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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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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 ||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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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 메레츠코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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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9대 노농적군 총참모장
키릴 메레츠코프 Кири́лл Мерецко́в | Kirill Meretsk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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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 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 Kirill Afanasievich Meretsk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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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7년 6월 7일 | ||
러시아 제국 랴잔현 자라이스크구 나자례보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주 자라이스크군 나자례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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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8년 12월 30일 (향년 71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재임기간 | 제9대 노농적군 총참모장 | ||
1940년 8월 ~ 1941년 1월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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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아파나시 파블로비치 메레츠코프 어머니 안나 이바노브나 메레츠코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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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예브도키야 페트로브나 | ||
자녀 | 아들 블라디미르 | ||
복무 | 노농적군 | ||
1918년 ~ 1946년 | |||
소비에트 지상군 | |||
1946년 ~ 1964년 | |||
최종 계급 | 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 ||
주요 참전 |
겨울전쟁 레닌그라드 공방전 만주 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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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서훈 |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7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수보로프 훈장 1등급 (2회) 적기훈장 (4회) 전승훈장 쿠투조프 훈장 1등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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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한 소련군의 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소련이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후에는 극동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만주 작전에서 일본 관동군을 격파하고 한반도 북부에도 진주했던 적이 있다.2. 생애
2.1. 성장
메레츠코프는 모스크바 남동쪽 라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 6월에 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하여 정비병으로 복무했으나, 1917년 8월에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다. 이듬해인 1918년에 붉은 군대에 입대했고, 붉은 군대의 전신인 적위대에서 참모장이 되었다. 내전 중에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 투입되어 졸업하는 데 시간이 걸려 1921년에 졸업했다.1924년 3월 6일 로스포트나도누에서 아들 블라디미르 메레츠코프가 태어났으며, 1931년까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근무했다. 1931년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련의 우호관계 때문에 독일에서 연수를 받았는데, 이는 나중에 큰 문제가 된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1년여 간 군사 고문관으로 공화파를 지원했다. 1937년에 귀국한 메레츠코프는 1939년에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군은 대숙청의 홍역을 치렀고 메레츠코프 역시 음해를 당한 적이 있었다. 메레츠코프가 벨로루시 군관구 참모장일 때 사령관은 예로님 우보레비치였다. 스탈린의 측근이라 요직에 앉은 우보레비치는 지역에서 영주나 마찬가지로 행세하며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나중에는 모스크바 중앙으로 오라는 스탈린의 보직 변경 명령에 와병 핑계로 저항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봐줬지만 우보레비치의 항명이 계속되자 숙청했다.[1] 이때 우보레비치가 인민의 적이니 메레츠코프도 인민의 적이란 논리의 익명투서가 붉은군대 총정치국에 날아들어 총정치국과 NKVD의 2달 동안 고강도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결론났다.
당시 소련에선 공직기강 확립 시류에 편승해 하급 관리들이 상급자들을 일단 찌르고보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상급자가 잡혀가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승진할걸 노린 것이다. 수사당국인 NKVD 역시 진짜 범인이던 고문을 해서 허위자백을 받던 일단 잡아넣으면 실적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메레츠코프 역시 한동안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책임질 일을 안하려하고 항상 NKVD 눈치를 보며 해명하려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
2.2. 겨울전쟁
소련은 그 해 12월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사령관으로 하여 핀란드와 겨울전쟁을 시작했다. 핀란드의 접경 지대인 레닌그라드 군관구를 맡고 있던 메레츠코프도 이 전쟁에 참전한다. 그러나 전쟁은 12월 중순에 이르러 모티 전술과 같은 효율적인 전투 방식을 개발한 핀란드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손실에 대한 비난에서 야전군 지휘관인 메레츠코프도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책임은 메레츠코프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이 무렵 소련군은 전략적 지침도 존재했고, 당시 서방과 다른 군사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대숙청의 여파로 경험 부족의 장군 및 장교들이 지휘하는 사단급 및 그 이하 제대의 전술 수행 능력과 전투 능력 자체에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실패로 인해 44사단의 지휘관들은 곧바로 총살당하고 여러 고위 지위관들이 대체됐으며, 그 과정에서 메레츠코프도 군관구 사령관에서 해임된다.이오시프 스탈린은 대신 메레츠코프를 다시 7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새로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이 된 세묜 티모셴코의 지휘를 받게 한다. 1940년 2월, 소련군은 재차 공세를 가했고, 이번에는 크게 승리했다. 메레츠코프는 이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으며 보리스 샤포시니코프를 대신해 총참모장이 되었고, 국방위원회 위원직에도 올랐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는 겨울전쟁과 스페인 내전의 전훈을 분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1940년 12월에 열린 회의 막바지에 열린 워게임이었는데, 파블로프 대장의 홍군(소련군)이 주코프 대장의 청군(가상 적군)에게 패배하고 만 것이다. 이 해임에 대해 두가지 설이 있는데, 스탈린은 이 워게임에 참여한 장군들을 크렘린으로 소환해 워게임에서 패배한 경위에 대해 캐물었고 당황한 메레츠코프를 보고 한심하다고 여겨 해임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위키백과에 나온 다른 이야기로는, 이 워게임 결과를 가지고 스탈린에게 가서 "서부에 대폭 증원이 필요합니다"라고 의견을 상신했는데, 독일과의 대결을 매우 꺼린 스탈린은 "동무 독일이랑 바로 전쟁하자는 건가?"라며 바로 해임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메레츠코프를 해임할 때, 여러 사람들 앞에서 "동무는 용감하고 유능하지만, 원칙이 없네"라고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2.3. 독소전쟁
사령관들과 지형을 조사 중인 모습[2] |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메레츠코프는 북쪽 방면의 독일군 북부집단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포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레닌그라드는 라도가 호수를 통해 소량의 보급품을 어느 정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메레츠코프와 볼호프 전선군은 레오니트 고보로프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협동으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깨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1943년 2월, 두 전선군은 시냐비노(Siniavino)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이후 두 전선군은 독일군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깨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개시했다. 이 시도들은 1944년 2월에 마무리되었다.
1944년 2월, 메레츠코프는 볼호프 전선군을 떠나 더 북쪽의 카렐리야 전선군으로 부임했다. 여기서는 그는 핀란드를 공격하려는 고보로프의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원했다. 10월,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를 통해 노르웨이로 철수하는 독일군을 추격했다. 10월,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의 페차모를 쓸어 버리라는 명령을 받아 그가 가진 극지전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여 페차모-키르케네스 작전(Petsamo-Kirkenes Operation)을 실시했다.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완전히 밀려났으며, 이 공로로 메레츠코프는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했다.
소련은 노르웨이까지 독일군을 추격할 심산이었으나, 전후 처리 문제에서 소련이 노르웨이를 장악하는 것을 영국이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스탈린은 노르웨이-핀란드 국경에서 진격을 중지시켰다. 이후 종전 때까지 이 전선은 큰 전투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메레츠코프에게는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다롄 비행장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모습[3] |
2.4. 종전 후 및 사후
전쟁 후 메레츠코프는 극동군관구 사령관직을 수행한 후 여러 군관계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68년 12월 30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다.3. 평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유능한 장군들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하며, 소련 영웅 칭호를 비롯하여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이다. 1969년 블라고베셴스크 고등전차지휘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모스크바,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한다.4. 진급 이력
5. 매체
-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알란과 헤르베르트에게 차와 옷을 강탈당한다. 이후 어린
김정일을 속이고
김일성에게 간 알란과 헤르베르트를 쫓아 북한으로 가서 끝내 따라잡는다.
처음에 메레츠코프는 흥분해 날뛰었지만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마오쩌둥은 예전에 알란이 자신의 부인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듣고 반가워했고, 김일성은 알란이 자신을 해칠 의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와 화해하며, 메레츠코프도 알란 역시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다는 걸 알고는 화해한다.[4] 그 후 마오쩌둥과 김일성, 그리고 메레츠코프는 알란과 헤르베르트를 살기 좋은 장소로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발리 섬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자 알란과 헤르베르트는은혜 갚은 '어릿광대 기생충'[5]마오쩌둥에게서 돈을 받아 그 곳으로 간다.[6] - Hearts of Iron IV에서 소련군의 장군으로 등장한다.
[1]
대숙청기의 많은 장교와 마찬가지로 예로님 우보레비치도 개인적인 능력은 매우 뛰어났고
이반 코네프,
게오르기 주코프,
로디온 말리놉스키와 메레츠코프의 스승으로 존경받았으며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칭찬을 받은 군인이었다. 그러나 부패했고 군사모험주의적이었으며 정치에 과도하게 간섭했다.
[2]
왼쪽부터
드미트리 파블로프,
막심 푸르카예프, 메레츠코프,
세묜 티모셴코
[3]
왼쪽부터 메레츠코프,
로디온 말리놉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4]
다만 거기 있던 김정일은 어린 나이에 받은 충격이 컸는지 울부짖으며 알란과 헤르베르트를 죽이라 고래고래 소리치다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다(...).
[5]
이 소설에서
쑹메이링이 마오에게 붙인 별명(...).
[6]
여담으로 마오쩌둥이
발리를 거론하기 전에 갈 곳의 후보로 쿠바(...)가 있었는데 이유가 '제일 공산주의적이지 않은 장소 중 하나'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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