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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
폴란드 공화국 Rzeczpospolita Polska Rząd Rzeczypospolitej Polskiej na uchodźstw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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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정부 | ||
국기 | 국장 | |
1939 ~ 1990 | ||
상징 | ||
국가 | 폴란드 국가 | |
역사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폴란드 제2공화국 | 폴란드 제3공화국 | |
1939년
9월 30일 폴란드 망명정부 성립 1990년 12월 22일 폴란드 제3공화국 출범으로 인한 해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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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정부청사 위치 |
프랑스 파리(1939) 프랑스 앙제(1939 ~ 1940) 영국 런던(1940 ~ 1990) |
|
수도 |
바르샤바(명목상) 런던(사실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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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 ||
언어 | 폴란드어 | |
민족 | 폴란드인 | |
정치 | ||
정치체제 | 민주공화제 | |
국가원수 | 대통령 |
[clearfix]
1. 개요
Rząd Rzeczypospolitej Polskiej na uchodźstwie.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폴란드 제2공화국이 무너지자 수립된 폴란드의 망명정부. 2차 대전 내내 나치에 대항하고 궁극적으로 폴란드를 독립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비록 2차 대전 종전 후 독립은 했으나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 위성국으로서 괴뢰국이나 다름 없던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2. 출범
1939년 9월 30일 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의 패망이 분명해지자 상원 의장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Władysław Raczkiewicz, 1885년 1월 28일 ~ 1947년 6월 6일)가 망명해 있던 파리에서 새로운 폴란드 공화국의 재건을 선포하면서 성립되었다. 총리 겸 자유 폴란드군의 사령관으로는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중장이 임명됐다. 서유럽의 연합국들과 폴란드 국민들 대다수에게서 빠르게 정통성을 승인받은 라치키에비치는 사회당, 노동당 등의 좌파계열 야당들도 망명정부에 참여시켰고, 임시의회에 해당되는 국민위원회도 설치했다. 라치키에비치와 시코르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목표는 단 하나, 나치 독일을 패퇴시킨 뒤 폴란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3. 항전
1939년 말에 접어들면서 소련군과 독일군의 추적을 피해 남부의 헝가리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으로 탈출한 폴란드군들이 속속 폴란드 망명정부 수하로 집결되기 시작했다. 폴란드 육군만 해도 10만 가량을 헤아렸으며[1] 나치와 소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폴란드 해군 함정들도 역시 영국으로 집결했다.[2] 이렇게 조직된 자유 폴란드군은 이듬해 봄에 일어난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군 지휘 하에 분투를 벌이만, 프랑스가 항복하자 런던으로 이전했다.영국으로 옮긴 뒤에도 폴란드 망명정부는 독일에 대항하여 영웅적인 항쟁을 계속했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도 영국 공군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폴란드인 조종사들이 독일 공군만 보면 어찌나 닥돌을 하고 냉혈한처럼 닥치는 대로 루프트바페 전투기, 폭격기를 격추해 나가니 어떻게든 자국 공군의 피해 규모를 최소한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던 영국 왕립 공군이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였다. 거기다 야사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교전상황이 터지면 서툰 영어 대신에 폴란드어가 튀어나왔던지라 의사소통의 문제도 상당히 심각했고 영국인들에게 독일군으로 오해받기도 했다고...[3] 그래도 이들은 폴란드 본토와 프랑스에서 계속된 항공전을 겪은 고참 베테랑 조종사들로서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한 연합국 조종사의 5% 정도를 차지했지만 전체 격추 비율의 12%를 차지하며 숫자에 비해 가장 큰 활약을 펼쳤다.
이어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폴란드 망명정부는 소비에트 연방과 다시 수교했고 폴란드 침공 당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감금됐던 폴란드군 포로들은 석방되어 소련군 혹은 자유 폴란드군의 일원으로 독일과 다시 투쟁을 벌여나갔다. 하지만 폴란드 망명정부와 소비에트 연방의 관계는 외교 관계 수립 후에도 여전히 개차반이었다. 우선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자리잡은 폴란드인 공산주의자들을 노골적으로 밀어주면서 폴란드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겠다는 검은 속내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게다가 종전 후 1939년 전쟁 발발 이전의 영토로 복귀할 것을 요구한 폴란드와 달리 스탈린은 커즌 선을 지키고 싶었던 것도 분쟁의 한 몫을 차지했다.[4] 한편 폴란드 망명정부는 1939년의 전쟁에서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와 병사들을 석방하여 폴란드군을 결성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소련 측에서 벌인 어떤 사건 때문에 폴란드군의 장교단이 죄다 날아가서 제대로 된 군대를 꾸릴 수 없었다고 한다.[5]어쨌든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안데르스 장군을 따라 좀 더 기후조건이 나은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중동으로 이동, 재정비 이후에 북아프리카 전선과 몬테카시노 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43년 4월 카틴 학살이라는 전쟁 범죄의 현장이 노출되자, 소비에트 연방의 소행으로 추정한 폴란드 망명정부가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를 통해서 진상 조사를 촉구하자, 소비에트 연방이 단교를 선언했다. 게다가 진상 조사를 추진한 시코르스키 총리는 비행기 사고를 당해 급사했다.
4. 냉전 시기
종전 이후 서방측은 커즌 선을 소비에트 연방과 폴란드 공화국의 국경으로 승인하는 대신에[6] 폴란드를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일환으로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자 했지만 우리 스탈린 동지께서 그러실 리가 있나... 1947년 총선에서 부정선거가 자행되고, 곧이어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출범한(폴란드 임시정부 → 폴란드 인민정부) 사회주의 세력들은 소련군과 합동으로 토벌전을 실행하여 폴란드 국내군 잔당[7]과 우크라이나 반란군을 철저하게 쓸어버렸다. 특히 우크라이나인은 대부분 소련령으로 추방되었고, 잔여 우크라이나인은 비스와 작전으로 연고가 거의 없는 폴란드 북부나 서부로 강제이주시켰다. 1952년에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선포(폴란드 인민정부 → 폴란드 인민공화국)하여 소련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역적들의 소굴로 변한 모스크바파 폴란드에 대하여 부정선거를 강조하면서 타도를 외쳤고, 폴란드가 자유민주주의에 바탕한 민주공화국 체제로 복고할 때까지 런던에 머무를 것을 결의했다.하지만 힘없는 자의 설움은 여전해서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프랑스 임시정부 및 영국과 미국마저[8] 폴란드 망명정부를 외면하였다. 그러니까 모스크바파 폴란드(폴란드 임시정부 → 폴란드 인민정부 → 폴란드 인민공화국)를 연속으로 승인하는 대신에 전간기의 폴란드 공화국과 폴란드 망명정부의 승인을 취소해 버린 것. 심지어 대사관까지 폴란드 인민공화국에 내주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이들과 자유 폴란드군 장병들은 종전 직후 열린 승전 기념 행사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나마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공을 세운 공군 조종사들은 유일하게 행사 참석 자격을 얻었지만, 이들은 다른 전우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불참하였다.
한편, 폴란드 본토를 장악한 소련군과 NKVD의 든든한 후원(?)으로 모스크바와 루블린에서 단합대회를 화려하게 개최한 폴란드인 사회주의 세력들은 혁명공약을 발표하면서 모스크바파 폴란드를 세우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이윽고 폴란드 임시정부를 창립한 그들은 1947년에 실행한 부정선거를 바탕으로 인민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폴란드 인민정부를 수립했으며, 1952년에 아주 확실하게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마지막까지 폴란드 망명정부를 국가로 인정한 나라는 아일랜드,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바티칸 시국 정도이다. 한 가지 역설적인 진실이라면 마지막으로 폴란드 망명정부를 국가로 인정하던 바티칸 시국이 이를 철회한 게 1979년인데 이 시점이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에 즉위한 지 바로 다음 해였다는 것. 더 나아가 폴란드 망명정부의 본청에서 1954년부터 1972년까지 내분이 일어나 수뇌부가 아우구스트 잘레스키 대통령과 3인 위원회 양쪽으로 분열하는 사태까지 터졌는데, 때마침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회유에 넘어가 투항하면서 귀국하는 정치인들도 늘어났다.[9]
이런 악재의 연속에도 폴란드 망명정부는 그들을 지지하는 15만여 폴란드인들과 함께 꿋꿋이 버텨나가며 공산주의 폴란드에 대항하는 반정부 운동을 펼쳤는데, 폴란드 국내의 민주화 운동은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제2사회가 주도했기 때문에[10] 폴란드 본토를 떠나 해외로 유학한 청년들을 장학금으로 포섭하면서 정보를 교환하는 밀사로 활용했다.
5. 해체와 재정착
1980년대에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소비에트 연방의 후원을 바탕으로 폴란드 인민군의 장군단을 앞세워 폴란드 공산당의 당권을 빼앗으면서 군사정권을 출범했기 때문에 폴란드 망명정부가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타도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고, 마지막의 선택으로 레흐 바웬사에게 베팅했으니, 쌍방의 대결은 무승부(?)로 종결했다.1990년에 레흐 바웬사가 제3공화국을 출범시키며 국민투표를 통한 민주적 정부가 자리잡자 더 이상 존속할 명분이 없어져 전간기의 폴란드 공화국 시절부터 지니고 있던 대통령기, 국새, 국장, 헌법 초안 등 법통을 바웬사에게 넘겨주고 스스로 해체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무려 51년 동안 타국에서 유지한 법통이 이어지게 된 것. 그러나 당시 폴란드 공화국을 다스리는 수뇌부는 구 공산 정권과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가 원탁회의를 통해 수립한 연합정부였고, 폴란드 망명정부의 정치인들은 정년퇴직의 시점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추천하는 지식인들을 새로운 정부의 고위급 관직(장차관급 및 국과장급)에 등용하는 조건으로 모두가 정계를 은퇴했다.
망명정부의 일꾼들은[11]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 폴란드에 귀국하는 사람도 있었고, 서유럽에서 거주하는 폴란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외국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망명정부의 각료들을 위시한 고위층들은 귀국해서 특별연금을 받았지만, 귀국을 아예 거부한 채로 미국과 프랑스의 시민이나 영국과 캐나다의 신민으로 사는 것을 택한 폴란드 사람들도 많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 재정착한 이래로 무려 50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폴란드로 귀국하기에는 현실적인 생계 문제가 매우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폴란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외채난으로 경기침체를 겪었고 특히 체제전환 과정에서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실업률이 한때 20%대로 올라가는 등 1990년대까지도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의 폴란드는 실업률이 많이 낮아지고 임금수준이 많이 오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영국에 비하면 소득수준이 크게 낮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브렉시트 이전까지 영국으로 많이 이주해서 돈벌이를 했으니 의식주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다. 게다가 폴란드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기득권을 일정부분 보장했기 때문에[12] 전국 방방곡곡에서 여전히 떵떵거리는 예전의 공산당원들에게 오랫동안 쌓인 배신감과 함께 서구와 북미에서 태어나 현지인의 정체성을 갖고 자란 2세대와 3세대 자녀들의 교육 문제를[13] 고려하여 귀국을 포기한 사람들도 많았다.
한편, 폴란드 국민들 가운데 나치 독일의 손아귀를 벗어난 폴란드 유대인은 폴란드 망명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멀리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수정시오니즘 성향이 강했던 폴란드 유대인은 전간기 폴란드로부터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직간접적 원조를 받으면서[14] 폴란드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2차 대전을 계기로 전간기 폴란드가 몰락하고 런던 망명정부도 끈떨어진 신세가 되자 제3의 길( 미국, 프랑스, 이스라엘에서 재정착)을 고려했는데, 이스라엘 본토에서 1948년의 화폐개혁( 팔레스타인 1파운드= 이스라엘 1파운드) 직후에 이스라엘 파운드( 영국돈과 등가교환)로 지급하는 매우 비싼 봉급에 주목했다.[15] 게다가 이스라엘로 탈출한 전간기 폴란드 출신 유대인들 가운데 이츠하크 아라드처럼 고위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지그문트 바우만처럼 사회주의 이상향에 심취하는 지식인들을 제외하고 당대의 선택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6. 한국과의 관계
수립 시기가 일제강점기 말기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폴란드와의 수교가 늦었기 때문에, 망명정부가 해산할 때까지 남북한과[16] 공식 외교관계는 없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마찬가지로 외교관계가 없었다. 국내에선 2차대전이나 폴란드 역사와 관련해서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폴란드 망명정부의 존재를 알게 된 경우를 제외하면 인지도가 낮다.- 일설에 따르면 폴란드 제2공화국 망명정부와 자유 프랑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 #, 확실하게 뒷받침할 물증이 전혀 없다. 당시 각국별 임정의 승인 여부에 대하여 최신 연구 결과인 임정, 거절당한 정부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 서방측에선 미국 국무부는 1945년 6월 8일 임시정부에 대하여 주권의 승인을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17], 영국 외무부는 1943년 12월에 영국 하원에서 클레멘트 애틀리 부총리와 이언 해너 의원과 닐 매클레인 의원의 흥미로운 문답, 중화민국 주재 영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 1944년 5월 25일에 영국 외무부로 발송한 비망록(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 아놀드 토인비와 찰스 웹스터가 자문하여 1944년 12월 20일에 제의한 비망록(한국의 장래 Ⅰ)과 1945년 1월 31일에 토의한 보고서(한국의 독립능력)와 1945년 7월 24일에 결의한 보고서(한국의 장래 Ⅱ)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믿지 말라' 강조하면서 임정을 배제하고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최종 방침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미소 양국은 임정과 건준( 조선인민공화국)을 모두 부정하고 미군정과 소군정을 실시함에 따라 임정 요인들은 38선 이남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
- 한편 소비에트 연방은 프랑스 본토의 탈환에 성공한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프랑스 외무부의고위급 관료들(장차관 및 국과장)과 3개국(중국, 미국, 소련)에 주재한 프랑스 대사관들의 매우 비관적인 정보통신 문답[18] 및 소련 해군의 해병대 장교로 참전한 정상진의 회고담을 바탕으로 전후처리에서 임정을 배제하기로 결정했고, 실제로 소련은 폴란드에서 국내군을 배제했듯이 [19] 제3의 친공세력( 김일성, 박헌영, 현준혁, 김용범, 김원봉으로 추정)을 간택했다. 자유 프랑스는 고심 끝에 미국과 영국과 소련의 의향을 수용하기로 결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끈질긴 요구를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이리저리 회피했다.
- 마찬가지로 폴란드 망명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뭔가를 했다는 공문서의 기록도 없다.
- 2차대전 종전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명시적으로 승인한 나라는 딱 2곳( 중화민국 광동정부와 리투아니아)밖에 없었고 2차대전 시점에선 다 망해서 없어졌다. 광동정부는 천중밍의 반란으로 붕괴했으며, 리투아니아는 일본 제국과 수교한데다 전쟁에는 아예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고 상술했듯 주요 열강은 임정을 '조선인의 유일 합법 정부'라 보지 않았고 임정을 지원한 중국조차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정식 승인을 해주진 않았다.[20]
7. 기타
- 시인 김광균의 시 '추일 서정'에서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포화(砲火)에 이지러진/도룬 시[21]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국 대중에게 폴란드 망명정부가 이름이나마 알려지게 된 가장 큰 이유. [22]
-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폴란드가 연합국 소속일 때 본토가 점령당하면 타국처럼 망명정부가 형성되며, 폴란드의 경우 고유 중점을 통해 바르샤바 봉기를 준비할 수 있다.
8. 역대 대통령
망명정부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지명해 승계했다.폴란드 망명정부 대통령 | |||||
대수 | 사진 | 정당 | 이름 | 임기시작 | 임기종료 |
제1대 | 무소속 |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 | 1939.9.30 | 1947.6.6[A] | |
제2대 | 무소속 | 아우구스트 잘레스키 | 1947.6.9[B] | 1972.4.8[A][26] | |
제3대 | 사회당 | 스타니스와프 오스트로프스키 | 1972.4.9 | 1979.3.24 | |
제4대 | 무소속 | 에드바르트 라친스키 | 1979.4.8 | 1986.4.8 | |
제5대 | 무소속 | 카지미에시 사바트 | 1986.4.8 | 1989.7.16[A] | |
제6대 | 무소속 | 리샤르트 카초로프스키 | 1989.7.19 | 1990.12.22[28] |
[1]
나중에는 소련에서 석방된 폴란드 포로들과 폴란드 교민들의 입대까지 합쳐서 20만으로 불어난다.
[2]
이렇게 집결한 해군 전력 중에는 폴란드 해안에서 당시
중립국이었던
에스토니아까지 도망쳤다가 거기서 탈출하여 다시
영국으로 무사히 도망친
오제우같은 사례도 있었다.
[3]
게다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듣기엔 폴란드어나 독일어나 중부유럽 언어 억양이 전반적으로 비슷비슷하게 억세게 들리기도 하고,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 자체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옛 카이저 치하 독일 제국, 프로이센 통치에서 벗어난지 30년도 안 돼서 재점령당한 상황이라 언어정화운동과는 별개로 구어에는 독일어 단어, 영향력도 강해서 외국인들 처음 보는 영국 농촌 농민들에겐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
[4]
처음부터 단호박으로 거절하진 않았다. 알았다는 답만 한 채로 '일단 나치부터 조지고 돌려줄게'라면서 시간을 끌다가 종전 후에 자기의 따까리인 공산주의 신정부를 세우고는 '1939년의 국경? 그게 뭐임?' 이렇게
아몰랑을 시전했다. 영국과 미국은 당연히 폴란드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일을 격퇴시키는데 엄청난 공헌을 한 소비에트 연방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을 통해 커즌 선을 승인해주고 만다. 그나마 폴란드에게 다행이라면 뺏긴 몫만큼 독일에게서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를 가져왔다는 것 정도. 사실 산업 기반 등의 가치로 따지면 얻은 영토 쪽이 훨씬 높기 때문에 국민 감정을 차치하고 보면 손해는 아니다.
[5]
물론 모든 폴란드 장교들이 죽은 것은 아니며 절반은 그래도 생존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은 주로 친공산진영쪽에 가담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군대를 꾸릴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6]
단 소련 점령지역 중에서도 동부의 비아위스토크와 그 주변지역만은 다시 폴란드에 반환되었다. 폴란드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힘이 없었다.
[7]
이들을
저주받은 병사들이라고도 부른다.
[8]
미국과 영국은 1944년 10월에 포기하기로 결심했는데,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처지였고, 프랑스 임시정부는 영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제외한
상임이사국의
높으신 분들은 서유럽에서 투쟁하는
자유 폴란드군들과 폴란드 교민들의 절망을 고려하여 1945년 여름까지 일부러 침묵했다.
[9]
고무우카는 스탈린 시절의 소련에 대항한 정치인이라는 명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해외동포들을 포섭하려고 애썼는데,
동독의 시골을 지나가는 방식으로 서베를린과 서독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에
모국 방문을 권유하는 광고를(
VISIT POLAND 또는
VISITE LA POLOGNE) 내걸었고,
LOT 폴란드 항공의
여객기가
동베를린을 경유하면서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 취항했다고
카더라.
[10]
#
[11]
재정 수입이 감소하면서 정부의 규모를 축소한 덕택에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관직(대통령, 총리, 부총리, 장관, 차관, 비서관)만 공무원이고, 나머지 모두가 그냥 일꾼이다.
[12]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심지어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조차 반러 노선을 밟을지언정 자국의 구 공산당 인사들은 포용했는데, 현실적으로 이들이 50여 년을 집권한 것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
3세대들의 경우엔 2021년 시점에서 나이가 20대~40대에 이르렀고,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와
마뉘엘 발스처럼 오래 전에 재정착한
선진국의
국민으로 살고 있다.
[14]
전간기 폴란드는 유대인에 대해 미묘한 태도를 보였다. 폴란드는 자기 조국이 없는 유대인의 처지에 동감하면서도, 그들이 폴란드에 너무 많이 거주한다고 불편해했다. 그러므로 폴란드는 1930년대 말
게토 벤치와 같은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행하면서도 유대인들의 조국을 세워 국외로 이주시키는 방안(+친폴란드적 유대국가 수립을 통한 폴란드의 해외 영향력 확대)을 추진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시오니즘을 지원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티머시 스나이더(Timothy Snyder)의
블랙 어스를 보라.
[15]
1948년 시점에서
이스라엘 파운드의 실질 가치는 파운드 블록에 힘입어
이스라엘 1파운드=
영국 1파운드=
미국 10달러=
서독 100마르크=
동독 100마르크였으니
#, 동서독 양국과 이스라엘 본토에서 공장 직공의 최초
일당은 1마르크~10마르크(동독과 서독) VS 1파운드~10파운드(이스라엘)의 구도를 형성했다. 그러나 스털링 잔고를 활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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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경제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가 없는 형편이었고, 이스라엘 재무부와 이스라엘은행(이스라엘의
중앙은행)은 화폐정책을 변경하면서(
파운드 스털링과 등가교환→
미국 달러와 등가교환→
프랑스 프랑과 등가교환) 이스라엘 파운드의 안정화를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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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모두 본토의 인민공화국과 각각 1989년/1948년에 각자 수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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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청진 상륙작전 직후 소련군의 정치공작,
사회단체를 결성한 죄로 소련군에 체포되어
연해주의
굴라크에 끌려갔다가
무죄로 석방되어 북한으로 돌아온
한교석(
한양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의
기자회견,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주모자들을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압송한 사례를 깊이 다룬 기광서(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논문(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운동의 실상)은
스메르시와
GRU와
NKVD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끔살하거나
유배하는 비상계획의 존재를 암시한다.
[20]
여담으로
이스라엘 건국전쟁 직전에 이스라엘 진영이 이슈브(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
자치정부)를 개조하여 창립한
이스라엘 임시정부를 1948년 5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승인한 나라들은 무려 25개국에 이르렀지만
#, 그 동안
이승만의 대한민국을 승인한 나라들은
미국,
영국,
중화민국이 전부였다는 점은 1940년대의 시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나라들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이슈브가 벌인 외교공작의 대성공으로 승인받았고, 남한의 경우는 1948년 12월 12일의
유엔 총회 결의안 195호로 승인받았다.
[21]
폴란드 중부의 내륙도시인
토룬(Toruń)을 가리킨다.
[22]
이 시는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평가에 현대시로 출제되었다.
[A]
임기 중 사망
[B]
전임자 사망 후 승계
[A]
임기 중 사망
[26]
7년 임기 종료 이후 스스로 연임하는 행위로 당시에도 위헌 논란이 있었다. 이에 '3인위원회'라는 대립 정권이 오스트로프스키 취임 시까지 대립하였다.
[A]
임기 중 사망
[28]
제3공화국의 2대 대통령인
레흐 바웬사에게 상징물 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