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3:21:58

체크포인트 찰리

1. 개요2. 체크포인트 찰리 대치 사건3. 각종 사진4. 여담5. 미디어

1. 개요

Der Checkpoint Charlie

옛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경계에 있던 연합군과 소련군 검문소. 이 곳은 연합군 3군 중 미 육군이 관할했고, 찰리는 음성 기호의 C를 뜻하는 것으로 특별히 다른 의미는 없다.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 및 동독으로 넘어가는 검문소는 여러 곳이 있었는데, 체크 포인트 찰리는 외국인이 도로로 통과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검문소였다. 철도로는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역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검문소 형태가 다른데, 서베를린은 임시 목조 가건물의 형태로 있었으며, 동독은 고속도로 톨게이트처럼 건축되어 차량과 보도 이동 인원의 통제와 검문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베를린 측의 가건물의 레플리카이고, 동독측의 검문소는 없어졌다.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장벽, 동서독 국경과 함께 독일 분단과 냉전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냉전 당시 유럽의 최전방이었던 두 독일의 유일한 공공 소통망이었으며, 이곳에서 군사적 대치나 사건이 일어날 경우 3차 대전까지도 갈 수 있던 침묵의 지뢰밭이나 다름없었다. 존 F. 케네디 로널드 레이건도 여기에 왔다 갔고, 1961년에는 소련 육군과 미군 전차를 몰고 와서 코앞에 갖다 대놓고 쏠까 말까 하던 곳도 여기다. 냉전 당시 촬영한 사진을 보면 서베를린 쪽은 건물들이 빼곡한데 동베를린 쪽은 시내인데도 망명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완전히 철거되어 썰렁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동베를린 쪽엔 높은 건물이 별로 없다.

2. 체크포인트 찰리 대치 사건

파일:external/4.bp.blogspot.com/checkpoint-charlie-1961.jpg
당시 사진. 미군과 소련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

1961년 10월, 베를린 장벽 건설후 2개월이 지난 후, 오페라를 보러 동베를린으로 가려는 미국 외교관 알란 라이트너(Allan Lightner)에게 동독 측에서 여권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자 미군이 동베를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조사를 위해 체크 포인트에 조사를 위해 외교관 알버드 헴싱(Albert Hemsing)을 보냈다. 헴싱이 외교관 차량을 타고 동베를린 국경을 지나는 시도를 할때도 동독 측에서 여권과 신원을 요구하자 미군 측에서는 군경을 파견해 헴싱의 차를 엄호하는 방식으로 통과하였다. 며칠 후 10월 27일에 헴싱은 이러한 시도를 다시 했다.

당시 서베를린 주둔 미군 사령관이었던 루시우스 D. 클레이 장군(General Lucius D. Clay)은 소련군이 나타나서 일을 벌이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M48 패튼 전차 10대를 체크 포인트 앞에 배치시키면서 대치가 시작되었다. M48 패튼의 배치 직후 소련군도 T-54A 전차 33대를 출동시켰고, 이후 서로가 서로의 전차들을 확인하자 소련군도 전차 10대만 남겼고, 50~100m 거리에서 17시간 동안 대치가 이어졌다. 당시 중동부 유럽에서 미군의 재래식 무기 역량은 소련의 역량에 비해 떨어지는 상황이었으나 '자유와 번영의 상징'이자 냉전의 최전방이었던 서베를린에서 미국이 물러선다는 것은 미국의 위신에 큰 타격이 가는 일이었고, 소련 입장에서도 당시 서기장이었던 흐루쇼프가 자신과 소련에 있어 국내정치적으로 그리고 군사전략적으로 중대한 위기에 빠졌다는 상황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순순히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막후 협상 채널은 살아 있었고, 다음 날에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소련의 첩보원 게오르기 볼샤코프를 통해 전차 철수를 합의하고[1] 미 육군과 소련 육군이 철수하면서 사태가 끝났다. 이때도 철수를 당장 하지 않고, 소련군 전차가 5m 뒤로 물러나자 미군 전차도 5m 물러나는 식으로 서로 눈치를 보듯이 찔끔찔끔 전차를 뺐다.

직접적인 군사 충돌은 없었으나, 당시 사건으로 인해 한 프레첼 장수의 수레(...)가 박살났다. 배상금: 프레첼이랑 수레값 그리고 탱크 연료값

이 사건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쿠바 미사일 위기 이전 미국과 소련 간 핵전쟁에 가장 가까웠던 순간 중 하나였다. 또한 1961년 제2차 베를린 위기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3. 각종 사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rlin_-_Checkpoint_Charlie_1963.jpg
1963년의 모습.

파일:external/www.cityscouter.com/checkpoint-charlie.jpg
▲ 위에서부터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순으로 된 표지판.

구글 지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eckpoint_Charlie_Berlin.jpg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검문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원래의 건물은 1990년 독일이 통일되자 그대로 차에 실어서 베를린 연합군 박물관(AlliiertenMuseum)으로 보내졌다. 지금 있는 건물은 레플리카로, 바로 앞에는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도 있다.

사진속의 소련군은 서독을 보고있고 반대쪽에는 철모를 쓴 미군 사진이 동독을 바라보고있다.

4. 여담

  • 베를린 지하철 U6 코흐슈트라세역 출구 코앞에 있다.
  • 초소에서 그 당시의 미 육군 복장을 하고 있는 알바들과 같이 어색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와 보신 분들의 말로는 남자는 돈을 받고 여자들은 공짜로 해 준다 한다(...). 2017년 현재 3 유로를 내면 함께 촬영해준다. 2022년 9월 기준 사진 알바는 없다. 사실 이들 사진 알바는 불법이지만 관청에서 그 동안 묵인해 줬는데, 사진 찍기를 강요하는 등 도를 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여 2019년에 대대적으로 단속해서 사라졌다.
  • 검문소 바로 옆 건물에는 '독수리 카페'(Cafe Adler)가 있는데, 검문소에 걸쳐 있어 커피를 마시면서 동베를린을 바라보기 좋은 장소였다고 한다.

5. 미디어



[1] Kempe, Frederick (2011). Berlin 1961. Penguin Group (USA). pp. 478–479. ISBN 0-399-157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