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08:54:33

일본군 패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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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2. 전선별 상황
2.1. 태평양 전선
2.1.1. 요코이 쇼이치2.1.2. 오노다 히로오2.1.3. 이광휘/나카무라 테루오2.1.4. 양칠성2.1.5. 기타
2.2. 관동군
3. 귀국 후

1.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각지에 남겨진 일본군 패잔병들을 말한다. 패잔병으로 세분하자면 포로가 된 사람과, 포로가 되지 않고 태평양 곳곳에 숨어 있던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본 문서에는 전자의 경우인 일본군/포로 문서 내용과 후자의 경우가 섞여 있다. 여기에 전자의 대표주자인 세지마 류조의 문서 일부와, 후자의 대표 주자인 마지막 황군, 오노다 히로 문서의 상당량이 발췌되어 짬뽕이 되어 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제일 잘 나가던 일본 제국 일본군 중국(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으로 중일전쟁 발발)에 이어 동남아(베트남, 홍콩, 버마, 라오스,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태평양(솔로몬제도, 파푸아뉴기니, 호주 북부)까지 지원병을 차출하여 보내 그곳을 선점하거나 인접해 있던 미국,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군대와 싸우게 했다. 그리고 결과는 다 알다시피 본토까지 밀려서 패전을 앞두고 있었다.[1] 게다가 1945년 8월에 소련까지 미국의 압력 및 동아시아에도 영향력을 넓힐 목적으로 일본을 공격하면서 승산은 더더욱 없어졌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크게 두번 맞고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천황 옥음방송으로 포츠담선언에 담겨 있는 무조건적인 항복을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항복 직후에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본토로 복귀하지 못하고 버려지다시피 낙오된 일본군들이 상당수 있었다. 물론 그 중엔 종전 소식을 못 듣고 그 자리를 우직하게 지키거나 들어도 현실부정을 외치며 미치광이처럼 날뛰기도 하였다. 근데 그럴 만도 한 게 당시 상식적인(=대본영발표 등에 세뇌되었던)일반 신민들로서는 갑자기 멀쩡하던 국가가 한순간에 패전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수 밖에 없다.[2] 오히려 미국이 자신들을 항복시키려고 만들어 퍼뜨린 심리전 가짜 뉴스 등으로 취급하고 무시한 채 계속 전투[3]하는 등 여러모로 일본 정부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꽤나 많았다.

2. 전선별 상황

2.1. 태평양 전선

태평양 전선은 후술할 관동군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그나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가장 민주적인 제도에 따르고 인권 문제에 민감했던 미군이었기에 포로들은 수용소에 있다가 전범의 경우엔 절차에 따라 사법 처리됐고, 일반 포로는 전쟁이 끝나고 본토 일본으로 귀국해 돌아갔다. 하지만 일부 패잔병들은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해당 국가에 남아 현지인들의 독립전쟁에 가담해 싸운 일도 있는데, 그 사례 중 하나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때 구 일본군 출신자들이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함께 네덜란드군과 싸우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거나 강제징집되어 인도네시아로 파견되었던 조선인이 있기도 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후술하는 양칠성이며, 그 외에도 조선인 패잔병이 있었다고 한다.

후술하는 요코이 쇼이치와 오노다 히로오가 오랫동안 홀로 살아남았다가 복귀했는데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생존한 것으로 유명하다. 요코이와 오노다의 상반된 부분을 살펴보면, 요코이는 일본 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다가 입대한 평범한 징집병 출신이었던 데에 반해, 오노다는 장교 계급인 육군 보병 소위 출신으로 일본군의 막장행각에 대해서도 옳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철저한 군국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 이전에 어떻게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극한의 상황에서의 행동방식이 철저하게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2.1.1. 요코이 쇼이치

파일:external/www.kuronowish.com/image.jpg
横井庄一
1915년 3월 31일 아이치현 아마군 사오리쵸(현 아이사이시)에서 출생. 원래 성은 야마다(山田)였으나 태어난 지 반년 후에 부모가 이혼하면서 모친 오오시카 츠루(大鹿つる, 1889~1958)의 결혼 전 성인 요코이를 쓰기 시작했다. 패전 당시 계급은 육군 오장[4]이었다. 요코이는 의 정글 속에서 스스로 만든 지하 방공호에서 28년간 은둔 생활하던 중 1972년 1월 24일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강가로 갔다가 현지의 새우잡이 어부에게 발견되었고 매스컴에 알려져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죽은 줄 알았으나, 오랜 시간 후에 귀환한 최초의 일본군이었다. 그는 "부끄럽지만 돌아왔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귀국할 때까지 벌벌 떨었다고 한다. 자신은 미군에게 잡혔다고 생각하고 조사가 끝나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에 공포감을 느꼈다고 한다. 요코이의 이 발언은 당시 일제가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로 일반인들을 얼마나 세뇌했는지를 후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일본에 막 돌아오고 다시 적응하는 것에 대해 힘들어 했으나, 다행히도 비교적 잘 적응해 고향에서 잘 살았다. 아래에 서술된 오노다 히로에 비해 철저한 생존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옷은 나무껍질로 원시인들이 입었던 누더기 수준으로 기워 만들어 입었고, 게, 생선, 나무열매, 새, 야생동물을 잡아 먹고 수렵을 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을 파서 살았다고 한다. 현지인들과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한 이유는 '포로가 되느니 자살하라'는 일본군의 막장 명령 때문에 처벌받는게 두려워서 그냥 정글 속에서 숨어버린 것이다.[5] 그는 전형적인 소시민에 불과했고, 오노다와 달리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정글에서 홀로 생활했으며 군국주의로 인해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피해자로 동정하는 사람도 꽤 많다. 요코이는 자신의 괌 생활을 바탕으로 궁핍했던 생활의 평론가로 전국을 돌며 강연했고, 이후 오노다 히로의 등장 때문인지 관심이 적어졌으나 역설적으로 오노다와 달리 지역사회 정착에 성공했으며 토기를 구워 생활하다가 1997년 9월 22일, 82세의 나이로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2.1.2. 오노다 히로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noda-young.jpg
小野田寬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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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이광휘/나카무라 테루오

李光輝/中村輝夫

1974년 12월 최후로 항복한 일본군 패잔병.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에 있는 모로타이 섬에서 다카사고 의용대[6]로 참전했던 인물로, 한족식 이름은 이광휘(1919~1979), 창씨개명한 이름은 나카무라 테루오, 대만 원주민식 이름은 스니유오(史尼育唔)이다. 그는 해안가가 거주지였던 아미(阿美)족 사람이었는데, 탈영 후 자신의 경험을 살려 정글에 오두막을 만들고 낚시, 함정, 재배 등으로 식량을 확보하면서 수십년을 버텼다[7]. 그가 거주지를 구축한 곳은 정글 안이었지만 모로타이 섬의 주민은 보통 해안가에 살아서 발견이 잘 안되었던 모양. 그러나 결국 인도네시아 군 까지 소식이 흘러가 결국 발견되기에 이른다. 이후 대만에 귀향해 살아있던 아내와 장남과 만났다고 한다. 아내는 재혼한 상태였는데 재혼 상대가 이광휘의 복귀가 기쁘고 자신은 이혼해도 상관없다고 나와서 이혼 후 다시 재결합했다고.
그는 대만 원주민 출신이었던 관계로 발견 시점에선 무국적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쿄에 귀환해 일본 국적을 얻어 연금을 받을지 고향인 대만으로 돌아갈지를 선택해야 했는데 결국 대만 귀환을 선택했는데, 그러자 그동안의 급여 계산을 대충 퉁쳐서[8] 6만 8천 엔만 줬다고. 다만 일본 정부도 최후의 양심이 있었는지 정부 및 각료 측에서 얼마 간의 위로금을 전달했고 대만 정부나 일본 민간인 등도 위로금을 모아주어서 일본측 기록 기준으로 약 8백만엔[9]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유명인사가 되어 기부를 하거나 관광 대상이 되는 등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귀환 후 골초가 된 것이 화가 되어 5년 뒤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진정한 의미에서 최후의 귀환자였지만 대만 원주민이었던 관계로 일본 쪽에서는 9개월 전에 귀환한 오노다 히로오에 비해서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에서는 그의 행적을 두고 수십 년간의 생존 생활동안 궁성요배를 잊지 않았다던지, 기미가요 애국행진곡에 반응해 잠복을 풀고 나와봤는데 일본인이 아닌걸 보고 날뛰었다던지, 일본으로의 귀환을 원했다던지, 일본의 위로금을 받아 부자가 되었지만 동족으로부터 경원시받아 폭음폭식에 골초가 되었다던지, 병상에 눕게 되자 가족과 일본에 가고 싶어했다던지 했다는 이야기를 위키에 실어놨지만 대만 쪽 위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라 믿기 어렵다. 위키의 주장을 믿는다면 부자가 되었단 말도 맞을 것이므로 안 아팠을 때 진작 갔을 것이다.

2.1.4. 양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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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기타

  • 군인이 아니라 노동자로 갔다가 살아남은 조선인의 사례도 있다. 펠렐류 섬 전투 후 10년 뒤에 1955년 5월 7일에 조선인 노동자 조병기 씨가 짐승같은 몰골로 작물을 훔치다가 섬 주민들에게 잡혔던 것. 전투 당시 펠렐류 섬에는 일본 육군 14사단 2연대를 중심으로 일본군 8,000명과 조선인 노무자 3,000명이 있었는데 최후의 생존자가 조병기 씨였다. 구출 후 그는 괌과 부산을 통해 고향인 충북 단양으로 돌아갔다. 일본 정부는 그에게 징용 기간의 밀린 임금으로 50,599엔을 지급해주었다.
  • 양칠성 외에도 군속 자격으로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선전 영화를 찍다가 일본의 패전 이후 인도네시아의 독립 운동을 지원한 허영이라는 인물의 사례도 있다.
  • 나카하라 후미오(中晴文夫) 라는 이름의 장교가 1980년대까지 필리핀의 산속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그를 찾기 위해 수색대가 조직되어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움막을 발견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고 한다.

2.2. 관동군

관동군의 경우 패망 직후 개인 자격으로 (알아서)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대다수는 도망 못 가고 소련군한테 잡혔고, 약 57만명[11]이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가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대략 6만명 정도가 사망했으며, 1956년에 일본과 소련이 국교를 회복하면서 상당수가 일본으로 귀환하나 일본 공안 당국은 이들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1990년대까지 시찰 대상으로 봤다.[12] 정작 소련의 포로 관리자들은 장교를 우대했다. 일본군/포로를 참고할 것. 이를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이 고미가와 준페이의 소설 인간의 조건으로, 히키아게샤와 돌아오던 일본군 얘기가 나온다.

이 생존자들은 일본 정부에 소송을 하고 있는데 법원에서 족족 기각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인 출신 포로들도 시베리아 억류 생활을 겪었는데, 이들도 일본 정부에 소송을 걸었으나, 마찬가지로 기각당했다. 관련 저서로 김효순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가 있다.

관련자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 유명하다.
  • 75대 총리 우노 소스케: 1945년부터 47년까지 시베리아에서 포로로 생활했다.
  • 세지마 류조: 군인, 기업인, 정치인. 포로 생활할 때 소련인들에게 아부하고 일본 포로들 사이에서 왕 노릇하던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인 '시베리아덴노(シベリア天皇)'로 불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카포와 유사한 말인 듯. 게다가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대가로 포로수용소의 사무를 돌보는 직위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편히 지냈다고 한다.
  • 고모토 다이사쿠: 황고둔 사건의 주모자. 1932년 군에서 예편했지만 일본이 패망 후에는 옌시산과 교섭하여 전범으로 체포되는 대신 공산군과의 싸움에 협력하는 대가로 그의 군사고문이 되어 염계군벌에 들어갔다. 이어진 국공내전 중 1200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 패잔병을 지휘했고, 타이위안 전투에서 인민해방군에게 패했다. 전향을 거부하다가 1955년 옥사하였는데 황고둔 사건을 회고록으로 남겼다. 자신이 황고둔 사건의 장본인임을 밝히면서도 '국가를 위한 희생'이었다며 끝까지 반성을 거부하였다.

3. 귀국 후

GHQ 일본군 장교 출신의 자위대 입대를 금지했지만 실제 조직 운영에서 문제가 나타나자 허용했다. 자위관 문서에서 각 주요 자위관 군종 지휘관을 보면 일본군 좌관( 영관)급과 위관급에서 일부가 자위대로 흡수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독일 연방군의 경우와 비슷하다. 다만 자위대의 인원은 일본군에 비해 제한적이었으므로 상당수의 일본군 출신은 그냥 민간인이 되었다.
[1] 점령지를 몽땅 잃고 본토까지 싹 밀리지는 않았다. 보르네오 섬, 수마트라 섬, 자바 섬 베트남지역, 그리고 중국 일부 지역은 종전 시 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의 향방에는 아무 영향이 없었지만. 전황이 이렇게 된 데는 태평양 전쟁 특성상 어쩔 수 없었는데 태평양 전쟁 자체가 인류가 벌인 전쟁 중 가장 넓은 영역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뿐만 아니라 넓은 육상에서만 벌인 전투가 아닌 전선의 상당수가 바다에 해당되어 육군보다는 해군, 공군, 해병대가 더 중요하고 제공권과 재해권의 장악이 절대적이었다. 전역이 너무 넓은 데다가 해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고 유럽전선 문제까지 있어서 일본이 장악한 지역 전부를 탈환 하는 건 인력과 물자 낭비가 너무 심했기에 빠르게 일본 본토를 공략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범위가 넓은데다가 사실상 해상전이라는 점에서 전쟁의 특성상 모든 점령지들을 탈환하거나 역점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2] 멀쩡한 국가가 갑자기 폭삭 정도가 아니라 천하의 대일본제국이 그런 서양놈들에게 질 리가 없다는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3] 말이 전투지, 상대할 군대가 없었으니 주변 민간인들에게 물자를 약탈하고 심하면 죽이는 등 전쟁범죄에 불과한 패악질에 불과했다. [4] 伍長, 육군 하사계급에 해당한다. [5] 포로가 되지 않으면 적어도 가족들은 무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군들 대부분은 부대가 붕괴되면 정글로 도망가면 갔지 항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6] 일본군 사상자가 늘어나자 군무원들을 부대 편성해 일선에 내보낸 것이기에 군인이라 하기엔 애매하다. [7] 일본 쪽 기록에 따르면 도야다이도라는 현지인 협력자의 도움까지 받아 수십년을 버텼는데, 도야다이도가 설득해도 그냥 자신에 대해 발설하지 말아달라고 했다는 모양. 이후 도야다이도가 병으로 죽으면서 이 협력역을 아들에게 물려줬는데, 아들이 어느날 실수로 그에 대한 정보를 주변에 이야기하면서 소식이 퍼졌다고 한다. 다만 현지 협력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대만 쪽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8] 이는 중일수교에 따라 대만-일본 수교가 끊어진데 원인이 있다. 대만은 대만인 일본병에 대한 급여를 받아내고자 했지만 대만 측의 일본인 재산 몰수 건을 물어올 우려가 있어서 지지부진하던 중에 중일수교가 달성되면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수교를 끊어버렸고, 결국 논의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고. [9] 2020년대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2400만엔 가량으로, 대충 1975년 일본 대졸자 초봉의 8년치 정도라고. [10] 이들 중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던 생존자가 나가이 케이지(永井敬司) 씨로, 2019년 말에 타계했다. 살아서 일본에 돌아온 후로는 평생 전쟁을 혐오하며 "평화헌법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1] 일본에선 65만명으로 본다. [12] 것도 그럴것이 그 시절 동안 공산주의에 감화된 이들이 꽤 많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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