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10:38:08

도요토미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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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정권 최고 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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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정권
豊臣政権
파일:1719369652184.png
1585~1603년
이전 이후
센고쿠 시대 에도 시대

1. 소개2. 역사
2.1. 초기2.2. 천하통일(1590년)2.3. 임진왜란(1592~1598년)2.4. 히데츠구 할복 사건(1595년)2.5. 히데요시 사망(1598년)2.6.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2.7. 에도 막부로(1603년)2.8.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1615년)
3. 정권 구조4. 군사5.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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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부터 에도 막부의 성립까지 이어진 도요토미씨 정권에 대한 문서.

2. 역사

2.1. 초기

시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당대에도 천한 출신이라는 평을 받은 히데요시였지만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하던 도중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자 가장 빠르게 회군하여 배신자 아케치 미츠히데 야마자키 전투에서 격파하고 죽은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키요스 회의에서 자신이 지지한 산보시를 옹립하는데 성공하여 오다 정권의 실권을 접수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다른 노부나가의 아들들을 제거 및 제압하고 관위도 오다 정권보다 높아짐에 따라 어린 산보시도 제치고 오다 정권을 대체하게 된다. 이 와중에도 히데요시는 자신의 적수들을 제압했고 1585년 히데요시는 관백상론에 관여하여 관백의 자리에 올라 조정의 최고 자리에 오르며 보통 히데요시가 관백이 된 1585년을 도요토미 정권의 시작으로 본다.

2.2. 천하통일(1590년)

결국 승승장구하던 히데요시는 1590년 천하통일을 이루어 낸다. 이미 우에스기. 모리, 도쿠가와, 시마즈 등 여러 가문들이 그에게 복종하였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후호조씨는 멸망하며 간토와 도호쿠의 다이묘들도 전부 히데요시에게 굴복하였다. 천하통일을 이룬 히데요시는 태합검지, 카타나가리(칼사냥)을 실시하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조치를 취한다.

2.3. 임진왜란(1592~1598년)

그런데 오랜 전쟁을 끝내고 천하통일을 이룬 만큼 한동안 내치에 전념하며 내부 통제를 강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을 해도 모자랄 시기에 히데요시는 대뜸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이 전쟁은 결과적으로 후술할 히데츠구 사건과 더불어 정권의 재앙이 되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먼저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전한 장군들이 모두 도요토미를 지지하는 다이묘들로 참전한 병사들도 모두 그들의 사병이다. 심지어 이들의 주 기반은 서일본 지역이라 동일본에 비해 발을 뺄 명분도 없었고 때문에 그만큼 많은 병력을 동원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의 병사가 임진왜란에서 많이 죽어버려 힘이 약화되었다.
  • 반대로 도요토미를 그리 지지하지 않는 다이묘, 특히 가장 경계한 이에야스는 동쪽의 에도에 있었는데 여기는 구 후호조씨 영지였던지라 원래 의미는 숙청할 명분은 없으니 고생이나 실컷 하고 혹시 영지 관리 못해서 사고나면 넌 죽는다는 의미였는데 이에야스가 성공적으로 새 영지 경영에 성공한데다 옛 후호조씨 영지라는걸 이용해 파병도 영지 안정을 핑계로 거부해[1] 힘을 그대로 유지했다.
  • 마지막으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전쟁은 결국 패배로 끝났다.

2.4. 히데츠구 할복 사건(1595년)

이 와중에 내부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본디 히데요시는 아들이 없었다. 아들을 세번 얻긴 했지만 먼저 얻은 두 아들들이 일찍 죽자 히데요시도 자기 직계로 대를 잇는 건 포기했는지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세우고 1591년에 관백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합이 되었다.

문제는 1593년에 히데요리가 태어난 것이다. 새 후계자의 기반이 다져져야 할 시기에 갑작스레 태어난 히데요리의 존재는 정권에 있어서 오히려 독이 되어버렸다. 이미 히데츠구에게 다 몰아진 상태에서 히데요리로 후계자를 바꾸기에는 너무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 하고 반대로 히데츠구에게 물려주면 히데요리의 존재가 히데츠구에게 걸림돌이 된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히데요리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히데츠구를 숙청한다. 결국 히데츠구는 할복으로 생을 마감한다.

문제는 숙청 과정이었다. 당사자인 히데츠구를 죽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그 일가족까지 죽여버렸다. 죄목도 덴노에게 돈을 바치고 유력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준 것 정도로 그 당시에도 특별할 것 없던 일을 빌미삼아 히데츠구를 죽인 것도 문제지만 그 일가족을 죽인 것도 문제인데 그 규모가 너무 크게 문제가 되었다. 히데츠구와 함께 그의 아내, 측실, 자식, 시녀까지 모두 처형되었는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는지라 나이가 어려도 여자라도 처형되었다. 원래 할복한 사람은 당사자로 처벌이 종료되는 게 원칙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폭거였다.

문제는 히데츠구가 원래 후계자였던 만큼 그의 아내, 측실 등은 모두 유력 다이묘의 딸들이었고 때문에 이 사건은 그들에게 어그로를 잔뜩 끈 셈이었다. 심지어 히데요시는 이들도 그냥 놔두지 않아서 측실인 코마히메의 아버지인 모가미 요시아키는 아버지라는 이유로 근신 및 연금되기도 했다.

심지어 이는 중신들에게도 피해가지 못해서 마에노 나가야스는 사망 키무라 시게코레, 세타 마사타다는 처형되었고 키노시타 요시타카, 아사노 요시나가는 유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기존의 영지를 몰수, 다테 마사무네와 모가미 요시아키는 처분을 기다리다가 이에야스에 의해 겨우 처벌을 면했다.

이 사건은 정권의 기반을 축소시켰으며 또한 지지를 크게 폭락시켰다. 도요토미 가에 충성한 이들이 별것도 아닌 이유로 죽어나가고 자기 딸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그들은 말은 않았지만 당연히 히데요시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후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많은 수가 도쿠가와의 편에 서게 된다. 심지어 전통적으로 가문을 섬겨온 후다이도 없던 도요토미 가인데 이 사건은 그나마 있던 가신들도 다수 숙청하는 제살 깎아먹기가 되고 말았다.

2.5. 히데요시 사망(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기도 전에 히데요시는 사망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한다.[2] 히데요시의 사망과 함께 정권에는 암운이 드리우는데 그 이유는 이에야스 때문. 기껏 고생하라고 에도로 전봉시켰더니만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대다이묘로 성장해버렸다. 그나마 히데요시가 생전에 마련한 안전장치들이 있긴 했지만 그 안전장치들을 히데츠구를 죽이며 날려버렸고 덕분에 이에야스는 별 힘 안 들이고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2.6.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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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의 판도[3]

그나마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은 것은 히데요시의 고참 가신인 마에다 토시이에 덕이었는데 그나마 토시이에도 히데요시가 죽기 전부터 건강에 문제가 있었고 결국 히데요시가 죽고 1년 뒤 죽고 만다. 중재자도 사라진 정권 내부는 더 심한 권력투쟁에 돌입했고 히데요시 사후부터 벌어지던 히데요시 밑에서 오봉행 등을 역임한 이시다 미츠나리 등 문치파와 기껏 참전한 전쟁에서 손해만 본 무단파의 대립이 심해진다.

이 와중에 차기 대권주자인 이에야스는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하면서도 세력규합에 나섰고 이에 이시다가 반발하게 된다. 그 와중에 심해진 분쟁은 결국 무단파가 이시다의 거처를 공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이는 이에야스의 중재로 진정되지만 이에야스는 그 대가랍시고 이시다의 오봉행 직을 강제로 내려놓게 만든다.

상황은 점점 이에야스에게 유리해짐을 느낀 이시다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전쟁을 선택했고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하지만 이시다의 서군은 엄청난 패인을 낳으며 패배했고 결국 이에야스가 승리, 사실상 일본천하의 주인이 된다.

2.7. 에도 막부로(1603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에야스는 일본 권력구조를 개편했고 결국 1603년 쇼군이 되고 막부를 연다. 이로서 에도 막부가 열리고 에도 시대가 시작된다.

이에야스가 쇼군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도요토미 가문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앞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편에 선 다이묘들 중에서는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지만 단지 이시다가 싫었고 또 이시다가 위협이라고 여겨 줄을 선 다이묘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가문의 직할 영지가 일본 각지의 222만석에서 셋츠, 카와치, 이즈미 3국으로 제한되어 65만석으로 감봉당하긴 했지만 그 남은 영지들이 일본 내 핵심 지방인 기나이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쿠가와 입장에서 도요토미는 아직도 위험한 세력이었다.

거기다 도요토미가는 여전히 셋칸케(摂関家)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히데요리는 순조롭게 높은 관직을 부여받았으며 가신들에 대해 독자적인 관직 서임권을 행사하였고 매해 신년마다 조정의 공가(公家)들에게 거성인 오사카 성에서 참배를 받는 등 히데요시 생전과 다름없는 높은 예우를 받았다. 무가 사회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가신은 부신(陪臣)이 아닌 도쿠가와의 직통 가신과 동등하게 인정받는 등 도요토미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과 일정하게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여 일각에서는 이 시기를 두 개의 정권이 공존하는 「 이중 공의 체제(二重公儀体制)」라고 평가하기도 한다.[4]

설상가상으로 시간도 이에야스에게 불리했다. 쇼군 취임 당시 이에야스는 60세였고 그 때 히데요리는 10살이었는데 히데요리는 점점 성장하는데 이에야스는 갈수록 늙어가는 것도 문제였고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에야스만한 역량은 없는지라 만일 이에야스가 그대로 죽어버리면 도쿠가와 가문의 미래는 어두울 수 밖에 없었다.

2.8.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1615년)

때문에 이에야스는 아얘 재임 2년만에 쇼군 자리를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오고쇼가 되어 실권을 쥐어 일단 쇼군직을 물려주는데는 성공하고 친도요토미 다이묘들을 압박하거나 긴키 지방의 성들을 중축하여 오사카를 고립시키고 공성무기를 만드는 등 기회를 노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도요토미 다이묘들이 의문사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런 일을 겪지 않은 다이묘들도 도요토미 가문을 돕지 않았는데, 우에스기나 모리는 세키가하라때 박살나서 이번에 박살나면 진짜 끝장이라서, 다테는 불만이 없진 않아도 대세가 도쿠가와라서, 마에다도 비슷한 처지, 호소카와도 도요토미 가문에 미래가 없다고 여겨서, 시마즈는 어차피 먼 동네 일이라 관망이 장땡이라 여겨 각자 도요토미 가문을 버린다.

이렇게 도요토미 가문의 보호막이 얇아지는 와중에 결국 호코지 종명 사건이 터지면서 이게 계기가 되어 오사카 전투가 벌어진다.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이 패배하고 요도도노와 히데요리는 자결하고 아들 쿠니마츠는 살해당하면서 히데요리 직계의 핏줄은 끊기고 가문은 멸망하였다.

3. 정권 구조

무가 정권이지만 특이하게도 무가의 상징격인 쇼군이 아니라 조정의 관직을 가진 관백 태정대신의 직함으로 일본을 통치하였다. 이는 후지와라 섭관정치나 헤이케와 비슷한 모습이다. 오랜 전란끝에 세워진 만큼 도요토미는 중앙집권을 위한 정책을 여럿 내놓았고 이는 에도 막부가 계승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고쿠다카 검지, 카타나가리 등이 있다.

관백 아래로는 오봉행이 각 분야 실무를 담당하였고 히데요시가 사망하기 전에는 오대로가 히데요시 아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5] 다만 중앙집권 정도는 에도 막부에 비해 떨어졌는데 일본을 통일하고도 분란이 계속 벌어져 조선통신사가 도착했을 때 히데요시는 전쟁에 나가서 몇달이나 자리를 비웠을 정도였고 이에야스 같은 너무 힘이 센 다이묘도 있었다.[6] 이렇다 보니 결국 히데요시의 목숨으로 이어가는 구조였고 결국 히데요시가 죽자 정권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다만 도요토미 정권의 중앙집권도가 마냥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에시당초 정말로 중앙집권도가 허약했으면 히데요시가 자기 혼자만의 야욕을 위해 무려 47만명의 대군을 소집하고 그중 총합 20만은 거뜬히 넘는 병력을 바다 건너에 밀어넣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7] 중앙집권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전근대 사상 가장 안정된 정권을 이룬 에도 막부와 비교할 때의 일이며 도요토미 정권은 히데요시가 건재할 때까지는 전근대 일본사에선 상당히 중앙집권이 강력한 축에 들어간다.

도요토미 정권의 특징으로는 지방 다이묘들의 일부 유력 가신들을 주가로부터 분리시켜 히데요시의 직신이자 독립 다이묘로 만드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 있다.[8] 이는 다이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견제를 통해 지방 통치를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는 다이묘 가문 내부의 분열과 불만을 촉발하여서 분쟁이 터지는 원인이 되었다.[9]

도요토미 정권의 중심지는 오사카였다. 하지만 법적 수도는 여전히 천황과 조정이 있는 교토였고 히데요시 본인도 교토에 주라쿠다이(聚楽第)라는 대저택을 건설하고 장기간 거주하며 여러 정치적 행보를 보였기에 오사카 독주체제는 아니였다. 그리고 히데츠구 숙청 이후 히데요시는 주라쿠다이는 철거하고 교토 남쪽에 새로 후시미 성을[10] 건설하여 주라쿠다이를 대체할 정무 중심지로 삼았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는 규슈 북부 히젠국에 건설한 히젠 나고야성이 전초기지 역할을 하며 히데요시가 그곳에서 전쟁 관련 지시를 내렸다.

4. 군사

중앙집권 정도가 비교적 낮다보니 군대 역시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임진왜란에 쳐들어온 일본군은 얼핏보면 하나의 일사불란한 군대 같지만 실제로는 각 군 지휘관이 각 군대 병사의 소유자들로 말하자면 현장에는 제대로 된 통합 지휘관 없이 각 군대 사령관들이 지휘권을 행사하는 형국이었다. 이러다 보니 탄금대 전투에서는 동선이 겹치는데도 함께 싸우지 않았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가토의 지원요청을 고니시가 씹었으며 명나라와의 강화협상때는 가토가 이를 파토내려고 혈안이 되어서 히데요시가 발끈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조선에서도 잘 알고 있었을 지경.

그래도 오랜 전란으로 각지의 영주들이 자체적인 병력을 최대한 많이 갖추고 실전도도 높은 상태에서 탄생한 통일정권인만큼 군대의 규모는 정말 대단했다. 나름대로 일본의 침공을 대비한 조선이 전쟁 초기에 방어선이 거의 전부 무너져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을 정도였고,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온 명군을 상대로도 기병과 포병 전력이 압도적으로 밀렸음에도 상당히 분전하여 큰 피해를 입혀 협상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수군 역시 단순 규모로는 조선을 압도했다. 이순신이 그렇게 많이 가라앉혔는데도 수적으로는 전쟁 종반까지 우세했을 정도로. 전국시대 동안 일본 내에서 득세한 해적집단 덕분에 수군 역시 실전경험이 꽤나 있었다. 다만, 대형선이 부족했고 그 대형선마저 제대로 된 함포를 장착한게 드물어 일본 수군 주력선인 세키부네를 압도하는 크기에 많은 함포를 장착한 조선 수군의 주력선 판옥선을 상대로 크게 고전했다.[11] 무엇보다, 조선의 바다에는 이순신이 있었기에...

5. 외교

히데요시가 주변국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관계로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였기에 처음부터 좋은 관계가 없었다. 당장에 조선에 사신 보낼 때도 그랬고... 그래도 명나라와는 강화협상 때 잘 지내보려는 움직임도 없지는 않았지만 강화협상이 파토나서 끝까지 조선, 명나라와는 적대관계였다.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조선에 군사지원을 하려고 하기도 했고(결국 무산됐지만)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도중에 여진족과 싸우기도 했기 때문에 여진족과도 사실상 적대관계나 다름없었다.

그 외에도 이곳저곳에 선전포고에 가까운 무례한 서신들을 보내서 주변국들은 전부 히데요시를 경계했다. 류큐 왕국은 국력차 때문에 머리를 숙이긴 했지만 조선 침공 지원은 피하고 뒤로는 명나라와 협력했다. 동남아의 아유타야 왕국도 상국인 명나라에게 조선의 사정을 들은 후 교전 의사를 표하며 명과 함께 일본 본토 침공을 고려하기도 했다. 거리 때문에 무산되었지만. 또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도 히데요시의 서한을 받고 마닐라 총독부가 일본의 침공을 대비하기도 했다. 거기다 선교사 추방령으로 교역하던 서양 국가들과도 관계가 악화되었으니 사실상 도요토미 정권 시기 일본은 국제왕따에 가까웠다.
[1] 일부 군대를 히젠 나고야성에 배치시켰지만, 끝까지 파병은 하지 않았다. [2] 임진왜란은 이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도요토미 정권의 발목을 잡았는데, 나중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편에 서는 시마즈 요시히로, 타치바나 무네시게, 소 요시토시, 고니시 유키나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잡혀 최대 1만 3천 여명이라는 큰 손실을 입으며 대패한다. [3] 초기 판도와의 주된 변화로는 히데츠구, 오토모 가, 가모 가 등이 개역당하고, 우에스기 가문이 전봉되어 본거지를 아이즈로 옮긴 것(사도국과 데와 쇼나이 지방은 유지)과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오와리로 전봉된 것 등이 있다. [4] 당장 이에야스가 쇼군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준 시점에 히데요리는 우대신, 히데타다는 그 밑의 내대신으로 도요토미가의 관위가 도쿠가와가보다 높았다. [5] 또한 이들 사이를 조율하는 삼중로들도 있었다. 다만 삼중로가 정식으로 부여된 직위나 조직인지는 불명확하다. [6]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직할령보다 많은 영지를 가진 것을 제하고도, 우에스기나 모리 같은 100만석을 훌쩍 넘기는 영지를 지닌 대영주도 있었다. 에도 시대에는 공식적으로 백만석을 넘긴 번이 마에다 가문의 카가 번 하나뿐이었다는 것과 대비된다.(다만 공식 석고와는 별개로 다테 가문의 센다이 번은 실질 석고가 백만석을 넘겼고, 막부 말기에는 조슈 번 역시 실질 석고가 백만석을 돌파하였다.) [7] 물론 가장 강대한 다이묘인 이에야스를 조선 정벌에 투입시키지 못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를 포함한 모든 다이묘들은 자신의 병력을 전초기지인 히젠 나고야까지는 집결시켜야 했다. 그리고 이에야스와 그를 견제할 마에다 토시이에를 빼면 대영주라 할만한 다이묘들은 도호쿠 북부 쪽 다이묘들을 제외하면 전부 병력 일부를 조선에 보내거나 자기가 잠시나마 조선에 건너가야 했다. [8] 대표적으로 이시카와 카즈마사(도쿠가와), 타치바나 무네시게(오토모), 츠가루 타메노부(난부), 나베시마 나오시게(류조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모리), 이주인 타다무네(시마즈) 등. [9] 반대로 에도 막부는 위와 같은 행위를 지양하고 쇼군이 다이묘 가신들과의 직접적인 주종관계를 맺지 않으며 다이묘의 권위를 올려줌과 동시에 일원화되고 안정된 지방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10] 세키가하라 전쟁 때 공성전으로 소실된 후 그 터가 모모야마(桃山)라 불리게 되어 모모야마 성이라고도 칭해진다. 오다 정권과 도요토미 정권을 묶어 부르는 시대구분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모모야마가 여기서 따온 것이다. [11] 안택선은 판옥선과 대체로 비슷한 크기였으나 문제는 이들은 대장용 기함이라 수량도 부족하고 선봉으로 나서기에도 부담이 컷다. 무엇보다 화력이 처참히 부족한건 똑같아서... 안택선의 강화판인 텟코센이나 특별히 거대하게 만든 안택선도 있었으나 이들은 수가 더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