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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명 |
히키 신[1] Hicky Shin |
출생 | 1938년 11월 4일 ([age(1938-11-04)]세) |
경기도
경성부
명륜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
|
본관 | 평산 신씨[2] |
학력 |
서라벌고등학교 (
중퇴) 버클리 음악대학 (명예박사)[3] |
가족 |
아버지 신익균 어머니 이순자[4] |
배우자 명정강(1940년 출생 ~ 2018년 3월 23일 사별) | |
장남
신대철 차남 신윤철 삼남 신석철 |
|
종교 | 무종교 |
활동 | 1957년 ~ 현재[5] |
직업 | 기타리스트, 작곡가, 가수 |
악기 | 보컬, 기타 |
장르 | 록, 사이키델릭 록, 소울, 로큰롤, 블루스 |
소속 | 애드 훠, 신중현과 엽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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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록 음악의 아버지란 말이 단지 록 음악으로 최초의 성공을 거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압도적인 서구의 문화 앞에서 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한국적 정체성을 구현하고자 했는가 하는 그 창조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한 말이 되어야 합니다.
평론가 강헌[6]
평론가 강헌[6]
한국 록의 영원한 대부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대한민국의 기타리스트, 작곡가, 가수.[7]
8.15 광복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사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이름을 거론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긴 레전드 뮤지션이다. 오늘날엔 '한국 록의 대부'라는 명칭으로도 잘 알려져있다.[8]
2. 생애
2.1. 성장 과정
1938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9] 아버지 신익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중현의 생모는 일본인이었는데 #, 그의 유년기 때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재혼한 후 남동생과 여동생이 태어났다.아주 어릴 때인 1941년에 집안이 만주국으로 이사했다. 당시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미용사였다. 만주에 살던 어린 시절에는 집안에 대형 축음기가 있었을 정도로 집이 부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다만 만주에서 그가 살던 시기는 여덟살도 되기 전 삼 사년 정도에 불과했고, 해방 직후에는 집안이 다시 서울로 이사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에는 가난해졌고, 가족이 충청북도 진천에 내려가서 농사일을 하면서 살았다. 이 때 신중현은 농사 일을 도우며 민요도 많이 들었는데 농부들이 밭 매면서 하는 노래들이나, 각설이들이 와서 문밖에서 리듬을 때리는 것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미인'같은 노래에서 한국적인 음악을 구현한 것에도 이 시기의 영향이 있었다고 신중현은 회고한다.
전쟁 중인 195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듬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막내 여동생까지 잃었다. 그 후 신중현은 남동생과 함께 전쟁 고아로 자라면서, 창고지기를 비롯한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당시 창고지기를 하면서 고물 라디오로 미군 방송이나 중국 방송을 온종일 듣기도 했었는데[10], 이것을 계기로 외국의 다양한 음악에 빠지게 된다. 그 후 거의 폐품이 되어 누군가가 내다버린 기타로 연습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전설적인 뮤지션의 시작이었다.
2.2. 미 8군 연예단의 기타리스트가 되다
서라벌고등학교를 다니던 1955년, 학교를 그만둔 뒤[11], 옷이 없어 교복을 입은 채로 미 8군 공연 팀의 조수로 부대를 출입하게 되면서 음악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미 8군 쪽과 인연이 닿게 된 것은, 중학교 때부터 기타 연습에 몰두하던 그의 실력을 알고, 기타를 배우고자 했던 어느 무용수의 소개에 따른 것이었다.처음에는 공연 장비를 나르고 심부름하며 출연자들의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일이었지만, 나중엔 무대 한쪽에서 보조로 기타를 연주하기도 하면서 점차 실력을 쌓아나간다.[12] 그러다 1957년 미 8군 연예단에서 드디어 기타리스트로 데뷔했다. 데뷰 무대에서 처음 연주한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All Shook Up'이란 곡이었다. 이때 신중현은 '히키 신'이라는 무대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13] 당시부터 주목받아 미군부대 순회 공연은 물론이고 기지촌의 클럽들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신중현은 사실 이때까지는 밴드의 프런트맨이라기 보다는 기타리스트였다. 실제로 신중현의 전성기 시절의 노래를 들어봐도 훌륭한 보컬리스트는 아니었고, 그래서 당시 기준으로 프런트맨으로 나서기에는 조금 어려운 조건이었다.[14][15] 그러나 당시 한국 뮤지션들 사이에선 가히 넘사벽급 기타 실력을 보유했기 때문에 그의 기타 연주가 공연장에 울려 퍼지면 미군들이 "히키 신!"이나 "재키!"를 연호하며 열광의 도가니가 펼쳐졌다고 한다.[16]
2.3. 록밴드 애드 훠를 결성하여 데뷔하다
1964년에 미8군 연예단을 나와서 록밴드 애드 훠를 결성하고 1집 ' 비속의 여인' #을 발매하며 데뷔했다.[17][18] 이 시기는 영, 미에서도 록 밴드 붐이 막 일기 시작한, 즉 록밴드 역사의 초창기였던 시절이다.[19] 신중현은 이 애드 훠 때부터 본격적으로 밴드의 프런트맨이자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국내 첫 창작 록 음악인 ' 비속의 여인'은 이후 수십년간 신중현이 만들어 발표하게 되는 수많은 불후의 명곡들의 기념비적인 첫 시작이었다.애드 훠는 당시 한국에 베이스 기타를 도입한 최초의 밴드 중 하나였고, 그래서 당시 쟁쟁한 로큰롤 밴드들( 키보이스 등)과 더불어 새로운 록큰롤 밴드 사운드를 재빠르게 도입한 밴드로 역사에 남았다. 키보이스 같은 밴드들이 당시 서구의 최신 음악을 최대한 재현해내는 데에 집중하거나, 엔카식의 멜로디와 록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면, 신중현은 단지 서양 록음악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서양 록음악과 구별되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담은 한국화된 로큰롤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20]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로큰롤은 너무나 생소한 음악이었다. 비록 엘비스 프레슬리나 진 빈센트 같은 뮤지션들의 몇몇 곡들이 소개되었지만 대부분의 대중들은 트로트[21]를 들었고 외국 음악은 여전히 생소한 음악이었다. 심지어 스탠더드 팝( 프랭크 시나트라, 폴 앵카, 빙 크로스비 등)같은 음악도 철저히 외국 것이었기 때문에 확산에 한계가 있었다.[22] 이런 당시 한국 대중음악 토양의 한계로 인해 애드 훠의 데뷰 앨범 " 비속의 여인"은 그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고[23] 대중음악의 판도 자체를 바꿀 만큼 큰 임팩트는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소수가 즐기던 클래식 음악만이 고급 음악으로 인정 받을 때였고 대중음악은 '싸구려 유행가'나 '저질 음악' 취급을 받을 때이다. 그래서 당시 한국에서 음악에 관심 있는 리스너들은 클래식, 재즈[24], 영화음악 정도를 들었고 그외 일반 대중들은 트로트(당시 표현은 가요, 유행가)를 주로 들었기 때문에, 록음악은 (선구적인 소수의 애호가들을 제외하면) 그 어느 쪽에서도 별 관심을 못 받는 소외된 장르였다. 1960년대 동시대의 서양과 일본 등에선 록 음악이 대세로 떠오르던 것과는 많이 다른 상황이었던 것. 나중엔 한국에서도 드디어 1970년대 초반부터 록음악과 포크음악이 청년층에서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서양과 일본 등 주요 국가들에 비하면 수 년이나 늦은 셈이다.
2.4. 신중현 사단의 전설이 시작되다
한국에서의 록 밴드 음악 활동은 아직 시기상조임을 깨달은 신중현은 다시 미 8군 연예단으로 돌아가서 악단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계속 한다. 그리고 1967년부터는 미 8군 연예단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동 외에도 작곡과 음반 제작 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67년에는 이정화, 이듬해인 1968년에는 펄시스터즈의 곡들을 만들어서 취입해줬다. 그러던 중 1968년 미8군 연예단의 월남 위문공연 계획이 잡혔는데 이 무렵 연초에 발표했던 펄시스터즈의 곡들이 예상치 못한 큰 히트를 치기 시작했다.그러자 신중현은 월남 위문공연 참가를 취소하고 다시 미 8군 연예단을 나와서,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발굴하여 곡을 주고 프로듀싱까지 해서 데뷔를 시키는 음악 제작자로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이후 신중현이 발굴하여 키운 가수와 곡이 하나같이 크게 히트해서 신중현 사단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이 '신중현 사단'의 유명한 가수로는 펄시스터즈, 이정화, 김추자, 박인수, 장현, 김정미 등이 있고, 유명곡으로는 '거짓말이야', '커피 한 잔', '꽃잎', '봄비', '봄', '미련' 등이 있다.
이 신중현 사단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에 미친 영향과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히트도 히트지만, 각각의 음악적인 시도 자체도 상당히 새로웠다. 대중적인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해외에서 이제 막 태동하던 다양한 장르의 음악적 문법을 적극적으로 국내에 도입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그 음악들이 하나같이 상당히 완성도가 높았다. 이 때부터 신중현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본격적으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확보해 나가게 된다.
일례로 1960년대에 그는 미국의 "솔 사운드[25] "( 소울 음악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소울 스타일의 한국 음악을 만들어냈고, 1960년대 후반 사이키델릭 록음악이 부흥하자,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또 한 번 소화해낸다. 게다가 서양의 신종 장르들을 국내에 빠르게 도입하기만 한 것 뿐 아니라, 서양의 오리지널들과는 구별되는 한국적인 독특한 정서를 담아서 재창조해내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나가지만, 사실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도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의 곡이다. 잘 들어보면, 퍼즈톤의 기타와 스트레이트한 비트가 영락없는 사이키델릭이다. #
신중현의 프로듀싱과 작사작곡 능력은 비단 '신중현 사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중현은 자신의 소속 가수 외에도 다양한 가수들에게 곡을 주어 히트를 시켰고, 또 프로듀싱을 하여 데뷔시키기도 했는데, 일례로 '안녕하세요'로 인기를 끌었던 장미화에게도 곡을 주었고,[26]. 김추자 이전에 김상희 음반도 만들었다. 윤수일과 함중아가 몸담은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그룹도 신중현이 제작했다. 이문세의 2집 전체도 신중현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훗날 김완선이 1989년에 불러서 히트한 '리듬 속의 그 춤을'도 신중현의 곡이다.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대부분의 기성 작곡자나 가수들이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새로운 음악의 흡수에 다소 인색한 반면, 신중현은 당대에 유행하던 새로운 음악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당대에 아주 트렌디한 음악을 했다는 얘기.
동요 반달을 나름대로의 로큰롤 버전으로 편곡한 버전이다. 드럼의 비트나 기타의 연주가 서프 음악과 흡사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참고로 서프 음악은 선구자격인 딕 데일이나 벤쳐스에 의해 1960년경 미국에서 처음 태동된 음악 스타일이다.
참고로 위 곡은 일부 매체에서 1958년에 발표했다고 소개하고 있는 '히키-申 키타-멜로듸'에 수록되어 발표된 곡이다. 그러나 이 '히키-申 키타-멜로듸' 음반의 수록곡들 중 일부는 1958년 이후에 나온 외국곡들을 커버한 곡들이다. 예를 들면 밀양아리랑의 경우 1962년 발표된 Booker T & the M G 's의 Green Onions를 그대로 커버한 것. 이상의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위의 곡은 적어도 1962년 이후에 발표된 곡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2.5. 탄압과 시련
그러나 3공 시절 청와대에서 신중현에게 박정희 찬양가를 만들라고 강권을 하나 신중현은 거절한다. 그 뒤 공화당에서 만약 박정희 찬양곡을 만들지 않으면 다칠지 모른다며 협박했으나 신중현은 또다시 거절한다. 신중현의 증언에 따르면, 1972년, 유신 독재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어느 날, 청와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들어보니 한마디로 '박정희 찬가'를 불러달라고 하길래 '난 그런 노래는 쓸 줄도 모를 뿐더러, 왜 하필 나한테 그런 주문을 하느냐'고 반문했더니, 그 때부터 일이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고 한다.그 뒤 박정희 정권에 완전히 찍힌 신중현은 많은 곡이 금지곡으로 묶이는 고난을 겪었고, 방송 출연 금지 및 업소 출연마저 막히게 된다. # 그리고 박정희 찬양곡 요구를 거절한 이후 얼마 후에 발표한 곡이 그 유명한 ' 아름다운 강산'이다. 이 노래는 처음에 "신중현과 더 멘"의 곡으로 박광수가 보컬리스트로 있을 때 처음 녹음되었다(1972년).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파동 이후 '아름다운 강산'은 한동안 본 의미와는 한참 다른 건전가요로 소개되었다. 후에 이선희가 커버해 유명해진 곡이기도 하다. 아래 원곡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10분이 넘어가는 대곡이다.
신중현에 대한 탄압은 10월 유신 체제 시기에 절정에 달했는데, 반대로 말하면 검열은 그 이전 시대에도 존재는 했지만 한국은 서브컬쳐나 반문화가 대대적으로 퍼지기에 유교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어 상당히 보수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반체제 뮤지션'이라고 정부 차원에서 분류할만한 인물도 드물어 그렇게 주목받을만한 탄압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미간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미국 문화가 전파되고, 한국인 이민자, 유학자 수가 연간 수만 명을 이루고,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 세대의 자식들이 한국에 반이민 혹은 일시 귀국 형태로[27] 오는 등의 여파로 점점 록 음악 붐이 불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대힉생 반전문화에 힘 입은 포크 음악도 서서히 밀려옴에 따라 관계 당국이 허용하는 수위를 넘는 음악이 계속 등장하기 시작한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었는데 아직 한국은 소프트웨어적으로나 하드웨어적으로나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1971년쯤 되면 한국에서도 우드스탁 같은 페스티벌이 열리기 시작한다. 청평 페스티벌이 대표적인 것인데, 이로 인해 한국의 음악은 진일보하게 된다. 하드 록 밴드가 나이트 클럽에 등장하고, 소울 음악이나 훵크음악의 영향으로 소위 말하는 "브라스 밴드"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아울러 우디 거스리나 밥 딜런, 조안 바에즈를 추종하는 일군의 포크 음악 세력도 등장하게 된다.
젊은이들은 머리를 기르고 대마초를 피우기 시작했다.[28] 그리고 정권 차원의 장기 독재 음모가 시작되면서 국가가 다시 권위주의적인 통제를 강화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국가 총력전에서 이탈할 소지가 큰 이러한 청년 문화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의 모토 중 하나였던 "건전한 민족문화 창달"은 이러한 '서양에서 유입된 환락적인' 문화를 제거 대상으로 여겼다.[29]
박정희 정권은 신중현에게 탄압의 강도를 서서히 높여갔다. 탄압에 대한 가장 최초의 발단은 앞서 말했듯 박정희의 작곡 요구를 거절했다가 미운털이 박힌 것이 시작이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신중현은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을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얘긴데.... 72년이었지. 유신독재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시절이었고 나는 가요계에서 최고 자리에 올라있을 때였죠. 어느 날 청와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어. 누군지도 모르고 통화는 한 5~6분 정도로 짧았지. 한마디로 '박정희 찬가'를 불러달라는 거예요. 난 대뜸 '그런 노래는 쓸 줄도 모를 뿐더러 왜 하필 나한테 그런 주문을 하느냐'고 반문했어요. 그쪽이 들었을 때는 내 어투가 퉁명스러웠거나 건방졌을까? 하지만 그런 거부 의사 자체를 그들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한 듯 합니다. 그 때부터 일이 꼬였어요.
이로 인한 댓가는 혹독했고, 원래도 파격적이고 새로운 음악을 지속적으로 도입하고 실험했던 신중현에게 검열 당국은 너무나도 높은 벽이었다. 실제로 신중현은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개인 작업 외에도 프로듀서로서 다양한 가수들을 키워냈는데, 이 시기 발매한 곡들이 금지곡으로 묶여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가수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신중현과 퀘션즈나 골든 그레입스 등이 그랬다.
1971년경 신중현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신중현이 시도한 다양한 기획이 실패한 것도 있었고, 음반을 내는 족족 검열에 걸려서 발매가 금지되는 등 사업을 펼치기에 너무나도 악재가 많았던 것이다. 이 시기에 신중현은 더더욱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록 음악의 작업에 몰두한다. 음악의 소재도 민중(아름다운 강산)[30], 마리화나(잔디) # 등 그 스펙트럼이 넓어지게 된다. 음악적으로는 후대에 훌륭한 곡을 남긴 시기가 되었지만, 음악 자체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상업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
하지만 신중현은 여전히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김추자를 비롯한 뮤지션들과의 작업으로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건재한 상황이었다. 이때 신중현은 다시 한 번 밴드로 대중 앞에 나설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생각으로 만들게 된 밴드가 바로 레전드급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이었다. 베이스에 이남이, 드럼에 권용남을 기용한 수퍼 세션 밴드가 탄생한 것이다. 신중현과 엽전들은 등장하자마자 1집 수록곡 " 미인"을 대 히트시키며 1974년부터 1975년 중반까지의 1년을 강타한다.[31] 심지어 "미인"은 영화화 되어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음악영화로 개봉하게 된다. 당시 영화의 일부 영상. 지금봐도 드럼 비트가 보통 그루브한 게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기가 바로 10월 유신과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 애초부터 미운털이 박혀 있던지라 신중현과 엽전들은 당국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음반 수록곡이 금지곡에 묶여 방송이고 음반 판매고 모조리 막혀버린다(1975년 7월 12일). 비록 1975년 상반기를 강타했을지언정 그 다음이 막막한 상황이 된 것. 그렇게 음반이 규제당하는가 싶더니 지상파 방송에서도 복장 불량 및 퇴폐를 이유로 신중현에게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출연을 금지시키겠다"라는 통보가 날아온다. 그래서 신중현은 아예 1975년 10월에 발매한 신중현과 엽전들 2집에서는 정장에 넥타이 차림으로 앨범 커버에 등장한다.[32] 노래도 죄다 행진곡이나 군가풍의 노래로 채웠고 이게 신중현의 곡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쉽게 말하면 이 시기는 신중현이 아예 대놓고 대항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어김없이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도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말았다. 행진곡에 군가풍의 노래를 발매했는데도 금지곡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에서 이 음반의 의도와 당국의 시각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상황을 베이스 이남이가 생전 인터뷰에서 자켓사진에 대해서 "지금 왜놈들 다스리던 시대도 아니고 왜 억압하고 난리냐"라는 뜻으로 항의하는 의미에서 찍은 것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결국 신중현은 1975년 12월 5일,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당시 신중현은 대마초를 피우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중현의 이야기에 따르면 60년대 후반에 대마초를 경험해 본 바가 있고, 이에 따라 당시 주간지 선데이 서울에 "신중현의 해피 스모크 탐방기"라는 글도 기고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당시 대마초 흡연 혐의로 관계 당국에 불려가서 간단히 조사를 받고 약식기소가 되어 사건이 종결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무리하게 후에 개정된 마약 관련법으로 법 조항을 소급 적용하여 잡아넣은 것.[33]
이로 인해 신중현은 약 4개월간 감옥에서 썩게 된다.[34] 신중현의 장남 신대철의 증언에 따르면, 신중현은 그때 정보부에 끌려가서 물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과 더불어 연예인 협회에서 제명당한다. 당시에는 완전한 국가 통제하의 사회였기 때문에, 연예인 협회에 등록하지 않으면 아예 활동이 불가능했다. 심지어 야간에 나이트 클럽에서 공연하는 밴드들도 모두 관계 당국에 등록되어서 '무슨 공연을 하는지 관계 당국이 알고 있는' 나라였다. 등록이 취소되면 '비등록 밴드' 취급을 받게 되어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신중현의 수난은 신중현에게서만 끝나지 않았다. 차남 신윤철이 훗날 EBS 스페이스 공감 방송에 나와 이야기하길,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신윤철이는 약쟁이 신중현의 아들이니까 같이 놀지 마라." 며 대놓고 구박을 주었으며, 이때부터 신중현의 아들들은 학교에서 따돌림과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1978년 초, 신중현은 클럽 무대 출연 정도는 가능하도록 당국에 의해 다소 구제를 받았지만, 그 외의 음반 활동이나 방송 활동은 일절 할 수가 없었다. 10.26 사건 이후 서울의 봄이 올 때까지 긴 침묵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함께 활동 금지 조치를 받았던 다른 대다수의 가수들이 몇 개월 만에 곧바로 활동 금지 해제를 받았지만, 박정희가 죽은 1979년 10.26이 일어날 때까지 끝까지 전면적인 활동금지 조치가 풀리지 않았던 가수는 신중현과 조용필 단 두 명 뿐이었다.
2.6. 복권과 재기
여러 대표작이 1987년까지 방송 금지곡으로 묶여버리는 등 상당한 수난을 겪으면서 고생고생하면서 음악 생활을 하였지만, 신군부 집권 뒤 방송 금지 조치가 풀린 후에는 대세가 디스코와 댄스 음악으로 바뀌어 본격 록 음악 뮤지션으로서는 재기를 할 수 없었다. 대신 1980년 여성보컬 2명과 브라스를 포함한 9인조의 빅밴드인 "신중현과 뮤직파워"로 다시 등장해서 본인의 히트곡에 디스코 리듬을 가미해서 편곡한 독특한 앨범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2집에서는 신중현 본연의 실험적인 록사운드로 변모한 2집을 발표한다. 그 후 1983년 "신중현과 세 나그네"라는 본격 록밴드로 다시 등장했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 이 시기 이후 신중현은 작곡가로서만 활동을 하게 된다.작곡가로서 신중현의 마지막 대중적 히트곡은 1987년 댄스가수 김완선이 발매한 2집 타이틀곡이자 오늘날에도 본인의 대표곡으로 남은 '리듬 속의 그 춤을'이다. 참고로 이 곡 중간의 기타 솔로는 신대철이 연주했다. 김완선 측의 부탁으로 이 곡을 만들 결심을 한 신중현은, 당시 떠오르던 컴퓨터 음악을 직접 배워 이 곡에 도입하였다. 곡 초반 인트로의 빠른 비트는 일일이 찍어서 표현했다고. 이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록의 대부 소리 듣던 신중현도 새로운 조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2.7. 이후
1990년대 이후부턴 그가 살아온 업적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지만, 일부 음악인들과 평론가, 애호가 중심의 재평가라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2004년에는 영화 ’ 하류 인생(The raging years)’의 주제가도 불렀다.
2006년 12월 17일 은퇴 공연을 가졌다. 다만 방송 활동 은퇴이며 무대 은퇴는 아니다. 현재도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21세기 들어선 이미 록의 대부로 전설이 된 그이기에, 한국의 대중음악사에 관심이 많은 후배 음악인들이나 음악팬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0년에 록의 대부라는 명칭을 붙여 신중현을 헌정하는 CF가 나오기도 했다. 노래는 신중현의 명곡 미인이다. #
2022년에 TBS eFM에서는 그의 업적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영어 라디오 다큐멘터리 Shin Joong Huyn, The Heart and Soul of Modern Korean Music을 제작, 방송했다. 나레이션은 기타리스트 김세황이 담당했고 신윤철, 한상원, 이현석, 사토유키에 등이 출연했다.
2017년에 신중현 데뷔 60주년을 맞아 후배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며 존경을 표하는 트리뷰트 무대가 KBS 2TV '불후의 명곡'을 통해 방송되었다.
3. 저서
신중현, 『신중현 3/3 기타주법』, 열린길, 1995.신중현, 『신중현 ROCK』, 다나기획, 1999.
신중현, 『록의 代父 신중현』, 한국일보사, 2003.
신중현,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해토, 2006.
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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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장남인 신대철, 신중현, 차남인 신윤철, 삼남인 신석철이다. |
맏아들인 신대철은 거의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그룹인 시나위의 리더이자 세션 등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동도 다수 하였다.[36] 최근에는 2012년의 나는 가수다 2 출연을 계기로 시나위 미니 앨범을 내고 활동하다가 시나위 정규 10집을 준비하고 있다. 둘째인 신윤철은 원더버드 시절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리다 현재 막내인 신석철과 함께 서울전자음악단을 결성해 함께 활동하다가, 현재는 다른 멤버들을 구해서 서울전자음악단을 이끌고 있으며, 여러 프로젝트성 그룹을 결성하고 음악을 하는 중. 신석철 또한 최근 서울전자음악단 탈퇴 이후 여러 뮤지션의 드럼 세션 활동과 그루브 올스타즈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2년 말에는 신윤철과 신석철 그리고 송홍섭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인 카도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일반적인 뮤지션이나 연예인들이 본인이 성공한 경우에도, 자기 자식들이 음악을 하거나 연기를 하거나 하려할때 말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과 달리, 신중현은 아들들이 모두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해, (따로 엄청난 지원 같은 건 하지 않았어도) 반대를 전혀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 어린 시절의 신대철과 신윤철에게 직접 기타를 가르쳐 준 사람이 신중현이었다. 신대철의 말에 의하면, 신중현은 손자들도[37] 음악을 하길 은근히 바란다고 하며, 신대철 본인도 자식이 의지와 소질이 있으면 시킬 마음이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가족들 모두가 굉장히 과묵한 편으로 인터뷰라도 할라 치면 굉장히 느린 말투와 열박자 쉰 다음에 나오는 '...네... ''''아니오...' 정도의 단답형 대답만 하는지라 인터뷰어가 인터뷰를 진행하기가 굉장히 힘든 편이다. 김창완이나 배철수 같은 레전드급 뮤지션들이 3형제를 인터뷰하면서 굉장히 진땀 빼는 편. 말수가 없는 신대철이 형제 중에 가장 달변가에 수다스러운 편이라고 하니...[38]
신해철과는 혈연관계가 아니다.[39] 단지 신중현의 3남들처럼 평산 신씨 34세손 '澈' 항렬자를 쓸 뿐이다. 그러나 이름이 비슷한 인연으로 신대철이 신해철과도 친형제처럼 생각하여 친분을 유지하면서 지낸다는 말은 한 적이 있고, 실제로 신해철 본인도 신중현의 아들로 오해받은 해프닝을 방송에서 이야기한 적도 있다. PD가 뜬금없이 "아버지 잘 계시냐"라고 물어보고 그랬다고. 이에 신해철은 그 아버지가 신중현을 지칭하는 것을 알고서 "우리 아버지 아닙니다."라고 답했으나 PD는 그냥 웃으면서 어깨를 토닥거렸다고(?).[40]
5. 제작 / 참여 음반
1960년대 《히키신 기타 멜로디》
1964년 《빗속의 여인》 애드 훠
1968년 《펄시스터 특선집》 펄 시스터즈
1969년 《꽃잎, 봄비, 마음》 이정화
1969년 《늦기 전에》 김추자
1969년 영화 《푸른사과》 배경음악
1970년 《시원한 기타 경음악》
1971년 《신중현 SOUND》
1971년 《아니야》 김정미
1972년 《장현 and 더 맨》
1973년 《1973》 지연
1973년 《내곁에 있어주오》 윤용균
1973년 서유석
1973년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3집》 양희은
1973년 《간다고 하지 마오》 김정미
1973년 《now》 김정미
1973년 박광수
1974년 《후회》 김정미
1974년 《바람》 김정미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 1집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 2집
1975년 영화 《아이 러브 마마》 배경음악
1975년 《신중현과 엽전들 경음악》
1980년 《저무는 바닷가》 김추자
1980년 《김추자 80》
1980년 영화 《연인들》 배경음악 〈날 보러와요〉
1980년 신중현과 뮤직파워 1집
1981년 인순이
1982년 신중현과 뮤직파워 2집
1983년 《세나그네》
1984년 이문세
1987년 《신중현 87》
1987년 《리듬속의 그 춤을》 김완선
1988년 《그동안》
1989년 이경화
1990년 《빗속의 여인》
1994년 《무위자연》
1997년 《김삿갓》
2002년 《Body & Feel》
2005년 《도시학》
1964년 《빗속의 여인》 애드 훠
1968년 《펄시스터 특선집》 펄 시스터즈
1969년 《꽃잎, 봄비, 마음》 이정화
1969년 《늦기 전에》 김추자
1969년 영화 《푸른사과》 배경음악
1970년 《시원한 기타 경음악》
1971년 《신중현 SOUND》
1971년 《아니야》 김정미
1972년 《장현 and 더 맨》
1973년 《1973》 지연
1973년 《내곁에 있어주오》 윤용균
1973년 서유석
1973년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3집》 양희은
1973년 《간다고 하지 마오》 김정미
1973년 《now》 김정미
1973년 박광수
1974년 《후회》 김정미
1974년 《바람》 김정미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 1집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 2집
1975년 영화 《아이 러브 마마》 배경음악
1975년 《신중현과 엽전들 경음악》
1980년 《저무는 바닷가》 김추자
1980년 《김추자 80》
1980년 영화 《연인들》 배경음악 〈날 보러와요〉
1980년 신중현과 뮤직파워 1집
1981년 인순이
1982년 신중현과 뮤직파워 2집
1983년 《세나그네》
1984년 이문세
1987년 《신중현 87》
1987년 《리듬속의 그 춤을》 김완선
1988년 《그동안》
1989년 이경화
1990년 《빗속의 여인》
1994년 《무위자연》
1997년 《김삿갓》
2002년 《Body & Feel》
2005년 《도시학》
6. 펜더 기타의 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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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 헌정 기타를 수여받는 신중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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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 |
신중현이 받은 이 펜더사의 헌정 기타(Fender Custom Shop Tribute)는 자사의 최고급 악기들이 생산되는 펜더 커스텀 샵(Fender Custom Shop), 그 곳에서도 가장 뛰어난 장인으로 공인된 마스터 빌더 중 한 명인 데니스 갈루즈카(Dennis Galuszka)가 직접 해당 음악인의 특징들을 살려 단 한 대만 제작하였다. 이 트리뷰트 기타는 악기를 연주하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도장에 생긴 미세한 실금들이나 무대 공연, 스튜디오 레코딩 도중에 발생한 스크래치, 그 외 자잘한 흠집 하나하나까지 완벽히 복제하여 새 것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헌 레플리카를 만들어낸 것이며, 이렇게 제작 과정에서 디자인이나 낡아보이는 외형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흠집을 보통은 렐릭(Relic)이라고 한다.
이런 펜더 커스텀 샵의 아티스트 레플리카 악기들은 그 아티스트의 팬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아티스트와 계약 후 복제, 대량생산하여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신중현의 경우엔 그런 비즈니스적인 부분 없이 순수하게 펜더 측에서 헌정의 의미로 단 한 대만을 제작하여 본인에게 준 것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신중현이 이 악기를 받은 2009년 당시 이 트리뷰트 기타를 받은 아티스트는 전 세계에 단 5명[41]밖에 없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아시아인 최초이자 한국인 최초로 이뤄낸 성과이니 정말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이런 마스터 빌더가 만든 악기들은 일단은 개인도 구입할 수는 있다. 다만 대략적인 가격이.. 해당 페이지에서 직접 확인해보자.
이러한 성과 덕분인지 미국에서 그의 음악이 리마스터링되어 발매되기도 했다. #
7. 여담
- 펜더사에서 헌정 기타를 받은 것과는 별개로 엄청난 펜더 기타 마니아이기도 하다. 특히 수십여 대를 보유하고 있는 스트라토캐스터 컬렉션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 젊은 시절부터 모아와서 단종된 기종도 있고 하니 전부 합치면 엄청난 가치가 있을 듯하다. 안타까운 건 과거 젊은 시절 부침이 있어 더 많이 못 모았다고. 하나만 고집하기 보다는 노래의 성격에 따라 1962년형 모델을 쓰는 등 여러 가지 다른 모델을 골라 연주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컬렉션 덕에 아들인 신대철이나 신윤철 등은 집에 굴러다니는 펜더[42][43]로 기타를 배웠다고 한다.
- 앨범 <신중현과 엽전들>이 가슴네트워크 선정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었다.
- 대중음악 전문지 '대중음악 사운드(SOUND)' 3호에서 최고의 작곡가 10인 중 1등으로 선정되었으며, 동시에 최고의 기타리스트 10인 중에서도 1등으로 선정되었다.
[1]
데뷔 초에 사용했다.
[2]
평산 신씨 33세손 현○(鉉○) 항렬이지만, 항렬자를 끝에 썼다.
[3]
2017년 수여.
#
[4]
다만, 이는 본명이 아니다. 밑에서 설명하겠지만 신중현의 모친은 일본인으로서 당연히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신중현 본인조차도 본명을 잊어버렸는지 일절 언급한 적이 없다.
[5]
방송 활동은 2006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6]
2006년 6월 29일 방송
콘서트 7080 내 인터뷰 中.
[7]
가창력이 엄청 뛰어난 타입은 아니라, 오늘날 신중현은 그가 작사, 작곡한 많은 곡들과 기타리스트로 더 알려져있다.
[8]
사실 신중현의 음악 커리어를 생각해보면 단순히 록 음악만 한 게 아니라 여러 대중음악 스타일의 곡들을 써내려갔고 히트도 시키는 등, 초창기의 한국 대중음악 자체를 발전시킨 공로가 커서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로 칭송해도 부족하지가 않다.
#
# 예컨대 대표적인 신중현 키드
김추자에게 준 혁신적인 곡들은 록 장르가 아니지만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고 있었다.
[9]
출생지가 서울 중구 신당동이라는 기사도 있다.
[10]
중국의 라디오 전파가 꽤 강력해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의 라디오 방송이 국내에서 잘 잡혔다고 한다. 이는 2차대전 연합국의 유산으로, 대일본 선전전을 위해 미국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중국 땅에서 무지막지한 출력으로 AM과 단파방송을 쏴댔기 때문이다.
여운형도 광복 이전인 1945년 8월 11일에 이미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기미가 보인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던 게 이 때문이었다.
[11]
신중현이 서라벌고등학교를 다녔던 것은 맞는듯 하다. 하지만 문제는 서라벌고의 개교년도가 1956년이라는 것이다. 2학년 중퇴라고 하는데 그럼 1회 입학생이라고 해도 1957년이라는 의미가 된다. 사실 30년 전만 해도 그의 생년은
1943년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중현의 여러 인터뷰를 종합해보면 조금씩 어긋나서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물론 당시 나이와 일치하지 않는 학번은 흔한 일이었고 오늘날 와서 신중현에게 학력을 논하는 것도 별 의미는 없지만 연구자들에겐 걸리는 부분이긴 하다.
[12]
그 당시엔 빅밴드 시대라 무대 위에 연주자들이 우르르 많이 올라가던 시절이라서 거기서 한 명이 더 올라가거나 덜 올라가더라도 큰 표가 안 나던 시절이었다.(...) 뮤지션 지망생 신참도 한쪽 구석에 올라가 큰 부담 없이 참여해서 연습하고 실력을 기르기엔 좋은 환경이었던 것.
[13]
미8군 연예단 기타리스트로서의 정식 이름은 '히키 신'이었지만, 실제 공연 무대에서는 보다 친근한 느낌의 '재키'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14]
사실 이건 한국 뿐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도 비슷했다. 그나마 대략
브리티시 인베이전 시기부터 록음악의 표현 방식과 개성이 다양해지면서
밥 딜런이나
루 리드 같이 객관적인 실력은 평범하거나 이하지만 표현력에서 강점이 있는 보컬들도 많이 인정받는 등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15]
신중현이 비록 전형적인 교과서급 보컬리스트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다른 악기 소리와 맞물려 노래로 곡을 완성하는 측면으론 단순히 노래만 잘하는 어지간한 가수들보단 훨씬 뛰어나게 부른다. 그래서인지 신중현이 직접 연주하고 노래한 곡들은 신중현이 부르지 않으면 원곡의 맛이 잘 살지 않는다.
[16]
여담으로, 이즈음 이화여대 음대 교수 이교숙 선생에게 인생 최초이자 최후의 음악 이론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이교숙 선생은 해군군악대장 출신으로서, 해군 군악장교 신분으로 미해군 군악학교에 유학하여 하프와 재즈 빅밴드 편성에 관한 체계적 이론을 최초로 국내에 도입한 인물이다.
[17]
여담이지만 이 당시 드러머가 현재 유튜브에서 인기를 얻은 코리안 드러머 Add-K의 권순근이다.
해당 영상
[18]
참고로 해당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전곡이 자작곡으로 구성된 정규음반이다.
[19]
참고로 세계적인 록밴드 열풍의 주역이자 선구자격인
비틀즈의 정식 레코드 데뷰는 싱글 'Love me do'를 발표한 1962년이고, 앨범 데뷰는 1집 'Please Please Me'를 발표한 1963년이다. 물론 비틀즈라는 밴드의 결성 자체는 1950년대이고, 스쿨밴드 시기를 거쳐 1959년부터 리버풀과 함부르크를 오가며 클럽 라이브 공연 활동을 해왔었다.
[20]
물론 키보이스의 작업도 훌륭했지만 신중현은 민요 등 한국의 전통음악에 훨씬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뿌리 자체가 좀 다르다.
[21]
지금의 트로트와 다르다. 가사만 한국어이고, 곡은 그냥 엔카였다. 예외가 있기는 했으나 드물었다.
[22]
당시 미8군 부대 공연을 통해 성장한 가수들이
패티 김, 쟈니 리,
현미,
윤복희 등인데, 이들의 당시 음원을 들어보면 오히려
재즈나 스탠다드 팝 시대의 창법과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정통 스탠다드 팝 음악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 번 탈색되고 현지화된 곡들을 취입하고 나서야 가능했다.
[23]
물론 훗날 신중현 사단이 인기를 끈 이후에는 이 곡도 재발표되어 뒤늦게 인기를 얻게 된다.
[24]
재즈가 무언지 아는 사람은 많아도 실제로는 듣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일부 골수 애호층이 있을 뿐이었다. 2020년대에도 초 마이너 장르이며 단 한 번도 재즈 밴드가 공중파 음악 방송에서 1위를 한 일이 없다.
[25]
현재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이게 맞다.
[26]
장미화는 신중현의 밴드 'Add4'의 여성 객원 보컬로 활동하기도 했다.
[27]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 히피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한대수였다.
[28]
재미있는 것은 1970년대 초 마약법을 비롯한 관련 법안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대마초는 규제 법안이 없는 상태였다.
# 대마초가 문제가 된 것은 1966년 경부터인데, 이 당시에는 환각 물질이 있다고 여겨진
인도산 대마의 성분이 한국산 대마에도 있다 하여 문제가 된 것. 그러다가
10월 유신이 선포된 뒤에는 박정희의 직접적인 지시로
최고 사형까지 구형할 수 있게 했다. 이전까지는 단순 투약자는 그냥 벌금형으로 서구권의 방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 "공산주의와 싸워야 할 이 중요한 시기에 젊은이들이 대마초나 피우고..."
[29]
이러한 박정희의 정책은
새마을 운동-새마음 운동으로 테크트리를 타게 된다.
[30]
게다가 그 당시 10분짜리 대곡이었다.
[31]
당시 베이시스트 이남이의 생전 인터뷰를 보면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좋아할 수가 있나 싶었다"라고 말할 정도.
[32]
충격과 공포의 2집 재킷을 볼 수 있는 곳.
#
[33]
이 시기에 워낙 많은 숫자의 가수, 밴드, 작곡가가 대마초 관련 법으로 잡혀 들어갔고 이를 두고 현대사 연구가 중 일각에서는 1975년의 가요대학살이라고 부른다. 국가권력이 직접 나서서 문화 정화를 명분으로 당시 국민 총동원에 방해가 되는 대중문화를 때려잡은 것. 이 피해자 중에서는
조용필도 포함된다. 조용필 역시 잡혀간 시점보다 수년 전인 미군 부대 내 공연단 시절에 미군의 유혹으로 몇번 피웠다가 알레르기 증상이 나서 완전히 끊어버려 다시는 한번도 피운 적이 없는데, 그냥 남산으로 잡아갔다. 거기서 검사 후 당연히 몸에서 대마초 성분이 전혀 안 나왔지만 그냥 계속 고문을 해버렸고, 이후 강요하여 강제 은퇴시켜버렸다. 조용필은 전두환이 새 쿠데타를 일으킬 때까지 대중가요 활동을 못하게 된다.
[34]
신윤철이 이끌었던 서울 전자 음악단의 2집에 실린 첫 곡인 '고양이의 고향 노래' 가사는 이 시절 아들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편린을 찾아볼 수 있다.
[35]
1940년생으로
2018년
3월 23일에 별세 하였다.
[36]
국민 할매
김태원이 방송활동을 한창 많이 할때, 과거 자랑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 자주 언급했던 "고등학교 때 서울에서 기타하면 강북의 김태원, 강남의 신대철이었지"라고 했던 그 강남의 신대철이 바로 이 신대철이다.
[37]
즉 신대철 형제들의 자식들
[38]
실제로
신대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3형제 중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을 뿐더러 2010년대 들어서는 방송 출연도 잦아져서 대중과 많이 소통하는 편이다.
[39]
신해철도
평산 신씨기는 하나 실제 신해철과 혈연관계가 있는 쪽은
서태지이다. 서태지의 어머니가 신해철의 어머니와 친척이라 둘이 6촌 지간이다. 서태지는 신대철의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데뷔했다.
[40]
신해철의 아버지는 약사였다.
[41]
제프 벡,
잉베이 말름스틴,
스티비 레이 본,
에릭 클랩튼,
에디 밴 헤일런으로 다들
록 음악을 좋아하거나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한다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전설적인 아티스트들이다.
[42]
신윤철이 쓰는 1982년식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또한 신중현이 앨범 녹음을 마치고 신윤철이 중학생일 때 물려준 악기라고 한다.
[43]
김종서가
시나위 시절
신대철 집에 놀러가면 펜더 같은 고가의 기타가 막 굴러다니는 점에 상당히 놀랐고, 중, 고등학생이던 신대철의 동생 신윤철이나 신석철 등이
잉베이 말름스틴의 노래 등을 카피하는 걸 보고 또 한 번 놀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