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2:18:51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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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
러시아어: Орловско-Брянская операция[1]/Вяземская операция[2]
독일어: Doppelschlacht bei Wjasma und Brjansk[3]
영어: Battles of Vyazma and Bryansk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일부
바르바로사 작전 모스크바 공방전의 일부
파일:뱌지마-브란스크.png
▲ 뱌지마와 브란스크에서 포위망을 형성하는 독일 국방군
날짜
1941년 9월 30일 ~ 10월 23일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뱌지마, 브랸스크 일대
교전국 [[틀:깃발|]][[틀:깃발|]][[소련|]]
지휘관 [[틀:깃발|]][[틀:깃발|]][[게오르기 주코프|]]
[[틀:깃발|]][[틀:깃발|]][[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참모차장)
[[틀:깃발|]][[틀:깃발|]][[이반 코네프|]]
(서부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세묜 부됸니|]]
(예비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안드레이 예료멘코|
안드레이 예료멘코
]]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제16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발터 폰 브라우히치|
발터 폰 브라우히치
]]
(육군최고사령관)
[[틀:깃발|]][[틀:깃발|]][[프란츠 할더|]]
(육군참모총장)
[[틀:깃발|]][[틀:깃발|]][[페도르 폰 보크|]]
(중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알베르트 케셀링|
알베르트 케셀링
]]
(제2항공함대 사령관)
[[틀:깃발|]][[틀:깃발|]][[귄터 폰 클루게|]]
(제4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하인츠 구데리안|
하인츠 구데리안
]]
(제2기갑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
(제2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
(제8항공군단 사령관)
결과
소련의 패배
독일 국방군이 브랸스크, 뱌지마 점령
소련 육군 7개 야전군 전멸
영향
태풍 작전의 시작
전력 병력 1,250,000명
포 7,600문
전차 1,000대
항공기 936기[4]
병력 1,929,406명
포 14,000문
전차 1,000~1,700대[5]
돌격포 350대
항공기 549기[6]
피해 규모[7] 전사 252,600명
부상 94,800명
포로 673,000명
전사 13,669명[8]
실종 2,556명
부상 46,645명

1. 개요2. 1941년 가을의 중부 전선
2.1. 독일군2.2. 소련군
3. 전투 서열
3.1. 독일군3.2. 소련군
4. 브란스크 전투5. 뱌지마 전투6. 결과7. 사상자 수에 관한 논란

[clearfix]

1. 개요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은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포위전인 키예프 전투에 밀리고 모스크바 공방전이 소련의 승리이자 독일군이 실시한 작전 중 최초로 패배한[9] 임팩트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지만 소련군은 30만 명의 사상자와 70만에 가까운 포로가 나오면서 한 방에 100만 명을 손실한, 독소전쟁에서 독일군 최대의 승리였다.

2. 1941년 가을의 중부 전선

2.1. 독일군

독일군은 손실이 보충 가능한 수준을 넘은지 한참 된 상황이었다. 9월 말까지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당시 전력의 15%에 해당하는 543,000명을 손실했으나 보충은 70%인 380,000명 정도였다. 더군다나 소련 땅은 동쪽으로 갈수록 더 넓어졌다. 인력과 물자는 줄어드는데 전선은 더 넓어지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미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하고 육군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있었으며 독일군은 현장에서 손실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를 후방에서 재편하는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전방 부대들의 전력은 계속 약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군이 계속 진군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군의 피해가 훨씬 더 컸고 2년간의 실전 경험을 통해 지휘부부터 병사들까지 압도적인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투입한 60만대의 차량 중에 9월까지 30%가 넘는 분량을 손실했으며 보충분은 손실분의 10%가 되지 못했다. 보급 역시 심각한 상태로 스몰렌스크 전투 이후 잠깐의 휴식 기간동안 야전철도사령부가 온 힘을 다해 비텝스크, 스몰렌스크와 로슬라블, 고멜까지 철도를 개통하긴 했으나 10월 초까지도 필요한 보급품의 절반 정도밖에 전달하지 못했고 당장 보유하고 있는 연료가 작전 목표의 절반은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구데리안의 2기갑군은 키예프 전투가 끝난 직후에 작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전력이 편제의 50% 수준이었다. 그래서 주공은 거의 완편된 상태였던 회프너의 4기갑집단이 맡게 되었으며 함께 양익 포위를 시도할 라인하르트의 3기갑집단도 80%정도의 전력을 보유 중이었다.

항공전력의 감소도 심각한 수준으로 2항공함대는 개전 당시 1,235기를 보유중이었으나 태풍 작전 개시 당시에는 549기로 줄어있었다. 그렇지만 항공에서의 전투 능력 격차는 지상보다 훨씬 심각했기에 조종사들의 헌신적인 출격으로 이를 상쇄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동부 육군에서 중부 집단군에 보병 전력의 60%, 기갑 전력의 80%를 집중했으며 이는 전쟁을 통틀어 독일군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군이었다. 보크의 중부 집단군은 14개 기갑사단, 9개 차량화보병사단, 56개 보병사단을 보유중이었고 1,920,000명의 병력과 14,000문의 포, 1,000대의 전차와 549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다. 이 때의 독일군 보병사단은 6개 대대를 보유중이던 이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와는 달리 9개 대대를 보유해 소련군 소총사단보다 2배 이상의 인력을 보유했으며 화력은 훨씬 압도적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300대 가량의 돌격포가 독립 돌격포 대대에 배속되어 보병을 지원했다.

2.2. 소련군

이렇듯 독일군은 표면적으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음에도 엉망진창이었지만 소련군의 상태는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철도는 독일군이 광궤에서 표준궤로 바꾸느라 시간을 벌어주고는 있었으나 소련군은 인력, 야포, 전차 모두 독일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독소전쟁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련군이 양에서 독일군에게 밀리는 전역이었다. 숫자가 반대여도 독일군이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수에서도 밀리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겉으로 보이는 전력은 상당했지만 무전기와 통신장비가 부족해 지휘치계가 엉망인 상황이었다. 야전군들은 1개 소총사단만을 예비대로 보유했지만 그럼에도 소총사단들의 담당 범위는 굉장히 넓었다. 항공기는 유일하게 소련군이 앞서는 부분이었으나 압도적인 숙련도를 가진 독일 공군은 숫자와 상관없이 육군의 진격로 상공에 전력을 집중시켜 대부분의 공세 지역에서 제공권을 장악했다.

화력에 있어서도 절망적인 상황으로 포와 박격포 자체의 숫자도 많이 밀리지만 대전차포, 중곡사포, 중박격포가 크게 부족했으며 정찰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아 숫자 이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나고 있었다. 전차 전력은 인력과 화력에 비해선 싸워볼 만 했지만 대부분이 경전차로 3호 전차와 4호 전차를 상대하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나마 독일군에게도 경전차의 비율이 상당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소련군은 모스크바 방면에 3개 전선군, 84개 소총사단과 1개 전차 사단, 2개 차량화소총사단, 9개 기병사단, 1개 소총여단과 13개 전차여단 휘하 1,250,000명의 병력과 문의 포, 1,000대의 전차[10], 936기의 항공기[11]를 배치했다. 서부 전선군이 558,000명과 479대의 전차를 보유했고, 예비 전선군이 448,000명, 브란스크 전선군이 244,000명의 병력을 보유중이었다.

3. 전투 서열

3.1. 독일군[12]

  • 중부 집단군 ( 사령관 : 페도르 폰 보크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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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소련군[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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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브란스크 전투

파일:브랸스크.png

남쪽 축선에서 독일군의 주공은 2기갑군이었으며 브랸스크-오룔- 툴라-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진격할 계획이었다. 공세의 좌익에서 독일군은 브란스크 전면에 2군을 배치하고 2군 우익에는 2기갑군이 북쪽부터 47기갑군단, 24기갑군단, 48기갑군단을 배치했다. 브란스크 전선군은 북쪽 브란스크부터 남쪽 보로즈바(Vorozba)[31]까지 50군, 3군, 13군, 예르마코프 집단을 배치했다.

9월 30일, 태풍 작전이 시작되기 2일 전, 구데리안의 2기갑군은 브란스크와 오룔을 향해 공세를 개시했다.[32] 독일군은 우세한 기갑전력과 압도적인 항공전력이 있었고 24기갑군단을 앞세워 며칠 지나지 않아 예르마코프 집단의 전선을 돌파했고 47기갑군단은 2군과 합세해 적을 포위하기 위해 북쪽 브랸스크로, 24기갑군단은 북동쪽 오룔로, 48기갑군단은 동쪽의 쿠르스크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2군은 10월 2일, 태풍 작전의 시작과 함께 브란스크 전선군의 우익인 50군과 3군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격은 기세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오룔까지는 적의 방어부대가 없었으나 또다시 연료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24기갑군단의 주력은 오룔까지 가지도 못했고 선봉인 4기갑사단은 10월 3일 오룔를 점령했지만 북쪽 20km정도에서 멈춰야했다.

브란스크 근방에서의 사정은 나은 편이었다. 10월 6일, 47기갑군단은 브란스크 동쪽에서 43군단과 만났다. 포위망 안에는 3군과 13군이 갇혀버렸다. 좀 더 북쪽에서는 2군의 포위망 안에 50군이 갇혔다. 브란스크에 있던 예료멘코의 전선군 사령부는 스타브카와 통신이 끊어졌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어서 17기갑사단이 도시로 진입했지만 예료멘코는 간신히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어쨌든 독일군의 정지로 시간을 번 스타브카는 드미트리 렐류센코 소장을 파견했다. 렐류센코 휘하에는 1근위소총군단과 4전차여단, 11전차여단, 5공수군단이 있었고 미하일 카투코프 대령[33]의 4전차여단은 므첸스크(Mtsensk)에서 반격을 가해 적을 잠시나마 멈춰세웠다. 10월 7일, 2기갑군에게 첫 눈이 내렸다. 4전차여단의 분전과 연료의 부족으로 2기갑군은 일주일 넘게 므첸스크에 멈춰있었다.

10월 13일부터 포위망에 갇힌 소련군이 동쪽으로 필사의 탈출을 시작했다. 3군과 13군은 돌파구를 형성하여 어느정도 빠져나가는데 성공했지만 50군은 대부분 섬멸되고 말았다. 23일까지 포위망 내부의 소련군의 저항은 사라졌지만 상당한 숫자가 서쪽으로 빠져나갔다. 2군과 2기갑군은 포위망의 적을 섬멸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전력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련군은 3개 야전군과 1개 전차군단이 괴멸되었고 살아남은 3군, 13군, 50군의 일부 부대들은 탈출하자마자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5. 뱌지마 전투

파일:뱌지마1941.png

근데 정작 독일군의 주공은 북쪽에 있었다. 가장 북쪽에는 9군과 3기갑집단이 있었다. 북부집단군은 더 이상 진군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중부집단군은 좌익의 늘어나는 측면을 알아서 방어해야했고 이를 슈트라우스 상급대장의 9군이 담당했다. 9군의 지휘를 받으며 북쪽에서 모스크바를 향할 것은 라인하르트 기갑대장의 3기갑집단이었다. 3기갑집단은 르제프-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진군할 예정이었다. 3기갑집단 우익에는 클루게의 4군이 있었고 4군 우익에는 4기갑집단, 그 우익에는 2군이 있었다. 회프너의 4기갑집단은 북부집단군에서 레닌그라드 점령을 포기하면서까지 차출해 온 전력으로 당시 4개 기갑집단 중에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의 완편된 상태였다. 4기갑집단은 태풍 작전에서 독일군의 주공이었으며 서쪽에서부터 뱌지마-모자이스크-모스크바 도로를 따라 진군할 계획이었다. 4기갑집단이 주공인 것은 후방 보급소가 전선에서 불과 30km 떨어져 있는 로슬라블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소련군 역시 뱌지마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다. 코네프의 서부전선군은 오스타시코브(Ostashkov)[34] 근처 북쪽부터 22군, 29군, 30군, 19군, 16군, 20군을 배치했으며 이 중 뱌지마 전면의 19군과 로코솝스키의 16군에게 전력을 집중하고 타 야전군에 비해 굉장히 짧은 구역을 배정했다. 20군과 남쪽 브란스크 전선군의 3군 사이에는 부됸늬의 예비전선군이 24군과 43군을 배치했다. 서부전선군과 예비전선군 후방에는 예비전선군이 보유한 4개의 야전군이 2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북쪽부터 31군, 49군, 32군, 33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10월 2일,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됐다. 서부전선군의 우익에 공세를 시작한 3기갑집단은 19군과 30군 사이를 노렸다. 이 근방의 소련군은 지나치게 넓은 구역을 보병만으로 방어중이었다. 56기갑군단은 6,7 기갑사단을 앞세워 전선을 쉽게 돌파했다. 소련군은 명령 없이 후퇴할 수가 없어서 후방으로 진격하는 기갑 부대를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대신 코네프는 4개 전차 여단으로 구성된 볼딘 그룹을 투입했지만 6기갑사단에게 박살나면서 남쪽으로 밀려났다. 10월 7일이 되자 3기갑집단은 뱌지마 후방에서 민스크-모스크바 고속도로를 차단했고 9군은 르제프로 진군했다. 14일에 독일군은 르제프를 점령했다. 여기서도 연료 부족이 심각했으나 2기갑군에 비해 보급창이 매우 가까웠기에 하루 보급받아 하루 전진하며 간신히 진격을 이어나갔다. 17일에는 41기갑군단과 27군단이 칼리닌을 점령했다.

4기갑집단도 동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40기갑군단과 46기갑군단의 공세 전면에는 예비전선군의 43군이 있었으나 소련군은 스몰렌스크-보로네시 철도를 방어하기 위해 스파스-데멘스크(spas-Demensk)로 물러났고 회프너는 57기갑군단을 투입했다. 7일, 10기갑사단이 북쪽에서 내려온 7기갑사단과 뱌지마 동쪽에서 만나면서 뱌지마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이 포위망 안에는 1개 전차 군단 규모인 볼딘 그룹과 19, 24, 30, 32군이 갇혔고 남쪽에서 역시 포위된 16군의 일부도 이곳으로 밀려났다. 갇힌 소련군의 규모가 너무 거대한 탓에 독일군은 포위망 안을 먼저 정리하기로 했다. 동쪽으로 진군한 4군은 12일, 칼루가를 점령했다. 소련군은 13일까지 완강히 저항했고 일부는 탈출했지만 1개 전차 군단과 4개 야전군 휘하 37개 사단[35]과 9개 전차여단이 괴멸됐다

6. 결과

서부전선군 대부분과 1선에 있던 예비전선군은 괴멸됐고 브란스크 전선군도 전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소련군은 38만명의 사상자와 66만명의 포로가 발생했으며 독일군은 전력의 10% 정도인 14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코네프는 해임되어 직전 서부전선군 사령관이었던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처럼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주코프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소련 정부는 극도의 공황에 빠졌으며 15일부터 스탈린은 정부 부처를 쿠이비셰프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린다.

예비전선군은 해체되어 서부전선군에 흡수됐고 게오르기 주코프가 사령관을 맡아 모자이스크에 2차 방어선을 구축했다. 10월 19일, 스타브카는 서부 전선군 우익의 22군, 29군, 30군, 31군을 차출해 칼리닌 전선군을 편성하고 코네프를 다시 사령관에 임명했다. 서부전선군에는 16군, 5군, 33군, 43군 49군이 북쪽 르제프-모스크바 철도부터 칼루가 전면까지 배치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모자이스크는 5군이 담당했다.

독일군은 전면의 소련군을 또다시 붕괴시켰지만 소련군의 동원 능력은 점점 빛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북쪽의 3기갑집단과 9군을 칼리닌 방면으로 진격시키고 남쪽의 2기갑군을 보로네시 방면으로 진격시키면서 독일군의 주공은 사방으로 분산되었다. 히틀러는 이미 전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하여 모스크바는 당연히 차지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공세 전면을 늘린 것이다. 이때까지는 할더조차도 낙관적이어서 크게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선의 야전사령관들의 생각은 달랐다. 보크는 공세가 분산되는 것에 대해 불만을 나타냈으며 구데리안은 보로네시까지 진군할 것이라면 24기갑군단을 남부집단군의 6군에 배속시켜[36] 진군시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여 2기갑군을 다시 툴라 방면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독일군의 야전 사령관들은 역사상 최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부터 전쟁의 승리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적을 포위섬멸하는 전술적 대승을 통해 전략적 승리를 거둔다는 계획은 아무리 섬멸해도 다시 등장하는 적 때문에 성공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전략적 목표가 필요한데 그것은 적의 수도 모스크바였고 이제 중부집단군은 적의 섬멸보단 모스크바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직도 낙관적인 육군최고사령부와 히틀러의 의중과는 다른 것이었다. 문제는 보급이 그때까지 버텨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보급이 버텨준다면 모스크바를 점령할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 그것이 소련의 항복으로 이어질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독일군 사령부의 그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한 확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7. 사상자 수에 관한 논란

포위된 군대의 규모가 워낙에 크고 급조된 부대가 많은데다가 대부분의 부대가 괴멸되었기 때문에 소련군의 피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일측 기록으로는 9월 28일부터 10월 19일까지 670,093명의 포로가 발생했고 전차 1,277대, 야포 4,378문, 대전차포 587문, 대공포 422문, 항공기 87기를 파괴 혹은 노획했다. 이 중 4군[37]과 9군[38] 지역에서 515,294명, 2군과 2기갑군 및 기타 지역에서 157,804명이 잡혔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전과 추정이 소련군보다 훨씬 투명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에 독일군의 기록이 신뢰가 더 가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부대가 괴멸되는 상황에서는 패배하는 쪽보단 공격한 쪽의 전과추정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라진 부대가 피해를 보고하는 것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군사학자인 크리보셰프는 9월 30일부터 12월 5일까지 소련군의 피해가 514,338명의 전사/포로/실종을 포함한 658,279명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손실된 전차 및 자주포가 2,785대, 야포가 3,832문, 항공기 293기이다. 손실은 서부 전선군에서 310,240명, 예비 전선군에서 188,761명, 브랸스크 전선군에서 109,915명이었다. 이는 모스크바 방어기의 모든 피해를 합친 것이므로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에서는 피해가 이보다 더 적어야 한다. 그러나 크리보셰프의 추측은 다소 적게 추정된 것이라는 논란이 있으며 이는 전쟁기간 전체에 대한 소련군의 전사 및 실종 수치와 쿠르스크에서의 피해 추정 역시 낮게 추정한 것으로 인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러시아의 또다른 저명한 군사학자인 로푸코프스키는 9월 28일부터 10월 18일까지 서부 전선군과 예비 전선군의 손실이 780,000명에 달하며 이 중 포로가 527,000명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브랸스크 전선군이 추가로 147,000명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본다. 이는 독일의 기록과 비슷한 수치이다. 네조로브는 10월 한달간 959,200명의 손실이 발생했으며 이 중 부상자가 104,100명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 학자들이 주장하는 또 다른 수치로는 이 기간 소련군의 손실이 770,000명~925,000명이며 이 중 전사자가 200,000~275,000명, 실종 및 포로가 450,000~500,000명, 부상자가 120,000~150,000명이다.


[1] 오룔-브랸스크 작전 [2] 뱌지마 작전 [3] 뱌지마-브랸스크 이중전투 [4] 작전 가능한 것은 545기로 폭격기 578기 중 301기, 전투기 285기 중 201기, 공격기 36기 중 13기, 정찰기 37기 중 30기가 운용 가능했다. [5] 1,700대는 소련측 주장으로 과장된 전력이며 실제로는 1,000대 근처였을 것으로 보인다. [6] 전투기 158기, 중형/급강하 폭격기 172기 [7] 여기 적힌 규모는 독일측 기록이며 소련 측 기록은 하단 문서에서 다루고 있음 [8] 독일군 피해는 10월 한 달간 중부 집단군의 손실 보고이다. [9] 전투 중 최초는 아니다. [10] 이 중 20%정도가 T-34와 KV-1 전차였다. [11] 작전 가능 기수는 545기 [12] 이 때는 기갑군단의 명칭이 차량화보병군단이었다. [13] 작전 중 9군에 배속 [14] 10월 5일부터 게오르크 한스 라인하르트 기갑대장 [15] 10월 5일까지, 11월 1일부터는 발터 모델 기갑대장 [16] 작전 중 4군에 배속 [17] 정식명칭은 상급집단지도자로 국방군 병과대장과 동급 [18] 10월 5일에 2기갑집단에서 2기갑군으로 승격했다. [19] 10월 26일, 기갑대장으로 진급 [20] 소련군의 소총군단은 스몰렌스크 전투와 키예프 전투를 거치며 해체되었고 야전군이 소총사단들을 직접 지휘하다가 천왕성 작전 시기에 다시 부활한다. [21] 10월 12일부터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 [22] 10월 12일 해체 [23] 10월 8일부터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 [24] 1선 제대 [25] 1선 제대 [26] 2선 제대 [27] 2선 제대 [28] 2선 제대 [29] 2선 제대 [30] 10월 14일부터 게오르기 자하로프 소장 [31] 브란스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선과 쿠르스크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선이 만나는 교차점정도에 위치해 있다. [32] 2기갑군의 진격로에는 포장도로가 거의 없고 구데리안은 가을 라스푸티차가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진격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작전 회의에서 미리 허가를 받았다. [33] 1943년부터 1전차군의 사령관이 되는 장군이다. [34] 홀름과 칼리닌을 잇는 축선에서 가운데 쯤에 있다. [35] 35개 소총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1개 기병사단 [36] 중부집단군의 전선이 줄어든다. [37] 4기갑집단 포함 [38] 3기갑집단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