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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아 알바 전투 루마니아어: Bătălia de la Valea Alb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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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476년 7월 26일 | |
장소 | 몰다비아 공국 발레아 알바(현재 루마니아 라즈보이에니) | |
원인 | 바슬루이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한 메흐메트 2세의 친정. | |
교전국 | 몰다비아 공국 | 오스만 제국 |
지휘관 | 슈테판 3세 | 메흐메트 2세 |
병력 | 몰다비아인 12,000 ~ 15,000명 | 90,000 ~ 150,000명(당대 사료) |
피해 | 미상 | 30,000명 |
결과 | 오스만 제국군의 승리. | |
영향 | 몰다비아 공국군의 유격전과 기아와 전염병 창궐로 인한 오스만 제국의 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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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76년 7월 26일,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이 슈테판 3세가 이끄는 몰다비아 공국군을 격파한 전투.2. 상세
1475년 1월 10일, 몰다비아 공국 제19대 보이보드 슈테판 3세는 바슬루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분노한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는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몰다비아를 침공하려 했다. 슈테판 3세는 폴란드 국왕이자 자신의 주군인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에게 보내 승전보를 알린 뒤, 군대와 자금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교황청과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서신과 포로 몇명, 튀르크 군기를 보내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4세는 돈과 인력이 모두 부족하다며 지원할 수 없다고 통보했고, 교황청은 아슬레타 크리스티(Athleta Christi, 그리스도의 승리자)라는 칭호를 수여하면서도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1476년 봄, 메흐메트 2세가 90,000 ~ 15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여기에 왈라키아 보이보드 바사라브 3세도 10,000명을 오스만 제국군에 가담시켰고, 크림 칸국의 멜리 1세 기라이가 이끄는 타타르군 15,000명도 동쪽에서 몰다비아로 진격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먼저 타타르군부터 격퇴하기로 하고, 프루트 강 유역에 있는 슈테파네슈티 마을 인근에서 타타르군을 요격해 격파했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진 타타르군이 자기 고향을 파괴할 것을 우려한 많은 장병이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고 강하게 요구하자, 슈테판 3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이로 인해 슈테판 3세에게는 12,000 ~ 15,000명 가량의 병력만 남았다. 이후 예정된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기 위해 청야 전술을 단행했다.
1476년 6월 하반기, 오스만 제국군이 다뉴브 강을 도하한 뒤 시레트 계곡을 따라 수체아바로 진군했다. 슈테판 3세는 이에 맞서 수체아바 요새에 잘 훈련된 전사들을 보내 수비를 강화했고, 경기병대를 파견해 적 보급로를 유린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후스 전쟁 시기에 후스파가 쓴 전법에 따라 참호, 울타리, 마차를 연결하여 요새화한 높은 고원, 발레아 알바에 진지를 세웠다. 7월 25일, 슈테판 3세는 루멜리아의 베일러 베이이자 지난해 바슬루이 전투 때 격파했던 하딤 쉴레이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선봉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오스만 주력군이 도착하자 요새화된 진영으로 후퇴했다.
7월 26일, 오스만 제국군은 적 진영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몰다비아군도 이에 대응해 포격을 퍼부었다. 이때 슈테판 3세는 4,000 가량의 기병대를 적 진영으로 돌격하게 했고, 1,000명으로 구성된 또다른 부대를 숲속에 매복시켰다. 몰다비아 기병 4,000명은 적군을 한 차례 들이친 뒤, 즉시 말머리를 돌려서 요새가 있는 쪽으로 후퇴했다. 오스만군 경기병대가 이들을 추격했다가 언덕에 진을 치고 있던 몰다비아 궁수대 및 석궁병의 일제 사격을 받은 데다, 사전에 숲에 숨어있던 몰다비아 병사 1,000명이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는 바람에 혼란에 빠졌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메흐메트 2세는 아군을 구하기 위해 예니체리에게 몰다비아 진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다비아 포병대와 궁수대의 공격을 받고 한 시간 만에 퇴각할 조짐을 보였다. 그러자 메흐메트 2세는 경비병 및 시파히를 전장으로 투입시키는 한편, 자신 역시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로 했다. 파디샤가 전장에 뛰어들자, 예니체리의 사기가 고조되어 적진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이윽고 황혼이 가까울 무렵 몰다비아 방어선이 돌파되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1,000명을 남겨서 아군의 후퇴를 엄호하게 한 뒤 어둠을 틈타 후퇴했다. 아군의 후퇴를 엄호한 몰다비아군 1,000명은 대부분 생포되었다.
당대 사료에 따르면, 오스만군은 이 전투에서 30,000명을 상실했다고 한다. 반면 몰다비아군의 정확한 피해는 불분명하다. 그 후 슈테판 3세는 몰다비아 북서부로 후퇴해 또다른 군대를 편성했고, 오스만 제국군은 몰다비아 영토 상당 부분을 점령했지만 슈체아바, 네암츠, 호틴 등 요충지들을 공략하지 못했으며, 몰다비아 분견대들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았다. 그 결과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기아에 직면했고, 전염병 마저 창궐해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던 중 이슈트반 바토리가 트란실바니아에서 반 오스만 봉기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메흐메트 2세는 1476년 8월 본국으로 철수했고, 슈테판 3세는 빼앗겼던 영토를 전부 탈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