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12:40:43

병사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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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스토리3. 기타4. 주제곡

1. 개요

병사의 시(Баллада о солдате, Ballad of a Soldier)는 1959년에 제작된 소련 영화이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출신 영화감독 그리고리 추크라이(Григо́рий Чухра́й)가 제작했다.

흔히 전쟁의 영광과 공산주의 체제의 위대함을 다룬 선전영화만 주구장창 제작했던 소련에서 나온 파격적이고 흔치 않은 내용의 영화로 알려져 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다뤘던 제9중대와 함께 러시아의 대표적인 반전 영화로 손꼽힌다.

전체적인 내용은 더글라스 서크 감독,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원작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와 꽤나 비슷하다.

2. 스토리

러시아 시골의 어느 마을, 검은색 스카프를 두른 늙은 여인이 마을 입구에서 슬픈 눈망울로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전쟁이 한창인 동부전선 어딘가, 독일군에 의해 자신의 연대가 괴멸된 이등병 알렉세이 "알료사"[1] 스크보르소프는 우연히 일개 대전차 소총 한자루로 티거 2대를 격파 한다.[2]

가까스로 부대에 복귀한 알료사는 동료의 증언으로 중대장에게 전차를 격파한 사실을 보고한다. 그의 말을 들은 중대장은 그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서훈하려 했으나 알료사는 훈장보다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고 집의 지붕을 고쳐주고 싶다는 말을 한다. 그러자 중대장은 흔쾌히 알료사의 의견을 승낙하고 전차를 잡은 공으로 6일 간의 휴가[3]를 준다.

하지만 휴가를 떠나는 내내 알료사는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일단 휴가를 떠나기 전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알료사의 선임 하나가 자신의 아내에게 줄 비누 선물을 알료사 보고 대신 전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열차를 타는 순간에는 다른 부대 병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전투 중에 다리를 잃어 상이 군인이 되어 의병 제대를 하는 중이였다. 알료샤는 처음에는 어머니를 뵈러 간다는 사실에 신나서 가진 돈으로 부모님께 선물로 드리려고 검은색 스카프도 사고, 이 군인의 가방도 대신 들어주는등 들뜬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열차를 타는 내내 그 병사와 이야기를 나눈 알료샤는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 병사가 자신의 다리가 불구가 된 이 흉측한 모습을 자신의 아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줄지 의문이라며 눈물을 흘리고 두려움에 떨며 고통스러워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알료샤의 심정은 매우 복잡미묘 해진다.

알료사는 군용 열차를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고기통조림으로 주고 군용열차를 탄다. 나중에 담당장교한테 걸리기는 하는데 어머니를 뵈러 간다는 알료사의 당당함이 맘에 들었는지 그냥 넘어가 준다. 그와중 약혼자를 만나러 가기 위해 열차에 무단으로 탑승한 슈라라는 소녀와 인연이 되어 함께 여행을 하게 된다.

중간에 알료샤는 물을 떠오려다가 열차를 놓치는 바람에 지나가던 트럭을 얻어타고 다음역으로 향한다. 이때 트럭을 몰던 사람은 왠 고령의 할머니였는데, 힘이 없어서 진흙탕 속에서 잘 나가지도 못하는 트럭과 자신의 모습이 똑같다고 한탄하며 '나에게도 자네와 같은 전쟁에 나간 아들이 있다.'고 말한다. 알료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랐는지 착잡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본다.

다행히도 슈라는 다음역에서 내려 알료샤를 기다려주었고, 둘은 다시 여정에 오른다. 그리고 아내에게 비누를 건네달라고 부탁한 선임병 세르게이의 고향에 들른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찾아나서는데 이미 그녀는 나치 독일의 침략으로 인한 곤궁한 생활, 남편의 부재로 인한 가난한 삶 때문에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려버린 상태였다. 전쟁에 나간 남편이 아내에게 주기 위해 부대의 모든 비누를 모아 선물까지 보냈것만, 바람을 피고 있는 아내를 본 알료샤는 화가 나서 그녀에게 줬던 비누를 빼앗아 세르게이의 아버지를 만나 그에게 비누를 건네주게 된다.[4]

그리고 알료샤와 슈라 두 사람은 마침내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오는데, 슈라는 사실 약혼하지 않았고, 이모를 보러 가는 길이며, 처음 보는 알료샤가 두려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함께 다니며 순수한 그의 모습에 반해 연정을 품게 되었다.[5] 하지만 순진한 알료샤는 그걸 끝까지 알아채지 못한다. 알료샤는 그녀에게 자신의 고향집 주소를 알려주지만 열차 소리에 묻혀 슈라는 듣지 못한다. 슈라는 열차를 따라 뛰며 알료샤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고 아쉬움이 가득한 모습으로 발길을 돌린다.

동쪽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알료샤는 뒤늦게 슈라의 진심을 깨달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가버린 후였다. 낙담한 알료샤는 같이 합석한 노동자 무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들은 스탈린의 산업지대 이전 계획에 의해 우랄산맥 동쪽 너머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대부분 노인, 여자, 아이들로 이루어진 그들과 대화하며 알료샤는 겨우 마음을 추스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밤중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열차에 불이 나고, 알료샤는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구하지만, 혼자서 모두를 구할수는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은 이들을 추모하며 슬퍼하는 가운데, 열차 운행이 재개되지만 부상자와 아녀자들을 먼저 태우느라 정상 운행은 두시간 후에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알료샤는 지친 행색에도 나룻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고 걸어서라도 고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운 고향 땅을 밟지만, 정신차려보니 휴가는 고작 몇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6] 결국 알료샤는 어머니와 단 5분 간의 상봉을 하게 된다. 알료샤는 어머니께 선물로 사온 스카프를 드리고 포옹을 한 뒤 다시 전선으로 복귀한다.[7] 알료샤는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며 왔던 길을 되돌아 점점 멀어져 간다. 그리고 알료샤의 어머니는 그가 준 스카프를 두른 채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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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화면은 알로샤가 떠나간 길을 배경으로 페이드 아웃되며 아래와 같은 나레이션이 나온다. #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건설가가 됐을지도 모르고 대지를 정원으로 꾸몄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군인으로만 남았습니다.[8][9]

3. 기타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의 참담했던 상황, 소련 인민들의 비참한 삶을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소련 공산당의 눈 밖에 났고, 이 때문에 상영관을 많이 받지 못했다. 추크라이 감독은 이 영화를 트집 잡는 관료에게 '내가 전선에서 뺑이 칠때 당신은 아슈하바트[10] 후방 사령부에서 이나 쳐빨지 않았냐'고 대들었다. 참고로 추크라이 감독은 스탈린그라드등 격전지에서 싸우며 3번이나 부상당했고 무공훈장도 받은 참전용사였다. 이 영화는 그 경험에서 우러나온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셈.

영화는 대도시에서는 상영되지 못했지만 시골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게 된다.[11] 이 덕분에 상영관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을지언정 개봉한 지역에서는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영화가 주는 진정한 묘미는 당시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힘들었던 어린시절을, 장년층은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포화와 수라장을, 노인들은 돌아오지 못한 자식과 손주들에 대한 기억들을, 장면 하나하나 속에는 그 시절 소련 인민들이 겪은 고난과 역경이 모두 들어있었다. 사람들은 어려웠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쏟아냈고 이 영화가 상영되는 곳은 항상 울음바다가 되었다. 촌락 지역에서 이 영화가 흥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스베스치야 편집장은 자신의 장인 흐루쇼프 서기장에게 이를 전했고, 흐루쇼프 역시 영화를 감상한 뒤 깊은 감동을 받았다.[12] 이후 영화는 전국 영화관에 상영허가가 났고, 3100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에 힘입어 소련의 내로라하는 영화제에서 상도 탔으며 외국 영화제에도 출품까지 했다. 1961년에는 감독 본인과 각본가인 발렌틴 이바노비치 예조프가 함께 레닌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참고로 이 영화가 제작된 시기인 1950년대 후반은 스탈린의 공포정치로 인해 경직되어 있던 러시아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유화되어 가던, 소련의 문화적 해빙기 시절이었다. 대체적으로 이전보다 검열이 많이 느슨해졌고 그 덕분에 수 많은 공산주의 예술작품들이 탄생한 시기이다.[13]

전쟁을 소재로 하긴 했지만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장벽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인간 드라마라는 점 덕분에 서구권에서도 그 작품성을 인정을 받았다. 1960년에는 칸 영화제에 출품되어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심지어 서로 핵을 날리니 마니 하던 시기일 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 내로라 하는 영화제들에 출품되었고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는 골든게이트 상을 수상했다. 7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21세기 현재까지도 러시아 영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4]

여러 군데 영감을 준 작품으로,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알렉세이와 그 어머니를 소재로 <어머니의 시>라는 노래도 만들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 뒤 봄, 어머니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기록영화를 보다 그 영상에 촬영된 아들을, 살아있고 건강하고 상처받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아들을 발견하여 그 이름을 부르짖는다는 내용이다.

4. 주제곡

영화의 주제곡으로 나오는 노래로, 주인공으로 대변되는 당시 소련 보병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바스토폴과 같은 실제 지명들이 나오는 것도 특징.


트롤송으로 유명한 에두아르드 힐이 부르는 버전

자막
러시아어 한국어 번역 러시아어 독음
진한 글씨는 절의 마지막에 반복한다.
1 Полем, вдоль берега крутого, мимо хат
В серой шинели рядового шёл солдат.
Шёл солдат, преград не зная, Шёл солдат, друзей теряя,
Часто бывало, шёл без привала, Шёл вперед солдат.
들판을 넘어, 가파른 강변을 넘어,
민가를 지나 이병의 회색 코트를 입은 병사가 갔다.
앞의 장애물들을 모두 넘으며 갔고, 전우를 모두 잃으며 갔다.
그는 쉬지 않고 앞으로 갈 때가 많았지만, 그는 계속 갔다.
폴롐, 브돌 볘레가 크루토바, 미마 핫,
브 세로이 시넬리 랴다보가 숄 살닷.
숄 살닷, 프레그라드 네 즈나야, 숄 살닷, 드루제이 테랴야,
챠스타 븨발로, 숄 베스 프리발라, 숄 브페료드 살닷.
2 Шёл он ночами грозовыми, в дождь и град,
Песню с друзьями фронтовыми пел солдат.
Пел солдат, глотая слёзы, Пел про русские берёзы,
Про карие очи, про дом свой отчий Пел в пути солдат.
그는 폭풍이 몰아치는 밤에도 갔고, 비와 우박울 뚫고 갔다.
전우들과 함께 그는 노래를 불렀다.
그는 눈물을 머금으며 조국의 자작나무에 대해,
그리던 그녀의 헤이즐빛 눈에 대해, 그의 조국에 대해 불렀다.
그는 가는 길에서 노래를 불렀다.
숄 온 노차미 그로자븨미, 브 도쥬지 그라드,
페스뉴 스드루즈야미 프란타븨미 펠 살닷.
펠 살닷, 글라타야 슬료즤, 펠 프로 루쓰키예 베료즤,
프로 카리에 오치, 프로 돔 스보이 앗치이 펠 브 푸치 살닷.
3 Словно прирос к плечу солдата автомат,
Всюду врагов своих заклятых бил солдат.
Бил солдат их под Смоленском, Бил солдат в посёлке энском,
Глаз не смыкая, пуль не считая, Бил врагов солдат.
그의 기관단총이 어깨에 붙어있는듯,
여기저기의 적군과 맞서싸웠다.
스몰렌스크 근처에서 싸웠고, 주둔지 근처에서 싸웠다.
자신의 잔탄도 확인하지 않으며, 병사는 쉬지 않고 적군과 맞서 싸웠다.
슬로브나 프리라스 크플레추 살다타 아브토맛,
브스유두 브라고브 스보이 자클랴틔 빌 살닷.
빌 살닷 이 포드 스말롄스캄, 빌 살닷 브 포스욜케 엔스캄,
(글라스 녜 스믜카야, 풀 녜 스치타야,)[15] 빌 브라고브 살닷.
4 Полем, вдоль берега крутого, мимо хат
В серой шинели рядового шёл солдат.
Шёл солдат-слуга Отчизны, Шёл солдат во имя жизни,
Землю спасая, смерть презирая, Шёл вперёд солдат.
들판을 넘어, 가파른 강변을 넘어,
민가를 지나 이병의 회색 코트를 입은 병사가 갔다.
병사는 조국을 위했기에, 목숨을 얹어서 앞으로 갔다.
그는 세계를 구하며, 평화를 지키며 갔다. 병사는 앞으로 갔다!
폴롐, 브돌 볘레가 크루토바, 미마 핫,
브 세로이 시넬리 랴다보가 숄 살닷.
숄 살닷 슬루가 앗치스늬, 숄 살닷 보 이먀 지스니,
(제믈류 스파사야, 스몔츠 프레지라야,)[16] 숄 브페룟 살닷.

[1] 알렉세이의 애칭이다. [2] 원전은 소련 대전차반장 페로페예프 상병이 124호 티거의 연료통을 맞춰 화재를 내고 우골롭스키가 대전차 수류탄으로 궤도를 끊어 무력화해 두대의 티거를 격파한 얘기를 참조한것으로 추측된다. # [3] 고향까지 가는 데 이틀, 가서 어머니를 만나고 지붕을 고치는 데 이틀, 돌아오는 데 이틀 [4] 영화를 제작할 때 이 장면때문에 갈등이 많았다. 검열국과 영화 관계자들로부터 "부대에 비누가 없으면 병사들을 뭐로 씻습니까? 소련 병사들이 더럽다는 겁니까?" "지금 소련의 아내들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겁니까?"등 비난을 받았고 참전용사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었던 감독 그리고리 추크라이는 전선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지적에 분노했다고 한다. [5] 정확히는 처음에는 다소 적극적으로 대쉬했지만 두려워진 슈라가 약혼자가 있다고 거짓말하자 선을 그은 것이었다. 이후로도 슈라는 주위에서 일행이냐고 묻는 말에 자꾸 아니라서 답해서 상황을 곤란하게 만드는 등 알료샤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겁내지만 결국 그를 지켜보면서 그에게 반하고, 알료샤에게 은근히 대쉬하지만 알료샤는 이미 슈라가 자신을 좋아할 리 없다고 확실히 단념해 버린 것. [6] 정확히는 복귀 열차를 타야할 시간이다. [7] 참고로 이때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료사의 아버지 역시 전쟁에 나가서 전사했다는 걸 알수있다. [8] 사실 영화 시작부 마을 입구에서 길을 바라보던 늙은 여인은 사실 알료샤의 어머니였다. 그녀가 두르고 있는 스카프도 알료샤가 선물한 바로 그 스카프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와 얼굴의 주름이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짐작 하게 해준다. [9] 앞서 알료샤가 불러주는 집주소를 미쳐 듣지 못한 채 그를 배웅하던 슈라의 모습도 일종의 복선이라 할수 있다. [10] 중앙아시아 남부 이란과의 접경지역. 최후방이었던데다 연합군으로부터 들어오는 랜드리스 물자를 받는 곳이라서 매우 평화로운 근무지였다. [11] 참고로 소련은 외진 시골마을이라해도 도서관은 없을지언정 영화관만은 꼭 있을 정도로 영화의 보급률이 아주 높았다. 이는 문맹률이 높았던 소련 농민들에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보급하려면 글자보다는 영상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공산당의 정책 때문이었다. 이런 정책에 힘입어 소련은 영화산업이 매우 거대해질수 있었다. 게다가 표값도 몇백원 수준으로 엄청 싸서 서민들이 부담 없이 볼 수 있었다. [12] 흐루쇼프도 정치장교로 스탈린그라드 최전선에서 싸웠고 전쟁통에 아들이 죽었는데도 시신을 발견하지 못해 생사조차 확인할수 없던 상태였다. [13]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자유진영의 맹주였던 미국에서는 반대로 조지프 매카시 빨갱이 열풍이 불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찰리 채플린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수많은 예술인들이 외국으로 떠나거나 예술 활동을 그만 두었던 암흑기였다. [14] 이는 현재 러시아 영화계의 꼬라지를 보면 더욱 극명하게 대비된다. 2000년대 이후 러시아에서는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 시키기 위해 2차대전 소재 영화들을 다시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연출과 액션은 과거에 비해 월등하게 발전했지만 작품성으로는 국뽕코인에 의지한 혹은 헐리우드 전쟁영화의 카피라는 악평을 받고 있다. 현재 러시아 영화는 과거의 명성에 비해 점점 퇴보해가고 있으며 그 회복은 요원해보인다. [15] 부른 버전마다 이 부분이 조금씩 다르다. [16] 마찬가지로 버전마다 조금씩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