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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 ||
국가 |
오스트리아, 아름다운 나라여!(1920~1929) 끊임없이 축복받으세(1929~1934) |
|
지리 | ||
1919년 ~ 1934년 | ||
위치 | 오스트리아 | |
수도 | 빈 | |
인구 | 6,800,000명(1919년) | |
정치 체제 |
공화제 의원내각제 |
|
국가 원수 | 대통령 | |
주요 총리 |
카를 레너 엥겔베르트 돌푸스 |
|
공용 언어 | 독일어 | |
민족 | 오스트리아인 | |
역사 |
1919년 성립 1934년 해체 |
|
통화 | 크로네, 실링 | |
성립 이전 |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 |
해체 이후 | 오스트리아 연방국 |
[clearfix]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고 독일계 지역이 따로 구분되어 세워진 공화국.2. 역사
191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수립된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전승국들과 강화 협정인 생제르맹 조약을 체결한다. 협상국은 패전국인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을 해체시켰다.이미 제국 내 영토였던 주데텐란트를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넘겨주어야 했으며, 쥐트티롤과 이스트리아 반도 역시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어갔고 이외에도 남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게 넘겨야만 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인들이 사는 영토 중에서도 두 지역을 빼앗길 수 있었으나 가까스로 지켜냈다.[1]
협상국은 또한 국제 연맹의 승인 없이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쳐지는 것을 금지한다. 이런 전승국들의 행태에 오스트리아인들은 불만이 점점 커졌다. 1920년 새 헌법이 제정되고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계승된다.
종전 이후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고, 여러 세력이 제각기 반란을 일으키며 사실상 내란 상태로 매일같이 거리에서 총격전이 일어났던 독일과 달리 그래도 오스트리아는 여러 세력이 연정을 이루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황이었지만 오스트리아 공화국 역시 급격한 국가 형성에 혼란스럽기는 했다. 오스트리아는 이중 제국에서 가장 발달한 지역이었지만 제국의 공업 지대의 대부분은 체코슬로바키아로, 농업 지대는 헝가리나 루마니아 왕국으로 넘어가 산악 지역만 남았기 때문에 산업 유지가 어려웠다.[2][3]
이런 상황에서 정국을 주도한 것은 기독교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기독사회당이었다. 기독사회당은 산업 자본가들과 가톨릭 교회와 협력해 나갔지만, 여전히 보수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격렬한 대립[4]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파시즘의 성향을 가지고 있던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1932년 집권하고, 집권 직후인 1933년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 정치를 펼치기 시작한다. 한편 1933년 무렵이 되면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나치즘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데, 비슷한 파시즘 성향이지만 돌푸스 내각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탄압하는데 몰두한다. 가톨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돌푸스 정권은 반기독교적이었던 나치당에게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데다가,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가는 오스트리아가 결국 독일에게 흡수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치당을 제압하기 위해 1934년 5월 돌푸스는 새로운 헌법을 발표한다. 돌푸스와 조국전선의 독재 체제를 강화한 1934년 5월의 헌법을 통하여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오스트리아 연방국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3. 기타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신분제를 폐지하였는데, 아예 von(폰)이나 zu(추) 등의 귀족 접두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때문에 많은 귀족 가문이 이름을 줄이거나[5] 이름에서 귀족 접두어를 빼는 개명을 거쳤고[6], 합스부르크 가문이 법적으로 이름에 von을 사용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7] 이 법률은 제정된 후 한번도 무효화되지 않았다.4. 관련 문서
[1]
하나는 케른텐 주의 남동부 지역으로, 당시 슬로베니아 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이 곳을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차지하려고 했으나 1920년 10월 20일 실시된 주민 투표로 계속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부르겐란트 주인데, 이 지역은 1647년부터 계속 헝가리의 영토였고, 헝가리인들은 이 곳을 '서헝가리(Őrvidék)'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대다수가
독일어 사용자들이었으나 소수의
크로아티아어와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주민도 있었다. 1919년
생제르맹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으나 이곳을 차지하려는 오스트리아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헝가리의 무력충돌 끝에 1921년 주민투표가 실시되어 중심도시인
쇼프론과 8개의 마을이 헝가리의 영토로 남고 나머지는 오스트리아로 편입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헝가리 잔류를 선택한 이 지역들은 여전히 헝가리의 영토로 남아 있다.
[2]
체코슬로바키아나 유고슬라비아 왕국 역시 금융 자본은
빈에게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던 상황은 양측이 똑같다.
[3]
비슷한 현상은
소련이 해체될 때도 일어났다. 각 지역이 분담하는 역할이 있었는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이 각자 다른 나라가 되면서 유기적으로 산업이 돌아가질 못했고, 해체 직후 상당한 경제난을 겪었다.
[4]
1927년 여러 집단 간의 길거리 충돌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와 어린 아이들이 보수주의 세력에게 살해당하자 사회주의 세력의 주도하에 전국에서 총파업과 시위 등이 1930년까지 이어진다.
[5]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알프레트 얀자 폰 타네나우 등.
[6]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쿠르트 슈슈니크 등.
[7]
물론 옛 황가라는 점이 참작되어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von을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