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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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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 지역의 표기
서기 1801년~1900년
간지 경신년~ 경자
단기 4134년~4233년
불기 2401년~2500년
황기 2461년~2560년
1. 개요
1.1. 주요 사건
2. 전 세계 각지의 상황3. 연도4. 연대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801년 1월 1일~ 1900년 12월 31일.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 퍼트린 민족주의, 법치주의, 자유주의, 시민평등사상과, 증기기관으로 시작된 산업 혁명이 만들어낸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 만들어지며 근대화가 시작되며 힘을 키웠고, 이후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

동아시아 조선, 청나라, 에도 막부가 모두 쇠퇴기에 들었다. 대영제국과의 아편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든 청은 쇄국 정책을 펼치며 망국의 길로 향했고 조선은 정조 사후 순조 시대가 도래하며 세도 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급속하게 병들어갔다. 쇄국 정책을 펼치던 에도 막부는 미국의 흑선 내항으로 강제 개항됐고 내분을 거친 끝에 무너졌다. 이후 일본은 미국이 남북 전쟁으로 혼란기에 접어들어 일본 열도에 간섭할 여력이 없어진 정국 속에 메이지 유신을 거쳐 한중일 중 가장 먼저 근대화를 달성하였고 청과 러시아를 연달아 격파하며 열강 대열에 합류했다.

미국 남북 전쟁이후, 강력한 연방을 구성하며, 전기의 미래 가능성을 본 발명가들에 의해 2차 산업 혁명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그리스가 독립해나가고 중앙정부가 이집트 등 제국의 주요 지방세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갔으며 프랑스와 영국의 후원 아래 러시아 제국을 막는 방파제 역할로 전락하였다.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포함한 수많은 사상이 퍼져나갔으며, 독일 이탈리아가 통일 국가로 거듭났다. 또한, 산업 혁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 유럽 외의 국가들은 유럽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가속도가 붙었다.

이 시기는 오랜 시기 유럽 평화가 지속된 시기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1815년 끝난 이래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1914년까지 유럽의 주요전쟁으로 크림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정도였으며 다 합쳐도 총 44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를 "백년 평화"라고 부른다. 이 평화를 지탱시킨 것은 빈 체제, 즉 빈 회의 이후 이루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신성동맹이었으며, 이 시기는 오늘날까지 '유럽의 최고 전성기'로 기억되고 있다.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의 125년을 "장기 19세기"로 규정하고, 1848년 2월 혁명까지를 "혁명의 시대", 그 뒤의 시대를 자본의 시대(1876년까지), 제국의 시대(1914년 1차 대전까지)로 구분하였다.

20세기 못지않은 엄청난 발전을 이룬 시대이다. 사진, 영화, 기차, 증기선, 자동차, 전신, 전구 등이 처음으로 등장하여 인류 사회를 뒤바꿔놓았다.

1.1. 주요 사건

2. 전 세계 각지의 상황

2.1. 유럽

유럽이 세계의 주도권을 잡고 각지를 식민지로 삼고 다스린 제국주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시대였다.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바로 19세기의 열강이었다. 이 제국주의는 20세기에 두 차례 세계 대전으로 폭발하게 된다. 문화적으로는 낭만주의와 이의 반동인 사실주의, 자연주의가 등장하였다.

한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시대에 이르러 근대 철학은 원숙기를 맞게 되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 쇠렌 키르케고르 등 현대 철학의 선구자들이 등장하였다. 산업 혁명과 공업 발달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사회주의가 보급되었으며, 중반에는 카를 마르크스가 등장하여 이후 한 세기 넘게 세계를 흔드는 공산주의를 정립하였다. 미하일 바쿠닌으로 대표되는 무정부주의 또한 사상의 한 축으로 등장하였다.

한편 학문적으로는 실증주의, 역사주의가 성립하여 각종 인문학에서 한 학문의 종합이 시도되었으며, 2차 산업혁명으로 중공업, 전기전자,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면서 과학적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한 공학의 뼈대가 섰다. 찰스 다윈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종교계와 생물학계를 뒤흔든다.

빅토르 위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등 문학의 거성이 이름을 날리고,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등 인상주의가 유행하면서 미술에서도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리하르트 바그너, 요하네스 브람스, 주세페 베르디,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프란츠 리스트, 프레데리크 쇼팽 등 거장들이 등장한다.

2.1.1. 영국

영국의 패권이 영원할 것으로 예측될 정도의 최전성기이자 평화의 100년이라고도 불린 시기가 대부분 19세기다. 1815년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 이긴 워털루 전투 이후부터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세계대전 이전까지를 의미한다. 이후 세계 패권은 미국에게 넘어간다.

영국은 1828년 비국교도(비 성공회교도)에 대한 관직 제한법인 심사법을 폐지하고 가톨릭 교도에 대한 차별을 폐지하기 위해 1829년 가톨릭교도 해방법을 제정하였다. 1832년 제1차 선거법이 제정되어 선거구는 폐지되었으나, 도시의 신흥 상공업자들에게만 선거권이 부여되어 노동자는 선거권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났다. 1837년부터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되고, "교육"의 보급으로 인해 절반의 영국인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는 등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1846년에는 곡물법을, 1849년에는 항해법을 폐지하여 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확립하였다.

문학적으로는 낭만주의의 종결과 함께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여러 소설가들이 잡지 연재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등 문학의 보급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여기에는 출판 기술의 발달과 문해율이 높아진 것도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19세기 영국의 대단한 변화는 한국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2.1.2. 프랑스

5분사탐-세계사 - 17강 나폴레옹 _#001

프랑스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을 제패하고 자유주의 확산에 기여하였으나 이에 대한 심한 반동을 겪고 부르봉 왕조가 복위하였다. 이후 성립된 빈 체제의 영향을 7월 혁명, 2월 혁명(1848년 혁명)으로 씻어내고 다시 자유주의적인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그 뒤 잠시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는 제정으로 돌아갔다. 제정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하고 붕괴되었고 파리 코뮌이 출현하였으나 이 또한 무너졌다. 그 후 제3공화정이 수립된 프랑스는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2.1.3. 베네룩스 3국

네덜란드는 혁명 이전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손에 넣으나 벨기에 혁명으로 이 지역을 잃었고 룩셈부르크만 보유하면서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했다. 독립에 성공한 벨기에는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벨기에 제국을 건설했지만 그 과정에서 레오폴드 2세가 잔혹한 행위를 일삼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5]

2.1.4. 독일

독일 1848년 혁명이 실패한 이래 프로이센 왕국 주도의 자유주의적인 개혁과 관세 동맹, 프랑크푸르트 회의를 통한 평화적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고, 이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철혈 정책 주도 하에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통일을 이룩했다. 이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프랑스를 떡실신시키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며 이후 영국 및 프랑스와 대립하며 군비 확장에 치중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congress_of_vienna.jpg
빈 회의 이후 유럽 지도, 1815년

2.1.5. 동유럽

오스트리아 제국 민족주의 열풍에 휩쓸려 체코인, 헝가리인 등 제국 내 소수민족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1848 혁명으로 위기에 빠졌다. 러시아 제국의 개입과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헝가리 왕국의 소수민족들인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 혁명을 제압해 합스부르크 왕가 중심의 제국을 공고히 하려 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패전으로 결국 독일 연방에서 완전히 이탈했고 제국 내에서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다음으로 인구가 많았던 헝가리인과 대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이원체제로 전환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헝가리인에게 특권을 부여하면서 제3민족으로 밀린 체코인, 헝가리인에게 가혹하게 탄압받기 시작한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등 제국 내 슬라브계 소수민족들이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을 끝으로 600년 역사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몰락하고 만다.

한편, 오스만 제국 치하의 여러 민족들도 격렬한 독립운동 끝에 독립에 성공했다. 서양의 사상적 원숙으로 불리던 그리스가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지원 끝에 그리스 왕국으로 독립했다. 세르비아는 세르비아 공국으로 자치권을 얻었다가 세르비아 왕국으로 독립했고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을 결성하여 통일을 이룬 끝에 루마니아 왕국으로 독립했다. 오스만 제국 유럽 영토의 마지막 보루였던 불가리아도 산 스테파노 조약 베를린 조약을 통해 불가리아 공국으로 반독립 수준의 자치권을 얻었다.

2.1.6. 이탈리아반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혁명의 물결으로 이탈리아반도 또한 통일을 향한 열망이 불타올랐다. 이미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이 된 밀라노 베네치아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의 방계가 다스리는 토스카나 대공국이나 모데나 공국,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방계가 다스리는 양시칠리아 왕국 파르마 공국, 교황이 주도하는 교황령 모두 후보에서 탈락하고 완전한 이탈리아계인 사보이아 가문이 통치하는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운동이 벌어져 적절한 외교와 군사력의 활용으로 통일에 성공하여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되었다.

2.1.7. 이베리아반도

스페인은 나폴레옹 전쟁 종결 이후 페르난도 7세가 다시 전제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도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에 힘입어 독립해 떨어져나갔다. 한편 페르난도 7세는 보르본 왕조의 등극과 함께 도입한 살리카 법을 폐지하여 딸 이사벨 2세에게 권좌를 물려주려 했으나 동생 카를로스가 반발하여 카를리스타 내전이 벌어졌고, 이념 문제와 결합된 끝에 알폰소 12세가 즉위하기 전까지 혼란을 달리게 된다.

옆나라 포르투갈 왕국 브라질을 잃었으며 그 브라질의 황제로 즉위했던 동 페드루 왕자가 딸 마리아 2세의 계승을 위해 동생 미겔과 내전을 벌이는 등 혼란에 빠졌다가 마리아 2세의 즉위로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다.

2.1.8. 러시아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 등과 함께 빈 체제에 의존하며 남진을 시도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훼방과 자체의 후진성으로 실패한다. 크림 전쟁의 패전 이후 봉건 제도 타파와 조직 혁신을 시도하였으나 개혁은 생각만큼 빠르지 못했고, 경과가 시원찮자 민심은 도리어 어지러워져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이 득세하게 된다. 그렇지만 동쪽에서는 성공을 거두어 캅카스를 정복하고 페르시아로부터 아제르바이잔을 빼앗는데 성공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카자흐 칸국, 코칸드 칸국을 합병했으며 히바 칸국 부하라 칸국은 괴뢰국으로 만들었고, 극동에서는 아이훈 조약 베이징 조약을 통해 스타노보이 산맥 너머의 청나라 영토였던 외 만주 연해주를 석권했다.

2.1.9. 북유럽

스웨덴은 비록 나폴레옹 전쟁으로 러시아에게 핀란드를 빼앗겼으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 왕태자의 활약으로 노르웨이를 빼앗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1867년부터 한파와 기근이 발생하자 많은 스웨덴인이 미국으로 건너가는 등 고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리고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동등한 주권을 갖기 위해 노력하나 실패하자 결국 독립하여 떨어져나갔다.

덴마크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노르웨이를 스웨덴에게 빼앗겼으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두고 독일 연방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겪었다. 결국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으로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빼앗기며 별볼일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2.2. 아메리카

신생 국가 미국은 19세기에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다. 이 시대에 서부 개척이 활발하였고 대륙 횡단 철도가 건설되었다. 중간에 남북 전쟁을 치르기도 했으나 19세기가 끝날 무렵 미국의 국력은 몰라볼 정도로 신장되었다. 한편 미국은 태평양 지역의 섬과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으며, 일본을 개항시켰으나 남북전쟁으로 인해 식민지화 계획이 물 건너 가면서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대개 중재 역을 맡게 된다.
Saylor.org HIST212: "The Spanish-American War and American Imperialism"

미국은 19세기 초 영국과 미영전쟁을 치른 이후, 먼로 독트린을 통해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 간섭하지 않도록 선포하는 등 유럽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는 중남미 독립운동을 자극하였으나, 실제로는 이제 전 아메리카의 짱은 나니까 유럽 니들은 잔소리하지 마라!에 가까웠다. 이에 남미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스페인과 미국-스페인 전쟁을 벌여야 했고 미국이 승리하면서 남미의 종속화가 가속화된다.

2.2.1. 남미

한편 먼로 독트린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스페인의 영향력 약화로 산 마르틴 시몬 볼리바르 등 혁명가가 출현하여 중남미의 여러 국가들이 잇달아 독립하였다. 가장 먼저 독립한 나라가 1804년 아이티. 참고로 브라질은 독립할 당시엔 제정이었다. 한때 남미에도 거대 연합국이 출현할 뻔 했으나 결렬되고 500일 전쟁, 태평양 전쟁 등 각축전이 계속되었다.

2.3. 서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연패하면서[6] 적지 않은 영토와 이권을 내주고 말았고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 반도에서는 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집트에서도 무함마드 알리가 사실상의 독자정권을 수립하는 등 한마디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였다. 이에 제국은 탄지마트를 비롯한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고, 제1차 세계 대전 패망 이후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이어지는 국민 국가 구조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총독 무함마드 알리가 와하브 운동 진압 등의 공헌으로 자치권을 획득하고 사실상 독립 상태가 되었으나, 수에즈 운하에 들씌워진 차관으로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이란 카자르 왕조 또한 시련을 면치 못했다. 투르코만차이 조약 이후 문호가 열렸고, 담배 등 서양 상품 불매 운동, 입헌 정치의 도입 등이 시도되었으나 영국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이란의 식민지화를 가속화하였다.

2.4.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반식민지 상태였던 인도를 영국이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었고, 무굴 제국의 황위를 빼앗으면서 영국은 제국을 칭하게 된다. 베트남은 선교사 살해를 명분으로 침탈을 본격화한 프랑스의 식민지로 편입되었으며, 미얀마 말레이시아는 인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영국이 차지하였다. 그나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 속국을 잘라주고 외교 관계를 적절히 이용하며 개혁에 성공한 태국을 제외한 거의 전역이 식민지화되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주도권 문제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2.5. 동아시아

2.5.1. 청나라

19세기가 시작될 무렵 동아시아는 기존 체제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며 강대국이 된 서양의 여러 국가와 달리 동아시아 삼국은 정부 조직에 만연한 부패와 기술 정체로 산업혁명에서 뒤쳐지며 국력이 약해졌고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침략이 본격화되었으며, 중국은 전쟁에 연전연패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는 등 강대국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물론 중국도 이홍장 캉유웨이 같은 인물이 개혁을 시도하고 의화단 운동 같은 민중 반란도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고 곳곳이 조차지로 들어가게 된다.

완전한 식민지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워낙 국가가 크고, 오랜 기간에 걸쳐 수억에 달하는 인구와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통일 국가가 수천년 전부터 확립되어 있었던 나라라 어떤 국가도 직접 지배는 무리였다는 의견과, 열강들의 견제로 인해 특정 국가에 의한 식민지배를 면했다는 의견이 있다. 어쨌든 열강이 힘을 합치면 식민지배가 가능했겠지만 그게 가능했으면 1, 2차 세계대전은 없었을 것이다. 열강이 제대로 힘을 합쳐서 전쟁에 임한 건 의화단 전쟁 당시의 개입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2.5.2. 에도 막부 ~ 일본 제국

5분사탐-세계사 - 19강 메이지 유신 _#001

당시 에도 막부의 통치기였던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개항하게 되고, 내부 분열이 시작된다. 결국 보신전쟁을 거쳐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뒤이어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주도하던 하급 사무라이들 중심의 전통주의 세력도 서남전쟁에서 격파한 뒤 메이지 덴노를 중심으로 한 정부가 수립되었고, 마침 남북전쟁 중이던 미국의 간섭을 피해 근대적 변신에 성공한다. 일본은 정부 주도의 급속한 공업화로 상당한 국력 신장을 이룩했고 19세기 말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은 수십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였던 판도를 완전히 뒤엎고 아시아의 초강대국이 되며 이후 타이완, 오키나와 등을 병합하는 한편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도 본격 추진하게 된다.

일본에서 19세기 동안 썼던 연호는 칸세이, 쿄와, 분카, 분세이, 텐포, 코카, 카에이, 안세이, 만엔[7], 분큐, 겐지, 케이오[8], 메이지 13개이다.

2.5.3. 조선 ~ 대한제국

조선은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영조/ 정조대에 싹 튼 세도정치가 조선 조정을 독점하게되면서, 국가는 모든 방면으로 쇠퇴했고, 백성은 분노와 불만을 농민운동으로 표출했다. 이러한 상황은 전국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내부적인 문제를 상당수 해결했지만, 서양 문물에 대해 폐쇄정책을 피던 중[9]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10] 고종은 비교적 유화정책을 폈으나 근대적인 국가/문물등의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인 결과로 제대로 된 개혁에는 실패하였고,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후, 많은 이권을 청일 양국에게 빼앗기며 점점 자주권을 잃게 된다.[11][12]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1894년부터 1896년 초까지 이어진 갑오개혁(+ 을미개혁)으로 근대의 틀을 갖춘 후, 1897년에는 대한제국이 수립하여 자주 국가를 표방하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을 이김으로써 대한제국을 더욱 간섭하고 더 나아가 대한제국을 합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2.6. 중앙아시아

서투르키스탄은 러시아에, 동투르키스탄는 청나라에 합병당했다.

3. 연도

4. 연대

5. 관련 문서



[1] 한국사에서는 서양 열강들이 조선을 침탈할때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정확히는 19세기 후반. [2] 당시 쿠로후네(흑선)으로 불렸던 배를 몰고 온 것은 미국 매튜 페리였다. [3] 9월 4일 오후. Engineering Technology and History Wiki 참고 [4] 대한제국을 조선의 역사로 보면 순종이 마지막 왕에 해당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고종이 마지막으로 '조선의 국왕' 지위에 있었다. 애초에 순종에게는 실권이 없었다. [5] 벨기에 제국의 영토 대부분은 콩고에 집중돼있었고 심지어 벨기에 국유지가 아닌 레오폴드 2세 개인의 사유지였다. [6] 크림 전쟁에서 단 한 번 승리했지만, 이마저도 영국, 프랑스 등이 오스만의 편에서 개입해준 덕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지원해준 은혜(?)를 앞세우며 내정에 간섭하여, 오스만 제국은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결과를 맞이했다. [7] 사용 기간이 1년을 채우지 못했다. [8] 이 때 헤이세이가 연호 후보로 올라오기도 했다. [9] 서양 세력의 조선내 횡포가 잦았다. [10] 최익현의 하야 상소가 대표적이다. [11] 이 외에 영국, 미국 등 서양의 열강들에게도 각종 산업권을 뺏기며 정치마저도 청에서 간섭했기에 날이 갈수록 대한제국은 상당수의 이권을 잃었다. [12] 다만 고종 일본 제국 대한제국을 독점하여 합병 시도를 하려는 것을 흐트리기 위해 한 것이다. 또한 동도서기론으로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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