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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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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NondescriptCapriciousThreateningTray, 합의사항1=한사군과 미소군정을 틀에 존치하는 대신 첨자로 추가설명, 토론주소2=AnUtopianAndLudicrousThrill, 합의사항2=대한민국의 역대 공화국들은 글자 크기를 줄여서 존치, 토론주소3=SelfishFaultyLongingTurkey, 합의사항3=부제에 강조 표현을 삽입하기, 토론주소4=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4='구한말(개화기)' 서술을 '개화기'로 서술, 토론주소5=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5='남북국시대'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6=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6='삼국시대' 시대구분 표 내 칸은 세로 3칸으로 분리하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 첫 번째 칸은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 -> 두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하며 -> 세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서술, 토론주소7=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7= '주호'는 삭제하되 -> '탐라' / '우산'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8=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8=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술은 존치하되 -> 남북한 / 임시정부 / 미군정 / 소련군정을 제외한 현대의 단체들의 이름 및 수식어는 모두 삭제한다., 토론주소9=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9=세로 열에 height를 모두 동일하게 지정하여 시각적으로 각 칸이 구별될 수 있도록 한다., 토론주소10=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10=본 틀 내 가야에 대한 첨자로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을 서술한다., 토론주소11=RealChildlikeExclusiveJewel, 합의사항11=근대시점을 개화기\, 일제강점기로 구분하고 해당 정치체로서 개화기에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링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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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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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nopad>
[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주요 민족: 예맥 · 삼한 · 한민족 }}}}}}}}}



1. 개요2. 개화기에 일어난 변화 (일)
2.1. 정치 제도적 변화2.2. 사회 문화적 변화2.3. 경제적 변화2.4. 생활 환경적 변화
3. 개화기 사건4. 개화기 인물
4.1. 한국인4.2. 외국인
5. 평가6.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

1. 개요

개화기()는 1876년 맺은 강화도 조약 후, 한국에서 서양 문물이 유입되어 종래의 전 근대 사회 질서 풍습이 타파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근대적 사회로 변화되어 가던 시기를 이르는 말이다. 개화기의 끝을 어디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보통 1910년 경술국치를 개화기의 끝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강화도 조약부터 경술국치까지 시기를 따져보면 대략 34년이다.[1] 초기 개화기(1876~1884), 정체기(1884~1894)[2] , 갑오개혁기(1894~1897), 대한제국 시기(1897~1910)[3]로 나누어진다.

일본에는 비슷한 시대로는 메이지 유신 직전 막말(幕末, 바쿠마쓰) 시대와 유신 이후 메이지 시대가 있다. 자국 문물이 난무하던 시기에 서양 문물이 물들어가는 때라서 그런지 일본에는 《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등 그때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다. 사실 한국에서도 이 시대를 다룬 작품은 생각보단 많기는 하나, 일본과는 다르게 결말이 좋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진지한 시대극이며, 가벼운 분위기로 개화기를 낭만적으로 그리는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개화기는 청나라 광서제, 선통제 시대, 유럽의 패권국 영국 빅토리아 여왕 치세 후반기 ~ 에드워드 7세 시대, 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한 미국 서부개척시대와 동시기에 해당하며, 벨 에포크 시기와 상당 부분 겹치는 기간이다. 소위 구한말과도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으니[4] 해당 문서도 참조할 것.

2. 개화기에 일어난 변화 (일)

개화기 중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때를 '개혁'이라고 해서 따로 지정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개혁들이 개화기 때 일어났다.

2.1. 정치 제도적 변화

  • 민주주의의 도입 시도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발표되었던 개혁 정강 14개조에서 급진 개화파 세력은 "대신(大臣)과 참찬(參贊)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政令)을 의결하고 반포한다."라는 문장을 실어 입헌군주제를 시도하려 했다. 1894년, 갑오개혁을 진행할 때에는 정부 사무와 왕실 사무를 각각 의정부와 궁내부로 분리하여 입헌 군주제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독립협회의 활동 기간 중에는 실제로 입헌 군주제의 실현이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다. 1896년에 설립된 독립 협회는 꾸준히 자유 민권 운동을 진행해 오며 연좌제 폐지 운동, 피고의 인권 존중 운동 등을 진행해왔다. 실제로 "칙임관은 정부에 뜻을 물어 과반수가 동의하면 임명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헌의 6조가 황제의 재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1898년 10월, 드디어 중추원 관제가 선포됨으로써 조선 최초의 의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보수파 세력이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공화정을 추종한다고 모함하여 고종이 황국협회를 동원, 독립 협회를 강제 해산시켜버렸다. 그렇게 조선은 입헌군주제의 도입은 실패하였다.[5] 민주주의 도입의 실패 원인에는 황제의 동의를 얻었다는 것에 고무된 나머지 박영효 추천 등 민중이나 황제 모두 염증을 느낄 만한 무리수를 많이 둔 것도 있다.
  • 정치 기구의 신설
    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정치 기구를 신설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1880년에 설치된 통리기무아문. 이 기구 산하에 12사를 편성하여 초기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 군제 개혁
    유럽의 군대를 모방하여 서구 무기를 도입하고 군대의 질적 향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는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그때그때 되어 가는 대로 하다가 실패. 예시로는 별기군 친군영, 훈련대가 있다.

2.2. 사회 문화적 변화

  • 태양력 도입
    기존에는 음력이 공식적인 달력이었으나 1895년 을미개혁으로 태양력(그레고리력)을 공식적인 달력으로 도입하였다. 다만 여전히 일상생활에서는 음력이 쓰이고 있었다.
  • 도량형의 서구화
    기존에 쓰던 도량형이 서구식 체계로 변화되었다. 다만 기존것을 완전히 갈아엎진 않고 일상생활에서는 병행해서 썼다.
  • 여성 운동 의식의 유입
    개화기는 초창기 페미니스트들이 서구사회에서 막 여권 운동을 하던 시절이었다. 이들에 영향을 받아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이 미약하게나마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1898년 여성인권선언인 여권통문이 발표되었다. 또한 여성교육과 애국운동을 같이 하는 신여성 운동이 일어났다. 참고글, 참고글2

2.3. 경제적 변화

개화기가 되면서 쇠퇴하는 것이다. 쇠퇴하게 된 다른 하나는 바로 왕조 그 자체.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으로 흥선대원군을 비판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개항과 통상이 군사력의 열세, 근대적 조약에 대한 무지 등의 이유로 경제 성장이나 기술 개발보다는 선진국에 의한 경제적 종속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말인즉슨, 무조건 '폐쇄 = 악, 개방 =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6]
  • 수공업의 쇠퇴
    • 일본, 청나라에서의 신문물 수입으로 인해 조선의 수공업이 망한다. 영국제 면포인 옥양목이 들어왔는데, 무명에 비해 가격에 거의 차이가 없고 품질은 훨씬 좋은 등 대량 생산된 외제 물품이 국산품의 성능을 앞질러 수공업이 거의 망하고 만다.
  • 상업의 쇠퇴
    • 원래 외국 상인들이 개항장에서 사방 10여 리까지만 드나들 수 있어, 개항장에서 시전 상인이나 보부상들이 이를 매입해 사람들에게 팔면서 이문을 남길 수 있었으나, 1882년 사방 50여 리로 늘고 1883년부터 조약을 추가로 맺어 외국 상인들이 전국 어디든 장사 권리를 얻게 되자 시전 상인과 보부상은 시장에서 밀려나고 만다. 이러한 정부의 행동에 반발해 1890년에는 시전 상인들이 연좌 시위를 하기도 했으나 정치인들이---- 늘 그렇듯이 통하지 않았다. 몇몇 악질적인 외국 상인들은 정세에 어두운 조선 사람들을 속여서 폭리를 취하거나 고리대를 하기도 해 지탄을 받았다.
  • 농촌의 몰락
    • 일본 상인들이 을 가지고 입도선매라는 장난을 쳐서 농민들은 빚더미에 나앉았다. 말 그대로 쌀이 서기도 전에 쌀을 사 간다는 것으로, 쌀을 수확하기도 전에 미리 을 받고 쌀을 수확하면 그대로 쌀을 넘기는 방식이다. 이 입도선매로 인해 당장 돈이 급한 농민이 쌀을 미리 헐값에 팔아넘겨 많은 농민들이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몰락한 농민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매도하였고 그 결과 지주 및 상인이 토지를 집중 소유하는 불건전한 경제 구도가 자리 잡았다.
    •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1883년에 맺어진 조일통상장정 제37관을 근거로 들어 방곡령을 선포했고, 방곡령 선포가 황해도 경상도 등지로 확산되었지만 일본은 아무렇지도 않게 1개월 전에 미리 대사관에 통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상금 11만 원을 뜯어내는 역관광을 시전하는 등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못했다.

2.4. 생활 환경적 변화

모두 알다시피 개화기는 서구 문물이 조선으로 쏟아 들어오는 시기였다. 다음은 개화기에 유입된 서구 문명을 정리한 것이다. 개인이 소지가 가능한 개인간 유통되는 물건들은 황학동, 인사동 골동품상이나 코베이 경매 등에서도 구입이 가능하다.

3. 개화기 사건

개화기에 일어난 사건들 목록이다.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변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의 한국사와는 비교도 안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것의 2배 정도 되는 단체들이 조직되고 그 단체 수의 2배 정도 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기록이 비교적 잘 보존되면서 공부거리가 폭증한다. 거기에 연도까지 더하면 그랜드슬램 달성.

대한제국 국권 피탈 과정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875년 9월 20일 운요호 사건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1885년 4월 18일 톈진 조약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1894년 7월 23일 갑오사변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 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1895년 4월 23일 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1896년 5월 14일 베베르-고무라 각서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1896년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 협정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1902년 1월 30일 1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중립선언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 경운궁 점령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1904년 5월 31일 대한시설강령 발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 감축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 진위대 감축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1905년 8월 12일 2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5년 8월 13일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
을사의병 발발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 퇴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해산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경술국치
( 한일병합조약)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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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화기 인물

개화기 때에 활동한 인물들.

4.1. 한국인

4.2. 외국인

5. 평가

긍정적인 면에서는, 한반도 최초로 신분 제도의 법적인 철폐가 이 때 이루어졌다. 또한 사실상 현대 문명의 초석인 서구 문물들이 한국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주체적으로 개화하려는 모습이 부족했고 일본을 비롯한 외세들에 의존하여 외세에 휘둘리는 모습도 보였다. 결국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강제병탄에 이른다.

6.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


[1] 일본이 한국을 실제로 완전히 지배한 35년 이전부터 그와 거의 비슷한 시간 만큼 침략의 손길을 뻗고 있던 것이다. [2] 다만 이 때도 근대화가 멈춘 것은 아니며, 점진적인 개혁은 꾸준히 시행되었다. [3] 1904년( 한일의정서)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시기를 국권피탈기라고도 부른다. [4] 시기상으로는 거의 동일하다. [5] 사실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도 황제의 동의를 근거로 들지만 결국 황제가 변심하여 해산시켰으니 실질적으로 가능성은 없다시피 했다. [6] 예를 들면 이집트는 근대화를 위한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열강의 농간으로 식민지로 주저앉았다. [7]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 참여. [8] 을미사변이 벌어지자 의병에 참여하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토 히로부미 살해를 계획하던 중 발각되어 음독 자결하였다. [9] 을사조약의 체결 이후 의병으로 활동했다. [10] 갑오개혁에 참여하였다. [11] 국채보상운동 주도. [12] 미국인으로 국적을 바꾼다. [13] 독립협회 1대 회장. 김재풍 등과 황제 양위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김재풍은 체포되고 그는 일본으로 망명하는 데 고종이 용서할 것처럼 하여 조선에 돌아왔는데 이 사건이 아니라 다른 사건을 트집을 잡아 죽였다 [14]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농민군을 진압한 적이 있다. [15] 을사조약에 반대한 대신이였지만, 나중에 변절하였다. [16] 을사의병 [17] 독립협회 참여 [18] 방곡령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수탈할 미곡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후 조병식은 충청 감사가 되어서 동학도들의 애절한 호소를 그냥 다 씹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이후 이리저리 좌천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탐관오리 일직선. 나름 지조있는 탐관오리 인생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직 고종의 전제 왕권 유지와 독립협회를 때려부수는 것만 목적이었던 정치 깡패 집단인 황국 협회의 간부가 되어 직접 독립 협회를 때려부수고 민권 운동을 탄압했다. 그야말로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닌 인물. [19] 한국학의 선구자 [20] 손탁호텔의 그 손탁이다. [21]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일으킨 주범 [22] 임오군란 때 살해당한 일본군 교관으로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한반도 진주에 대한 명분이 되었다. [23] 정확하게는 초반부 부분 [24] 역시 초반부 부분 애초에 1875년에 태어났다 보니 자연히 개화기를 다루는 부분이 없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