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연방군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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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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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 ||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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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28대 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안드레이 예료멘코 Андре́й Ерёменко | Andrey Yeryomenk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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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예료멘코 (
러시아어)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Ерёменко Andrey Ivanovich Yeryomenk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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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리 이바노비치 예료멘코 (
우크라이나어) Андрій Іванович Єрьоменко Andriy Ivanovych Yerʹomenk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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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2년 10월 14일 | ||
러시아 제국
하리코프현 마르콥카 (現 러시아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마르콥카군 마르콥카)[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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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0년 11월 19일 (향년 78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재임기간 | 초대 카르파티아 군관구 사령관 | ||
1945년 7월 ~ 1946년 10월 | |||
제19대 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
1946년 10월 ~ 1953년 11월 | |||
제28대 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
1953년 11월 ~ 1958년 4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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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이반 이바노비치 예료멘코 어머니 마리야 이바노브나 예료멘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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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남동생 세묜, 가브리엘, 표트르, 이반 자매 폴리나, 프라스코뱌, 마리야[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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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 러시아 제국 육군 | ||
1913년 ~ 1917년 | |||
노농적군 | |||
1918년 ~ 1946년 | |||
소비에트 지상군 | |||
1946년 ~ 1970년 | |||
병과 | 기병 → 보병 | ||
최종 계급 | 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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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서훈 |
소비에트 연방 영웅 레닌훈장 (5회) 노력적기훈장 (4회) 10월 혁명 훈장 수보로프 훈장 1등급 (3회) 쿠투조프 훈장 1등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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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적백내전, 독소전쟁에서 활약한 소련의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의 최상위 부대인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지휘해 유명해졌다.2. 이력
2.1. 초기이력과 전간기
1892년 지금의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지역에서 농민의 8자녀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3년 제1차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기병으로 참전, 동부전선에서 활약해 루마니아군과 싸웠다. 용맹을 떨쳐서 부사관으로 승진했다.10월 혁명이 발발하자, 볼셰비키가 만든 붉은 군대에 가담해 부됸니 기병대 (제1기병군)에서 싸웠다. 이후 레닌그라드 기병학교와 1935년 기병장교로 프룬제 군사대학을 졸업하고, 기병 여단장이 된다. 1938년 제6기병군단의 군단장이 되었다.
2.2. 제2차 세계대전
2.2.1. 폴란드 침공
1939년 소련은 나치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 침공에서 소련군은 전반적으로 대숙청의 후유증 때문에 여러 삽질을 했지만, 기병과 경전차로 구성된 예료멘코의 제6 기병 군단은 인상적인 기동능력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전쟁역사가 데이비드 글랜츠는 이런 예료멘코의 지휘를 두고 "러시아의 구데리안"이라고 평가했다.2.2.2. 바르바로사 작전
예료멘코는 폴란드 침공의 공훈으로 극동으로 전근되어 제1극동 적기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어 독일이 침공하자 소련군은 참패했다. 특히 독일군의 페도어 폰 보크가 지휘하던 중앙집단군을 상대하던 서부전선군은 민스크 방면에서 대참패를 했고, 서부전선군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은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부실지휘로 군사재판을 받고 바로 처형되었다.예료멘코는 시베리아에서 긴급 소환되어 6월 28일 서부전선군을 맡아 스몰렌스크를 수비했다. 하지만 예료멘코는 사령관에 취임한지 3일후인 7월 1일 적의 포격에 맞아 큰 부상을 당했고, 결국 4일만에 지휘봉을 내려두고 모스크바로 후송되었다. 후임 사령관이 국방장관을 맡다가 야전으로 나온 티모셴코 원수였는데, 이 스몰렌스크에서도 소련군은 참패했다. 이후 어느정도 회복된 예료멘코는 8월에 새로 편성된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8월 예료멘코는 키예프 전투를 돕기 위해 중앙집단군에서 남방으로 내려가던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2.2.3. 모스크바 전투
독일 중앙집단군은 스몰렌스크를 함락시킨 이후 일단 정지한후 두달간 재편성을 했고, 10월부터 다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을 했다. 예료멘코의 브랸스크 전선군은 독일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상당부분은 포위망에서 탈출했다. 10월 예료멘코는 후퇴중 다시 부상을 당했고, 비행기로 모스크바로 탈출했다.이후 모스크바로 전진하던 독일 중앙집단군은 주코프가 지휘한 반격에 밀리기 시작했고, 예료멘코는 제4충격군의 사령관이 되어 다시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북부 방면에서 계속 전진했기 때문에 르제프 돌출부를 형성했다. 이때 다시 독일군의 기총소사에 부상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그다지 심한 부상이 아니었던지, 작전이 끝날 때가지 병원에 가지 않고 계속 지휘를 계속했다.
2.2.4.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3년 여름, 독일군의 청색 작전이 시작되자 돈강의 스탈린그라드가 위험해졌다. 공교롭게도 당시 남동전선군(이후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으로 개칭) 사령관은 예료멘코의 서부전선군 후임인 세묜 티모셴코였는데, 스탈린은 아무래도 바로 직전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독일군에게 참패한 티모셴코가 못미더워서 8월 1일자로 예료멘코를 스탈린그라드 사령관으로 앉혔다. 예료멘코는 당시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서 다리를 절었지만, 스탈린에게 찾아가서 전선으로 내보내달라고 간청했고, 그 적극성에 감동한 스탈린이 못미덥던 티모셴코의 후임으로 예료멘코를 앉혔다고 한다.정치장교 니키타 흐루쇼프와 같이 스탈린그라드에 내려온 예료멘코는 전선군 휘하의 62군과 64군을 점검했는데 시내 수비를 맡은 62군 사령관 안톤 로파틴이 매우 패배주의적인 언동을 보이는 것을 보고 바로 64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로 교체했다. 추이코프와 62군은 예료멘코의 생각대로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 시내로 끌어들여 소모시켰고, 계속 축차투입된 독일 증원군은 지옥의 시가전에서 하나하나 박살이 났다.
11월 소련의 우라누스 작전이 실행되면서 소련군이 독일군 제6군을 역포위했다. 독일군은 만슈타인의 지휘로 제6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예료멘코는 이를 격퇴했다. 이어 제6군은 항복했고, 이 전투를 기점으로 독소전쟁의 흐름은 소련군에 유리하게 된다. 예료멘코군은 포위된 6군을 뒤에 두고 카프카즈로부터 후퇴하는 독일 클라이스트 집단군(A 집단군)을 포위하려 했으나, 간발의 차로 실패하고 만다.
2.2.5. 대전후기
예료멘코는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나자 부상이 도져 다시 모스크바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4월에 병가를 마치고 북부로 이동하였다. 이해 여름, 남부에서는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졌지만, 예료멘코는 부상이 악화되어 조금 한가한 북부의 전선군을 맡아 요양중이었기 때문에 이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때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1943년 12월 다시 남부로 이동하여 크림반도를 탈환했고, 1944년 여름 바그라티온 작전의 레즈츠코-드빈스카야 공세에 참가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소련영웅칭호를 받았다.
1944년 가을 다시 북부로 파견되어 발트 3국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때 독일 북부집단군의 30개 사단을 분쇄하여 그야말로 소멸시켰다.
1945년 3월, 다시 남부로 내려와 제4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을 맡아 우크라이나에서 출발,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를 각각 점령하고, 종전을 맞았다.
2.3. 종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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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독승전 20주년 퍼레이드 당시의 모습[3] |
3. 기타
- 소련군 역사상 전선군 지휘 이력이 가장 많은 원수이다.[4]
- 전쟁중에 고위지휘관은 일기쓰기가 금지되었음에도[5] 불구하고 매일 일기를 써서 남겼고, 이것을 바탕으로 회고록을 남겼다. 회고록에서는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장성들의 실명을 거론하여 디스하여 소련에서는 많은 화제가 되었다.
- 회고록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군사기밀이 포함되어 있던 터라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온전한 회고록은 1990년대가 되어야 출판될 수 있었다.
- 묘하게 세묜 티모셴코 원수와 악연이 있는 인물이다. 1941년 7월 스몰렌스크를 수비하다가 부상 때문에 서부전선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스몰렌스크 대패의 책임을 후임자 티모셴코에게 떠넘길 수 있었고,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잃은 티모셴코를 대신해 부임하여 독소전쟁 역전의 전기를 만들었다.
- 러시아군/소련군 지휘자들중에 인명 피해에 대해 둔감한 사람이 많지만, 예료멘코는 매우 예외적으로 부상병들에 대한 의료지원을 크게 신경썼다고 한다.
- 독소전쟁 기간 중에 세번이나 큰 부상을 당해서 항상 지팡이를 짚고 다녔고, 어떤때는 들것에 실려서 이동해야했지만, 그럼에도 전장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맹장이었다.
- 스탈린은 예료멘코를 티모셴코보다는 높이 평가한 것 같으나 로코솝스키보다는 낮게 평가하는 발언을 남겼다.
- 바실렙스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동료 원수인 예료멘코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첨하는 재주도 뛰어나다고 디스하기도 했다.
4. 진급 이력
[1]
우크라이나 행정구역으로는
루한스크주 스타로빌스크군 마르키우카.
[2]
또는 마르타.
[3]
왼쪽부터
바실리 소콜롭스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필리프 골리코프,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게오르기 주코프,
키릴 모스칼렌코, 예료멘코
[4]
서부전선군 → 브랸스크 전선군 → 남동전선군 →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 남부전선군 → 칼리닌 전선군 → 제1발트전선군 → 제2발트전선군 → 제4우크라이나전선군
[5]
적에게 넘어갈 경우 작전 계획이나 군 기밀이 직간접적으로 누설될 수 있기 때문.
분류
- 1892년 출생
- 1970년 사망
- 러시아 제국의 군인
- 소련군 원수
- 러시아 내전/군인
- 제1차 세계 대전/군인
- 독소전쟁/군인
- 소비에트 연방 영웅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영웅
- 클레멘트 고트발트 훈장
- 수흐바타르 훈장
- 크렘린 벽 묘지 안장자
-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출신 인물
- 소련 최고회의 5기 국가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6기 국가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7기 국가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8기 국가평의회 위원
- 소련 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0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1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2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3기 중앙위원회 위원
-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