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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두 왕국 大肚王國 | Kingdom of Midda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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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두 왕국의 지도(주황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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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 ~ 1732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대만 원주민 | 청나라 | |
위치 | <colbgcolor=#fff,#1f2023> 타이완섬 중서부 | |
수도 | 다리다[1] | |
정치체제 | 부족연맹, 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
국왕 |
카마찻 아슬라미에(?~1648)[2] 카마찻 말로에(1648~?)[3] |
|
언어 | 대만 제어[4] | |
종교 | 조상 숭배 | |
종족 | 파포라족 등 대만 원주민 | |
현재 국가 |
[[대만|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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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어 | 大肚王國 | 大肚王国 |
표준 중국어 | ㄉㄚˋㄉㄨˋㄨㄤˊㄍㄨㄛˊ | Dàdù Wángguó |
대만민남어 | ㄉㄨㄚ⊦ㄨㄢ⊦ㆲˊㄍㆦㆶ | Tuā-tōo-ông-kok |
한국 한자음 | 대두왕국 | |
일본어 | 高山国, 高山國[5] | |
영어 | Middag Kingdom | Kingdom of Middag |
네덜란드어 | Koninkrijk Middag |
16세기 중반[6]부터 18세기 초까지 타이완섬 중서부[7] 평야에서 존재했던 대만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이지만 초기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기 그지 없는데다, 다두 왕국을 통치했던 왕들도 재위기간과 이름 역시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고작해 봐야 두명의 왕만 알려졌으며 타이완 섬에 온 네덜란드와 스페인, 동녕국 시기가 되어서야 그 기록이 그나마 상세히 나왔다. 그래서 다두 왕의 계보도도 그리 상세하지는 않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친서를 보낼때 고산국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런 것을 보았을때 최소한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부터 존재해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어로는 大肚王國, 즉 다두 왕국으로 읽는데 大肚는 원주민 파포라어로 다리다(Darida)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미다그(Middag) 왕국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주민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은 네덜란드어로 '낮'이라는 뜻이다. 다두 왕국에서는 군주를 Lelien이라고 했는데 태양왕이라는 뜻이었고, 태양왕을 네덜란드어로 Keizer van Middag이라고 번역하면서 그 나라를 낮의 왕국(태양의 왕국)으로 부르게 된 것.
2. 역사
16세기경 타이완 원주민인 파포라족(巴布拉族)을 중심으로 바부자족(貓霧捒族), 파제흐족(巴宰族), 호아냐족(洪雅族), 타오카스족(道卡斯族), 카하브족(噶哈巫族)이 연합하여 건국한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이다. 타이중 현의 서쪽과 장화 현의 북부에 있는 27개의 부족 마을을 통치했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대만에 정착한 한족들과 교역을 하기도 했지만 조선이나 일본은 물론 옆에 있는 오키나와 섬의 류큐 왕국에 비해서도 외부의 영향과 교류가 적었고 체계적인 문명의 형성이 늦었다.
1624년 네덜란드가 타이완의 남부( 타이난, 가오슝, 핑둥, 타이둥 일대 등)를 점령하고, 1626년 스페인이 타이완의 북부( 타이베이, 신베이, 지룽, 단수이 등)를 점령하여 남북에서 유럽의 두 국가 세력들이 중서부의 다두 왕국을 압박해왔다. 그러다 당시 견원지간이었던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타이완 섬에서 세력을 다투었고, 1642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타이완에서 몰아낸다. 이후 164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군대가 대만 북부의 케타갈란족(凱達格蘭族)을 공격해 무찌르는데 성공한 후 남쪽으로 진격하여 다두 왕국을 공격하였지만 다두 왕국의 원주민 부족 동맹 연합이 네덜란드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1642년 8월 네덜란드는 한때 스페인이 식민지화 해서 차지한 대만 북부와 본인들이 차지한 남부를 연결하기 위해 서부 평원의 원주민 정복을 목표로 삼았다. 1644년에 네덜란드의 선장 피터르 본(Piter Boon)은 북부 지역의 순종하지 않은 원주민 토벌을 위해 네덜란드 원정대를 이끌었고 그 다음해인 1645년 다시 다두 왕국에 두번째 공격을 감행하여 다두 왕국의 통치를 받고있던 반네덜란드 성향의 13개의 부족 마을을 파괴하자, 당시 18개의 다른 부족 촌락의 지도자였던 다두 왕이자 파포라족의 카마찻 아슬라미에(Camachat Aslamie)에는 즉위 말기에 파포라족을 이끌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결국엔 어쩔 수 없이 부족의 안전과 평화회담을 위해 시몬 판 브렌(Simon van Breen) 목사의 중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네덜란드에 무릎을 꿇고 네덜란드가 주최하고 있는 노스 로드 회의에 참석한다. 그리고 1645년 4월에 아슬라미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남부 지방 회의에 참석하였고 네덜란드는 무력으로 굴복시킨 아슬라미에한테 강제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항복 조약을 서명 및 체결하게 만들어 다두 왕국이 네덜란드에 항복하고 복종했음을 명시하여 다두 왕국을 속국으로 삼고 한때 스페인이 지배했던 북부를 비롯한 타이완 섬 전부를 점령하고선 본격적으로 모든 원주민 부족들과 오래 전에 타이완 섬에 정착하거나 수입한 한족들을 노예로 착취한다.[8][9]
또한 정성공은 동녕국(명정)을 세우면서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대만 원주민들에게도 한족의 유교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대만은 동북아시아사로 편입되었다.
이후 정성공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타이완 섬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청나라에게 반기를 들어 청나라와 잦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683년 7월, 청나라와 동녕국 사이에 벌어진 펑후해전(澎湖海战)에서 동녕국의 해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동녕국은 더이상 청나라에게 저항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동년 10월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동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1683년 강희제가 동녕국을 멸망시킨 후에 청나라는 미개척된 타이완섬 동북부에 진출하여 그곳을 정복했다. 한족들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토지를 빼앗긴 원주민들은 계속 산악 지대로 밀려났다.[14] 결국 1732년 옹정제 통치 때에는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이 한족의 군사작전으로 인해 그대로 토벌당해 다두 왕국은 멸망한다. 이 사건을 대갑서사항청사건(大甲西社抗清事件)이라고 부르며 그렇게 다두 왕국의 영토는 청나라의 관할이 되었으며 청나라는 타이완섬을 푸젠성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타이난을 중심으로 타이완 섬을 통치했다.
3. 관련 문서
[1]
파포라어로 Darida 또는 Dorida. 중국명은 大肚社. 현재의
타이중 시 다두 구(大肚區).
[2]
중국어로는 甘仔轄·阿拉米, 영어로는 Kamachat Aslamie.
[3]
중국어로는 甘仔轄·馬祿, 영어로는 Kamachat Maloe.
[4]
파포라어, 바부자어, 파제흐어, 호아냐어, 타오카스어, 카하브어.
[5]
こうざんこく, たかさんこく
[6]
1540년 혹은 17세기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시기는 불명
[7]
영토는 현재의
타이중시 ·
장화현 ·
난터우현 일대라고 한다.
[8]
여기서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배운 한족들,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중국어를 배운 원주민들이 생겨났다.
[9]
그러나 아슬라미에는1645에 우강(烏溪) 유역 지대를 중심으로 다자시(大甲溪) 남쪽 기슭에서 동루어시(東螺溪) 북쪽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리며 여전히 다두 왕의 칭호를 유지하면서 다두 왕국을 반독립 왕국으로 계속 통치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역시 아슬라미에의 사후, 다두 왕국의 세력과 영향력을 약화시키는데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10]
프로빈티아 요새, 제일란디아 요새
[11]
이후 네덜란드군이 제일란디아 요새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는 제일란디아 요새 성벽이 네덜란드 공격군에게 핸디캡이 되면서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12]
정성공 자신도 전직 네덜란드 관료였던 선교사 안토니위스 함브루크(Antonius Hambroek)를 참수하고 그의 딸을 첩으로 삼기도 했다.
[13]
이때 다두 왕국의 전사였던 대만 중부 지역 출신의 파포라족 아 텍 카우종(阿德狗讓 / 1592년-1661년)이 정성공의 원정으로 파견된 두 장군의 매복전술에 살해당했다.
[14]
이로 인해
툰샤오 사 사건이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