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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쿠즈네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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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쿠즈네초프 · 이반 이사코프 ·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비고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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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2대 해군장관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Гера́симович Кузнецо́в
Nikolay Gerasimovich Kuznetsov
파일:Nikolai_Kuznetsov_3.jpg
출생 1904년 7월 24일
러시아 제국 볼로그다현 벨리코우스튜그구 메드비드키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아르한겔스크주 코틀라스군 메드베드키)
사망 1974년 12월 6일 (향년 70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기간 제4대 해군인민위원
1939년 4월 28일 ~ 1946년 2월 25일
초대 해군 총사령관
1939년 7월 24일 ~ 1947년 1월 17일
제3대 해군 총사령관
1951년 1월 20일 ~ 1956년 1월 5일
제2대 해군장관
1951년 7월 20일 ~ 1953년 3월 15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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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게라심 표도로비치 쿠즈네초프
어머니 안나 이바노브나 쿠즈네초바
배우자 ???[1] (1935년 이혼)
베라 니콜라예브나 쿠즈네초바 (재혼)
자녀 아들 빅토르,[2] 니콜라이, 블라디미르
학력 쿠즈네초프 해군사관학교 (졸업)
복무 소비에트 해군
1919년 ~ 1956년
최종 계급 원수 (소비에트 해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독소전쟁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영웅
레닌훈장 (4회)
우샤코프 훈장 1등급 (2회)
적기훈장 (3회)
적성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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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 성장2.2. 독소전쟁2.3. 전후
2.3.1. 첫 번째 탄압2.3.2. 두 번째 탄압2.3.3. 은퇴 후
3. 평가4. 여담5. 진급 이력6. 대중매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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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6affa94784b3c40dc1a051f042d5e39.jpg
해군 군관 예복을 입은 초상화
소련 해군 장성으로 소련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해군 원수 및 해군 장관을 역임하였다.

2. 생애

2.1. 출생 성장

파일:쿠즈네초프_집_박물관.jpg
메드베드키 마을에 있는 쿠즈네초프 일가의 집. 현재는 쿠즈네초프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904년 7월 24일 아르한겔스크주 코틀라스군 메드베드키마을 농민 게라심 쿠즈네초프의 아들로 태어났다. 북드비나강을 낀 메드베드키 마을에서 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었고 여름에는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배를 타 강을 건너고 캠프파이어를 하는 축제까지 있었다. 덕분에 쿠즈네초프는 어릴 때부터 강과 배와 친근했고 마을 어른들이 들려주는 러시아 항해사들과 북극 탐험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다로의 낭만적인 모험을 꿈꾸며 자랐다.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제 교구 학교에서 공부했다. 1915년 2월, 아버지 게라심 쿠즈네초프가 사망했다. 오랫동안 병을 앓았기 때문에 쿠즈네초프의 기억 속 아버지는 항상 아픈 모습이었다고 한다.

1916년 12세에 코틀라스의 한 식당에서 일하다 삼촌 파벨 쿠즈네초프가 아르한겔스크로 데려갔다. 쿠즈네초프는 아르한겔스크에서 삼촌의 아들과 함께 1년 더 공부했다.

1917년 아르한겔스크 항구에서 배달부로 취직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아르한겔스크의 상황이 복잡해져 오래 일하지 못했다. 1918년엔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 방앗간에서 일했다.

1919년 외삼촌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약속해 기다리고 있을 때 부두에서 우연히 만난 해병에게 해군에 입대할 것을 권유 받았고, 입대하려면 최소 17세가 돼야 했기 때문에 15세였던 쿠즈네초프는 나이를 2년 속이고 해군에 입대했다. 나이에 비해 키가 컸기 때문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이후로 공식 서류상 쿠즈네초프는 항상 1902년생으로 표기됐다. 북드비나 소함대에 배치된 쿠즈네초프는 다른 여타 젊은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것을 기대했으나 쿠즈네초프의 똘똘함을 알아본 상관은 그를 타자기 앞에 앉히고 서류작업만 시켜댔다. 연말에 쿠즈네초프는 제발 자신을 배에 태워달라고 간청했다.

1920년 2월 21일 아르한겔스크가 적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북드비나 소함대도 해체되었지만 쿠즈네초프는 무르만스크 아르한겔스크에서 훈련을 받으며 계속 복무했다. 가을에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해군 사령부로 전출되었다. 1921년 콤소몰에 가입했다.
파일:쿠즈네초프제독_동기들.jpg
쿠즈네초프와 해군사관학교 동기들. 맨 앞줄 누워있는 4명 중 제일 오른쪽이 쿠즈네초프다.
1922년 9월 20일 페트로그라드의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악명높던 다른 사관학교들과 달리 혁명과 내전으로 선배들이 다 쓸려나갔기 때문에 어떠한 갈굼과 부조리도 겪지 않으며 꿈과 희망이 넘치는 보람찬 사관학교생활을 시작했다.[3]

1924년 페트로그라드 대표단의 일원으로 해군사관생도들도 레닌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쿠즈네초프는 이때 사상적으로 깊은 감명을 받아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공산당에 가입 신청서를 냈다. 생도로서 그 유명한 순양함 아브로라를 타고 스웨덴 노르웨이를 방문했고 방학땐 집에 돌아가지 않고 페트로그라드에 남아 친구들과 강에서 배를 타고 놀았다.

1925년 공산당 가입이 승인됐다. 실습 훈련과 항해등을 거치며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0월 31일 레닌그라드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하일 프룬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1926년 10월 졸업 성적순위 10위권에 들어 복무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실습 때 쿠즈네초프를 눈여겨 본 발트함대 총참모장 레프 갈레르가 발트함대 사령부로 오라고 제안했지만 쿠즈네초프는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취역준비중이던 흑해함대의 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를 선택했다. 원래는 절친이었던 동기 블라디미르 트리부츠[4]와 함께 강구트급 전함 '파리즈스카야 콤무나'에서 복무하기로 했지만 새로운 순양함을 타고 떠나는 항해에 매료되어 마지막에 마음을 바꿨다.

1929년 가을 오데사 인근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함대 훈련에 참석한 보로실로프가 훈련 때 쿠즈네초프의 행동을 높이 평가했다. 보로실로프는 쿠즈네초프를 따로 불러내 모두의 앞에서 악수를 하며 칭찬을 했고 쿠즈네초프의 해군대학 입학 허가 명령을 내렸다. 해군대학에서 쿠즈네초프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파일:크라스니_캅카스_부함장_쿠즈네초프.jpg
크라스니 캅카스의 부함장 쿠즈네초프. 1932년.
1932년 해군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해 또 다시 복무지를 선택할 기회가 생겼다. 발트함대에서 좋은 조건을 제안하며 다시 스카우트 제의가 왔으나 쿠즈네초프는 이번에도 거절하고 흑해함대의 순양함 '크라스니 캅카스'의 부함장 직위를 요구했다. '크라스니 캅카스' 함장은 부함장인 쿠즈네초프가 최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해줬고 쿠즈네초프는 함선 승조원들의 복지를 신경씀과 동시에 엄격한 질서를 도입했다. '크라스니 캅카스'의 일정은 분 단위로 잡혔고 음주가 금지됐으며 복장규정도 철저해 옷을 보고 누가 '크라스니 캅카스'의 승조원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훈련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자 '크라스니 캅카스'의 승조원들은 이러한 점에 자부심을 느끼며 쿠즈네초프가 떠난 후에도 확립된 질서와 규칙을 유지하고 이어갔다. 또한 쿠즈네초프는 전투 훈련 방법 이론을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동료 장교는 "여태까지 훈련 이론이 없었고, 누구도 개발하려 하지 않았다."며 감탄을 표했다.
파일:체르보나우크라이나_쿠즈네초프.jpg
체르보나 우크라이나 함장 쿠즈네초프와 포수들
1933년 11월 29세의 나이로 첫 복무지였던 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의 함장으로 임명되어 전세계 최연소 순양함 함장이 되었다. 쿠즈네초프는 훈련에 참여하며 새로운 전투 준비 시스템과 작전 행동을 개발했고 다른 배와 함대에서 쿠즈네초프의 전투 훈련 방법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35년 '체르보나 우크라이나'가 붉은 함대 전체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 공로로 쿠즈네초프는 존경징표훈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9월 세르고 오르조니키제가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에 탑승해 항해했다. 함선과 승조원들의 상태에 만족한 오르조니키제는 쿠즈네초프에게 시계와 GAZ-A 승용차를 수여했다.
파일:스페인내전_소련군사고문단.jpg
스페인내전에 파견된 소련측 군사 고문단과 쿠즈네초프. 오른쪽은 그레고리 슈테른이다.
1936년 8월 스페인 내전에 공화국측 군사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해군 최고 고문으로서 활약한 쿠즈네초프는 공로를 인정받아 1937년 레닌훈장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숙청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쿠즈네초프도 스페인에서 투하쳅스키등 고위 군 지휘관들의 체포 소식을 들었지만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으며 이것이 대대적인 숙청일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1937년 8월 귀국해 태평양함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극동으로 이동했다. 임명되고 얼마 안 가 자신의 상관인 태평양함대 사령관 키레예프가 체포되어 1938년에 새로운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모스크바로 소환 명령을 받고 떠나는 키레예프를 쿠즈네초프가 직접 배웅해줬는데, 슬픈 표정의 키레예프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것 같았다고 한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된 쿠즈네초프는 함대사령관으로서 해군에서 장교들이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너무나 쉽게 체포되는 과정을 목도했고, 조국을 배신할 리 없는 가까운 지인과 친구들까지 체포되기 시작하자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쿠즈네초프는 해군에서 일어난 체포들의 세부사항을 조사했고 체포된 장교들의 무고함과 결백함을 확인한 쿠즈네초프는 자신 또한  반동으로 몰려 숙청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를 감수하고 용감하게 항의하고, 장교들의 신원보증을 서 석방시켰다.[5]
파일:쿠즈네초프_슈테른_1938.jpg
태평양함대 사령관 쿠즈네초프와 극동군 사령관 슈테른. 1938년.
쿠즈네초프는 본업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직에도 충실히 적응하며 1938년 여름에 일어난 하산 호 전투에서 육군을 지원했다. 같은 해 11월, 마무리 진수 작업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견인되고 있던 프로젝트 7형 구축함 '례쉬텔니'가 폭풍우를 만나 난파당하는 사고가 벌어졌는데, 이 견인 임무의 책임자가 다름 아닌 고르시코프였다. 모두가 고르시코프가 엄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쿠즈네초프는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에 고르시코프의 죄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구하기로 마음먹는다. 12월 쿠즈네초프는 사고 보고를 위해 모스크바로 향했다. 스탈린을 포함한 정치국 의원들이 참여한 해군 최고회의에서 쿠즈네초프는 고르시코프의 결백을 주장하고 상업항구를 나홋카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 폐쇄된 군항도시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쿠즈네초프의 발표를 마음에 들어하며 요청대로 고르시코프는 경미한 처벌로 끝내고 나홋카로 상업항구를 옮길 것을 지시했다. 쿠즈네초프는 이때 보고서와 자료의 디자인을 맡은 베라 니콜라예브나에게 반해 극동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함께 가자며 청혼해 재혼했다.[6]

2.2. 독소전쟁

파일:쿠즈네초프_1941.jpg
해군 군관 예복을 입은 쿠즈네초프 해군 인민위원
1939년 3월 전연방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3월 17일 18차 당대회에서 연설한 날 새벽 스탈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스탈린은 쿠즈네초프와 해군에 대해 짧게 얘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고, 다음날 해군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는 통지를 받는다. 대숙청을 이끌었던 예조프가 몰락하고 예조프의 수족이었던 3대 해군 인민위원 미하일 프리놉스키가 4월 6일에 체포되어 인민위원직이 공석이 되었다.

1939년 4월 28일 34세의 나이에 해군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소련의 최연소 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임 인민위원들은 해군에 대해 잘 모르는 육군 출신에 해군에서의 숙청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에 쿠즈네초프가 임명되자 소련 해군은 "드디어 해군 출신이 우리 수장이 됐다!"라며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이 자리를 맡으면서 소련 해군을 지휘하였다. 쿠즈네초프는 해군 인민위원 시절 소련 해군이 서방이나 독일에 맞서기에 너무 빈약하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에게 대양함대 육성 계획을 발표했다. 해군력 양성에 관심이 있던 스탈린은 쿠즈네초프의 함대 육성 계획을 지지했고 이에 대한 재원 마련에 들어갔지만, 독소전쟁이 발발하며 그 예산은 모두 지상군으로 전용되었다.

독소전쟁 발발 직전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군에 경계령을 내리는 것을 금했으나,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 육군과는 달리 쿠즈네초프가 지휘하는 해군의 모든 함정은 경계령에 들어가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에 당한 피해가 매우 적었다. 스탈린은 쿠즈네초프가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해 무척 화를 냈지만 소련 해군의 피해상황을 보고받자 화를 풀고 쿠즈네초프를 칭찬했다.

쿠즈네초프는 해군 장관으로서 총사령관 스탈린, 총사령관 대리 게오르기 주코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공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등과 함께 스타프카(최고지휘부)의 멤버였다. 무르만스크로 들어오는 연합국 수송선단을 보호하는 작전을 감독하기도 하고, 특히 흑해 방면 작전에 을 기울였다. 독일 해군, 크릭스마리네 지중해에서 강력한 영국 해군에 가로막혀 흑해까지 일부 U보트 소해정, 슈넬보트 정도밖에 진출하지 못했고, 쿠즈네초프는 이런 제해권을 이용하여 상륙전 교리를 개발하고 직접 실행시키기도 했다. 이런 업적으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이반 이사코프 제독,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제독과 함께 해군에 단 3명 뿐인 원수가 되었다.

2.3. 전후

2.3.1. 첫 번째 탄압

파일:쿠즈네초프 해군장관.jpg
쿠즈네초프 해군장관
전후 쿠즈네초프는 스탈린과 해군 발전 방향에 대해 상당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1945년 스탈린은 쿠즈네초프의 감독하에 개발된 10개년 군함 건조 계획을 거부했고, 쿠즈네초프도 스탈린의 여러 해군에 대한 견해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언쟁을 벌였다. 특히 1946년 스탈린이 발트함대를 북발트함대와 남발트함대로 분리시키려 하자 쿠즈네초프는 격하게 반대했고,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스탈린이 곧 자신에게 철퇴를 내릴 것이라는 걸 직감했지만 꿋꿋하게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스탈린의 뜻대로 발트함대는 1946년 2월 두 함대로 분리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통합되었다.

1946년 2월 25일, 소련 해군 인민위원회가 폐지되어 소련 국군 인민위원회로 통합되었고 쿠즈네초프는 소련 해군 총사령관이자 소련 국군 인민위원회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쿠즈네초프는 통합된 소련 국군 인민위원회는 다분히 육군 편향적이고 해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해군 부서와 해군 총사령관의 지위를 전쟁 때처럼 보장해 줄 것을 주장했다가 해군의 특별한 독립을 주장한다며 군에서 전방위 폭격을 맞았다.

결국 쿠즈네초프는 1947년 1월 직위에서 해임되고 2월에 레닌그라드의 해군 사관학교 학과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자신을 불순물 취급하고 해군 예산만 삭감하던 국군 인민위원회에서 빠져나왔다며 기껍게 받아들였다.

한편 당시 군에서 부는 정치적 숙청을 감지한 해군 기뢰 연구부 장교 알페로프 대령 불가닌에게 쿠즈네초프, 갈레르, 알라푸조프, 스테파노프 제독이 소련 정부의 허가 없이 낙하산 어뢰 설계도, 함포 시스템, 수많은 기밀 도면과 해도 등을 영미 연합군에게 넘겼다고 고발하는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받은 불가닌은 눈엣가시였던 쿠즈네초프를 묻어버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스탈린에게 보고서를 올렸고 스탈린은 즉시 조사 명령을 내렸다.

첫 조사는 해군 내에서 해군들이 하도록 지시됐고 조사관으로 판텔레예프 제독과 라푸쉬킨 제독이 임명되었다. 두 제독은 소련 해군이 연합군에게 어뢰도와 지도를 넘겨준 것은 사실이나, 기밀정보가 아니었다는 보고서를 쓰며 제독들의 혐의를 부정했다. 해당 보고서는 전쟁 기간 북방함대 사령관으로 활약하고 해군 참모장으로 임명된 아르세니 골로프코 제독이 크렘린으로 가져갔으나, 골로프코 제독은 가져갔던 보고서를 그대로 들고 돌아와 판텔레예프와 라푸쉬킨에게 돌려주며 "내가 이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건네면서 당신들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을 행운으로 아시오. 그랬다면 당신들도 해군에서 제명됐을 거요."라고 말하며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음을 밝혔다. 스탈린은 골로프코 제독에게 "너희 해군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라며 제독들을 명예법원에 회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1947년 11월 8일, 레닌그라드에 있던 쿠즈네초프와 레프 갈레르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둘은 기차를 타고 가며 왜 소환 명령이 왔는지 추측할 정도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4명의 제독들은 체포되었고 그들은 결백하고 혐의가 없었기 때문에 지지부진한 조사 과정이 이어졌다.

12월 12일, 소련 각료 회의가 해군 제독들을 명예법원에서 재판하기로 결정했다. 고보로프 원수가 재판장을 맡았고 법관 구성은 불가닌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

1948년 1월 12일~15일 명예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법정엔 피고인들을 엄하게 처벌해달라는 날선 비난이 쏟아져 내렸다. 제독들을 옹호한 라푸쉬킨 제독과 시바예프 제독은 해임되었다. 쿠즈네초프는 회고록에서 "나는 평생 부하들을 지키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무고한 처벌 위협을 받던 결백한 부하들을 그렇게나 구해주었는데, 이제 나는 내 부하들이 우리에게 쏟아내는 거짓 비난을 듣고 있었다."라며 당시 씁쓸했던 감정을 내비쳤다. 법원의 판결은 스탈린이 불가닌에게 내렸고, 판사들은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불가닌의 명령에만 따랐다. 재판의 결과는 이 사건을 대법원 군사 재판소에 회부하는 것이었다.

1월 16일부터 2월까지 군 검찰청이 제독들을 심문하고 조사했다.[7] 이 길고 불안정한 시간 동안 쿠즈네초프는 많은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계와 심장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1948년 2월 3일 대법원 군사 재판소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장은 울리히였는데, 쿠즈네초프는 울리히가 그 해 벌어진 모든 정치 재판들을 담당했고 모든 판결이 가혹했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를 예상하며 긴장했다. 먼저 알라푸조프, 스테파노프의 10년형이 선고됐고 쿠즈네초프는 시작이 10년형인 걸 보고 뒤로 갈수록 형이 높아져 자신은 사형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갈레르가 4년형을 받자 자신도 4년일 거라고 생각해 안심했다. 결과적으로 쿠즈네초프는 전쟁 중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 강등 조치로만 끝났다. 이 결과도 스탈린이 결정한 것으로, 스탈린은 처음 체포 명령을 내릴 때 쿠즈네초프를 인민의 적으로서 체포하자는 빅토르 아바쿠모프의 제안에 "쿠즈네초프는 인민의 적이 아니다."라고 거절하며 쿠즈네초프를 정도 이상으로 벌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했다.

강등당한 쿠즈네초프는 1948년 6월 극동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돼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고 1950년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됐다.

2.3.2. 두 번째 탄압

파일:주코프와쿠즈네초프.jpg
주코프와 쿠즈네초프
1951년 쿠즈네초프가 해군장관으로 재임명되었다. 쿠즈네초프의 후임으로 해군장관이 된 유마셰프 제독을 스탈린이 마음에 안 들어 하며 그를 대체할 새로운 해군장관 후보에 대해 회의할 때 스탈린이 쿠즈네초프를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병 주고 약주기 재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온 쿠즈네초프는 자신이 마치 망치와 모루 사이에 있는 것 같다며 겉으로는 나를 용서한 척하는 정치부가 또 다른 '늑대 굴'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불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쿠즈네초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사리지 않고 전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해군에 대해 논쟁하다 주코프 흐루쇼프등 주요인물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8]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쿠즈네초프는 곧장 알라푸조프와 스테파노프를 석방해 복권시켰고[9], 자신을 옹호해서 해임당했던 제독들도 복권시켰다.

1955년 초 쿠즈네초프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5월 국방장관 주코프에게 건강상의 이유로 자신의 보직을 변경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나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쿠즈네초프는 병가를 냈고 6월 해군장관의 업무가 쿠즈네초프의 추천으로 당시 흑해함대 사령관이던 고르시코프에게 임시로 맡겨졌다. 병가를 낸 쿠즈네초프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크림반도의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이 병가 기간인 10월 29일, 흑해함대에서 전함 노보로시스크[10]가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1955년 12월 국방장관 주코프가 노보로시스크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쿠즈네초프를 해군 장관직에서 해임시켰다. 쿠즈네초프는 사건 조사단에 자신을 포함시켜주고, 조사 결과에 대해 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6년 2월 17일 쿠즈네초프는 중장으로 강등되고 강제 예편 당해 해군에서 은퇴당하고 만다.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에서 퇴출되었다.

2.3.3.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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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쿠즈네초프 중장
쿠즈네초프는 은퇴당하고도 몇십년 동안 꾸준히 노보로시스크 사건을 명확하게 조사하고 자신의 강등과 처우를 결정한 재판을 합법적으로 다시 할 것을 요청했다.[11] 노보로시스크 폭발의 이유는 흘러들어온 독일 기뢰때문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이 또한 가설 중 하나일뿐이며 폭발 사건 조사위원회는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쿠즈네초프는 이렇게나 사람이 많이 희생된 사건을 어째서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지 의아해하며 오래된 독일 기뢰가 그렇게 쉽게 흘러들어와 배의 취약한 곳과 접촉해 폭발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기뢰 가설을 납득하지 못했고 이탈리아인들의 사보타주일 거라고 추측했다. 흑해함대 보고서에서도 10년 동안 세바스토폴만을 통제하면서 미확인 기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나와있으며, 나중에 따로 이 사건을 조사한 카사토노프 제독도 당시 전함의 위치는 흘러들어온 기뢰와 닿기 어렵다며 기뢰보다 고의적인 사보타주일 확률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쿠즈네초프는 강제 예편된 후 "나를 해군에서 쫓아냈어도 나와 해군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며 해군에 관한 저술에 힘쓰고 전쟁 당시 회고록을 집필했다. 직장을 잃은 쿠즈네초프는 처음에 금전 문제에 시달렸고 가장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회고록을 출판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회고록은 나밖에 쓸 수 없는 내용을 제대로 쓰고 싶다"며 집필에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전쟁 회고록을 이미 완성했음에도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고 있어 적당한 때를 기다렸고, 흐루쇼프 실각 후 1966년 스페인 내전 2차 세계 대전 때의 회고록을 출판했다.[12]

스탈린 독재와 자신에게 일어난 탄압, 흐루쇼프, 소련 정치에 대해 쓴 전후 회고록은 "이건 내 사후에나 나올 수 있을 것."이라며 원고를 보관해뒀고 그의 말대로 1995년에서야 전후 회고록이 출판될 수 있었다. 쿠즈네초프는 전후 회고록에서 스탈린과 흐루쇼프의 독재를 직접적으로 비난하고, 그들을 따르던 정치위원들과 정치적으로 행동하던 해군 동지들[13]을 아첨꾼이라며 비판했다.[14]
어느 남미 국가의 독재자가 하룻밤 사이에 다른 독재자로 교체된다면, 그건 그곳을 지배하는 것이 국민이 아니라 파벌일 뿐임을 의미하며 법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전후 회고록 «Крутые повороты» 中
쿠즈네초프는 공산당이 모든 국가기관을 대체해 당에 의해 국가권력이 힘을 잃었다고 공산당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 사람이 막강한 권력을 누려 쉽게 독재자가 될 수 있는 현 소련 체제 자체를 뜯어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쿠즈네초프는 강력한 법률과 헌법을 제정하고 감독기관을 설치해 독재를 하지 못하도록 막고 가능한 많은 개인과 기관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서술하며 흐루쇼프 이후엔 국민을 위하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집권하기를 소원했다.

1957년 쿠즈네초프를 해임했던 주코프도 니키타 흐루쇼프의 미움을 사서 해임되었다.[15] 1964년 바실렙스키[16]를 포함한 많은 제독들이 쿠즈네초프를 복귀시켜달라고 청원을 냈고, 명예직이었던 국방부 감독관에 임명되었으나 쿠즈네초프가 직접 후임으로 골랐었던 소련 해군의 어머니로 평가받는 고르시코프 제독의 반대로 인해 생전에 원수로 복귀하지 못했다. 심지어 고르시코프는 '복권의 비효율성에 대해서'라는 문서까지 준비했다.

1974년 12월 3일 신장 낭종 수술을 받다가 심장이 멈췄고, 심근경색을 일으키다 끝내 12월 6일 1시 15분에 숨을 거뒀다. 세상을 떠난 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던 1988년에야 소련 해군 원수로 사후 복귀되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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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인 아르한겔스크에 세워진 쿠즈네초프의 동상.

탁월한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능숙한 행정가로서 쿠즈네초프가 소련-러시아 해군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 해군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핵잠수함 미사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이것은 흐루쇼프의 대표적 왜곡 주장으로 전혀 사실이 아니다. 쿠즈네초프는 이미 1946년 스탈린에게 원자력 추진 함선 설계 필요성에 대해 보고하고 있었다. 핵잠수함 건조는 쿠즈네초프의 재임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1954년 쿠즈네초프와 말리셰프, 자베냐긴이 함께 핵잠수함의 첫 설계를 검토했다. 쿠즈네초프의 전후 건조 계획에서도 실제 취역한 핵잠수함보다 더 많은 양의 핵잠수함이 제시되고 있었다.

소련 해군의 미사일 무기는 1951년에 쿠즈네초프가 최초로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쿠즈네초프가 해군장관으로 지내던 1954~1955년에 순양함 '아드미랄 나히모프'와 해안부대에 새로운 미사일 무기 시제품들이 설치됐고 해안용 '스트렐라'는 테스트 발사까지 완료됐었다. 쿠즈네초프는 1955년 크림반도에서 흐루쇼프에게 직접 미사일 발사를 보여주었고 해군 미사일에 관한 모든 초안 방향을 결정했다. 흐루쇼프의 주장과는 정 반대로 소련 해군의 핵잠과 미사일 전력의 토대는 쿠즈네초프가 세운 것이다. 이 사실들은 쿠즈네초프 본인이 해당 주장은 '주코프와 흐루쇼프의 모함'이라고 분통을 터트리며 회고록에 직접 반박한 내용들이다.[17] 쿠즈네초프는 분노를 넘어 흐루쇼프의 거짓 주장을 해군 동지들까지 받아들인다며 이러다 사후에 복권되는 대신 전쟁 기간 동안 세운 전공들까지 왜곡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다.

그의 이름을 붙인 항공순양함 함급인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 중항공순양함이 2척 건조되었다. 1번함인 어드미럴 쿠즈네초프함은 아직도 러시아 해군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고, 제2번함인 바랴그함은 미완성 상태로 준공비용도 없고 완공하더라도 운용비가 나올 구멍이 없어서 우크라이나에서 방치되었다가 중국에서 해상 카지노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팔려갔다가 중국 해군이 개조하여 랴오닝함이라는 함명으로 취역시켰다.

비슷한 사례로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인 손원일 제독이 있다.

4. 여담

  • 육군 장군 주코프와 함께 스탈린에게 할 말은 다 하던 완고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전후 스탈린과 해군 재편으로 언쟁을 하면서 "저한테 불만 있으시면 저를 해임 시키십시오."라고 했을 정도...[18] 스탈린에게 "그대는 왜 항상 나와 논쟁하려 하느냐."라는 말을 대놓고 듣기도 했다. 이런 성격 탓에 불가닌, 흐루쇼프를 비롯한 주요 정치부들과도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19] 일화로 1951년 해군장관으로 재임했을 때 스탈린에게 보고를 하러 가니 말렌코프가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리지 말라."라며 좋은 말만 할 것을 제안 했지만, 아첨하느라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여긴 쿠즈네초프는 곧이곧대로 해군 조선 문제에 관해 부정적인 보고를 올리고 스탈린의 기분을 망쳐 그날 회의를 갑분싸로 만들어 버렸다. 소련 정치부가 쿠즈네초프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잘 알 수 있는 일례. 본인도 회고록에서 이 점을 지적하며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발언할 때 좀 더 부드럽게 말할 것이라고 후회를 보였다.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20]
  • 사관학교 때 학교에서 나오던 대구 요리를 좋아해 별명이 콜랴- 트레스카(Коля-Треска)였다. 동기들 모두 이러한 별명이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 자신의 첫 복무지이자 함장을 지냈던 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1970년, 전쟁 중 운 적이 있냐는 부됸니 원수의 물음에 '체르보나 우크라이나'가 침몰했을 때 미안함과 슬픔에 눈물이 흘렀었다고 고백했다.
  • 예편당한 후 금전적인 문제에 시달렸다. 저축한 돈이 없었고 연금[21]이 나왔지만 4인 가족[22]이 먹고살기엔 충분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위 시선 때문에 육체노동도 못해 1년 동안 영어를 배운 뒤[23] 장당 60루블의 영문 군사 기사 번역 일을 했다. 다행히 말년엔 금전적으로 안정되었다고 언급한다.
  • 금전 문제로 집도 더 작은 곳으로 이사해야 해서 마침 더 큰 집을 찾고 있던 로코솝스키 원수와 집을 교환했다. 그렇게 교환한 집은 트베르스카야 거리 9번의 아파트로, 건물 입구 외벽에 이곳에 살았던 유명인들의 명패가 걸려있는데 그중 쿠즈네초프의 명패도 있다.[24] 지나갈 일이 있으면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 그러나 쿠즈네초프는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로 집보다 모스크바 외곽 라즈도리 마을에 있는 다차에서 여생을 보냈다.[25]
  • 생전 출판한 회고록들이 큰 성공을 거두며 소련 작가 협회에서 입회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자신은 작가가 아니라며 웃으며 거절했다.

5. 진급 이력

6. 대중매체

  • 8부작 전기 드라마 <쿠즈네초프 제독>이 촬영 완료되어 2024년 로시야 1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제작사는 러시아 대표 영화 스튜디오 모스필름으로, 쿠즈네초프 역은 이고르 페트렌코가 맡았다. 드라마에서는 전처가 장남 빅토르를 키우며 쿠즈네초프와 만나고 현 아내와 미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쿠즈네초프가 빅토르의 양육권을 가져가 키웠으며 이혼한 전처와는 다시는 보지 않았고 재혼한 아내 베라와 가정에 충실했다.

7. 관련 문서


[1] 누군지 알려진 바 없음. [2] 전처 소생. [3] 생도 수도 별로 없어 식사시간에 식당에 가면 식당의 절반만 찼다고 한다. [4] 2차 세계대전 때 발트함대 사령관. [5] 1940년 5월 쿠즈네초프의 도움으로 석방됐다는 해군사관학교 동기의 기록을 보면 태평양함대 사령관 이후 해군 인민위원이 됐을 때도 동지들을 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6] 청혼을 받은 베라는 화를 내며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당신에게 이미 아들이 있다는 걸 압니다!"라고 거절했다. 당황한 쿠즈네초프는 "나는 내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테지만 아들이 우리 사이에 문제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베라의 손에 1935년 여름에 작성된 이혼 증명서를 쥐여줬다. [7] 지루한 과정의 연속이었을 뿐 신체적 위해는 없었다. [8] 이러한 쿠즈네초프의 행동에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처신을 못했냐며 탄식하자 쿠즈네초프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잘못된 견해를 지지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못 박았다. [9] 4년형을 받은 갈레르는 1950년에 옥중사망했다. [10] 원래는 2차 대전 종전후 3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로부터 전쟁배상조로 받아낸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이었다. 당시 소련은 신형이었던 비토리오 베네토급을 원했지만 당연히 영/미의 반대로 구형전함(1차대전형 전함으로 1930년대말 이탈리아가 대대적으로 마개조했다. 당시 마개조한 이유도 프랑스 해군이 독일의 장갑함(그라프 쉬페급)건조에 대응해 됭케르크급을 건조하자 이탈리아 해군도 됭케르크급에 대항할 신형함이 급히 필요한데 신형함 건조에는 시간이 모자라다고 판단, 기존의 구형전함들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친 것이었다.)을 받았는데 항구에 정박중 불가사의한 이유로 폭발, 함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는데 전복위험이 없다고 본 함장 때문에 승조원들의 대피가 없었고 이 때문에 함이 갑자기 전복되는 바람에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고 한다. [11] 두 번째 탄압의 모든 과정은 쿠즈네초프를 배제한 채 이루어졌으며 중장 강등과 예편이 결정된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 쿠즈네초프는 첫 번째 탄압 땐 명분이라도 있었다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12] 부됸니 원수는 "다들 스탈린을 터무니없이 모욕적으로 묘사해놨는데 이 회고록의 스탈린은 매우 사실적이다."라며 쿠즈네초프의 회고록이 객관적이라고 칭찬했다. [13] 직접적으로 이름이 거론되며 까인 건 이사코프 고르시코프. 동기출신 절친 트리부츠도 쿠즈네초프 비판에 목소리를 보태며 배신했으나, 쿠즈네초프는 친구의 배신 소식을 듣고도 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이후 출판된 쿠즈네초프 전쟁 회고록에서 트리부츠는 그대로 "내 친한 친구"라고 서술되었다. [14] 흐루쇼프 실각 후 자신을 외면하던 동지들이 귀신같이 연락하며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자 "어째서 사람들이 이토록 타락했는가."라며 분노했다. [15] 1970년에 쿠즈네초프를 만난 부됸니 원수가 전해주기를, 쿠즈네초프의 일에 대해 책망하니 "저도 흐루쇼프에게 당했습니다!"라며 성을 냈다고 한다. [16] 은퇴 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오래도록 우정을 이어나갔고 바실렙스키는 쿠즈네초프 사후에도 그의 복권 요청 청원서를 썼다. 쿠즈네초프는 " 주코프는 뛰어난 야전 사령관이었지만 참모는 영 아니었다. 반면 바실렙스키는 타고난 참모장이었다."라고 평가했다. [17] 러시아어로 관련 내용들을 검색하면 모두 사실임을 알 수 있다. [18] 이 발언을 한 1년 뒤 1947년에 진짜 해임된다. [19] 쿠즈네초프는 회고록에서 첫 번째 탄압은 불가닌이 주도했고, 두 번째 탄압은 주코프와 흐루쇼프가 중심이었다고 서술했다. [20] 독일어는 원서를 읽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21] 군인 연금도 아닌 개인연금이었다. [22] 장남 빅토르는 장성했으나 차남과 삼남은 10대 학생이었다. [23] 이미 알고 있던 프랑스어, 독일어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24] 파일:쿠즈네초프제독_명패.jpg [25] 쿠즈네초프 말년 영상에서 나오는 2층짜리 목조주택이 이 다차다. [26] 해군 원수 계급 신설 전이라 육군 원수와 동급이었음. [소련] 전설함장으로 쿠즈네초프를 구매할 수 있다. 함장 스킬 중 '승리의 의지'가 있는데 불타는 전함도 살리는 기적을 행하기 때문에 쿠즈네초프의 '소뽕의 의지'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