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2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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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1943의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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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魔王)[1]

1. 개요2. 생애3. 사상과 이념4. 평가5. 매체에서

1. 개요

北一輝
1883년 4월 3일생-1937년 8월 19일몰

일본의 사상가. 일본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파천황적 사고방식의 소유자.

좋게 말하면 혁명적 낭만주의자[2]이고 나쁘게 말하면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희대의 또라이(...)

2. 생애

본명은 키타 테루지로(北 輝次郎). 메이지 16년(1883년) 4월 3일 니가타현 사도군 료츠미나토정(현 사도시)의 양조업자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업도 있을 뿐더러 부친은 정장을 지낸 인물로서 나름 지역 유지였다. 이런 주변부 지역 호족 출신성분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민권운동에 많이들 참여하는데, 키타의 부친과 숙부도 그 중 하나였고 키타는 그것을 보며 자랐다.

1897년 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월반해 3학년이 된다. 하지만 눈병에 걸려 입원, 학업부진으로 낙제하고 가업까지 기울어 퇴학당한다. 이 눈병 때문에 오른쪽 눈은 적출, 평생 의안을 사용한 애꾸가 되었다.

1901년 눈 치료를 위해 상경했는데, 이 때 고토쿠 슈스이 등의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에 부정적이었던 아나키즘적 사회주의자 코토쿠와 달리 키타는 국가와 국민을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를 구상하게 된다. 키타는 신문지상에 러일전쟁 찬성론, 국체론 비판 등 논문을 발표하다가, "국민 대 천황의 역사적 관찰"이라는 논문에서 "천황은 국민의 가까운 가족 같은 존재다"라고 썼다가 불경죄로 연중을 당했다.

남동생이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자 같은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 독학으로 사회과학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1906년 첫 단행본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를 간행했다. 이 책은 발간 5일만에 금서가 되었고 키타는 요시찰인으로 여겨져 경찰의 사찰대상이 되었다. 책이 판금되자 일본국내 개혁에 좌절한 키타는 국제개혁을 통한 국내개혁을 주장한 미야자키 토텐 대륙낭인들과 어울려 중국동맹회에 입당, 신해혁명에 투신한다. 이때 키타는 중국에 건너가 쑹자오런 등과 교류했는데, 그의 중국행은 흑룡회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특파원 신분으로 흑룡회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1913년, 친구 쑹자오런 상해 철도역에서 암살된다. 정황상 위안스카이가 범인이 확실했지만 키타는 쑨원이 범인인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선동하기 위해 신문에 쑨원을 암살 사주범으로 지목하는 기사를 썼다. 하지만 대륙낭인들 중 쑹자오런 지지자는 키타 혼자 뿐이었고, 미야자키와 우치다를 비롯한 주류파는 쑨원 지지자였기 때문에 키타는 이 기사 때문에 그들에게 왕따를 당하게 된다. 결국 상해 총영사에게 퇴청, 귀국명령을 받고 귀국한 키타는 『지나혁명외사』를 써서 신해혁명의 좌절을 기록했는데, 일본이 21개조 요구를 한 것을 비판했다. 기타는 신해혁명의 성공과 쇠락이 모두 위안스카이의 관군의 동참 여부에 달렸음을 목격하고 혁명 성공을 위해 "혁명에 동조하는 관군"의 존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1916년 다시 중국에 건너가 이 때부터 중국풍 이름인 "잇키"를 자칭했다. 상해 북쪽의 일본인 병원에 취직해 지내다가 1920년 상해를 방문한 오카와 슈메이 등에게 귀국을 권유받아 동년 12월 31일 귀국했다.

귀국한 키타는 1921년 오카와가 세운 유존사에 합류하여 국가개조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유존사는 1923년 해산당하고 키타와 오카와는 사이가 벌어져 철천지원수가 되어 버린다.[3] 키타는 『일본개조법안대강』을 발간, 의회를 통한 변혁에 한계가 뚜렷하니 군사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금서 처분을 당했으나 쇼와 유신을 추종하던 청년장교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1920년대를 넘어가면서 키타는 우익 청년장교들이나 우익 폭력배들에게 상당한 (간접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최초의 사례가 1921년 아사히 헤이고의 야스다 재벌 총수 야스다 젠지로 암살사건.[4] 아사히는 기타와 일면식도 없었지만 기타 앞으로 보내는 유언장을 썼다. 키타는 이런 폭력집단들의 테러를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정보료 명목으로 돈을 내놓을 것을 재벌들에게 요구했다. 이 공갈행위로 키타는 대저택에 살면서 처자식 3명과 하녀 3명, 운전수 1명을 모두 꾸준히 먹여살릴 수 있는 돈을 벌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고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자 박열이 찾아와 의탁을 청했다. 하지만 이미 요시찰인으로 경찰의 사찰을 받던 키타에게 의탁할 수는 없었기에 키타는 노잣돈을 주어주고 박열을 돌려보낸다. 박열은 키타의 집에서 불령사 본부로 돌아가는 길에 체포된다. 그 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히로히토 황태자를 암살미수했다는 혐의로 기소되는 박열 대역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예심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는 박열을 회유하기 위해 여러가지 무리한 박열의 요구들을 들어 주었는데, 그 중에는 고향의 모친에게 보여드리기 위한 웨딩사진 촬영도 있었다. 키타는 이 사진을 어떻게 입수했는지 신문사들에 뿌리고 다녔다. 박열과 후미코의 사진은 묘한 포즈[5] 때문에 소위 "괴사진"이라고 불렸다. 어떻게 대역죄인에게 이런 특혜를 줄 수 있냐고 여론이 끓어올라 다테마스 예심판사는 잘리고 제1차 와카츠키 내각은 총사퇴했다.

1926년 제자 내지 하수인인 니시다 미츠기[6]가 찌라시를 흔들어 궁내성 괴문서사건을 일으키자 함께 체포당해 1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기타는 예전부터 여러 차례 막후에서 찌라시를 흔들어 정국을 흔들었다. 예컨대 1918년에는 외가가 사쓰마번 출신인 구니노미야 나가코 히로히토 황태자의 비로 내정되었을 때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조슈벌이 반대하고 나섰는데, 기타는 나가코를 지지하는 찌라시를 흔들어 야마가타의 정치생명을 골로 보내 버렸다. 이런 짓을 막후에서 오랫동안 해오다가 박열 사건으로 기타의 이름이 양지에 드러나게 되었다.[7]

30년대 들어서 일본이 국가총동원체제로 전환되어가면서 기타는 정치활동을 그만두고 종교( 일련종)에 침잠한다. 자기 이름과 얼굴이 드러난 상황에서 찌라시 흔들기 같은 모험을 또 하기에는 시국이 너무 엄혹해져 있었다. 기타는 저택에 틀어박혀 법화경 낭송으로 세월을 보낸다. 1936년, 키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소위 2.26 사건. 키타는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사상적 배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기타는 정말 쿠데타와 관련이 없었지만 군에게 책임이 돌아갈 것을 우려한 군부가 "군 외부의 불순분자" 기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기타는 이 당시 중일전쟁을 막아보겠다고 중국으로 건너갈 준비에 한참이었고, 쿠데타 당일에야 거사를 전달받았기 때문에 쿠데타 계획과 실행에 연관이 있을 수가 없었다.

재판장은 기타가 무죄이고 죄가 있다 하더라도 방조죄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군 상층부의 압력을 받은 다른 판사들이 기타가 반란수괴라고 주장해 그것을 관철시켰다. 군 상층부에서는 기타와 니시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어 극형에 처한다는 방침이 이미 확고했다. 그래서 군부가 무엇을 덮기 위해 이런 무리수를 두었는지, 2.26 사건이 정말 청년장교들의 혈기만으로 일어난 사건이 맞는지 음모론도 무성하다.[8] 그래서 기타는 법정투쟁을 벌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지만, 청년장교들이 먼저 총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법정투쟁을 포기하고 사형 구형을 자처한다.[9] 결국 1937년 8월 14일 니시다와 함께 총살형이 선고되었고 5일 후인 8월 19일 형이 집행되었다.

함께 총살된 니시다가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부를까요"라고 묻자 키타는 거부했다. 그리고 사세구를 남기길
도련님에게 투구를 빼앗겨 져 버린 싸움
若殿に兜取られて負け戦
이라며 히로히토 천황을 도련님이라고 냉소하며 죽어갔다. 향년 54세.

3. 사상과 이념

나는 명백하게 주장한다.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나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것이다. 거의 종교이다. (중략) 하지만 동시에 나는 명백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제국주의를 버릴 수가 없다. 아니, 나는 사회주의를 위해 단연코 제국주의를 주장한다.
사회주의 세상에는 사형에 의한 도태가 없고, 완력에 의한 도태, 경제상의 경쟁에 의한 도태가 없고, 국가간, 인종간의 전쟁에 의한 도태가 없다.
社会主義の世においては死刑による淘汰なく、腕力による淘汰、経済上の競争による淘汰なく、国家間、人種間の戦争による淘汰なし。
-- 기타 잇키,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

키타는 분명히 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로 표상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할 수는 없었다. 키타는 마르크스보다 플라톤의 사회조직론이 더 우수하다고 했고, 맹자는 동방의 플라톤이라고 했다. 전반적으로 독일 보수혁명론자들이 주장한 사회주의와 유사하다. 또한 그는 사회진화론자였는데, 주체는 "소아"(개인)에서 "대아"(국민)로, 그리고 대아를 넘어 "무아"(국제)로 나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제국주의적 사회주의자"라고도 한다.

키타의 일본 정치에 관한 구상은 1923년 발간한 『일본개조법안대강』에서 집대성된다. 키타는 "단일한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사회주의의 이상이 강제되는 전체주의를 도입하고자 했다. 메이지 유신 이래로 일본 곳곳에 포진한 재벌, 제국주의로 표변한 입헌정치인, 화족으로 대표되는 수구보수세력을 일거에 쓸어버리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키타 자신이 그런 "강력한 지도자"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다. 키타는 천황이 일본 사회에서 누리는 특수한 지위, 신적 존재로서 무한한 권위는 가지고 있으나 실권은 그렇지 않은 존재라는 점에 착안해 천황을 바로 그 역할을 맡을 존재로 낙점했다.

일단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을 장악하고, 천황의 권위를 이용해 메이지 헌법을 중지시킨다. 유산보수정당들을 쓸어버리고 민중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할 정당들로 의회를 급격히 재조직한다. 개조된 국회는 전략산업을 국유화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천황과 국민 사이를 막고 있는 화족과 궁내성 같은 "울타리"들을 모두 뽑아 버리고, 고문원으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고문원의 고문은 천황을 알현할 수 있는 존재이며, 명망 있는 국민적 지도자들로 선출한다.[10] 그리고 이런 내부적 개혁으로 강력해진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아시아를 해방시킨다.

...는 것이 키타의 정견이었다. 이것을 "국가개조론"이라고 한다. 이 계획은 언뜻 보기에는 천황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는 것 같지만, 잘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의회와 고문원을 통해 민중의 의사를 펌핑해 올리고, 천황은 그 민의를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천황이라는 그릇의 권위를 이용해 민중의 뜻을 아래로 하달, 강제한다.

즉 키타에게 천황이란 자신의 혁명을 위한 도구, 그릇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던 것이다! 천황이 현인신이라는 사고에 의해 국체가 존립되던 전전 일본에서!

한편, 조선에 대한 의견도 밝힌 바 있는데 그는 조선을 독립시켜 줘야 한다는 의지는 없었다. 대신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평등한 참정권을 주어 동등한 국민으로 대우해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사회진화론자였던 기타 입장에서 조선의 멸망은 조선의 지배계층의 무능으로 인한 것이라 동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민족차별을 계속한다면 서세동점에 맞서 동양을 해방시켜야 하는 일본의 당위성을 해치게 된다. 그러니 조선인을 핍박해서는 안 되고 "일본인"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해 줘야 한다.[12] 이미 독립한 한국인의 입장에선 얼토당토않게 들리는 소리지만, 전후에도 식민지 시절과 별다를 것 없는 차별을 받던 재일 조선인 사이에서는 "그 양반이 일본 정권을 잡았더라면..." 식으로 기타를 평가해 주는 의견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어를 폐지하고 에스페란토를 일본 제국의 공용어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13] 그는 에스페란토어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바라봤으며, 미래의 세계 공용어가 될 에스페란토어를 일본도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100년 후[14] 일본 제국과 그 식민지들의 유일한 언어는 에스페란토어가 될 것이었다.

4. 평가

벗이여, 혁명의 이름에 전율하는가?
그것은 계집애나 할 짓이라네
양심은 어떠한 상전과도 더불어 살 수 없으니
자본가
지주
차르
카이저
그리고 ・・・・ (말할 필요도 없다 言ふぺからず)
영하일섬, 가슴에서 가슴에
죄악의 세상을 뒤집는
지진과 같이
대장부 이렇게 이 세상에 살리라
-- 기타 잇키, 「혁명의 노래(革命の歌)」

사회주의, 국가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심지어 일련종의 종교적 색채까지 뒤섞여 기타 사상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의 영향을 받아 궐기를 통해 국가개조를 강행하고자 했던 2.26 사건의 청년장교들도, 수제자라는 니시다 미츠기도 실상을 보면 알겠지만 기타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천황에 대한 관점이 대표적인 예로, 기타에게 천황은 도구에 불과했지만, 청년장교들에게 천황의 존재는 국가기관이나 도구가 아닌 선한 신이었고, 궐기 이후에도 순진하게 천황의 대어심을 기다리며 충성을 바쳤다. 그래서 그들의 혁명은 실패했다.[15]

자신의 추종자들과 달리 기타는 천황을 몹시 증오했다. 국회의원인 친구가 관직에 출사할 것을 권하자 "천황 따위 시끄러운 놈이 있는 세상에서는 벼슬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할 정도였다. 그의 천황에 대한 증오는 다른 사회주의자들이나, 후세 다쓰지 같은 민권주의자의 천황제 반대와는 사뭇 다른 감정적인 무언가였다. 민중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거짓된 국체 위에 아무런 비전도 없이 군림하고 있는 무자격자인 천황에 대한 질투가 개입되어 있었다. 어쩌면 천황이 가지고 있는 그 위치에 정말로 어울리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16] 최후까지 그는 천황을 도련님이라고 비아냥대며 죽었다.

기타는 천황제와 메이지헌법, 천황주권론에 대한 혹독한 비판자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성립된 근대 일본은 "천황의 일본"이었고, 일본 국민들도 "천황의 국민"이 되어 있었다. 키타가 보기에 이것은 제대로 된 근대화는 커녕 "토인부락"의 꼬락서니에 지나지 않는 미개한 것이었다.] 그래서 키타는 "천황의 일본", "천황의 국민"을 뒤집어 "일본의 천황", "국민의 천황"으로 만들려 했다. 즉, 천황을 국민을 위한 도구로 만들겠다는 소리였는데, 제국 시절 일본인이 천황에 대해 이런 생각을 품는다는 것은 파격 그 이상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일본 국민"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사상과 시대가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침탈에 맞서기 위한 대응책이었기 때문에 기인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서양을 닮고자 했던 입헌 리버럴들[17]은 서양이 그랬듯 제국주의 국가로 일본을 몰고 갔다. 키타는 아시아주의의 이상을 믿었고 그의 정견의 최종 숙원은 내실을 다진 일본이 아시아를 서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18]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 같다. 쑹자오런을 죽인 것이 위안스카이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쑨원 범인설을 제기했고, 가네코 후미코가 죽자 관장사까지 했다. 박열과의 관계나,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동등한 공민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자기 가치관에서는 민족차별에 반대한 것 같지만, 1926년 괴문서 사건에서 니시다가 관동대학살을 조선인의 폭동에 대한 정당한 행위라고 찌라시에 쓴 것을 교정하지 않았다. 니시다의 가치관이 어떠하건 간에 니시다를 통해 정국을 흔들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기타의 이런 면모를 마츠모토 켄이치는 "될 대로 되어라주의"라고 했다.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그의 정견과 구상부터가 천황 숭배를 미개의 습속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국민에게 사회주의적 이상을 강제하기 위해 천황 숭배를 이용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의 극치였다. 여러모로 도덕 "따위" 초월해버린 것 같은 인물. 그래서 그는 당대에 마왕이라고 불렸고, 총살대의 이슬로 사라진 뒤 군국주의 정권에게도, 전후 보수 리버럴 정권에게도 터부시되었다. 이 불온한 혁명성 때문인지, 전후 우익 뿐 아니라 신좌파 학생운동가들이 기타 잇키를 읽곤 했다고 한다.

5. 매체에서

일본 뉴웨이브 영화의 주역이었던 요시다 요시시게 계엄령에서 2.26 사건과 함께 중요하게 다뤄진다.

테즈카 오사무도 기타 잇키를 다룬 「 잇키 만다라」라는 만화를 그렸다.

사상사학자 마츠모토 켄이치는 30년동안 기타를 파서 1000쪽 분량의 평전을 썼다. 읽다 보면 마츠모토 본인이 기타의 불온한 카리스마에 매료당해 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

이준익의 영화 박열 최후반부에 등장. 배우는 서동기. 아사히 신문사에 찾아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괴사진을 뿌린다. 키타라고 언급되지는 않고, 스탭롤에 이름도 "누군가"라고만 되어 있다.[19] 대중에게는 맥락없이 파시스트라고만 알려진 인물이 주인공의 조력자였음을 설명하려니 여백이 부족해서 그냥 이렇게 어물쩡 때워버린 것 같다. 기타와 박열의 유대관계의 배경을 관객을 이해하기 쉽게 제시하려면 키타가 단순한 파시스트가 아니었음을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데, 그러면 스포트라이트가 박열이 아닌 키타에게 가는 꼴이 될 수 있으니 "박열 부부"의 전기영화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들과 동시대인으로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오스기 사카에는 오스기가 일본어로 번역한 크로포트킨 책의 역자 이름으로 스쳐 지나간다.
[1] 동시대인이었던 오카와 슈메이의 평가. [2] 1970년대에 키타를 재발굴한 사상사학자 마츠모토 켄이치의 평가. 기타는 좌익으로도 우익으로도 분류될 수 없고 다만 혁명가이고 낭만주의자였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3] 그러나 훗날 기타가 처형당하자 오카와는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고, 추억보정인지 나중에는 자신과 기타 사이의 불화가 자신의 철없음에서 기인하였다고 회고하며 기타를 높이 평가하였다. [4] 도쿄대 야스다 강당이 이 사람이 기부한 돈으로 세워져서 야스다 강당이다. 전공투가 점거했던 거기 맞다. [5] 후미코와 박열이 몸을 겹치고 앉아있고 박열의 왼손이 후미코의 가슴 섶에 쑥 들어가 있다. [6]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의 육사 동기로 군인 출신이다. 늑막염으로 예편한 뒤 기타, 오카와 등의 영향을 받아 우익운동가가 되었다. 군인 출신으로 육군 내 황도파 청년장교와 재야 우익을 연결하는 "혁명 브로커" 역할을 했다. 흔히 2.26 청년장교들이 기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정확히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니시다였다. [7] 이렇게 전면이 아닌 막후에서 흑막짓을 하는 취향이었기 때문에 훗날 2.26 사건을 일으킨 청년장교들도 5.15 사건으로 니시다가 총격당했을 때 니시다의 병상에서야 기타를 처음 만났다. [8] 적어도 황도파 고위 장령 중 누군가가 직접적 오더 또는 간접적 싸인을 주었을 것이라는 음모론이다. 실제로 히로히토 분노하여 본인이 친정하겠다는 의사를 표출하기 전까지 장령들은 반란군에게 동정적이었고, 애매하게 동참 의사를 표시한 자들도 있었다. 이 음모론에 따르면 진짜 수괴는 황도파 2인자였던 마사키 진자부로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니시다의 육사 동기이자 사실상 황도파 일원이었던 히로히토의 동생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의 이름이 이후 수사나 재판에서 이상하리만치 전혀 언급되지 않은 점도 수상쩍다. [9] 청년장교들에게 책임감을 느껴서 그랬다는 설도 있고, 목숨을 구걸하면 자신의 사상적 완결성이 무너지기 때문에 그랬다는 설도 있다. [10] 아시오 광독 사건의 다나카 쇼조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인데, 실제로 키타는 다나카를 꽤 존경했다고 한다. [11]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고 패망할 때까지 "민도" 부족을 핑계로 조선에서는 헌법을 실시하지 않았다. 조선총독은 내각이 아니라 천황 직속이었기에 내각과 헌법으로부터 독립적이었다. 그래서 식민지 조선의 정치가 총독 마음대로일 수 있었던 것이다. [12] 비슷한 사상을 가진 이시와라 간지도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 이시와라는 아예 조선을 독립시키자고 했던 점이 차이. [13] 그와 사상적 교류를 하던 중국 대륙의 아나키스트들도 비슷한 제안을 한 적이 있다. [14] 즉 2030년대 [15] 그래서 기타는 처형당한 청년장교들을 동정하면서도 자신이었다면 황거로 쳐들어가 천황의 신병부터 확보했을 것이라며 그들을 혹평했다. [16] 마츠모토 켄이치는 전전 일본에서 천황이 가지고 있던 위치를 " 카리스마"였다고 규정했다. 막스 베버의 정의에 따르면 카리스마는 전근대 사회에서 비논리적으로 공동체를 휘어잡는 존재, 즉 사이비종교의 교주 같은 무엇이다. 그래서 마츠모토의 기타 평전 부제가 "천황과 대결한 카리스마"인데, 기타가 "카리스마" 천황을 증오하고 자신이 카리스마가 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17] 후쿠자와 유키치, 이토 히로부미, 무츠 무네미츠 등 번벌정권과 이타가키 다이스케로 대표되는 자유민권운동 우파세력이 융합해 형성된 일본 제국 및 전후 일본의 지배세력 [18] 그래서 기타는 "국제적 프롤레타리아"인 일본이 "국제적 자본가" 영국에게서 호주를, "국제적 지주" 러시아에게서 시베리아를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프롤레타리아면 조선은 뭔데? [19] 이름이 익명 처리된 것을 생각해 보면 기타가 아니라 기타의 하수인 노릇을 한 니시다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