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20:21:11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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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3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
金永南|Kim Yong Nam
파일:3DB83863-54E3-4C69-A128-A5D33CBA4002.jpg
<colbgcolor=#024fa2> 초명 김명삼(金明參)
출생 1928년 2월 4일 ([age(1928-02-04)]세)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시)
본관 전주 김씨
가족 부인, 아들 김동호, 장녀, 차녀
학력 모스크바대학 (외교학 / 중퇴)
김일성종합대학 (외교학 / 학사)
신체 180cm[1]
수훈 김일성훈장 (1982)
김정일훈장 (2012)
로력영웅 (1998)
소속 정당

선거구 평양시 락랑구역 락랑선거구 (제47호)

1. 개요2. 생애
2.1. 당 국제부 소속2.2. 외교부장 겸 부총리2.3.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2.4. 은퇴
3. 경력4. 여담

[clearfix]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외교관이며 현재는 북한 원로간부의 상징.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친 김씨 왕조를 보좌해 온 충신 중의 충신이자 북한 입장에선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정치인의 표본인 인물이다.

1998년부터 2019년까지 무려 21년 동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2010년 9월부터 2019년 4월까지 근 10년간 정치국 상무위원, 1978년부터 2019년까지 무려 41년간 정치국 위원을 지냈는데 이는 1974년부터 2011년까지 37년간 정치국 위원을 지낸 김정일보다 오랜 기간이다. 즉 북한의 상징적 국가원수였지만, 2009년 김정일 헌법의 도입으로 국방위원장이 국가원수로 승격됨에 따라 국가원수에서 물러났다.[2] 그러나 한국의 언론에서는 김영남을 여전히 헌법상 국가수반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외국 대사들의 신임장이 김정은이 아닌 김영남 명의로 발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김정은이 직접 가기 뭐한 외국 인사[3]와의 회담 같은 경우에는 김영남을 보내는 등 얼굴마담으로 써먹었다. 김정은이 국무위원장 제도를 통해서 국가원수 직함을 확실히 장악한 이상 한동안 김영남은 북한의 마지막 상징적 국가원수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2. 생애

김영남은 1928년 2월 4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김택세(金擇世)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적지는 평안북도 구성군(現 구성시)이다. 일부 자료에서는 김영남이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관전현(寬甸縣) 진강진(振江鎭) 서강촌(西江村)[4] 출신이라고 하는데, 한국어 위키백과를 제외한 대부분의 문헌에는 평양 출신으로 등재되어 있다. 일부 북한 관련 기관에서는 혈연적으로 김일성계에 속하는 김일성 일가의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5]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가족들은 8.15 광복 직전 만주국 빈강성(濱江省) 목란현(木蘭縣)[6]으로 이주했고, 중일전쟁 종전 후에는 쑹장성(松江省) 상즈현(尙志縣)[7]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송강성립 상지초급조선중학교를 졸업했다.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정부의 '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을 지원해 집안을 보전하고 나라를 지키자)'이라는 호소에 호응해 그 해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에 입대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신분으로 6.25 전쟁에 참가했다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자 북한에 잔류했다. 1954년 1월 그는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해에 중국으로 귀국했다. 이후 1950년대 중반 가족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재차 귀환했다. #

2.1. 당 국제부 소속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죽 관료, 주로 외교 계통에서 일해왔다.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과장으로 출발하여 1960년에는 국제부 부부장, 1962년 11월, 외무성 부상,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1971년 국제부 제1부부장으로 승진, 1972년 후반, 김동규의 후임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으로 승승장구한다. 1974년 11월, 국제비서 자리는 유지하고 있던 김동규가 부주석으로 조동되면서 후임 조선로동당 국제비서 겸 국제부장에 임명되어 김일성의 지근거리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연설문 작성능력이 뛰어나 김일성의 연설문의 초안을 담당했고, 이로 인해 김일성의 신임을 얻어 1978년 9월,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한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확인이 된 것이 9월이므로 승진은 더 빠른 시점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국제비서, 국제부장에 재선되었다.

2.2. 외교부장 겸 부총리

파일:123666_61711_331.jpg
외교부 부장(외무상) 겸 정무원 부총리 시절 사진.

국제부장으로 재임하던 중 아웅산 테러의 실패로 대남비서 김중린이 경질되자 부총리 겸 외교부장 허담이 새 대남비서로 이동함에 따라 1983년 12월 2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허담의 뒤를 이어 후임 부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조동되었다. 추가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겸하였다. 그러나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만만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국제부의 터줏대감으로 군림하다가 말안듣는 3세계 국가들을 담당하는 외교부장으로 조동되는 점에 대해서 상당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허담의 아내 김정숙도 빡센 대남비서에 자기 남편이 임명됐다는 소식에 분개했다. 유일하게 기뻐한 것은 국제비서로 벼락출세한 김용순이었으나 김용순은 오진우에게도 술에 취해서 반말하는 등 김정일을 등에 업고 너무 나대다가 얼마 안가서 혁명화에 처해지게 된다.

재임기간 동안 서울올림픽 유치 방해공작 및 보이콧을 위해 북한의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했으나,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의 일화가 상당히 눈물나는데, 김영남은 북한 외교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를 설득해 소련의 서울 올림픽 보이콧을 유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면서 좀처럼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김영남은 아예 성과를 이룰 때 까지 북한 외교관들이 식사를 못하게 하는 배수진을 치고 말았다. 하지만 북한 외교관들도 사람인지라 배고픈 나머지 몰래 밥을 얻어 먹다가 결국 김영남에게 걸려들고 말았다. 그러자 김영남은 "야이 새끼들아, 지금 이런 상황에서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냐?"라며 불같이 날뛰었다고 한다. 당시 김영남의 똥꼬쇼는 가히 눈물 겨운 수준인데 동독을 방문해서 호네커에게도 서울 올림픽에 참석하지 말라고 빌었지만 호네커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 정치국이 결정할 일이라고 돌려서 거절했고, 아프리카 순방을 갔을 때는 대부분 대놓고 거절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들이 참가해서 그곳에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줄 것이니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는 대답까지 돌아와서 흥분한 김영남이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는 이 깜둥이들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욕설을 퍼붓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그를 수행한 고영환은 그나마 북한을 이 정도라도 대접해주는건 이 '깜둥이'들 뿐이라고 어이 없어 했다고. 마다가스카르를 비롯해서 일부 국가가 보이콧에 동참했는데 그 대가로 많은 북한의 원조를 뜯어내서 전혀 수지가 맞지 않는 낭비에 불과했다.

김일성 사후에는 이집트-한국 수교를 저지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무바라크 정부는 북한에 대해서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여기에 한국이 북한이 이란에 스커드 미사일을 공급하고 있다고 이집트 정보부에 일러바치는 공작을 적절히 취한 결과 1995년에 한국-이집트 대사급 수교가 성사되었다. 이제 김영남은 주북 이집트 대사를 초치하여 눈물을 흘리며 항의했지만 그래봤자 이집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김영남이 엉엉 울었단 정보까지 한국에 전달해주었다.(...)

2.3.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일성 사망후 김정일이 집권하여 김정일 체제가 좀 안정화된 1998년에 개최된 10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일성 헌법 채택을 통한 국가주석직 폐지, 국방위원회 설치 등 대격변이 일어난다.

이때 김영남은 외무상으로 개편된 외교부장직에서 마침내 내려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2019년까지 역임하였는데, 국가주석직이 폐지됨에 따라 1998년부터 김정일 헌법이 통과되는 2009년까지 북한의 형식상 국가 수반의 지위를 누렸다. 이는 김정일이 정권 안정화를 위해 자신이 당수 총비서 겸 군 통수권자인 국방위원장에 올라 권력을 집중하면서도 국가수반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정부수반은 내각 총리에게 위임하는 형식으로 표면적인 권력을 분산하였기 때문이었다.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지만, 어쨌거나 헌법상 국가원수였고 김정일과 상호존칭을 쓰며 대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2009년 헌법 개정 이후에도 수령을 귀찮게 만들 친선 외교는 오랫동안 김영남이 전담하였다.

그러다가 2009년 화폐개혁으로 나라가 결딴날 판에 처하자, 뇌졸중으로 죽어가던 김정일은 아들 김정은의 후계자 자리를 굳혀주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뛰어다니게 된다. 우선 화폐개혁을 지휘한 박남기를 희생양으로 삼아 총살시키고 내각 총리 김영일을 숙청하였으며, 김일성의 책임서기[8]를 지낸 평양시 책임비서 최영림을 새로운 내각 총리에 임명하는 한편, 선군정치로 인해 사실상 유명무실해져 있던 당정치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가 개최되면서 김영남은 조명록, 최영림, 리영호와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2019년 정치에서 은퇴할 때까지 이후 상무위원직을 유지한다. 수령에게 죽기살기로 충성해도 실수로 삐끗하거나 수령의 똥치우기 희생양으로 끝장나는 불쌍한 북한 엘리트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3대에 걸쳐 김씨왕조에서 최고위직을 유지하고 있는 이 양반의 처신은 가히 소름 돋을 따름이다. 김영남은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하여, 북한에서 공직 생활하다 보면 으레 겪게 마련인 가벼운 철직('해임'의 북한식 표현)이 한 번도 없는 걸로 알려져 있다. Don Oberdorfer[9]의 '두 개의 한국'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북한 외교관이자 김일성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남한으로 망명 고영환은 김영남을 북한 관리의 전형이라 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김일성이 벽을 가리키며 '저것은 문이다'라고 한다면 김영남은 그 말을 믿고 기어이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가려 할 것이다" 또한 북한엔 이런 농담도 있다. 김영남 그 사람은 지문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하도 손을 비비며 3대에 걸쳐 아부를 하느라...

북한 내에서도 매우 똑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10]뿐만 아니라 외교관 출신이기 때문에 북한의 주요 우방국 언어인 중국어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영어, 독일어에 능통하다.[11]사적으로는 따뜻하며, 당원들을 보듬어 주는 성격이나 업무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냉철하다고 한다. 그리고 정치국 위원 겸 비서라는 엄청난 지위에 있다 보니까 인사권, 책벌권 등 조직 관련한 권한이 있었지만 자신이 그런 권한을 썼다간 아첨꾼들이 자신 주변에 몰려들어 싫어도 세력이 형성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이런 권한을 절대로 쓰지 않고 묵묵히 시키는 일만 했다고 한다. 그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한 양형섭의 경우, 70년대 후반에 지도부에서 밀려나 학문과 상징적인 업무만 맡던 적도 있고, 김정은 시대에 영국 통신사 APTN과 외무성에서 준 원고대로 트럼프와 대화할 수 있다는 원론적 답변을 했다가 APTN이 이를 김정은이 트럼프와 만나겠다는 의도로 보도하는 바람에 김정은에게 그 늙은이가 뭔데 미국과 대화하니 마니 떠든단 말이냐고 욕을 한사발 먹은 적이 있는 반면 김영남은 말조심이 철저했다고 한다. 가령 켈리 방북으로 제네바 체제가 붕괴되던 당시에 통일부 장관 정세현이 방북하여 김영남에게 로동신문에 보도될만한 것 말고 개인적 의견을 좀 들려달라고 거듭 부탁했지만 발언 요강에 없는 말은 한마디도 안했다고 한다.

2011년 김정일 사망 당시에는 추도사를 그가 낭독했다. 온건파적인 성향이 있기 때문에 김정은 이후에는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장성택의 비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영남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가 권력의 외곽으로 밀려나갔다고는 절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등에서는 그의 드문 공식석상 출현에 그가 나이 때문에 은퇴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했지만 2014년에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도 건재함을 과시했다. 8월 30일에는 평양에서 열린 국제레슬링대회 개막식에 참가한 일본 국회의원 안토니오 이노키와 만나 현안문제를 놓고 회담을 진행, '얼굴마담'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

2017년 2월 15일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생일인 ' 광명성절'을 하루 앞둔 15일인 '탄생 74돌 경축 중앙보고대회에서 김영남은 보고에서 "지구관측위성 광명성 4호의 성과적 발사는 최대의 민족적 명절인 광명성절을 더욱 빛나게 장식하고 있다"며 "우리 군대와 인민은 경애하는 김정일 동지의 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빛내어 갈 맹세를 굳게 다지고 있다"고 밝혔다. 즉 여전히 현역임을 과시하였다.

2018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된 지 어언 20주년을 맞았지만 2018년 이후부터는 북한이 핵실험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상당한 제재를 받게 되면서 김영남도 함부로 해외에 국가대표 자격으로 나가긴 힘들어질 듯하다. 하지만 국가 대 국가가 아닌 비동맹회의 같은 단체 회의나 국제 스포츠 행사 같은 경우에는 본인 체력이 된다면 계속 참석할 가능성도 있다.[12]

평창 동계올림픽에 오는 북한의 고위급 사절단 단장으로 선정되었다. 김정은을 제외하면 명목상 가장 높은 사람이 온다고 하니 신경은 쓴 모양이다. 첫 방남[13]이다. 미국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오는 만큼 미국과 협상을 원하는 북한에서 급이 맞고 제재 대상에서 제외된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보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14]

막상 대표단에 김정은의 친동생 김여정이 포함되면서 화제는 모두 김여정이 가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외교 라인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양가 있는 대화는 가능할 듯했으며, 개막식 준비 리셉션 헤드테이블에 배석할 정도로 공을 들였지만 정작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노골적으로 북한과 동선이 닿지 않게 하라는 요청을 했고, 리셉션에서도 김영남과 눈도 안 마주치고 가버리는 외교적 결례 수준의 무시까지 하면서 김영남은 미국 측 인사와 접촉조차 못한 것이다.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6화에 펜스에게 무시당한 김영남의 표정이 나오는데 출연한 정세현 장관의 말로는 얼굴이 벌게져 겨우 화를 억누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결국 개막식 김여정, 김영남의 방남은 펜스의 패싱으로 소득 없이 끝난 셈.
9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70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로 동안인데다 상당히 건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영남은 북한의 다른 간부들과 달리 오래전부터 건강식에 관심이 많아 기름진 음식이나 을 멀리하고 평소에 운동을 하는 등 건강과 체력 관리를 체계적으로 해 왔다고 한다. 이러한 건강 관리로 그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이르는 동안 요직에 있었으며, 다른 고위급 관리들이 고혈압, 당뇨병, 비만 성인병을 앓는 것과 매우 대조된다. 이러한 일면은 철저한 자기관리의 일환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탈모만은 못 피했다.(...)

방남 당시 만 90세인데도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심지어는 흡연자임도 인증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차가 준비될 때까지 5분간 기다려야 한다는 전달을 받자 담배 좀 피울까 하는 말을 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해서 김여정과 함께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선수단 입장 때 남북 공동입장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포착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북한 공연을 보면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반면 같은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의원은 김영남의 눈물에 대해 위의 분석과는 달리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한 정통 공산주의자인 김영남이 인생의 늘그막에 남한을 방문하고 발전된 모습을 목격한 후 정통 공산주의자로써 공산주의 이론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3대 세습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데서의 서글픔, 3대 세습이라는 무리수를 둬가면서도 극도의 후진성을 면치못하는 북한의 현실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라고 해석하였다. #

권력의 실질적 크기의 여부와 관련 없이 북한 내에서 의전 서열 공식 2위로 대우받았다. 판문점 회담 때는 과거 김정일이 타고 다니던 구형 벤츠 리무진을 타고 나타났으며, 김정은의 차량 바로 뒤를 따랐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에도 참석차 러시아를 방문하였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도 파견될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의외로 리룡남 부총리를 파견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헌법 개정을 통해서 법적인 국가원수의 지위를 지향하는 모습이 포착되고, 외무성이 각국에 앞으로 서신을 김영남이 아니라 김정은 앞으로 직접 보내라고 하는 등 점점 얼굴마담으로의 역할이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더니...

2.4. 은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소환,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직을 최룡해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정정해 보였으나 역시 90세가 넘는 탓에 평창 올림픽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 만일 사망할 경우 북한 입장에서 김씨 왕조 3대를 보좌한 역사의 산 증인인 만큼 이변이 없는 한 대규모 추모식이 열릴 것으로 예상되며 당연히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묻힐 것이다.

은퇴 직후인 2019년 12월 7일, 양덕온천문화휴양지 준공식에 초대된 것을 시작으로 각종 주요 행사에 초대되었는데, 2020년 10월, 조선로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과 군중시위에도 참석했으며 2021년 1월, 8차 당대회 기념 열병식과 조선로동당 제8차대회경축 대공연 《당을 노래하노라》등에 고개를 내밀었다. 2021년 정권창립 기념 열병식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동안이었던 현직 시절과 달리 하얗게 머리가 세어 버린 채 등장했다.[15] 2022년 정권수립 74주년 기념행사에 최영림, 박봉주, 리명수, 최태복, 김경옥, 박재경, 황병서, 김정각과 함께 초대받았다. 9월 9일에 열린 전국도대항군중체육대회-2022 결승경기에 참석했으며 같은 날에 열린 경축연회에도 다른 노간부들과 함께 초대받았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거동이 불편한지 혼자서는 운신을 하지 못하고 부축을 해주는 청년들에게 거의 실려가는 수준이었다. 2023년 7월 27일, 노간부 자격으로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돌경축 대공연 및 기념보고회에 참석했으며 열병식에도 초대받았다. 한달 후인 9.9절 열병식과 공화국 창건 75주년 경축 중앙보고대회에서도 노간부 자격으로 초대받았다.

2024년 7월 8일, 김일성 30주기 추도식에도 박봉주, 김정각, 태종수, 리명수, 박재경 등과 함께 참석했다. 추모음악회를 관람했는데 퇴장할 때 손자로 보이는 인물의 부축을 받고 지팡이를 짚고 걸었는데, 96세의 나이를 고려하면 상당히 정정한 편이지만 상술한 것처럼 2021년과 마찬가지로 머리카락도 완전히 백발이 되었고, 3년 전에 비해서도 더 많이 수척해졌으며 정신이나 시각, 청각 등이 온전치 않은 듯 상당히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겨우(?) 87세에 김정은도 못알아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현철해와 달리 이쪽은 96세 생일을 넘겼는데도 김정은을 알아보기는 했는지 웃으면서 포옹하고 담소하며 기념사진을 같이 찍었다. #

3.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로동당 5기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74년 1978년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조선로동당 5,6기 중앙위원회 국제비서
1974년 11월 1983년 12월 1일 6기 8중전회에서 외교부장으로 조동
조선로동당 5기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1978년 1980년 10월 14일 6차 당대회에서 직함 개편
조선로동당 6, 7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1980년 10월 14일 2019년 4월 10일 6차 당대회에서 선출
3차 당대표자회에서 재선
7차 당대회에서 재선
정무원 외교부장
1983년 12월 28일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조동
정무원 부총리
1983년 12월 28일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조동
10, 11, 12, 13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98년 9월 5일 2019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은퇴
조선로동당 6,7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2010년 9월 28일 2019년 4월 10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7차 당대회에서 재선
7기 4중전회에서 은퇴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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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출생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굉장히 큰 편이다. 180cm라는 정보가 있지만 현재 고령이라 약간 키가 줄어든 듯, 170cm근처의 문재인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170cm대 후반으로 보인다.

1978년 베이징대학에서 중국통사 과목을 들은적 있는데, "지금 남조선 북조선보다 잘 사는데 어찌된 영문인가?"[16]라는 조선족의 질문에 "세상에 ‘ 남조선’, ‘북조선’이란 나라 이름이 없는데 무슨 말을 하나?"라며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말을 하려면 바로 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반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반부보다… 이렇게 말해야 맞다"라고 시정해주고 이내 "그건 도대체 어떤 돼먹지 못한 선전기관에서 내놓은 관점인가?"라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6.25 전쟁과 관련해서도 많이 싸웠다고 한다. # 다만 당시 김영남은 이미 정치국 위원, 당 국제비서 겸 국제부장으로 그가 중국에 방문한다면 바로 정부요인들이 영접나와야 할 거물인데 신분을 숨기고 중국에서 학업을 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동명이인인 1등 서기관 김영남과 혼동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한국의 보수 성향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은 핵을 만들 의지도 능력도 없다"고 발언했다고 알려졌지만, 그 말을 실제로 한 사람은 김영남이다. 정확히는 1991년 6월 21일 워싱턴 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발언을 했다. #

2000년 9월, 미국을 방문하려다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과도한 보안검색에 반발해서 일정을 전면취소하고 귀국한 사건이 있다. 2000년 프랑크푸르트 공항 사건 문서 참조.

건강 이외에도 다른 간부들은 자녀들을 내세우며 자신의 권력을 대놓고 대물림하고[17], 자식들끼리 권력 투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김영남의 가족은 국제 기구에 부인을 대동한 것과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했을 당시 이희호 여사와 동행하여 같이 공연을 관람한 것 이외에는 공개된 바가 없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튀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부터 이렇게 장수하는 2인자는 본인 능력도 출중해야 하지만, 자기 의견이 없이 무색무취하고 모든 사람과 인간관계가 원만하며, 위기상황에서도 잘 피해나가는 사람이 많다.[18]이런 인물은 북한이 아니라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관료생활을 했어도 그 정도로 올라갔을 것이다. 여러 모로 2인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인물.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 행사에서 연설을 했는데 내용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김씨왕조의 절대적인 추종자로서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19] #

고영환의 회고에 따르면, 김영남 본인은 사고를 친 적이 없지만 김영남의 아들(1964년생 추정)은 1987년,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던 중, 내기 트럼프[20]를 치다가 판돈이 다 떨어지자 여자들을 데리고 와서 벗기는 변태적 게임[21]을 하다가 걸린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김영남의 아들이나 그 친구들이나 다 당 거물들의 아들들이라서 오히려 뻗대고 있었는데, 대학 분위기가 고위 간부 아들이라고 이런 식으로 봐주는게 어딨냐는 식으로 불만이 폭발하는 바람에 너무 심각해져서 결국 김일성종합대학 당위원회 긴급회의가 소집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영남이 아들을 발가벗기고 다음날 등교도 못할 정도로 가죽 벨트로 두들겨팼다고 한다. 결국 김정일에게까지 보고가 들어가서 본보기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는데, 6개월 후에 풀려나서 복학되었다고 한다.

태영호 의원이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김영남의 아들 이름은 김동호이며 태영호 의원의 베스트프렌드라고. 현재 태영호 의원이 아내인 오혜선 씨를 만나게 된 것도, 친구인 동호가 주선한 소개팅 덕택이라고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밝힌 바 있다.


[1] 다만 현재는 고령이라서 키가 170대 중반 정도로 줄었지만, 그래도 북한 남성의 평균적인 신장에 비해 훤칠하다. [2] 소련도 헌법상 국가원수는 소련 최고회의 의장이나 실질적인 최고권력자는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임기 당시에는 이게 안 맞는다 싶었는지 다 갈아엎고 국가주석을 뜻하는 소련 대통령직을 신설했지만 이미 소련 붕괴 직전의 상황이었다. 오늘날 중국 베트남도 마찬가지인데, 중국도 헌법상 국가원수가 국가주석이지만 실권자는 군 통수권을 가진 중앙군사위 주석이고 베트남도 국가주석이 헌법상 국가원수지만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가 실권자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주석의 권한이 아예 없지는 않다. 국가주석은 국방, 외교 같은 외정을 담당하며 엄연히 국가원수로서 권한을 행사한다. 총리는 내정을 담당한다. 그러나 국가주석, 총리, 국회의장, 정부 각료들도 공산당원이기 때문에 공산당원의 우두머리, 총비서가 실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예를 들어 북한과 수교국이지만 친밀하지는 않은 나라의 정부 특사나 대통령 등. [4]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주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 전장진(振江鎭) 시장촌(西江村). [5] 하술하겠지만, 김영남은 공직 생활 간 단 한 번도 격랑을 겪지 않았다. 그의 출신 성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김일성 사촌인 김창주, 김봉주, 강현수 등도 다 부침을 겪은거 보면 먼 친척인 정도로 김영남이 득을 봤다는 주장은 황당한 것이고 그냥 김영남 본인의 처신 + 운으로 봐야 한다. [6]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무란현(木蘭縣). [7]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상즈시(尙志市). [8] 책임서기는 우리로 치면 수석비서관 정도에 해당되는 직책이다. [9] 미 존스홉킨스 대학 교수 [10] 그런 곳에서 수십 년을 권력자로 징계 한 번 안 당했다. [11] 따지고보면 독일어도 원래는 우방국 언어였다. [12] 2018년 후반에 장거리 비행해야 하는 쿠바, 베네수엘라, 멕시코 등을 방문하는걸 보면 아직 정정한 듯. 일단 이 세 나라는 미국과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그나마 꺼리지 않고 방문하는 모양이다. [13]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은퇴할 시기가 점점 다가올 테니 은퇴 하기 전에 남한에 한번 갔다오라고 김정은이 특별히 배려해준 듯하다. [14] 미국 부통령은 행정부 2인자임과 동시에 미국 상원 의장직도 겸직한다. 북한의 권력서열 2인자이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인 김영남이 펜스에게 있어서는 여러모로 격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 [15] 이 점으로 보아 현역 정치인 시절엔 염색을 하다가 은퇴한 후로는 안 해서 갑자기 머리가 확 센 것으로 보인다. [16] UN 통계 기준으로 남한의 1인당 GDP는 1974년 북한을 넘겼다. [17] 대표적으로 김정일 다음갔던 최고위 간부 오진우의 아들 오일정이 있다. [18] 대표적으로 구밀복검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인 당의 이임보가 있다. 얼굴마담이었던 김영남과는 달리 이임보는 최고 실권자로서 17년을 재상으로 재직하고 자연사했다. [19] 38분 58초 부터 [20] 북한에서는 트럼프(카드)를 '주패'라고 부르는데, 서민이나 고위층이나 할거 없이 대인기라고 한다. 반면에 화투는 일본문화라고 탄압해서 사람들이 거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 [21] #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해서 더 자세히 밝히기론 여성을 알몸상태로 눕혀놓고 그 위에다 초밥을 얹혀 내기에서 이길 때마다 하나씩 주워먹는 게임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