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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보호령 Protectorat du Laos ລາວ |
|
프랑스의 보호령 | |
국기 | |
연한 파란색 부분 | |
1893년 ~ 1953년 | |
위치 | 라오스 |
수도 | 비엔티안 |
통화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피아스터 |
정치체제 | 프랑스의 보호령 |
국가원수 | 루앙프라방 왕 |
정부수반 | 라오스 이사장관[1] |
언어 | 프랑스어, 라오어 |
성립 이전 |
루앙프라방 왕국 참파사크 왕국 태국 |
멸망 이후 | 라오스 왕국 |
[clearfix]
1. 개요
라오스에 존재했던 프랑스의 보호령이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였다.2. 역사
프랑스는 1880년대 베트남과 캄보디아 전체를 식민지배하고 있었으며, 라오스도 노리고 있었다. 당시 라오스는 루앙프라방 왕국이었는데, 1887년 청나라에서 넘어온 흑기군에 의해 수도가 점령되는 등 고초를 겪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가 개입해 흑기군을 몰아내주었다. 1889년 루앙프라방 왕인 우운 캄이 프랑스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1893년에는 프랑스가 태국과 전쟁을 벌여 메콩강 동부 영토까지 얻었고 1893년부터 라오스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2] 프랑스는 이후 1904년 태국의 보호국인 참파사크 왕국까지 병합했다. 라오스는 두 영역으로 나눠졌는데, 형식적으로 루앙프라방 군주가 다스리는 간접 지배 영역과 나머지 지역인 직접지배 영역으로 나눠졌다.그러나 프랑스는 사실 라오스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인구도 적고, 산투성이라서 지형도 안 좋고, 땅도 심히 척박해서 농사지을 수 있는 영토가 전체 영토의 3%에 불과했는데다, 무엇보다도 강 자체가 군함이 통과하기엔 수면이 낮아서 추후 중국 침략에도 난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중심으로 몇몇 학교들이 설립되긴 했지만, 도시를 제외하곤 교육시설은 전무하여 교육 혜택조차도 왕실과 귀족 등 상류층에 국한됐으며, 백성들은 불교 사찰에 가서 수업해야 했다. 이 지역의 산업은 거의 발전시키지 않았고, 그나마 고지에서 생산되는 아편 산업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베트남인들을 라오스로 이주시켜 라오스를 다스리게 했다. 1943년에 베트남인들은 40,000명까지 불어났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이 동남아시아 전역을 포함하여 라오스에 진주했는데, 일본군은 인도 침략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버마를 침략할 길을 빌려달라는 전제로 프랑스의 통치권을 인정했으나, 일본군을 주둔시켜 사실상 지배했다. 이에 프랑스는 라오스 사람들을 선동하여 '라오민족쇄신운동'을 지원하고 최초의 라오어 신문을 내도록 했으며, 프랑스군이 지휘하는 라오인 보병부대까지 만들었다. 1945년 3월, 명호작전을 시행해 프랑스인들을 억류하고 루앙프라방 왕이었던 시사방 봉에게 독립을 강요해 괴뢰국 라오스 왕국으로 독립시켰다. 하지만 그해 8월, 애석하게도 일제가 패망하면서 독립도 취소되고 프랑스가 돌아왔다.
하지만 라오스인들은 라오이싸라라는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했다. 1946년에는 라오이싸라가 태국과 베트남으로 망명해 국경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북베트남과 연대했다. 프랑스는 북베트남과 전쟁 중이었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을 우선순위로 보아 라오스를 달래기로 한다. 1946년 프랑스는 라오스를 입헌군주국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합의했다. 그리하여 1947년 헌법을 재정하고 루앙프라방 왕을 라오스 전체의 왕으로 격상한 후, 군사, 재정, 외교권을 제외한 나머지 자치권을 허락하여 라오스 왕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1953년에는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3. 출처
- 가로세로 세계사 2권: 동남아시아, 동방의 천년 문명이 열린다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06. p7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