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5:47:24

찬드라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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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인도 임시정부 주석
찬드라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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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대 인도 국민 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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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인도 임시정부 초대 주석
찬드라 보스
चन्द्र बोस | Chandra Bose
파일:Subhas_Chandra_Bose_NRB.jpg
본명 সুভাষ চন্দ্র বসু[1]
सुभाष चन्द्र बोस[2]
Subhas Chandra Bose
수바스 찬드라 보스[3]
출생 1897년 1월 23일
인도 제국 쿠탁
(現 인도 오디샤 주 쿠탁시)
사망 1945년 8월 18일 (향년 48세)
일본 제국 타이완 타이호쿠
(現 대만 타이베이)
국적
[[인도 제국|]][[틀:국기|]][[틀:국기|]] (1897~1943)

[[자유 인도 임시정부|]][[틀:국기|]][[틀:국기|]] (1943~1945)
재임기간 초대 자유 인도 임시정부 주석
1943년 10월 21일 ~ 1945년 8월 18일
서명
파일:bose's signatu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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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일본 도쿄 렌코지
부모 아버지 자나키나스 보스
어머니 프라바바티 보스
형제자매 13남매 중 6남
배우자 에밀리 쉥클[4] (1937년 결혼)
자녀 아니타 보스 파프
학력 침례교 선교의 개신교 유럽 학교 ( 졸업)
레이븐쇼 고등학교 (졸업)
캘커타 대학교 프레지던트 대학 ( 철학 / 퇴학)
캘커타 대학교 스코틀랜드 교회대학 (철학 / B.A.)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컬리지 (정신 및 윤리과학 / B.A.)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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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국민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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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도 전진 블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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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4. 음모론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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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 독립운동가. 인도 국민 회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경칭이자 통칭은 '네타지(নেতাজি, नेताजी, '사령관')'.

한국에서는 영국의 적이었던 추축국, 특히 일본 제국과 손을 잡고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 자유 인도 임시정부의 국가 주석 겸 인도 국민군 최고 사령관을 지낸 걸로 널리 알려졌다.

2. 생애

1897년 1월 23일 대영제국 인도 제국 쿠탁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소에 비폭력 투쟁에 의문을 제기하고 폭력투쟁을 주장하였다. 물론 견해 차는 있었지만 인도의 독립을 염원하는 것은 같았기 때문에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의 다른 독립운동가와 친하게 지내 영국의 감시대상에 올랐다. 1938년 자와할랄 네루의 뒤를 이어 인도 국민 회의 대표로 선출되었지만 앞서 언급했듯 그는 폭력 투쟁을 주장한 강경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비폭력 투쟁을 강조한 간디와 대립했고 인도 국민 회의 지도층은 간디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의 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평소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 위해서 영국의 감시망을 뚫고 소련을 통해 나치 독일로 들어갔다. 이때는 아직 독소 불가침조약이 깨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소련과 독일이 연합해 북쪽에서 인도를 치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미 바르바로사 작전을 구상 중이던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과의 연합을 묵살하고 그를 대영방송에 동원했다. 한편 영국도 이 방송에 대항해 BBC를 중심으로 다른 방송국을 만들었는데 조지 오웰이 잠시 참여했다. 북아프리카 전역 등의 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인도군 병사들을 설득해 독일 국방군 내부에 인도인 부대인 아차트 힌트 사단(Azad Hind, 자유 인도 사단)을 창설했는데 최종적으로는 3,500여명의 부대원이 모였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 이후 독일의 점령 지역이 축소되면서 자꾸만 인도와 거리가 광속으로 멀어지는 통에 해당 부대는 독일과 점령지 내부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패전을 맞이하고 전원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일부는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그래서 해당 부대에 있던 인도인 중에서 전투에 본격적으로 참전한 사람은 에르빈 롬멜 휘하에서 북아프리카 전선에 참가한 수백 명 수준에 불과하였다.

한편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일본군이 인도를 향해 접근하자 그는 도조 히데키 아돌프 히틀러의 동의를 얻어 U보트를 타고 일본 측에 가서 이들과 함께 인도를 해방시키려고 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인도인 부대를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인과 결혼해 딸을 낳았는데 훗날 오스트리아의 대학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파일:wwii greater east asia confedence.jpg

1943년 11월 일본의 영향 하에 있었던 아시아의 국정 최고 책임자들을 초청하여 열린 '대동아회의'의 기념사진. 제일 앞줄 맨 오른쪽이 찬드라 보스다. 왼쪽부터 버마국 수상 바모, 만주국 수상 장징후이, 왕징웨이 정권 주석 왕징웨이,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타이 왕국 왕자 완 와이타야콘, 필리핀 제2공화국 대통령 호세 라우렐.[6]
私ハ日本ノ新自由亞細亞創建ノ使命ガ十二分ニ完遂セラレンコトヲ所ル次第デアリマス

나는 일본의 신자유아세아 창건에 대한 사명이 십이분 완수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찬드라 보스, 대동아회의.

이후  싱가포르에서 자유 인도 임시정부를 세우고 주로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전향한 인도인들을 모아 4만 5천 명의 인도 국민군을 조직했다. 다만 전후 기록에 의하면 위장 전향한 사람들도 꽤 있었고 적어도 3명 이상의 인도군 장교가 영국군 진지로 탈출했다. 사실 인도 국민군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일본 제국에 의해서 구상된 바 있어 실제로 그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군 조직을 갖추었지만 내부 사정으로 탄압받고 수장이  수마트라 섬으로 유배를 가는 지경에 이르자 일본 측에서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유명한 반영 운동가인 그가 재규합했고 일본군과 함께 공동 전선을 폈는데 하필 그것이  임팔 작전이라서 작은 땅이나마 자국민으로 인도를 해방시키려던 그의 꿈은 좌절되고 작전에 실패한 인도 국민군들도 철수 과정에서 와해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이후 대만에 머물던 그는  1945년 독일에 이어  일본까지 항복하게 되자 연합군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기 위해  다이호쿠 마츠야마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으나 비행기가 추락하여 숨졌다. 

그가 조직한 인도 국민군은 어쨌든 연합국에 맞서서 추축국 편에 붙었으므로 전후 영국에 의해 포로로 생포되었으며 반역, 고문, 살인죄로 재판장에 서게 된다.(인도 국민군 재판) 그러나 당사자인 대영제국이 머잖아 인도에서 손을 떼려고 했기 때문에 재판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의 동지인 자와할랄 네루가 INA 변호 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들을 변호했기 때문에 거의 불기소 무죄 처분을 받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인도 국민군 출신 인원들은 차후 조직된 인도군에 입대하지 못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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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학교에 흔히 걸려 있는 초상 중 하나.
None of those who have written on Bose's Indian national army has investigated whether, while they were trained by the Japanese army, they were permitted to share in the "comfort" provided by thousands of kidnapped Korean young women held as sex slaves by the Imperial Japanese Army at its camps. This might have provided them with some insight into the nature of Japanese, as opposed to British, colonial rule, as well what might be in store for their sisters and daughters.

일본군에게 훈련받던 보스의 인도 국민군이 일본군에게 납치당해 병영에 성노예로 끌려왔던 수천 명의 어린 한국인 위안부들의 "위안"도 제공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이들에 대해서 다룬 연구자들 그 누구도 다루지 않았다. 이는[7] 아마 인도 국민군들이 일본의 식민통치와 영국의 식민통치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 그리고 그들 자신의 누이와 딸들에게 어떤 일이 닥치게 될 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제러드 와인버그, 2차세계대전사.

3.1. 긍정적 평가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와 함께 추앙받는 독립 영웅이다.[8] 당장 서벵골 주 캘커타 국제공항의 정식 명칭은 그의 이름을 딴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국제공항(Netaji Subhas Chandra Bose Int'l Airport)이고 안에 그의 대형 초상이 있다. 콜카타 시내에도 곳곳에 그의 초상과 조각상이 산재하여 쉽게 볼 수 있으며 인도 학교에도 이 사람의 초상이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와 함께 꼭 걸려 있다. 그의 이름은 캘커타 국제공항에도 사용될 정도로 존경받고 있으며 벵골 무슬림들이 독립해 세운 이웃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도 세속주의자들 사이에서 사실상 국부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인도의 대문호이자 벵골인들의 대문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함께 동시대에 인도의 독립과 벵골인의 민족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 위대한 벵골인으로써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가 인도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손을 잡아 당시 많은 인도인들이 일본을 형제의 나라마냥 옹호하고 지지서명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도쿄 전범 재판 당시 무죄 판결로 일관한 라다비노드 팔 판사다. 지팡구에서도 꽤나 간지나게 등장하고 2007년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그의 후손과 만나기도 했을 정도였다.

1938년에는 나치의 인종정책과 유대인 박해를 비판하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는데 그의 반유대주의는 어디까지나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한 적성국, 영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유대계 자본가들을 비판하는 선에서 그쳤다.

알아 두어야 할 점은 당시 인도는 조선과 달리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아닌 영국령 인도 제국으로서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의 독립을 위해서는 영국의 적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영국과 대립하고 있었고 이들을 몰아낼 만한 힘이 있어 보였던 일본 제국에 접근한 끝에 손을 잡았다. 물론 일본도 이를 이용하여 대동아공영권이 정당했다는 명분을 내세우긴 하였지만 같은 친일파라도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거나 회유에 넘어가 핍박받는 동포들을 배반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인도에서는 독립 영웅으로 숭상된다.

3.2. 부정적 평가

아민 알후세이니 스테판 반데라가 독립운동가임에도 왜 비난받는지 생각해 보면 마냥 옹호할 수는 없다. 당시 일본은 전쟁범죄 수준이 나치와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위치였던 아웅 산은 반영투쟁에 일본을 이용하는 선에서 끝냈고 수카르노는 상대적으로 일본 제국이 조선이나 중국만큼 폭압적인 통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제국과의 심각한 충돌이 없었으며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바로 손절하고 인도네시아 독립을 선언해 상대적으로 친일 이미지가 적다. 반면 그는 인도에서도 독립 운동세력의 주류에서 밀려났고 반영 투쟁에 간디가 비폭력주의로 일관한 탓에 투쟁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도 마다하지 않고 추축국과 손잡고 피를 묻힌 만큼 그 역사적 책임도 지는 것이다.

당시 인도가 영국 식민지였고 인도에서 위대한 독립운동가로써 존경받는 점도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는데 우크라이나도 당시 소련에게 점령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파시스트가 아닌 우크라이나인들 중에도 소련에 맞서 싸운 스테판 반데라를 독립운동가로써 존경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학살을 당한 폴란드인이나 유대인이 반데라를 악마라고 비난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9]

그는 나치즘을 진지하게 지지하였고 독립국 인도가 나치즘과 공산주의 혼합에 기반한 사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인도에서 영웅시되는 것과 별개로 서구권을 비롯한 학계에서는 그를 파시스트라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10]

그가 이끄는 괴뢰 정권은 본부가 있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에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강압적인 동화 정책 및 학살을 저질러 현재까지도 원주민들이 외부인들에게 폐쇄적으로 대응하도록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전술한 제러드 와인버그의 언급처럼 한국인 위안부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도 없으며, 설령 본인이 그런 문제에서 결백하다고 치더라도 다른 인도 국민군들 중 단 한 명도 위안부와 접촉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매우 적을 것이다. 설령 그와 인도 국민군들 모두가 결백하다고 치더라도, 제 아무리 인도의 탈식민화, 독립이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나치•일제의 거짓된 명분하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것 자체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평가가 대세이다.[11][12] 그와 일본군이 승리했다면 인도는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독립국 행세만 하는 식민지로 전락했을 것이며, 일본이 행한 마닐라 대학살의 사례에서 보듯이 영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폭정과 학살의 참극이 이어졌을 것이다.[13]

추축국 옹호자였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는 종종 유대인들이 영국을 도와 인도를 착취했다며 '유대인'과 '유대자본'을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 보스 지지자들은 로스차일드 가문 등 영국 후원 유대계 자본을 비난한 것이지 반유대주의라고 볼 수 없다고 두둔하기도 하지만 그러면 애초에 유대인, 유대교라는 민족적 정체성으로 비난할 게 아니라 단순히 '친영 자본' 혹은 유대교와 연관짓지 않고 않고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난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라는 점으로도 그들을 비난했다. 비록 그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비판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조차도 정작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부터 나치 독일에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 난민들의 인도 망명을 강하게 반대한 행적 등을 보았을 때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라고 보긴 어렵다.

4. 음모론

갑작스런 폭사 때문에 그의 죽음에 대한 음모론이 몇 가지 있다. 그가 사고를 당한 비행기에는 군자금으로 쓰던 막대한 금괴와 일본인 고문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그는 행방불명되고 금괴의 행방도 묘연한데 왠지 그 고문들은 그 뒤에 어디서 얻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자금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건 그냥 음모론에 불과하다.

다른 하나는 그는 사실 죽지 않았고 지금 타이완에 있는 유골은 DNA 검사 결과 가짜라는 것이다. 즉, 무사히 일본 고문들의 도움으로 러시아로 갔지만 아직 연합국과의 친교가 필요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보스를 시베리아로 보냈고 거기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소-인 외교 관련 회의 때 니키타 흐루쇼프가 인도에서 원한다면 48시간 내에 그를 귀국시키겠다거나 생존 확인을 해 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이야기도 1956년 이후에는 사라졌다. 인도 정부에서 수차례 이 설을 조사했지만 아직도 명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인도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또 다른 음모론 중에는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자와할랄 네루가 손을 써서 보스를 암살(혹은 시베리아에 있는 걸 알고 모른 체)하여 경쟁자를 제거했다는 주장도 있다. 독립운동의 세 거두 중 마하트마 간디는 세속적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구름 위에 있는 사람이니 경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고 최대 경쟁자였던 네루와 보스의 대립이 암살이라는 형태로 드러났다고 하지만 이 설도 증거는 없는 음모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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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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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벵골어식으로 '슈바시 촌드로(쫀드로) 보슈'. '바'의 'a' 모음은 역사적인 장모음이지만 벵골어 모음 장단 구별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aː/→/a/의 모음추이를 겪었고 '촌'(Chôn)의 'ô' 모음은 /a/→/ɔ/로의 모음추이를 겪었다. [2] 힌디어식으로 '수바스 천드르(쩐드르) 보스'. '바'의 'a' 모음은 장모음이므로 /aː/가 되고 '천'(Chan)의 'a' 모음은 중설모음화한 단모음이므로 어중에서 /ə/가 된다. 'Chandra'에서 마지막 'a' 모음은 어말 단모음 'a'이므로 힌디어 발음 규칙 상 탈락되지만 산스크리트어 원음을 존중하여 /ə/ 모음을 넣어 '천드러'로 발음하는 경우도 있다. 산스크리트 원음을 존중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인용했다. Manjari Ohala, Aspects of Hindi Phonology (Delhi: Motilal Banarsidass, 1983), 138. [3] 외래어 표기법 용례집. 보스(O), 보세(X), 보우즈(X), 보우스(X) [4] Emilie Schenkl,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 [5] All India Forward Bloc. 보스의 주도로 1939년에 창당되었다.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좌익 내셔널리즘 성향을 띄고 있다. [6] 이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조선의 대표가 없는데 조선은 한일합방으로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대동아공영권 선전 포스터 등에도 조선을 상징하는 인물은 없다. 단, 조선의 대표자가 없을 뿐 조선인 중 이 회의에 참관한 사람은 있는데 바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인인 이광수 최남선이다. 이광수, 최남선은 대동아회의의 세부 회의 중 하나인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해 조선 청년들을 일본 제국을 위한 자원입대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7] 그랬거나 한국인 위안부의 존재를 목격한 것. [8] 인도인들 사이에서는 비폭력으로 일관한 간디보다는 실제로 독립 투쟁을 전개한 보스를 더 존경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하지만 당시의 주류였던 북인도의 인도아리아계 힌디들은 암리차르 학살 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무장 투쟁에 소극적이었고 보스는 동인도의 주류인 벵골족이었던 데다 세속주의자였던 탓에 힌두 극단주의자들은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을 더 추앙하고 있다. [9] 스테판 반데라 문서의 '우크라이나 내의 평가' 문단에도 서술된 내용이지만 우크라이나 자유주의 정치인이자 반데라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피해자의 후손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조차도 반데라를 나쁜 놈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우호적 시각을 고려해 우크라이나의 자유를 수호한 영웅이였다고 평가하면서도 우리는 현대의 영웅, 예술의 영웅, 문학의 영웅, 우크라이나의 모든 영웅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그에 대한 지나친 옹호를 경계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크라이나 입장이고 폴란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정치성향을 초월해서 사악한 파시스트로만 인식된다. [10]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보스를 파시스트, 나치 협력자 카테고리로 분류했고 이에 대한 근거로 수많은 학술 논문과 서적을 각주로 달아 놨다. [11] 이는 소련의 식민지였던 발트 3국이 고국의 독립을 위해 독소전쟁 당시 나치 편에 가담한 군인들, 유고슬라비아의 영토였던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위해 나치와 손을 잡은 우스타샤가 서양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대세라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사실 이쪽은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으니 욕 먹어도 싸긴 하며, 특히 후자는 나치도 기겁할 정도로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던지라 오히려 독립운동 이라는 이름을 더럽힌 수준. [12] 만네르하임의 핀란드처럼 딱 적국과의 싸움만 도움을 받고 다른 싸움에 개입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나치즘 사상을 진지하게 믿고 안다만니코바르에서 학살을 저질렀으니... [13] 현재 인도에서도 네오나치나 일빠들의 의견을 반박할 때 이들의 통치가 영국의 통치는 그저 애들 장난으로 보이게 할 정도로 폭압적이고 잔혹했을 거라고 비난할 때 자주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