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3:59:35

영빈 이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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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의 후궁
소유영빈 이씨 | 昭裕暎嬪 李氏
파일:수경원.jpg
수경원 전경
출생 1696년 8월 5일
사망 1764년 8월 12일 (향년 68세)
조선 한성부 경희궁 양덕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의열묘(義烈墓)
수경원(綏慶園)
재위기간 조선 숙의
1726년 12월 9일 ~ 1728년 11월 9일
조선 귀인
1728년 11월 9일 ~ 1731년 1월 5일
조선 영빈
1731년 1월 5일 ~ 1764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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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전의 이씨
부모 부친 - 이유번(李楡蕃)
모친 - 한양 김씨
배우자 영조
자녀
슬하 1남 6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 ~ 1748)
차녀 - 옹주(1728 ~ 1731) 요절
3녀 - 화덕옹주(和德翁主, 1729 ~ 1731) 요절
4녀 - 옹주(1732 ~ 1736) 요절
5녀 -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 ~ 1752)
장남 - 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 1735 ~ 1762)
6녀 -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 ~ 1808)
봉작 숙의(淑儀) → 귀인(貴人) → 영빈(暎嬪)
사당 의열묘(義烈廟)
선희궁(宣禧宮)
시호 의열영빈(義烈暎嬪)
소유영빈(昭裕暎嬪)
}}}}}}}}} ||

1. 개요2. 생애
2.1. 궁녀에서 후궁으로2.2. 영조의 오랜 숙원이었던 아들 사도세자의 탄생2.3. 자녀들의 불행한 삶2.4. 행운인가 불행인가2.5. 비극적인 삶2.6. 한 맺힌 죽음
3. 가계도
3.1. 친정( 전의 이씨)3.2. 시가( 전주 이씨)3.3. 배우자 / 자녀
4. 관련 문화재5. 대중 매체
5.1. 드라마5.2. 영화
6.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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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두 번째 후궁이다.

부군 영조 이후 사도세자부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철종대까지 모두 혈통상 영빈 이씨의 직계 자손들이다.

화평옹주, 화협옹주, 사도세자, 화완옹주의 생모이며 정조 친할머니이다.

아버지는 증 찬성 이유번(李楡蕃)이며, 어머니는 한양 김씨를 본관으로 두었던 김우종(金佑宗)의 딸이다. 사후에는 선희궁(宣禧宮)으로 불렸다.[1]

사도세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자식들이 불우한 인생을 살았고 심지어 영조에게 아들의 대 처분을 직접 요청한 이후에는 여생을 단장(斷腸)[2]의 심정으로 피눈물나게 살았던 비운의 여성.

2. 생애

2.1. 궁녀에서 후궁으로

1696년(숙종 22년)에 태어나 6세의 어린 나이에 궁녀로 뽑혀 들어왔다.[3] 지밀에 소속되어 대전(大殿, 임금이 거처하는 곳)에서 일했다. 당시 숙종은 이씨를 두고 "이 나이의 사대부 집 여자아이들은 어린 티를 면하기 어려운데, 위항의 여자[4]라 조숙하여 이런 일까지 다 하는구나."라고 말했다 한다.

1726년(영조 2년) 11월 16일, 30살에 영조 승은을 입으면서 아이를 갖게 되어 이례적으로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정식 책봉되었다. 1727년(영조 3년) 장녀 화평옹주 출산하고, 1728년(영조 4년) 내명부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다. 비록 그동안 세 명의 옹주가 조졸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1730년(영조 6년) 11월 27일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暎嬪)이 되었다. 1733년(영조 9년)에는 5녀 화협옹주를 출산했다.

2.2. 영조의 오랜 숙원이었던 아들 사도세자의 탄생

1735년(영조 11년)에 마침내 모두가 고대하던 왕자(王子)를 출산하는데 그가 사도세자다. 정빈 이씨가 낳은 장남 효장세자를 일찍 잃고 오래도록 아들을 두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43세의 늦깎이 아버지 영조는 후궁 영빈 이씨가 출산하던 당일 직접 그 곁을 맴돌며 지키고 있다가 아들이란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이 왕자는 곧 다음해에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되어 세자로 책봉됐다.
영빈 이씨가 원자를 집복헌에서 탄생하다
영빈 이씨가 원자(元子)를 집복헌(集福軒)에서 낳았다.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儲嗣)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중략)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하례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 삼종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하였다.
- 《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1월 21일 (임진) 1번째기사'''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를 낳았으나, 사도세자 또한 어느 후궁 소생의 왕자들이 정실 왕비를 어머니로 모셔야 했던 것처럼 곧 다음해에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되어 세자로 책봉됐다.
그리고 영빈 이씨는 1737년(영조 13년) 6녀인 막내 화완옹주를 낳았다.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낳았는데, 화완옹주를 제외한 나머지 자녀 모두 영빈 이씨 보다 먼저 세상을 일찍 떠났다.

2.3. 자녀들의 불행한 삶

그러나 누구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평옹주는 21세에 첫 딸을 낳다 난산으로 요절해 영조와 영빈을 상심하게 만들었다. 혜경궁은 화평옹주의 탈상 기간에 장남 의소세손을 낳고 속이 어떻든 영빈이 산후조리를 해줬는데, 영조에게 딸이 죽은 판에 손자 봐서 신났다며 인정머리 없다고 욕 먹었다는 기록을 남긴다. 거기다 영조의 총애는 받지 못했지만 영빈을 닮아 미색이었다는 화협옹주 역시 20세에 홍역으로 요절했다.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사이에 낳은 딸 3명은 어린 나이에 숨져 옹주 봉작(封爵 작호 봉하는 일)조차 받지 못했다.

그 중 유일한 아들 사도세자는 애초에 아버지 영조와 사이가 멀고 성격,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수시로 영조와 내외적으로 심하게 갈등했다. 그 갈등으로 인한 중압감과 계속된 아버지의 핍박과 학대 때문에 정신병까지 발병해 입어야 할 옷을 찢는 의대증, 벼락을 무서워 하는 뇌벽증, 갑자기 발작하여 지나가는 내시를 아무 이유없이 죽이거나 궁녀들을 겁탈을 하는 끔찍한 발작을 하는 등의 기행에 이어 연쇄적 살인 같은 범죄로 발전했다. 그러던 중 세자에게 정조를 비롯한 아들들이 연달아 태어나자, 영조는 아들을 건너 뛰고 당시 세손이었던 손자 정조 후사(後嗣)를 택하려 했다.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이후로도 계속 심해져 의대증 발작이 일어난 날 아끼던 후궁 경빈 박씨를 폭행하여 살해(때려 죽임)하고, 급기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아버지 영조( 국왕)의 시해까지 운운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무서웠는지 영조라는 주어는 없었지만 반드시 없애버리겠다 등으로 상대가 누구라고 다들 알 정도로 말하고 다니자[5] 결국 영빈은 세손을 살리기 위해 친아들의 단죄를 결심하고 울면서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달려가 울면서 낱낱이 고했다.[6]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수 없는 일을 행한것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으로 한도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장번내관을 내쫒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 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눠주고,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母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근일 궁궐 후원에다가 무덤을 만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묻고자 했으며
하인에게 머리를 풀게하고 날카로운 칼을 곁에두고 불측한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 영빈 이씨의 고변

영빈의 고백 다음날 영조는 아버지 숙종의 어진이 있는 창덕궁 선원전 앞에서 결의[7]를 다지고, 세자의 피할 수 없는 대처분 1762년(영조 38년) 윤5월 13일 기어코 감행했다. 영조는 세자를 쌀을 담는 '뒤주'에 가두기로 결심했을 때 "나의 꿈에 정성왕후가 나타나 '세자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고 예지(叡智)해 준 적이 있다"면서 적모(嫡母)인 정성왕후의 현몽과 생모 영빈의 밀고를 근거로 내세웠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세자(孝章世子)가 훙(薨)하여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는데,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10여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 1757년)과 무인년( 1758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으로 인하여 이 심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점점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또 환관, 기녀와 함께 절도 없이 놀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 인사를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번 나라를 위해 근심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과 용포를 벗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중략)
세손( 정조)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金聖應) 부자(父子)에게 수위(守衛)하여
세손이 또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 세자궁)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중략)
세자가 곡(哭)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다.
금상(今上)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라고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정조)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 혜경궁 홍씨)과 세손 및 여러 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 (을해) 2번째기사

이후 영조의 명으로 세손이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 승통(承統)을 이을 것을 명하자 충격을 받고 슬퍼하였다.

아들의 죽음 이후 영빈은 "자식에게 못할 짓을 하였으니 내 자취(무덤)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며 평생을 가슴앓이 했고 그 죄책감으로 손자인 정조를 지극 정성으로 대했다고 한다. 직접 아침저녁 반찬을 살펴 어린 세손이 이른 음식을 잡숫지 못하는데 할머니 정성에 억지로 자신다는 편지를 보고 혜경궁이 안도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고. 그러나 정조는 생전에 할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어쨌든 어린 나이인 11살에 친할머니가 아버지를 죽여달라 간청한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 아버지를 생각하면 용서하기 어려웠던 듯.

2.4. 행운인가 불행인가

조선 시대에 궁녀로 입궁해 왕의 승은을 입고 후궁 첩지, 그것도 최종적으로 정1품 '빈(嬪)'에 봉해진[8] 것은 평민 출신인 궁녀로서 희대의 벼락 출세다. 이것도 처음부터 어려운 일인데,[9] 후궁 첩지를 받더라도 왕에게 계속 총애받으며 왕손들을 낳아 기반을 다지기란 당연히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조선에서 궁녀는 왕에게 승은을 입고 승은 상궁으로 봉해져도 왕의 방문이 끊겨 쓸쓸히 늙어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계속 총애받다가 왕손을 낳아 승급하는 경우는 있어도, 왕자를 낳는다 해도 그 왕자가 장차 왕통을 이을 국본이 되어 세자의 생모가 됨은 더더욱 드물었다. 후궁 소생의 왕자 군이므로 왕비가 대군을 낳는다면 왕위 계승권에서 바로 밀려나는 것이 법도이니 더 그렇다. 하지만 영빈은 이 일을 모두 차근차근 다 해냈다.

또 영빈은 나이 30살이 되어서야 영조에게 승은을 입었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중년에 가까운 나이였다. 이때 운 좋게 화평옹주를 가져 후궁 첩지를 받은 것만도 감지덕지, 천운인데 이후 딸만 5명을 내리 낳았는데도 계속 영조에게 총애받았다. 그러다 마침내 38세에 아들 사도세자를 출산하고 3년 뒤에 화완옹주까지 출산하며 영조의 비빈(妃嬪)들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은 기록을 세운다.

심지어 영조는 형수 선의왕후의 상중에 구설수에 오를 것을 감수하고 당시 종1품 '귀인(貴人)'이었던 이씨를 정1품 '빈(嬪)'으로 승급시키며 큰 잔치를 베푼 점, 영빈이 손자인 세손 정조와 종법상 남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10] 영빈의 발인 때 세손이 직접 참여하여 곡림(哭臨, 곡하는 일)하게 허락한 점 등[11], 영빈을 위해 이리 특별한 조치 등을 단행한 것만을 봐도 영조와 영빈의 부부애(금슬)가 매우 극진했음을 알 수 있다. 한시라도 빨리 후사(後嗣)를 봐야 하는 영조로서는 나이도 있는 데다 줄줄이 딸만 낳는 궁녀 출신의 후궁보다는 더 어리고 배경도 좋은 젊고 예쁜 후궁을 얼마든지 들일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빈이 그렇게 오래 총애받음은 분명 특별한 일이었다.

2.5. 비극적인 삶

하지만 영빈의 인생은 그렇게 행복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조선에서 궁중 여인은 처소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왕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살아야 했다. 특히 영빈은 사도세자를 낳기 전부터 영조의 총애 덕분에 궁중에서 가장 높은 후궁에 봉해져 있기는 했지만 정작 세자를 낳고도 직접 기르지 못했다. " 왕세자"라는 이유로 생후 100일이 지나자마자 생모의 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져 거기서 반대파 궁인들 손에서 자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중록에서는 이것이 문제였다며 '저승전(儲承殿)은 경종 계비이신 어 대비 계시던 집으로 안 계신지 오래 되지 않고, 보모 상궁들도 어 대비 모시던 것( 소론)들이라 작은 일도 큰 탈이 나게 하니' 등등으로 돌려 비판했다. 저승전은 평생 영조와 심각하게 대립했던 형수 선의왕후의 거소이며 보육 담당 궁인들 역시 그 측근들로 영조와 매우 척을 진 사람들이라 어린 세자에게 나쁜 영향[12]을 미쳤다는 것이다. 정조도 아버지가 일찍부터 생모 곁을 떠나 있어서 엇나갔다고 생각하여 훗날 의빈 성씨 문효세자를 낳자 정비인 효의왕후의 아들로 입적시키되 생모 의빈이 키우게 했다고 한다.

게다가 사도세자 역시 여느 후궁 소생 왕세자들처럼 적모인 왕비의 아들로 입적되어 왕비를 어머니로 모셔야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정성왕후와 돈독한 사이라 그녀를 극진히 모셨고, 정성왕후 역시 세자를 친아들처럼 아껴서 영조의 구박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보호해 주었다. 게다가 비록 정실부인과 후궁의 관계지만 영빈 이씨도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한 죄책감 때문인지 정성왕후와는 돈독한 사이였다. 영조가 후궁 숙의 문씨를 통해서 파토내려고 한 정성왕후의 회갑연을 치르자고 건의한 사람도 다름아닌 영빈 이씨였다.

사도세자는 생모인 영빈에게도 극진했다. 외롭고 자기 때문에 마음고생 심한 어머니를 안쓰럽게 여겨, 후궁의 가마를 왕비에 준할 정도로 크게 개조해 영빈을 태우고 창덕궁 후원(秘園)을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영빈이 거절했지만 세자는 억지로 밀어넣었고 이때가 영빈과 사도세자가 모자로서 지낸 마지막 시간이었으나, 세자는 한창 영조의 미움을 받던 때라 부왕에게 질책을 들을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효심을 보여 데이트(?)를 한 것이지만, 영빈은 아들의 정신병이 더 심해진 것 같다고 더 불안해 며느리 혜경궁에게 "어찌할까 보냐!"며 울었다.

결정적으로 영빈의 자녀들도 거의 다 요절했다. 막내딸 화완옹주만이 부모보다 먼저 죽지 않고 천수를 누렸으나 젊은 나이에 어린 딸과 남편 정치달을 겨우 한달 간격으로 연달아 잃었다. 게다가 화완옹주는 조카인 정조를 자식같이 대해주다가 차차 조카에 대한 집착이 비정상적으로 심해지면서 선을 넘는 행동을 하다가 오히려 정조와 적이 되고, 결국 정조가 즉위하자 서인으로 강등당해 유배형을 받고 왕족 신분에서 정처(鄭妻), 즉 그냥 '정 모씨의 아내'라고만 불리는 서인(평민)으로 격하되는 불행을 겪었다.

2.6. 한 맺힌 죽음

한중록》에 의하면 임오화변이 있은 직후 영빈 이씨는 손자 정조가 임금이 되는 날만을 곱씹어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왔으나 1764년(영조 40년), 세손으로 하여금 효장세자의 장통(長統)을 계승하게 하겠다는 영조의 처분이 있은 직후 식음을 전폐하며 꽤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1764년(영조 40년) 음력 7월 26일, 그녀는 먼저 간 아들을 뒤따르듯 경희궁 양덕당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13] 향년 68세.
영빈 이씨가 연서하다
영빈(暎嬪) 이씨(李氏) 연서(捐逝)하였다. 임금이 임곡(臨哭)하기를 매우 슬프게 하였고,
후궁 일등의 예로 장사를 치르라고 명하였다. 혜빈궁(惠嬪宮)이 《의례(儀禮)》 경전에
‘서자(庶子)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는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글에 의거하여 시마복을 입었다.
영빈이 사도 세자를 탄생하였는데, 후궁에 40여 년간 있으면서 근신하고 침묵을 지켜 불행한 때에 처하여 보호한 공로가 있었다.
-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 1764년, 청 건륭(乾隆) 29년) 7월 26일 (병자) 1번째기사

영조는 영빈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빈의 장례를 후궁 제일의 것으로 하였고 '의열(義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손수 묘지명을 지어주었는데, 국왕이 후궁의 지문을 지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영빈 이씨의 청화백자 묘지명은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사위인 화평옹주의 남편인 금성위 박명원이 글씨를 썼다. 또한 영조는 사도세자와 영빈의 일을 기록한 《표의록(表義錄)》을 직접 작성하였다.
아아!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구나.
39년간 해로하였는데 지금 하나의 꿈이 되고 말았으니
내 슬픔이 너무나 깊다.
다섯 달만 더 살았더라면 칠순이 되었을 것을,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일이다.
- 《어제영빈이씨묘지(御製暎嬪李氏墓誌)》[14]

영빈의 장례 때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세손인 정조는 법통상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형식적으론 세손과 친모인 혜경궁 홍씨에게 영빈은 그저 선왕의 일개 후궁인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영조는 혜빈( 혜경궁 홍씨)과 세손이 영빈의 영전에 조문할 것을 예조에서 청하지 않았다며 이 책임을 물어서 예조판서 이지억(李之億)을 파직시키고 혜빈과 세손이 조문하도록 특별히 허락했다.
예조 판서 이지억을 파직하고 남태제를 대신하다
예조 판서 이지억(李之億)을 파직하고 남태제(南泰齊)를 대신하였다.
임금이 영빈(暎嬪)의 상(喪)에 혜빈과 세손이 마땅히 한번 가야 한다고 여겼는데,
해조에서 계품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예조에서 비로소 발인하는 날 나아가 곡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 1764년, 청 건륭(乾隆) 29년) 9월 7일 (병진) 1번째기사

묘소는 연희궁(衍禧宮) 자리[15] 시호를 따 의열묘(義烈墓)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었으며, 고종 사도세자 황제 묘호인 '장조(莊祖)'로 재추존되자 영빈의 묘소도 '묘(墓)'에서 '원(園)'으로 승격되어 수경원(綏慶園)이라는 원호를 받고 정자각과 비각이 새로 건립되었다. 이후 고종대에 '소유(昭裕)'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1969년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으로 천장해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연세대학교 루스채플이 들어섰다. 천장할 때 정자각과 비각은 그대로 두고 비각 안에 있는 비석만 옮겼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선희궁(宣禧宮)[16]에 고이 모셔졌다.

3. 가계도

3.1. 친정( 전의 이씨)

  • 아버지 : 증 찬성 부원군 이유번(贈 贊成 府院君 李楡蕃) - 이영임(李英任)의 아들
  • 어머니 : 부부인 한양 김씨(府夫人 漢陽 金氏) - 김우종(金佑宗)의 딸

3.2. 시가( 전주 이씨)

3.3. 배우자 / 자녀

4. 관련 문화재

5. 대중 매체

창작물에서 생전에 선희궁으로 지칭되는 경우가 많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선희궁은 영빈 이씨의 사당 이름이다.

5.1. 드라마

5.2. 영화

사도세자의 생모이지만 갓난 아들을 직접 기르지 못하고 궁인들한테 보내야 하는 후궁의 면모가 부각된다.[21] 떨어져 지내는 어린 아들이 잘 먹고 잘 지내는지 몹시 궁금해하나, 일개 후궁에 불과해서 실제적으로는 아들에 대한 권한이 거의 없었다.[22] 역사대로 정비 정성왕후와 잘 지내는 모습이 나온다. 혜경궁 홍씨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자 나보다 자네가 더 오래 주상 전하를 모시지 않았냐는 정성왕후의 권유에 따라 홍씨에게 어떻게 하면 시아버지를 거스르지 않고 섬길 수 있는지 잘 가르쳐주기도 하고, 이후 정성왕후의 환갑이 다가오는데도 영조가 아는 체도 하지 않자 보다못해 자신이 먼저 중전 마마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열어드리자고 먼저 나설 정도로 정성왕후를 우대해준다. 하지만 영조 말년에 총애를 독차지한 승은 후궁이던 숙의 문씨가 "그런 일로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혀서야 되겠냐"며 세자의 생모인 영빈에게 무안을 주면서 겁없이 대들고, 이 하극상에 노한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문씨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는 자리에 정성왕후 혜경궁 홍씨과 함께 입석해 문씨를 째려 노려본다. 하지만 갈수록 악화되는 영조와의 갈등과 학대로 광증( 정신병)이 더욱 심해진 사도세자가 온갖 비행을 일삼자 두려워한다. 급기야 세자 영조의 시해까지 운운하자 손자인 세손만이라도 구하려고 영조에게 ' 세자의 대처분'을 요청하면서 결국 임오화변이 일어나는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공한다. 사도세자 사망 소식을 듣고 혜경궁 홍씨에게 "내 아들 내가 죽인 거 아니지?"라고 절규하며 아들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걸 필사적으로 부인하듯이 통곡하고, 이에 혜경궁 홍씨도 눈물을 흘리며 "이게 어떻게 어머님의 잘못이겠냐"고 하면서 시어머니를 위로함과 동시에 사태를 이 지경으로까지 끌고간 영조에 대한 울분 아닌 울분을 토해낸다.
궁합에서의 영빈 이씨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가녀리고 약한 이미지가 아니라 아들 이선을 위하여 아들의 이복누나 송화옹주를 적극적으로 음해하는 메인 악역으로 나온다. 그러나 결국 전부 실패하고 세자 이선 앞에서 영조에게 펑펑 울며 용서를 빌고 영조는 세자 이선을 꼭 안아준다.

6. 참고 문서



[1] 당초에 부군 영조의 뜻에 따라 사도세자의 대처분을 청한 일 등이 종묘 사직을 보호한 일이라며 '의열(義烈)'이라는 어지간한 구국영웅도 받기 힘든 시호가 내려졌으나, 손자인 정조대에 이르러 사당의 명칭을 시호를 딴 의열궁에서 선희궁으로 개칭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시호 역시 대한제국 시기에 사도세자를 황제로 추숭하면서 어미로서 추존황제에 대한 대처분을 요청한 것이 영 거시기했던지 (대략 어질고 너그럽다는 평범한 의미의) '소유(昭裕)'로 고쳤다. [2] 새끼 원숭이(자식)를 잃은 어미 원숭이의 심정은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지는 것과 같다. [3] 본래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 차출하는데, 지밀 등에서는 양인 출신을 선호해 편법으로 입궁시키곤 했는데 영빈 이씨도 여기에 해당하는 듯하다. [4] 委巷, 민가의 여자. [5] 강력한 전제군주제 국가였던 조선시대에서 한 나라 국왕의 시해 운운은 사형당할 수 있는 역모에 해당하는 중죄이며 세자도 국왕의 아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거기다 아들인 세자가 부왕을 언제든 담그고 말겠다 떠드는 건 역적에 불효, 패륜까지 세트로 성립되는 것이고, 세자가 이러고 다닌다는 것이 알려지면 왕실의 체면 자체가 와르르맨션 감 . [6] 이것도 세손 정조의 보위와 정통성을 지키고 궁내의 마지막 평화라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 당시 중전 정성왕후와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잇달아 승하하면서 세자를 뒤에서 후원해주고 빽으로 뒷받침해주던 이들이 없어지니, 영조와 세자의 부자(父子)를 중재할 왕실 어른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총대를 맬 사람은 세자의 생모인 영빈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광증과 범죄가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영빈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이 선택 때문에 영빈은 여생을 자식을 간접적으로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며 평생동안이나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야만 했다. [7] 영조는 아무리 자식인 사도세자가 미웠어도 그렇게 역적(逆敵)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아버지 숙종 어진 앞에서 "아바마마, 오늘 내 기필코 역적을 처단하고자 합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8] 관리로 치자면 종9품 말직에서 시작해 정1품 영상까지 파죽지세로 오른 것. [9] 애초에 간택 후궁이 아닌 이상 제일 말단 품계인 종4품 '숙원(淑媛)'이 되는 일도 하늘의 별따기다. [10] 영빈이 사망하기 몇 달 전 영조가 단행한 '효장승통처분' 때문이다. 이 효장승통처분(孝莊承統處憤)으로 인해 정조는 영조의 장남이자 사도세자의 이복형 효장세자의 아들로 양자 입적되었다. 즉 혈통상으로는 친조모-친손자 관계일지라도 종법으로는 정조와 영빈은 남남이었다. [11] 영조 자신은 생모 숙빈의 상중에 부왕 숙종 등의 영향으로 마음대로 망곡(터놓고서 곡하며 우는 일)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영빈 이씨의 장례 당시에 세손(정조)은 공식적으로 효장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할아버지의 첩이 죽었을 뿐이었는데, 영조의 유일한 후계자 자격으로 장례 절차에 참여하여 조문하고 영전에서 울도록 함은 분명한 영조가 영빈 이씨에게 베푼 최대의 특혜였다. [12] 특히 장차 왕위를 잇는 막중한 사명을 지닌 왕세자에게 고작 병정놀이, 삼국지나 무인 기술잡서 등을 익히게 하고, 한중록에 한 상궁이라는 보모는 직접 칼, 활 등을 만들어 바쳤다는 얘기도 있다. 공부를 멀리하고 무예에 빠지게 함으로써 이렇듯 세자는 무예를 더 좋아해 영조가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결국 세자에게 이런 것들을 제공한 주변인들을 한꺼번에 조진 적도 있었다. 또한 세자를 보모하던 궁인들은 경종을 지지한 친 소론이었기에 세자에게 노론들을 펌하하는 얘기를 자주 했을 것이다. 또한 소론 궁인들 중에서 리더격인 최 상궁과 한 상궁이 영빈 이씨의 어릴 적만 생각하고 그녀를 업신여기며 세자에게 자주 찾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13] 절묘한 사망 시점 때문인지 자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만약 병사했다면 매일같이 며느리로서 시어머니를 찾아가 문안을 드렸던 혜경궁 홍씨가 간병했을 텐데 한중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는 점, 영빈 이씨의 사망 직후 한동안 한중록이 중단됐다는 점이 그 근거. 더 나아가서 우울증이 갑작스러운 자살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4] #. [15]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신촌 일대. [16] 금성위 박명원이 의열 영빈궁의 묘호에 관해 상소하자 이를 논의·확정하다 - 《 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12월 26일 (계축) 2번째기사. [17] 戊申八月十五日 ····· 今戊申年八月初三日申時生翁主阿只氏藏胎事 / 무신년(1728년) 8월 15일, 8월 초삼일 신시에 태어난 옹주 아기씨의 태를 묻다. - 《태봉등록(胎峯謄錄)》 [18] 庚戌正月初八日 ······ 己酉年十二月十二日酉時生翁主阿只氏藏胎事 / 경술년(1730년) 정월 초파일에, 기유년(1729년) 12월 12일 유시에 태어난 옹주 아기씨의 태를 묻다. - 《태봉등록(胎峯謄錄)》 [19] 壬子二月十三日 ······ 今壬子正月初一日寅時生翁主阿只氏藏胎 ··· ··· / 임자년(1732년) 2월 13일, 정월 초하루 인시에 태어난 옹주 아기씨의 태를 묻다. - 《태봉등록(胎峯謄錄)》 [20] 정조 즉위년인 1776년, 정조의 세손 시절 대리청정을 막고 모해한 죄로 옹주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정치달의 처(妻)'라는 뜻의 정처(鄭妻)로 불렸다. [21] 왕자녀는 모두 유모에게 맡겨지는데 사도세자는 당시 세자로서 왕비의 자식으로 입적되어 법적으로는 영빈 이씨의 아이가 아니기도 했다. [22] 일개 왕자군이나 옹주였다면 모를까 왕세자였던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