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4 23:12:30

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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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위_북연_고구려.jpg

407년 ~ 436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후연 북위
별칭 북연(北燕), 동연(東燕), 황룡국(黃龍國)[1]
위치 중국 랴오닝
수도 화룡성(和龍城)
정치 체제 군주제
국성 (高) → 풍(馮)
국가원수 천왕
주요 황제 혜의제 고운
문성제 풍발
언어 중세 중국어, 선비어, 고구려
문자 한자
종교 불교, 도교, 유교
종족 한족, 고구려인, 선비족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역대 황제3. 기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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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 시대의 나라 중 하나. 요서 일대에 위치해 있었으며 후연의 북쪽 지방을 차지해서 북연이라 부른다. 모용희를 시해한 모용운(慕容雲)이 세웠다.

어느 시기부터 북연으로 봐야하는지는 이견이 많다. 고운이 시해당하고 풍발이 즉위한 시점부터 북연이라고 보기도 하고 모용보가 화룡성으로 달아나 후연의 영역이 북쪽에 해당하는 요서 지방으로 줄어든 시점부터 북연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고운의 통치 시기만 뚝 떼어 후연과 북연 사이의 대연 시기를 구별하자는 주장도 있다.

모용운은 모용보의 양자였고 모용희를 시해한 뒤 추대로 즉위했으니 후연을 계승했다고 볼 여지가 많다. 그러나 모용운은 원래 고구려 왕족인 고씨 출신이었고, 모용운 사후 즉위한 풍발과 풍홍은 둘 다 한족 출신이었으니 후연과 달리 선비족 왕조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체로 한족 왕조로 분류하는 편이지만, 창업 군주의 종족적 정체성을 강조[2]해 고구려계 왕조로 보는 관점도 있으며,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분류표에 북연의 민족을 高句麗, 으로 표기한다.

모용운은 모용씨 일족을 쫓아내고 자신도 모용씨를 버리며 본래 성이던 고씨로 되돌렸다. 이후 본인의 조부 고화가 고구려 왕족이었던 것에 근거해 종족의 연을 맺기도 했다.

고운은 즉위 뒤 휘하 군대의 반발로 시해당하고 그 뒤를 풍발이 잇는다. 이후 거란 해족 무리에게 귀선왕 직을 내리고 그들에게 교역을 허용, 농업을 권장했고 유연과도 혼인 동맹을 맺는 등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망을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북위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친선을 시도했으나 북위에 서쪽 변경 백랑성을 뺏기는 등 위협이 가시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골육상쟁 끝에 즉위한 풍홍은 북위가 아청과 고필이 이끄는 정예 기병 1만 명을 파견해 공격해오자 고구려에 밀사 양이를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고구려는 갈로 맹광의 지휘 아래 2만 대군을 북연의 수도이자 북위의 목표인 화룡성에 보냈다. 초반에는 선수를 친 친북위파가 친고구려파를 제압하고 화룡성을 접수해 성문을 열었으나 북위군은 이를 못 믿고 안 들어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때 고구려군이 화룡성에 들어가 북위군의 공격을 막고 풍홍은 지배층과 수만 백성들을 아예 고구려로 이주[3]시키는 선택을 한다. 이주 준비를 한 뒤 고구려군은 성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끝내 북위군은 화룡성의 황폐화된 빈 터만 얻었다.

고구려에 귀부한 풍홍은 그를 맞이하러 온 사신이 엄연한 천왕이었던 자신을 국왕도 아니고 군왕(郡王)으로 하대[4]하자 법도를 들먹이며 꾸짖는 것을 시작으로 의전, 월권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자 고구려 측에서 태자 풍왕인을 인질로 삼게 되고 그러자 풍홍은 나라 망명을 계획한다. 풍홍의 부탁에 응한 송나라는 사신으로 왕백구를 파견했는데 장수왕이 손수와 고구를 보내 풍홍을 그 일족과 함께 처형시켰다. 이후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전사하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보내 그 군사들을 패퇴시키고는 왕백구를 사로잡아 송나라로 보낸다. 송나라에서는 왕백구를 일단 감옥에 가뒀다가 나중에 석방[5]하였다. 풍홍은 소성제라는 시호를 받았다.

북연을 멸망시킨 북위 태무제는 훗날 화룡성에 진수한다. 모용씨는 위진남북조 말기에도 활약했고 풍씨는 북위 황실의 외척으로 세를 유지하게 된다. 중원의 변경으로서 번성했던 요서는 거란과 해족의 거점이자 고구려와 중원 여러 나라 사이 완충 지대로 바뀌며 연이라는 국호는 6세기 초에 취덕흥이 연의 부흥을 내세우며 일으킨 반란이나 오대십국시대에 유수광이 연왕을 자칭한 게 마지막이다.

2. 역대 황제

<rowcolor=#fff>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1대 경종(景宗) 혜의황제(惠懿皇帝) 고운 정시(正始) 407년 ~ 409년 407년 ~ 409년 -
추존 - 원황제(元皇帝) 풍화 - - -
추존 - 선황제(宣皇帝) 풍안 - - -
2대 태조(太祖) 문성황제(文成皇帝) 풍발 태평(太平) 409년 ~ 430년 409년 ~ 430년 장곡릉(長谷陵)
3대 - 소성황제(昭成皇帝) 풍홍 태흥(太興) 431년 ~ 436년 430년 ~ 436년 -

3. 기타

  • 백제의 인물 풍야부가 북연에서 백제로 유입된 인물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고구려로 망명한 북연 황족들은 438년 장수왕에게 제거당했는데 이 때 백제로 유입했을 것이라는 가설[출처]이다.
  • 북연과 관련된 고분으로 요녕성 북표시에 조성된 풍소불(馮素弗:?-415년)의 묘가 남아있다. 풍소불은 풍발의 동생으로, 이곳에서 초기형 등자가 유물로 출토되었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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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도 화룡성에서 유래한 별칭 [2] 주민 구성을 봐도, 선비족의 침략으로 끌려온 수많은 부여인과 고구려인들이 있었다. [3] 행렬이 80여 리나 이어진 대규모 이주였다 한다. [4] 장수왕은 풍홍을 국왕급인 연왕도 아니고 용성왕이라 불렀다. [5] 송나라도 중원의 패권을 둘러싸고 북위와 치열한 대립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척을 지지 않는 상황에서 처리한 것. 송나라는 장수왕에게 직접 북위 정벌을 위한 말 800필을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장수왕 역시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이를 수용했다. [출처] 노중국, 「百濟의 姓氏와 貴族家門의 出自」, 대구사학 89, 2007. 74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