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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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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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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으로 쓴 진( )[2]
파일:진나라 지도.png
기원전 210년의 강역
기원전 9세기~기원전 206년
(통일왕조) 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
위치 감숙 섬서 → 중국 전역
수도 진읍(秦邑) 옹(雍) → 약양(櫟陽)[3] 함양(BC 350)[4]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영(嬴)
국가 원수 백작 황제[5]
주요 군주 목공 임호
효공 거량
혜문왕 사
소양왕 직
시황제 정
주요 섭정 선태후
여불위
주요 재상 상앙
위염
범저
이사
언어 상고한어
문자 금문 전서
종교 중국 토속 종교[6]
면적 2,300,000km² (기원전 220년 기준)[7]
정치 이념 법가[8]
종족 화하족, 융족
통화 포폐(춘추전국시대)
반량전(통일 이후)
성립 전 주나라
멸망 후 한나라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1. 개요2. 역사3. 역대 군주4. 기타5. 매체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중국 서주- 동주 교체기부터 존재해왔던 제후국이자 중화제국의 첫 통일 대제국으로 전국칠웅 중 하나로서 천하일통을 달성했다. 현대 중국어 발음은 Qin(친).[9]

동주의 낙읍 천도 이후 중원이 여러 개의 제후국으로 갈라져있었던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나라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으로 유명하다. 춘추전국시대의 전반기라고 할 수 있는 춘추시대에 공존했던 문공의 진나라(晉)[10]나 훗날 중국 삼국시대를 재통일하는 사마씨의 진나라(晉)와는 다른 나라다.

중국 서부에 있었던 나라로, 척박한 땅과 야만적인 국가란 이유로 무시당했지만 중원의 인재들을 받아 들여 문화수준과 국력의 수준을 꾸준히 신장시켰으며 더불어 무력으로 주변국을 강하게 압박했고, 진시황 대에 이르러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후 만리장성을 쌓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하나된 세계로써 중국의 기틀을 다졌지만 진시황 바로 이후엔 2세 황제 호해에 이르러 전국은 반란으로 분할되고, 진왕 자영대에 이르러 단 3대 만에 제후국으로 내려앉아 멸망하고 말았다.

국색은 검은색이었다. 황제의 의복, 관리들의 관복, 군복, 군기의 색을 검은색으로 통일했고 심지어는 백성들도 검수(黔首)라고 불렀다고 한다.[11]

국호 '진'이 서양권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이름인 시나(Sina)[12] 차이나(China)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13]
[clearfix]

2. 역사


2.1. 서주

사기》에 의하면 진은 상나라 주왕 제신의 시중을 든 간신 오래의 후예라고 한다. 오래의 아버지는 비렴인데 비렴에게는 오래 말고도 계승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계승의 후손 중에 조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보는 말을 잘 몰아 서주 목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목왕이 기, 온, 화류, 녹이라는 명마를 얻어 서쪽으로 순수를 떠났는데 너무나 즐거워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서언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보는 목왕의 수레를 끌고 하루에 1,000리를 달려 주로 돌아와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니 목왕은 조성을 조보에게 분봉했고, 조보는 이때부터 조씨가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오래의 자손들도 조성에 살며 조씨로 살고 있었는데, 기원전 900년 즈음에 서주의 효왕을 시중들고 있었던 비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효왕이
"옛날 백예가 순임금을 위해 가축을 잘 번식시켜 봉토와 영성(嬴姓)을 받았는데 그 후손이 다시 가축을 잘 관리하니 땅을 주고 부용국으로 삼는다."
라고 하여 영(嬴)이라는 성(姓), 조(趙)라는 씨(氏)를 받아 영성의 제사를 잇고, 대부가 되어 진(秦)읍에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2.2. 춘추시대

통일 이전에는 제후국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변방국으로 시작했다. 진이 최초로 흥한 장소는 현재의 간쑤성 진정진(秦亭鎭) 부근이며 현재 리 현 일대에서는 진의 선조의 능묘라고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춘추시대에는 수도가 옹[14]이었으나 전국시대에는 함양[15]이 수도가 되었다. 본디 시작은 서융의 변방국이자 소국이었으나, 기원전 770년에 주나라 견융의 침략으로 서주 유왕이 살해당하고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진양공이 진(晉)과 함께 가장 먼저 달려와 동주 평왕을 호위한 공로로 백작위를 제수받으면서 제후의 반열에 오르고, 융족이 점령한 주나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게 된다. 이후 진양공은 영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견융족을 대거 공격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수많은 군주들의 노력으로 끝내 옹주를 제패함으로써 실질적인 천승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를 서융지패라고 하는데, 옹주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진나라 국군(國君)이 몇 명이나 전쟁터에서 사망한다. 결코 그저 거저먹은 게 아닌 것이다.[16]

진나라는 춘추전국시대에 들어가는 동시에 제후가 되었지만 풍속적으로는 중원 제후국과 크게 달라 야만스러운 나라로 여겨졌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진나라 제후들은 주로 서융과 항쟁함과 동시에 그들을 포섭해가며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의 정비 등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갔다. 전국시대의 순자는 진나라를 방문하고 방문기를 남겼는데, 그 묘사를 보면 개미굴의 느낌을 준다. 순자가 감탄한 점은 엄격하게 집행되는 법률 아래서 각 백성들이 불평없이 각자 맡은 일을 척척 한다는 것인데, 순자는 어디까지나 유자였기 때문에 순자가 든 유일한 진나라의 단점은 유학자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민족적으로 봐도 진나라의 반은 서융의 이민족이었으며[17] 이렇게 이민족과의 부단한 투쟁 및 사방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나라에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목공 시절에는 오랜 전란에 시달린 중원에서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그중 백리해와 건숙을 등용하여 국력을 착실하게 키워나갔고, 서쪽에 치우친 위치 때문에 중원의 제후국들에게는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서융에서 신하로 일하던 유여를 포섭하여 그가 건의한 방법으로 서융의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켜 서방의 패자로 군림했다. 목공은 동쪽 진(晉)나라의 내전에 두 차례나 개입하여, 결국 진 혜공을 사로잡은 후 영토를 뺏고 후에 그의 아들인 진 회공이 진(秦)나라를 거스르니 폐위시키고 진 문공(晉文公)을 연상의 사위로 맞아들인 후 진(晉)나라 군주로 세워 친선 관계를 유지한다. 이후 진(晉)나라와 힘을 합하여 반역으로 쫓겨난 동주 양왕을 복권시켜 주 왕실을 보위하는 등 춘추시대 최고의 리즈 시절을 맞는다.

그러나 중원 진출을 노리는 진(秦)나라는 중원으로의 길목에 위치한 진(晉)과는 자웅을 가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미 패자인 진 문공의 사후, 진(晉)과 진(秦)은 적대 관계로 돌아섰고, 이 대립 관계는 진(晉)이 멸망하고 삼진(三晉)으로 불리는 , , 이 일어선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진(晉)의 국력이 유지되는 동안 진(秦)나라는 중원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18] 진 목공 시절 얻었던 하서 지방을 다시 빼앗김으로 인해 하동과 하서 지방의 영유권, 즉 황하 유역을 진(晉)나라가 꽉 쥐고 있었고, 따라서 영토는 위수 지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진 문공 사후 벌어진 효산 전투에서는 전군이 몰살당하는 등 진(秦)나라 입장에서는 대참사를 겪었으며 3년 뒤에 벌어진 전투에서 또 졌고, 이후 마지막으로 벌어진 복수전도 배수진을 친 진(秦)군의 예기를 피해 진(晉)군이 한 발 물러난 듯한 기록의 전투라 사실상 정신승리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진 목공도 미개한 관습이었던 순장을 없애지는 못해 진 목공 사후 대규모의 순장으로 인해 인적 인프라를 상당수 상실하게 된다.

그럼에도 훗날 관중이라고 불리는[19] 위수 인근의 비옥한 황토 지대는 어디 가는게 아니었고 외부의 침략도 외부로의 침공도 없이 수백 년 동안[20] 진(秦)은 착실히 국력을 쌓아나간다.

참고로 훗날 대립하게 되는 삼진 왕실도 영성 조씨로 시조가 조보였다. 조보의 장남의 후손이 진나라, 조보의 차남의 후손이 조나라였다.[21]

2.3. 전국시대

이렇게 풍부한 진나라의 잠재력에 불을 붙인 촉매는 공손앙(혹은 위앙 또는 상앙)의 개혁이었다. 공손앙은 (衛)나라 사람으로 법가의 선두주자였다. 공손앙이 법치를 이념으로 진나라를 뜯어고쳐 최강대국으로 만들어놓았고, 이를 바탕으로 후에 범수가 '원교근공'을 기치로 패도를 쌓아나갔던 것이다.

진이 황하 유역에 진출하는 데 가장 처음 방해가 되던 나라는 위나라였다. 최전선인 하서 지방을 오기가 점유하고 있었던 시절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으나, 오기가 없는 위나라는 그때 그 시절의 위나라가 아니었고, 변법 이후의 진나라도 그때 그 시절의 진나라가 아니었다.

당시 위나라는 위문후, 위무후 시절의 팽창 정책이 한계점을 맞이한 데다가, 중국 한가운데 위치한 영토의 특성상 사방 팔방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그 혼란함을 놓칠 진나라가 아니었다. 기원전 342년 마릉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위나라의 동방 정책은 종언을 고했고, 기원전 341년 진나라는 상앙이 위나라 공자를 포로로 잡는 계략을 성공시켜 하서 지방에 상당한 영토를 얻어낸다.

결국 기원전 330년 숙원이었던 하서의 영유권을 공고히 하게 된다. 이후로도 위나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해 옛 수도인 안읍을 포함한 하동 지방까지 정복하고, 이렇게 얻어낸 황하 유역과 진령산맥 사이에 설치하게 된 것이 바로 함곡관이다.

진순신의 《이야기 중국사》에서는 기원전 316년의 파촉 정벌이 중국 통일에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진(晉)이 분열된 이후 국토와 인구 등을 따져 전국 칠웅 중 양대 강국은 진과 초였는데, 두 강국 중 '천부(天府)의 땅'이라 불릴 정도로 생산력이 높았던 파촉 땅을 먼저 먹는 국가가 중국을 통일할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초나라가 지도층 간의 내분에 휩싸여 있는 동안 진의 명장 사마착이 파촉을 점령해 초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에 서게 된다. 파촉 땅의 생산력에 더해 장강의 상류를 점령함으로써 군사적으로도 초나라에 대해 우위를 쥐게 된 것이다.

다만 진나라가 통일된 시점과 파촉을 개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도강언이 완공된 시점은 27년밖에 되지 않았고, 파촉이 완전히 천부지국으로서의 명성을 떨치는 것은 한나라 때부터였다. 아직 파촉의 인구는 많지 않았다. 진나라의 가장 핵심적인 지역은 결국 관중이었다. 방어와 진격 모두에 능한 그 천혜의 자연환경은 후대의 한고조까지 승리하도록 만들어 준다.

이미 진은 전국시대의 최강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고, 전국시대에 들어오고 나서는 진나라의 위력 앞에 감히 대적할 나라가 없어졌다. 남방의 강국 초나라도 단독으로는 진나라에게 대적할 수 없음이 단양 및 남전 전투의 대패로 증명되었고, 다른 국가들은 연합해서 진에게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특히 기원전 296년에 있었던 합종군에 대한 보복적인 성격이 강했던 이궐 전투에서 한-위 연합군 240,000명이 진나라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면서[22] 사실상 합종이 아니면 진나라를 막을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

이미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범수를 등용한 소양왕 때는 원교근공책을 채택해 힘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황하 유역의 한나라 영토를 지속적으로 잠식해 황하 이남과 이북의 영토를 분단시켜 장평대전을 유발한다. 결국 장평대전에서 백기(趙)나라의 대장 조괄을 깨부수고 조군 400,000명을 생매장시키기도 했다.

효문왕과 장양왕 시절에는 조금 주춤했다고 할 수 있지만 진왕 정이 등장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승상 이사를 발굴하며, 한비자의 의견을 중용하는 등의 혁신을 통해 진나라는 전국시대의 최강국을 유지했다.

2.3.1. 진의 중국 통일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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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국

파일:external/www.startour.pe.kr/%EC%A7%84%EC%8B%9C%ED%99%A9.jpg
시황제
진왕 정은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주변국을 차례차례 무너뜨렸고, 결국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하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진왕 정은 왕의 지위보다 높은 황제에 올랐으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므로 진시황, 즉 시황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외부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각 지방별로 다르던 문자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하나된 세계로써 중국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진시황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또 폭압적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부작용이 심했고, 진나라 이외에 옛 6국 출신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여 진 제국은 이미 통일 직후부터 내부에서 곪아들어가기 시작했다.

전국시대부터 이어진 거대한 궁궐인 함양궁보다도 더 거대한 아방궁을 지었다는 소리도 있다. 다만, 아방궁은 실존 자체는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clearfix]

2.5. 멸망

시황제가 붕어한 이후 진나라는 2세 황제 호해, 진왕 자영을 끝으로 통일 이후 15년 만에 멸망한다.[23]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왕조임과 동시에 가장 단명한 통일왕조이기도 하다.[24]

시황제는 흉노를 막고자 만리장성의 축조에 들어갔고, 자기 무덤을 지으며, 도로를 만드는 등 거대하고 무리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 민심을 잃고 말았다.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장남 부소를 제치고 호해를 황제로 옹립했는데, 조고는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온갖 악행을 벌였고 호해는 조고에게 정사를 맡긴채 자신은 유흥에 빠지면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트렸다.

결국 기원전 209년 진승 오광이 반란을 일으켜 장초라는 나라를 세웠다. 진승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진나라 전역을 장악했고, 진승의 부하들에 의해 6국이 부활했으며 심지어 주문이 이끄는 무리가 함곡관 앞까지 진군하기도 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소부 장한이 나서 주문의 군대를 쳐부수고 장초를 짓밟은 뒤 되살아난 6국을 하나하나 제압했지만 초나라 출신 항우에 의해 막혔다. 장한의 군대는 기원전 207년 거록대전에서 항우에게 대패했고, 장한은 은허에서 항우에게 항복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이세황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오로지 환관 조고하고만 의논하였다. 황제에게 간언한 풍거질, 이사, 풍겁은 도리어 체포당했고 모두 죽었다. 조고는 절대권력을 손에 쥐면서 황제의 눈과 귀를 가려 진나라가 몰락하는데 크게 일조했다.[25]

그러나 장한이 패배하고, 6국이 부활하여 함곡관 동쪽이 진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났으며, 항우와 유방을 비롯한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로 몰려오자 조고도 더 이상 진실을 가릴 수 없게 되었다. 특히 패공 유방은 수만 명을 이끌고 진나라의 또 다른 관문인 무관(武關)을 함락시켜 수도 함양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조고는 황제가 자신을 질책할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았으며, 호해는 "경수의 신이 괴상한 일을 일으킨다"는 해몽을 듣고 망이궁에서 경수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도적과 관련된 일을 의논하기 위해 조고에게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조고는 겁이나 나머지 동생 조성, 사위 염락과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 그들은 황제를 폐하고 공자 을 새 황제로 세우려 했으며, 염락이 행동대장을 맡아 천 명에 달하는 병졸을 이끌고 망이궁을 공격했다. 그들은 막는 자들을 가차없이 베어낸 뒤 이세황제의 눈앞에 나타났고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어 싸우지 못했다. 반란군에게 붙잡힌 이세황제는 염락에게 애걸하면서 끝내는 평민으로 살 테니 부디 살려달라고 말했지만 염락은 듣지 않았다. 결국 이세황제는 자결을 택하고, 조고는 공자 영을 옹립하면서 '제'의 호칭이 6국이 독립하고 영토가 축소된 현실과 맞지 않는다며 군주의 호칭을 '왕'으로 되돌린다. 그렇게 진 제국은 단 2대 15년 만에 끝나고 왕국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자영 또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고, 사전에 두 아들과 조고를 제거할 계략을 모의한 뒤 병을 핑계로 종묘에 제사를 드리러 나가지 않았다. 애가 탄 조고가 직접 자영을 찾아가자 자영은 재궁에서 조고를 살해하고, 그의 일족 또한 모조리 멸했다. 그렇게 진나라를 좀먹던 조고 일파는 파멸했지만 진나라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었다. 유방이 진군을 격파한 끝에 패상에 이른 것이다. 자영은 즉위하고 불과 46일만에 유방에게 투항을 택했고, 스스로 죄인처럼 목에 끈을 묶으며 전국옥새를 가지고 지도(軹道) 부근에서 유방에게 항복했다. 유방은 자영의 항복을 받아주고 주위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으며, 진나라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군대를 함양 밖으로 물리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대체할 <약법 3장>을 반포하여 민심을 다독였다.

그러나 뒤늦게 관중에 입성한 항우가 자영을 죽이고 이듬해에 수도 함양을 불태워 진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진나라 땅은 18제후왕 분봉에 의해 항우에 투항한 장한, 사마흔, 동예와 유방이 각각 옹왕, 새왕, 적왕, 한왕이 되어 다스리게 되었지만, 분봉으로부터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유방이 군사를 일으켜 옹, 새, 적 세 나라를 멸하고 진나라의 영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리고 진의 땅을 기반으로 해서 중국 최강의 패왕 항우에 대적하니, 이것이 바로 초한전쟁이고 결국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중화제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다룬 소설이 바로 초한지이다.[26]

3. 역대 군주

파일:진 전서체.png
진(秦)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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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 -
비자 진후 공백 진중
추존 국군 초대 국군 제2대 국군 제3대 국군
장공 양공 문공 헌공
제4대 국군 제5대 국군 제6대 국군 제7대 국군
출자 무공 덕공 선공
제8대 국군 제9대 국군 제10대 국군 제11대 국군
성공 목공 강공 공공
제12대 국군 제13대 국군 제14대 국군 제15대 국군
환공 경공 애공 혜공
제16대 국군 제17대 국군 제18대 국군 제19대 국군
도공 여공공 조공 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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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국군 제25대 국군 초대 국왕 제2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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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국왕 제4대 국왕 제5대 국왕 제6대 국왕→초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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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 이전의 군주들의 정확한 계보나 재위 기간은 정확하게 알려진 게 없다. 기원전 841년경 주나라에서 국인(國人)의 반란이 일어나 많은 사료들이 없어져서 《 사기》에서도 기원전 841년부터 연표를 작성하고 있다. 이른바 ' 공화 원년'이다.
대수 시호/제호(왕호) 성명 재위연수 재위 기간
국군 국왕 황제
- - - - 비자(非子) ? 기원전 ???년 ~ 기원전 858년
- - - 진후(秦侯) ? 10년 기원전 857년 ~ 기원전 848년
- - - 공백(公伯) ? 3년 기원전 847년 ~ 기원전 845년
- - - 진중(秦仲) ? 23년 기원전 844년 ~ 기원전 822년
- - - 장공(莊公) 영기(嬴其) 44년 기원전 821년 ~ 기원전 778년
01 - - 양공(襄公)[27] ? 12년 기원전 777년 ~ 기원전 766년
02 - - 문공(文公) ? 50년 기원전 765년 ~ 기원전 716년
03 - - 헌공(憲公) ? 12년 기원전 715년 ~ 기원전 704년
04 - - 출자(出子)[28] 영만(嬴曼) 6년 기원전 703년 ~ 기원전 698년
05 - - 무공(武公) ? 20년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78년
06 - - 덕공(德公) ? 2년 기원전 677년 ~ 기원전 676년
07 - - 선공(宣公) ? 12년 기원전 675년 ~ 기원전 664년
08 - - 성공(成公) ? 4년 기원전 663년 ~ 기원전 660년
09 - - 목공(穆公) 영임호(嬴任好) 39년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21년
10 - - 강공(康公) 영앵(嬴罃) 12년 기원전 620년 ~ 기원전 609년
11 - - 공공(共公) 영도 / 영화 / 영가[29] 5년 기원전 608년 ~ 기원전 604년
12 - - 환공(桓公) 영영(嬴榮) 27년 기원전 603년 ~ 기원전 577년
13 - - 경공(景公) 영석(嬴石) 40년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37년
14 - - 애공(哀公) ? 36년 기원전 536년 ~ 기원전 501년
15 - - 혜공(惠公) ? 10년 기원전 500년 ~ 기원전 491년
16 - - 도공(悼公) ? 14년 기원전 490년 ~ 기원전 477년
17 - - 여공공(厲共公) ? 34년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43년
18 - - 조공(躁公) ? 14년 기원전 442년 ~ 기원전 429년
19 - - 회공(懷公) ? 4년 기원전 428년 ~ 기원전 425년
20 - - 영공(靈公) ? 10년 기원전 424년 ~ 기원전 415년
21 - - 간공(簡公) 영도자(嬴悼子) 15년 기원전 414년 ~ 기원전 400년
22 - - 혜공(惠公) ? 13년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23 - - 출공(出公)[30] ? 2년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5년
24 - - 헌공(獻公) 영연 / 영사습(嬴連/嬴師隰)[31] 23년 기원전 384년 ~ 기원전 362년
25 - - 효공(孝公) 영거량(嬴渠梁) 24년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년
26 1 - 혜문왕(惠文王) 영사(嬴駟) 27년 기원전 337년 ~ 기원전 311년
27 2 - 무왕(武王) 영탕(嬴蕩) 4년 기원전 310년 ~ 기원전 307년
28 3 - 소양왕(昭襄王) 영직(嬴稷) 56년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51년
29 4 - 효문왕(孝文王) 영주(嬴柱) 1년 기원전 250년
30 5 - 장양왕(莊襄王)
장양태상황제(莊襄太上皇帝)
영이인(嬴異人)[32] 3년 기원전 249년 ~ 기원전 247년
31 6 1 시황제(始皇帝) 영정(嬴政) 37년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10년
32 7 2 이세황제(二世皇帝) 영호해(嬴胡亥) 3년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7년
33 8 - 진왕(秦王) 영자영(嬴子嬰) 1년 기원전 207년

4. 기타

  • 중국의 자동차 제조사인 BYD에서 생산하는 BYD 친의 이름의 유래가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5. 매체

  • 2017년에 방영된 드라마 진시려인명월심에 중국 배우 장빈빈이 진시황의 역할을 맡았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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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진 /*dzin/. 현대 발음은 친 qín. 秦은 현대의 한자이며 진나라 시대의 전서 소전체 표기는 이렇다. 참조 [2] 소전체(小篆體)는 승상 이사가 지어서 시황제에게 바친 서체로, 중원을 통일한 뒤에 도량형과 함께 문자 체계도 통일하고자 보급한 자체이다. [3] 헌공~ 효공 [4] 수도가 서안으로 알려져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다르다. 함양은 서안에서 25km 정도 떨어져있는 도시이다. [5] 기원전 325년부터 칭왕, 기원전 221년부터 칭제, 기원전 207년에 다시 칭왕. [6]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 [7] Taagepera, Rein (1979).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600 B.C. to 600 A.D.". Social Science History. 3 (3/4): 121. # [8] 기원전 4세기 이후. [9] 중국을 뜻하는 영단어 China의 어원이자 진나라의 본거지였던 현 섬서성의 별칭이기도 하다. [10] 당시 본거지였던 현 산서성의 별칭으로도 쓰이고 있다. [11] 음양 오행에 따라 화(火)의 나라였던 주나라 이후의 통일 왕조이므로 수(水)의 색인 검은색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북쪽을 상징하는 색이 검은색이어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단순한 썰이 아니라 정설이라면 고대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도교적인 세계관 속에서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12] 과거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권에서 중국을 지칭하던 다른 이름인 ' 지나(支那)' 역시 이 Sina를 음역한 것에서 유래한다. [13] 중국을 뜻하는 아랍어 الصين의 발음 또한 as-sin(앗-신)이다. 이 역시 진나라가 어원이다. [14] 현재의 보계(바오지 시). 보계라는 이름은 당나라 시절에 붙었으며, 옛 이름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진창이다. [15] 기원전 350년에 천도했다. [16] 실제로 진목공 당시 유여를 포섭하여 서융을 복속한 이후에도 서융은 계속해서 잔존했고, 헌공이 완전히 안정시키기 전까지 서융은 상황에 따라 위수까지 넘봤다. 효공이 융의 원왕을 죽이면서 거의 토벌된 것으로 보인다. [17] 서융은 시대마다 다른 민족을 칭했는데, 진나라에서 부르던 서융은 티베트 계통이었으며, 현 중국의 소수민족들인 강족 이족의 선조였다고 한다. [18] 진(晉)은 춘추시대의 사실상의 패자나 다름없는 위치였고 그러다보니 진(秦)은 춘추시대에는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다. 진 문공 사후, 두 진나라는 일진일퇴의 싸움을 거듭한다. [19] 당시에는 함곡관이 없었음을 기억하자. [20] 진 목공 사후 역사에서 한 발짝 물러난 듯한 진은 200여 년 동안 지도자의 교체를 제외한 별다른 기록이 없고, 진 애공 시절 멸망 직전의 초나라에 원군을 보낸 기록 정도만이 주목할 만한 기록이다. [21] 이 문단은 앞선 문단의 설명과 배치된다. 앞 문단에서 서술한 대로면 진의 시조인 비자는 비렴의 장남인 악래(오래)의 후손이고, 조보는 비렴의 차남 계승의 후손이니 한 집안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조보가 공통 조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고대의 족보인 만큼 출전마다 세부 내용이 조금씩 다른 건 어쩔 수 없긴 하다. 아무튼 피터지게 싸우고 또 싸운 나머지 포로 40만 명을 갱살하기까지 한 진나라와 조나라가 소호의 후손을 자처한 영성 조씨로 같은 계통이라는 점은 당대인들도 인식은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대패했을 뿐만 아니라 사령관인 공손희가 포로가 되면서 5개 성이 함락당할 정도였다. [23] 사실 진나라는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통일을 했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통일에 대한 사상 및 자신이 진나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통일만 달성하면 칭송하는 풍조와 다르게 당시 지배층들이나 피지배층들이 승자인 진나라에게 불만을 가졌고, 여기에 진나라의 가혹한 압제로 불만이 더욱 커져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에 반란이 시작되었다. [24] 단명한 국가들 중 서진 수나라조차 통일왕조였던 기간만 따지면 진나라의 2배다. [25] 이때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지록위마이다. [26] 진나라때의 한 해의 첫 번째 달은 단월(진시황의 휘인 정(政)과 겹쳐서 정(正)월이 단월이 되었다.)이 아니라 10월이었는데, 진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자영이 항복한 달이 기원전 206년 10월이었다. 만약 시황제가 한 해의 첫 번째 달을 10월로 바꾸지 않았으면 진나라의 멸망 연도가 기원전 207년이 되고, 해하 전투가 기원전 203년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27] 견융 족에 의해 수도인 종주가 함락되어 주 왕실이 동천할 때에 호위한 공으로 백작으로 봉해진다. [28]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곧 살해당하였다. [29] 춘추좌씨전에는 도(稻), 사기에는 화(和), 사기색은에는 가(貑)로 나온다. [30] 찬탈당하고 어머니와 같이 살해당하여 어머니의 시체와 함께 우물에 파묻혔다. [31] 여씨춘추에는 연(連), 사기색은에는 사습(師隰)으로 나온다. [32] 후에 자초(子楚)로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