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섬을 포함하는 동명의 주에 대한 내용은 사할린주 문서 참고하십시오.
일본이 이 섬 북위 50도 이남 지역을 영유하던 시기에 대한 내용은 일본령 가라후토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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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할린은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 연방의 섬이다. 유라시아 대륙과는 매우 좁은 타타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있으며, 일본 홋카이도 섬과는 라페루즈 해협을 두고 40km 북쪽에 떨어져있다. 동쪽에는 오호츠크 해를 끼고 있다. 동쪽에 위치한 쿠릴 열도와 함께 러시아의 사할린주를 이룬다.2. 지리
세계적으로도 면적이 꽤 큰 섬으로, 23번째로 큰 섬이다. #[1] 7만 2492㎢로 남한 면적의 3/4에 달하며, 러시아가 영유한 섬 중에서 면적이 가장 큰 섬이다.[2] 남쪽에 바로 이웃한 일본 홋카이도(78,719㎢)보다는 약간 작다.[3] 남북으로 길쭉한 형태로 남북 길이는 948㎞에 이른다.이 지도의 빨간 네모 중 위의 3개는 북사할린(사가렌), 아래의 3개는 남사할린(가라후토)이다. 일본이 러일 전쟁 이후부터 태평양 전쟁 패망 전까지 40년간 영유했던 지역이 바로 이 남사할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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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
사할린 섬은 산이 많은 지형으로서 섬의 2/3는 산지이며, 두 개의 산맥이 나란히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크기가 크다 보니 큰 강도 2개 있다. 그 중 팀 강은 길이 400㎞에 달하는 긴 강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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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일본 홋카이도와 러시아 사할린 사이의 해협은 라페루즈 해협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프랑스의 라페루즈 백작이 해도에 최초로 기록했기 때문이다.[8] 일본과 중국에서는 라페루즈 해협을 소야 해협이라 부른다.[9]
유라시아 대륙과 사할린 섬 사이에 타타르 해협, 혹은 폴로베츠 해협이라 부르는 좁은 물길이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사할린을 탐험해 사할린이 대륙의 일부가 아닌 섬임을 최초로 밝혀낸 마미야 린조(間宮林藏)의 이름을 따서 마미야 해협이라고 부른다.
섬 북서쪽의 포기비와 대륙 측의 라자레프와는 간격이 가장 좁아 불과 7㎞ 밖에 떨어지지 않아 연륙교 건설도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겨울에는 타타르 해협의 바다가 얼어 붙기 때문에 썰매를 타고 사할린 섬과 러시아 본토를 오갈 수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아무르 강 하구에 큰 시장이 열려 사할린 사람들이 러시아 본토에 장을 보러 오기도 했으며 지금도 사할린 원주민들은 물자를 구하러 겨울에 썰매를 타고 해협을 건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과거 스탈린 정권 시절 사할린 주둔군 보급도 할 겸 해서 죄수들을 동원해서 해저터널 공사를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스탈린이 사망하고 죄수들이 사면되면서 공사를 포기했다. 그리고 2020년에 다시 2035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
타타르 해협 북쪽의 바다는 대륙과 사할린이 만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를 사할린 만이라고 한다. 다만 남쪽이 해협으로 뚫려있으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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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속 섬
남쪽 홋카이도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매끈한 해안선을 지니고 있어 부속 섬이 많은 편은 아니다. 최남단 서쪽 해안의 작은 무인도로 모네론 섬(Остров Монеро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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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오호츠크해로 인해 춥고 다습한 기후대에 속한다.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는 냉대 습윤 기후(Dfb ~ Dfc)이다. 찬 바다로 인해 같은 위도의 내륙보다는 여름이 시원하다. 겨울에는 바다 덕에 약간 덜 춥지만 그래도 위도가 높으므로 추운 편이다. 여름 평균 최고 기온이 섭씨 21도, 겨울 평균 최저 기온이 −19 ℃.
남북으로 긴 형상을 하고 있기에 지역별 기후 차이가 상당하다. 가령 1월 평균 최저 기온의 경우 남단의 코르사코프에서는 -11.9 ℃지만 북단의 오하에선 -21.9 ℃에 달한다.
습한 기후라 여름에는 안개가 많이 끼고, 겨울에는 눈이 많으며 고위도 지역 특성상 눈이 잘 녹지 않는다. 심지어 산에는 눈이 5m 씩 쌓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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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추운 기후, 드넓은 평원, 높은 산맥, 타이가에 가까운 산림 지역 등 시베리아와 많은 특성을 공유하고 있어 종도 대체로 유사하다. 특히나 시베리아와 사할린을 단절하는 타타르 해협은 겨울에 얼어붙기 때문에 육상 동물의 이동이 원활하다.
벌, 나비, 딱정벌레, 매미, 각종 민물고기, 도롱뇽, 개구리, 살모사, 뇌조, 들꿩, 박새, 까마귀, 딱따구리, 올빼미, 부엉이, 참수리, 흰꼬리수리, 검독수리, 박쥐, 들쥐, 다람쥐, 청설모, 멧토끼, 두더지, 족제비, 담비, 수달, 붉은여우, 너구리, 우수리불곰, 스라소니, 순록, 사향노루등이 서식한다. 한때 홋카이도늑대도 있었던 걸로 보이지만 멸종된 상태이다.
한편 극동 러시아와 거리가 가깝고 겨울에 얼어붙으면 해수면이 낮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호랑이나 노루 등은 서식하지 않는다.
한류가 흐르고 있어서 각종 어패류가 많은 이유로 큰바다사자나 바다표범, 각종 고래등도 나타나는 편이다.
3. 명칭
<colbgcolor=#dddddd,#222>언어별 명칭 | |
영어 | Sakhalin |
러시아어 | Сахалин |
일본어 |
[ruby(樺太, ruby=からふと)] サハリン サガレン |
중국어 |
萨哈林岛(Sàhālíndǎo) 库页岛(Kùyèdǎo) |
한국어 |
사할린 화태 |
위 명칭을 러시아에서 받아들인 것이 세계적으로 퍼져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19세기에 이를 사가렌(薩哈嗹, さがれん)으로 음차하였는데, 유래는 사할린 섬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20세기 초 러/일이 나누어 관할하던 당시에는 북위 50도 이남 일본령 가라후토와 대응하여 북위 50도 이북 러시아령 사할린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주로 쓰였다. 오늘날의 사할린은 일본에서 サハリン(사하린)으로 전사한다.
한편 일본 측에서 부르는 '카라후토'는 아이누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르(Kamuy kar put ya mosir)에서 따왔다. "신이 강의 하구에 만든 섬"이라는 의미로, 이 역시 위 만주어와 마찬가지로 사할린 섬이 마치 아무르강의 하구에 쌓여 있는 모양새인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樺太는 이를 한자로 훈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樺太라는 표기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어 '화태'라고도 했다. 17세기 말 조선의 표류기인 표주록에서는 '갈악도'(羯惡島)라는 음역 표기로 나타난다. 종종 '에조'(蝦夷, 홋카이도의 옛 이름) 북쪽에 있다고 '키타에조'(北蝦夷)라고도 불렀다.
중국에서는 库页岛는 과거에 사용하였던 단어로, 현재는 사할린의 음역인 萨哈林岛를 주로 사용한다. 역사적으로는 당나라 때는 窟說(쿠웨), 원나라 때는 骨嵬(구웨이), 명나라 때는 苦夷(쿠이), 苦兀(쿠우), 청나라 때는 庫葉/庫野/庫頁(쿠예)로 불러왔는데, 이것들은 모두 아이누어로 사람을 뜻하는 kur와 땅을 뜻하는 il, 즉 우리 사람들의 땅이라는 의미인 Kur-il의 음역어로 본다. 쿠릴 열도의 어원이다.
4. 역사
북아시아의 역사 | ||||||||
시베리아 | 극동 | 몽골 | ||||||
사하 | 하카시야 | 투바 | 캄차카 | 사할린 | 쿠릴 |
사할린사 요약. |
4.1. 전근대
본래 북부 지방에는 퉁구스계 민족인 윌타인(Ульта)과 고유한 계통의 니브흐족(Нивхи) 등이, 남부 지방에는 아이누 계통인 사할린 아이누가 거주했다.역사적으로 중국에 당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동북아시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당시 당나라의 기록에서 이들은 유귀국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한 차례 조공을 한 적은 있으나 지리적으로 중국에서 너무 멀었는지라 외교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고 또 다시 잊혔다. 운송 수단이 발달한 오늘날과는 달리 과거에는 동아시아 중심부에서 너무 먼 지역이었다.
당 멸망 이후엔 요나라와 금나라가 간섭했고 금나라의 경우엔 여진족의 중심지인 만주랑도 나름 가까웠으나 교류가 적었는지 관련 기록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13]
그러다가 13세기 이후에 몽골 제국이 수 차례 침공했으나, 그것 역시 한 번 침입한 후 형식적인 복속만 확인했을 뿐 몽골인들이 정착하진 않았다. 몽골인들이 수십년간 간접적으로 지배했지만 몽골 제국 본국이 쇠퇴하면서 모두 철수했다. 청나라가 1616년 이곳에 군대를 보낸 이후로 자국 영토로 간주해 관리를 보냈지만 실제로 근대 국가로서 지배권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且聞初泊之外。別有羯惡島爲號地。未知何國所屬。而身長八九尺。面目口鼻皆如蝦夷。毛髮不長。其色皆赤。能用戈刺。或有蝦夷與日本人。漂流其地。則盡殺能食其肉。逃出偸生者頻頻有傳。若加數日之漂。尤恐危也。而能免其禍。此亦天助。君必長壽之人也。
당신께서 처음 정박했던 곳의 외방에 별도로 갈악도(羯惡島)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 땅인지 모르지만, 그곳의 사람은 키가 8~9척(尺)이나 되고, 얼굴ㆍ눈ㆍ입ㆍ코가 모두 하이족(蝦夷族)[14]과 같고, 모발은 길지 않고 그 색깔은 다 붉으며, 창으로 찌르기를 잘 합니다. 혹간 하이족이나 일본인이 그곳으로 표류를 하면 다 죽여 그 고기를 먹는다고 가끔 살아 도망쳐 온 자들이 전해 줍니다. 만일 며칠만 더 표류했더라면, 더욱 무섭고 위험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를 면했으니 이 또한 하늘이 도운 것이어서, 그대는 꼭 장수할 분입니다.
표주록(1696) - 원문
1690년대 조선인이 쓴
홋카이도 일대 표류기인
표주록에서는 이 시기 사할린의 모습이 일본인[15]의 입으로 단편적으로 묘사된다. 종족은 홋카이도와 마찬가지로
아이누이지만 홋카이도 아이누와 딱히 동질감을 느끼지는 않았던 듯하며,
식인의 문화가 있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아울러 위에서 청나라의 관리가 내려왔다고 했지만 확실히 형식적이었는지 "누구 땅인지 잘 모르겠다" 식으로 언급하여 통치 사실이 주변에 잘 알려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16]당신께서 처음 정박했던 곳의 외방에 별도로 갈악도(羯惡島)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 땅인지 모르지만, 그곳의 사람은 키가 8~9척(尺)이나 되고, 얼굴ㆍ눈ㆍ입ㆍ코가 모두 하이족(蝦夷族)[14]과 같고, 모발은 길지 않고 그 색깔은 다 붉으며, 창으로 찌르기를 잘 합니다. 혹간 하이족이나 일본인이 그곳으로 표류를 하면 다 죽여 그 고기를 먹는다고 가끔 살아 도망쳐 온 자들이 전해 줍니다. 만일 며칠만 더 표류했더라면, 더욱 무섭고 위험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를 면했으니 이 또한 하늘이 도운 것이어서, 그대는 꼭 장수할 분입니다.
표주록(1696) - 원문
4.2. 러시아/ 일본의 정착 및 공동 관할(1855~1875)
17세기~ 18세기에는 청나라의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일본과 러시아가 각각 남부와 북부를 중심으로 식민 개척을 시작하였고 이러한 역사가 훗날 러일 양국이 사할린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일본의 경우 에도 시대 초기인 1679년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에 마츠마에 번이 어장을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며 러시아는 그보다 조금 늦은 18세기 초반에 시베리아에서 외만주, 연해주로부터 내려와 사할린 서북부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보했다.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양국의 사할린 점유 양상은 어디까지나 섬의 해안가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간 일부 거점을 설치하는 수준에 그쳤고 중국 역시 형식적인 조공 선에서 만족했을 뿐 이 섬에 유의미한 지배력을 보이지 않았기에 이 시기부터 사할린이 러시아나 일본,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하기에는 빈약하다.[17] 단, 윌타나 니브흐, 사할린 아이누가 국가적 실체를 구성하지 못했으며 이들은 경제적으로 각각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1806년 러시아의 통상 요구를 에도 막부가 거부하자 러시아 해군은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 등지에 위치한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여 파괴한 후 사할린을 러시아령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7년 에도 막부가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일본령으로 선포했으며 그러한 선언의 일환으로 1809년에 일본의 탐험가인 마미야 린조가 막부의 지원 하에 지금의 타타르 해협까지 탐사했고 사할린이 섬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18] 결국 러시아와 일본 간 사할린과 쿠릴을 둘러 싼 신경전 끝에 1855년 러일화친조약(일본명 시모다 조약)이 체결되었고 조약에 따라 사할린은 양국의 공동 관할구역이 되었다.
4.3. 러시아 단독 관할(1875~1905)
러일화친조약 체결 이후에도 사할린에 대한 양국의 경쟁은 지속되었으며 공동 관할지라는 어정쩡한 지위로 인해 양국 거류민간 마찰도 잦았다. 게다가 1868년에야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으로서는 강대국 러시아와의 영향력 경쟁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비교적 가치가 떨어지는 사할린 섬을 두고 러시아와 직접적인 마찰을 빚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본토의 일부인 홋카이도 개척마저 아직 완전히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식민지인 사할린까지 동시에 개척하는 것은 신생 메이지 정부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일본 내에서는 사할린을 본래의 영향권에 따라 50도선, 혹은 4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분할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으나 일본과의 파워 게임에 자신이 있던 러시아는 북쿠릴 열도를 일부 내주더라도 사할린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응수했다. 러시아보다 먼저 사할린에 진출했고 사할린이 섬임을 먼저 밝혀낸 일본도 어떻게든 사수하고자 했지만 결국 여러모로 골칫거리인 사할린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그렇게 1875년에 체결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일본명 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으로 인해 쿠릴 열도 전도를 일본이 영유하는 대신 사할린의 전역이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19] 이후 일본인들과 일본의 영향력 하에 예속되어 있던 사할린 아이누들은 대거 홋카이도 등 일본 본토로 이주하였고 사할린 섬 전역에 러시아 식민자들이 대거 입식했다. 당시 사할린은 유럽 러시아와 거리가 멀어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열악했고 이러한 상황은 저명한 문호인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에도 묘사되었다.
4.4. 러일 분할 통치(1905~1945) - 일본령 가라후토
자세한 내용은 일본령 가라후토 문서 참고하십시오.1905년 러일전쟁 말미에 일본군은 사할린 섬을 단숨에 점령했고 전후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의해 본래 일본의 영향권이던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남부는 일본령으로 재편입되었으며 일본은 이 지역에 가라후토 민정서(樺太民政署)를 설치하였다. 이후 1907년에는 가라후토 민정서를 가라후토청(樺太廳)으로 개편하였으며, 그 이후에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이 사할린 섬의 남쪽을 40년간 지배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령 가라후토 문서 참고.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 측에서는 50도 이북 사할린을 '사가렌'(サガレン)이라고 구별하여 불렀다.
한편 1905년 이후에도 북사할린은 러시아의 영토로 남았으나,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한 뒤 러시아 내전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간섭한 일본군이 1925년까지 사할린 전역을 지배했다. 러시아 혁명의 결과로 갓 출범한 신생 소련 정권은 유럽 러시아를 간수하기 바빠 사할린 개발에 소극적이었으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할린 섬의 석유 개발권을 일본에 양도했다. 또 레닌은 사할린 영유를 로마노프 왕조의 제국주의에 의한 불법 점유라고 주장했고,[20] 일본에 사할린 섬 전체를 반환하려고 했지만 결국 1925년 일본이 소련을 승인하고 북사할린에서 스스로 철수하면서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4.5. 러시아 단독 관할(1945~현재)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일본이 가라후토를 내지로 편입하는 행정조치를 취했으나 오래 못가 1945년에 패망하였고 이 과정에서 만주 작전으로 소련군이 기습적으로 가라후토를 함락하여 섬 전체가 다시 소련-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전쟁 이전 북사할린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하바롭스크 지방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소련이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통째로 흡수하였다.[21]7월 이후 북사할린, 남사할린, 쿠릴 열도까지 포함해서 1947년 사할린 주로 독립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일본은 1949년 가라후토청을 폐지한데 이어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사할린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였고 현재까지 러시아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5. 경제
사할린은 석유, 천연가스, 부유식 해양 천연가스, 석탄의 채굴 및 임업, 어업이 주요 산업이다. 소련 붕괴 이후 석유 붐이 일어서 석유와 가스의 비중이 높은데 2006년 기준 석유와 가스가 공업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석유와 가스 덕택에 실업률이 2%에 불과할 정도로 경제는 활황이다. 다만, 산악 지형과 고위도 지역이라는 특성상 농업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지만 200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활성화에 들어가고 있다.6. 교통
예나 지금이나 사할린 섬의 수도나 마찬가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유즈노사할린스크 역이 철도 교통의 중심이다. 위 지도에서 특별히 이름이 빨간색인 역.
사할린 섬의 철도 남쪽은 일제강점기에 깔아놓은 철도를 바탕으로 약간씩 연장한 것이다. 북쪽 부분은 제정 러시아 말기/소련 시대 지은 산업철도이다.
특이한 것은 본토의 러시아 철도가 광궤인 것과 달리 이 곳에는 일본 철도와 같은 케이프 협궤 철도가 깔려 있었다. 한동안 과거 일본이 깔았던 철도를 계속 사용했기 때문이다. 북쪽 부분도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러시아 본토의 광궤가 아닌 700㎜/762㎜ 협궤 경편철도로 부설된 것을 1945년 이후 단일 철도국으로 통합되면서 운영편의를 위해 남사할린와 같은 1067㎜ 케이프 협궤로 개궤했다. 한때 D51형 증기 기관차도 굴러 다녔고 차량 한계도 일본 기준으로 맞춰져 있어서 소련 시기에 자국산 차량을 사할린에 맞게 변경하는 대신 아예 일본산 디젤 동차를 굴리기도 했다. 오랜 개궤 공사 끝에 2019년부터 러시아 본토와 동일한 1520㎜ 광궤 차량이 운행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일본이 치하쿠 연락선을 통해 홋카이도의 소야 본선 철도와 연계하여 운행하였으나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사할린을 병합하고 냉전기 내내 일본과 소련은 잠재적 적국이었던 관계로 두 섬을 잇는 항선은 끊어졌다. 냉전이 끝난 현대에는 양국의 관계가 개선되어 정기여객선이 다시 취항했으나 철도와 해저터널의 연결은 재정적 문제와 정치적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외 일반교통은 주로 자가용과 시외버스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장거리 여객은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 항공편을 주로 이용한다. 한국 인천국제공항과의 직항편은 아시아나항공과 오로라항공 등이 운항하고 있으나, 아시아나항공은 노선 구조개선의 일환으로 2019년 9월부터 운휴에 들어갈 예정이다. 사할린 노선은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아시아나항공의 국제선 노선 중 가장 낮은 탑승률(56.8%)를 기록했다.
장기적으로는 사할린과 타 지역을 잇는 철도 해저터널 / 해상교량이 계획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사할린과 러시아 본토를 잇는 사할린 터널과, 사할린과 일본 홋카이도를 잇는 사할린-홋카이도 해저터널이 있다. 개통이 성사되면 섬 밖으로 나가는 단거리 여객수요를 끌어들임과 동시에, 물류 수송에도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7. 인구
소련 말기인 1991년에는 71만 명에 달하였으나, 소련 붕괴 후 인구가 빠르게 줄어들어 2016년에는 48만 명으로 크게 감소하였다.[22] 그나마 2016년 이후에는 인구감소세가 반전되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중심 도시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섬 전체 인구의 40% 가량인 20만 명이 모여 살고 있다.2002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계 주민이 전체 인구의 83%를 차지해서 1위이며, 2위는 바로 한국계 러시아인이다. 약 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5% 남짓이다. 일본인은 2차대전 직후 거의 모두 강제추방되었고 일부 극소수의 일본계 및 러시아-일본계 혼혈인들 정도나 남아있다.
남쪽에 접한 홋카이도와 크기는 비슷하지만 높은 산지의 비율, 러시아 중심지로부터 매우 먼 위치, 좀 더 한랭한 기후 등의 요인으로 인구는 훨씬 적다. 홋카이도 인구는 500만 명 가량으로 사할린의 10배에 이른다. 그런 홋카이도도 일본 전체로 보면 매우 인구가 적은 곳으로 손꼽힐 정도이니 그보다 인구가 10배 적은 사할린은 전세계 기준으로도 인구 밀도가 낮은 곳에 속한다. 사할린의 인구밀도는 5.4명/km2로, 시베리아 전체의 인구밀도(2.8명/km2)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이다.
7.1. 원주민
사할린의 원주민이었던 니브흐, 윌타, 사할린 아이누는 인구 비중에서 극소수를 차지한다.[23]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인데 이러한 현상은 비단 사할린이나 쿠릴 등지 뿐만 아니라 발트 지역, 카렐리야,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소련 치하에 흔하게 일어나던 일이다. 일본 역시 홋카이도와 혼슈 북부의 아이누인들을 몰아내고 강제적인 동화를 시행했다. 더욱이 사할린 아이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인과 함께 추방되면서( 히키아게샤) 더욱 비율이 낮아졌다. 그나마 일부 잔류한 인원들도 러시아인들과의 통혼으로 동화되어 사실상 사멸했다.사할린섬에서는 아이누어의 사할린 방언, 니브흐어, 윌타어, 오로치어 등의 언어도 쓰였지만, 소수 민족들의 수가 줄어들고 사할린 섬의 아이누족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대부분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거의 소멸되었다.
7.2. 사할린 한인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사할린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은 한민족이다.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자 일본은 한국계들을 방치한 채 일본인들과 아이누인들만 데리고 본국으로 철수했기 때문이다.사할린 섬에 한국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일찍이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였다. 이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한 러시아와 일본은 척박한 사할린섬의 석탄, 광산 개발, 석유개발, 어업, 임업 등을 위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고, 심지어 유배온 죄수들도 노동에 동원할 정도였다. 당시 조선은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면서 새로운 산업을 창출해내기 어려운 위태한 상황이었으므로 이 시기에 많은 농민과 육체 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외국으로 떠났고 사할린도 그 중 하나였다. 다만 오늘날의 사할린 한인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 이주 및 징용당한 이들(과 그 후손)이다.
강제징용자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사할린 한인은 구한말부터 자발적으로 만주 및 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고려인과는 차이가 있다. 연해주 지역 고려인은 주로 평안도, 함경도 등 이북 지역에서, 사할린 한인은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남한 지역에서 이주한 지라 서로 간 정체성 차이가 존재한다. 사할린에도 자발적 이주자들이 일부 있었고 이들은 따로 사할린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한반도 남부 출신 강제징용 피해자와 그 후손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 아닌 한인이라고 여긴다.
이후 한국계 귀국 문제로 일본에 소송을 제기한 적도 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1989년부터 실무자 접촉 등 가시적 진척이 있었고, 그 후 2000년에 407세대(814명)가 귀국하는 등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아직도 영구 귀국을 희망하는, 미처 귀국하지 못한 사할린 한국계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가 있어서인지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총영사관의 출장소가 생겨 관련 업무를 담당한다.
8. 식문화
사할린의 식문화는 중앙아시아 및 러시아의 고유한 식문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동아시아의 식재료가 들어간 음식이 현지화된 것이 특징이다. 과거 이 지역을 통치한 일본 제국의 영향도 있고, 상술한 사할린 한인들의 영향도 있다. #오징어, 조개, 나물, 도축 후 남은 부산물들, 다시마와 미역 등 해초류들,[24] 고사리[25]가 들어간 음식이 사할린 요리에는 많으며 현지 한식들도 순대에 비계를 많이 넣는다거나, 김치돼지볶음에 두꺼운 비계를 그대로 넣는다든가, 된장과 고추를 섞은 장으로 연어조림을 만드는 등 상당한 로컬라이징이 일어났다.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성게, 조개, 다시마나 산나물 채집도 하러 돌아다니고, 채집한 걸 사할린 한인들에게 되파는데 가장 인기가 많은 식재는 고사리이다. 옛날에는 그냥 내버리던 갑오징어도 지금은 비싸게 팔린다.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도 옛날에는 금방 쉽게 얻는 해산물도 요새는 러시아인들이 자신들도 먹으려고 해서 값이 비싸졌다고 푸념하는 할머니의 증언이 있다. 막걸리는 재료를 못 구해서 사라져버렸지만 육개장, 닭도리탕도 먹고 1990년대 이후에는 두부와 배추김치까지 먹는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의 본토인들은 사할린 사람들의 식문화를 신기하게 여긴다.
9. 영토 분쟁
일본에서 발간되는 지도에서는 북위 50도 이하의 남사할린 지역이 어느 나라의 영토로도 표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귀속 문제를 보류했고, 소련이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쿠릴 열도 분쟁이 발생하여 영토 관련 협의가 모두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일본 정부의 입장은 "일본이 남사할린을 포기한 것은 맞지만, 러시아(당시 소련)가 인계한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다만 국제법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러시아는 사할린 지역에 대해서 실효 지배를 수행하고 있다.[26]물론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을 했기 때문에 남사할린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진 않는다. 같은 조약에서 마찬가지로 포기하기로 명시한 쿠릴 열도에 대해서 분쟁을 이어나가는 것은 쿠릴 열도가 여러 섬으로 되어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인데, 사할린은 한 덩어리의 섬이므로 왈가왈부할 여지가 없다. 한때 가라후토청의 소재지였던 유즈노사할린스크(舊 도요하라)에는 일본 총영사관마저 두었으므로 러시아의 영유권을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다.[27] 만약 일본이 남사할린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결코 총영사관을 설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 입장과는 별개로, 일부 일본의 극우 단체들은 북방영토에 쿠릴 열도와 남사할린도 포함하여 러시아로부터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주류 정치권에서는 무시당한다. 역사적으로도 남사할린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넘긴 이후 러일전쟁으로 빼앗았다 2차 대전으로 도로 빼앗긴 땅이며 사할린의 포기를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명문화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도 반환 명분이 전혀 없다. 쿠릴 열도 분쟁에서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는 미국과 유럽연합도 사할린은 러시아령으로 인정한다.
10. 여담
- 남사할린이 일본 영토인 가라후토로 불렸던 20세기 초반 이곳에서 하드로사우루스류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학자들은 '일본의 도마뱀'이란 뜻의 니폰노사우루스라는 학명을 명명했다.
- 1983년 9월 1일 사할린 본섬 남서쪽의 부속 섬인 모네론 섬 근방에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사건으로, 269명의 승무원 및 승객 전원 사망했다.
- 소련 붕괴 직후인 1995년 사할린 섬 북부에 있는 네프테고로스크시에서 규모 7.6, 진도 IX의 강진으로 전체 인구 3,500명 중 약 2천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는데 이 지진으로 네프테고르스크는 유령도시가 되었다. 이때 한국도 의약품을 포함한 30만 달러 규모의 구호물자를 피해 지역에 지원했는데 지원한 식료품 중 하나가 초코파이였다.
- 한반도의 부족국가들과 간접적인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는데, 특히 신라의 탈해 이사금의 출신지가 이곳이었다는 설이 있다. 출신지에 대해서는 인도 남부 출신이라는 설과 캄차카 반도 출신이라는 설, 말갈족 출신이라는 설, 강원도 지역에 존재한 한국계 부족 출신이라는 설 등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이 중 주류 학계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는 설은 한반도 북부 출신설과 캄차카 반도 출신설, 그리고 사할린 출신설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11. 스포츠
아이스하키, 축구, 여자 배구 선수단으로 구성된 PSK 사할린이라는 팀이 있다. 아이스하키팀은 2014-15 시즌부터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에 참가하여 항상 상위권을 지키는 강팀이다.축구 구단은 러시아 프로페셔널 풋볼 리그에 소속되었다. 2014-15 시즌에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2부리그까지 승격했는데 당시 같이 2부리그에 소속되어 있었던 FC 발티카의 연고지인 칼리닌그라드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7500㎞에 달하여 그야말로 세계 최장거리의 원정경기를 치렀다. 이 팀이 1부리그로 올라가서 모스크바에서 오려면 12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러나 1시즌 만에 다시 3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배구 구단은 오랫동안 우승과 인연이 없다가 2017년에 시베리아-극동 여자배구 컵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다. 러시아 선수권에서는 중하위권 정도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12. 대중매체에서
의사이자 극작가로 유명한 안톤 체호프가 1890년도에 이곳의 유형지를 답사하면서 만든 보고서인 '사할린 섬'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사할린의 지질학, 지리학적 정보 뿐만 아니라 당대 시베리아 지역 유형지의 모습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비록 형식은 실무 보고서이지만 글 좀 쓰는 사람이 써서 그런지 딱딱한 느낌이 아니라 기행문처럼 술술 읽히므로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봐도 좋다. 한국어 번역서도 출간되었다. 체호프의 사할린 기행은 그의 문학관에도 큰 변화를 주었는데 기존작들은 레프 톨스토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사할린을 여행하면서 그의 영향에서 탈피하고자 했다.일본의 가공전기에서는 여전히 일본 제국의 영토이거나 일본 국방군이 북방영토, 쿠릴 열도를 비롯한 남사할린, 아예 러시아령인 북사할린까지 사할린 전체를 다 차지하기도 한다.[28] 물론 실제 역사처럼 소련-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되는 전개도 존재한다. 그게 아니라도 아예 분쟁지역으로 분류해서 물밑싸움이 격렬하게 일어나는 곳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대마인 아사기 결전 아레나에 등장했던 가상의 도시인 토미하라 같은 설정이 대표적.
[1]
이 정도 크기의 섬에는 섬 하나를 국토로 삼는
섬나라들도 보인다.
스리랑카,
아일랜드가 딱 사할린과 비슷한 면적에 섬에 위치한 섬나라이다. 크기는 약간 더 크지만 북방이라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섬이라는 점은
아이슬란드와 유사하다. 인구를 비교해보면 아이슬란드가 37만 명으로 사할린보다 더 적다.
[2]
북극해에 있는
노바야제믈랴 섬은 실제로는 섬 2개이다.
[3]
그런데 사할린이 위치한 위도 50도부터는 일반적인 지도 도법인
메르카토르 도법의 면적 확대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지도로 보면 홋카이도보다 좀 더 커보이기도 한다.
[4]
애초에 '유즈노사할린스크'라는 지명부터가 "남사할린시"를 의미한다.
[5]
남한 최북단이 북위 38도 60분, 남북한(
한반도) 최북단인
온성군이 북위 43도이다. 사실 사할린 남쪽에 있는
홋카이도만 해도 최남단이 한반도 최북단과 거의 위도가 비슷한 정도이다.
[6]
북위 43~53도
[7]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직선거리가 대략 330㎞ 정도이다.
[8]
사할린 남단의 크릴론 곶 역시 이 인물이 명명한 지명이다.
울릉도도 관측하여 '다즐레'(Dagelet)라고 명명한 바 있다.
[9]
소야 해협의 '소야'는
소야곶 문서에서도 보듯
아이누어 토착 지명으로, 본래 곶 서쪽의 암초를 가리키던 표현이라고 한다.
[10]
아무르강의 중국 측 명칭인
헤이룽장(黑龍江, 흑룡강) 역시 검다는 뜻이다.
흑수말갈의 흑수(黑水)에서도 보듯 아무르강은 실제로 어두운 빛을 띄기에 검은색을 포함한 지명으로 불려왔다. 한편 같은 색으로 이름이 지어진 지구 반대편의
흑해는 실제 색과는 큰 상관이 없고 관념적
오방색과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11]
'아무르강'의 '아무르'는 현지 언어로 "강"을 뜻한다고 한다.
만주어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긴 한데 근거가 확실치는 않은지
영어 위키백과
아무르 강 문서에서는
퉁구스계일 것이라고만 추측하고 있다.
[12]
그냥 '사할린 강 건너편에 있는 섬을 사할린이라 불렀다'뿐이기 때문에
헤이룽장성의 만주어 이름도 사할린이었다. 단, 헤이룽장의 본 이름의 의미로서는 사장되고 오히려 파생어인 사할린 섬이 훨씬 유명해진 것.
[13]
금나라는 요와
북송으로부터 빼앗은 남쪽의
중원 지방을 관리하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런 변방의 외딴 섬 지역을 개발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전대의 요나라도 마찬가지로
연운 16주 개발에 매진했다. 자료에 따라서는 이 두 나라의 영토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그만큼 기록이 부실했고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다.
[14]
아이누를 가리키는 蝦夷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이다.
[15]
마츠마에 번의
봉행으로, 표주록에는 新谷十郞兵衞(신곡 십랑병위)로 기록되었다. 일본어로는 아마 '니야 주로베'(にいや⁼じゅうろうべえ) 정도로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홋카이도 북부에는
금광 채굴을 목적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16]
이 시기에는 홋카이도 북부도 일본인의 정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본격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표주록의 묘사를 보면 현
왓카나이 일대에 표류한 저자 이지항은 주변에
한문을 아는 사람은커녕
일본인조차도 남쪽으로 좀 내려가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17]
일례로
홋카이도와 비교했을 때 두 섬 모두 19세기에 와서 중앙 정부에 의한 개발과 주민 이주가 본격화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홋카이도는 에조치라 불렸음에도 이미
15세기 중반 일본의 진출이 시작한 이래, 17~18세기경
다이묘 가문인
마츠마에 번의 주도 하에 일본인들이 홋카이도 해안가 전역에 진출했고 홋카이도 아이누를 형식적으로
번의 지배 하에 복속해 관리했기 때문에 러시아도 홋카이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식하며 관심에 두지 않았다. 즉,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개척하고
오호츠크 해로 진출한 18세기 무렵 홋카이도 핵심지역은 이미 마츠마에 번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도 이곳에 손쓸 겨를이 없었다. 반면 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일본 본토인
혼슈에서 너무 멀고 일본인의 진출과 원주민의 복속 정도가 매우 약했으며 특히 사할린은 일본인의 거주지가 오도마리(코르사코프)를 비롯한 섬 남부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남북으로 길쭉한 사할린의 지형상 러시아가 무리없이 식민 정책을 펼 수 있는 제반 환경이었다.
[18]
그래서 오늘날에도 일본에서는 타타르 해협을
마미야 해협으로 부른다.
[19]
일본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은근히
불평등 조약으로 인식하는데 이는 사할린에 비해 쿠릴 열도가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실제 사할린 내에서의 파워 게임에서 신생 근대화 국가인 일본은 대제국인 러시아와 겨룰 힘이 없었지만 형식적인 수준의 평등 조약을 맺어 국제사회에서의 체면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사할린에서 물러나는 대신 쿠릴 열도를 양도받았다. 다만 쿠릴 열도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단순 면적만으로 두 지역의 가치를 비교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
[20]
레닌만의 주장은 아니고
안톤 체호프도 기행문에서 사할린은 원래 일본의 땅이라고 기록하는 등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할린은 일본으로부터 획득한
외지로 여겨졌다. 이는 지구 반대편의
유럽 러시아인들 입장에서 사할린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섬인데다 지리적으로 일본
열도의 연장선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러시아인들이 처음 발견한 시점에 코르사코프를 비롯한 섬 남부에 이미 일본인 정착촌이 소규모나마 존재했으며 초기에는 일본이 사할린을 더욱 적극적으로 탐사하는 등 한층 더 강한 역사적 클레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반면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직접 답사를 수행한 18세기 러시아 탐험대는 느슨하게나마 마츠마에 번의 통제 하에 있던 홋카이도는 대체로 일본령으로 인식한 반면 일본인의 활동이 적었던 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러시아가 개척할 수 있는 사실상의 빈 땅으로 인식했다.
[21]
소련군은
일본의 항복 이후인 8월 26일에 사할린을, 9월 4일에 쿠릴 열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9월 2일에 일본이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는데 하보마이와 시코탄 등을 항복 조인식 시점까지 점령하지 못한 상태였다. 참고로 스탈린은
홋카이도까지 침공해
쿠시로-
루모이 선을 경계로 홋카이도를 분할하는 계획도 구상했으나 이는 남사할린과
슘슈 섬에서의 출혈 및
미국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22]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국가 전체적으로 인구가 상당 폭으로 줄었다.
# 더구나
시베리아 외곽 지역 같이 원래부터 인프라가 부족했던 곳은 소련 붕괴를 기점으로 더욱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23]
니브흐족은 하바롭스크 지역 인구를 제외하면 절반인 2천명대이고, 월타족은 2002년 기준으로 300명대였으니 현재는 더 감소했을 공산이 크다.
[24]
동아시아권을 제외한 문화권들은 해초류를 잘 소비하지 않는다.
[25]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고사리를 이용한 요리가 매우 적다.
[26]
국제법적 지위는 다소 애매하지만 통치가 이루어지는 지역들은 세계 곳곳에 꽤 있다. 조약이나 협정에서 모든 지역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대한민국 역시
38선 이북의
수복지구는 국제법적 지위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수복지구 지역이 대한민국 영토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27]
이는 한때 독일령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소속이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舊
쾨니히스베르크)와 폴란드
브로츠와프(舊 브레슬라우) 등지에 독일 총영사관을 설치한 독일의 사례와 유사하다.
[28]
반면 일제가 패망하는 전개일 경우 사할린과 쿠릴은 물론 종종
홋카이도까지 소련 혹은
공산 일본에 강점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