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04:04:19

제너럴 셔먼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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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의 그림으로 잘못 알려진 그림.[1]

1. 개요2. 전개
2.1. 신미양요와 5년이나 차이나는 이유
3. 영향4. 증기선 제작설5. 후세의 평가
5.1. 북한의 역사 왜곡
6. 미디어7. 기타8.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incident)은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SS General Sherman)'[2] 1866년 7월 25일[3]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안도의 중심지인 평양부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고 민간인을 살해하자, 9월 5일[4] 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 휘하의 조선군 부대가 배를 급습하여 불태우고 선원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2. 전개

19세기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 및 식민지화가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민, 관을 가리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를 개방시켜 이권을 선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즈음하여 아편 전쟁 쿠로후네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도 개항의 길을 선택했다. 민간상선인 제너럴 셔먼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조선을 개항의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제너럴 셔먼 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조선을 미개국으로 착각하고 조선 개항을 선점하여 한몫 잡을 생각에 단독으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려고 했다. 그는 배를 중국 톈진에 기항하였고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제너럴 셔먼 호는 메도스 상사에 위탁된 채 조선으로 출항했다. 이 배에는 영국 웨일즈 출신 개신교 목사 토마스가 조선어 통역관으로 승선해 있었다. 그는 1865년 9월에 세관을 사임하고 1차 조선 선교 여행을 하며 성경책을 나누어주며 선교 활동을 했으나, 조선 당국에 적발되어서 추방당했다. 이듬해인 1866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차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해군 원정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낭패한 토마스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 호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부에 이르렀고 평양부 관민들에게 수교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에 식량이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 측에서 소고기 채소 등 식량과 배에 필요한 자제를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장마 비에 불어난 대동강 물을 거슬러 올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가해진 포격에 여러 군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

조선군도 대응 포격을 했지만 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탓에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평안감사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냈으나 되려 그를 잡아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군이 납치된 것을 본 군졸들과 백성들이 노하여 배를 포위하고 화승총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자 제너럴 셔먼 호의 선원들은 두려워 했고, 퇴역 장교인 박춘권이 조각배를 타고 접근해오자 중군 이현익과 부하들은 셔먼 호에서 뛰어내렸고, 이현익은 무사히 박춘권의 배에 올라탔으나 부하들은 익사하고 말았다.

분노한 군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제너럴 셔먼 호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중군을 억류했다 풀어주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대동강 수위가 낮아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기름을 뿌린 짚을 가득 실은 목선들을 가득히 보내서 불을 질렀다. 결국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탔다.
파일:제너럴 셔먼호 화재.png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배에 타고 있던 선장과 다른 상선사관 등 승무원 중 서양인은 5명뿐이었고 나머지 선원 19명은 동양인 중국인과 말레이시아 선원이었는데 몇 명이 가까스로 뭍으로 헤엄쳐 올라왔다. 개화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박규수는 이들을 죽이지 않고 잡아서 협상에 쓰고자 했으나 백성들이 내놓으라고 하는 분노가 너무 엄청나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통역을 맡았던 토마스를 비롯해 청나라 선원 이팔용, 말레이시아 및 미국인 선원들은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맞아죽는다. 조정에선 5명의 서양인은 그렇다쳐도, 중국인 선원까지 다 죽인 것 때문에 청나라가 문책할까 봐 두려워서 역시 죽이는 건 바라지 않았다.

5년 후 1871년 6월 11일 신미양요 미합중국 해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첫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사령관 로저스 제독의 기함 USS 콜로라도 함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 해군 함선에 승선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다. 미군이 제너럴 셔먼 호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조선 측의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진 뒤 살해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미국 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2.1. 신미양요와 5년이나 차이나는 이유

병인양요 병인박해 직후 프랑스의 보복으로 일어났지만, 신미양요(1871)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에 5년이 지나서야 일어났다. 신미양요와의 시간적 간격이 큰 이유는, 애시당초 제너럴 셔먼호 사건 자체가 미국 정부의 지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민간상선이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조선은 이미 병인박해 때문에 프랑스가 조선에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미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외교적으로 좋지 않은 시점을 택할 이유가 없다. 엄밀히 말해 무장상선에 불과했던 제너럴 셔먼호가 몰살당한 것은 바로 이 해적행위 때문이었다. 병인양요 직전이라 조선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대해주고 보내주려는데 해적행위를 했다는 것.[5]

게다가 애시당초 셔먼호가 정부 소속이거나 지시를 받았더라면, 아무런 외교적 군사적 대책도 없이 조선인들 상대로 행패를 부리고, 도주 경로 확보도 없이 무턱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몰살을 자초하는 병크 짓을 할 이유도 없었다.[6]

더군다나 발생 년도는 1866년으로 남북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지 겨우 1년 뒤였다. 미국 본토에서는 남북 전쟁의 참화를[7] 수습하기도 벅찬 마당에 전임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해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이 후임자로 올라 상황을 수습하던 상태였다.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미 정부는 직접 탐문 조사에 나서게 된다. 이듬해인 1867년에는 와추세트호, 그 다음해인 1868년에는 셰난도어호가 조선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방문의 목적은 정보 수집이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모두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났다. 신미양요가 일어날 때까지 전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한편, 셰난도어호가 방문했을 때 조선 정부는 미국에 공식 회답을 보내 제너럴 셔먼 호의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 때 미국은 조선이 아니라 청나라에도 정보를 구함과 동시에 "님들 지방 정부가 이랬는데 혼좀 내주셈."이라는 컴플레인을 걸었다. 즉, 당시 조선은 미국에게 있어 청나라의 자치주 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셈. 하지만 청나라는 이에 대해 "걔들 독립국인데? 우리 소관 아님."이란 통보를 내준다.

따라서 미국이 이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는 데만 3년이 걸린 셈. 얼마나 정보가 없었느냐하면, 제너럴 셔먼호가 무장 상선인데 동아시아인 조선 군대에게 아작났다는 것, 그리고 청나라의 속령이 아닌 독립국이라는 것을 근거로 조선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해버렸다. 여기에 신미양요 초반부에 대원군이 병인양요 등을 거치면서 준비한 최대의 방어 병력이 보여준 포격을 보면서, 미군은 그에 더해서 최대한의 함포 사격을 하고 다시 공격을 했는데, 결과는(...) 신미양요 참고. 게다가 이 사건에 대해서 조선이 정보를 제공하며 협조를 했는데도 이 정도다.

그리고 미 정부도 조선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논의하고, 이를 다시 동아시아 지역 책임자(베이징 공사)에게 전하고, 베이징 공사는 정보를 수집하고, 군사를 정비하고.... 이런 식으로 따져 보면, 5년이라는 시간적 공백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게다가 미국 본토 역시 남북 전쟁 뒤처리로 바빴다는 점. 신미양요 2년 전인 1869년에서야 미 대륙 횡단 철도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전까지는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덜 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조선의 개항은 대외 정책의 큰 틀, 특히 대 러시아 정책과 관련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일이라는 점 등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꽤 지나서야 발발하게 되었다.

3. 영향

흥선 대원군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서양에 대한 배척을 나타내더니 같은 해에 일어난 병인양요를 계기로 양이정책(攘夷政策)인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4. 증기선 제작설

<근세조선정감>에서는 흥선대원군이 가라앉은 제너럴 셔먼호를 건져내서 증기기관 복제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야담을 모은 야사집이며, 정식 국가 기록인 승정원일기 실록에는 복제 시도 기록 자체가 없다.

흔히 증기선 복제를 성공했고 세척 만들어 강화도에 배치했다는 설의 근거로 인용되는 고종 4년 정묘(1867) 9월 25일, 고종 5년 무진(1868) 1월 11일의 기사는 단순히 새 전선을 건조했으니 이름을 붙이고 강화도에 습조 시킴, 현대 한국해군식으로 따지면 전력화 시키라는 기사였을 뿐이다.

물론 조선 조정이 정말 손놓고 있었거나 관심이 없었던건 아니었다.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책 <해국도지>와 <화륜선도설>[8]등을 통해 화륜선과 와트 증기 기관의 설계도를 확보한 상태였고,[9] 많은 대신과 선비들이 화륜선의 보유에 대한 필요를 강하게 주장했었다. 하지만 해국도지에는 제대로된 설계도가 아닌 대략적인 외형만 그린 도해도 수준만 기술되어 있었고, 일본과 서양을 통한 기술도입 역시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현실적으로 조선이 증기선을 생산할 기술력도 안되기에 고종 19년 임오년(1882)에 주교사를 시켜 화륜선과 풍범선을 구매하게 했다. 이후 러시아측 기록을 보면 조선에서 민/관이 소유한 증기선이 1894년에는 143여척에 달할 정도로 급속도로 도입하게 된다.

5. 후세의 평가

역사상 이양선(異樣船)과의 첫 무력 충돌 사건이다.[10][11]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관한 사료는 꽤 많으나 남아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 조선 기록이다. 반면 제너럴 셔먼호의 입장을 담은 사료는 없다.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가 아무도 없으니 기록이 남았을 리가 없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양측의 충돌 경위를 따지기는 중요한데,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가름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생존자가 있다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주장했을 가능성도 크지만,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략 근거로 삼는 종교 박해를 무조건 선전포고라며 기록한 걸 봐도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12]

당초 제너럴 셔먼호를 두고 조선 조정은 다른 이양선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접하여 돌려 보내려고 했다.[13] 그들의 요구에 따라 평안도 관민들은 세 차례에 걸쳐 쌀, 고기, 계란, 채소, 땔감 등을 대주었다. 그러나 조선 측에서 수교만큼은 거절하였고, 이에 반발한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중군 이현익을 납치했다. 이는 모든 기록에서 일치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기록이 <패강록浿江錄>이다. 이 책은 이현익의 아들 이흥근이 쓴 것이다. 이에 따르면 문정에 나선 진사 안상흡이 만약의 경우 제너럴 셔먼호를 퇴치할 방안을 적은 문서를 든 채 배를 타고 이현익에 앞서 접근했다가 제너럴 셔먼호에서 띄운 소청선에게 그 문서를 빼앗긴다. 그리고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그 문서를 통해 조선 측에서 선원들을 회유해 상륙시킨 뒤 몰살하려는 계획을 알아내고 이현익이 탄 배를 나포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로 이 사건의 책임은 국경을 침범하고 조선 관원들의 요구를 무시하며 함부로 무력을 사용해 조선 민간인들을 살상한 뒤 군인을 납치하기까지 한 제너럴 셔먼호에 있었다. 미국도 1867년 1월 슈펠트(Shufeldt,R.W)의 탐문 항행과 1868년 4월 페비거(Febiger,J.C)의 탐문항행으로 승조원이 도발적 행동을 해서 화를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14]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거두가 되는 박규수가 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세력의 강력함을 두 눈으로 경험하고 후학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5.1. 북한의 역사 왜곡

북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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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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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전쟁 발발 책임 · 승패 인식
백두혈통
우상화
김응우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김형직 · 강반석 · 김정숙 · 김정일 출생지 왜곡
관련 서적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 죄행 ·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 세기와 더불어 · 조선력사
*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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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응우역사왜곡.jpg
북한이 그린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기록화다. 가장 중간에 있는 사람이 김응우다.
미국에 대해서 적대적인 북한에서는 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한 일화를 창작하여 체제 선전과 반미 프로파간다에 이용하고 있다. 특히 '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조선 백성으로부터 미국의 침략을 몰아내기 위해 샤만호[15] 격침을 지휘했다'[16]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실제 역사인 것처럼 교육하여,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 주고 백두혈통의 정통성을 주입하는 식이다.

북한 내 조작된 역사와는 달리, 실제로 이 사건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도 관찰사이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 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이 사건의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군관 출신이었던 박춘권이라는 사람이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다룬 당대 사료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김응우는 했다 쳐봐야 행동대원 1로 꼽사리나 꼈을 22세의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는 이미 나이 60을 바라보는 노성하고 권한과 동원 능력이 충분한 고위 관료였다. 상식적으로 누가 대응을 주도했거나 핵심 인물이었을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6. 미디어

  • 1990년에 방영한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대원군>에서도 등장했는데 미국인들이 멋대로 올라와 땅을 측정하고 사진을 찍어가는 것에 지나가던 평양 백성들이 보고 군졸들에게 신고한다. 군졸들이 잡으러 몰려오자 데꿀멍하여 보트로 달아나고 셔먼 호가 포격하여 군졸과 구경하던 백성들이 살상당한다. 이를 본 박규수가 "이, 양놈들이... 내 차마 죽이지 않고 잘 구슬리든지 쓸모있게 하려고 했더니만..." 혀를 차고 공격을 벌이게 하여 화공으로 배를 침몰시킨다. 토마스 목사를 비롯한 선원들이 뭍으로 와서 죽임을 당하는 건 나오지 않았지만, 극중 조선 군관들이 셔먼호에 타서 조선어를 하는 토마스의 통역 아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온다. 배가 불타며 침몰하자 모여든 백성들이 환호하지만, 박규수는 한숨쉬며 '양놈들이 결코 이걸로 끝나지 않을 텐데' 라며 불안해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장면이 나온다.
  • 1996년 방영된 KBS 찬란한 여명에서 등장했는데, 장사하러 왔다고 밝히지만 박규수가 "우린 통상 안 함"...이라며 튕겼다. 그러자 선원들이 보트 타고 육지에 와서 농부를 쏴죽이고 동네 처녀를 강간하다가 박규수가 이끌고 온 포졸들과 대치하는데, 셔먼호에서 포격을 가해 평양 군민들을 살상했다. 이에 관군도 포격으로 대응하다가 야간에 불화살을 쏴서 배를 침몰시켰다. 선주는 헤엄쳐서 빠져나왔지만 강변에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에게 다구리를 당해 끔살당했고, 한발 늦게 당도한 박규수는 그래도 죽여서는 안 되었다는 투로 한숨을 쉬었다.
  • 2002년 KBS에서 방영한 태양인 이제마에서도 등장했다. 제너럴 셔먼호가 뜬금없이 대동강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강변에 구경하러 몰려들었는데 갑자기 셔먼호에서 무차별 포격으로 민간인을 마구 학살하며, 이후 평양 군민들이 야습으로 배를 통째로 불태운다.

7. 기타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중국과 한국학을 전공한 교수가 미국 측에서 연구한 관점에서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있다.
  • 상단에 게재된 유명한 그림처럼, 제너럴 셔먼 호가 남북 전쟁에 사용된 미 해군 군함 USS Princess Royal 함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 해군의 공식 문서에 따르면 프린세스 로열 함의 민간 판매 시점이 애초에 이 사건이 일어난지 2년 뒤인 1868년이었고, 상선으로 바뀐 뒤의 이름도 제너럴 셔먼이 아닌 셔먼이었고, 침몰한 것도 평양이 아닌 1874년 1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 Cape Fear에서 침몰하였다.

8. 같이 보기



[1] 여러가지 공식 매체에서도 흔히 제너럴 셔먼호로 잘못 알려진 그림으로, 실제로는 그림 하단에 적혀 있듯 '로열 프린세스호'를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이 제너럴 셔먼호의 그림으로 사용되는 이유는 로열 프린세스호가 훗날 영국인 선주에 의해 '셔먼호'로 이름이 바뀌어, '제너럴 셔먼호'와 이름이 같아졌기 때문이다. 즉, 이름만 같은 다른 배. 아이러니하게도 위 사진은 현재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2] 미국 남북 전쟁의 명장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이름을 따왔다. [3] 고종 실록 3권, 고종 3년 7월 18일 [4]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7일 [5] 당시 서구에서도 해적행위는 교수형이 기본이었다. [6] 뒷날의 신미양요 때 온 미군들은 이 사건을 일으킨 이들보다는 제법 신사적이긴 했다. 대원군의 철수 권고 편지에 정중하게 거절하고(병인양요 때는 훈련대장 이경하와 극동 함대 제독 로즈가 살벌하게 대립했다.) 파괴, 방화, 약탈도 프랑스보다는 덜했다. 단 전사자 숫자는 신미양요 때가 더 많았다. [7] 미국이 워낙 전쟁에 능하고 여러 네임드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사실이지만 남북전쟁은 미 전쟁 역사상 가장 많은 미국인이 죽은 전쟁이었다. 심지어 이 당시 죽은 미국인이 제2차 세계대전때보다 더 많았다. 미 본토에서 일어난 마지막 전쟁이었기에 미국인들이 많이죽었던 건 당연했던 것. [8] <해국도지>의 요약 필사본격인 책이다. [9] 대원군 시절 만들어진 운현궁 소포 / 중포와 <훈국신조기계도설>, <훈국신조군기도설>에 나오는 조선의 수뢰포, 쌍포양륜거, 철모(철로 된 대포 주조틀), 마반포거, 마반거 등도 이 책에 실린 서양의 최신 무기들과 과학 기술, 그리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청나라의 무기들에 대한 내용을 참조한 것이다. [10] 굳이 거슬러 올라가면 나선정벌 러시아 제국과 싸웠으니 서양과의 무력충돌이라 할 만하지만 그때는 조선군 단독으로 싸운 것이 아니었으며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달리 국경선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1] 하지만 이 사건으로부터 약 250년 전인 1614년 조선의 학자인 이수광이 쓴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에 보면,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인 흥양 앞바다에 놀랍게도 영국 함선으로 추정되는 서양의 배가 나타나서 조선 수군과 하루 종일 결전을 벌이다가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1622년 7월 19일자 <광해군일기>의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라남도 고흥인 흥양현(興陽縣)의 앞바다에 크기가 산과 같고 배 위에 30여 개의 돛대를 세운 배 1척이 들어와서 첨사(僉使) 민정학(閔廷鶴)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언급되는데, 기사를 쓴 사관은 그 배가 “아마 서양의 배였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자세한 내용은 오른쪽의 링크를 참조 바람. 링크 [12] 이 점은 동시대에 박해를 겪었던 천주교의 처지와 대비된다. 병인박해 때 천주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기록은 조선 조정의 <추안급국안>이나 <승정원일기> 혹은 <일성록> 등과 크로스 체킹이 가능하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선 당시 신앙 공동체가 전무하여 토마스 목사의 행적을 수집할 수 없었고, 무려 사건이 발생한 지 40년 ~ 50년이 지난 다음에야, 토마스 목사의 행적을 수집하였고 글로 남겼다. [13]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해서 보내는 것을 유원지의(柔遠之義)라고 한다. [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15] 북한에서 셔먼호를 부르는 이름. [16] 화공전술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17] 북한에서는 피랍된 푸에블로호를 평양의 대동강 셔먼호 격침비 바로 옆에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