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골라 내전 관련 둘러보기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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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 내전 Angolan Civil War Guerra Civil Angola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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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75년 11월 11일 ~ 2002년 4월 4일 | ||
장소 | ||
앙골라, 나미비아 | ||
원인 | ||
독립 이후 앙골라 내부 권력 투쟁 | ||
결과 | ||
앙골라 공화국의 승리 앙골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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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 ||
나미비아의 독립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앙골라| ]] (1992~2002) [[쿠바| ]][[틀:국기| ]][[틀:국기| ]] (1975~1991) [[틀:깃발| ]][[틀:깃발|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 (1975~1991) [[틀:깃발| ]][[틀:깃발| ]][[아프리카 국민회의| ]] (1975~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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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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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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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안토니우 아구스티뉴 다 실바 네투|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제레미아스 치툰다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안토니우 뎀보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루이스 랑케 프랑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엔리케 은지타티아고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호드리게스 밍가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발타자르 포르스터 [[틀:깃발| ]][[틀:깃발| ]][[피터르 빌럼 보타| ]] |
]][[틀:깃발| ]][[조나스 사빔비| ]] †|
전력 | ||
[[틀:깃발| 1976년: 4만 명 1987년: 7만 명 2001년: 13만 명 [[틀:깃발| ]][[틀:깃발| ]][[쿠바군| ]] 1976년: 36,000명의 병사와 400대의 전차 1982년: 35,000명 ~ 37,000명 1988년: 6만 명 총합: 33 ~ 38만의 병사과 1000대의 전차, 600대의 장갑차, 1,600문의 야포 [[틀:깃발| ]][[틀:깃발| ]][[소련군| ]][5] 11,000명 [[틀:깃발| ]][[틀:깃발| ]][[북한군| ]] 3,000명 |
]][[틀:깃발| ]][[앙골라 인민공화국| ]]
[[틀:깃발| 65,000명 [[틀:깃발| ]][[틀:깃발| ]][[남아프리카 공화국군| ]]: 6,000~7,000명 |
]][[틀:깃발| ]][[앙골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군사적 피해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쿠바군| ]]: 2,016 ~ 5,000명 전사 [[틀:깃발| ]][[틀:깃발| ]][[소련군| ]]: 54명 전사 [[틀:깃발| ]][[틀:깃발| ]][[체코슬로바키아| ]] 국적자: 1명 사망 |
]][[틀:깃발| ]][[앙골라 인민공화국| ]]: 집계 안 됨.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FNLA: 집계 안 됨.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FLEC: 집계 안 됨. [[틀:깃발| ]][[틀:깃발| ]][[남아프리카 공화국군| ]]: 2,365 ~ 2,500명 전사 |
]][[틀:깃발| ]][[앙골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집계 안 됨. |
민간인 피해 | ||
민간인 80만 명 이상 사망 및 400만 명의 난민 발생. 7만 명 이상의 앙골라인이 지뢰로 인해 절단 부상을 입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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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5년부터 2002년까지 친소련 국가이자 MPLA가 통치하던 앙골라 인민공화국- 앙골라 공화국과 친서방 국가이자 UNITA가 통치하던 앙골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RPDA) 사이에서 벌어진 앙골라의 두 단계에 걸친 장기 내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RPDA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쿠바 역시 맞대응으로 앙골라 인민공화국을 돕기 위하여 개입하면서 결국 냉전 후반기를 장식하는 미국, 중국과 소련의 대리전으로 확대된 내전이었다.결국 냉전이 종식되고 쿠바군과 남아공군이 동시에 철수하면서 앙골라 내전에 대한 두 초강대국의 개입은 일단락되었으나 국제연합의 중재 아래에 벌어진 1992년 총선에서 MPLA의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가 부정선거를 통해 승리하자 RPDA의 대통령이자 UNITA의 당수였던 조나스 사빔비는 이에 반발해 2차 내전을 일으켜 앙골라를 또 한번 수렁으로 빠트렸다. 초기에는 RPDA가 앙골라 전국토의 70%를 장악하며 승기를 잡아갔지만 냉전이 종식되어 더 이상 사빔비를 비호할 이유가 없던 미국과 유럽연합은 RPDA 측이 일으킨 온갖 전쟁범죄들을 문제삼으며 제재를 가했고 앙골라 공화국 측이 군사력을 복구해 반격에 나서면서 다시 수세에 몰렸다. 거기다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붕괴되고 들어선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정부와 그 뒤를 이은 타보 음베키 정부,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시기 남아공의 지배를 받다가 1990년에 독립한 앙골라의 이웃나라인 나미비아가 RPDA를 적대하고 앙골라 공화국을 앙골라 지역 유일의 합법 정권으로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RPDA는 사면초가에 빠져들었다. 1998년, 앙골라 공화국은 RPDA를 향하여 대공세를 개시했고 결국 2002년, 지도자였던 조나스 사빔비와 안토니오 세바스티앙 뎀보, 파울로 루캄바 등 지도부 인사들이 사망하고 항복하면서 구심점을 잃은 RPDA와 지도부였던 UNITA 측은 동년 앙골라 공화국과 MPLA와 종전협정을 체결하며 내전은 종식되었다.
2. 배경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앙골라 지역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앙골라 내 독립 세력들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고 있었고 포르투갈군은 남아공의 지지를 받고 식민지내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전쟁을 수행 중이었다.그러나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군 내 좌익 장교들이 이른바 카네이션 혁명을 일으키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배 정책에도 변화가 생겼다. 제국주의적 통치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포르투갈군 좌익 장교들은 식민지의 해방을 약속했고 결국 1975년 1월 15일, 앙골라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각 독립 세력들이 정치 성향, 부족 등의 문제를 놓고 서로 의견 차이를 보이며 갈등이 슬슬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주요 군벌이자 최대 정치세력중 하나였던 우익 정당인 UNITA(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표명했으나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좌익 계열 군벌이자 정당인 MPLA(앙골라 해방인민운동) 측은 UNITA 측의 선거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남아프리카 연방은 위기감을 느껴 자국군을 1975년 8월부터 앙골라 영내로 진입시켜 UNITA와 당시 UNITA보다 더 강력한 우익 군벌이었던 FNLA를 지원했다. 앙골라 역내에서 MPLA의 위세가 축소되는 것을 경계한 소련은 쿠바에 병력동원을 요구했고 결국 쿠바군도 개입해 키팡곤도 전투에서 루안다까지 진격하는 FNLA와 남아공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결국 MPLA를 전복시키고자 했던 남아공의 목표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 하루 뒤인 1975년 11월 11일, MPLA는 루안다에서 독자적으로 앙골라 인민공화국을 선포해버린다. FNLA(앙골라 민족해방전선)도 이에 지지않고 암브리스에서 앙골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RPDA)을 선포하고 UNITA(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측도 FNLA와 함께 우암부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결국 본격적인 내전으로 치닫게 된다. 여기에 미국은 UNITA와 FNLA를 지원했고 소련은 MPLA를 지원하며 국제적인 대리전 양상이 도래하고 말았다. 전쟁 초반에 앙골라 인민공화국이 RPDA를 압도하였고 결국 초대 RPDA의 지도부였던 FNLA는 1978년 MPLA와의 평화 협정을 맺고 전쟁을 중단하면서 내전의 양상은 MPLA와 UNITA의 2파전으로 변모했다. 여기에 MPLA측은 석유를 장악하고 있었고 UNITA 측은 다이아몬드를 장악하면서 양측은 지하자원이라는 훌륭한 돈줄을 기반으로 끝도 없이 전쟁에 돈을 퍼부어대었다.
3. 1980년대
1981~1982년, 앙골라에서 작전중인 남아공군
앙골라 내전은 1980년대가 되자 격화되었다. 남아공군이 1980년부터 앙골라의 영토를 지속적으로 침범하자 MPLA 측은 이를 남아공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보복으로 10월 31일, 당시 남아공의 영토였던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現 나미비아)까지 침공하기에 이른다. 내전이 격화됨에 따라 소련도 MPLA에 대한 원조를 대폭 늘렸고 미국 역시 반공 논리에 따라 UNITA 측에 막대한 원조를 단행했다. 중국 역시 미국 편을 들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UNITA를 지원했고, 이스라엘도 우방이었던 남아공을 도와 RPDA를 지원하며 분쟁에 끼어들었다. 여기서 남아공군은 MPLA만 적대한 것이 아닌 앙골라 영내에서 활동하는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등 나미비아 독립세력까지 격퇴하는 군사작전을 지속하였다.
앙골라 내전 당시 쿠바군
남아공군이 군사적으로 개입을 지속하자 소련을 도와 해외에 영향력을 확장하던 쿠바는 자국 입장에선 최신병기나 다름 없던 Mi-24 공격헬기와 MiG-23 전투기까지 투입하며 앙골라 인민공화국을 제대로 지원한다.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한 국제사회의 군수제재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데다가 정치적 제한 그리고 국경 전쟁까지 수행하고 있던 당시의 남아공군은 소련제 최신병기들을 동원한 쿠바군에 수세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 특수작전과 중소규모 정규작전, G6 차륜형 자주포 등을 이용한 게릴라성 장거리 화포 사격 위주로 작전을 수행했다.
앙골라 내전기 쿠바와 남아공 사이의 공중전에 관한 영상
서방 전투기들을 만나기만 하면 맥을 못추던 MiG-23 전투기가 이곳에선 대활약을 했다. 당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고 있어 미라지 F1 전투기에 신형 공대공 미사일을 장착할 수 없었기 때문. 그렇기에 쿠바군 소속 MiG-23 전투기들은 공중우세를 점하며 남아공군을 폭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손실이 없었던건 아니라 9대를 손실했다.
앙골라 내전 중 가장 격렬한 전투는 쿠안두쿠방구주에서 1987년에 발발한 쿠이투 쿠아나발레[6] 전투였다. 이는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벌어진 아프리카 대륙 최대의 재래식 전투로 기록될 정도였다. 앙골라 인민공화국 측이 RPDA를 수세에 몰아넣자 RPDA의 멸망을 결코 허용할 이유가 없었던 남아공군이 8월 부터 본격적인 군사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정치적 제한도 사라져서 남아공군은 올리판트 전차까지 동원했고 여기에 쿠바군은 T-62 전차로 맞대응해 대규모 전차전으로 확대되었다. RPDA를 기세좋게 몰아붙이던 MPLA군의 주력은 남아공군의 기계화부대에 의해 격파되어 막대한 손실을 입은채로 패퇴당했지만 남아공군 역시 쿠바군의 반격에 앙골라 남동부 내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양측이 승리를 주장하는 가운데 미국은 본격적으로 중재에 나섰고 결국 1988년부터 남아공군은 앙골라 영내에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남서아프리카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독립을 이루어 나미비아가 되었고 곧이어서 쿠바군 역시 앙골라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4. 1990년대
전쟁기 항상 우위를 점하고 UNITA에 비해 전쟁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덜 보이며 정치적 승리를 이루어낸 MPLA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폐지하고 다당제 민주주의와 온건 사민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전격적으로 발표하여 앙골라 인민공화국 체제가 폐지되고 앙골라 공화국이 탄생한다. 동년에 쿠바군도 철수한데다가 동구권이 붕괴한 끝에 공산권 최대 맹주이자 MPLA의 물주였던 소련까지 해체되면서 더 이상 MPLA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MPLA의 정통성은 늘어났고 UNITA 측의 조나스 사빔비는 이에 위기감을 느꼈다. 특히 UNITA는 항상 공격적으로 자신들을 지원해주던 최대 물주였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붕괴되어 문제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냉전이 종식된지라 미국과 서방국가들, 중국, 이스라엘은 더는 비인간적인 처사를 자행하던 UNITA를 두둔할 이유가 사라진 상황이었다.[7]RPDA의 대통령이자 UNITA의 수장인 조나스 사빔비의 사진
사빔비는 미국 정계에 로비를 실시하고 서방 미디어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을 했고 결국 미 의회는 사빔비를 지지하게 되었다. 거기에 사빔비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포르투갈이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중재하면서 체결한 비세 협정(1991년 5월 31일)이 그것이었다. 비세 협정은 국제사회의 감시 아래에 다당제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추구하고 MPLA 측 앙골라군은 무장해제하는 대신 UNITA 측 전투원을 앙골라군으로 편입해 타협하자는 방안이었다. 국제사회는 사빔비가 군사적 모험을 시도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은 앙골라를 또 한번 내전의 수렁으로 빠트리게 되었다.
1992년, 앙골라 총선에서 사빔비가 이끄는 UNITA가 참패하자 사빔비는 이에 격분했다. MPLA 측이 국제사회의 비호를 믿고 부정선거를 개시하고 심지어 UNITA 지지자들까지 학살해버렸다고 여겼으며, 이는 사빔비로썬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였다. 결국 분노가 터진 사빔비는 2차 내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하고 앙골라 공화국군에 편입된 자신의 병력들을 빼와 앙골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RPDA) 측으로 이들을 편입, 앙골라 공화국과 MPLA 측을 상대로 공세를 감행했고 무장해제로 인해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던 앙골라 공화국은 처참하게 밀리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RPDA가 앙골라 전 국토의 70%를 장악하며 승기를 잡아갔지만 내전 재개전은 국제연합의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던게 문제였다. 이에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협정을 주선해줬던 포르투갈 등을 비롯한 서방세계 국가들은 RPDA 측에 경제제재 및 무기 금수 조치를 가했고 중국과 이스라엘도 RPDA를 외면했다.[8]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독재정권이 붕괴하고 새로 들어선 넬슨 만델라 정부가 MPLA를 유일 정권으로 인정하는 등 적국으로 돌아섰고, 이후엔 특수부대를 투입시켜 RPDA와 전투를 치렀다.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등의 끊임없는 투쟁과 미국의 요구로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로부터 독립을 얻어낸 신생 나미비아 정부 역시 이를 잊지 않고 MPLA를 앙골라 유일 정부로 인정하며 RPDA를 적대했다. 거기다가 사빔비가 저지른 수많은 전쟁범죄까지 앙골라와 서방 주요 언론 매체들로부터 폭로되면서 RPDA의 국가로써의 정통성은 크게 하락했다. 게다가 1994년, 앙골라 공화국군이 재반격에 나서면서 앙골라 전 국토의 60%를 장악하는데 성공, RPDA 측은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된다.
1994년 11월 15일, 국제사회의 중재에 따라 양측은 다시 정전협정을 체결했고 두 세력의 군사적 통합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빔비는 자신의 신변 안전을 염려해 끝내 루안다로 이동하는 것을 거부했고 MPLA측은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여 1998년부터 RPDA 측이 장악한 동남부 지역에 대공세를 가했다. 국제사회의 제재로 인해 크게 약화되었던 RPDA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밀어붙이는 앙골라 공화국군 측에 속절없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2000년 4월 18일에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UNITA를 상대로 한 제재를 더욱 강화하는 결의안 1295호이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을 통틀어 15개국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5. 내전의 종식과 앙골라의 현재 상황
2002년 2월 22일, 조나스 사빔비는 전투 중에 MPLA 앙골라 정부군에게 사살당했고 지도자였던 사빔비의 죽음으로 세력이 크게 약화된 RPDA는 결국 2002년 4월, MPLA와 종전협정을 체결하면서 30여년에 걸친 장기 내전은 드디어 종식되었다. 협정에 따라 UNITA는 합법 정당으로써 공인되었고 대신 UNITA 측의 군사집단은 해산되며 반 세기 가량동안의 UNITA의 군벌 역사는 끝나게 되었다.전후에는 20년 이상의 기간 동안 MPLA가 안정적인 집권을 이어나갔다. 패배자 UNITA는 MPLA 측의 확고한 정치적 기반과 권력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 특히 UNITA의 전쟁범죄 기록이 치명적이었다. 사빔비가 억울한 면이 있다고 항목에 적혀있다지만 그럼에도 사빔비가 저지른 만행들로 수많은 앙골라 민간인들이 전쟁으로 사망하거나 난민으로 대거 전락한 것은 변함이 없고, 각종 횡포로 많은 앙골라인들이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앙골라 현지에서는 사빔비에 대한 평가는 극히 안 좋은 편이다. 다만 산투스 역시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어느정도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하며 앙골라의 경제력을 아프리카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며 앙골라를 안정화시킨 업적은 있기는 하나, 시급한 교육, 복지제도와 의료체계 정비보다는 과시성 사업에 신경을 쓰고 그 와중에 자신과 그 가족, 측근들은 치부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이는 명과 암이 극명히 교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로 인해서 앙골라의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루안다에 각종 마천루와 아파트들이 줄줄이 건축되었지만 막상 서민들은 근교 판자촌에서 하루벌어 하루사는 것은 매한가지였고 고도성장도 2015년 저유가로 마무리 되었다. 2017년 로렌수 대통령이 집권 한 이후로 개혁을 단행하고 있지만 경제사정이 그닥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2022년 총선에서 MPLA가 가까스로 의석 수 과반을 유지하게 되고 UNITA가 의석의 43%를 확보하며 전략적 승리를 하게 되며 앙골라의 양당제가 확고해지게 되었다.
6. 여담
- 당시 미국은 무자헤딘에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UNITA 측에 스팅어 지대공미사일을 지원했다. 그래서 쿠바군과 MPLA 정부군 항공기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은 회고록에서 앙골라 개입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앙골라에 막대한 지원을 했지만 막상 얻어낸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도 소련이 끼어들었기에 끼어들었고 이득은 그다지 없었다. 오히려 다른 유럽 쪽에서 앙골라에 자원 개발사업 등을 이것저것 따내 두 강대국이 막대한 돈을 쓰고 손해를 본 거랑 대조적이다.
- 북한은 앙골라 정부를 돕기 위해 3,000명의 군대를 파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아프리카에서 벌여진 내전 중에서 흔치 않게 기계화보병, 포병, 전투기, 헬리콥터가 대규모로 동원된 내전이기도 하다. 이는 미국, 소련 두 초강대국이 개입한 내전인데다가 MPLA, UNITA 양쪽이 막대한 천연자원을 팔아 큰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중화기들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30년간의 내전 기간 앙골라의 국토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7. 대중매체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 의 첫 임무 "상처뿐인 승리(Pyrrhic Victory)"의 배경이 앙골라 내전이다. MPLA와 UNITA가 등장하는데 미국에서 만든 게임인 만큼 미국인 주인공 알렉스 메이슨이 UNITA 쪽에 합류해서 전투를 치른다. MPLA가 악당처럼 묘사되는 건 덤.
8.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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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앙골라 민족해방전선
[2]
카빈다 월경지 해방전선
[3]
앙골라 초대 국방장관
[4]
1989년,
부패 및 반역혐의로 처형되었다.
[5]
군사고문단에서부터 특수전병력, 항공기 조종병력까지 포함한 수치
[6]
현재 앙골라 내에 위치한 11개 국립대학들 중 쿠안두쿠방구주를 대표하는 대학인 쿠이투 쿠아나발레 대학도 이 전투를 기리는 의미에서 명명된 것이다.
[7]
이는 UNITA를 가장 열렬히 지원하던
아파르트헤이트
남아공 역시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남아공의 적대세력인
ANC,
FRELIMO,
MPLA 등이 일제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자 서방 측에서는 더 이상 반공을 명목으로 국내외에서 온갖 범법행위를 하는 이 불량국가를 지원해 줄 이유가 없었다. 남아공은
핵개발 등의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마지막 발악을 했지만 결국 국제 사회의 압박을 받아들인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가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고 핵무기를 해체하며, 비백인들에게도 투표를 허용하면서부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무너지게 된다.
[8]
특히 이스라엘은 90년대 이후로는 MPLA를 포함한 반 사빔비 세력에 무기를 팔고 훈련을 겸하여 이스라엘군 일부를 위장 용병으로 보내 사빔비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