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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현 [ruby(沖, ruby=おき)][ruby(縄, ruby=なわ)][ruby(県, ruby=けん)] Okinawa Prefectu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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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과 오키나와현의 관계를 정리한 문서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류큐 독립운동이 아닌 일본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다만 한반도와 류큐 제도는 역사적으로는 오래 전부터 관계를 가져왔다.관련 논문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관련 기사 3 관련 기사 4(국내)
2. 역사적 관계
2.1. 고려 이전
고려시대 이전에는 류큐에 통일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 간의 교류는 없었지만 류큐인들과 한국인들의 문화 교류는 존재했다.사진 출처 : 경주 대릉원 천마총
오키나와 근해에서만 발견되는 야광조개의 껍질로 만든 것으로, 5세기 당시 신라와 류큐의 교류를 확인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조개로 제작한 국자가 천마총 외에도 경주 황남대총, 금관총, 고령 지산동 고분군 등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렇게 신라 고분에서는 중국에서 주로 사용하던 앵무조개잔과 류큐에서 주로 사용하던 야광조개잔이 모두 발견되어 당시 신라가 동아시아 국제 교역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남대총 야광조개국자와 이 천마총 야광조개국자의 경우 류큐산 조개에 추가로 신라인들이 화려한 공예를 해놓았다. 오키나와 야광조개의 테두리를 수은 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한 후 국자 모양으로 둥그렇게 절단하고 표면 각질을 제거하여 연마한 후 안쪽은 우윳빛, 바깥쪽은 다양한 색상의 광택이 나게 다듬었고, 이후 황금 테두리를 제작하여, 금을 수은에 녹여 바르고 가열하기를 여러 차례 수행했다. 김종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한국과 일본의 출토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일본에서는 이 정도로 화려한 황금 조개 국자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를 볼 때 국자 형태로 가공한 야광조개를 수입한 후 신라인들이 황금과 은으로 다양한 장식을 했다."고 밝혔다.
2.2. 고려
자세한 내용은 고려-류큐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2.3. 조선
자세한 내용은 조선-류큐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류큐->조선 관계
조선->류큐 관계
2.4. 일제강점기
류큐와 조선 모두 나라를 잃은 시기다 보니 나라간 교류는 당연히 없었다.그러나 둘 다 나라를 빼앗긴 상대가 옆집에 사는 누구다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는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오키나와로 연행돼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들이 있으며 ‘조선인 위령탑’도 세워져 있다. 위령탑은 1975년 8월 광복 30주년을 맞아 세워졌으며 위령탑을 쌓은 돌은 우리나라 각지에서 수집돼 옮겨진 것이다.
당시 조선인 1만여 명이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인된 사람은 3400명 가량이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령탑은 일본의 극우파가 건립했다. 그 세운 이유를 들어보니 ‘조선인도 일본을 위해 싸웠으니 위령탑을 세워야 한다.’는 입장 때문이라고.
조선인 군노무자의 실상은 이러했다. 조선인 군부에는 무기가 지급되지 않는 등, 이른바 ‘총알받이’ 취급을 받았다. 또한 조선인 군부는 오키나와 사람들과 더불어 학살되고 집단자결을 강요받기도 했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김원영이 출간한 수기 ‘조선인 군부와 오키나와’와 박수남 감독의 ‘아리랑의 노래’을 보길 가란다.
2.5. 현대
독립을 이룬 한국과 달리 오키나와는 독립에 실패했다. 그러나 한반도와 오키나와의 관계가 검토된 적은 없다.3. 오키나와 귀속 문제
한편 동아시아에서도 냉전 구조가 형성되는 가운데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강화되었으며 처음에는 국내 상황 때문에 오키나와 귀속문제에 무관심했던 한국 정부도 한국전쟁을 거쳐 자국의 안전이 오키나와 기지와 직결되어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또 한때 침묵을 지키던 국부 역시 1953년 아마미군도반환을 계기로 오키나와 귀속문제에 다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1954년에 국부와 한국 정부는 아세아민족반공연맹(APACL)을 결성하고 여기에 류큐 대표를 참여시키며 오키나와에도 반공연맹을 조직하게 함으로써 오키나와를 반공 독립 쪽으로 향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오키나와 현지에서는 일본복귀론의 뿌리가 단단했으며, 또 미국 정부가 APACL 회의에 오키나와 출신자가 참여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오키나와의 지위에 대한 오해가 생길까 우려해 현지 미국 기관(USCAR) 이 공개적으로 APACL 지부 결성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명한 것 등으로 인해 오키나와 현지에서 그것에 대한 지지는 확산되지 않았다.
더욱이 APACL 자체도 1956년까지 일본 참가를 두고 한국 정부와 국부가 대립함으로써 기능부전에 빠졌기 때문에 이 시기에 류큐 독립론이 국제사회에서 널리 인식되는 일은 없었다. 1956년이 되자 토지문제를 계기로 오키나와에서 현상 변경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관계 각국은 새로운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한국 정부와 국부는 일본의 반공 태도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현상 유지 또는 오키나와 독립을 요구하는 입장을 재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양자가 바란 반공 독립국가로서의 ‘류큐’는 본토 복귀론이 거세지던 실제 오키나와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4. 문화 교류
2006년 11월 제주도한일친선협회와 오키나와일한친선협회가 연내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후 2007년 제주도한일친선협회가 오키나와를 방문해 우호 교류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
2009년 제주도 하도마을과 오키나와 하에바루초 인사들을 초청했으며 자매결연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
2016년 kt가 골든 킹스 오키나와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
2018년 한국의 예수병원이 오키나와의 올리브산병원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