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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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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어: Rozbiory Polski
독일어: Teilungen Polens
러시아어: Разделы Речи Посполитой

1. 개요2. 1차 분할(1772년) -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3. 2차 분할(1793년) -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4. 3차 분할(1795년) -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5. 의의6. 기타7. 번외: 4차, 5차 분할
7.1. 1815년 -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7.2. 1939년 - 나치 독일, 소련
8. 둘러보기

1. 개요

...그들 모두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도 된다는 듯 바다 세계를 침략하여 정복했고, 해적 같은 세 강대국이 폴란드를 나눠 가졌듯이 각자가 대서양과 태평양과 인도양을 나눠 가졌다.
허먼 멜빌, 모비 딕 14장. 1851년 발간된 미국 소설책으로, 당시 대중들이 폴란드 분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8세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가 세 차례에 걸쳐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세 주변국에 의해 분할된 사건을 말한다. 때때로 여기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바르샤바 공국 분할과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침공 이후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라 폴란드 제2공화국 분할한 사건을 포함하기도 한다.

2. 1차 분할(1772년) -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1763년 아우구스트 3세가 사망하자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미 연방은 동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한 뒤였고, 게다가 아우구스트 2세 대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입김은 점차 강해져 스타니스와프가 왕위에 오른 1760년대 쯤 되면 폴란드는 러시아의 반식민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장 스타니스와프 2세부터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의 영향을 등에 업고 왕위에 선출되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영국 입헌군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관세 제도를 도입하고 세제를 개혁하는 등 쓰러져가는 조국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는 폴란드를 자신들의 젖소쯤으로 생각했던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러시아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른 스타니스와프 2세를 아니꼽게 생각한 일부 반러시아 귀족들이 바르 연합을 조직, 반러시아 봉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스타니스와프 2세가 이루고자 했던 개혁은 중단되고 스타니스와프 2세는 러시아 제국군과 손을 잡고 이 봉기를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폴란드 남쪽에 위치한 크림 칸국을 두고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1768~1774)에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승기를 잡자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전쟁 후반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노리고 있던 몰다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을 침공하여 점령하기도 했고, 러시아의 팽창은 오스트리아에게도 위협적인 일이라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고려할 정도였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유럽의 패권을 주장할만큼 강해진 나라는 일단 다함께 치고 본다는 유럽의 전통에 입각하여 오스만 제국을 지원해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모두 얼마 전의 7년 전쟁에서 너무 많은 국력을 소진했던터라 큰 전쟁을 또 일으킬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는 전쟁 대신에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서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에 저항할 수 있도록 여러 국가의 국경선을 조정한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여기에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와중에 빼앗은 슐레지엔의 일부를 오스트리아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이 들어있어 프로이센도 이 문제에 얽혔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엄청난 피를 흘려가며 차지한 이 땅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한편 7년 전쟁 이후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 동맹을 맺어두었기 때문에, 만약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프로이센이 자동으로 참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7년 전쟁에서 국토가 초토화 되었던 프로이센의 입장에서 또 다른 전쟁에 끌려들어가는 것도 달갑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래서 이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프로이센이 후술할 과정을 거쳐서 폴란드를 희생양으로 하는 평화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 1차 폴란드 분할이다.[1] 이를 통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 대신에 폴란드로 진출하게 해서 살아난 오스만이 두 나라를 견제하게 하고, 동시에 이전에 슐레지엔을 잃은 오스트리아와 오스만에게서 더이상 영토를 빼앗지 못 하는 러시아를 달래려는 것이었다.

1769년 오스트리아가 헝가리 왕국의 세페시(Szepes)주[2]에 있던 폴란드의 월경지를 무단으로 합병하면서 삼국 분할의 포문을 열었다. 그 지역은 1412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그몬드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을 위해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전쟁 자금으로 60그로셴 은화 37000개( 순은으로 약 7톤)를 빌리는 조건으로 세페시주에서 소금이 많이 나는 16개 마을을 담보로 넘겼으나 돈을 갚지 못해 폴란드 영토가 된 곳이었다. 그리고 거의 360년이 지난 1769년 폴란드에서 바르 연합의 반러시아 봉기가 터지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봉기로부터 지역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 지역을 합병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주러시아 프로이센 대사로 있던 프리드리히의 동생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공한테 오스트리아의 도발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 일부를 합병할 것을 제안했는데 하인리히는 이 제안을 형에게 알렸고 프리드리히는 이 제안을 수정하여 3국이 폴란드 영토를 분할하고 그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에게 가장 큰 몫을 주겠다고 오스트리아에게 제안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을 돌려주면 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 일부를 합병하는 것을 묵인해주겠다고 역제안을 했지만 프리드리히는 거절하였다.

그 와중에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도중 몰다비아와 왈라키아까지 침공하면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가는 러시아의 위협이 현실화되고 때마침 바르 연합이 반러시아 봉기를 일으키면서 러시아는 폴란드를 보호령으로서 남겨둘 가치가 사라졌다고 판단, 직접 봉기진압에 나서기 시작한다. 하인리히 공은 러시아가 폴란드와 오스만 양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면 3국 간의 세력균형이 무너지므로 러시아가 오스만 방면으로 진출하지 않는 대신 3국이 사이좋게 폴란드를 분할하면 3국 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가 되므로 바르 연합이 일으킨 봉기 진압에 개입할 것을 프리드리히와 마리아 테레지아 두 사람에게 주장한다. 여기에 두 사람이 동의하면서[3] 1771년 11월 바르 연합의 스타니스와프 납치 시도를 빌미로 3국은 폴란드에 개입하고 봉기 진압이 끝난 1772년 2월 오스트리아의 수도 에서 3국이 폴란드 분할에 합의하면서 폴란드의 분할은 현실화되었다.

그렇게 1772년 8월 3국은 동시에 폴란드-리투아니아 땅으로 쳐들어와 협정에서 정한 대로 각자의 몫을 챙기기 시작했다. 분할하기로 한 지역의 도시, 마을, 요새 등에 3국의 깃발이 걸리는 상황. 일부 군대가 저항을 시도해 봤지만 헛수고일뿐이었다. 1772년 8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국은 정식으로 폴란드 분할 조약에 서명했다. 폴란드는 어떻게든 저항을 해보려 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서유럽의 열강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도 제 코가 석자인지라 무시해버렸고 3국의 군대는 바르샤바를 점령한 후 조약을 승인할 세임을 소집하지 않을 경우 바르샤바를 박살내 버리겠다고 협박을 가하고 뇌물을 쳐먹은 귀족들은 조약을 승인하자고 땡깡을 부리니 결국 9월 22일, 세임은 3국의 폴란드 분할 조약을 승인했다. 마지막으로 1773년 9월 18일, 폴란드와 3국은 양도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는 빼앗긴 지역에 대한 권리를 모두 포기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lish-Lithuanian_Commonwealth_1773-1789.png

조약에 따라 3국은 각자 나름대로 제 몫을 챙겼다. 우선 프로이센은 왕령 프로이센의 대부분과 노테츠 강 유역의 대폴란드 북부와 쿠야비 북부 일대를 점령했다.[4] 프로이센이 차지한 몫은 3국 중 가장 적은 몫(영토와 인구 모두 가장 적었다)이었지만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동안 프로이센의 영토는 중간에 폴란드 땅이 끼어 있어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본토와 동프로이센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 중간 지역을 폴란드로부터 빼앗으면서 두 영토를 육로로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 지역은 발트해 연안에 있어서 폴란드의 해외 교역량 중 80% 이상을 담당하던 곳이라 프로이센은 폴란드의 해외 무역을 사실상 봉쇄할 수 있게 되었고 폴란드산 물건에 높은 세율의 관세를 물리면서 폴란드의 경제적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거기에 왕령 프로이센을 폴란드 분할을 통해 차지함으로써 대외적으로는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로 칭하던 프로이센의 군주가 진정한 의미의 프로이센 국왕(König von Preußen)이 되었다.[5]

오스트리아는 3국의 폴란드 분할에 가장 관심이 없었지만 차지한 지역은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차토르와 아우슈비츠, 소폴란드 일부[6] 갈리치아 전역 그리고 비엘리츠카 소금 광산 또한 오스트리아가 차지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재상 카우니츠 모두 이번 분할로 얻은 땅을 프로이센에게 자국의 세수 22%를 차지하던 슐레지엔을 잃은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으로 여겨 만족해 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처음에 툴툴거린 건 마리아 테레지아의 도덕주의적 경향도 있지만, 상실한 슐레지엔에 대한 집착도 한 이유였다. 폴란드에서 강탈한 땅을 가지고 프로이센에 딜을 해서 슐레지엔을 되찾으려 했지만, 슐레지엔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폴란드를 분할한 프리드리히인데 들어줄 리가... 별 수 없이 폴란드 분할에 만족한 것. 본인의 도덕주의의 일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외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인 성향이 확고했고, 전 시대 17세기 30년 전쟁이나 제2차 빈 공방전 같은 역사적 순간에 폴란드가 같은 가톨릭 맹방으로서 여러차례 지원해준 점을 기억하며 전통적인 우방국에 대한 뒷치기로 봤다. 후대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이런 마리아 테레지아의 도덕주의와 가톨릭을 탄압하고 동화정책을 펼친 독일,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7]의 경우를 보라며 폴란드인에게 오스트리아 통치의 당위성을 어필하곤 했는데, 관점이야 어쨌든 명분 만큼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 문화적, 정치적 차원에서 폴란드인의 광범위한 자치가 보장되긴 했고,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령 크라쿠프(크라카우), 르부프(렘베르크)는 러시아, 독일령 폴란드에서 망명온 논객들이 주도한 폴란드 민족주의의 기반 지역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쯤 되면 분할국 3국 사이 폴란드인들은 농민,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그나마 산업화가 되어있는 러시아령 바르샤바, 독일령 포즈난 일대로 대거 이주하는 반면 지식인, 전통 지주층은 정치적 자유를 위해 오스트리아령인 르부프, 크라쿠프로 이주하는 경향을 띈다.

러시아는 3국 중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했지만 대부분이 개발이 덜 되고 경제적으로도 중요치 않은 북동부 지역이었다. 드비나 강, 드루트 강, 드네프르 강을 따라 그어진 경계선 이동의 전역, 폴란드령 리보니아(Województwo inflanckie)로 알려진 라트갈레, 벨라루스 북동부 지역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이 지역들을 차지함으로써 러시아 본토가 더욱 안전해졌으며 폴란드의 대 러시아 방어력을 상당부분 상실시키는데 성공했다.

3국의 분할 결과 연방에서 떨어져나간 지역은 21만 1천 km2, 인구는 약 453만 명이었다. 영토의 약 30%, 인구는 1/3을 넘는 엄청난 수치였다. 폴란드인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연방의 수족을 잘라버린 조약 때문에 조약을 승인해버린 귀족들은 바로 버로우하게 된다.

한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통적인 동맹국이었던 프랑스는 이를 방관했다. 당시 국왕 루이 15세의 왕비가 폴란드의 공주였음에도 말이다. 이는 동맹의 역전으로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의 혼인동맹국이 된 것에 기인한다. 오스트리아도, 폴란드도 동맹국인 상황에서 프랑스와 루이 15세는 무리하게 다 무너져가는 폴란드와의 의리를 지켜 3국을 모두 적으로 돌리기보다 새로운 혼인동맹국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나았기 때문에 프랑스는 3국 분할에 대해 중립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왕태손 시절에 이를 목격한 루이 16세는 자신의 처가이기도 한 오스트리아의 확장정책에 실망했다. 안 그래도 유약한 성격이었던 그는 내부적인 재정문제까지 겹쳐지면서 유럽 대륙의 현상유지에 주안점을 두게 되고, 이는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기대와 달리 중립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3. 2차 분할(1793년) -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1772년 1차 분할로 엄청난 손해를 본 스타니스와프 2세는 그제서야 3국이 언젠가 폴란드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내부 정리에 착수해야 했다. 우선 가장 큰 위협인 러시아에 대항해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곧바로 그는 폴란드의 모든 것, 특히 정치의 개혁에 돌입했다. 오랜 기간 토론 끝에 세임은 5월 3일 헌법이라 불리는 새 헌법을 승인했다. 1791년 5월 3일 승인되었다 해서 이름이 붙여진 5월 3일 헌법은 미국 헌법에 이은 세계에서 2번째의 성문헌법으로, 참정권 부여와 삼권의 완전한 분리, 세임의 권한 남용 금지 등 그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내용으로 이후 폴란드인들의 민족적 기억에 깊이 각인된다. 하지만 이미 폴란드를 먹잇감으로 보고 있던 주변국들은 "폴란드 저놈들이 개혁으로 슬슬 기어오르려고 하네?"라며 헌법 승인에 대해 반대했다.

그리고 개혁의 적은 폴란드 내부에도 있었으니 5월 3일 헌법으로 손해를 보게될 소수의 슐라흐타들이 타르고비차 연합을 결성하여 러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폴란드가 반란 진압에 나서자 이들은 러시아에게 참전을 요청했고 뒤이어 10만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두 방면으로 나뉘어 침공해 왔다. 이에 3만에 불과한 폴란드군이 분전을 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동맹을 맺었던 프로이센은 폴란드가 개혁을 통해 부강해지면 자국에게 위협이 될 거라 여겨 폴란드를 돕지도, 심지어 중재를 서주지도 않았다.

러시아는 폴란드를 자기 속국으로 보았기에 폴란드의 추가 분할에 대해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폴란드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걸 자국을 확장할 기회로 보고 폴란드와의 동맹을 끊는 조건으로 러시아에게 보상을 요구했다. 이 당시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요청으로 프랑스 혁명전쟁에 참전했는데 때마침 발미 전투에서 깨진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별말 없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zeczpospolita_Rozbiory_2.png

1793년 가을, 가르디나스에서 러시아의 뇌물 공세와 협박 등으로 인해 세임이 열렸고 스타니스와프 2세가 강제로 세임에 참석한 가운데 11월 23일, 세임은 5월 3일 헌법을 포함한 모든 개혁을 파기하고 프로이센과 러시아, 두 나라에게 추가로 영토를 양도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러시아는 폴란드의 키유프 주[8], 브라츠와프 주, 포돌레 주, 민스크 주 전체와 빌노 주, 노보그로덱 주, 브제시치리테프스키 주, 볼린 주의 일부를 얻었다. 프로이센은 1차 분할 때 차지하지 못한 그단스크 토룬, 그니에즈노 주, 포즈난 주, 시에라즈 주, 칼리시 주, 프웍 주, 브제시치 쿠야프스키 주, 이노브로츠와프 주, 도브진 지역 전체와 크라쿠프 주, 라바 주, 마조프셰 주의 일부를 얻었다. 프로이센은 이번 분할로 얻은 폴란드 영토에 남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9]

2차 분할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30만 7천 km2의 영토와 5백만이 넘는 인구를 잃었다. 이제 연방에게 남은 건 4백만의 인구와 두 나라의 완충지대가 되어버린 21만 5천 km2의 영토, 꼭두각시 왕과 세임, 그리고 폴란드 내의 불온한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자국에 주둔한 러시아 제국군 뿐이었다.

4. 3차 분할(1795년) -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1794년 2차 분할로 조국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폴란드 국민들은 분노에 휩싸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새로 성립된 헌법을 무효화시키려는 무능하고 매국적인 귀족들에게 격노했고 결국 연방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며 반란의 지도자였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는 국왕의 권한을 폐지했다. 라츠와비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기습공격으로 바르샤바의 러시아군을 전멸시킨 폴란드군은 한때 빌뉴스까지 해방시키면서 승기를 잡는 듯 했다. 코시치우슈코는 여기에 농민들에 대한 적극적인 유화책을 쓰면서 농민들을 반란에 끌어들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rtitions_of_Poland.png

하지만 폴란드의 대봉기를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놓칠리 없었고 결국 반란은 러시아군과 이에 호응한 프로이센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2차 분할에서 프로이센에 병합된 대폴란드 지방에서 폴란드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지만 이미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버린 상황. 봉기의 마지막 전투인 바르샤바 동쪽 외곽의 프라가 전투에서는 2만여 명의 시민들이 러시아군에 학살당했다. 결국 1795년 견디다 못한 스타니스와프 2세는 퇴위해버렸고 러시아는 쿠를란트와 메멜 강 동부의 리투아니아 영토를 얻었으며, 프로이센은 바르샤바를 포함한 마조프셰 전역과 메멜 강 서부의 리투아니아 영토[10]를 얻었고, 오스트리아는 크라쿠프와 소폴란드 전역을 합병하고 말았다.

이 결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지도에서 사라지고 말았으며, 그 자리에는 오스트리아의 구성국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신갈리치아[11]와 러시아의 빌나 현, 비텝스크 현, 볼히니아 현, 그로드노 현, 키예프 현, 코브노 현, 쿠를란트 현, 민스크 현, 모길료프 현, 포돌리아 현, 프로이센의 행정구역인 서프로이센 남프로이센과 신동프로이센, 신슐레지엔 주가 들어섰다.

그나마 나폴레옹 전쟁 당시 바르샤바 공국이 세워졌지만 나폴레옹의 파멸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이후의 분할로 3차 분할 때 프로이센이 얻었던 바르샤바 등은 러시아에게 넘어간다.[12]
1795년 [13]

5. 의의

폴란드 분할은 국가 지배층들의 무책임과 무능이 국가에게 미치는 해악을 보여준다. 이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주변국, 즉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은 계몽전제군주의 지도 하에 강국으로 거듭나고 근대화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그에 비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개혁의 구심점이 될 군주의 권력이 지나치게 미약하였고, 반대로 귀족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하고 강력하였다. 대홍수를 비롯해 18세기 초까지 끊임없는 전란을 겪은 결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적 기반은 거의 파괴되었으며, 이것은 귀족 간의 경제적 격차를 심화시켰다. 이것은 힘 있는 소수의 대귀족들을 중심으로 그 밑의 귀족들이 뭉치는 사태를 초래했으며, 강력한 중앙정부가 부재한 상태에서 각 대귀족들은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처럼 놀고 외국 정부와 자체적으로 교섭했다. 즉 나라가 나라가 아니게 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외세의 개입에 더욱 취약해지게 되었다.

비록 18세기 초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가 회복되긴 했지만 이때쯤이면 주변국에 비해 많이 뒤처진 상태였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을 통틀어 상공업 및 금융 인프라를 제대로 갖춘 도시는 독일인이 모여사는 그단스크 하나 뿐이었다. 대홍수로 수출 인프라가 파괴되어 식량 수출은 전체 수확량의 5%도 안되는 양이었고 그마저도 아메리카 및 러시아 등의 다른 식량 수출국과 경쟁해야 했다. 그 결과 이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크기에 비해 굉장히 허약한 국가가 되었다. 폴란드보다 훨씬 작은 프로이센이 220만의 인구에 8만의 상비군을 보유했는데, 같은 시기 폴란드는 인구가 1000만이 넘었지만 상비군이 3만을 못 넘었다.

1차 폴란드 분할은 폴란드인들에게 정신적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결국 폴란드는 멸망의 목전에 다다라서야 국가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유럽 최초의 성문헌법인 5월 3일 헌법의 통과는 그 노력의 정점이었다. 폴란드의 개혁이 멸망을 코 앞에 두고서야 시작된 것의 원인에는 리베룸 베토로 표현되는 만장일치제가 있음에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한다. 1차 분할의 충격 직후, 대부분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도 개혁 자체에는 동감하고 있었다. 5월 3일 헌법의 폐기 대상 1호가 바로 이 만장일치제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특권이 일정 부분 줄어드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일부 폴란드 귀족들의 매국적 행위는 결국 폴란드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폴란드 분할은 유럽의 외교 구도에 나비효과를 가져다주는데, 바로 동유럽의 패권을 노리던 두 국가, 즉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전에도 두 국가가 철천지 원수 관계가 되었던 적이 있지만,[14] 그래도 중간에 폴란드라는 완충국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충돌의 빈도는 적었다. 그러나 그 폴란드 자체가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1795년에 이르러 둘은 처음으로 국경을 맞대게 된다. 처음에는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동맹국이자 폴란드 분할의 공동 책임자로서 서로 협력하던 관계였지만 이후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영향으로 둘의 관계가 아작난 이후로, 이들은 1차 대전으로 전면전을 벌이더니 독소전쟁에 이르러서는 리얼 브루드워를 실현시켜가며 싸운다. 결국 2차 대전 이후에는 소련의 외교적 필요성에 의해[15] 폴란드는 멸망 전의 영토가 아닌, '서쪽으로 이동한 형태'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16] 프로이센의 영토였던 지역은 폴란드에 편입되었고, 반대로 폴란드의 동쪽 영토였던 곳은 소련에 편입되었다.

6. 기타

파일:1920px-Rejtan_Upadek_Polski_Matejko.jpg
폴란드의 국민화가 얀 마테이코가 그린 레이탄, 폴란드의 몰락(Rejtan. Upadek Polski, 캔버스에 유화, 1886년).
1773년 당시의 1차 분할을 묘사한 그림이며 누워서 웃통을 까고 농성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타데우시 레이탄이다.

강대국들의 땅따먹기 놀이였다 하더라도 일단 형식적으론 주변국에게 영토 일부를 양도한다는 내용에 관해 폴란드 의회인 세임(Sejm)의 투표를 거쳐야 했는데, 일명 ' 리베룸 베토(Liberum Veto)'라고 불리는 세임 특유의 만장일치제 때문에[17] 의원의 전원 찬성이 나와야 양도 조약의 통과가 가능했다. 이 때문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3국은 양도 조약 투표를 위한 세임으로 기존의 만장일치제의 세임이 아닌, 다수결 제도의 연합 세임(sejm skonfederowany)으로 소집할 것을 강요했으며[18] 대부분의 의원들을 매수, 혹은 협박으로 회유해서 찬성표를 던지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조국의 영토를 적들에게 떼어줄 수 없다는 일부 의원들의 반발이 있었는데[19] 결국 대부분의 의원들이 굴복하면서 세임 소집안이 통과되고 국왕까지 이를 비준하면서 의원들이 회장을 떠나려고 하는데...

이 때 타데우시 레이탄(Tadeusz Rejtan)이라는 반대파 의원 한 명이 회장에서 웃통을 까고 바닥에 드러누워, 문을 막아 의원들이 회장에서 떠나는 것을 막으면서 '폴란드를 죽이느니 차라리 나를 죽여라'고 외치며 저항했다.[20] 그러나 의원들은 문앞에서 드러누은 레이탄을 발로 밟고 회장을 빠져나갔으며 레이탄을 비롯한 소수의 반대파 의원들이 항의의 표시로 이틀 동안 회장에 남아서 단식농성을 벌이다 3국의 대사들이 찾아와 레이탄에게 내린 형벌을 면해주고 다른 징계를 주지 않는 조건으로 농성을 중단했다.

세임 자체는 조약이 통과되고 3년 후인 1776년까지 소집이 되었고 레이탄은 계속해서 조약 파기 운동을 벌였으나 그의 영향력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1775년 레이탄은 러시아군에 의해 강제로 세임을 떠나 고향의 저택에 사실상 감금당했고, 폐인이 되다가 1780년 나라를 지키지 못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향년 38세의 나이에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1][22]

폴란드 분할이 빚어낸 정치적 지형은 폴란드가 독립한 이후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제2공화국 당시 폴란드의 문해율은 프로이센령이었던 지역이 90%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높았고 오스트리아령 지역이 75 ~ 90% 정도로 준수했던 반면 러시아령이었던 지역은 그 이하를 밑돌았다.

현대 폴란드에서도 갈리치아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높은 교육 성취도를 보이는데, 이는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프로이센 러시아 제국에서의 교육이 민족 말살과 독일화/러시아화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반면 민족적 다양성을 정체성으로 삼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의 교육은 어느 정도 폴란드인의 지적 창달을 배려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관련 논문

또한 매 선거 때마다 표도 나뉘는 양상도 독일령이었던 지역과 아니었던 지역을 기준으로 한다. 독일령이었던 지역은 주로 리버럴 성향의 시민 연단 텃밭인 반면, 나머지 지역은 강경보수 성향인 법과 정의당 텃밭이다. 다만 이것은 지역간 차이보다는 도농간 차이라고 봐야 한다. 오늘날 폴란드 중부와 남부, 동부는 대개 법과 정의당 텃밭이지만 그 중에서도 바르샤바, 우치 같은 대도시는 시민 연단 텃밭이기도 하다. 북서부 지역도 대개 도시화율이 높기 때문에 그만큼 시민 연단 표가 더 나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정말 다양한 지역별 통계에서 여전히 과거 분할 당시의 국경선을 확인할 수 있다. 레딧에는 아예 이러한 통계들만 모아 놓은 r/WidacZabory[23]라는 서브레딧이 있다.

7. 번외: 4차, 5차 분할

이 문단에 있는 사건은 엄밀히 말해 폴란드 분할이란 역사적 사건에 포함시키지 않지만 호사가들에 의해 때때로 포함되기도 한다.

7.1. 1815년 -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1807년 프로이센군을 무찌르고 틸지트 조약으로 프로이센이 먹은 폴란드를 토해내게 해 바르샤바 공국을 세워줬고, 1809년에는 오스트리아도 무찌르고 쇤부른 조약으로 오스트리아가 먹은 폴란드도 일부 토해내게 해 바르샤바 공국에 더해줬다. 만약 러시아 원정까지 성공했으면 러시아가 먹은 폴란드도 토해내고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재건되었겠지만, 이 전쟁으로 오히려 나폴레옹 제국이 몰락해버렸다. 따라서 1815년 빈 회의에서 바르샤바 공국의 멸망과 폴란드 지역의 재분할이 결정되었다. 원래는 프로이센은 바르샤바 공국 전체, 그러니까 러시아에 프로이센령 포젠까지 넘겨 러시아가 폴란드 전체를 소유하는 대신 프로이센은 작센 왕국 전체를 삼키기로 결탁하였으나 열강의 반대로 말미암아 러시아가 한발 양보해 포젠을 프로이센에 남기는 조건으로 프로이센은 작센의 60%만 얻었다.
  • 러시아: 이전 3차 분할에서 얻은 영역을 모두 획득하고, 옛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 중 프로이센령이었던 신동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령이었던 신갈리치아를 획득했다. 재병합한 지역은 " 폴란드 왕국"으로 만들어 러시아 황제가 동군연합으로 지배했는데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이자 니콜라이 1세의 형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24]이 폴란드 총독으로 반독립적으로 다스렸다. 1830년 11월 폴란드에서 러시아에 대항한 11월 봉기가 일어나고 봉기 진압 이후에도 니콜라이 1세는 그동안 보장하던 명목상 자치를 그대로 인정했으나 자치권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등 폴란드의 러시아화를 시작했고 1863년 1월 봉기가 발발하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이를 진압하고 1867년 폴란드의 명목상 자치권을 폐지하고 폴란드 왕국을 완전히 러시아의 일부로 흡수시켜 버린다.
  • 프로이센: 1차 분할로 얻은 지역을 유지한 것은 물론 틸지트 조약으로 바르샤바 공국한테 넘겨야했던 단치히를 회복하고, 2차 분할에서 얻은 영역의 일부도 " 포젠 대공국"으로 다시 회복했다. 포젠 대공국은 1848년까지 존속했으나 폴란드 민족주의 봉기가 확산되자 진압과 억압을 당하면서 포젠 주로 강등당했다.
  • 오스트리아: 1차 분할 시 얻은 갈리치아 지역을 유지했다. 추가로 쇤브룬 조약으로 러시아에게 양도한 타르노폴 지역을 회복했다. 3국 감시하에 크라쿠프 자유시가 있었으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온상(?)이 되었고 결국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 합병했다.

파일:Europe_1815_map_en.png

결국 이렇게 독립국 폴란드는 지도에서 사라지고, 100년 넘게 지나서야 독립하게 된다.

7.2. 1939년 - 나치 독일, 소련

1939년 나치 독일 소련이 폴란드를 각각 분할 점령한 것을 말한다. 자세한 건 독소 폴란드 점령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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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리드리히 대왕 이전 폴란드 분할을 처음으로 계획했던 사람은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였다. 다만 대홍수가 진행되는 도중 스웨덴이 덴마크와 싸우기 위해 물러나면서 칼 10세가 1656년 라드노트 조약으로 계획했던 폴란드 분할은 무산되었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폴란드 분할을 실천으로 옮겼다. [2] 지금은 슬로바키아 영토이다. [3]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의 나라를 갈라먹자는 철천지 원수 프리드리히의 제의를 쉽게 받아들이자 프리드리히는 마리아 테레지아더러 "울고 또 울었지만 이득을 얻을 수 있으면 최대한 얻었다"고 비웃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폴란드 분할을 주도한 건 아들 요제프 2세와 재상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지만, 허구헌날 다투던 아들의 결정에 태클을 안 걸고 묵인한 걸로 보아 사실상 제의에 찬성한 것이다. [4] 그단스크 토룬 제외. 하지만 이 두 곳도 곧 있을 2차 분할 때 차지했다. [5] 다만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브란덴부르크로 더 많이 불렸다. 프로이센으로 널리 불리기 시작한 것은 1815년 빈 회의 이후이다. [6]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 제외. [7] 이 시기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주 종교는 개신교였으며, 러시아 제국의 주 종교는 러시아 정교회였다. [8] 정작 이때 키유프 주의 주도는 현재의 키이우가 아닌 지토미르였다. 키이우는 이미 대홍수를 끝낸 안드루소보 조약때 루스 차르국 영토가 되어버렸기 때문. [9] 나중에 남프로이센은 포젠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0] 현재의 수바우키 회랑 일대. [11] 1803년 둘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으로 통합된다. [12] 원래 포젠까지 러시아에 할양하고 작센 왕국을 전부 병합하려 했고 러시아의 동의를 얻었으나, 러시아가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여타 열강들에 의해 반대되었고 결국 남프로이센 동부만을 러시아에 할양하고 작센 왕국의 60%만을 병합했다. 그때 병합한 작센 지역이 프로이센 작센주(Provinz Sachsen)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안할트와 합쳐져 작센안할트가 되었다. [13] 원인은 30년 전쟁 문서로 [14] 프로이센은 7년 전쟁 기간 동안 국운을 걸고 러시아와 피터지게 싸웠다가, 전쟁이 끝나고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를 견제한다는 목적이 일치한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고, 이후 동유럽에서 충분히 영토를 넓힌 러시아가 더 이상 오스트리아와 반목할 이유가 없어지면서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는 바람에 다시 적성 국가로 돌아섰다. [15] 즉 독일을 약화시키며, 완충국을 만들기 위해서 [16] 땅을 서쪽으로 추가적으로 확보시켜 동쪽에서 잃어버린 땅을 벌충시켜주고 공장지대도 더 떼어준 것과 동시에, 방어하기 매우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 단순 길이만 재봐도 전간기 독-폴 국경선보다 2차 대전 이후의 독-폴 국경선이 훨씬 짧다. 거기에 오데르 강과 라우지처나이세 강을 국경선으로 삼았기에, 강이라는 이름의 자연 요새까지 더해져 방어하기 매우 쉬워진다. 반면에 소련 상대로는 완충지 역할을 하던 크레시 지역이 사라져 소련 세력을 막기에 훨씬 취약해졌으며, 이러한 구도는 1989년 동구권이 붕괴된 이후로도 계승되어 오늘날에도 친서방 폴란드가 친러 벨라루스와 대립하고 동부 국경의 안위에 신경을 쓰는 원인이 된다. [17] 세임에 참석한 의원들 중 어느 한 명이라도 리베룸 베토를 발동하면 법안 통과에 대한 논의를 강제로 중단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전에 이미 통과된 법안이라도 리베룸 베토를 발동하면 그 법안을 무효화하는 게 가능했다. [18] 참고로 연합 세임을 소집하기로 지시한 2명의 세임 의장들(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동군연합을 이루면서 두 나라의 의회가 하나로 합쳐진 만큼 세임의 의장도 두 나라를 대표하는 1명씩 각각 선출했다) 중 폴란드 왕국 대표인 아담 포닌스키(Adam Poniński)는 러시아군에서 복무 중인 러시아 귀족이기도 했다. [19] 러시아는 반대하는 의원들에게 조약을 통과시키지 않을 경우 바르샤바를 박살내버리고 의원들은 재산은 모조리 몰수한 뒤 처형하며, 할양할 영토를 더 늘리겠다는 등 온갖 종류의 협박을 가했다. 군대를 동원해서 이들 중 일부를 체포해 시베리아로 끌고 가기도 했다. [20] 법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이런 말도 안되는 조약은 애초에 무효라고 논리적으로 항변했다. 그러나 찬성파 의원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서 오히려 반항하는 레이탄에게 회의장에서 나가라고 했으며 그가 거부하자 재산 몰수 및 감금형을 내렸다. [21] 흥미로운 것은 레이탄이야말로 황금의 자유의 만장일치제를 옹호한 정치가였다. [22] 한편 1780년은 1차 폴란드 분할을 같이 참여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세상을 떠난 연도이기도 하다. [23] '육안으로 보이는 분할'이라는 뜻. [24] 알렉산드르 1세가 딸만 있어서 황태제였으나 첫결혼에서 자식없이 이혼하고 사생아만 있는 상태에서 귀천상혼 하면서 계승권을 포기한다. 그래서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제위를 물려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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