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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아데나워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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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07070><colcolor=#fff> | |||
본명 |
콘라트 헤르만 요제프 아데나워[1] Konrad Hermann Joseph Adenau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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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6년 1월 5일 |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쾰른 | |||
사망 | 1967년 4월 19일 (향년 91세)[2] | ||
독일연방공화국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바트호네프 뢴도르프 | |||
재임기간 | 초대 연방총리 | ||
1949년 9월 15일 ~ 1963년 10월 16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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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0707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요한 콘라트 아데나워[3] 어머니 헬레네 아데나워[4] |
|
형제자매 |
형 아우구스트[5], 요하네스[6] 여동생 릴리[7], 엘리자베스[8] |
||
배우자 |
에마 바이어 (1904년 결혼 1916년 사별) 아우구스테 친서 (1919년 결혼 1948년 사별) |
||
자녀 | 슬하 5남 3녀[9] | ||
학력 |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
법학,
정치학) 뮌헨 대학교 ( 법학, 정치학 / 석사[10]) 본 대학교 |
||
신체 | 187cm | ||
병역 | 면제 ( 만성 폐쇄성 폐질환) | ||
종교 | 가톨릭 | ||
소속 정당 |
(1906~1933) (1945~1967) |
||
의원 선수 | 5 | ||
의원 대수 | 1~5 | ||
지역구 | 본 | ||
약력 |
쾰른 시의회 의원 쾰른 부시장 쾰른 시장 프로이센 자유주 국무회의 의장 기독교민주연합 당수 제헌위원회 의장 제1-5대 연방의회의원 초대 연방총리 초대 외무부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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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연방총리 취임 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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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s ist die Schicksalsfrage Deutschlands.
Wir stehen vor der Wahl zwischen Sklaverei und Freiheit.
Wir wählen die Freiheit!
이것은 독일의 운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속과 자유 사이의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택했습니다!
1952년 12월 3일 연방하원 연설 中, 독일의 재무장 추진 방침을 밝히면서 영상
Wir stehen vor der Wahl zwischen Sklaverei und Freiheit.
Wir wählen die Freiheit!
이것은 독일의 운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속과 자유 사이의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택했습니다!
1952년 12월 3일 연방하원 연설 中, 독일의 재무장 추진 방침을 밝히면서 영상
독일의 정치인, 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연방총리.[11]
1949년부터 1963년까지 당시 서독의 초대 총리로 재임하며 현대 독일의 시작을 이끈 정치 지도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사회적 시장경제[12] 체제를 독일에 뿌리내렸다고 평가받는다. 재임기간 동안 ' 경제 기적'이라고 불리는 서독 경제 재건의 기반을 마련했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과의 관계 정상화와 소련과의 수교를 통해 서독이 국제사회에서 주요 국가의 일원으로 복귀하는 데 기여했다.
2. 생애
2.1. 초기
1876년 1월 5일에 쾰른에서 요한 콘라트 아데나워와 헬레네 샤르펜베르크 부부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은 개신교 신자로 아들에게 프로이센적인 규율을 가르쳤으나 아데나워는 독실한 가톨릭 가문이었던 외가와 어머니 헬레네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다. 게다가 그가 유년 시절일 무렵은 한창 비스마르크가 라인란트 지방을 주축으로 하는 가톨릭 세력을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 문화투쟁(Kulturkampf)'에 전념하고 있는 시기였고,[13] 이는 그가 평생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국가주의에 반감을 가지게 되는 근원이 된다. 1894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이후, 뮌헨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00년에 쾰른 법원에 변호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이 무렵 독일은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선천적으로 폐가 좋지 않았던 아데나워는 병역의무를 면제받는다.2.2. 쾰른 시장 재임기
독일 중앙당 소속으로 1906년 쾰른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아데나워는, 이후 1917년부터 나치가 집권하는 1933년까지 무려 17년에 걸쳐 쾰른 시장을 역임한다.[14] 그가 처음 쾰른 시장을 맡았던 시기는 1차 대전이 한창이었던 와중이므로, 아데나워는 후방 군수기지로서 쾰른의 기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한창 영국에 의해 해상봉쇄가 실시되면서 물자부족의 심화[15]로 인해 가중되던 시민들의 고통을 줄여주고자 각종 배급소를 설치하였다. 아데나워 본인에게도 이 시기는 비극이었던 것이 첫 부인을 전쟁 말기에 병으로 잃고 만다.전쟁이 끝난 이후 쾰른을 비롯한 라인 강 좌안에서는 영국군의 군정이 실시된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라인란트 귀속권 문제가 제기되자 아데나워는
1921년 전후 배상 문제로 당시 내각이 위기에 처하자 중앙당으로부터 총리직 제안을 받았으나 아데나워는 정당에 독립적인 내각을 조건으로 내세워 무산됐다. 한편 전후 배상금을 갚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이 파피어마르크를 무작정 찍어내어 뿌렸고[17] 이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총리였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새로운 화폐인 렌텐마르크를 발행하는데, 문제는 슈트레제만이 '다른 지역을 먼저 살리기 위해 라인란트 지방에는 렌텐 마르크를 공급하지 않겠다!' 라고 선언해 버린 것. 이같은 중앙 정부의 움직임은 안 그래도 반 프로이센 감정이 팽배한 라인란트 지역의 분리주의자[18]들을 폭발시켰고, 아데나워는 급기야 슈트레제만에게 '정부가 정 그렇게 나오면 우리도 먹고살기 위해서 프랑스 군을 라인란트에 주둔시키겠음!'이라고 선포한다.[19]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군과 '라인란트 자치 정부' 문제에 관한 협상도 진행시킨다.
이후 1926년 대연정에 참가한 중앙당은 아데나워에게 총리가 될 의향이 있냐고 다시 제안을 했다. 아데나워는 연립정권의 안정과 총리의 인사권 보장을 수락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연립상대였던 독일 인민당은 슈트레제만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해야 아데나워를 총리로 밀어주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위의 사건들을 거치며 슈트레제만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던[20] 아데나워는 쿨하게 총리직을 포기한다. 게다가 과도기의 총리는 매력적인 자리도 아니었다. 이 때 아데나워가 총리를 차지했더라면 바이마르 공화국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면서 나치의 부상을 막을 수 있었을지, 아니면 다른 당시의 우파 정치인들처럼 히틀러에게 이용당한 뒤 팽 당했을지는 상당히 궁금한 대목.
한편 아데나워는 1929년 쾰른 시장에 재선되어, 대공황 극복을 위한 공공사업으로 쾰른과 본 사이에 최초의 아우토반을 건설한다.
2.3. 나치 독일 시기
독일 전역에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사회혼란에 힘입어, 양 극단 정치세력인 나치즘과 공산당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이러한 점은 보수 가톨릭 세력이 강한 라인란트 지방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0년대 이후, 나치는 서서히 지방 의회에서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 하지만 아데나워 역시 다른 우파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신경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쏟았고, 나치즘에 대해서는 경제가 안정되면 사그러들 것이라고 간과하였다.[21] 그리고 아데나워가 나치즘의 위험성과 불관용, 배타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한 뒤였다.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아데나워와 나치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33년 의회 및 지방선거였다. 선거 과정에서 나치는 쾰른 시청에 하켄크로이츠 게양을 요구했지만 아데나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히틀러가 쾰른을 방문했을 때도 영접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 해 선거에서 "아데나워 물러가라"는 구호를 내세운 나치는 쾰른의 1당이 됐고, 아데나워는 선거 다음 날 쾰른을 탈출해 베를린에서 몸을 숨긴다.
이후 쾰른 시 의회와 프로이센 주 정부는 나치에 의해 해산되었고, 그 역시 쾰른 시장직에서 파면됐다. 나치의 집요한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치는 주택 몰수, 계좌 동결, 정치활동 금지 등을 통해 그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결국 아데나워는 신변의 안전조차 안심할 수 없자 베네딕트 수도회의 도움으로 수도원에서 약 1년간 은신생활을 한다.
히틀러의 개인 건축가이자, 나중에 군수장관까지 맡는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데나워가 깔끔하게 개발한 쾰른 시가지의 모습에 히틀러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데나워의 정치 성향상 그를 활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장검의 밤 직후 그를 쾰른 시장 재직 시절 각종 직권 남용의 혐의로 투옥시킨다. 다행히도 곧 풀려난 아데나워는 이후 2차 대전 시기까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은둔 생활을 해나간다. 하지만 1944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진 이후 나치가 더더욱 광기를 부리면서 그 역시도 다시 강제노동수용소에 투옥된다. 이때 아내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탈출하지만 나치가 딸의 신변을 위협하자 겁을 먹은 아내의 실토로 다시 수감된다. 다행히 아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종전까지 은둔한다.
1차 세계대전 시기에 이미 첫 아내를 잃는 비극을 겪었던 아데나워의 아픔은 2차 세계대전에서도 반복된다. 그와 함께 수감된 두번째 아내 아우구스테 친서(Auguste Zinsser)는 수감 중에 겪은 고문 및 남편의 은신처를 실토했다는 죄책감 등의 후유증으로 1948년 사망한다. 냉철한 편인 아데나워였지만, 두번째 아내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에게도 큰 상처였고, 이로 인해 생긴 우울증은 이후 평생 그를 괴롭힌다.[22]
2.4. 연합군 군정 시기
쾰른을 점령한 미군은, 행정직 경험이 있으면서 나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을 관직에 앉혀 행정력의 공백을 최소화하고자 했고, 아데나워는 그에 딱 맞는 적임자였다. 미군정에 의해 그는 쾰른 시장에 다시금 임명된다. 그 직후 쾰른은 미군 관할에서 영국군 관할로 넘어가게 되는데, 아데나워는 경제 정책 및 전쟁 중 쾰른 폭격 문제 등을 놓고 영국군과 사사건건 대립선을 세우곤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국 군정청 몰래 프랑스 군정청과 추후 점령구역에 세워질 새로운 국가 체제와 관련하여 의견을 주고 받은 것이 발단이 되어[23] 결국 1945년 10월에 쾰른 시장직에서 해임되고 만다.[24] 하지만 이 해임은 오히려 아데나워에게 정치적으로 이득이었던 것이 '필요하다면 점령군과도 맞설 수 있는 강단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그에게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해임 이후 시간이 남으면서 아이러니컬하지만 신당 창당에 더 전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기독교민주연합의 주요 창당 인사 중 하나가 된 그는 1949년 5월 서독 제헌위원회장의 자리까지도 오른다.[25] 이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다수의 기민련 인사들은 73세라는 평균수명을 뛰어넘은 고령[26],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 등을 고려하여 그가 킹 메이커의 위치 정도에 머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1949년 8월 초대 독일 연방하원의 선거가 끝난 직후 아데나워의 자택에서 열린 기민련 인사들의 식사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총리직에 대한 야망을 밝힌다.[27] 쿠르트 키징어를 필두로 일각에서는 독일 총리 대신 명예직인 독일 대통령을 맡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아데나워는 자신의 오랜 정치경력을 바탕으로 이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28]
당시 선거 포스터 |
Mit Adenauer,
für den Frieden, die Freiheit,
und die Einheit Deutschlands,
darum CDU
아데나워와 함께
독일의 평화, 자유,
그리고 통일을 위하여
그러므로 기민련
für den Frieden, die Freiheit,
und die Einheit Deutschlands,
darum CDU
아데나워와 함께
독일의 평화, 자유,
그리고 통일을 위하여
그러므로 기민련
선거에서 아데나워와 기독교민주연합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를 구축하고 서방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재통일[29]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의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여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고 번영을 구가하는 것이 재통일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쿠르트 슈마허와 사회민주당은 미-소 사이의 중립국을 지향하며 재통일을 이루자는 입장을 보였고 부분적인 계획경제를 주장하며 민주사회주의적 경제노선을 내세웠다. 선거 결과 원내 1당은 사민당(131석)이 차지하긴 했으나, 기민련(115석)과 그 자매정당이자 연합교섭단체인 기사련(24석)을 합치면 사민당의 의석 수를 넘겼다. 아데나워는 사민당에게 대연정 제의를 했으나 슈마허는 이를 거부하였고, 아데나워는 사민당 대신 자민당(52석), 독일당(17석)을 끌어들여 연정을 성사시키면서 집권당이 된다.
2.5. 연방총리 재임기
2.5.1. 제1차 내각 (1949 ~ 1953)
기민련-기사련, 자민당, 독일당 대연정의 총 의석 수는 208석으로 총리비준안 통과에 필요한 202석을 넘기긴 했으나 막상 본 투표에서는 연정 내부에서 반란표가 나오는 바람에 단 한 표 차로[30] 아슬아슬하게 의회에서 총리인준을 받은 후, 1949년 9월 15일 아데나워는 연정 파트너인 자유민주당 출신의 테오도어 호이스 연방대통령에 의하여 서독을 이끌어나갈 초대 총리로 임명된다.[31]총리로서 아데나워는 우선 구 나치 전범들을 죄의 경중에 따라 일부 사면했다. 그는 연방하원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연합군이 군정기간 동안 실시한 탈나치화 과정에서의 맹목성을 비판하면서, 전범들을 양분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데나워의 입장에서 무분별한 나치 경력자들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극단적 민족주의를 다시 불러일으킬 뿐으로, 고위공직자를 비롯한 주요 전범들은 물론 정치적으로 거세되고 처벌받아야 되겠지만, 특별한 목적의식없이 사회의 흐름에 따라 나치에 동조한 자들(Mitläufer)에 대해서는 독일 사회가 다시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연합군이 이 시기 단순 동조자들에게 내린 유죄 판결에 대해서도 사면조치를 고려하고 있음을 밝혔으며, 실제로 그가 이끄는 기민당은 과거 나치 동조자들이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조건 하에 이들의 입당을 허용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 당원 출신으로 후일 그의 뒤를 이어 3대 총리로 재직하게 되는 쿠르트 키징어이다.
외교적으로는, 이미 1920~30년대부터 철저한 반공주의자[32]였던 아데나워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고, 패전국의 지위였던 독일이 다시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질서에 편입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서 분단의 고착화를 감수하기로 결심한다. 서유럽 질서의 편입을 위해 1952년 서독은 파리 조약을 통해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 가입하였다. 이어서 유럽방위공동체에 가입하고 런던에서 대외채무 협정을 체결하였다.
아데나워의 이러한 조치는 기존의 보수 세력을 완전히 혁신시키고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 독일 보수 세력이 적응하는 단초를 마련한다. 게다가 나토에까지 가입했으니 이제 전쟁이 나면 서유럽 진영과 함께 전쟁을 치르어야 했던 것은 덤이다. 이는 다른 서유럽 진영, 특히 프랑스의 입장도 계산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는 유럽 자체의 주도권을 회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국력이 한 풀 꺾인 프랑스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었고 파트너가 필요했다. 하지만 전쟁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유럽보다는 미국과의 관계에 더 집중하였고, 프랑스는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이 때 아데나워가 이끄는 독일이 드디어 서유럽 진영과 공식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프랑스는 독일이 내민 손을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이 서유럽과 함께 걷게 됐음을 보여주는 신뢰의 징표로 아데나워는 연합군이 루르 공업 지대를 해체하는 것을 용인해 준다. 여기에다가 프랑스가 자를란트를 독일에서 분리 독립 추진하는 것까지도 묵인했다. 프랑스는 독일에서 자를란트를 떼어내 자치권을 부여하고 나아가 분리시켜 프랑스 경제권에 편입할 계획이었다.[33] 허나 대놓고 권리를 포기한다는 아데나워의 외교는 당연히 독일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정적 슈마허는 아데나워를 '연합군의 총리(Kanzler der Alliierten)'라고 까지 비난한다. 이런 비난에 아데나워는 "연합국은 나에게 독일이 그들의 안전보장을 만족시킬 수 있을 때에야 공업지대 해체를 멈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민당은 최악의 결과를 바라고 있는 것인가?"라고 대꾸하며 뚝심있게 자신의 결정을 밀어붙인다. 하여튼 서유럽에 대한 아데나워의 저자세 덕분인지 이후 페터스베르크 조약이 맺어져 선박건조 제한이 철회되었으며 공장 해체가 예정됐던 18개 기업도 구제됐다.
한편, 아데나워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강경한 모습을 꾸준히 내비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동프로이센을 둘러싼 전쟁 직후 스탈린에 의해 국경선이 일방적으로 설정되었음을 주장하며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을 거부한 일이다.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을 거부한 점은 단순히 외교뿐만이 아니라 국내정치적인 계산도 충분히 깔려있었다. 구 동방 영토와 주데텐란트, 트란실바니아 등 동유럽 일대 등에서 추방되어 서독으로 넘어온 1000만 명의 독일계 추방민(Vertrieben)들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영향력[34]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다만 과격한 행동은 연합국들을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추방민 연합회의 로비나 활동을 어느 정도는 제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아데나워의 행보에 과연 그가 정말로 2차대전 이후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정치적인 계산에 입각한 쇼에 불과했는지는 전문 연구자들마저도 그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1952년 스탈린은 동서독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4개국 간의 평화조약과 독일의 중립화를 제안하는 ' 스탈린노트'를 발표했다. 스탈린은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독일의 군대 보유 허용도 약속하였다. 사민당의 강력한 지지 속에서, 당시 독일 여론은 스탈린이 제시한 중립화 통일에 호의적이었지만 아데나워는 이를 거부했다. 독일의 중립화가 주독 미군을 철수시키고 나토 가입을 저지하려는 시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독일 재통일을 가져올 유럽질서의 재편은, 서방세계가 소련에 대해 외교적·정치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주장할 수 있을 만한 힘을 충분히 길렀을 때나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반대파는 가톨릭 신자인 아데나워가 개신교 신자가 다수인 옛 프로이센, 즉 동독에 무관심한 분리주의자 아니냐며 비판했다.
한편, 연합군 군정 시기부터 독일이 정말로 주체적인 지위를 국제 사회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재무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아데나워는 1950년 무렵에 재무장을 시도했다. 그런데 2차 대전의 기억이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연합국, 그 중에서도 특히 호되게 당했던 프랑스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하여 일단은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발발한 6.25 전쟁이 아데나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의 정예군들은 죄다 남한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로 파견되고, 프랑스 군 역시 베트남에서 호치민 치하의 공산군과의 전투로 인해 주력이 빠져나가자 서유럽 전역에서 소련의 침공에 대한 공포가 급부상하면서 연합국 측에서는 독일의 재무장에 대한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독일에 대해 알레르기에 가까울 정도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가 독일 자체의 군에 대해서 다시 반대하며, 유럽 방위 공동체의 일원으로 독일을 재무장할 것을 골자로 하는 플르뱅 계획(Pleven Plan)[35]을 제시한다. 독자적인 군대를 원했던 아데나워에게 이런 프랑스의 주장은 내키는 것이 아니었지만, 프랑스의 태도는 강경했고 아데나워는 이 안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아데나워 외교 정책에서 한가지 더 주목할 점은 바로 유대인들의 국가 이스라엘에게 막대한 배상액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참모와 내각은 아직 독일 내부의 경제가 피폐하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막대한 배상액은 독일 재정에 크나큰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혔지만, 아데나워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고수했다.
2.5.2. 제2차 내각 (1953 ~ 1957)
1953년 동베를린 지역에서 생필품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일으킨 이른바 동독 사태에 대한 소련군의 무자비한 진압은 아데나워에게 손쉽게 재선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1950년에는 프랑스의 강력한 반대에 의하여 접을 수 밖에 없었던 아데나워의 재무장의 꿈이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1954년쯤 되자 연합국 지도자와 일반인들에게 거부감이 이전보단 많이 희석되었고, 냉전이 세계 곳곳에서 격화되면서 미국은 유럽에서 소련을 억제할 세력을 키울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물론 프랑스의 여론은 여전히 플르뱅 계획에 대해서조차 강경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후일 아데나워보다 더 민족주의적인 정치인이 독일의 지도자 자리에 올랐을 때, 독일의 재무장이 어떤 부메랑으로 그들에게 돌아올지에 대한 확신을 도무지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참패로 프랑스 내부의 여론은 더욱 강경해진다. 자신들이 과거 식민지로 통치하던 지역에서조차 패하였다는 사실은 프랑스의 군사적인 자신감을 크게 떨어뜨리면서 독일에 대한 공포심을 재차 키웠고,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스 군의 주력이 유럽 본토로 복귀함에 따라 서독의 재무장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는 목소리가 거세진 것이다.
같은해
또한 우수한 공업 기술과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기업들, 그리고 매우 유능한 관료집단을 가진 독일은,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함께 시장경제의 확고한 신봉자였던 기업인 출신의 경제부 장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활약에 힘입어 이 무렵 독일의 경제는 전쟁 발발 이전의 수준을 회복한 데 이어,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성장한다. 소위 말하는 라인강의 기적(독일어로는 Wirtschaftwunder[37])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와 함께 1957년 로마 조약이 조인되었고 서독은 유럽경제공동체 창설에 참여하고 가입하면서 서유럽 경제질서에도 편입하게 되었다.
이시기 아데나워는 소련과도 외교적 담판을 벌이는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십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 수많은 독일군 포로들은 아직도 소련의 시베리아 및 노동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다.[38] 그리고 이들의 귀환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간 아데나워는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 니콜라이 불가닌 총리와 회담을 갖는다.[39] 2차대전의 앙금도 앙금이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만남이었던 만큼 회담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아데나워의 전쟁 포로 귀환 요구에 대하여 흐루쇼프는 그들은 침략자일 뿐만 아니라, 각종 학살 및 강간 등 범죄를 저지른 전범이라고 응대했고, 아데나워 역시 전쟁 후반기 독일 땅으로 진격한 소련군의 행태 역시 별다를 바 없었다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협상은 성공적이었고, 1953~1955년에 걸쳐 전쟁 후 살아남은 독일군 포로들은 귀환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55년 9월 13일 서독과 소련은 국교를 정상화한다.
2.5.3. 제3차 내각 (1957 ~ 1961)
Keine Experimente 실험은 안된다 |
8년의 국정 운영과 귀환 포로 출신 유권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제3차 아데나워 내각을 구성한 당시 그를 지배한 가장 큰 화두는 베를린 문제였다. '육지의 섬'이라고 불리면서 동독 영토의 한 가운데에 턱 박혀있는 서베를린으로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낀 동독 시민들, 특히나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지식인 층의 탈출 행렬이 쉬지 않고 이어졌고 이는 동독 정권에게는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역으로 보자면, 서베를린의 존재는 서방에게도 뜨거운 감자였다. 냉전시대 공산주의 세력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서방 진영이라는 그 상징성으로 인해 동구권의 무수한 위협을 감내해야 했던 것.[40][41] 그리고 이런 점들을 노려 동독 공산당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와 소련의 흐루쇼프는 베를린을 서독과 동독이 나눠가지는 것이 아닌, 하나로 통합된 자유시로 지정하자고 제안하며, 그렇지 않다면 소련은 서독에서 베를린으로의 통행권 문제를 다루는 권한들을 동독에게 넘길 것이라고 위협을 했다.
흐루쇼프의 제안은 서방을 딜레마로 몰아넣었다. 베를린을 자유시로 지정하고 그들의 군사력을 철수시킨다면 동독과 소련이 서베를린을 호시탐탐 노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하였다. 그렇다고, 이 제안을 거부하자면 앞으로 베를린으로의 통행권과 베를린의 유지에 관한 여러 요소들을 동독과 직접 교섭을 해야 했다. 이는 아데나워 외교 정책의 제1 원칙인 할슈타인 원칙[42]에도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었다.
베를린 문제에 관한 그의 완고한 태도에서 보이듯이, 이 무렵의 아데나워는 자신의 신념과 국익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점점 자신이 한 평생 구사해온 예민하고 탁월한 정치적 조율 능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베를린 문제에 관련해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그의 모습에서 미국과 영국 외교관계자들은 짜증을 느꼈다.[43]
한편 1958년, 프랑스에선 드골 장군이 알제리 위기를 이용하여 재집권하는데 성공했다. 전 자유프랑스의 지도자이며, 전후 짧은 기간 프랑스를 영도하면서 약화된 독일과 소련과의 협상을 추구했던 드골 장군은 아데나워 정권에게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다.[44] 헌데 뜻밖에도 드골의 집권 인준 투표에서 프랑스의 친독파들은 대부분 드골에게 몰표를 주었고 집권 직후 1958년 2차례의 정상회담에서 드골을 만난 아데나워는 드골에게 푹 빠지게 된다. 두 사람은 모두 늙은 보수적 지도자이며 독실한 카톨릭 신자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공통점이 많았고, 독일어에도 유창했던 드골은[45] 아데나워를 무척이나 친근하게 대하면서 아데나워가 추구하던 독불친선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허나 아데나워는 미국과 프랑스와 동시에 친해진다는 목표를 잡고 있었으나, 드골은 미국에 강경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고 이에 아데나워는 드골을 선택하게 된다. 이는 당연히 독일과 기민련 내부 친미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미국과 영국도 심히 불쾌해했다. 결국 이 분쟁은 기민련 내부의 드골주의와 대서양주의의 대립으로 비화되었다. 아데나워의 드골주의는 카톨릭과 남독일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슈트라우스와 바이에른 기사련도 여기에 합류했다. 대서양주의의 대표주자는 다름아닌 에르하르트였고 개신교와 북독일 정치인들은 이쪽을 지지했다. 이는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의 수상 선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된다.[46]
한편 이 시기 아데나워의 행보는 독일 내 정치계에서도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다. 바로 다음 선거에서 연방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 테어도어 호이스 대통령이 깔끔하게 2번의 임기만 수행하고 물러나자 후임 대통령 후보들이 모두 시원치 않은 상태에서 아데나워는 갑자기 에르하르트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당혹했고, 에르하르트는 연방의회에서 요구한다면 따를 순 있지만 개인적으론 고민을 해봐야겠다면서 유보적인 입장이었는데, 아데나워는 기민련 지도부와의 상의도 없이 이를 일방적으로 언론에 뿌리더니 급기야 1959년 4월 7일에 자기가 대통령에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아데나워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독일 정계는 당혹했지만 동시에 이를 반겼다. 당시 이미 80을 훌쩍 넘긴 아데나워의 나이 상, '총리직 그만 하시고 슬슬 물러나실 때도 된 거 같은데...'라는 게 독일 내의 주된 여론이었고, 존경받는 국가원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는데 이제 아데나워가 물러나서 대통령을 하고, 에르하르트가 수상을 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결과라고 다들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연방의회 의장 게르슈텐마이어는 아데나워의 출마를 적극 지지했으며, 아데나워의 측근들인 크로네와 그롭케도 아데나워를 부추겼다. 문제는 아데나워는 실권 없는 상징적 대통령 따위 전혀 할 생각이 없었다.
4월 8일, 아데나워는 코모 호숫가의 카덴나비아에서 휴가를 즐기면서 연방기본법을 읽으면서 강력한 대통령이 되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다. 하지만 4월 말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아데나워는 대통령이 되면 어떤 수를 써서도 외교정책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대통령 출마를 포기한다고 선언한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후임 수상이 에르하르트가 될 것이란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차마 자기가 차기 수상이 될 줄 알았던 에르하르트 면전에서 그걸 폭로하기에는 너무나도 망신살이 뻗치는지라 1959년 6월, 에르하르트가 미국 외유를 떠나자 그제서야 기습적으로 언론에 대통령 출마 포기를 선언한다. 아데나워가 무슨 생각으로 대통령에 나갔는지가 명명백백해지자 독일 정계는 충격을 받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대통령에 큰 권한을 줬다가 나치를 대두시키는 바람에 신생 독일 연방 공화국은 대통령의 힘을 대폭 약화시켜놓았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테오도어 호이스도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등 철저히 비정치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거를 뒤집으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아데나워가 그토록 집요하게 싫어하고 앞길을 막으려 했던 에르하르트는[47] 라인강의 기적을 이끈 경제부 장관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던 정치인이었다. 결국 대통령 선거 출마 시도는 독일 내에서 '이 늙은이가 진짜로 노망이 들었구나...' 정도의 반응만 얻은 채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고 아데나워의 측근들조차도 폭발해서 그를 비판했고 기민련은 개망신당했다고 발칵 뒤집혀 아데나워의 측근 크로네를 당 의장에서 쫓아내버렸다. 결국 농업부 장관 출신 하인리히 뤼브케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2.5.4. 제4차 내각 (1961 ~ 1963)
앞서 언급한 이런 실책들로 인해서 아데나워의 평판은 다소 추락했지만 여전한 위신[48]에 힘입어 4선에 성공한다. 다만, 3선 때와는 달리 단독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해서 다시 자민당과 연정을 이루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흐트러지기 시작한 아데나워의 정치감각은 쉽사리 돌아오지 못했다. 1961년, 자유시 문제가 흐지부지 장기화되고 동독 주민들의 탈출 행렬은 계속 이어지자 참지 못한 소련과 동독 당국은 결국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이는 베를린 위기라 불리는 대치로 이어졌다. 이 베를린 위기로 말미암아 베를린에서는 영국군과 미군이 서쪽에 서서, 소련군과 동독 경찰이 동쪽에 서서 중무장하고 전차까지 불러와 대치하는 살벌한 풍경이 벌어졌다.아데나워는, 그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던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의 유산이자 수도였던 베를린을 위해, 또한 그가 마찬가지로 그토록 싫어했던 동독과 소련의 사회주의자들과 마주앉아 협상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로 인한 것인지, 슈피겔 지에 따르면 당시 아데나워는 비밀리에 미국 측과 접촉하며 한 가지 충격적 제안을 내놨다고 한다. 바로 서베를린과 기존에 영국군/미군 점령지였다가 소련 점령지로 넘어간 동독 지역들을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에 따르면, 소련과 동독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상징성이 클 서베를린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대신, 과거 영국군/미군 점령 하에 있던 튀링겐 주 전체와 슈베린을 포함한 메클렌부르크의 일부 그리고 라이프치히를 포함하는 작센의 일부 지역이 서독으로 편입될 지역으로 지정됐다.[49][50] 미국 쪽에서도 이 안건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소련 측에서도 서베를린 인구의 서독 이주를 포함한 이 안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으나, 결국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가 존 F. 케네디를 불러 그 유명한 Ich bin ein Berliner 연설을 하게 하는 등 동분서주하는 동안 아데나워는 정말 손놓고 가만히 있는 것도 모자라 저런 제안까지 내놓은 것이다. 그러고는 나중에 사생아라는 빌리 브란트의 배경까지
한편, 안 그래도 삐걱거리던 당내 2인자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와의 관계마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한다. 유럽 경제공동체(EEC)[53]를 소수 회원국간 깊은 관계의 모임으로 만들고자 한 아데나워의 생각과 달리, 에르하르트는 영국 등 더 많은 회원국을 참가시키고자 했던 것. 총리 기간 재임 내내 프랑스와의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영국-미국과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 못했던 아데나워와 달리, 에르하르트는 대표적인 친미파 인사였던 것도 두 사람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 갈등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1963년 드 골이 영국의 EEC 가입을 거부하면서였다. 다수의 그의 내각 장관들은 에르하르트와 그의 친미-친영 외교노선을 지지했고, 아데나워는 결국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에르하르트에게 자리를 넘겨주면서 14년이라는 긴 시간[54]동안 자리를 지켰던 총리직에서 퇴임한다.[55] 다만 기민당 총수 자리는 1966년까지 유지했다.
2.6. 사망
총리직 사임 후 병을 얻고 투병생활을 하다 1967년 4월 19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딸에 의하면 유언은 쾰른 사투리로 "울 필요 없다!"였다고 한다(...).그의 장례식은 세계 각국 정상들이 참가한 가운데[56] 쾰른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이후 바트 혼네프 지역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3. 평가
Er ist derjenige gewesen, der auch mit seiner Persönlichkeit die frühe Bundesrepublik massiv geprägt hat, und der selbst als jemand, der aus dem Nationalsozialismus unbelastet hervorgegangen war, als ein wirklicher Elder Statesman, Vertrauen für diese neue Republik gewinnen konnte. Und die Kategorie des Vertrauens, die kann man in ihrer Bedeutung gar nicht überschätzen.
그(아데나워)는 자신의 개성을 바탕으로 초기 연방공화국의 틀을 폭넓게 다진 당사자였고, 나치즘으로부터 무관한 뒷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기에 진정한 원로 정치인으로서 신생 공화국에 대한 신뢰를 얻어낼 수 있었죠. 그리고 우리는 신뢰라는 상징이 갖는 의미를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안드레아스 뢰더, 마인츠 대학교 사학과 교수
아데나워 이전에 독일인들이 완전한 민주정치를 체험한 시기는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 이뤄진 1920년대의 10여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 이전에는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 하에서 이뤄진 사실상 국왕/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제 국가였고, 바이마르 공화국도 20년대 패전의 여파를 겨우 딛고 일어설 무렵 30년대 대공황이 터지면서 위기를 틈타
나치가 등장,
히틀러 독재 체제가 들어서고 말았다.그(아데나워)는 자신의 개성을 바탕으로 초기 연방공화국의 틀을 폭넓게 다진 당사자였고, 나치즘으로부터 무관한 뒷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기에 진정한 원로 정치인으로서 신생 공화국에 대한 신뢰를 얻어낼 수 있었죠. 그리고 우리는 신뢰라는 상징이 갖는 의미를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안드레아스 뢰더, 마인츠 대학교 사학과 교수
전통적으로 독일의 중심은 토지 귀족이자 군 장교들인 융커들이었고, 국가 체제도 귀족과 군부 중심의 병영국가, 경제도 국가자본주의가 주류였다. 그래서 당시만 해도 상당수 독일인들에게 민주주의라는 것은 잠시간 시행된 적은 있었지만, 그리 매력적이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체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데나워는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황폐화된 상태였던 독일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이후 독일은 이전의 국가들과는 다른, 건강한 시민 사회와 다양한 사회적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 다시금 서유럽과 국제 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독일식 자본주의 모델, 라인 자본주의라 불리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독일의 사회적 자본주의는 종래의 국가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시장 자본주의를 추구한 것이었으면서도 영미식 자유시장 자본주의나 프랑스식 지도주의와는 또 다른 경제시스템이었다.
다만, 기민련 내부에서는 사회적 시장경제에 입각한 경제정책 및 사회복지정책을 둘러싸고 ' 사회적' 측면을 보다 중시하는 기독교 민주주의 입장과 ' 시장경제' 측면을 보다 중시하는 질서자유주의 입장이 다소 입장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전자의 입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아데나워는 전후 복구 기간에 후자의 입장에서 나오는 불만을 억누르면서까지[57] 연금개혁과 같은 복지 확대를 실행하여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추구했다.[58] 아데나워 특유의 이 리더십을 '칸츨러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나중에 칸츨러 민주주의도 아데나워의 노망과 함께 무리한 대선 출마, 슈피겔 사건 등에서 파행을 일으켰으나 그의 임기 대부분 독일 민주주의를 다지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아데나워의 독선적이고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은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파행을 일으켰겠지만 아직 민주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전후 독일에서 민주주의 정부도 허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 많은 보수 유권자들이 연방독일 체제를 받아들이게 하는 기묘한 순효과를 발휘했다.
물론 상기되어있듯 후기 내각으로 갈수록
덕분에 오늘날 독일 각지에서 콘라드 아데나워의 이름을 딴 지명이나 물건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독일 여러 도시에서는 콘라드 아데나워 가(街)/광장이 흔히 발견되며, 아데나워의 출신지인 쾰른의 공항엔 쾰른-본 콘라트 아데나워 국제공항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현 독일 기민당 당사의 공식 명칭은 콘라트-아데나워 하우스 (Konrad-Adenauer Haus)이고 독일 총리 전용기( A340-313X VIP)의 이름도 콘라트 아데나워 호이다.
4. 사생활
개인적으로는 금전적인 추문이 잦은 편이었다. 쾰른 시장으로 재임할 당시에 투자를 잘못 했다가 대공황으로 인해 파산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는데, 이 파산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스로 시장의 봉급을 자꾸 올려 추가 수당 및 주택 보조금 등을 포함해서 그의 월급은 12만 마르크였다. 이 월급은 심지어 대통령보다도 많은 액수였기 때문에 이는 나치와 공산당에게 좋은 공격거리가 되었다.하이네 티센 보르네미자 백작이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아데나워가 하이네 티센의 어머니인 백작부인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방문하였을 때 보르네미자 가문의 미술품 컬렉션을 보던 중 어떤 한 그림에 푹 빠졌다고 한다. 그 그림은 중세 후기 플랑드르의 대화가인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의 "로자리오의 성모"였는데 아데나워가 좋아하는 눈치를 보고 백작부인이 그 그림을 선뜻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이네 티센이 몇달 후 미술상에게 좋은 작품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가서 보니 아데나워에게 선물했던 바로 그 로자리오의 성모였다. 하이네 티센은 아무 말 없이 그 그림을 다시 사들여서 예전 집에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걸어둔 후 갖은 빌미로 아데나워를 다시 집으로 초대해 미술상에게서 다시 사들인 그 그림을 다시 보여주었다. 아데나워는 한참 동안 감탄하면서 보다가 돌아갈 때쯤 되어서 하이네 티센에게 그림값으로 얼마나 주었는지 은밀히 물어보았다고 한다. 하이네 티센이 그림값을 말해주자 아데나워는 자신이 미술상에게 넘긴 금액과 맞는지 따져보는 눈치였다고. 일국의 총리가 선물받은 그림으로 장사를 했다는 점에서 추문에 해당하지만 묘하게도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선물받은 그림을 밀매했던 아데나워는 중세 성당의 벽화를 복원했다는 위조꾼들에게 굴욕을 당한 일도 있다. 뤼벡 성모 마리아 성당 벽화 위조 사건 참조.
상술했듯이, 그의 후임자인 에르하르트 총리와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서[59] 여러가지 음해성 정치 방해 공작을 벌여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2017년 2월에는 뜬금없이 만년의 약물 중독 의혹도 제기되었는데, 아들 파울이 1961~66년 동안 쓴 일기장이 공개된 뒤 학자들이 거기서 '아버지는 능력 향상을 위해 가끔 페르피틴을 복용했다'는 언급을 찾아냈다.
5. 어록
내 나이가 몇이냐고? 사실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독일인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매우 사랑했다. 그리고 교활함이 필요하다면 갖추어야 한다.
라인란트 출신의 사람을 사귀어본 이들은 그들이 그리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내가 라인란트 출신이다.
물론 나는 법을 존중한다. 그러나 법을 지나치게 존중할 필요는 없다.
국민들에게 거짓말만 늘어놓지는 않았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올바름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In der Politik geht es nicht darum, recht zu haben, sondern recht zu behalten
In der Politik geht es nicht darum, recht zu haben, sondern recht zu behalten
우리는 정당을 선택하고 정당은 개인보다 오래 지속된다.
프링스 추기경,[60]
당신들은 교회 일을 잘하고 우리는 정치를 잘하겠소. 우리가 정치하듯이 당신들이 교회 일을 잘하면 우리 모두 만족할 것입니다.
서독이 세워지기 전 헌법 기초를 닦고 있던 상황에서 교회 소유의 학교를 철폐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대해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이 비판하자 반박하면서 한 말.
서독이 세워지기 전 헌법 기초를 닦고 있던 상황에서 교회 소유의 학교를 철폐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대해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이 비판하자 반박하면서 한 말.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예외적인 상황이다.
1957년 서독 제3대 연방 총선에서 소속당 기민련(CDU)이 단독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음에도 17석짜리 소수정당 독일당(DP)과 연립정부를 수립하겠다고 선언하며 "왜 단독정부를 출범시키지 않느냐"는 비판 섞인 주위의 질문에 한 말.[61]
1957년 서독 제3대 연방 총선에서 소속당 기민련(CDU)이 단독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음에도 17석짜리 소수정당 독일당(DP)과 연립정부를 수립하겠다고 선언하며 "왜 단독정부를 출범시키지 않느냐"는 비판 섞인 주위의 질문에 한 말.[61]
6. 동시대인의 평가
전쟁의 폐허 더미에서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과 독일 민주주의를 다시 복원한 것, 그리고 독일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한 것은 총리의 이니셔티브로 가능했다. 이후로도 독일은 계속해서 그의 결단력있고 용기 있으며 이상적인 성품에 힘입고 있다.
해럴드 맥밀런, 영국 총리
해럴드 맥밀런, 영국 총리
위대한 독일인이자 유럽인으로서, 그리고 20년간 유럽 대륙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해주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굳건한 옹호자로서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로리스 노스태드, 북대서양조약기구 총사령관
로리스 노스태드, 북대서양조약기구 총사령관
7. 대중매체
Hearts of Iron IV에서 민주주의 독일의 수장으로 등장한다. 역사적 전개로는 절대 나올 일이 없고 대개 연합국에게 패배한 민주화된 독일/얄타 회담으로 나뉜 서독에서나 볼 수 있다. DLC Waiking the Tiger를 보유한 상태라면 플레이어가 직접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이 분을 집권시킬 수 있다. 이 때의 독일은 우리가 아는 대통령을 선거로 뽑고 의원내각제에 의해 총리를 뽑는 현재의 연방 공화국이 아니라 대통령을 뽑는 대신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을 위시한 근왕파의 요구로 입헌군주정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차이점이다.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지만 홀로코스트도 시행되지 않고 중앙당도 해산되지 않은 덕분에 비교적 고분고분한 태도로 바뀌어 포젠 시장이 되었고, 히틀러의 수도 재개발 계획에도 참가한다.
8. 관련 문서
[1]
국립국어원의 규정용례는 '아데나워, 콘라트'이지만, [w\]가 잘 실현되지 않는 독일어의 특성상 '아데나우어'라는 표기도 주로 쓰인다. 독일어 발음은 '[ˈkɔnʁaːt ˈʔaːdənaʊɐ\]\(콘라트 아더나우어)'에 가깝다.
[2]
91세 생일을 맞은 후 104일을 더 살았다.
[3]
1833년 출생 1906년 사망
[4]
혼전성은 샤르펜베르크(Scharfenberg). 1849년 출생 1919년 사망
[5]
1872년 출생 1952년 사망
[6]
1873년 출생 1937년 사망
[7]
1879년 출생 1950년 사망
[8]
1880년 출생 직후 사망
[9]
역대 독일 총리와 대통령 중에서 자녀가 가장 많다.
[10]
Staatsexamen.
[1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현대 독일 정부는 대통령이 상징적 존재인 국가원수, 총리가 정치적 실권을 쥔 정부수반을 담당하는
의원내각제다. 한국으로 치면
제2공화국 시절과 비슷한 방식. 다른 나라의 사례로는 이스라엘, 싱가포르 등이 있다.
[12]
19세기 후반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독일 경제체제는
시장
자본주의라기보다는
국가자본주의에 더 가까웠다.
[13]
리버럴좌파와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과 연대해서 문화투쟁을 반대할 만큼(참고: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도서출판 마티, 2020, 765-766쪽) 엄청난 내부 반발을 부른 정책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 가톨릭의 정치 스탠스에 대해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 참고.
[14]
당시 쾰른 시장의 임기는 12년이었다.
[15]
이 시기를 독일 일반인들은
순무의 겨울이라고 불렀다. 먹을게 순무뿐이었기 때문에. 커피도 없어서 나무 뿌리 태운거를 커피 대용으로 마시던 그런 시기이다.
[16]
물론 단순히 반 프로이센 감정때문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아직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기 전이었던 이 시기 독일 내부에서는 '프랑스가
라인란트를 합병하고
라인 강을 국경으로 삼는 것 아니냐'라는 우려가 팽배했기 때문에 이같은 염려에 대한 선제조치로는 꽤나 괜찮은 생각이었다.
[17]
흔히 알고 있는
라이히스마르크는 렌텐마르크로 인플레가 잡힌 뒤에 도입한 화폐로, 렌텐마르크 및 파피어 이전에는 '골트마르크'권을 쓰고 있었다.
[18]
다만 주의할 것이, 이 지역의 분리주의자라고 해서 오늘날
스코틀랜드나
카탈루냐처럼 아예 새로운 독립정부를 차리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치를 요구하는 수준
[19]
그리고 이 발언으로 아데나워는 반대파들에게 두고두고 반역자라고 씹힌다.
[20]
앙금도 앙금이고 아데나워는 슈트레제만을 '너무 프로이센스럽다'라고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21]
사실 이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관점을 무조건 어리석었다라고 비난하기는 힘든 일이다.
맥주홀 폭동 이후 나치즘이 상당한 지지자를 끌어모았었지만,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20년대의 황금기에 접어들며 경제적 안정을 찾아가자 다시금 2~3%로 지지율이 폭락했었던 사실이 가장 좋은 예이다. 문제는 좌우 가릴 거 없이 히틀러의 정치력을 과소 평가했다는 것이었지만.
[22]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총리를 지냈으며, 가톨릭 중앙당 동료였던
하인리히 브뤼닝은 실처한 직후 아데나워를 만나고는 그의 우울증에 놀라서 "이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이 없군."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23]
전후 모든 독일인들의 정치활동은 연합군에 의해 금지되었고, 임시로 임명한 시장들은 어디까지나 행정처리 역할을 맡을 뿐이었다.
[24]
아데나워는 자신이 해임된 이유가 당시
클레멘트 애틀리를 총리로 하는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보수적인 자신보다 사민당을 파트너로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아데나워의 전기를 쓴 작가는 아데나워의 뒤를 이은 쾰른 시장도 기민당 출신이라는 점을 들면서 아데나워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 바 있다.
[25]
다만 아데나워가 제헌에 크게 기여한 바는 없다.
테오도어 호이스는 "그는 단 한 줄도 기여하지 않았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26]
지금도 73세에 대통령직에 출마하면 나이가 너무 많지 않냐는 우려가 나올 지경인데 하물며 이 시기에야 73세는 거의 반쯤 송장 취급되던 연령으로 1950년대 전반기 기준으로 독일의 평균수명이 약 68세였으니 아데나위가 조만간 세상을 떠도 할말이 없을 정도의 나이였다.
[27]
아데나워는 상당히 구두쇠 기질이 강한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2차대전 패전 직후의 극도로 궁핍한 상황에서 그가 사람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제공한 사실은 당대 정계 인사 사이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아데나워가 자기의 와인을 다른 사람에게 대접한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라고 회고하기도(...)
[28]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험상 아데나워가 무려 14년을 집권할 거라고 본 사람도 전무했을 뿐더러, 아데나워 본인도 딱 2년만 총리를 맡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되면 사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서 총리직을 맡기 가장 적절한 장년 정치인들이 나치 부역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아데나워의 총리 취임에 기여했다.
[29]
독일에서 '통일'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19세기에 이루어진 통일을 지칭하며,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통일은 재통일이라고 표현한다.
[30]
이 한 표 차는, 아데나워 본인도 두고두고 회상했지만, 본인이 본인을 찍은 덕분에 가능했다.
[31]
헌법상으로 독일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다.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호된 경험으로 대통령은 말 그대로 상징적 존재로 그 힘을 약화시켰지만, 어쨌든 형식상이나마 내각을 해산하고 선거를 치르며 그 결과에 따른 총리를 임명하는 것은 대통령의 주요 권한 중 하나.
[32]
그 과정에서 매카시즘적인 공격도 망설이지 않고 정적들, 특히 사민당의 대표인 쿠르트 슈마허에게 사용했다. 당시 독일의 보수층 사이에서는 슈마허의 사상과 국가관이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물론 스탈린한테 디스당할 정도였던 슈마허 입장에선 억울할만도 하다), 이러한 공격은 보수층 결집에 매우 유용한 수단이기도 했다.
[33]
하지만 이 계획은 이후 자를란트 주민들의 반발과 장 모네, 로베르 쉬망 등 프랑스 일부 정치인들의 반대로 철회됐다.
[34]
동독과 오스트리아로 흘러들어온 추방민까지 포함하면 최소 1200만 명, 최대 1400만 명에 달하며 당시 독일 유권자 수의 16%, 서독 만으로 치면 20%에 달했다. 보통 선거가 3~5% 정도의 지지율 차이로 승패가 결정나는 것을 고려하면 말 그대로 캐스팅보트 이상의 위력.
[35]
이 계획을 구상한 당시 프랑스 총리 르네 플르뱅(René Pleven, 1901~1993)의 이름을 땄다.
[36]
라인라트 지방에 배치된 영국군을 라인 사단이라고도 한다.
[37]
경제기적이라는 의미이다.
[38]
일반 포로들은 비용문제로 인해 시간을 두고 석방해 동독으로 보낸 소련군이었으나 무장친위대 소속 혹은 동독행을 거부한 포로들은 이 때까지도 억류상태였다.
[39]
소련 측의 도청을 우려해서 자동차부터 모든 사무실 집기를 독일에서 싣고 갔다고 한다.
[40]
흐루쇼프는 서베를린을 서방의 불알이라고 비유하며, 서방의 비명소리를 듣고 싶을 때 마다 서베를린을 움켜쥐면 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41]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자기 역시 베를린 시민이라고 한 것 또한 이런 상징성을 고려한 제스처였다.
[42]
동독과는 관계를 맺지 않으며, 소련을 제외하고 동독을 국가로 인정한 국가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정책.
[43]
후일 발견된 당시 영국 외무장관의 일기에는 아데나워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가득했다. '반쯤 미친 늙은이'(...)이니 '의심만 많고 탐욕스러우며 공허한 양반'이니 등등.
[44]
사실 아데나워의 생각과 달리 드골은 복수에 불탄 반독파가 아니었으며 1950년에는 독불 관세협정에도 거의 유일하게 찬성했다.
[45]
드골은 어려서 독일어를 배운 적이 있으며 1차 대전 중 독일군 포로로 잡혔을 때 더 공부했다.
[46]
재밌는 것은 독일 드골주의자들은 공산권과의 제휴를 중시한 드골 주장 따위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독일의 동방정책은 독일 대서양주의자들이 지지했다.
[47]
에르하르트 본인도 도대체 아데나워가 자길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48]
오랜 정치 경력과 명성 탓에 여전히 많은 지지자들이 있었고, 그에게 대적할 만한 정치적 능력을 가진 거물들이 딱히 없었던 점도 한몫했다.
[49]
아데나워 본인의 입장에서야 바다 한 가운데의 섬과 같아 방어하기도 힘들고, 자신에게는 여러 안 좋은 추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베를린을 포기하는 대신, 당시 동독의 주요 도시들 중 전쟁 피해를 가장 적게 입었고, 학문과 문화, 인구의 중심지이자 추가적인 인구 수용 능력 또한 넉넉한 라이프치히를 손에 넣는 것이 훨씬 좋은 아이디어로 보였을 것이다.
[50]
하지만 라이프치히와 서베를린이 독일 통일에 미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만일 아데나워의 제안이 이뤄졌을 경우 독일 통일은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대표적인 외교 실책이 될 뻔한 셈.
[51]
빌리 브란트를 의회에서 프람 씨(Herr Frahm)라고 불렀다. 프람은 빌리 브란트가 나치를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하기 전 쓰던 성으로, 마찬가지로 사생아 출신인 외할아버지의 성이었다. 사생아여서 아버지의 성을 몰랐던 브란트에게, 외할아버지의 성으로 불린다는 건 당연히 큰 모욕이었다.
[52]
슈피겔 지에서 나토의 군사 계획에 대해 보도하자 국방부 장관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아데나워의 재가를 받아 슈피겔 편집진들을 반역죄로 기소한 사건이다.
[53]
상술한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에서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등이 참가하면서 발전한 형태.
[54]
그의 임기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천년제국을 자처한 나치 독일의 존속 기간보다 길었다.
[55]
현재까지도 헬무트 콜, 앙겔라 메르켈에 이은 3번째 최장기 임기다.
[56]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 영국의
해럴드 윌슨 수상 등이 참여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건국자인
다비드 벤구리온도 참석해서 주목을 받았다. 심지어 아데나워가 생전에 악마의 대리인으로 여겼던 소련 대사도 조기를 내걸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해줬다.
[57]
이때 보다 친시장, 친기업 입장에서 아데나워와 입장 차이를 보이며 복지 확대 노선을 우려한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한 장본인 에르하르트 당시 경제부 장관이었다.
[58]
덕분인지 지금도
기민련과
기사련은 다른 나라의 우파 정당에 비해서는 상당히 중도에 가까운 포지션이다. 기민당의 온건한 성향+ 다당제, 내각제라는 제도적 요인 때문에 독일은 미국, 한국, 영국 등과 달리 우파 진영이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않고
온건 보수주의,
기독교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기민당,
경제적 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자민당,
우익대중주의, 강경 우익을 표방하는
독일을 위한 대안으로 나뉘어져 있다.
[59]
에르하르트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에르하르트는 알아듣지 못하는 쾰른 사투리로 "저 놈은 총리가 되어서는 안 돼!"라고 노골적으로 뒷담을 깠다고 한다.
[60]
쾰른 대교구의 추기경으로 골수 가톨릭 신자인 아데나워와는 사적으로도 굉장히 친밀한 사이였다.
[61]
특정 정당의 단독 과반 점유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테니 단독으로 집권하려는 눈앞의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 연정을 통한 협치의 기틀을 다져놓는 게 훨씬 낫다는 취지의 이 발언은 현재까지 정확히 들어맞는 예언이자 독일 다당제 정치의 모범을 제시한 교훈으로 평가받고 있다.
[62]
아데나워는 이 발언에 대해 비스마르크와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와는 다른 독일을 만들 것이라는 뉘앙스로 '비스마르크의 군화가 내게는 너무 크다'라고 응수했다.
[63]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