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09:25:01

소련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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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식재료1.2. 소련 요리와 아나스타스 미코얀
2. 관련 문서

1. 개요

소련 요리(: Soviet cuisine, : Советская кухня)는 소련에서 먹던 요리로, 당대에는 각 15개 공화국에서 먹던 요리들을 전부 포괄해서 부르는 명칭이었지만 소련 붕괴 이후로는 당시 대중 식당에서 판매하던 음식들[1]을 소련 요리로 일컫는 경우도 많다.

세계 최대의 영토, 그리고 척박한 토양과 혹독한 기후, 계획 경제의 비효율성 탓에 소련은 유통 인프라가 좋지 못했고 지역에 따라 신선한 식재료 수급이 원활하지 못한 곳이 다수 있었던 관계로 대체로 단출한 재료로 음식을 풍성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경향을 잘 보여주는 요리책으로 <맛있고 건강한 음식에 대한 책(Книга о вкусной и здоровой пище)>이 있다.

그래서 소련 요리 하면 가정식이나 단촐한 간편식만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각 공화국와 민족들이 지닌 독특한 식문화들과 30년대 미코얀의 식문화 개선 사업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현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다양한 궁중 요리들이 실전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인들이 자기들의 문화에 갖는 관심은 대단히 높아서 러시아 제국의 대귀족과 황족들이 향유하던 고급 식문화도 혁명 이후에 보존되었다.

사라진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고급 식문화가 잘 유지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기에 귀족 가문과 왕실 소속의 요리사들이 식당을 세워 프랑스 요리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소련에서도 황실 요리를 취급하는 고급 식당들이 성업을 이루어 후대까지 영향을 미쳤다.[2]

또한 소련 정부는 1920년대 193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식생활 개선과 건강 증진을 도모하고 노동자들이 도시락을 싸오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대규모로 구내 식당을 설치했다. 소위 스탈로바야(Столовая)라고 부르는 국영 식당에서 저렴한 가격에 식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도시 노동자들의 식생활은 크게 개선되었다.[3]

스탈로바야는 다양한 요리들을 진열해 둔 뷔페로서 식대를 치른 고객이 접시에 담아 가게 했다. 식단은 식당의 사정에 맞춰 매일 바꾸거나 식단을 미리 준비해 두는 식이었지만, 정부 당국이나 상급 기관에서 식단을 관리했기 때문에 어느 구내 식당을 가든 메뉴가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식당에서는 러시아와 캅카스 요리를 주로 팔았고 프랑스 요리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요리의 영향을 받는 음식들도 있었다. 의외로 중앙아시아 요리들은 주로 해당 요리를 취급하는 식당에서 팔았다. [4]

1.1. 식재료

소련은 연방 구성국들이 지역 환경과 특성에 맞춰 산업을 특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식품 산업도 이에 영향을 받아 지역별로 특산물처럼 취급되는 식료품과 음식들이 많았으며 품질과 수량도 모두 상이했다.
  • 중세부터 단맛에 환장하던 러시아인들의 기질은 소련 시기에도 계속 이어져서 소련인들은 겨울만 되면 다챠에 가서 잼과 다양한 음식들을 만들곤 했다. 한국인들이 겨울에 김장을 담그듯, 소련인들도 겨울에 잼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설탕과 과일 수요가 폭증해서 소련 정부에서 제대로 공급을 못해줄 지경이었다. 소련의 농축산물 수입이 급증하기 시작한 70년대부터는 쿠바 같은 우방국이나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엄청난 양의 설탕을 수입하곤 했는데, 그 구매량이 매년 상이하고 시기도 특정할 수가 없어서 소련이 국제 시장에서 설탕을 사들이기 시작하면, 국제 설탕 시장이 교란되어 설탕 가격이 심하게 요동쳤고 세계 각국들이 짜증을 많이 낼 정도였다. 다만, 쿠바를 위시해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달한 국가들은 소련 덕분에 설탕 가격이 폭증해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 " 샴페인"이 흥하기도 했다. 일명 '소볘츠코예 샴판스코예(Советское шампанское, 소비에트 샴페인)'라고 진짜 프랑스 샴페인은 아니고 이름만 빌려 온 스파클링 와인이긴 했지만 말이다. 1930년대 스탈린 정권이 "귀족들이나 즐기던 사치품을 인민 대중에게도 공급해야 한다"며 대중화를 추진한 것이 시초로[6] 질보다 양에 집중하긴 했지만 여차여차 대량 생산에 성공했고 이후 널리 퍼져서 인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생산은 소련 붕괴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모양인지 2021년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안에서만 생산된 제품에 대해서만 샴판스코예(샴페인)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명령하여 원조 샴페인 생산국인 프랑스가 반발하는 도 있었다.
  • 고기, 치즈, 버터, 우유 같은 축산품은 1950년대 중반부터 비교적 흔한 식재료가 되었지만 막상 구하려면 유통 시스템의 문제로 지방 국영 상점에서 생고기를 구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였고 기본 가격도 다른 식자재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 그래서 소비재 공급이 상대적으로 좋은 양대 대도시(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와 그 밖의 주요 대도시가 아닌 지방 소도시에서 육류를 풍족하게 구하고 싶으면 집단농장 농민 시장에서 몇 배의 돈을 주고 비싸게 사야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대도시에서도 콜호즈 시장에 가서 육류를 구매하곤 했다.[7]
식당에서는 미트볼, 꼴바싸, 피로시키, 보르시, 샤슬릭 같은 고기 요리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통조림 냉동식품도 비교적 흔했기 때문에 육류는 통조림이나 소시지 같은 가공 식품, 냉동 식품의 형태로 섭취하는 비중이 상당했던 편이다.
  • 추운 기후와 육류에 대한 높은 선호도 때문에 소련인들의 육류 수요는 대단히 높았다. 그래서 육류 공급은 정부 차원에서 관리하던 중대 사안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육류의 소매 가격을 동결하다시피 했다. 심지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축산 농가에 보조금을 주며 생산을 장려하는 지원 정책과 가축 두수가 감소하면 지원금을 삭감하고 징계를 먹이는 정책을 병행할 정도였다.
소련 정부의 육류 가격 동결 조치로 인해 축산업의 채산성이 계속 떨어져서 축산 농가에서는 어려움을 호소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일반인들이 국영 상점에서 구매하는 '소매 가격'은 낮게 유지하고 축산 농가로부터 육류, 축산품을 구매하는 '도매 가격'은 인상해 주었다. 이 가격 격차 문제로 인해 소련 정부는 육류 공급 부문에 상당한 예산을 투입해야 했고 1970년대에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을 채우기 위해 아르헨티나, 호주 등지에서 육류, 치즈, 버터 같은 축산품을 수입하기도 했다. 그래서 오일 머니가 풍족하던 70년대의 소련은 세계 농축산물 시장의 큰 손으로 군림했고 아르헨티나와 호주에서는 미소관계의 냉각으로 무역 금수 조치가 떨어지면 늘 미국에게 불평했으며 더러는 미국을 배제하고 소련과 단독으로 거래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 소련인들은 고기 요리는 그런대로 먹었지만 생선 요리는 신선도가 떨어져서 비린내가 많이 났기 때문에 선호도가 떨어졌다. 여기에는 소련의 지리 특성상 음식 문화가 주로 대륙권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역사가 길다 보니 해안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해물 요리가 생소했던 탓도 있었다.
이 점은 소련 수뇌부에서도 아는 일인지라,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에 오케안(Океан)이라 이름 붙인 생선 공급 유통망을 조직하여 이전보다 품질이 좋은 수산물을 대량으로 공급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오케안 점포들이 개점하자, 소비자들이 진열대의 상품들을 싹쓸이할 정도로 오케안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과 재화가 공급되고 있는 점과 수산물 어획량에 대한 회계 처리와 감독이 느슨하다는 점을 노린 부패 관료, 당 간부들이 여기에 개입하면서 모든 계획이 뒤틀려졌다.
이 '생선 마피아'들은 어선에서 항구로 선적되는 수산물 상자의 무게를 몇 킬로그램씩 높이고, 팔리지도 않은 수산물이 수백 톤씩 판매되었다고 허위로 장부를 기재해 수익금과 물품들을 빼돌렸다. 이렇게 빼돌린 물품들은 박스갈이나 택갈이를 해서 서방에 밀수하거나 블랴트(암시장)에 팔았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 불법적인 루블, 외환 거래가 이뤄졌으며 수백 명이 넘는 관료와 당 간부들이 여기에 개입했다. 이 일은 오케안의 지점에서 점원이 실수로 택갈이를 한 통조림을 고객에게 판매한 것 때문에 꼬리가 잡힌 것을 시작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전부터 고위 공직자들의 뇌물 수수 사건을 조사하던 소련 검찰은 오케안에 수사를 집중해 약 200명의 공직자를 체포, 기소했고, 이 사건에는 물고기 재판(Рыбное дело)이란 이름이 붙었다. 체포된 생선 마피아들이 고가의 캐비어를 많이 빼돌렸기에 캐비어 재판(икорное дело)이라고도 불리는 이 재판에서 많은 이들이 중형을 선고받았으며 수산부 차관 블라디미르 리토프는 총살당했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인 수산부 장관 알렉산드르 이시토프는 브레즈네프의 보호를 받아 장관에서 물러나 은퇴하는 처분만 받았다.
  • 소련에서는 1970년대 초반까지 생산되지 않았다. 원래 소련은 껌을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 금기시했으며 껌이 있더라도 죄다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많은 청소년들이 관광객들에게 껌 좀 달라고 구걸을 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8] 당시 껌을 구할 수 있던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서 돈벌이하는 데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대외 방문객들을 고려해 1976년부터 껌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소련 전역의 상점에 껌이 공급되기 시작했지만 맛이 빨리 사라지고 단단해서 서방 국가의 추잉 껌보다 질이 낮았고 껌 1통(5개 단위)의 가격도 50코펙(0.5루블)[9]이라 소련 아이들에게는 비싼 가격이었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 1980년대의 소련 아이들은 껌을 통으로 사기보다 낱개로 사서 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1980년대 후반부터 소련의 경제 사정이 크게 나빠지면서 식료품 부족 현상이 자주 일어나자 당시 소련에서는 부족한 식량 사정으로 인해 다른 생필품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었던 마카로니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다만 실제 시중에 유통되었던 제품의 품질이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소련인들 사이에서는 마카로니가 저렴하고 풍족한 이유는 사실 군용 탄피를 만들던 기계로 만들어서 그렇다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
  • 소련의 패스트푸드는 한동안 음료를 탄산이 아닌 주스로 제공했다. 미국에 대한 적대감 때문만으로 콜라를 수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소련 정부 입장에서 코카콜라를 수입하거나 생산권을 구매하기에는 가격부터 시작해서 부담스러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식품들처럼 국산화를 시도하여 콜라의 코카를 조지아산 차로 대체하여 새로운 유형의 콜라를 만들려고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출시가 무산되었다.
이후 미국의 콜라는 1959년에 소위 ' 부엌 논쟁'이라고 불리는 리처드 닉슨 니키타 흐루쇼프의 설전이 있었던 모스크바 무역 박람회에 참여한 펩시가 흐루쇼프에게 자사의 제품을 권하면서 다시 소련에 진출할 기회를 잡았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콜라를 마시는 사진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이 일은 파급력이 상당했지만 정작 수입과 생산은 지지부진해서 펩시 1974년이 되어서야 노보로시스크에 공장을 세울 수 있었다. 사족으로 미국 회사 입장에서 소련 루블을 이용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펩시는 대금을 보드카로 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소련인들은 냉전 말기까지 콜라는 펩시만 마셨고 코카콜라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인 1986년부터 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만 보면 소련에는 제대로 된 탄산음료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련 정부는 60 ~ 70년대부터 '바이칼'을 비롯해 다양한 탄산음료들을 생산하여 인민들에게 제공했기 때문에 소련인들에게 탄산음료는 생소한 것만은 아니었다.

1.2. 소련 요리와 아나스타스 미코얀

소련의 외식문화나 간식에 대해서 얘기할 때 아나스타스 미코얀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흔히 미코얀은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대에 걸쳐 오랫동안(일명 "일리치부터 일리치까지"[10]) 소련 정치에서 활동한 원로 정치인으로 유명하다.[11] 미코얀은 1926년부터 무역인민위원(무역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붉은 상인"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소련 무역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으로부터 랜드리스 수급을 총괄하면서 소련군 보급 문제를 해결하여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 미코얀은 식품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미국 선진국들을 방문해 많은 식품 생산 시설과 기계를 외국으로부터 들여 놓았고 러시아 전통 식품 말고도 다른 문화권과 국가의 음식들도 소련에 많이 도입했다. 미소관계가 개선된 1930년대 중반에 미국을 방문한 그는 소련에서는 생소한 음식이었던 도넛 햄버거, 초코바, 각종 포장 식품과 통조림, 시리얼, 팝콘, 주스, 연유 분유, 소시지, 케첩, 러시아인들이 죽고 못 사는 마요네즈까지 엄청하게 다양한 식품을 소련에 소개하고 그 조리법과 제조 기계를 도입하여 식료품의 품질과 생산량을 개선했으며 아이스크림 생산 시설도 현대화하여 대량 생산 시스템을 확립시켜 놓았다.[12]

여기에 급식 제도의 정비에도 기여했으며 요리책도 손수 출판했다. 오죽하면 스탈린도 미코얀을 보고 "당신은 공산주의보다 아이스크림에 더 관심이 많다."며 농담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만 아니었으면 맥도날드가 성업하기 훨씬 이전에 맥도날드만한 패스트푸드점이 소련에서 탄생했을 것이라는 농담 섞인 예측도 나올 정도다.[13]

도입 과정에서 현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미국의 오렌지 주스에 큰 감명을 받은 미코얀은 소련에서도 오렌지 주스를 생산하고 싶었지만 소련은 한대 기후가 중심이어서 열대 작물인 오렌지를 재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련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과 토마토로 대체하여 주스를 생산하고 유치원 학교와 같은 교육 시설에 급양하여 자라나는 아동, 청소년들에게 추가적인 영양을 제공하려고 했다. 이후 개량과 개선을 거듭하고 종류를 다양화하여 사과와 토마토 외에도 주스와 자두 주스도 개발해 보급했다. 미코얀이 영향을 미친 급식 시스템이나 요리책은 1980년대까지도 소련에 지대하게 영향을 끼쳐 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도 구 소련 15개국에는 미코얀이 남겨 놓은 유산이 지대하게 남아 있다.

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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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으로 치면 분식집이나 백반집 정도. [2] 다만 물가와 외식비가 저렴한 소련에서도 그런 고급 식당들은 가격이 높아서 특별한 일이나 접대를 할 때나 갔고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3] (출처) What was it like eating out during the Soviet Union? (영어) (소련에서 식사하는 일은 어땠을까?), Anna Sorokina, Russia Beyond (RBTH), 2018년 12월 11일. [4] 물론 프랑스 요리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해도 흔히 떠오르는 고급스러운 요리들은 비싼 레스토랑에 가야 맛볼 수 있었다. 식당에서 팔았던 프랑스식 요리들은 샐러드와 커틀릿류가 일반적이었다. [5] (출처) Soviet hangover: How people drank beer in the USSR (영어) (소련의 숙취: 소련인들은 맥주를 어떻게 마셨을까), Eleonora Goldman, Russia Beyond (RBTH), 2017년 7월 28일. [6] 같은 논리로 캐비아 초콜릿, 와인, 보드카 등도 대량 보급되었다. [7] 공산주의 유머에 나오는 "소시지 열차"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8] 이와 관련된 일화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6월 미육군 항공군 폭격기 부대가 독일 폭격 작전을 위해 소련 비행장에 잠시 머물렀을 때 폴타바를 방문했던 미 공군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이 현지 방문 및 전시 선전을 겸해 껌을 나누어주자 당시 소련 아동들이 이를 즈바츠카(жвачка)라고 부르면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미군이 촬영한 공보영상 (25:11부터) [9] 소련에서 50 코페이카는 값싼 담배 1갑을 사거나 영화를 1번 보거나 군것질거리를 여러 개 사먹을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소련 아동들에게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10] 그러니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부터 레오니드 일리치 브레즈네프까지. [11] 여담으로 동생인 아르툠 미코얀은 군용 항공기 설계국 미그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다. [12] 오늘날 러시아에서 소련 시절을 그리워할 때 흔히 언급되는 플롬비르(Пломбир)란 아이스크림도 이때 미국에서 도입된 레시피를 그대로 사용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다. 실물 사진 [13] 소련에도 햄버거는 상륙했지만 크게 유행하지 못해 주로 냉동식품으로 취급되거나 소수의 식당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맥도날드가 진출하면서 햄버거가 이전보다 더 많이 퍼지기는 했지만 1990년대 자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햄버거가 간단한 한 끼 식사거리로 취급된 것은 아무리 길게 봐도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