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Troisième Républiq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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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우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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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 ||
국가 | 마르세유의 노래(La Marseillaise) | |
위치 | ||
오늘날의 프랑스 대부분과 알제리[1] 및 식민지 | ||
1870년 9월 4일 ~ 1940년 7월 10일 |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 이전 | 프랑스 침공 이후 | |
프랑스 제국 | 비시 프랑스 | |
프랑스 군정청 | ||
벨기에-북프랑스 군정청 | ||
자유 프랑스 | ||
역사 | ||
1870년 공화국 수립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940년 프랑스 침공 및 망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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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위치 | 서유럽 | |
수도 |
파리(~1940.6.10) 보르도(1940.6.10~1940.6.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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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 ||
인구 |
1870년 38,400,000명 1910년 41,500,000명 1940년 40,690,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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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프랑스어 | |
종교 | 가톨릭[3] | |
정치 | ||
정치체제 | 의원내각제 | |
국가원수 | 대통령 | |
경제 | ||
통화 | 프랑스 프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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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전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이 전복되면서 세워진 프랑스의 정치 체제.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정확히 70년 간 유지됐고, 이는 지금까지도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장수한 공화국이다.[4]프랑스의 공화국 체제의 기반을 다진 시기로, 프랑스 제1공화국은 12년, 프랑스 제2공화국은 고작 4년 지속된 데 비해 70년간 유지되어 안정성을 굳혔다. 1848년 연방헌법 제정으로 완전한 연방제 공화정 국가가 된 스위스에 이어 유럽 내에서 2번째로 정착한 근대 공화정 체제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당시 프랑스와 스위스, 산마리노 정도를 제외하면 유럽 내 모든 나라들이 군주제를 고수하고 있었다.[5] 그로부터 약 40년 후 포르투갈 왕국에서 왕정이 붕괴되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스위스와 더불어 유럽의 둘뿐인 주요 공화국이었다.[6]
프랑스 사회가 20세기 이후 전면적인 세속적 현대 사회로 탈바꿈하는 과도기로서[7], 이른바 프랑스판 벨 에포크라 불리는 경제, 사회, 문화적 전성기임과 동시에, 이전의 혁명 수준만큼 유혈사태는 없었지만 드레퓌스 사건을 비롯한 굵직굵직한 사회적, 정치적 분쟁이 강도 높게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2. 역사
2.1. 공화국 설립 초기(1870년-1879년)
2.1.1.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 때 개전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황제 나폴레옹 3세와 그의 군대는 졸전 끝에 포로 신세가 되어버리고, 프로이센 왕국은 단기간에 승기를 잡고 프랑스 파리까지 포위해 물자 공급로를 차단하려 한다.그러자 쥘 트로슈 장군과 시민 방위군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나폴레옹 3세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레옹 강베타, 쥘 페리, 쥘 파브르, 쥘 그레비, 쥘 시몽과 함께 새로운 공화국 정부를 선포한다.[8] 새 정부는 강베타가 파리에서 열기구를 이용한 탈출을 감행해 남쪽에서 전력을 가다듬고 오를레앙을 일시 수복하는 등 활약하기도 하나, 공성전에 지친 파리 정부 인사들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협상 시도를 감행한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정당성을 확보한 프랑스 국민들을 대표하는 정부가 수립되어야만 협상을 개시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쥘 트로슈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국회의원 총선을 시작했고, 프랑스인들은 티에르를 포함한 왕당파들을 대거 선출한다. 다만 이 선거는 왕당파 이념의 실질적인 승리를 의미하기보다는 당시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상당수 공화파와 달리 전쟁을 끝내고 싶어한 프랑스인들의 심리가 투영된 것이 더 컸다고 보는게 맞다. 참고로 당시 프랑스 정계는 전제군주파, 입헌군주파, 평화에 찬성하는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와 소수의 보나파르트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게 총선이 끝나고, 비스마르크가 정한 조건에 부합하는 대표성 있는 정부를 구성한 쥘 트로슈는 비스마르크와 협상을 재시도한다. 하지만 알자스와 철광 지역인 로렌의 일부 양보와 높은 전쟁손실배상금 등을 요구한 협상안을 프랑스가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협상은 파기된다. 프로이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포위전을 계속하고, 포위당한 프랑스는 전력을 구축하지 못한채 기근으로 쇠약해져 간다.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한 쥘 파브르의 프랑스 대표단은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비스마르크의 조약을 승인한다.
한편, 기세등등하던 공화파를 따돌리고 국회의 768석 중 400석을 차지한 왕당파들은 1871년 2월 17일 보르도 협약으로 온건파 왕당주의자로 알려져 있던 아돌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이때 왕당파 세력은 전제군주제와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을 지지하는 법통주의자들과 루이필리프식의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오를레앙주의자들로 양분되어 있었다.
2.1.2. 파리 코뮌과 티에르 정부
1871년 3월,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공산주의 정부라 할 수 있는 파리 코뮌이 탄생한 계기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첫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허망하다 싶을 정도의 빠른 패배는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군대가 일부러 져주었다는 음모론을 조성하게 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7월 혁명, 2월 혁명을 국민들의 승리로 이끌었던 민병대가 고작 신흥국가에 불과한 프로이센에 이토록 빨리 패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게다가 루이필리프와 나폴레옹 3세 기간 동안 프랑스는 겉보기엔 국력을 키워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하는 등 자신만만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현실은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는 것이 드러났고, 이들의 불만은 적성국인 프로이센보다 자국의 군대를 향하게 된다.
둘째, 나폴레옹 3세가 파리 개조 사업에 착수한 뒤로부터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노동자/서민 인구는 파리 동쪽이나, 근교 도시(banlieue)들로 밀려나게 되면서, 파리는 지역에 따른 소득 격차가 두드러지게 된다. 중심부와 서쪽의 위성 도시(faubourg)에는 고급 주택들로 금융업자들이나 사업가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다.
셋째, 노동자들은 1830년 전제왕정주의자 샤를 10세를 타도하는 7월 혁명, 1848년 루이필리프의 정부를 타도하고 제2공화국을 설립하는 2월 혁명 혁명에 참여하고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그들이 요청하는 사회적 정책은 실현되지 않거나 미미했었다. 7월 혁명과 2월 혁명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혁명들이었고, 수혜자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인텔리나 금융가들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노동자 계층은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은 카를 마르크스, 쥘 발레스, 블랑키 등 당대 유행하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는다.
결국 3월 18일 혁명 세력에 가까웠던 국민위병(Garde nationale)들은 당시 티에르 임시정부의 굴욕적인 강화 협상으로[9] 시행하게 생긴 파리 시내 대포 철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티에르는 베르사유로 피신하고, 국민위병들은 티에르 정부가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신 정부를 세운다. 파리 코뮌은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첫 공산주의 정부로 칭송되지만, 알고 보면 이념 혁명을 떠나 패전 투수격이던 베르사유의 티에르 정부에 반대하는 민중혁명에 가까운 측면도 있었던 것. 허나 파리 코뮌은 급진성 등을 우려한 비공산 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70일 천하로 끝나고 마는데[10], 티에르는 프로이센의 사실상 지원을 받아 포로로 잡혀 있던 17만 명의 병사들을 돌려받고 파리 코뮌을 진압하는데 성공한다.
어찌됐든 그렇게 티에르는 프랑크푸르트 협정에서 요구한 전쟁배상금을 모두 갚는데 성공하고 프로이센군의 철군을 얻어낸다. 또 티에르는 왕당파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공화국 프랑스를 꿈꿔 단순한 임시체제로 여겨지던 공화정이 프랑스의 항구적인 체제가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11] 허나 뒤통수 당한 꼴인 왕당파들은 이에 반발해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한다.[12] 게다가 공화파들 역시 파리 코뮌을 강제 진압한 티에르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그 결과 의회와 티격태격하던 티에르는 징병제 관련한 국민 여론까지 안 좋아지자[13] 임기 2년만에 사퇴하고[14], 대통령은 법통주의자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으로 교체된다.
2.1.3. 마크마옹과 왕당파의 득세 그리고 몰락(1873년-1879년)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은 국회의장으로 오를레앙주의자 알베르 드브로이[15]를 앉혀 자신과 법통주의자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의 계획은 소유권의 보장, 전통 기득권층인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권리 보장과 샹보르 백작의 즉위였다. 하지만 이 세 계획 모두 적용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표면적인 이유는 샹보르 백작이 완강한 고집의 소유자로 첫째는 백작 자신의 후임이 기필코 자신의 직계이길 원했다는 것, 둘째는 백작이 철저한 전제군주제의 옹호자였다는 점이었다.[16] 샹보르 백작이 속한 부르봉 왕가를 지지했던 법통주의자들은 공공의 적이라 여긴 공화주의자들이 집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신속히 왕을 앉히려 했다. 이들은 오를레앙주의자들과 합의를 보아 부르봉 왕가 출신인 샹보르 백작이 먼저 군림하고, 그의 서거 시 오를레앙가 출신인 파리 백작 필리프가 후대를 잇는 것으로 계획했다. 하지만 샹보르 백작은 이 제안이 자신이 제일 증오하는 오를레앙 왕가가 표상하는 입헌군주제의 부활을 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해 거부했다.[17] 게다가, 아돌프 티에르를 몰아낸 왕당파들은 정치적 의제의 합의를 찾지 못했다. 이에 보나파르트주의자까지 합세했고, 심지어는 법통주의자들 내에서도 온건정통주의와 강경정통주의(“Chevau-léger”, 소위 경기병대) 등의 분파로 의견이 갈렸다. 1873년에 내분을 이유로 왕당파들은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의 임기를 7년제로 늘려 합의점을 찾을 때까지 넉넉한 시간을 확보하고자 한다.마크마옹은 자신의 임기 동안 “천주교의 도덕적 양속에 따라 관습을 바로잡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와 브로이의 정책들은 국민들에게 수구적으로 다가왔고, 신문/ 풍자화 검열의 복구 등은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그래서인지 1875년 국회의원 총선에서는 다시 공화주의자들이 승기를 쥐게 되고, 마크마옹은 공화주의자들 중 온건파에 속하는 쥘 시몽을 국회의장으로 임명해 절충점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쥘 시몽은 마크마옹의 보수적인 정책에 반대하고 이를 무산시키려 한다. 이에 마크마옹은 쥘 시몽을 알베르 드브로이로 교체하고 의회를 해산하나, 이어지는 하원/상원 총선은 모두 강베타가 이끄는 공화주의자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결국 1879년 마크마옹은 사퇴하고, 공화주의자 쥘 그레비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공화주의자들을 승리로 이끈 것은 대중적 인기가 좋은 레옹 강베타였으나, 그는 급진적인 성향에다가 언변도 좋아 동료 공화주의자들에게 경계받았고, 안티들에겐 판이하게 다른 정치 성향들로 구성된 의회를 포용하며 이끌 수 있는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카리스마는 좀 떨어지지만 온건 공화파인 쥘 그레비를 선출하게 된 것이다.[18]
2.1.4. 제3공화정 초기 프랑스 사회의 문제점
제3공화정 초기의 프랑스는 다양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 문제점들은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일부 설명하기도 한다. 우선, 프랑스는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항상 인구에 관해서는 우위를 갖고 있었다. 가령 17세기 30년 전쟁때 프랑스가 합스부르크 왕가라는 혈맹 이름 하에 강한 외교적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프랑스의 압도적인 인구 수에 기반했었다.[19] 하지만 19세기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공업혁명과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구 상승에 박차를 가한 이웃 국가들에 비해 프랑스 인구는 침체했고, 결국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에는 프로이센 왕국에 비해 적은 인구를 보유하게 된다. 또 비록 정치체제적인 변화를 여러 차례 겪었다고는 하나, 사회적인 발달은 미미했다. 사회적 구조나 농업 기술적인 측면에서 프랑스 사회는 아직 낙후되어 있었다.2.2. 제3공화국의 번영과 위기(1879년-1914년)
1876년 총선 결과 공화좌파가 1당을 차지하는 등 공화파가 보수파를 상대로 1870년대 후반부턴 쭉 승리하면서, 프랑스 사회의 주도권은 공화파로 넘어왔다. 그리고 당시 공화파는 쥘 페리의 공화파 좌파와 기타 중도좌파 세력, 레옹 강베타의 공화파 연합과 클레망소 같은 급진파 세력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이들은 교육과 사법 등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개혁, 개헌을 실시했는데, 이는 단원제와 양원제 선택 문제처럼 같은 공화파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문제가 상당히 많았다. 그래도 왕당파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대동단결해서, 1884년 8월 14일 통과한 헌법에 의해 전 군주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며, 향후 정부 체제를 공화국에서 다른 체제로 바꾸는 것 또한 사실상 금지되었다.
사회적으론 벨 에포크라 불리는 번영기가 찾아왔는데, 한편으론 1894년 드레퓌스 사건처럼 내부적인 모순이 표출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 사건의 여파 덕분인지는 몰라도 19세기 후반부터 1914년까진 진보 세력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2.2.1. 쥘 페리의 개혁과 불랑제 위기
쥘 그레비는 쥘 페리를 국회의장으로 임명한다. 그는 강경한 정교분리 정책으로 교회 교육을 완전히 세속적 교육으로 대체시키고 무상 의무 교육 정책을 도입한다(1882년). 또 불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근대화하는 토목 정책들을 밀어붙인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를 거울 삼아 무리할 정도의 군대 강화 정책을 도입해 결국 프랑스의 인구가 프로이센 왕국에 비교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을 능가하는 장병들을 기르는데 성공한다. 대외적으론 식민 전쟁들을 계속하고 튀니지와 베트남 정복에 나선다. 물론 이는 상당한 국고 지출을 유발했고 프랑스 민생에 타격을 줘 쥘 그레비는 대통령에 재선출되었지만 쥘 페리의 인기도는 급락한다.한편, 이를 기회 삼은 반대파들이 다시 대두하기 시작한다. 당시 왕당파들은 샹보르 백작과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의 사망으로 내분에 끝을 맺었고, 오를레앙가의 파리 백작이라는 인물 아래 단결되어 다시 권력을 회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편 파리 코뮌의 트라우마로 한동안 수면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사회주의자들과 블랑키주의자들은 불황에 불만을 표출하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그들 기준 "부르주아적 공화정"에 반대한다. 하지만 반대파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바로 국방부 장관 조르주 불랑제였다.
조르주 불랑제 장관은 포퓰리스트적 선동으로 새로운 공화정을 이룩할 것을 약속하고,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해 프랑스 경제의 침체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재침공이 일어날 것이라는 루머가 퍼지고 있는 점을 이용해, 자신이 프로이센에 복수를 가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한편, 오를레앙가 파리 백작을 추대하는데 실패해 공화정에 적대적인 포지션을 고수하기로 한 왕당파들 역시 불랑제를 지지해 공화정을 약화시키려 한다. 이에 힘입어 조르주 불랑제 장군은 나폴레옹 3세의 모델을 따라 국민투표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에 기겁한 공화주의자들의 정치적 압박과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던 불랑제는 1889년 선거 때 지지기반을 잃어버리고 측근이 체포당하자 벨기에로 망명해 그곳에서 자살했다.[20]
2.2.2. 드레퓌스 사건
한창 독일의 재침공에 대한 우려가 가중화되고 있던 시대에 어떤 유대인 출신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루머가 퍼진다. 검사들은 위조 문서들을 조작해 드레퓌스에 대해 기아나 유배형을 선고하고, 프랑스 정치계는 친드레퓌스파와 반유대주의자들로 구성된 반드레퓌스파로 나뉜다. 1898년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조르주 클레망소가 주관하는 문학 신문 "여명"(L'Aurore)에 기고해 드레퓌스 재판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드레퓌스 사건을 공론화시킨다. 에밀 졸라는 선동죄로 1년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여론을 의식한 반드레퓌스파들은 재판을 다시 열지만, 다시 유죄 판결에 10년 구형을 언도한다. 대통령은 사면권을 행사해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 사면을 받을 것을 제안하고, 드레퓌스는 이를 승낙한다. 물론 이후에도 논란이 되자 1906년엔 재심 끝에 최종 무죄 선고를 받는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2.3. 제3공화국의 한계(1914년-1940년)
1914~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주로 급진사회당이 주도했던 프랑스 제3공화정 후반기의 역사는 급진당 내부 계파의 성향에 따라 1920~1924년 우파 세력과 연정, 1924~1926년 좌파 세력과 연정, 1926~1932년 우, 1932~1934년 좌를 거쳤다가 1934~1936년 다시 우, 1936~1938년의 좌를 지나서 최종적으로 1938~1940년에는 중도파가 득세하는 등 뚜렷한 정치 비전 없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이는 1차대전과 대공황의 충격에서 프랑스가 완벽히 벗어나는 것을 방해했고, 극우파 연맹(ligues d'extrême droite)과 극좌파 프랑스 공산당(PCF)의 계속되는 반공화국적 행동 역시 제3공화국에 부담이 되었는데, 결국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붕괴시킨 사태는 한때는 비극적이게도 무능한 민주주의와 승천하는 파시즘 독재의 대비로 보일 정도였다.[21][22]
2.3.1. 제1차 세계 대전
제3공화국은 1차 대전에서 막강한 독일 제국군의 진격을 필사적인 방어로 정지시켰고 대전쟁의 승전국이자 승리의 주역이 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전쟁 중에 청년층 인구의 25%를 날려버리며 발생한 인력난[23], 서부 전선의 전투 대부분이 주요 공업, 인구 밀집 지대인 프랑스 북부에서 발발하며 발생한 도시 인프라의 파괴 등으로 프랑스의 경제적 상황은 심각히 악화되어 있었고, 외교적 파트너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전쟁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할 것을 지지했고, 이러한 성향은 서서히 파급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해 우파와 중도파[24]는 국민연합(Bloc National, 블록 나쇼날)[25]을 성립하고, 볼셰비키 배척과 애국주의를 앞세워 1919년 9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 이 연맹의 알렉상드르 밀랑(Alexandre Millerand)은 1923년 1월 20일에 수상에 보직, 같은 해 9월에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여담으로 국민연합 의원 중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자들이 많아 일각에선 "청회색[26] 의원"(Chambre Bleu Horizon)이란 이명을 얻기도 한다.
2.3.2. 1920년대
국민연합 내각은 전대의 강력한 정교분리 정책에도 불구하고 바티칸과 외교를 재개하고 교구협회(Association diocésaine, 아소시아숑 디오세젱)[27]의 성립 등 가톨릭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친다. 또한 국민연합 내각은 노동 운동에 있어선 보수적이고 강경한 정책을 펼치는데, 가령 1920년의 대대적인 파업[28]을 진압한다. 또 프랑스 재건과 전쟁 피해자, 유족들에게 배상하기 위한 금액 등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린다. 그러나 국고 지출을 크게 늘림에도 금리를 하향 조정할 것은 끝끝내 거부해 1924년 경제공황을 유발시킨다.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돈이 궁했던 프랑스 정부는 해결책으로써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한 배상금으로 눈을 돌린다. 당시 수상이었던 레몽 푸앵카레는 독일의 광산이 풍부한 루르(Ruhr) 지방을 점령하지만, 루르의 독일인들은 프랑스 정부에 적대적인 태세를 취하고, 영국과 미국은 무역 제재를 통해 경제적 압박을 주면서 이러한 정책은 완전히 실패한다. 영국의 피해 규모는 프랑스만큼 크지 않았던 터라 독일의 배상금이 그다지 아쉽지 않아 배상금의 규모를 줄여줄 의향도 있었던 반면, 프랑스는 이런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제 공황과 파업 진압, 루르 지방 점령의 논란 그리고 정부의 가톨릭에 대한 편애는 중도파(급진당)와 좌파의 연맹으로 이루어진 좌파 카르텔(Cartel des Gauches, 카르텔 데 고슈)이 1924년 총선에서 승리하는데 한몫한다. 다만 사회주의 세력은 이때 중도좌파 진영의 콩라인이라 후임 대통령으론 급진당 출신 후보 가스통 두메르그(Gaston Doumergue)가 당선된다.
카르텔의 새 내각은 우선 평화 회복을 위해 국제연맹(영: League of Nations 불: Société des Nations)에 가입하고, 독일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을 경우 배상금을 완화하자는 도스 안에 동의한다.
하지만 좌파 연정은 급진파와 사회주의자로 갈라져 재정적 이슈에 합의를 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본적 세금을 대폭적으로 공제하고, 소득세의 인상으로 벌충할 것을 요구한다. 폴 팽르베의 협의를 위한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협안의 부재는 프랑의 240% 인플레이션율이란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레몽 푸앵카레는 1926년 수상으로 복귀해 에두아르 에리오(Edouard Herriot)와 함께 경제 상황을 일부 복구시키고, 1928년 국회의원 총선에서도 성적을 내게 된다. 하지만 몇 년간의 당파 정치는 프랑스 국민의 원성을 사고, 당내에서도 개혁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정치"를 부르짖음은 급진적 변화를 원하는 극우적 성향의 발달을 초래했는데, 예를 들어 이탈리아 파시즘을 모방한 르 페소(Le Faisceau)와 복고주의를 지지하는
또한 스페인과 함께 모로코의 리프 전쟁에 개입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2.3.3. 1930년대
파시스트와 왕당파를 위시한 극우파의 세가 커지자 견제 심리가 발동했는지 1932년 총선에선 사회당(당시엔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과 급진당이 양대 정당이 되고 나머지 정당들은 쇠락하는데, 그렇게 1932~1934년 좌파 정권이 유지되던 중 1934년 극우파들이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켰으나 당시 급진당 정부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1934년 급진당 내부의 계파 중 우파가 주도권을 잡아서 다시 민주 공화국 동맹 및 공화연방(FR)과의 연정을 2년간 시도하였다.그러나 계속되는 파시스트 주변국들의 도발과 코민테른의 정책 변화로 좌파 내부의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 프랑스 공산당(PCF) 사이의 갈등이 봉합되고, 마침 급진당 내부의 좌파 계파가 주도권을 잡은 것을 계기로 SFIO-급진당-PCF의 '인민전선'이 결성되었고 1936년 총선에선 이들 정당이 나란히 1, 2, 3당을 하며 낙승한다.
참고로 이때 취임한 레옹 블룸 총리는 리버럴이 아닌 사회주의 계열로는 프랑스 최초의 정통(?) 좌파 총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다보니 그의 급진적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급진당과의 이견이 심해진 끝에 내각은 2년만에 붕괴되었고, 1938년부터는 급진당 주도의 중도파 내각이 들어선다.
이 당시 프랑스는 젊은층들이 적은 인구 구조에다가 식민지와의 교역을 통해 경제대공황으로 인한 충격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지만[29] 1930년대 후반에는 이러한 인구구조가 역으로 작용한데다가 빠르게 성장하던 소련이나 나치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과는 다르게 내부 정쟁으로 빠른 회복에 실패하여 침체가 지속되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자, 프랑스는 바다 건너편에 있는 우방국들인 영국이나 미국보다 이탈리아와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다지려 한다. 하지만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국제연맹의 회원국인 에티오피아를 점령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관계도 파탄난다. 한편 독일은 오스트리아 병합을 1938년에 완료하고, 세력권을 확장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협하자, 프랑스는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 함께 뮌헨에서 4자 회담을 통해 독일의 주데텐란트 병합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한다.
2.4. 1940년: 붕괴와 이후
그리고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5월 10일에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하는데, 사실 프랑스도 독일의 재침공을 우려했기에 마지노선을 구축하는 등 나름 철저한 대비를 했으나, 마지노선을 돌아가는(...)[30] 나치의 공격 앞에 200만 육군을 보유하고도 허무하게 무너져 6주 만에 나치 독일에 패망한다.[31] 직후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페탱 장군은 사실상 패전인 종전을 요청하고 이듬달 7월 10일에 비시 프랑스가 성립된다.프랑스 저항군들은 국내에선 붙잡혀 고초를 겪거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국외에선 자유 프랑스라는 망명정부를 세운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되고 1년 뒤 연합국이 최종 승리하면서, 프랑스도 임시정부 시기를 거쳐 1946년 프랑스 제4공화국으로 새출발하게 된다.
3. 정치
3.1. 구성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는 내각제 중심의 대통령제를 정치체제로 삼았다. 명목상으로는 대통령이 국가의 원수였지만, 프랑스 제2공화국 시절의 반성을 토대로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에 머물렀고, 실권은 내각과 의회의 손안에 있었다. 대통령은 상원과 하원의 동시 표결을 거쳐서 선출되었고, 관리의 임명권과 면직권 역시 대통령이 아니라 내각이 지니고 있었다. 또한 대통령은 장관을 임명할 수 있었으나, 의회는 표결에서 과반수만 넘으면 이들을 즉시 불신임시킬 수 있었다.그러나 제2공화국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의 권한이 지나치게 약한 점이 문제였다. 의회에서 시도때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불신임투표를 통해 장관들을 무력화시키는 통에 행정부와 대통령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물론 제3공화국은 대통령중심제가 아닌 의원내각제였으니 대통령이 3개월 내에 총선을 실시하는 조건으로 의회를 해산시키는 방법이 있긴 했고, 실제로 이는 헌법에서 명시된 대통령의 권리였으나,[32] 문제는 4대 대통령 쥘 그레비가 취임하면서 자신은 (드마크마옹과 다르게) 어떠한 경우에도 의회[33]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이게 일종의 불문헌법(Constitutional Convention)으로 굳어지면서 이후 당선된 대통령들은 의회를 해산시킬 수 없었다.
결국, 그 결과 의회는 자신들은 절대 해산되지 않는데 장관들은 과반수만 넘으면 마음대로 끌어내릴 수 있는, 소위 무소불위의 존재가 되었으며,[34] 프랑스 제3공화국은 65년 동안 내각이 100번 넘게 교체되는 엄청난 정치적 대혼란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무력한 행정부와 날뛰는 입법부로 인해 서서히 몰락해간 제3공화국은 또다른 불씨를 남기게 되는데, 바로 훗날 대통령이 되는 샤를 드골로 하여금 "강력한 행정부"를 가져야한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35]
1889년 까지는 한 후보자가 여러 지역구에 중복 입후보 할수 있는 “중복입후보제”를 채택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지역별 연기투표제[36]로 바뀐다.
또한 공화정이 새로 등장하면서 제2제정까지 존재했던 귀족 제도를 공식 폐지하였다. 이후에는 단순히 공식 석상에서 기존의 귀족 가문 출신인 인사에게 귀족 호칭을 붙여주는 정도의 관례로만 남게 되었다. 참고로 이러한 관례는 프랑스 제5공화국 시절인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 시절에 완전 폐지된다.
3.2. 정교분리
제3공화정 내내 프랑스 정부와 가톨릭 교회는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특히 당시 프랑스에서 가톨릭 교회는 앙시앵 레짐 이후로도 왕당파 및 우파 세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공화정에 크나큰 위협이었다.[37]게다가 이 시기에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은 초등교육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사제들이 아이들에게 반동적인 이념을 교육시킬까봐 매우 우려했다. 그래서 1882년에 정부는 학교 내의 모든 종교교육을 금지하는 법안인 쥘 페리 법을 통과시킨다.[38] 게다가 정부는 가톨릭에 경제적으로도 압박을 가하기 시작해서 교사로 근무하는 성직자들의 월급을 대폭 깎았고 가톨릭 재단, 특히 예수회가 운영하는 사립학교를 약화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들 학교 측에게 많은 공과금을 납부하게 해서 이렇게 받은 돈으로 공립학교를 설치했다. 사실 이 정책에서 교사들이 정교분리를 이뤄내는 일등공신이었는데, 이 시기에 프랑스 농촌으로 파견된 젊은 교사들은 모두가 공화국의 열렬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이들을 지칭하는 별명 중 하나가 '공화국의 검은 경기병단'이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 교사들의 근무복이 검은색이었기 때문에 그런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이 법 이후로도 정부의 교회 견제는 더욱 심해졌고, 20세기에 들어서면 교회의 거센 반발[39]에도 프랑스 정부는 1884년에 이혼을 합법화했고, 군종 신부들이 군대에서 추방되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3세가 중재를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19세기 말에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에서 가톨릭 측이 보여준 극우적이면서도 편향된 모습은 프랑스 국민들한테 가톨릭에 대한 반감을 심어주었으며 진보적 정치인들로 하여금 더더욱 교회를 정계에서 뿌리뽑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1904년 총리를 지낸 에밀 루베가 정교분리법을 발의하고 가톨릭 교육 단체를 강제로 통폐합해버리면서 가톨릭 세력은 치명타를 입고 정치력을 상실하게 된다. 반대로 국가가 교회에 간섭, 특히나 주교를 누구로 임명할지를 놓고 정부와 교회가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중단됐다.
후손인 오늘날의 프랑스 정부 역시도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경한 정교분리 원칙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프랑스 헌법 제1조에서 프랑스를 비종교적, 민주적, 사회적, 불가분적 공화국으로 규정하였고, 공적인 장에서 일체의 종교적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라이시테). 이 때문에 공립학교에서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히잡을 착용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오늘날 히잡이나 부르키니을 착용하려는 사람들이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대해 프랑스 정부가 강경하게 대처하는 것을 쉽게 이슬라모포비아로만 간주하기 어려운 것도 프랑스가 강경한 정교분리 원칙을 추구하기 때문이다.[40]
4. 외교
4.1. 유럽 내 외교정책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참패한 이후 프랑스의 외교목표는 오로지 독일 제국에 복수(Revanche)하고 잃어버린 고토 알자스-로렌을 되찾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까지는 외교의 천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건재했던 탓에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하지만 빌헬름 2세에 의해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이후 유럽 외교의 지형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빌헬름 2세가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안전보장 조약을 연장하지 않고 파기하자, 이틈을 놓치지 않고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다. 또한 빌헬름 2세가 건함 경쟁을 벌이면서 독일-영국 사이의 관계도 악화일로를 치닫자 당시 프랑스의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영국과도 전격적으로 동맹을 체결한다. 오랜 경쟁 심리와 더불어 파쇼다 사건으로 독일만큼이나 영국도 싫어했던 프랑스 여론은 델카세의 외교노선에 거세게 반발했지만 영국에 대한 과거의 원한보다는 독일에 대한 현재의 두려움이 더 컸기에 결국은 이를 수용한다.프랑스는 1차대전 승전국 중 최대 지분국이다. 프랑스가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된 원인도, 프랑스가 먼저 독일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하면서 러시아와 동맹국인 프랑스에 동시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자주 정권이 교체되어 일관성이 없는 국방정책을 펴던 정치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부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수모를 앙갚음하고 군국주의적인 독일 제국의 팽창주의를 우려해서 방위체제를 확립하는 데 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의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전선을 유지하면서 막강한 독일군의 진격을 정지시켰고, 결국 승전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4.2. 제국주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비참한 패배에 대한 보상심리와 더불어 19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민족주의가 더해지면서 프랑스 역시 활발한 식민지 구축에 나서게 된다. 1914년에 이르러서는 대영제국에 다음가는 천만 제곱 킬로미터이 넘는 면적의 제국을 보유하게 됐다. 이미 제3공화국 시기 이전에 차지했던 알제리와 베트남을 발판으로 하여 북/중 아프리카 일대와 인도차이나에서 거대한 프랑스의 식민 기지가 건설된다.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도 영토가 있었으나, 앞서 언급한 두 장소에 비해 지리적 근접성이나 경제적 수익성이 떨어져서 투자 비중이 적은 편이었다. 이러한 식민지 건설에는 특히나 가톨릭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41]4.2.1. 목적과 여론
이렇게 획득한 식민지는 프랑스의 경제 체제에서 원료 공급과 상품 소비와 같은 경제 활동으로 해외 투자자의 투자 수익을 얻게 해서 프랑스의 경제에 일부 참여한다. 대공황 시기 프랑스는 이들 식민지에 대한 산업을 거의 독점해서 철저한 블록경제를 형성하여 부의 이탈을 방어 혹은 경제 교류를 방해하였다. 다만 제국주의가 과연 본국의 경제에 얼마나 실질적인 공헌을 하였는지에 대해선 학자간에도 논란이 있다. 식민지 피지배층이 착취당한 것과는 별개로, 프랑스 재정의 10%를 식민지 유지에 사용하게 되었고 [42] 정복 전쟁의 비용도 높았다. 또, 소득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질적인 득을 본 자들은 식민사업에 뛰어들 정도의 자본력을 보유한 대기업들이었다. 당시 제국주의 정책은 경제학적 논리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 감정이나 지배 계층의 체제 유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에르네스트 르낭같이 제국주의에 호의적이었던 인텔리들의 존재는 당시 프랑스 여론이 범국민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이었던 것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식민주의가 주요한 정치의제들 중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고, 레옹 강베타, 쥘 페리, 조제프 라이나흐 등의 인물을 포함한 공화파들과 쥘 뒤발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43] 역시 식민지 팽창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브 귀요, 폴 르로이 보리외 등 경제학자들은 "식민지는 아직 장성하지 않은 동생같은 존재로,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문명화된 유럽인들의 숙명"이라며 식민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급진좌파, 극우 왕당파, 많은 경제적 자유주의자들 등 이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도 의외로 많았다. 우선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식민주의는 정부의 시장 개입과 보호주의 무역을 동반했기 때문에 장바티스트 세를 계승한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식민주의에 호의적이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 중에도 예외는 있어 이중잣대를 들이대거나, 자유무역을 전제로 한 식민화는 동의한다는 사람들도 간혹 있긴 했다. 그 외 샤를 모라스 등 왕당파는 적국 독일에게 빼앗긴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쏟아야할 군비를 식민사업에 붓는 것을 낭비로 보았고,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에 비해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시기가 너무 늦다고 주장했다. 그나마 조르주 클레망소를 포함한 급진좌파는 인종의 위계와 유럽인들의 우월성을 도덕적인 차원에서 거부하면서 반대했다. 군대를 분산시키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사실 1830년에 샤를 10세가 여론의 눈길을 돌리기 위해 정복했던 알제리를 제외하면,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식민주의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부터였다. 양측에서 갑론을박이 오가는 가운데, 결정적으로 식민사업의 이유를 제공한 것은 친식민기업들의 로비였다. 아렌베르크 공작과 외젠 에티엔 위주로 모인 식민당 운동은 프로파간다와 활발한 원내 정치공작을 통해 여론을 돌리는데 성공한다.
4.2.2. 열강과의 경쟁
1870년대부터 프랑스는 튀니지를 두고 이탈리아와 경쟁해야 했다. 결국 1881년에 프랑스가 튀니지를 선점하자, 이듬해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연을 끊고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삼국동맹을 맺게 되면서 비스마르크 체제에 편입하고 프랑스를 철저하게 고립한다. 한편 이스마일 파샤 치하의 이집트가 서방 열강들로부터 받은 과도한 대출 때문에 파산당할 상황에 처하자, 1876년에 프랑스와 영국은 이집트의 재정부에 자국의 관료를 심어서 공동통치하자는 조약을 맺는다. 하지만 1882년에 아라비 파샤가 지도하는 독립운동이 터지고, 프랑스는 독일의 눈치를 보면서 개입하는 것을 꺼린다. 영국은 이집트 독립운동을 진압하고 독점적인 보호령을 설립한다. 하지만 영국을 공격하는 것은 유일한 동맹국과 등을 돌리는 것을 의미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프랑스는 새로운 국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1885년에 통킹(베트남 북부)을 식민화한 후에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소실의 영향을 체감할 수 있었다.5. 경제
5.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벨 에포크"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프랑스 공업에 있어 제3공화국은 성장 속도가 둔화되는 시기였다. 1880년에 세계 공산품 생산의 8.6% 정도였던 프랑스의 몫은 1913년에 이르러서는 6.4%에 불과하게 된다. 이는 1880년대에 영국을 앞지르고 세계 1등 공업국가가 된 미국 (1913년에 세계 36%), 유럽 1등 공업국가인 독일 (세계 16%) 또 영국(14%)에 비하면 한참 모자른 것이었다. 주된 이유는 인구 성장률이 비교적 낮았다는 점과, 석탄의 3분의 1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에너지원이 항시 부족했다는 점이었다(알자스-로렌의 상실이 컸다). 프랑스의 석탄 추출량은 미국의 8%에 불과했고 영국이나 독일의 반도 안되었고, 철광석조차 부족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세계 무역의 8%를 담당했고 그마저도 항시 적자였다. 그럼에도 항공기 제조 산업, 자동차 산업 등에는 세계 1위, 2위로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전통적인 비단과 와인 등은 효자상품으로 (특히 영국의 구매력으로) 외화를 꾸준히 수급해주었다.프랑스 경제의 실질적인 강점은 금융에 있었다. 파리 금융가로 대표되는 프랑스는 1880년대부터 꾸준히 해외 채권을 구매했고, 1914년에 이르러서는 세계 해외 투자의 20%가 프랑스의 지분이었다. 초기 투자 형태는 철도 및 인프라 건설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었는데, 점차 직접 투자를 지향해 해외 진출 기업들에 대한 주식 투자가 늘기 시작한다. 주요 투자 대상은 개발 도상국들로, 초반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이었고, 1900년대 이후부터는 러시아와 남아메리카였다. 남유럽 국가 투자의 감소는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국채를 되산 탓이고, 오스만 제국의 투자 감소는 독일, 영국과의 경쟁 탓이다. 러시아의 증가는 알렉산드르 3세 시절 감행한 공업 개혁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프랑스 자본은 러시아의 철도 확장을 지원했고 이는 슐리펜 계획을 저지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5.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기축통화였던 스털링이 약화되었으나 1918년까지 국내총생산의 준수한 성장률을 보이던 영국이나, 무기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인 미국과 달리, 독일과 프랑스는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농업으로, 전쟁 직후 프랑스의 벼 생산량은 전쟁 직전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선박들과 공장 설비들의 파괴로 공업과 무역도 타격을 입었다. 국가채무도 1922년에는 국내총생산의 35.8%에 달했다. 한편, 전쟁 물자보급에 필요했던 인프라의 현대화로 국내 상업은 오히려 활성화되었다.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같이 계획경제 국가로 변모했다. 국가는 공급과 배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다. 하지만 20년대 초반부터 파탄이 난 영국 경제와 달리 프랑스 경제는 10.6%[44]의 높은 인플레이션률로 국채의 부담을 줄이며 경제를 재건한다. 부족한 일손은 남유럽 출신 이민자들을 수용하면서 채웠고, 원래 강세였던 자동차 산업과 항공 산업의 현대화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경제를 회복한다.
1929년 미국 대공황 이후로 유럽 은행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판에, 프랑스의 경제는 수출에 덜 의존하던 탓에 그 여파에 비껴난 듯 보였다. 하지만 1931년에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도입하면서 스털링이 평가절하되었고 프랑스 경제가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영국을 따라 프랑을 평가절하했고, 결과적으로 무역은 유지했지만 구매력이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임금 인상이 불충분했던 샐러리맨들이 대거 파업을 일으키면서 생산량까지 줄었다.
6. 주요 사건
- 1871년 파리 코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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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불랑제 사건
1886년~1887년 육군 장관이었던 조르주 불랑제 장군이 대중의 지지를 받아 인기를 끌었고[45] 이를 경계한 내각은 그를 육군 장관에서 해임한다. 이후 그의 주위에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극단적 공화주의자 등이 몰려들었고 특이한 정치적 연합이 형성된다. (가령 극단적 공화주의자이자 1884년 이혼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던 Naquet이란 국회의원도 여기에 참여하여 'Dissolution, révision, constituante' 이란 슬로건을 내놓는다.) 육군 장관에서 해임된 이후 불랑제는 총선에 출마하여 여러 곳에서 당선되었고[46] 1889년 1월에 실제로 쿠데타 계획을 세웠지만 정부가 먼저 손을 써서 불랑제의 측근을 체포한다. 이후 불랑제는 벨기에로 망명했다 그 곳에서 연인의 병사로 충격을 받고 자살한다. -
1892년
파나마 스캔들
1880년대 후반에 민간업체를 이용하여 프랑스 정부는 파나마 운하를 시공하였는데, 말라리아 유행, 당시 기술로는 힘들었던 건축, 자금 부족 등이 겹쳐져 건설이 중도에 중단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민간업체가 내각과 의회에 엄청나게 뇌물을 뿌렸던 것이다. 덕분에 정국은 뒤집어졌고 반 공화주의자들은 공화정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씹고 다닐 수 있었다. 여기에 해당 민간업체가 유대계 자본에 의해 설립된 유령회사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대중 사이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거세진다. 그리고 이렇게 팽배해진 반유대주의는 3년 뒤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폭발하게 된다. - 1895년 드레퓌스 사건
- 1898년 파쇼다 사건
- 1914년~1918년 1차 대전
- 1920~1927년 리프 전쟁
- 1929년 대공황
- 1938년 뮌헨 협정
- 1939년 2차 대전 발발
- 1940년 프랑스 침공으로 제3공화국 붕괴
7. 연표
연도 | 대통령 | 주요 사건 |
1870 ~ 1873 | 아돌프 티에르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전으로 집권. 파리 코뮌 진압. |
1873 ~ 1879 | 파트리스 드마크마옹 |
1873년 대통령 임기가 7년으로 확정 1875년 권력기구 구성에 관한 법률 재정. |
1879 ~ 1887 | 쥘 그레비 | 파나마 스캔들 |
1887 ~ 1894 | 사디 카르노 | 국방장관 조르주 불랑제(Georges Boulanger)의 제거. |
1894 ~ 1895 | 장 카지미르페리에 | 드레퓌스 사건. |
1895 ~ 1899 | 펠릭스 포르 |
레옹 "부르주아" 내각. 파쇼다 사건 |
1899 ~ 1906 | 에밀 루베 | 정교 분리 |
1906 ~ 1913 | 아르망 팔리에르 | |
1913 ~ 1920 | 레몽 푸앵카레[47] | 제1차 세계 대전 |
1920 | 폴 데샤넬[48] | |
1920 ~ 1924 | 알렉상드르 밀랑 |
"국민연합(Bloc National)" 출신. 사회주의자 출신의 권위주의 우파. 루르 점령 |
1924 ~ 1931 | 가스통 두메르그 |
인민전선(좌파)의 집권.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 바이마르 공화국 국제연맹 가입 허용. (1925~1930)[49] |
1931 ~ 1932 | 폴 두메르 | 인민전선. |
1932 ~ 1940 | 알베르 르브룅 |
인민전선. 국무총리의 신설(두메르그 #)[50] 마지노선, 뮌헨 협정. |
8. 대중매체에서의 프랑스 제3공화국
- 다이스가 제작한 게임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하는 FPS 게임인 배틀필드 1에서 연합국인 대영제국, 미합중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과 함께 등장 세력으로 나온다.
- 하츠 오브 아이언4에서 주요 열강국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항복 한도치를 50% 낮추는 <분열된 정부>라는 희대의 쓰레기 국민정신을 가지고 있어, 멀티에서 프랑스는 최대한 빠르게 분열된 정부 국민정신을 없애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 대체역사물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대전쟁 패배의 여파로 민심이 떨어졌고, 생디칼리슴 혁명으로 내전이 일어나자 본토를 프랑스 코뮌에게 날리고 알제로 도망가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새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넓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를 작디작은 알제의 임시정부가 통제하는 탓에 당장 반란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는 본토를 수복하여 정통성을 회복하고서야 그 힘으로 제압할 수 있게 된다.
[1]
알제리는 특이하게도
유럽이 아닌
북아프리카에 속했음에도 프랑스 본토로 취급되었다. 또한 1871년부터 1918년까지는
독일 제국에 할양된
알자스-로렌이 영토에서 제외되어 있었으나,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여 이 지역을 수복하면서 영토가 현재의 프랑스 영토와 같아졌다. 물론 알자스-로렌이 영토에서 제외되었던 시기에도 프랑스는 이 지역을 수복해야 할 영토로 간주하고 영토 수복을 주장했다.
[2]
프랑스 침공으로 인해 파리가 함락 직전 상황에 몰리자 프랑스 제3 공화국은 1940년 6월 10일을 기하여 보르도로 천도했다.
[3]
1905년 정교 분리법이 통과되어 국교의 지위는 상실했다. 또 주류 종교긴 했지만 기타 소수 종교인들도 존재했다.
[4]
현 프랑스 제5공화국은 1958년에 성립되어 앞으로 별다른 헌법 개정이 없다면 2027년에 70주년을 맞이한다.
[5]
그래도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나홀로
전제군주제였던
러시아 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는 명목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입헌군주제를 표방하고 있긴 했다.
[6]
이웃나라인
스페인에선 여러 번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첫번째는 1년만에 망했고
두번째는
내전으로 뒤집어 지면서 망했다.
[7]
이 시기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왕당파와 공화파 간의 싸움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공화파가 승리를 거두고 공화국 프랑스의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8]
사실 프로이센은 황제를 잡았으니 전쟁은 끝났다고 여겼는데, 국민정부라는 저항자들이 새롭게 튀어나와 항전을 계속하니 꽤나 당황했다고 한다.
[9]
물론 이미 전쟁에서 쳐발린 티에르 정부 입장에서도 답이 없긴 했다. 게다가 티에르는 줄기차게 반전을 주장하여 정계에서 밀려나있다 프랑스 망하게 생기자 그제서야 겨우 여론의 지지를 얻어 나선 뒷처리 투수격이었다.
[10]
레옹 강베타 등 당대 좌파 공화주의자들의 지지도 별로 받지 못했다.
[11]
티에르는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이 왕을 몰아낸 결과 근대적 독재자만 불러온 꼴이 되었다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공화국 프랑스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노력했다.
[12]
애초에 제3공화국은 사실상 의원내각제라 대통령의 실질적인 권한이 세지도 않았다.
[13]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군을 재건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당연히 대중들의 큰 반발을 샀다. 징병제 자체도 반대 여론이 많았는데 심지어 복무기간은 무려 5년이었다.
[14]
사실 정말 사퇴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의회를 협박하려고 제출한 사직서가 그대로 수리되면서 얼떨결에 사퇴하게 되었다.
[15]
양자역학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루이 드브로이를 떠올렸다면 제대로 떠올린 것이다. 그는 루이 드브로이의 조상으로, 드브로이 가문은 공작 가문 출신으로써 당대의 가장 유명한 귀족 중 하나였다.
[16]
그나마 샹보르 백작도 목이 잘릴 게 뻔하므로 옛
절대왕정 체제는 부정하면서 그 때로 되돌아갈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17]
이때 좋은 핑계가 된 것이 바로 국기 문제였다. 샹보르 백작은 "부르봉 백기를 국기로 재지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왕위에 안 오르겠다." 고 선언했다.
[18]
당시 대통령은 의회 투표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다.
[19]
다만, 신성 로마 제국 내 군주들과 귀족들이
30년전쟁 동안
가톨릭과
개신교로 갈려져 내전까지 벌어져서 그렇지, 신성로마제국 전체 인구만 놓고보면 30년전쟁 이전까지는 프랑스보다도 인구가 많았다.
[20]
재미있게도 정치적 이슈로 인한 자살이 아니라, 망명지까지 따라와 준 애인이 병사하자 상심해서 자살했다.
[21]
웃픈 점은 당시 나치 등장에 프랑스가 일조한 점도 있었다는 것이다. 뭔 소린고 하면, 1차대전 당시 패전국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린 핵심 당사국이 프랑스였는데, 과도한 배상금에 독일 국민들이 배째라 할 무렵 나온 것이 나치였으니 그야말로 아이러니하다.
[22]
여담으로 1945년 5월 8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유럽전선 승리를 발표하며 이런 말을 남긴다. "한때 무능하고 유약하다 폄하되었던 평화의 연합체는, 독재자와 군부의 폭정보다 훨씬 더 강력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23]
당시 프랑스는 본토의 인구 3,900만명 중 총 840만명을 동원하였고, 140만명의 사망자와 426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즉 프랑스는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동원했으며 동원된 군인 중 67%가 죽거나 다쳤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전간기에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 프랑스는 고질적인 인력난을 겪게 된다.
[24]
민주 공화국 동맹 및 클레망소를 수장으로 하는 독립 급진파. 조르주 클레망소는 젊어서는 좌파였으나 나이를 먹으며 점점 우파로 변한다.
[25]
1972년 창당된
국민연합과는 다르다.
[26]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군 군복의 색은 초기에는 멀리서도 확연히 구별될 정도로 높은 채도의 파란색 코트에 시뻘건 바지를 입는 방식이었다. 이후 참호전에서 수도 없이 병사들을 잃고 난 뒤 채도를 낮춘 지평선 청색(horizon blue)을 채용하였다.
[27]
프랑스 가톨릭 고유의 종교적 공동체로, 각 교구에 하나씩 있는 주교가 감독하는 예배 장소.
[28]
철도/광산업 종사원들이 높은 생계비에 반발해 일어난 사건. 국민연합 내각은 15000명의 해고로 대응한다.
[29]
미국의 실업률이 25%에 달하는 동안 프랑스는 5%대에 그쳤다.
[30]
정확히는 마지노선과 벨기에 사이에 아르덴 숲이 있었는데, 숲이라 벨기에와 프랑스도 서로 신경을 덜 쓰고 서로가 알아서 지키겠지 하고 대충 막아두다가 뚫리게 된 것. 실제 독일군 입장에서도 아르덴 숲 진격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31]
그 외 1차 세계 대전을 겪은 프랑스 시민들이 내 자식들에겐 자신처럼 비참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32]
그리고 3대 대통령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은 실제로 자신이 앉혀놓은 국회의장 쥘 시몽과 격렬한 대립을 빚은 끝에 의회를 해산시켜버린 바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직후 이어진 총선은 드마크마옹이 속한 왕당파의 대패로 끝났고 드마크마옹은 그대로 사퇴. 이 사건을 끝으로 프랑스에서 왕당파는 다시는 힘을 쓰지 못했고 이후 1884년 개헌을 통해 프랑스의 국가체제가 공화국으로 영구히 고정됨과 동시에 기존 왕족들의 가족들은 대통령직에 오를 수 없다는 조문까지 헌법에 추가되면서 프랑스의 왕정복고 시도는 끝을 맺는다.
[33]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민들의 직접투표로 뽑히는 하원.
[34]
다만 대통령만은 특별한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불신임투표로 하야시킬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조건에서 대통령마저 그렇게 쉽게 하야시켰다면 국가체제가 유지되었긴 했을지조차 의문이다.
[35]
실제로, 드골은 연합군의 도움으로 프랑스가 해방되고 임시정부가 세워진 뒤부터는 꾸준히 프랑스 전국을 돌며 새 헌법에서는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점과, 제3공화국이 붕괴된 원인은 정당들의 난립 때문이었다는 것을 골자로 한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과는 반대로 1946년 국민투표를 통해 채택된 새 헌법으로 세워진 프랑스 제4공화국에서는 행정부와 대통령의 권한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고, 이에 불만을 품은 드골은 기어이 개헌을 통해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고 민주국가를 통틀어서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대통령중심제를 구축했다. 물론 그 자신도 이것이 빌미가 되어 물러나야 했지만.
[36]
다인 선출 선거구에서 유권자들에게 선출되는 의원의 수 만큼 동일한 수의 표를 갖게하는 제도
[37]
여담으로 당시
위그노(개신교)와
유대교는 이 다툼에서 열심히 정부의 편을 들어줬다.
[38]
다만 모든 종교교육을 금지한 것은 아니고 목요일은 종교교육을 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
[39]
혼인성사 참조
[40]
반대로
한국의 경우,
프랑스의 방식이 아닌
미국/
독일 방식의 정교분리를 채택하고 있다. 미국과 독일에서의 정교분리는 '국가가 특정 종교에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개념이며, 그렇기에 독일에서는 종교 정당인
기민련 등이 활동할 수 있으며 정치인이 종교적인 동기를 가지고 정책을 추진하는 것도 이론적으론 가능하다.
[41]
다만 이는 프랑스 만이 아니라 모든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개척할 때 흔히 쓰는 방법이었다. 선교사를 보내 문화적으로 침투하는 한편, 이에 반발해서 선교사에게 위해가 가해지면 이를 빌미로 군대를 파견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그런 침략과 정복에 동의한 건 아니었고, 일부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한 고국의 탄압에 반발을 해서 고국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42]
물론, 인프라 건설보다는 군대 유지 비용이 3분의 2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43]
생 시몽이 창시한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전신.
[44]
1920년부터 1929년까지 연당 인플레이션의 평균값
[45]
1887년 Schnaebelé 사건 이후 독일에게 공공연히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다녔고 병사들의 병영생활 개선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46]
당시 프랑스에선 한 사람이 여러 곳의 선거구에 동시에 출마할 수 있었다.
[47]
20세기 초의 저명한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와는 사촌지간이었다.
[48]
여담으로 이 사람의 증손녀가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썸머 역을 맡아 유명해진 프랑스계 미국인 배우인
조이 데이셔넬이다.
[49]
1926년
노벨 평화상 수상.
[50]
1936년 거국일치 내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