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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大韓帝國軍 Korean Imperial Armed Forces(KIA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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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모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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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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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 1897년(대한제국군 개칭) |
해체 | 1907년( 군대 해산) |
소속 | 원수부 |
통수권자 |
대한제국 황제 (대한제국군 대원수) |
군령권자 |
대한제국
황태자 (대한제국군 원수) |
편제 |
대한제국 육군 • 대한제국 호위대 • 대한제국 시위대 • 대한제국 헌병대 • 대한제국 친위대 • 대한제국 진위대 • 대한제국 지방대 대한제국 해군 대한제국 상무영 |
병역제도 | 모병제 |
상비군 | 약 2만 8천 명(1902년) |
전신 | 조선군 |
후신 | 대한민국 국군[1] |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군( 大 韓 帝 國 軍)은 대한제국의 군대이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총사령관이자 대원수였다.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 등으로 구성된 육군과 해군 두 개의 군종으로 편제한 모병제였다.전신은 당연히 조선군으로 갑오개혁 때 편제가 개편되었다가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건국을 거쳐 창설되었다.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 등의 삼군영 조직을 통해 세를 불려나갔고 청의 의화단 운동과 간도 영유권 분쟁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군제가 대폭 축소되었고 군대 해산을 거쳐 일부의 명맥만 유지하다 대한제국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2. 상세
당시 대한제국은 나라를 지키려면 대규모의 병력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근대적인 징병제가 필요했다. 실제로 징병제로 전환하는 것을 고려한 바가 있으나 대한제국은 최후의 순간까지 모병제였다.대한제국이 모병제를 징병제로 전환하지 못한 이유는 징병제를 할 만큼 행정제도가 조밀하지 못한 점과 경제적 여건, 공업수준이 매우 열악했던 점 그리고 내부와 외부의 방해 등 여러가지가 있다. 특히 청일전쟁과 갑오사변으로 인해, 1880년대 이래로 급격하게 성장하던 조선의 군사적/경제적 역량이 치명타를 얻어맞은 것이 가장 컸다.
대한제국의 명목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통수권자는 대원수 직위를 역임한 대한제국 황제였다. 황제는 원수부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국군을 이끌었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일본 등 당대 다른 군주제 국가들에도 보편적으로 남아있던 특징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군주제 국가들의 군부는 정부의 문민통제를 받지 않았고, 그들과 병립하며 군주에 충성했다. 일본군 대원수였던 일본 천황 직속의 대본영(大本營)이나 독일군 최고전쟁지도자였던 독일 황제의 군사내각(Militärkabinett), 또는 합스부르크 황가의 일원만이 보임되던 오스트리아 제국군 총감(Generalinspektor)직 등의 사례가 대표적인 예시다.
갑오개혁 직후에는 군무아문(軍務衙門)에 담당하였으나 을미개혁 때 군부(軍部)로 개칭되었다. 군부대신이 오늘날의 국방장관 역할을 했다.
3. 교범과 전략
대한제국 시절 편찬된 근대적 교본의 번역본을 현재에도 볼 수 있는데, 당시 대한제국군이 어떠한 훈련을 받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대한제국 보병조전 國防軍史硏究所
#
군대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보병에 대한 훈련 방법에 대해 설명한 교범이다. 각개전투부터 당시 최대 전투단위인 여단급 기동에 이르기까지 각 제대별로 나누어 설명한다. 특이 사항으로는 중대급 제대까지 산개대형을 밀집대형 못지않게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교하자면 일본육군조전에서는 신병훈련에서 분대급 산개대형을 강조하고 있다. 다만 가장 기본적인 제식훈련부터 부대의 이동과 진형 변환 및 일제돌격과 대기병 방진 구성법 등 당대 표준적인 보병 운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
대한제국 전술학교정(상/하) 國防軍史硏究所
#
#
전술학 교범. 전쟁의 속성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적 이해를 바탕으로 각 병과의 속성과 각 제대별 운용 방법 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교범이다. 보병의 경우 여기서도 산병전에 대해 근래의 주목받는 전술로 매우 효용이 크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판세가 갈리지 않을 시 증원을 통해 밀집돌격하여 백병전을 가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기병에 대해서는 추격을 통한 적 잔여병력의 파괴를 중시하는 등 아주 공격적인 행동을 주문한다. 포병의 경우 빠른 진지 구축과 방렬 및 포대이동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현대와 유사하지만, 시대적 한계 상 4km 이내의 거리 내에서의 전투를 상정한다거나 최전선에서의 직사 포격을 지양하지 않는다. 그 외 공격과 방어, 수색과 경계 등의 상황별 전술을 상세히 기술했다.
4. 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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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부 | 군부 | 참모부 | 교육부 | 시종무관부 | 동궁배종무관부 | 육군무관학교 | ||||
대한제국군 친위대 |
대한제국군 시위대 |
대한제국군 진위대 |
대한제국군 호위대 |
대한제국군 헌병대 |
대한제국군 상무영 |
대한제국 해군 |
4.1. 육군
대한제국 육군의 병.
1895년 5월 갑오개혁 때 기존의 중앙군[2]과 지방군을 점점 개편하면서 시위대가 처음 창설되었다. 시위대는 을미사변 당시에 경복궁에 난입한 훈련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3] 이후 을미사변에 가담한 훈련대는 해체되고 시위대는 이후 창설된 친위대에 편입되어 그 역할을 이어서 역임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경복궁 점령과 을미사변을 겪은 고종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일본의 침략을 막을 군사력의 증강이었다. 이에 러시아에 군사 고문을 요청하여 1897년 9월 친위대에서 정예를 뽑아 시위대를 재창설하였다. 이로써 중앙군에는 시위대와 친위대가, 지방군에는 지방대와 진위대가 편제되고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대한제국군이 탄생하였으며 이후 제주에도 진위대가 설치되고 한성에는 육군 법원과 병원까지 만들어지게 된다. 1897년에는 중앙군인 시위대가 약 2600명, 지방의 진위대는 7천 명이었다. 또한 장교 양성을 위해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창설되었다. 육군무관학교는 1909년에 폐지되기 전까지 졸업생 282명을 배출했다.
1898년에는 시위대 1대대와 2대대를 합치고 포병 중대( 포대)를 설치하여 연대로 개편하였다. 1900년에는 포병 중대를 포병 대대로 확장하고 기병 대대를 설치하여 보병 대대 2개에 포병 1개 대대, 기병 1개 대대 등 제대로 된 4각 편제를 구성했다. 군악대(소대급)도 2대를 설치하였고 1902년에는 보병 연대가 2개로 늘어나 총 병력이 5천 명에 이르렀다. 지방군의 경우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5월 30일 각 지방의 친군영들[4]을 재편성하면서 명칭을 지방대로 바꾸었다. 통영과 북청, 대구와 강화, 청주, 공주, 해주, 춘천, 강계 등지에 지방대가 설치되었다. 1897년 6월에는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원, 청주, 공주, 안동, 광주, 황주, 안주, 종성, 원주 등 9개 지방대가 더 설치되었다. 1898년 12월에는 전국적으로 14개 지방대대 병력을 대대본부, 중대부(2개 중대), 곡호대(曲號隊 군악대) 등으로 통일하였고 전체 병력은 5천 명이었다.
1899년(광무 3년) 6월에는 최고 통수 기구인 원수부와 참모 본부인 참모부가 개설되어 근대 군 통수 기구가 도입되었다. 원수부 산하에는 군무국, 검사국, 기록국, 회계국이 설치되었으며 1900년 6월에는 육군헌병사령부가 창설되어 원수부 직속에 편제되었다. 또한 황제의 근접 경호를 맡는 경호실 격의 호위대가 창설되었는데, 원수부 군무국 총장이 호위 대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지방대가 원수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899년 11월부터 청에서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였고 이후 의화단과 청군 비적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침략하자 군사력의 강화를 느끼고 국방비를 증액했다.
1900년 6월 30일 평안북도와 함경남·북도의 4개 지역에 1개 대대 규모 진위대를 새로 편성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7월 20일 진위대와 지방대로 양분되어 있던 지방군 조직을 진위대로 통합시켰다. 같은 달 25일 칙령 26호로 진위대를 연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각 지역의 진위대를 연대 단위로 통합하여 진위 제1연대는 경기도 강화, 제2연대는 경기도 수원, 제3연대는 경상북도 대구, 제4연대는 평안남도 평양, 제5연대는 함경남도 북청 제6연대는 의주에 본부를 두었다. 1901년 8월 이후에는 평양 진위대가 확대되는 등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확장되어 1만 600여 명에 곡호대(曲號隊) 378명을 두었다. 시위대와 진위대를 합쳐 1만 8378명에 이르렀다.
1902년에는 시위대는 2개 연대에 포병1개 대대와 기병 1개 대대를 합친 5천 명, 친위대 2개 연대 4개 대대 4천여 명을 두었고 이후 진위대는 확장을 거듭하여 18개 대대에 1만 8천 명으로 늘었고 호위대 730여 명과 헌병대 등을 합쳐 최대 2만 8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서울을 점령했던 일본은 승기를 잡은 1905년 4월 대한제국군에 1차 군축을 감행하여 시위대 5천여 명은 2513명으로 줄어들고, 친위대 4천여 명과 호위대 730여 명은 폐지되었으며 진위대 1만 8천여 명은 4438명으로 줄었다. 1907년 2차 군축 때는 여러 부대를 합쳐 시위대가 4215명이 됐지만 진위대는 4305명이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시점에서 편제상의 정원은 약 9천 명이었지만, 실제로는 약 8천 명 정도 있었다고 추정한다.
4.2. 해군
첫째는 대한제국군의 첫번째 군함 양무호, 그 밑은 두 번째로 도입한 군함 광제호와 승조원들. 맨 뒷줄 오른쪽 끝이 초대 함장 신순성이다.
일단 대한제국이 정식으로 성립하기 전, 조선군에서의 수군 체제 및 개혁 시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
기존의 진관 체제에선 통제영을 최고 기구로 하는 수군이 존재했다. 수군 기지는 주로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883년 12월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이 설치되고 민영목이 기연해방사무(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된다. 기연해방영은 1888년 4월 통위영으로 개편되었다.
조선 조정은 해군 양성을 위해 1892년 영국에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1893년 3월 통제영학당(總制營學堂)을 설치하였다. 통제영학당에서는 1893년 9월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하였고 이듬해(1894) 4월 영국에서 콜웰(W. H. Callwell) 예비역 해군 항해 대위와 커티스(J. W. Curtis) 하사가 파견되어 왔으나, 일본을 비롯한 대외의 압박으로 1894년 11월 통제영학당은 폐교된다.
같은 해 갑오개혁으로 수군을 해산하고 1902년 대한제국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해상 방위 전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 한동안 해군이 없었다. 원래 고종은 영국의 최신 기선 전함 구입을 원했는데 일본의 지속적인 방해로 무산되었고 대신 일본이 제시한 화물선 한척을 구입했다. 1903년에 중고로 상선 (석탄운반선)을 한 척 구입하여 갑판에 대포를 얹어 군함으로 개조하는데, 이것이 한국의 첫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揚武號)이다. 양무호 구입은 일본의 강매였는데 그 과정은 양무호 항목 참조. 양무호는 80 ㎜ 포 4문과 5 cm 포 2문을 장착하여 화력도 빈약했으며, 심지어 이런 군함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배를 당시 국방예산의 30%나 주고 구매했다.[5] 양무호는 1904년엔 러일전쟁 때 일본 해군이 징발해 사용하였고,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후에는 부산에서 견습 선원들을 위한 실습선으로 쓰이다가 1909년 일본 해운회사에 매각되었다.
1904년에는 1,056t급 광제호(光濟號)를 구입한다. 3인치 포를 3문 장착하고 있는 광제호는 배 자체도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에 발주하여 건조한 새 배로, 양무호와 비교하면 훨씬 괜찮은 함정이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광제호는 해군 함정이 아니라 세관의 연안 감시선 역할을 맡게 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석탄 운반에 쓰이다가 8.15 광복 후 귀국 일본인들을 싣고 일본으로 갔다.
양무호와 광제호 두 척의 초대 함장은 모두 신순성(愼順晟, 1878-1944)이었다. 그는 대한 제국 해군 해체 이후 상선사관으로 근무했다. 경술국치 전날, 신순성 함장은 광제호에 게양되어 있던 태극기를 내려 보관하고 있었는데, 조국 해방을 1년 앞두고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 신태범 박사가 광복 이후 열린 한국 기선 취항식에서 이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대한제국 해군을 다룬 책으로 한국 근대 해군 창설사가 있다.
군복은 우용곡 작가가 대한제국 해군 군복에 대해 다룬 블로그 참조.
- 관유 함선 목록
- 창룡호(蒼龍號, Signal) 경하 혹은 기준 403톤 만재 536톤 - 1887년 도입
- 현익호(顯益號, 붕기복호, Bankchef Henrikssen) 만재 709톤 - 1892년 도입
- 이운호(利運號, 조주부호, ???) 1000톤급 - 1893년 도입
5. 계급
러시아 제국군[7]의 계급 체계를 모방했으나, 계급 상하 관계를 러시아군의 대 - 중 - 소 체계와 달리 정 - 부 - 참 체계라는 전통적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군에는 준장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대한제국군 역시 준장이 없었다.사실 이것이야말로 서방 군대의 Lieutenant의 의미를 제대로 살린 번역이다. 말 그대로 정규 위관/ 대리 위관 / 참모 위관인 것. 이는 조선군의 관례상 대 - 중 - 소는 부대의 전투 서열상 상하 관계를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도 구세군대한본영에서는 정 - 부 - 참 체계로 계급명을 나타낸다. 영관이란 표현은 현재 동북아에서 한국에서만 독자적으로 쓰이는 명칭이다.
이 정부참 체계는 명나라의 군사계급체계에 기원을 두고 있다. 명과 명의 뒤를 이은 청나라 녹영군의 군사장교계급체계를 간략하게 서술하면 파총-천총-수비-도사-유격-참장-부장-부총병-총병관(정2품)-제독군무총병관(줄여서 제독, 종1품)이었다. 아무래도 역사상 이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기에 이러한 체계가 채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청나라 군대도 상하계급을 정-부 체계로 구분하고 '영관' 계급이 있었는데, 우리와 다른 점은 정 - 부 - 참이 아니라 정 - 부 - 협이라는 것이었다. # 고종이 여러 개혁 및 개편 과정에서 옛 전통으로부터 명칭을 따오는 일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한제국군의 계급체계도 이러한 전례들을 참고한 듯하다.
참고로 같은 계급을 중화권에서는 교관급 장교로 불리며, 북한과 일본( 구 일본군과 현 자위대), 베트남에서는 좌관급 장교로 불린다. 조선경비대 시절에 잠시 다시 정 - 부 - 참을 도입했으나 1948년 이후 대 - 중 - 소로 바뀌었다.
- 원수급
- 장군급
- 대장 - 참모부 총장, 황제 시종 무관부 무관장. 종 1품.[8][9]
- 부 장 - 참모부 총장, 교육 총감, 황태자 배종 무관부 무관장. 정 2품.
- 참장 - 참모부 국장, 원수부 산하 각 국 총장, 교육부 총감 / 부감 / 참모장, 헌병 사령관. 종 3품.
- 영관급
- 위관급
- 준사관급
- 교관급(한국군의 부사관)
- 군졸급(한국군의 병 사)
병사와 부사관들은 계급장에 소속 부대를 표기했으며, 참교부터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줄이 하나씩 추가되었다.
장교부터는 계급장 양 옆에 별이 표시되며, 장군부터는 별이 금색으로 바뀌었다. 위관급은 중앙에 태극 문양, 영관급과 장관급은 중앙에 대한제국의 국화인 오얏꽃과 오얏나뭇잎이 태극 문양을 둘러싸고 있었다. 계급장이 잘 정리된 사이트들 1 2 또한 장교들은 견장 계급장과 함께 소매에 ㅅ자 형상 수장 계급장도 사용하였다. 줄 1개(참위) ~ 11개(대원수)로 구분되었다.
1894년에 해당 계급을 설치했다. 실록에 따르면 대장은 연령 정년이 없고 부장이 70세, 참장이 65세, 영관급 장교는 54세, 대위에 상당하는 정위는 47세, 기타 위관급 장교와 부사관은 45세였다.
주요 장성급 장교는 대한제국군/장성급 장교를 참고할 것.
6. 장비
대한제국군 보병장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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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화기 | <colcolor=#ffbc00> 볼트액션 소총 | <colbgcolor=white,#191919> 게베어 1871, 그라 소총, 무라타 13년식, 베르단, 30년식 소총 | ||
단발 소총 | 레밍턴 롤링블럭, 스나이더-엔필드 | |||
권총 | C78, M1879, MAS 1873, 르벨 리볼버, 웨블리 리볼버, 나강 M1895, 26년식 권총, 마우저 C96 | |||
지원화기 | 기관총 | M1883 개틀링, 맥심 기관총 | ||
화포 |
암스트롱포,
크루프 포.
빅커스 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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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의 경우 주로 리볼버를 사용했다.
대한제국의 기병들과 순검들은 미국제 45구경 콜트 리볼버를 사용 했다고 한다.
아마 콜트 싱글 액션 아미와 M1878 더블액션 리볼버 두가지가 사용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45 Long Colt 탄약을 사용한 이유는 45구경 총알 1발로 적의 숨통을 끊거나 최소 제압 상태를 만들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군이 구매했던 맥심 기관총 #
막 근대화를 시작하고 중공업이나 기술이 부족하던 현실적인 여건상 소화기부터 중화기까지 모두 외국에서 수입한 장비가 주류를 이루었다.
대한제국군이 운용한 주요 장비는 아래와 같다.
- 게베어 1871
- 그라 소총
- 레밍턴 롤링블럭 M1867
- 무라타 13년식
- 베르단 소총
- 30년식 소총[12]
- 개틀링 기관총
- 맥심 기관총[13]
- 암스트롱포[14]
- 크루프 포[15][16]
- 빅커스 포[17]
▲대원수
고종황제와 원수
순종황태자. 보다시피 피켈하우베 형태의 예식모도 도입되었었다. |
육군 군복들. 육군의 복제는 러시아, 프랑스, 프로이센 군복을 참고했다고 하며, 예장(예복), 정장(정복), 상장(常裝, 근무복), 군장(전투복)이 있었다.
#
2022년에는 초초혼 작가가 대한제국 군복 자료를 집대성한 자료집 '그림으로 보는 대한제국의 군복'을 개인출판 하였으며, 2024년에 도서출판 길찾기에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7. 실전
7.1. 의화단 운동
1899년 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 이후 대한제국 내 평안도와 함경도에도 의화단과 청군 비적이 쳐들어와 대대적으로 약탈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의화단 진압을 위해 열강 8개국이 참전하였고, 러시아 제국이 고종에게 참전을 제안하였지만 초기의 대한제국군의 군세는 열악하고 국내에 침입한 의화단을 막기에도 벅찬 관계로 고종은 거절했다. 이후 국방비를 대폭 늘려서 대한제국군의 전력을 강화시켰고, 고종은 평안북도 관찰사에게 진위대 예하 대대들을 나누어 배치하여 이들과 교전하였다. 진위 5연대의 소대장 조기설, 김성열, 강희규 등이 청나라 비적 400명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1900년에는 이범윤을 북간도로 파견하여 한국인 보호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7.2. 청과의 간도 영유권 분쟁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청 국경 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7.3. 의병 진압
일본은 1905년 4월에 18개 진위대를 8개 진위대로 감축시켰다.러일전쟁 승리 이후에는 일본은 원수부에속해있던 군령권과 군정권을 다시 군부에 환원시키고, 친일적 인사이면서 훈공과 근로가 가장 많은 육해군 대장으로 부원수를 두고 대원수와 원수에 諮詢하는 책임을 맡게함으로써 중심부에서부터 군통수권을 해체시켜 나갔다. 일본은 특히 대한제국 내부에서 황제에게 속한 군통수권의 지위를 격하시키려는 여론을 조성해 나가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중추원 의관 안종덕의 경우, “군부가 있는 이상 원수부는 승격시킬 필요가 없다”면서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18]
일본은 고종의 군통수권의 지위를 격하시킨 이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대항하는 을사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진위대를 투입하였다.
을사의병 당시 폐하의 군대에게 대적할 수 없다며 교전을 피하다 잡힌 최익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의병들은 일본군에겐 적의를 가지지만 대한제국군에겐 교전을 피하거나 소극적이 되어 알아서 해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7.4. 일본에 대한 저항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의 만행을 겪고 아관파천으로 탄생한 대한제국군이었기에 당연히 일본군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서울과 덕수궁을 점령하고 대한제국의 항일 장교들을 교체시키거나 추방하고 용산에만 일본군 5만명을 주둔시키는 등 대한제국 각 거점에 주둔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같은 곳에 주둔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 간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다. 사병들은 상대편의 장교를 봐도 경례를 하지않고 무시했으며 사소한 충돌도 잦았다. 당연히 장교들도 서로 경례를 하지 않았다.을사조약의 횡포를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을 일본이 퇴위시키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군중 시위가 연일 발생하였다. 7월 20일에는 시위혼성여단 소속1연대 3대대 소속 병사 100여 명이 동조하여 종로의 병영을 뛰쳐나와 고종 퇴위 반대시위를 벌이던 군중과 함께 종로경찰서를 습격하여 일본 경관들을 살상한다. 대한제국군이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한 일본은 대한제국군을 해체하기로 하고 7월 31일 순종의 군대해산 칙명을 받아내어 8월 1일에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9월까지 진위대를 해산시킨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남대문 전투를 벌였고 원주 진위대, 여주 파견대, 강화 분기대, 홍주 분견대, 진주 분견대, 안동 분견대 등 진위대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을사의병과 합류 정미의병이 되어 전국에서 일본군과 전투하며 저항하였다.
8. 군축과 해산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월 9일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한일의정서를 체결 후 군축을 요구하여 1905년 4월 16일에 대한제국군 친위대 4천여 명을 해산시키고 시위대 5천여 명을 혼성시위여단 2500여 명으로 줄였다. 지방 진위대의 병력도 크게 감축시켰다.1901년 이후 6개 연대이자 18개 대대 1만 8천 병력이던 위대는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축소되었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했으며, 1개 중대 병력을 장교 이하 256명으로 줄여서 8개 대대를 모두 합쳐도 2365명에 불과했다.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군 해산 문서 참고하십시오.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대한제국군 해산을 위해 통감부를 통한 비밀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대한제국군의 화포, 기관총 등의 중화기를 보관하던 용산 육군 병기창을 점령하고 탄약 600만 발과 무기류의 관리를 일본군 일임하에 두도록 했으며, 대한제국군 사병들이 반발하여 봉기할 것을 대비하여 대한제국군 일원에게 금족령를 발령하여 일본군이 대한제국군의 탄약고 및 무기고를 관리 감독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미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사병들에게 신형 총기 및 탄약을 추가 보급하였다. 그리고 1907년 7월 31일 순종에게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발령과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 분야를 통감부와 일본군에게 인계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군부에서는 다음날인 8월 1일 시위대의 해산을 시작으로 8월 3일부터 9월 3일 사이에는 진위대까지 해산시켜 일부 호위대 병력을 제외한 전 대한제국군을 해체하였다. 이 과정에서 해산에 반발한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였고 시위대 소속 2개 대대 등이 저항하여 일본군과 남대문 전투를 벌였다. 지방의 진위대들은 각지에서 봉기하고 을사의병에 합류해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호위대 일부는 황제의 호위병으로 유지되었다. 해산인원 중 257명은 경찰관이나 헌병보조원으로 채용되어 옛 동료들의 반대편에서 총을 잡았다. 관련 페이지 1907년 이후에도 조선 보병대, 조선 기병대와 군부의 일부 기관은 남아 일부 군인들이 근무했으나 1910년에 일본군으로 소속을 완전히 옮긴다. 노백린 등은 군대 해산 후에도 근무하다가 이때 군문을 떠났다. 일본군 소속으로 옮긴 뒤에 계급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고 일본군의 계급에 상당하는 것으로 대우하다가 1920년에 계급 명칭까지 일본군과 완전히 합친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대한 제국군은 병합 후 조선왕가의 호위를 맡은 조선보병대였다. 조선기병대가 해체된 뒤에도 명맥을 유지하다 1930년대에 사라진다. 1931년에 대부분 군인들이 전역 조치되고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의 흔적은 사라졌다.
정미의병에 합류한 대한제국군은 훈련과 무기의 질에 있어서 상당한 전력 향상을 가져왔다. 1907년 11월에 일어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한 13도 창의군의 1만 병력 중 3천여 명이 대한제국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1910년까지 국내에서 의병에 가담해 일본군과 싸우다 이후에는 만주로 이동해 독립군이 된다.
대표적인 대한제국군 출신 독립군 인사들로는 육군대장 출신으로 강화진위대를 모아 저항하다 일본에 잡혀 처형당한 의병장 이능권과 육군 장교 출신으로 만주에서 저항운동을 전개한 나중소와 김좌진, 육군 참령 출신으로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노백린, 무관학교 생도 출신으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던 대한민국 초대 무임소장관 지청천 등이 있다.
9. 대중매체에서
- 북한 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는 주연 중 하나가 대한제국군 소속이며 2부 초반부에 남대문 전투 장면이 나온다.[19] 다른 북한 영화인 <맹수 사냥꾼>에서는 극초반에 주인공이 소속되어 있다가 해산되어서 위와 같이 남대문 전투에서 전멸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 임화수가 제작에 참여한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에서는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에 주둔중이던 대한제국군 시위대가 일본군에 제압당하는 모습과 중반부에 군악대와 보병들이 경무청 앞에서 시위중인 독립협회 회원들의 사이를 행진곡을 연주하며[20] 지나가는 모습으로 등장, 이때 한 독립협회 회원이 연주중이던 군악대의 북을 발로 차 넘어트리고 다른 회원들이 그 넘어진 북을 굴리면서 조롱하는데 이때 별다른 항의도 하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북을 회수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간간히 등장.[21]
- 2018년 방영한 미스터 션샤인에서 등장. 3화부터 대한제국 경무대를 배경으로 사열한 모습으로 나오며 검은 제복에 붉은 줄무늬, 군모엔 오얏꽃(이화문) 문장이 달린 제복 차림이다. 이후 유진 초이가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교관이 되면서 자주 등장한다. 22화에서는 군대해산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싸운 남대문 전투가 나오며 탈출한 군인들은 이후 정미의병에 합류하여 의병전쟁을 수행한다.
- 대체역사물 더 킹 : 영원의 군주에서 대한제국 영해를 침범한 일본 해군 함선들을 향해 대한제국 해군이 경고 사격을 가하여 퇴거시킨다. 그런데 황제를 비롯한 승조원들이 모두 갑판으로 나와있고 현대식 이지스함이 근대식 전함마냥 함포 사격으로 근접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심각한 수준의 고증 오류라며 많은 밀덕들과 해군 출신 군필자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22]
10. 여담
요동과 간도 영유권 분쟁을 두고 진위대 외에도 1902년부터 간도에 주둔한 '북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1905년까지 청군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의화단을 진압한 러시아군이 만주에 주둔하며 철도부설을 하던터라 처음에는 러시아 공사가 이런 월경 공격에 대해 침략 행위라며 항의하는 서한을 대한제국 외부(외무부)에 보낸 적이 있다.그러나 곧 러시아는 청군에 공동대응하자며 대한제국과 이런 합의를 맺었다. 첫째,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간도 및 그 부근 3마일 이내의 지역에 주를 설치하여 관리한다. 넷째, 간도에 소란이 생겨 주장(州長)의 권한으로 대응할 수 없을 때,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협동하여 적절한 방어책을 강구한다.
이범윤의 사포대는 어디까지나 정식으로 대한제국군 편제에 속한 정규군이 아니었으나 고종은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고 세를 걷어 사포대를 유지함을 허가했다. 그러므로 대한제국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는 민병대로 준군사조직으로 볼 수 있다.
11. 같이보기
[1]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이 대한제국군, 구한말 의병,
광복군이고 정부 자체도 대한제국 정부를 계승한다고 명시했다.
# 애초에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승을 천명했는데 임정은
대동단결선언에 따라 대한제국의 주권이 순종의 포기 이후 국민에게 넘어갔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현 국군이 구 대한제국군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2]
친군장위영, 친군통위영, 총어영, 경리청등을 포함
[3]
이때 훈련대장
홍계훈은 전사하였다. 훈련대는 시위대와 자주 충돌하였는데 훈련대의 반란을 막기 위해 고종이 신임하는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으로 맡기고 해체를 앞두고 있었으나 일본에 포섭된 훈련대대장 3명(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이 이끄는 훈련대가 궁궐로 들어오자 꾸짖으며 막아서다
일본군에게 사망한다.
[4]
예를 들어
대구시의 친군남영,
평양시의 친군서영,
경성군의 친군북영 등.
[5]
참고로 동시기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
기함으로 쓰였던
전함
미카사는 305 ㎜ 주포에 152 ㎜ 부포를 달았다. 일본이 미카사를 비롯한 시키시마급 전함 4척을 영국에서 구입하는데 예산 5800만 엔이 들어갔는데 이는 대한제국 국방예산의 30년치와 맞먹는다.
[6]
창룡호와 현익호에 양무호와 광제호 두 척의 초대
함장인 신순성이 부함장으로 근무했다.
[7]
1895년 갑오개혁 당시 조선군 개편은 독일식 일본군을 참고했으나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원년에 창설된 대한제국군은 프랑스식 제정 러시아군 체계를 따랐다.
[8]
원래는 정장이 되어야 하나 대장이라는 용어가 예전 조선군 시절부터 있었기 때문에 대장 계급명 사용.
[9]
1904년
원수부를 일본이 폐지시킨 후 촬영된 순종의 군복 차림 사진을 보면
팔소매 계급장을 대장 계급장으로 착용하였으므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원수부 폐지와 함께 대원수, 원수 계급 자체가 없어지고 황제와 황태자의 계급이 대장으로 격하되었다고 추정한다.
[10]
위 표에서는 원사 계급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대한제국군이 모방한 일본군의 특무조장(후에 준위로 계칭)을 생각해볼때 원사보다는 준사관에 해당하는 계급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대한제국군에 준사관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11]
다만 일본군의 준사관은 한국군의 준위보단 원사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12]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썼고, 1905년 설립된 용산 군기창을 통해 직접 생산까지 할 계획이었지만 실제 생산을 했었는지 그냥 놀렸는지는 기록 부족으로 알 수 없다.
[13]
6정을 보유했다.
[14]
다만 성능부족 등으로 주력은 아니었으며 일부가 지방군이나 해안포대에서 운용되었고 상당수는 치장물자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주력은 크루프 포였다.
[15]
알프레드 크루프가 세운 크루프 사에서 만든 대포다.
[16]
그러나 구매시점을 생각하면 한때 인터넷 상에서 일본군 야포보다 뛰어났다며 떠들어대는, 주퇴복좌기가 설치된 최신 모델은 1900년대 초에 도입한 10여 문 남짓뿐이고, 이조차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자국의 주력 야포가 러시아군의 76mm 속사포에 비해 성능이 떨어진다고 봐 수백 문을 발주하여 전쟁 말기에 인도되었으며, 종전 후 국산화하여 대량으로 도입되었다. 대부분은 당시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군이 쓰던 크루포 야포와 동일한 모델로 추정되는 구식 모델이다. 레밍턴 롤링블럭 등 당시 구한말 조선군의 신식무기 및 설비 구매 당시 청국의 조언이나 입김이 제법 담겨 있었다.
[17]
1902년 맥심 기관총 6정과 함께 모델 불명의 빅커스제 야포 4문과 빅커스 QF 2.95인치 산포 8문을 도입한 기록이 있으며 후자의 경우 기록사진도 있다. 그 밖에 해안포도 구입했었다는데, 이 역시 기종 불명이다.
[18]
고종의 軍統帥權 강화시도와 무산과정 연구-대한제국의 멸망원인과 관련하여-. 장영숙
14쪽
[19]
군복 고증에서는 조금 아쉬운 것이 빨간색과 검은색 복제로 구성되어 있는 실제 대한제국군 군복과 달리 온통 검은색으로 깔맞춤되어 있다. 묘사된
대한제국군 시위대의 견장 역시 빨간색 견장에 '시위대'라고 써져있는 것이 아닌 검은색 견장에 '시위-'라고 되어있는 것도 흠, 다만
일본군 군복은 고증이 꽤 잘된 편인데 당시 대한제국군 군복 색상이 일본군의 메이지 19년식의 군복과 유사하다는 것을 고려해 일부러 고증에 맞지 않는 군복을 보인 듯
[20]
이때 군악대가 연주하는 행진곡은 독일의 행진곡인
옛 친구(Alte Kameraden)
[21]
이쪽도 군복 고증이 상술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급은 아니지만 대한제국군의
피켈하우베가 철모가 아닌 단순한 원형
모자 위에 꼬챙이를 단 괴상한 형태의 모습으로 나온다. 다만 당시 한국에서 피켈하우베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장식이 많고 비싼 피켈하우베의 특성상 자체적으로 제작하기도 어렵기에 영화를 제작할 당시 원형 모자에다 꼬챙이들 달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22]
심지어 일본 함대의 군함은 그냥 현실의 한국 해군 군함에다가 일장기만 어설프게 붙혀놓은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