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카와 언더 더 브리지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라스트 사무라이(아라카와 언더 더 브리지) 문서 참고하십시오.
역대 일본 아카데미상 | ||||
최우수 외국작품상 | ||||
제27회 (20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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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200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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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2006년) |
피아니스트 | → | 라스트 사무라이 | → | 밀리언 달러 베이비 |
라스트 사무라이 (2003) The Last Samur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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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px -11px" | |
장르 | <colbgcolor=white,#191919>드라마, 사극, 액션 |
감독 | 에드워드 즈윅 |
각본 |
존 로건 에드워드 즈윅 마샬 허스코비츠 |
원안 | 존 로건 |
제작 |
톰 크루즈 마이클 도븐 톤 엔젤먼 테드 필드 마셜 호스코비츠 스콧 크루프 그레이햄 라슨 찰스 멀베힐 나라하시 요코 리처드 솔로몬 파울라 와그너 빈센트 와드 에드워드 즈윅 |
출연 |
톰 크루즈 티모시 스폴 와타나베 켄 |
촬영 | 존 톨 |
편집 |
스티븐 로젠블럼 빅터 뒤브아 |
음악 | 한스 짐머 |
제작사 |
레이더 픽처스 더 배드포드 폴즈 컴퍼니 크루즈/와그너 프로덕션 |
배급사 |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
개봉일 |
2003년
11월 20일 2004년 1월 9일 |
상영 시간 | 154분 (2시간 34분) |
VOD / 스트리밍 |
카카오페이지 네이버 시리즈온 |
제작비 | 1억 4,000만 달러 |
월드 박스오피스 | $454,627,263 (최종) |
북미 박스오피스 | $111,127,263 ( 2004년 4월 8일) |
국내 상영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해외 상영 등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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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7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미술상, 의상상, 음향상 후보작2003년 개봉한 미국, 뉴질랜드, 일본 합작 영화.
일본 정부군의 초빙 교관이던 미 육군 장교가 사무라이 신분의 반란군에게 동화되어 그들의 혼을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 싸운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만듦새는 굉장히 좋은 편이나,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 와패니즘이 듬뿍 들어간 영화로서, 서양 와패니즈 영화를 꼽으라면 게이샤의 추억과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영화다.
한국에서는 SBS에서 더빙해 방영했다.
2.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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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v(38257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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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등장인물
- 사이먼 그레이엄 ( 티모시 스폴)
- 제브 겐트 ( 빌리 코놀리)
- 벤자민 버글러 ( 토니 골드윈)
- 우죠 ( 사나다 히로유키)
- 타카 ( 코유키)
- 오무라 (하라다 마사토)
- 메이지 덴노 ( 나카무라 시치노스케)
4. 줄거리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는 1876년. 남북 전쟁과 인디언 전쟁에서 최고의 지휘관으로 무공을 세웠지만, 현재는 알콜 중독자인 예비역 미합중국 육군 대위 네이든 알그렌( 톰 크루즈)은 무기상에게 고용되어 윈체스터의 소총을 팔기 위해 자신의 무용담을 관중들에게 강의하는 신세다. 그의 마음 속은 인디언 학살에 대한 심한 죄책감과 전쟁의 참상으로 인한 고통으로 멍들어 있었다.[2] 그런 그에게 옛 상관이던 벤저민 배글리 육군 대령( 토니 골드윈)이 연락해와 일본의 개화파 관료인 오무라(하라다 마사토)를 소개한다. 오무라는 알그렌에게 월당 500달러의 봉급을 조건으로 사무라이로 구성된 반란군 토벌을 위한 메이지 정부 정부 육군의 교관 겸 고문관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고 알그렌은 수락한다. 요코하마에 내려 일본의 수도인 도쿄로 향한 알그렌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영국인 신문 기자 사이먼 그레이엄(티모시 스폴)과 만나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곧 황궁에서 배글리와 함께 그레이엄의 안내에 따라 메이지 덴노( 나카무라 시치노스케)와 만남을 가진다. 천황은 유례없이 옥좌에서 내려와 직접 환영을 해준다.
그러나 훈련을 받기로 한 정부군은 한세대 전의 머스킷으로 무장한데다가 총은 쏴본 적도 없는 농민출신 오합지졸이었고[3], 설상가상으로 훈련을 다 끝내지 못한 상황에서 하세가와 장군의 지휘하에 반란군 토벌에 긴급 투입된다. 출병한 정부군은 안개가 자욱한 새벽에 전투지가 될 숲에 도착하고, 알그렌 대위는 상관인 배글리 대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같이 군사 고문으로 온 옛 부하 제브 겐트 상사(빌리 코넬리)와 함께 선두에 선다. 전투는 알그렌의 예상대로 정부군의 패배로 끝난다. 첫 실전에 우왕좌왕하던 정부군은 장궁과 일본도, 창 등 전통적인 무기로 무장한 반군에게 일방적으로 몰살당하고, 알그렌 대위는 일본인 장교에게 퇴각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리볼버와 세이버로 저항하다 부상을 당하며, 겐트 육군 상사는 갖고 있던 라이플로 저항하다 전사한다. 갑작스럽게 돌진해온 적의 말에게 부딪혀 자신의 말과 함께 쓰러진 알그렌 대위는 다시 일어나 반군과 무쌍을 찍고 고군분투 끝에 자신을 찌르려는 사무라이를 창으로 찔러 죽인다. 이를 지켜보던 반군의 수장인 카츠모토 모리츠구 영주( 와타나베 켄)는 이에 감명받아 알그렌을 생포할 것을 명하고, 이에 따라 알그렌은 포로가 된다. 사무라이들의 본거지에 도착한후 카츠모토는 알그렌에게 여기는 첩첩산중에다 곧 겨울이 올테니 탈출은 생각도 안 하는 게 좋을 거라는 말과 함께 그가 죽인 붉은 갑옷의 사무라이 히로타로의 집에 머물게 한다.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카츠모토는 알그렌에게 호의적으로 대화를 요청하고 알그렌은 자신이 죽인 히로타로가 카츠모토의 여동생인 타카의 남편, 즉 처남인 것을 알게 된다. 가족을 죽인 자신에게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려는 모습이 없음에 의아해하자 '사무라이가 전쟁터에서 훌륭한 적에게 죽는 것은 영광이며 당신은 그의 명예로운 삶을 완성시켜줬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들의 삶을 보아달라고 한다.
알그렌은 소박하고 고요하게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지며 점차 사무라이의 문화에 동화되어가고 그곳에서 자신이 죽인 히로타로의 아내 타카( 코유키)를 동경한다. 처음에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한 사무라이들도 자신들의 말과 습관, 검술 등을 열심히 습득하려는 그에게 서서히 동질감을 느끼고 사무라이의 아내 타카도 점차 알그렌에게 정을 느낀다.[4] 이후 개화파가 보낸 닌자들의 습격을 함께 막아내면서 카츠모토와 알그렌과의 관계는 더 친밀해진다.
계절이 바뀌어 눈이 녹고 길이 트이자 알그렌은 내각 회의에 참석하려는 카츠모토와 함께 도쿄로 간다. 알그렌은 그곳에서 배글리 대령을 다시 만나고, 정부군이 더 이상 사무라이들만 보면 벌벌떨던 오합지졸이 아닌 신식 소총과 신식 대포, 그리고 개틀링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정규군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한편 카츠모토는 본래 천황의 스승이기도 하여 천황을 만나 사무라이 정신으로 대표되는 전통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폐도령을 빌미로 카츠모토는 오무라에 의해 연금되고, 알그렌 대위 역시 자객들에 의해 살해될 위기에 처하나 그동안 사무라이들에게 배운 검술로 살아남는다. 이후 알그렌은 카츠모토의 아들인 노부타다(고야마다 신)와 그레이엄의 도움으로 카츠모토를 구출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부타다가 죽는다.
영지로 돌아간 둘은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고 그레이엄은 사무라이들의 모습을 사진 등을 통해 기록으로 남긴다. 알그렌은 타카의 청을 받아들여 자신이 죽였던 그 사무라이의 갑옷을 입고 사무라이들과 함께 출병한다.
오무라와 배글리 대령이 이끄는 정부군이 도착하고, 그레이엄은 언덕 위에서 사무라이들과 정부군의 전투를 지켜본다. 초반에 1,000명의 정부군은 대포로 압도하나, 500명의 반군의 함정에 걸려 백병전에 휘말리고,[5] 많은 사상자를 내고 본진으로 퇴각한다. 그러나 반군의 타격도 매우 컸고, 카츠모토와 알그렌 역시 부상을 당한다. 둘은 자신들의 패배를 직감하고 생존한 반군들을 재정비하여 최후의 기병 돌격을 가한다. 후발대 1,000명의 제국군의 포격과 일제 사격에 많은 사무라이들이 쓰러져 갔고,[6] 알그렌은 자신이 가진 일본도를 던져 제국군을 지휘하며 리볼버를 사격하던 버글러 대령을 무찌른다. 그러나 방어선을 돌파한 남은 몇십 명의 사무라이들은 개틀링 기관총들의 집중 사격으로 전부 장렬히 전사하고 카츠모토와 알그렌 역시 추가 공격으로 쓰러진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인 장교[7]는 오무라의 명령에 불복하여 사격중지 명령을 내린다. 심각한 부상을 당해 카츠모토는 같이 쓰러진 알그렌에게 지금까지 좋은 대화를 해줘서 고마웠다고 하며 천황에게 전해주려던 검을 대신 전해줄 것과 자신의 할복을 도와줄 것을 청한다. 알그렌은 그의 할복을 도와주고 정부군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일본인 장교를 따라 카츠모토를 향해 절을 하며 애도를 표한다.
이후 반군을 토벌한 오무라와 덴노는 미국 대사를 만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려 하지만 알그렌이 나타나 카츠모토가 전해주려던 검을 천황에게 바친다. 오무라의 만류에도 천황은 옥좌에서 내려와 검을 받고, '우리가 누구인지 잊어선 안된다'며 불평등 조약을 무효화시킨다. 천황은 알그렌에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 주게.(Tell me how he died.)"라고 하는데, 알그렌은 "그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I Will Tell You How He Lived.)"라고 답한다.
그레이엄의 나레이션에서 '이후 미국인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소문에는 본국으로 돌아갔다거나 부상 때문에 죽었다고 하더라'고 말하며 끝에 "나는 그 미국인이 작게나마 평화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누구나 찾지만 모두가 찾지는 못하는 평화를..."이라며 남은 사람들이 생계를 일구고 있는 영지로 알그렌이 돌아와 타카와 서로 마주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5. 평가
||<table align=center><table width=480px><bgcolor=#f6c700><tablebordercolor=#f6c700><tablebgcolor=#fff,#191919><:>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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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크리틱과 로튼 토마토같은 크리틱 리뷰에서는 평작 정도의 취급을 받았으나 IMDB를 포함한 관객 반응은 그보다 훨씬 좋은 편이다. 로저 이버트는 3.5점(4점 만점)을 주면서 본작의 영상미, 각본, 연기 등을 극찬하였다.
본작을 비판하는 반응은 엄청난 재현 오류와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이나 백인 구원자(white savior) 같은 클리셰가 뒤범벅된 점을 비판한다. 반면 본작을 긍정하는 측은 수려하고 고전적인 영상미, 서구 문명에 비판적인 주제 의식을 칭찬하는 편이다. 제국주의 시절부터 이어져 온 백인 구원자 클리셰는 대개 서구의 '문명적인' 백인이 제3세계의 '야만적인' 유색 인종을 정신과 물질 양 측으로 교화하는 것에 비하여, 본작의 주인공은 오히려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의 트라우마로 서구 문명에 깊은 회의를 가진 결과, 동아시아 원주민의 가치관에 감화된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
영상미도 상당히 뛰어난 작품인데, 후반부의 전투 이후 사무라이들의 시신 위로 벚꽃이 흩날리는 장면은 이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한스 짐머의 배경 음악도 수준급이다. 링크
5.1. 한국
정한론을 주장한 걸로 한국에 유명한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미화했다는 점 때문에 국내에서는 비판이 되기도 했다. 일부에선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를 정한론자로 보는 것은 한일을 막론하고 주류 학설이다.사실 소재를 떠나고 봐서도 거의 모든 장면이 장르 클리셰로 점철되어 있는지라 의외성이 없어서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전개'라는 평도 많았고 반면 그런 부분 때문에 볼만하다는 평가도 많았다.
5.2. 일본
일본 내에서는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것에서 보듯, 일반적으로는 호평이 압도적이다. 물론 엄청난 재현 오류 때문에 개그 소재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그 정도가 그리 심하지는 않다. 어차피 일본 내 역사 관련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도 이런 수준의 재현 오류와 판타지스러움은 별로 드문 케이스가 아니기 때문. 다만 본작의 천황이 유약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넷 우익들은 싫어하는 편이다.6. 흥행
흥행은 1억 4000만 달러를 투입하여 월드와이드 4억 6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등 꽤 성공한 편이다.북미 흥행은 1.1억달러 정도로 본전도 못건졌으나 해외에서 3.5억달러를 벌어들였는데, 일본을 배경으로 하며 동시에 노린 작품 답게 그 중 1.3억달러가 일본 내 수입일 정도로 일본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결국 이 영화는 일본 내에서 가장 성공한 영화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7. 탐구
라스트 사무라이의 배경은 1876년에서 1877년이며, 각종 영화 소개를 보면 서남전쟁을 배경으로 하며, 대체로 개혁을 하려는 메이지 정부군과 정통을 지키려는 사무라이들의 대결로 나와 있다.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무라이 우두머리라는 설정도 좀 웃기지만, 이 정도는 이야기의 진행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8] 하지만 사무라이가 천황에게 충성하고 메이지 정부가 천황을 가지고 논다는 식의 설정[9]은, 일본의 역사를 초급 수준으로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어이가 없을 것이다.
절제된 듯 복종하는 듯 보이지만 어딘가 헤픈 거 같기도 한 일본 여자의 이미지도 이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영화가 꼭 사실에 기반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영화에 대한 평가 기준의 일부일 뿐 전체인 것은 아니며, 그냥 재미로 놓고 보자면 나름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다.
7.1. 군신 관계 묘사
일본의 역사에서 막부의 쇼군은 실권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쇼군들에 짓눌려 천황은 오랫동안 실권 없는 종교의 대상이자 막부의 권위를 살려주는 얼굴마담일 뿐이었다. 이렇게 힘 없는 천황을 대정봉환(大政奉還) 이후,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의 일본으로 만든 세력은 바로 영화 속의 오무라 같은 사람들이었지 결코 사무라이가 천황에게 충성을 하지는 않았다.네이버 영화 소개를 보면 '황제와 국가에 목숨 바쳐 충성해온 사무라이의 마지막 지도자 카츠모토(켄 와타나베)'이라고 나와있는데, 어디까지나 사무라이들은 쇼군이나 다이묘에게 충성을 바쳐 왔고, 이를 뒤엎고 천황에게 권력을 넘겨 주려고 한 것이 바로 오무라 같은 신진 세력이다. 물론 조슈번이나 사쓰마번 등의 사무라이들은 존왕지사로써 활동했으나, 어쨌든 다수의 사무라이들은 막부나 다이묘에 충성했다.
즉, 어느 쪽이 천황에게 충성하는 세력인지 사실 관계가 반대로 나와 있다.
추가로, 네이버 영화 소개에는 '신 문물에 매료된 일본 제국의 젊은 황제가 신식 군대 조련을 위해 알그렌을 초빙하면서 두 사람은 운명적인 조우를 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신식 군대 조련을 위해 프랑스인 교관(톰 크루즈의 모델)을 불러 들인 곳은 막부측이며, 그래서 반정부군(구막부군)은 프랑스 군복을 입고 싸운 것이다.
차라리 서브 주인공인 카츠모토 모리츠구를 사이고 다카모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아니라 교토 출신인 완전한 가공의 사무라이로 설정했다면 천황에게 충성하는 내용이 훨씬 설득력 있게 그려졌을 것이다.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했을 뿐인 전근대 일본의 사무라이들 중에서도 교토의 사무라이들만큼은 천황에게 충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츠모토가 일으킨 반란 또한 서남전쟁이 모티브인 전쟁이 아니라 그냥 권력을 잃은 사무라이 잔존 세력의 마지막 결사 항전 정도로만 묘사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주군이 누구인지를 떠나 당시의 기득권 세력이었던 사무라이들은 영지를 잃는 등의 각종 불이익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10]
7.2. 선악 묘사
네이든 알그렌의 모티브는 무진전쟁(보신戊辰 1868~69)에 참전한 프랑스인 교관 쥘 브뤼네(Jules Brunet). 카츠모토 모리츠구의 모티브는 서남전쟁(세이난西南 1877)을 일으킨 사이고 다카모리다.사실 서남전쟁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11], 두 거물이 벌인 정쟁이 관료 출신 전면 개혁파와 하급 무사 출신 부분 개혁파 간의 충돌로까지 이어져 끝내 내란으로 번졌던 것. 작중에서는 반란군은 악인이 아니지만, 오무라는 개인의 욕심으로 철도를 놓고 농민들은 군인으로 만들어 내란진압에 강제로 개입시킨 것처럼 묘사되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선인, 악인의 이분법으로 딱 정할 수가 없다.[12] 둘 다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 개혁이라는 주제를 두고 가타부타 논쟁하다가 결국 내란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7.3. 군사 관련 묘사
작중 초반에 수구파 카츠모토가 이끄는 군대가 활과 칼만 쓰는 구식 군대라고 소개되고 농민들을 징집해 만든 신정부군은 진가사를 쓰고 전장식 총기로 무장하는데, 상식 수준의 동아시아사만 알아도 어이가 달아나는 장면이다. 일본은 센고쿠 시대부터 집단전에서 전장식 총기를 썼고 대량운용에도 능숙했으며 막부 말기부터는 이쪽이고 저쪽이고 서양의 최신 후장식 총기를 구매해서 썼다. 따라서 작중의 총포로 무장한 신식 군대와 전통적인 도검과 활만을 가진 구식 무사의 눈물겨운 격돌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부연하면 작중 배경의 10년 전인 무진전쟁을 보자면 천황을 등에 업은 정부군에서도 주력인 조슈, 사쓰마만 근대화된 양복에 스나이더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했을 뿐이지, 이후 참가한 제번들은 그냥 일본도에 야리 등의 창칼로 무장하였다. 오히려 반정부군, 즉 구막부군은 프랑스식 군복에 스펜서 총기류로 무장하였고, 구 막부를 지지하던 번 중 나가오카번은 반대로 자비로 직수입한 개틀링 기관총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무리 칼이 사무라이의 혼이니 어쩌니 해도, 막상 붙어보면 최신 서양 총기 앞에 냉병기 들고 개돌하다 죽어나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는데 끝까지 창칼만 고집하면 그야말로 바보가 아닌가? 사실 창칼을 고집하던 사무라이들은 딱히 일본의 혼을 중시해서가 아니라 전근대의 무사계급적 우월의식 때문에 평민 아시가루들이나 썼던 총포를 쓰고 싶지 않았을 뿐이며, 전쟁 초반에 일찌감치 다 죽었다. 그리고 그나마 전투전문 계급으로서의 양식이 있어서 총포류도 적극적으로 쓰는 사무라이 중에서도 옛 전장식 총기를 쓰는 데 머무른, 그러니까 역시 전근대적 계급의식 때문에 구식 '병법'을 고집했던 이들도 마찬가지로 초반에 거의 전멸했다. 무진전쟁의 첫 전투가 교토 인근 도바-후시미에서 벌어졌는데 가장 선봉에 서서 발도 돌격한 것은 산천 초목을 부르르 떨게 하던 신센구미와 미마와리구미였다. 물론 이들은 조슈-사쓰마군의 총구 앞에서 전멸하였다. 이후 조슈-사쓰마군과 구막부군은 그냥 서로 서양식 총기로 싸웠다.[13] 다만 세이난 전쟁에서의 사쓰마군이 발도 돌격으로 정부군에 큰 피해를 주기도 했었다.
하물며 무진전쟁으로부터 10년이 지난 서남전쟁에서 '전통을 지키려는 사무라이들이 창칼만 들고, 정부군 개틀링 기관총 앞으로 돌격했다?' 그딴 게 도대체 어디 있는가? 어디까지나 서남전쟁은 무진전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차지한 두 축인 조슈번과 사쓰마 번이, 언제 조선을 정벌할까 하는 시기적 차이에 의한 내전일 뿐이었다.
게다가, 사무라이들이 총포를 쓰기 싫어했다는 것도 상당수는 그 사무라이 본인 및 같은 무사 신분의 가신들 이야기지, 아시가루같이 천박한(?) 것들은 무기를 뭘 들려주든 이기면 장땡이었다. 즉 칼 냅두고 총 써서 체면 상하는 건 사무라이들끼리나 그렇고, 애초 상할 체면이 없는(?) 병사들을 총포로 무장시켜 상대측 병력을 쓸어버리는 건 사무라이의 명예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영화상으로도 사무라이들 쪽이 그다지 명분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데 일단 오무라가 부정부패한 관료라는 것은 오로지 카츠모토의 언급이나 나중에 메이지 덴노의 재산 반환하라는 일갈에서 간접적으로만 접할 수 있어 개화파가 딱히 나쁘다라는 인상 자체가 적고 사무라이들 세력은 이미 흑선내항으로 왕정 복고가 이루어진 일본에서 총쓰는 것도 거부하고 칼과 활만 고집한다. 당시 망해가던 조선이나 고작 반란군 무리에 불과한 태평천국조차 군대는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보면 이들이 이겨서 헤이안 시대스러운 전통을 되찾으면 일본에는 오히려 해악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굳이 사무라이들의 재래식 무기 사용을 강조할 거면, 사무라이들이 원거리전에서는 총포류 사용을 마다하지 않되 총탄, 포탄, 화약이 다 떨어졌거나 일본 정부군의 격렬한 공격으로 총포류를 잃어버리고 재래식 무기만 겨우 갖춘 채 도망쳤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재래식 무기를 쓰는 걸로 나오는 게 나았을 것이다.
또한 쿠사리 카타비라(鎖帷子, 쇄유자)를 입고 있어야 할 카츠모토의 부하들이 모두 수백년 전의 임진왜란에서나 나왔을 법한 당세구족을 걸치고 있다. 당세구족은 에도 시대 동안 이미 대단히 무겁고 실용성 없는 의전 및 장식용 갑옷으로 전락했다. 실제로 당세구족을 입은 에도 시대 말기 사무라이들의 사진이 남아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당세구족 차림의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당세구족을 입은 모습이었을 뿐이다.
7.4. 그 외
이처럼 역사적 재현은 사실상 무시하거나 모호하게 처리하고[14][15] 단지 시대적 배경으로만 사용하였기에 이 영화는 사극이 아닌 시대극이라 보는 것이 옳다. 일본 개화기라는 소재를 이용해 세계화에 대한 회의주의라는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감독의 의도대로 그 주제 의식의 표출은 상당히 설득력있고 성공적이었다. 즉, 사극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감상한다면 나름 괜찮은 영화라는 얘기.8. 제작 비화
- 영화에 등장하는 사찰은 엔교지. 반란군측 진영이나 마지막 대규모 전투씬은 캐나다에서 촬영했다. DVD에 수록된 코멘터리에서 감독은 자기 입으로 '일본에는 사실 이렇게 생긴 산이 없죠. 가본 분은 어색하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근데 사실 천과 지 같은 일본 영화도 캐나다에서 촬영한 거 생각하면 별 문제 없을 듯. 후지산의 모습은 뉴질랜드 타라나키산으로 대신 촬영했고, 당시 일본의 시가지는 대체로 CG로 재현했다.
- 본래 전투 장면의 엑스트라로, 좀 더 싼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고 남성 대다수가 군대에서 훈련을 받은 한국인들을 고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톰 크루즈와 각본가가 "일본인이 아니면 일본인의 정신을 담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투씬의 엑스트라는 전원 일본 태생 일본인이 맡게 되었다.[16] 영화 게이샤의 추억이 주역 게이샤 캐릭터들인 사유리[17], 하츠모모, 마메하를 중화권 배우인 장쯔이, 공리, 양자경이 각각 맡아서 큰 논란이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 톰 크루즈는 이 영화 촬영 후 일본 정부에서 훈장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 원래는 주인공에 스티븐 시걸이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 오무라 역의 하라다 마사토는 원래 영화 감독[18]이고 이 영화에는 일본측 촬영 스태프로 참가했다. 그런데 오무라 역에 적합한 '대단히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는 뚱뚱한 배우'를 찾기 힘들어서 영어를 잘 하는 그가 오무라 역도 하게 되었다.
8.1. 미국의 프로파간다설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 시기, 이라크 전쟁에 대하여 일본의 파병 반대 여론을 잠재우고 지지를 얻기 위한 심리전을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설이 있다. 다음은 일본의 공안조사청 요원 출신이 저술한 책의 내용이다.최근에는 2003년 12월 개봉되어 일본에서 영화를 초월한 '무사도 붐'을 일으킨 히트작 「라스트 사무라이」가 인지조작의 관점에서 주목된다. 분명히 이 영화가 일본에서 대미(對美) 협조 여론을 고양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심리공작 일환으로 기획했다고 지적할 만한 근거는 없다. 감독은 착상은 어떤 의미에서 「7인의 사무라이」를 본 10대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알맞은 '프로파간다 영화'로 일본 정부에 이용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즉, 이라크전이 일어나기 1년 전인 2002년 10월 8일 오사카에서 「라스트 사무라이」 제작 발표 기자회견이 있었다.(개전은 이듬해 3월 20일).
2003년 8월 28일에는 주연인 톰 크루즈가 일본으로 와서 코이즈미 총리(당시)를 관저로 예방했다. '영화를 통해 무사도 정신에 매료된 크루즈가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로 굳이 총리 예방을 희망했다. 20분 간의 환담에서 총리는 입장료를 내고 꼭 보러 가겠다며 관람을 약속했다'고 한다(같은 달 29일자 「일간 스포츠」 기사). '할리우드의 톱 배우가 한 편의 영화로 두 번이나 일본에 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생략) 빡빡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온 것은 코이즈미 총리와의 대면이라는 「트릭 플레이(trick play)」가 큰 요인인 것 같다'고도 이 신문은 보도했다. 약속대로 같은 해 12월 27일 코이즈미 총리는 영화를 관람했다(같은 달 28일자 「추니치신문」 조간 기사).
이라크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후인 같은 해 5월의 방미 때에는 '금년이 페리 제독의 일본 내항(來航)으로부터 150년이 되기 때문에 총리는 미 · 일 교류 역사를 소개한 비디오를 지참했다. 무사도와 관련해서는 「BUSHIDO(무사도의 영어식 표기)」라고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고 했다.(같은 달 24일자 「니시니혼신문」 조간 기사). 정부가 이라크 부흥지원 특별조치법안과 테러 대책 특별조치법 개정법안을 동시에 국회에 제출한 것은 같은 해 6월 13일이다.
그 이라크 부흥지원 특별조치법에 따라 자위대는 해외로 파병됐다. 2004년 2월 1일 육상 자위대 본대의 대기(隊旗) 수여식이 훗카이도 아사히가와시의 아사히 주둔지에서 코이즈미 총리, 이시바 시게루 방위청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제1차 이라크 부흥지원군' 책임자인 반쇼오 코오이치로오 대령은 식이 끝난 후 격려 모임에서 '무사도 나라의 자위대 간부답게 규율을 지키며 임무 완수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결의했다(같은 달 2일자 「오키나와 타임스」 조간 기사). 대기 수여식에서 반쇼오 대령의 발언을 들은 북부 방면대 간부는 '부하들에게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도록 권했다' (같은 달 17일자 「훗카이도 신문」 석간 기사)고 한다.
이어지는 같은 달 3일의 항공자위대 치토세 기지에서의 전송식에서 하마타 야스카즈 방위청 부장관은 '이라크 사람들을 위해, 세계의 평화를 위해, 무사도(BUSHIDO) 나라의 자위대의 기개를 보여주기 바란다' 고 발언했다(앞의 기사).
만약 이 영화 없이 당돌하게 자위대 식전(式典)에서 무사도가 강조되었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이한 인상을 주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해외 파병에 대한 찬의(贊意)를 국민에게 환기시키기는커녕 시대착오라는 느낌을 갖게 했을 것이다.
이라크 파병에 관한 국회 질의에서도 자민당 후루카와 요시히사 의원은 '일본 정신문화를 새삼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깨달았다'(같은 해 3월 25일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면서 상기된 말투로 몇 번인가 영화를 증거로 내세웠다.
주(駐)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대사관의 웹사이트에 실린 '일본의 문화외교'라는 영문 스피치 원고도 「라스트 사무라이」를 언급했다. 톰 크루즈가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무사도>가 많은 미국인들을 감동시켜 일본인 및 일본에 대한 공감을 갖게 했다고 썼다.
그리고 니토베의 <무사도>가 한 역할은 조셉 나이(Joseph S. Nye, 미국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국제정치학자)가 말하는 '소프트 파워'에 해당되며, 소프트 파워는 정부의 프로파간다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사도는 제2차 대전 당시에는 「라스트 사무라이」와는 전혀 다른 묘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명기해 두어야 할 것이다. 「너의 적, 일본을 알라(Know Your Enemy-Japan)」라는 미군의 프로파간다 영화는 서두에서 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장(GENERAL SADAO ARAKI)의 말을 빌어 '칼은 쇠의 바이블이다'고 하면서 일본인의 호전성을 강조했다.
무사도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우월한 자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싸움에서 무모한 용기를 칭찬하는 한편 더 중요한 것은 적에 대한 기습, 어둠을 타고 불시에 습격을 장려하는 모반과 배신의 기술'이라는 해설을 덧붙였다. 일본이 진주만에서 비열한 기습 공격을 했다고 말한 것이다.
'용기'와 관련해 전쟁 전에 미국은 ' 미토 코몽의 말' 이라는 것을 선전 전단에 게재해 투항을 권유했다. 이것은 니토베 저 <무사도>가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말이라고 하여 '살아야 할 때 살고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은 진정한 용기니라' 라고 기술한 것을 이용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미군은 PSYOP를 위해 <무사도>를 정독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심리공작은 대상의 논리(스토리)에 입각하면서 전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신문화'를 왜 할리우드가 가르쳐야 하는지 필자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톰 크루즈에게서 무사도의 깨우침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후루카와 의원도 지적하다시피 「라스트 사무라이」가 많은 일본인에게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미토 코몽의 말' 처럼 혹은 베트남 전쟁에서 성검 전설이라는 민족 신화를 이용한 것처럼 인지조작은 교묘하게 대상의 심리에 작용하는 것이다.
노다 히로나리, 한반도 주변 심리 첩보전, 222~226P
그러나 다음과 같이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알맞은 '프로파간다 영화'로 일본 정부에 이용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즉, 이라크전이 일어나기 1년 전인 2002년 10월 8일 오사카에서 「라스트 사무라이」 제작 발표 기자회견이 있었다.(개전은 이듬해 3월 20일).
2003년 8월 28일에는 주연인 톰 크루즈가 일본으로 와서 코이즈미 총리(당시)를 관저로 예방했다. '영화를 통해 무사도 정신에 매료된 크루즈가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로 굳이 총리 예방을 희망했다. 20분 간의 환담에서 총리는 입장료를 내고 꼭 보러 가겠다며 관람을 약속했다'고 한다(같은 달 29일자 「일간 스포츠」 기사). '할리우드의 톱 배우가 한 편의 영화로 두 번이나 일본에 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생략) 빡빡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온 것은 코이즈미 총리와의 대면이라는 「트릭 플레이(trick play)」가 큰 요인인 것 같다'고도 이 신문은 보도했다. 약속대로 같은 해 12월 27일 코이즈미 총리는 영화를 관람했다(같은 달 28일자 「추니치신문」 조간 기사).
이라크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후인 같은 해 5월의 방미 때에는 '금년이 페리 제독의 일본 내항(來航)으로부터 150년이 되기 때문에 총리는 미 · 일 교류 역사를 소개한 비디오를 지참했다. 무사도와 관련해서는 「BUSHIDO(무사도의 영어식 표기)」라고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고 했다.(같은 달 24일자 「니시니혼신문」 조간 기사). 정부가 이라크 부흥지원 특별조치법안과 테러 대책 특별조치법 개정법안을 동시에 국회에 제출한 것은 같은 해 6월 13일이다.
그 이라크 부흥지원 특별조치법에 따라 자위대는 해외로 파병됐다. 2004년 2월 1일 육상 자위대 본대의 대기(隊旗) 수여식이 훗카이도 아사히가와시의 아사히 주둔지에서 코이즈미 총리, 이시바 시게루 방위청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제1차 이라크 부흥지원군' 책임자인 반쇼오 코오이치로오 대령은 식이 끝난 후 격려 모임에서 '무사도 나라의 자위대 간부답게 규율을 지키며 임무 완수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결의했다(같은 달 2일자 「오키나와 타임스」 조간 기사). 대기 수여식에서 반쇼오 대령의 발언을 들은 북부 방면대 간부는 '부하들에게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도록 권했다' (같은 달 17일자 「훗카이도 신문」 석간 기사)고 한다.
이어지는 같은 달 3일의 항공자위대 치토세 기지에서의 전송식에서 하마타 야스카즈 방위청 부장관은 '이라크 사람들을 위해, 세계의 평화를 위해, 무사도(BUSHIDO) 나라의 자위대의 기개를 보여주기 바란다' 고 발언했다(앞의 기사).
만약 이 영화 없이 당돌하게 자위대 식전(式典)에서 무사도가 강조되었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이한 인상을 주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해외 파병에 대한 찬의(贊意)를 국민에게 환기시키기는커녕 시대착오라는 느낌을 갖게 했을 것이다.
이라크 파병에 관한 국회 질의에서도 자민당 후루카와 요시히사 의원은 '일본 정신문화를 새삼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깨달았다'(같은 해 3월 25일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면서 상기된 말투로 몇 번인가 영화를 증거로 내세웠다.
주(駐)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대사관의 웹사이트에 실린 '일본의 문화외교'라는 영문 스피치 원고도 「라스트 사무라이」를 언급했다. 톰 크루즈가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무사도>가 많은 미국인들을 감동시켜 일본인 및 일본에 대한 공감을 갖게 했다고 썼다.
그리고 니토베의 <무사도>가 한 역할은 조셉 나이(Joseph S. Nye, 미국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국제정치학자)가 말하는 '소프트 파워'에 해당되며, 소프트 파워는 정부의 프로파간다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사도는 제2차 대전 당시에는 「라스트 사무라이」와는 전혀 다른 묘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명기해 두어야 할 것이다. 「너의 적, 일본을 알라(Know Your Enemy-Japan)」라는 미군의 프로파간다 영화는 서두에서 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장(GENERAL SADAO ARAKI)의 말을 빌어 '칼은 쇠의 바이블이다'고 하면서 일본인의 호전성을 강조했다.
무사도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우월한 자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싸움에서 무모한 용기를 칭찬하는 한편 더 중요한 것은 적에 대한 기습, 어둠을 타고 불시에 습격을 장려하는 모반과 배신의 기술'이라는 해설을 덧붙였다. 일본이 진주만에서 비열한 기습 공격을 했다고 말한 것이다.
'용기'와 관련해 전쟁 전에 미국은 ' 미토 코몽의 말' 이라는 것을 선전 전단에 게재해 투항을 권유했다. 이것은 니토베 저 <무사도>가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말이라고 하여 '살아야 할 때 살고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은 진정한 용기니라' 라고 기술한 것을 이용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미군은 PSYOP를 위해 <무사도>를 정독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심리공작은 대상의 논리(스토리)에 입각하면서 전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신문화'를 왜 할리우드가 가르쳐야 하는지 필자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톰 크루즈에게서 무사도의 깨우침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후루카와 의원도 지적하다시피 「라스트 사무라이」가 많은 일본인에게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미토 코몽의 말' 처럼 혹은 베트남 전쟁에서 성검 전설이라는 민족 신화를 이용한 것처럼 인지조작은 교묘하게 대상의 심리에 작용하는 것이다.
노다 히로나리, 한반도 주변 심리 첩보전, 222~226P
9. 기타
-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에서 토탈 워: 쇼군2의 DLC 콘텐츠인 토탈 워: 쇼군2/사무라이의 몰락을 내놓았는데 마지막 전투씬의 오마주라는 말이 있다. 정확히는 배경이 서남전쟁이 아닌 무진전쟁.
- 제작진들도 이 영화를 많이 의식했는지, 인터뷰 당시에 라스트 사무라이의 한 장면을 쓰기도 했다. 물론 톰 크루즈=낫 리얼이라는 말과 함께 했다.
-
자, 제군, 개틀링 머신건을 소개합니다. 회전식 총열과 크랭크식 자동 장전 시스템으로 분당 200발을 발사하죠. 그 명성 드높은 발명가, 리처드 조던 개틀링 박사에 의해 고안된 이 포는 장전 시간 없이 지속적인 화력을 지원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당신의 무기고에 개틀링 건을 마련해 놓는다면, 단 4명으로 이루어진 팀 하나가 숙련된 80명의 라이플병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전비를 줄이면서도 군의 효율을 높일 수 있죠. 이것이 바로 미국의 독창성과 창의성의 산물, 개틀링 건입니다. 자, 여러분. 사인 할 준비 되셨습니까?[19]
실제로 해당 게임으로 19세기 군대와 일본 사무라이 군대의 대전을 재현할 수 있는데, 물론 게임이라 몇 가지 문제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면 신식군의 압승으로 끝난다.
영화의 명장면들 |
-
톰 크루즈가 말에서 내리려고 할 때 하필 말이 엑스트라의 거기에 발을 차는 장면이 있다.
- 2011년 영국에서 8살 소년이 이 영화의 자살 장면을 따라하다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
- 실제로는 전통이 아니라 외세의 무기를 쓰지 말자는 소수의 사무라이가 모티브다. 오랫동안 써온 화승총도 금할 정도의 신념(?)을 지닌 파벌이 있었지만 당연히 전멸했다. 소수지만 외국인들에겐 이 부분이 눈에 띄다보니 총을 거부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미 사용하던 화승총은 일본이 수백년 간 오랜 평화를 누렸기 때문에 장식에 가까워져서 제대로 사용되는 것도 적어서 총없이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천황은 유약했던 것은 맞지만 스승인 다카모리가 죽자 생애 유일하게 신하들에게 침묵으로 반항했다. 하지만 나중에 신하들이 꼭두각시로만 여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엄연히 천황의 후예였기에 왕으로서의 책무는 충실했다고 한다.
- 일본에서 유독 퍼져있는 루머로, <라스트 사무라이> 촬영 당시 사나다 히로유키의 검술 장면이 너무 멋있게 나와 톰 크루즈가 그의 분량을 대폭 편집해 버렸다는 썰이 있다. 그리고 이 반대급부로 와타나베 켄의 분량이 더 늘어났다는 것. 실제로 이 영화 개봉 당시 사나다는 일본내에서 영화와 드라마 양쪽으로 성공한 탑배우였던 반면[20] 와타나베는 인지도는 있지만 경력을 보면 사나다보다는 못한 이미지였는데, 일본인들은 영화속 와타나베 분량에 의아했다고 한다.
[1]
작중 톰 크루즈의 감시 및 호위역.
[2]
이 때문에 박람회에서 술에 취한 채 소총으로 원래의 표적이 아닌 일반 물건들을 향해 쏘는 기행을 보이기도 한다. 근데 그게 한발도 빗나가지 않았다는 게 굉장한 점.
[3]
참고로 이 시기 메이지 정부는 1874년 국민개병제를 실행하여 일본 육군의 주력 무기는
후장식 스나이더 소총이었다. 영화의 모델인
프랑스 육군 장교가 10년 전인 1860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케이오 2년의 군제 개혁에 참여한 인물이라
막부육군이
전장식 소총을 사용하는 것처럼 그려졌지만 당연히
재현 오류. 다음해인 1877년 일어난
세이난 전쟁에서도 일본 육군의 주력 무기는 스나이더 소총이었다.
[4]
처음 마을에 왔을 땐 신발을 벗지 않고 집안에 들어간다든가 제대로 씻질 않아 몸에서 풍기는 악취 때문에 타카를 비롯한 가족들이 눈살을 찌뿌릴 정도였지만, 이후 온천에서 목욕하는 습관을 들이고, 간단한 회화도 필사적으로 익혀 타카의 아들들과도 소통하고, 어깨 너머로 배운 검술도 점차 능숙해지며 나중엔 마을 최고의 실력자인 우죠(사나다 히로유키)도 놀랄 정도로 급성장한다.
[5]
이때 카츠모토가 예전에 알그렌이
테르모필레 전투의 관한 얘기를 해줬는데 이후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군인들은 어떻게 되었나는 질문에 완전히 몰살당했다는 알그렌에 답변에 만족했다는 듯 미소를 띄며 사무라이가 동경하는 명예로운 죽음을 향해 돌격하는 모습은 가히 명장면
[6]
교전 장면을 보면, 이미 포격으로 사무라이측 병력은 반 이상 무력화되었고, 보병들도 소총으로 사무라이들을 정말 잘 맞추어 대다수를 사살했으며, 초반의 오합지졸이던 시절과 달리 기병이 코앞까지 왔음에도 도망치는 이들이 거의 없이 일부는 총검 등으로 말과 사무라이들을 제압하기까지 하는데다, 돌파된 이후에도 뒤돌아서 사무라이들에게 계속 총격을 가하는 등 제대로 훈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개틀링 맞기 전에 이미 사무라이 대부분은 죽고 다쳤다.
[7]
알그렌이 처음 카츠모토의 군대와 교전했을 때 함께 참전했다. 패주하는 정부군 병력들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사무라이들에 맞서 분전하는 알그렌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묘사가 있다.
[8]
실제로도 영화를 보면 적을 알기 위해 영어를 배웠다는 묘사가 있긴 하다.
[9]
전자의 경우 후술할 내용처럼 교토의 사무라이들 한정으로나 그나마 말이 되며, 후자의 경우 메이지 정부가
메이지 덴노를 이용하여 권력을 휘둘렀고 메이지 덴노 본인도 전제군주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그걸 감안해도 실제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
[10]
실제 서남전쟁은 작중에 묘사된 일회성 전투와 달리 야전과 공성전 등 여러번의 전투를 치렀고 관군도 손실된 병력을 재보충해가며 '전쟁'답게 긴 시간 지속했다. 작중의 전투는 오히려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에서 여러번 일어났던 소규모의 사족 반란 토벌과 더 비슷하다.
[11]
영화에서는 사이고에서 모티브를 따온 카츠모토가 튼실하고 키 큰 체형, 오쿠보에서 모티브를 따온 오무라가 뚱뚱보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로 사이고의 체형이 뚱뚱했으며 오쿠보는 날씬했다. 1876년 시점에는 오쿠보는 내무성의 내무경으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정권의 최고 위치에 있었다. 일개 미군 대위 출신의 교관을 직접 만나서 스카웃하는 위치가 아니었다. 즉, 오무라는 오쿠보가 아니다. 그나마 모티브가 된 인물이라면 무진전쟁에서 대활약을 펼친
조슈 번의 전략의 귀재라고 불리운 오무라 마스지로를 연상할 수 있다.
[12]
우리나라 입장에서야 개혁때문에 혼란스럽고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 계급을 한국을 정벌하면서 써먹자라는 논리인 정한론 때문에 사이고 다카모리를 악인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크지만, 사실 당시에 사이고 다카모리만 정한론을 주장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 하나 때문에 내란을 일으킨 건 더더욱이 아니라서, 일본 내에서도 둘에 대한 평가는 막부가 무너지고 정치적으로 개방을 해야하는 시점에서 개혁에 관해 편파가 갈려 다툰 역사의 풍운아들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13]
이후
신센구미의 잔존 세력은 홋카이도까지 도망쳐, 그냥 평범하게 소총 들고 정부군과 싸웠다.
[14]
특히 닌자가 나오는 부분도 있다. 영화 제작 때 높으신 분들이 일본을 배경으로 하니까 반드시 닌자가 나와야 한다는 그야말로
와패니즈적인 이유로. 굳이 닌자를 등장시킬 거면 봉건제의 붕괴로 인해 사무라이들처럼 실업자로 전락한 닌자들을 일본 제국 윗선이 실업 문제 해결을 가장한
이이제이의 차원에서 이용하는 식의 좀 더 세세한 묘사가 나와야 했을 것이다.
[15]
더군다나 작 중 닌자들이 쇠뇌를 사용하는데 일본에서는 쇠뇌가 사용된 적이 거의 없다.
[16]
물론 영미권 본토(특히 미국과 캐나다)의 동아시아계 주민들을 고용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동아시아 본토인들을 고용하는 것에 비하면 임금이 많이 비싸졌을 것이다.
[17]
어린 시절은 실제 일본인 배우인
오고 스즈카가 맡았지만 말 그대로 어린 시절만 맡았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18]
일본 패망 하루전과
세키가하라(2017) 등을 연출한 중견 감독이다.
[19]
56초부터.
[20]
라스트 사무라이 개봉 일 년전 사나다는
황혼의 사무라이로 일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