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00:10:40

요동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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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반도(랴오둥반도)
遼東半島| Liaodong Peninsula
<colbgcolor=#363><colcolor=#fff> 위치 동아시아
면적 15,770㎢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인구 약 770만명
최대 도시 다롄시

1. 개요2. 역사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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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동반도(), 중국어 발음: 랴오둥 반도)는 산동 반도와 함께 발해해를 감싸고 있는 반도이다.

남쪽에는 황해 서한만이 있고 동으로 한반도와 접한다. 랴오닝성에 위치한다. 그중에서도 요동의 일부분이다. 이름은 요하의 동쪽에 위치한 반도라는 의미이다. 인구 2010년 기준으로 요동 반도에 있는 다롄 시와 잉커우 시의 남부를 합쳐서 약 772만 명 정도 된다. 면적은 인구와 같은 방법으로 계산 시 15,770㎢으로 랴오닝성의 10%를 조금 넘는 정도이다.

2. 역사

고대에는 고조선이 위치해 있었지만 기원전 3세기 연나라가 침탈하면서 5호16국시대까지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러다가 4세기 광개토대왕에 의해 완전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소고구려 혹은 발해가 요동 반도 지역을 영유했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요나라( 거란)- 금나라( 여진)- 원나라( 몽골)로 이어지는 북방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요나라 때에는 흥료국-대발해로 이어지는 발해부흥운동이 일어나곤 했다. 원나라에서는 고려 왕족이 심왕에 책봉되며 명목상의 통치자가 되기도 하였다.

14세기 후반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아직 대륙의 주도권을 쥐지 못하던 시기에 공민왕 이성계가 주도한 제1차 요동정벌로 한민족계 국가에서는 마지막으로 고려가 점령했다가 철수했다. 이후 몽골계 군벌 나하추가 잠시 점령했으나 명나라가 원나라를 몽골 고원으로 밀어내고 북진하면서 명나라 영토가 되었다.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요구에 반발해서 고려 우왕 최영이 제2차 요동 정벌을 추진했으나, 이성계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요동 반도의 영유권은 명나라-청나라로 이어진다.

19세기 청나라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서 일본 제국에 할양했으나, 삼국간섭에 의해 다시 반환받은 일도 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이 잠시 지배했다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일본에게 되돌려 주었고 이곳은 관동주라는 이름하에 일본에 할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만주 군정에 편입되었다가 뤼순(旅顺) 지역을 제외하고는[1] 1946년 국민정부에 반환하고 이후 국공내전을 거쳐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에 남는다.

3. 여담

철광산이 많다. 고구려를 비롯한 요동을 점유했던 국가들의 철제무기가 강력했던 이유가 있다. 삼국전투기에서 고구려편을 다룰 때 동천왕과 공손연이 이 곳을 놓고 다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길에 굴러다닐 정도로(...) 넘쳐나는 철광 자원이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또한 동고서저 구조에다 특히 평안도- 황해도 지방에 유독 평야지대가 많아 자연방벽이 거의 없었던 한반도 지형의 특성상, 산지와 구릉지 범벅인 요동반도는 대륙세력에 대한 강력한 방파제가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사상 유일하게 요동반도와 한반도가 제대로 연결된 정권이었던 고구려는 요동반도를 아주 산성으로 도배를 해놓기도 했고 실제로도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고려와 같은 후속 왕조들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욕심 같은 이유가 아닌 전략적 필요상 틈만 나면 요동정벌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항상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실패하고 요동정벌은 한국사의 떡밥 혹은 맥거핀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로는 정반대 방향으로의 방위가 필요했던 명나라가 요동지방에 여기저기에 요새를 박아넣은 것을 통해 여진족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둔 바 있다.

[1] 이쪽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소련이 태평양 진출을 위한 거점이 되었고, 1955년까지 해군 기지로 사용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