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4:49:12

일본군/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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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조선지원병3.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4. 징병5. 조선군인/조선인 일본병6. 광복 그 후7. 알려진 사람들
7.1. 조선군인7.2. 일본 육군7.3. 일본 해군
8. 매체에서의 조선인 일본군
8.1. 문학작품8.2. 드라마8.3. 영화8.4. 논픽션
8.4.1. 책8.4.2. 방송 등 미디어

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에 일본군에서 복무했던 조선인에 대한 문서.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일본 육해군을 조선에 진주시켰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그들은 조선을 지배하겠단 야욕을 드러냈고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1907년엔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일으켰다. 그 후 1910년에 강제 병합을 했다. 총독부 산하의 행정기관에도 조선인을 배치하였으나, 일본군에 조선인이 입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조선인이 일본군에 있는 경우는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시에 일본에게 협조적이었던 친일파 군인들이 일본 육군으로 들어온 경우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로 임관하는 경우 밖에 없었다. 사실상 당시 일본 육사에 들어갈 수 있는 조선인은 조선 왕족 출신이거나[1] 친일파들뿐이었다. 그나마 해군은 장교는커녕 말단 수병조차 조선인을 받지 않고 있었다.[2] 1930년대 이후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관학교에 들어가 만주군이나 관동군으로 복무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당시 일본군은 일본 본토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3]

강제병합 이후 치안을 유지한단 핑계로 경찰 조직 대신에 육군 헌병을 조선 전역에 배치했다. 이때 조선총독부 헌병보조원으로 일부의 조선인을 뽑았다.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가 그랬지만 식민지의 사람들은 아주 하급직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조선인이 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공직이었기에 상당히 엘리트들이었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으로 인해 문화 통치로 전환한 조선총독부는 헌병 상당수를 일본 제국 경찰로 전직시키고, 조선인들을 보다 많이 채용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고 미국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일본군은 병력을 수급하기 위해 전쟁 말기에 조선인을 일본군에 끌고 가거나 군속( 군무원)으로 데려갔다. 이들은 내선일체를 외치며 조선인과 일본인과 대만인이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했지만[4] 실제로는 군 복무에서 철저히 분리하여 관리했으며 조선인들은 전장에서도 심각한 차별대우를 받았다.[5] 그리고 일본은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들의 친족도 징병에서 제외하였다. 전후에 전범으로 유죄를 받은 조선인은 129명이었고 이들 중 14명은 사형되었다. 도쿄 재판에 오른 A급 전범은 없다. 차별 등으로 인해 조선인이 고위직에 사실상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계 일본인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가 있긴 한데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건너간 사람이 아니라 임진왜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끌려온 조선인 도공의 후예이다. 일본군 고위급에 오른 조선인의 대다수는 대한제국군에서 편입한 친일파나 왕공족이었다. 홍사익만이 예외적인데 일본군에서 내선일체를 위해 조선 이름을 유지하는 그를 진급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전시용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2. 조선지원병

육군특별지원병 한정으로 1938년부터 1943년까지 17,664명이 동원 되었다.

3.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

1944년 1월 20일 실시되었다.

일본군이 직접 작성한 자료에는 현역병 3,457명, 제1보충병 436명을 합한 3,893명이며, 조선총독부가 제국의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4,385명인데 1·20 학병동지회도 이 수치를 따르고 있다.

당시 전문학교 포함 조선인 대학생은 약 7천명 가량인데 이중 이과생과 사범학교생을 제외하고 거의 싹쓸이로 동원하였다. 그래도 거부하는 학생들 약 400명은 징용되어 시멘트 공장 등에 배치되었다.

4. 징병

전쟁말기 병력이 대거 부족해지자 아예 징병령을 내렸다. 1944년의 징병 1기와 1945년의 징병 2기로 구분된다.

군인만 약 209,279명(한반도 내 51,948명[6], 한반도 외 157,331명)을 징병한다. 군무원도 60,668명(한반도내 12,468명, 한반도 외 48,200명)에 달한다.

참고로 징용의 경우는 한반도 내에서만 6,488,467명이며, 해외로는 1,045,962명이 끌려갔다. 그외 위안부 피해 인원도 상당하다.


5. 조선군인/조선인 일본병

약간 표현에서 기술적인 차이가 있는데 조선군인은 대한제국군에서 일본군으로 편입한 친일파나 1938년 지원병을 받기 전에 일본 정부의 특례로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을 말한다. 아래는 1910년 9월 1일에 일본군으로 편입한 대한제국군 인원이다. 전원이 육군 장교이다. 총원이 25명이다.
중장(부장) 2
소장(참장) 2
대령(정령) 1
중령(부령/2등군의장[7]) 4
소령(참령) 4
대위(정위) 8
중위(부위) 1
소위(참위/삼등사) 3

이들 외의 조선군인으로는 특례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홍사익이나 영친왕 등이 있다. 1883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가운데 일본육사에 입학한 인원은 141명이었다. 이중 메이지와 다이쇼 시기의 인원은 85명이며 이중 상당수는 육군무관학교가 폐쇄할 때 편입한 33명이다.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가운데 일본육사 출신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 편입한 자를 포함해 다섯이다. 조선인으로 일본해군병학교에 들어간 사람은 없고 일본 내지인 호적으로 들어가 입학한 경우는 일부 있다고 하나 정확한 출처는 없는 상태다. 대한민국 해군 참모총장 및 고급 장교 가운데 일본 해군 출신은 없으며,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등 소수의 만주군 인맥이 있으나 대부분 해병대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부족한 조종사 충원을 위해 해군 예과 연습생[8] 일부를 조선인에게도 개방했으나, 종전까지 임관한 사람은 없다. 예과련 출신 중 중앙정보부장이 되는 김재규가 유명한데, 그 역시 후보생으로만 있다 광복으로 임관 못하고 귀국했다. 육군항공사관학교에는 일부 입학자가 존재하는데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 중에도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과 5대 공군참모총장 김창규 두 명이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육군 헌병대에서 군속 신분으로 일하던 헌병보조원도 군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들은 일등병과 이등병 사이의 대우를 받았다. 1910년 당시에 헌병경찰의 숫자는 2,019명이었는데 이중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1,012명이었다. 헌병을 합친 전체 경찰의 숫자는 7,712명이며 이중 조선인의 숫자는 4,440명이었다. 1919년엔 헌병 대신 조선총독부경찰이 업무를 맡았다. 헌병보조원들은 일본 제국 경찰의 순사가 되었다.

조선인 일본병은 1938년부터 시작된 지원병, 1943년 시작된 학병, 1944년 시작된 징병제에 의해 일본군에 들어간 자를 말한다. 육군의 경우 1938년부터 특별지원병 제도를 시작했고 해군은 1943년부터 육전대( 해병대)와 지상근무자를 중심으로 조선인을 받았다. 고졸 이상으로서 간부를 임용하는 제도의 경우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확인할 것. 병사의 경우 보통학교 4년 졸 이상이면 일본어, 산수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조선인을 징병할 때[9] 일본 육군에서는 주로 보병 (약 2/3)으로 데려갔다. 그 외에는 치중병, 비행병, 공병, 고사포병, 산포병, 야포병으로 각각 1~5%씩 데려갔지만, 전차병, 야전중포병, 철도병, 통신병, 선박병, 항기병, 병기병으로 복무한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일본 해군 역시 주로 수병과 공작병 (각각 1/3)으로 데려갔다. 나머지는 정비병, 기관병, 목공병, 위생병, 주계병으로 복무했다.

6. 광복 그 후

조선인 일본병의 경우 육군 기준 94,978명이 징집되어 5,870명이 전사하고 89,108명이 귀환했다 (생존률 93.8%). 중국에 배치된 조선인 육군병은 15,941명 중 15,287명이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는 지역별로 천차만별이어서, 사망률이 높았던 필리핀 전역에 배치된 육군병은 3,107명 중 951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생존률 30.6%). 뉴기니 등도 마찬가지였다 (2,877명 중 1,014명 귀환, 생존률 35.2%).[10][11]

해방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 조선인들은 1948~49년까지 지속적으로 조선으로 돌아왔다. 장교나 하사관 출신 등 일부는 일본군 시절 경력을 살려 군사영어학교를 통해 신생 대한민국 국군에 투신하거나 경찰에 지원하게 된다. 학병으로 징집된 학생들은 학업을 마치고 관료나 정계에 진출해 대한민국 사회의 곳곳에 포진했으나 가난한 농어촌에서 태어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지원했던 조선지원병 출신들은 대다수가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한국의 시민이 되었다.

관동군이나 조선군에 배치된 조선인들은 1945년 8월 소련군 만주 작전에 휘말리면서 운명이 크게 바뀌게 된다. 당시 만주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은 계속되는 전황 악화 속에 주력부대가 껍데기만 남은 채 병력과 장비가 본토 방위를 위해 꾸준히 차출당하고, 그 공백은 재소집된 예비역 및 신규편성 부대 등으로 메꾸고 있어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으며, 조선군 역시 장기화되는 전쟁 속에서 정예 상비사단이었던 대다수의 전력이 뉴기니, 남양군도 방면으로 재배치되고 그 자리를 예비역이나 신규 편성 부대가 채워넣었기 때문에, 이들이 기습공격을 받고 와해되면서 하위 계급이 대부분이었던 조선인 징집병들은 대다수가 목숨을 부지했으나 소련군에 의해 일본군의 일원으로 분류되어 굴라그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48년 수립된 북한정권이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이들은 1949년을 기점으로 북한으로 송환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 당국은 사회주의적 연립 정권으로 비교적 루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에 사상재교육 후 희망자에 한해서 남측으로 보내주는 모습을 보였으나 정식 남북대화채널을 통해 인계하지 않고 각자가 38선알아서 넘어가도록 하는 바람에 남측을 선택한 대부분이 남파공작원이나 불법 월경자로 몰려 군 방첩부대에 붙잡혀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고, 이후에도 소련에 갔다왔다는 사실이 낙인으로 찍혀 반공을 국시로 하는 경직된 사회 속에서 연좌제에 걸리고 경찰과 안기부의 감시를 받는 등 6월 항쟁 직전까지 고초를 겪었다.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일부는 소련에 남아 고려인 커뮤니티로 흡수되었다.

그나마 일본 본토나 남방에 주둔중 종전을 맞은 조선인들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B, C급 전범으로 몰려 사형이나 징역형을 선고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몇년간 억류 생활을 하다가 대부분 1949년 이내로 조선으로 돌아갔다.

일본령 동인도에 주둔중 종전을 맞은 일부 조선인들은 극소수가 신생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시기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합류해 네덜란드 식민제국을 상대로 교전을 벌인다. 전북 완주군 출신 양칠성( 마인어명 코마루딘)이 그 예로, 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을 앞두고 네덜란드 식민당국에 적발되어 처형당했다. 나머지 조선인(국재만, 정수호 등)들 역시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후에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현지에서 독립영웅으로 대우를 받았다.

B, C급 전범으로 분류된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내지'로 송환이 될 때 대만인과 함께 일본으로 인도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되었다. 연합군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인 전범은 형집행을 지속하도록 했지만, 조선인과 대만인은 국적이 이미 일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예외로 분류했다.

한국인 수용자들은 이를 근거로 일본 정부에 석방을 요구했지만, 우리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일본의 최고재판소구금 당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형기를 마쳐야 한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 이들은 형기를 모두 마치고 나서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석방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재일교포 사회에 합류했다.

공식적으로 마지막으로 한국에 돌아온 일본군 소속 종군자는 남양군도 펠렐리우 섬에 징용노동자로 파견되었다가, 미군에게 붙잡히면 잔혹하게 처형당한다는 말을 믿고 전투가 끝난 뒤에도 정글속에 숨어 살다가 원주민에게 발견되어 1955년 부산항을 통해 돌아온 조병기 씨이다. 그는 펠렐리우와 , 일본을 거쳐 밀린 급여를 정산받고[13] 고향인 충청북도 단양군으로 돌아갔으며, 재혼한 아내 및 아들, 형 내외등 가족과 상봉했다고 전해진다.

광복을 맞은 지 5년도 지나지 않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고향에 돌아온 청년들은 해방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또 다시 전쟁의 비극을 겪게 된다.

해방 후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 경력을 드러내는 건 사회적인 매장을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없었기에 대다수의 생존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함구했다. 그러다가 이들이 별세하고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본 제국이나 만주국 훈장, 군복 등 과거 흔적이 나와 후손들을 경악에 빠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내 언론에 보도가 된 일본군 소속 종군자 중 마지막 생존자는 2021년 3월 26일 향년 96세로 사망한 이학래 씨이다. 그는 죽음의 철도 공사현장에 동원되어 포로감시를 맡았다는 이유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주 소집연령이었던 1910년대 후반~ 1920년대생들이 이제는 별세를 앞둔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인지라 이들이 대부분 별세하는 2020년대를 전후로 실제 당사자로서의 증언과 기억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7. 알려진 사람들

7.1. 조선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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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무: 1864-1926. 조동윤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에 편입됐다. 정미칠적,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주도했으며, 이후 의병 토벌에 진압에 앞장서기까지 했음. 경술국치 후 귀족작위 받아 떵떵거렸다. 친일파로 최종 계급은 일본군 중장.
  • 김응선: 1881-1932.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우츠노미야 타로에게 발탁되어 일본 육사로 유학했다. 그후 일본군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다가 대한제국군으로 다시 파견되어 열심히 친일질 했다. 최종계급 일본군 소장.

7.2. 일본 육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Hong_Sa-ik.jpg
  • 홍사익: 한국인 평민출신으로 유일하게 일본군 장군(중장)까지 오른 인물. 중일전쟁 시기 중국팔로군과 조선의용군과 교전(태항산 전투) 당시 일본군을 지휘했으며,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필리핀전선에서 연합군포로 수용소장 지냈다. 종전후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군대가 해산되자 일본의 육사로 유학갔다. 당시에는 대한제국의 명의로 유학을 간 것이었다. 한일합방 이후 같이 유학을 간 친구들은 독립운동 등에 투신하였으나 그는 그대로 남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자신을 영국군에서 복무하는 아일랜드인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지만 시기상조라며 거절했으며 탈영한 조선인 일본군을 숨겨주는 등 묘한 행동을 많이 했다. 일본군 장군에 있었다는점과 중일전쟁시기 조선 독립군을 상대로 교전 지휘했다는점, 그리고 2차대전 전범이었다는 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다. 최종계급 일본군 육군 중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Kim_Young-gil_%28Singer%29.jpg
  •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郎): 본명은 김영길로 평양 출신으로 일본 도야마 군악학교를 나온 뒤에 일본군 병(군악부)으로 입대했다. 음악가로 테너로 활동했다. 일본군을 독려하는 음반 등을 발표했다. 전후에 갑산파성향을 띄다 재일교포 북송에 참여해 북한으로 갔다. 그러나 북한 공연에서 오 솔레미오를 불렀다는 이유로 자본주의자로 몰려 가택연금 등을 당했다가 풀려난 뒤에 북한에서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내는 일본인인데 자녀들은 북한에서 음악을 가르친다고 한다. 이 사람이 부른 노래는 한 곡이 나무위키에도 항목이 만들어져 있는데 일본 군가 정복하자 런던이다.
  • 김달삼 : 학병 출신으로 소위 임관. 복무 중 종전을 맞고 귀국하였다. 일본군 복무 경험은 이후 4.3사건에서 김달삼의 유격대 지휘통솔력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김수환 : 학도병으로 끌려가 강제로 태평양 전선에서 싸웠다.
  • 김준엽 : 장준하와 마찬가지로 학도병에 반강제적으로 입대하여 중국에 있던 일본군 자대에 배치되었으나 곧 탈출하여 한국광복군 기지로 향한다. 마찬가지로 중국군에게 투항해 중국군 기지에서 장준하를 만났다. 광복 후 귀국까지의 행적은 장준하와 거의 동일하다.
  • 이은석 : 1938년 조선지원병 제도가 생긴 후 입대한 조선인 지원병으로, 이후 중국 전선으로 자대배치를 받아 중국에서 근무하며 1939년 산시 성에서 국민혁명군과 교전중 전사했다. 이은석의 입대와 전사는 조선인들의 일본군 입대를 홍보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는데, 사후 상등병으로 추서되었고 대대적으로 칭송되었기에 충북 옥천군의 유족들이 일제강점기 동안 전국에서 온 부의금 등으로 생활할 정도였다. 이후 가족은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지만 본인이나 유족이나 등재 기준에 미달되었기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는 못했다.
  • 장준하 : 자원입대하여[16] 중국에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4년 7월 탈영한다. 탈영 직후 국민당 유격대에 의탁했으나 그 유격대는 일본군도 아니고 중국 공산당 게릴라의 공격으로 와해되고, 어찌어찌 빠져나와 김준엽과 다른 조선인 탈영병들과 함께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임시정부가 미국 OSS와 합작 기획한 국내 진공 작전 요원으로 김준엽, 노능서 등과 함께 편입되지만, 8월 15일 광복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일반인 자격으로 쓸쓸히 귀국하였다. 이 여정을 함께 했던 광복군 장병 분들이 90대의 춘추로 몇 분 살아계셔서 KBS 역사스페셜에서 증언을 하였다.
  • 탁경현 : 조선인 카미카제 대원. 역사스페셜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를 조명한 영화가 일본에 나오자 그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주선으로 그의 고향에 추모비가 세워지자 분노한 주민들이 일본을 위해 죽은 것이 뭐가 자랑이냐고 추모비 건립을 반대하여 끝내 식이 치러지지 못했다. #

7.3. 일본 해군

  • 김기택: 전 영남대학교 총장. 입대 시점은 확실하지 않으나 입대 전에 만주흥업은행 본점에서 근무했고 한국 전쟁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경리장교로 입대했던 것을 보면 일본 해군에서도 주계과(경리, 보급, 행정을 맡는 병과) 장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종전시 대위였다.

그 이외에도 기관과 등 지원병과 중심으로 출신자가 있었다. 심지어 일본 해군 항공대 출신 전투기 조종사도 있었다. 또한 당시 상선학교(도쿄상선, 고베상선학교 등) 출신의 해기사는 의무적으로 해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되었으므로 이곳 출신 조선인들 중 군함에 탄 이들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경력을 드러내는 건 사회적인 매장을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없으므로 생존자나 후손들도 대개 공개하지 않는다.

8. 매체에서의 조선인 일본군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다룬 작품에서,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을 다룬 작품에서 많이 나온다.

8.1. 문학작품

8.2. 드라마

8.3. 영화


8.4. 논픽션

8.4.1.

  •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김효순[18], 한국) - 관동군에 징병되어 만주 작전에 참전했고 소련군에 의해 굴라그에서 혹사당했던 조선인 병사들의 애환과 배상 문제를 다룬 책.
  • 적도에 묻히다

8.4.2. 방송 등 미디어

  • 잊혀진 황군(忘れられた皇軍)(1963, 일본) - 일제 침략전쟁에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은 조선인 병사들의 삶과 이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닛폰 테레비를 통해 방송된 25분짜리 다큐멘터리이다. 극중 일본 정부는 조선인 부상자 문제에 대해서 조선은 1945년 이후 외국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조선인으로 징병된 이들 역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보상대상에서 제외했고, 한국 정부는 이들이 일본군에 부역하는 상황에서 입은 부상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연관성과 한국정부의 지원 의무가 없으며 일본 정부에 청구할 것을 못박았다.[19] 감독은 감각의 제국으로 유명한 오시마 나기사이다.
  • 궁금한 이야기 Y / 17세 소년은 왜 자살특공대가 되었나(2014.02.28 방송, 한국) - 조선인 가미카제 부대원 박동훈의 이야기를 다뤘다.
    • 그것이 알고싶다 328회 / 야스쿠니의 神이 된 소년 특공대원(2005.02.26 방송, 한국) - 만주국의 수도였던 장춘의 방송국에서 발견된 박동훈의 유언이 담긴 레코드와 그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통해 일본의 우경화와 보통국가화 문제를 지적했다.
    • NHK 클로즈업 현대 2454회 어째서 반환하지 않았는가 ~유골을 둘러싼 한일외교사~(なぜ返されなかったのか~遺骨をめぐる日韓外交史~)/ (2007.8.23 방송, 일본) - 위 그알 328회와 마찬가지로, 조선인 가미카제 부대원 박동훈 등을 포함하여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어 있는 조선인 일본군 유골들의 이야기를 취재했다. #
      "유해를 봉환하고 싶어도 일본의 입장에서는 함경북도 출신 유골들을 한국으로 봉환해야 할지 북한으로 봉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야스쿠니의 당시 변명이었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야스쿠니에 한 번 합사된 위패는 신토 교리상 다시 분리 못한다"는 논리로도 버티고 있다.[20] 그리고 2021년 현재까지도 조선인 유골은 야스쿠니에 그대로 있으며 일본은 그 때와 비교해서 훨씬 우경화되었다.
  • 그것이 알고싶다 1137회 / 화태(樺太) 에서 온 편지 - 국가는 왜 날 버렸나?(2018.09.15 방송, 한국)

[1] 당시에 일본은 왕공족으로 이들을 분류하였다. 황족보단 낮고 화족보단 높게. 간단히 줄여 이왕(李王)가라고 불렀다. [2] "육지와 달라서, 만약에 배 위에서 문제가 생기면 다 죽는다"라는 게 일본 해군 측의 입장이었다. 여기에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감안하면 일본 해군은 일본 육군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조선인들의 입대를 허용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을 수도 있다. [3] 제3세계사람들 입장에선 놀랄만한 대우였다. 대체적으로 제3세계 독재자들은 부사관인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는데 이는 구왕족이 아니면 장교가 될수 없는 유럽의 식민지배 시스템 때문이었다. 소련에 망명했다가 민주화후 귀국 황성준씨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에 유학온 3세계 혁명가 자제들과 대화중에 한국은 그런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왜 독립한거냐란 소리를 들었다. 물론 이는 일본이 착해서 그런건 아니고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라기보단 전근대적 영토점령으로 취급했으며 본토화 시키기 위한 문화작업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극단적인 친일파들은 정말로 이것을 믿고 드디어 내지인과 조선인이 평등하게 하나가 되는구나!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5] 단, 일단 입대하고 나면 계급 우선주의에 입각했기에 조선인이라 하더라도 하급자 일본인은 그들을 함부로 못대했다. 괜히 조선인들이 오장 달 때까지만 참자며 버틴 게 아니며, 실제로 오장으로 진급하여 동네로 오면 자신을 괴롭히던 주재소장(오늘날의 파출소장 내지는 지구대장) 싸대기부터 때렸다. 홍사익도 일본인 부하들이 홍사익이 조선인이라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중장이 일본인도 아니고 대한제국 황족도 아닌 평민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 외경심을 느꼈다고 한다. [6] 남한에 4만, 제주도에 각 1만명 정도. 북한의 대동강 이북은 관동군 관할이었다. [7] 군의관 별도의 계급으로 중령에 상당한다. 3등군의장은 소령. [8] 단기에 해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 약칭 예과련. [9] 관련 문헌은 정안기 (pdf 논문 본문) 및 엑셀 보충 자료를 참조할 것. [10] 일본군의 병력동원 규모와 추이 [11] 참고로 조선인 지원병들은 조선에 주둔한 조선군 소속 19, 20사단에 배치하는게 원칙이었는데, 태평양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장이 넓어지며 정예 상비사단이었던 저 사단들을 필리핀이나 뉴기니 쪽으로 파병하면서 저렇게 된 것이다. [12] 이와 반대로 일본 후생성조선인은 1945년 8월 15일 이후로는 외국인으로 분류된다는 논리로 일본군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은 조선인들이 낸 피해보상 청구를 족족 기각하다가 1999년이 되어서야 보상을 시작했다. [13] 이때는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대일청구권이 일괄 청산되기 전이었다. [14] 왕, 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황족과 일본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친왕 이은 경우, 태어나자마자 아주 어린시절부터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15] 1950년 전후로 한국내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한 이승만대통령의 입김으로 그는 정상적 입국절차를 받지 못해 결국 해방 후에도 한동안 일본에 지냈다. 하지만 그는 육군 장교자격으로 2.26사건의 진압부대의 일원이었을 뿐, 단 한차례도 제대로 된 교전, 특히 독립군전선 혹은 중국전선을 밟은 적 조차 없다. 또한 그는 자신의 출신을 계속 잊지 않고 1910 경술국치이후 1945 8.15 광복까지의 35년간 한국어를 잊지 않아 1945년 이후 주변의 한국인들과는 유창한 한국어로 소통했다고 한다. 참고로, 1945년 전까지 그의 주변에는 한국인이 없어 한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35년간 일본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편으로는 계속 한국어를 되뇌었다는 것이다. [16] 고향친구 최기일은 말리는거 뿌리치고 자원 입대했다고 말했고 본인 자서전 돌배게에서도 부모님이 걱정 되었다고 이유를 들면서도 자원했음은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 뒷배경이 있었는데, 그의 미망인 김희숙 여사가 정신대로 징발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자원입대하게 된 것이다. <출처 : 장준하, 묻지못한 진실, 돌베개, 고상만 저. p38> [17] 영화 속에서 촌장은 나환자촌의 환자들을 배신해 학살하고 유일한 생존자인 무당마저도 동굴에 가두고 산 채로 태워죽이는 등 온갖 패악을 저지으면서 본인이 부리는 패악을 "살려고 지은 죄는 용서받는다."라는 말로 합리화한다. 주인공 부자와의 약속을 배신한 것도, 한센병 환자들과 무당을 죽여버리고 마을을 차지한 것도, 일본군에 입대한 것도 본인이 살기 위해 한 행동이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 [18] 1974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19] 단 영화의 촬영시기는 한일국교정상화가 실시되기 전이었고 대일청구권등 보상논의 역시 이루어지기 이전이었으며 당시의 한국 경제 역시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이 실시되기 이전의 참담한 수준이었고 당시의 한국 정부는 한국 전쟁당시 부상당한 참전 용사들의 복지 문제도 손을 놓고 있던 실정이었다. 한일기본조약체결 이전 한국인들의 반일감정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20] 여담으로 당시 2007년 여름은 그 해 7월 31일 미국 하원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일본군 강제위안부 규탄 결의안(H.Res.131, Jul.31.2007.)이 통과되어 있어 일본이 약간 코너에 몰려 있던 시기였다. 강제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미국 하원의회에서 직접 증언을 하였다. 시오자키 당시 일본국 관방장관은 유감표명 성명을 냈다. 그러나 해당 방송 회차에서는 유골 문제만 다루고 당시 이슈이던 강제위안부 문제는 묵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