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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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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령도자
김일성
金日成 | Kim Il Sung
파일:김일성 초상화.jpg
<colbgcolor=#024FA2><colcolor=#FFF> 출생 1912년 4월 15일[1]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동 칠골
(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1동)[2]
사망 1994년 7월 8일 오전 2시 (향년 82세)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특각
(現 평양시 모란봉구역)
재임기간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년 2월 9일 ~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1948년 9월 9일 ~ 1972년 12월 2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49년 6월 30일 ~ 1966년 10월 12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50년 7월 ~ 1991년 12월 24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3]
1966년 10월 12일 ~ 1994년 7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
서명 파일:김일성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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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4FA2><colcolor=#FFF> 본관 전주 김씨
부모 아버지 김형직(1894 ~ 1926)
어머니 강반석(1892 ~ 1932)
형제자매 남동생 김철주(1916 ~ 1935)
남동생 김영주(1920 ~ 2021)
배우자 본처 한성희(1914 ~ ?)
이처 김정숙(1917 ~ 1949)
삼처 김성애(1924 ~ 2014?)
자녀 장남 김정일
차남 김만일
3남 김평일
4남 김영일
5남 김현
장녀 김경희
차녀 김경숙
3녀 김경진
4녀 김백연( 1987년생, 사생아)
학력 창덕학교[4]
화성의숙 중퇴
지린 위원중학교 ( 퇴학)
종교 개신교[5] 무종교 ( 무신론)[6]
신체 177cm[7], 90kg, AB형[8]
군사 경력
복무 동북항일연군
1936년 ~ 1941년
소련군
1942년 ~ 1945년
조선인민군
1948년 ~ 1994년
최종 계급 소좌 ( 소련군)
대원수 ( 조선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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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능력
3.1. 끝없는 권력욕3.2. 무능한 전쟁광3.3. 무자비한 숙청
4. 의문사5. 여담6. 가족 관계7. 소속 정당8. 어록9. 대중매체에서
9.1. 대한민국9.2. 일본9.3. 북한
10. 별명 및 호칭
10.1. 부정적 호칭10.2. 북한 입장에서
11. 관련 사건사고12. 관련 문서13. 관련 연구1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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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Kim Il-Sung 1950.png
파일:Kim il-sung 1984.png
1950년 1984년
북한 군인 출신 정치인, 독재자. 겉으로는 인민공화국을 표방하지만, 북한을 왕조와 다를 바 없는 3대 세습 독재국가로 만든 장본인으로서, 생전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등의 직책을 지냈다.[9]

집권 초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을 지냈으며, 8월 종파사건(1956년) 박금철· 리효순 사건(1967년 / 갑산파 숙청 사건)[10] 등을 통해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한 이후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에 올라서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북한의 일인 세습독재 체제를 수립해서 1970년대부터 장남 김정일에게 권력을 서서히 이양해나갔으며, 1994년 사망하며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하였다. 사후에도 평양정권 주도 하에 '영생불멸의 위대한 수령'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다른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과는 달리 영구적인 맹목적 숭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분단을 경험했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희생과 비극을 초래하였다.[11][12] 건국 초기 종교의 자유나 소유권의 보장 주장, 그 이후 해방전을 자신이 주도했다는 역사왜곡[13] 등 숱한 거짓말, 자신의 반대파에게 가혹한 행위를 일삼으면 출세를[14] 시키는 등 온갖 비열한 수단을 동원하여 권력을 획득했다. 사회주의를 구실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장악하여 주민들을 충성도에 따른 배급에 길들여서 절대 권력을 얻었다. 이는 배급이 예고없이 끊겨 일어난 비극인 90년대의 대기근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반대하는 자신의 자손에 대한 권력 세습에 수십년간 공을 들여 이런 실태가 항구적으로 유지되도록 하였다.

자신이 권력을 얻는데 쓰던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변화하는 국제정세조차 무시한 채 폐쇄적으로 국정 운영을 해서 20세기 말에 이르러러서는 북한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최빈국 및 독재국가로 만들었다. 또한 폭압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여 권력유지를 위해서 무자비한 학살과 인권 탄압을 자행했다. 이로써 김일성 집권기에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자신이 노예화되고 국가 상황이 나빠진 줄도 몰랐다.[15] 이 때문에 남북한의 화해·재통일 및 북한의 정상국가화가 기약 없이 보류되고 영원히 없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16] 그리고 전후 긴 세월에 걸쳐 남북한의 청년들이 군대에 징집되어 그들의 시간을 잃어 온 것까지 이 모두가 김일성과 그 자신이 만들어 놓은 폭압적인 체제로부터 비롯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 6.25 전쟁이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때로는 유화적 제스처를 보내면서 동시에 적화통일을 노리며 호시탐탐 도발해온 악당', 그리고 '숱한 실책으로 북한을 빈곤한 국가로 만들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주민들 정신 깊은 곳까지 감시하고 조종하며 3대 세습이라는 현대 인류사에 손꼽힐 만한 민족의 반역자와 독재자'로 평가받는다. 좌파에게도 세습과 계급적 착취, 민족주의자에게도 같은 민족에 대한 인권 탄압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일성/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m_Il-sung_in_1927.jpg
파일:김일성1945.jpg
1927년, 15세 1945년, 33세
1912년 4월 15일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당시 평양 중국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 중국 길림 육문중학교 재학 중이던 1920년대 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 공산당 밑에서 만주 지역 무장항일투쟁에 참여하였으며, 일본의 탄압을 피해 1940년 소련으로 월경해 소련군에 입대했고 1945년 소련군과 함께 국내에 돌아왔다. 광복 이후 자신들을 지지할 것으로 믿던 소련 군부에 의해 북한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하자 폭력적인 토지개혁으로 갈등을 조장하여 더 공고한 권력을 추구하였다. 6.25 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다수의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등 전쟁범죄를 일으켰으며 이후 8월 종파사건, 갑산파 숙청 등을 통해서 중국과 소련과 연계가 깊었던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여 197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채택과 함께 마침내 유일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파일:kimilsung1958.jpg
1958년 11월 방월 당시 호찌민 주석과 건배를 하는 모습.
전후 한반도 북부의 공업 기반과 사회주의권의 원조를 바탕으로 중화학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통해 성공적인 전후복구를 마치고 1950 - 60년대에는 대한민국보다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애초 계획경제의 한계, 지나친 자립 노선, 과도한 국방비, 허접한 경공업 따위의 까닭이 맞물려 차츰 남한에 비해 경제 성장이 밀리게 되었다. 소련 중국 대립 와중에 독자노선 병영국가화에 몰두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제2세계 국가들과 동떨어진 길로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란 목표도 허울 좋은 집권 명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과 동구권 국가들의 연쇄 붕괴에도 꿋꿋이 정권을 유지했으나, 차츰 정권 유지가 쉽지 않다는 현실 인식 하에 미국 대한민국 등 국가들과 대화 통로를 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평양 집무실에서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했다. 향년 82세.
파일:EP-307139944.jpg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일성.
" 인민들에게 고깃국과 이팝을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말을 50여 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약속이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그의 사후 북한은 아예 대다수의 인민이 굶주림과 아사(餓死) 위기에 노출된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사망 직후 김씨일가 신격화 차원에서 그의 시체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방부처리( 엠버밍)한 뒤 금수산태양궁전 박제되었고, 그의 장남 김정일은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 등으로 떠받들며 주석직을 영구결번 시켰다. 현재까지도 북한의 국가수반의 직책명으로 주석이 사용된 것은 김일성 이후로 단 한 명도 없다.

3. 능력

3.1. 끝없는 권력욕

김일성은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고학력인 중졸[17]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모든 나라의 중대사보다 중시했기에 나라를 이끌 능력은 부족했다.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거의 이해하지 않았거나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고 본다. 남북통일을 위해 사회주의를 연구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산주의자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면서도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독재자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유고슬라비아를 이끈 초졸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 같이 학력이 낮아도 추후 사회주의로 나라를 이끌고자 하면 그럭저럭 사회주의 이념으로 나라가 굴러가나 김일성은 티토보다 학력이 높았어도 그렇지 못했다.[18] 중국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 것을 감안하면 '학습능력' 자체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교적으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완은 있었다.

하지만 진짜 권력만을 추구하는 그의 성향 때문에 군사적 수완 같은 다른 능력은 부족했다. 권력욕이 너무 강하여 성급하게 일을 벌이다가 망할 뻔한 사건이 6.25 전쟁이다. 박헌영의 부추김이 있었다고 하나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서 통일은 못하나 국체를 보전하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되면 박헌영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계획도 있었고, 정전 후 실제로 이를 시행하였다. 심지어 전쟁을 처음 제안한 것은 김일성이 맞다. #

정부 수립 초기에는 농민의 지지를 얻고자 토지개혁을 통해 북한 농민들에게 땅을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사회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둘러댔다. 토지의 국유화를 북한 주민이 싫어할 것을 예측하여 일단 눈속임을 한 후 실행 여건이 갖추어진 후 실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계급 투쟁의 주장을 변용하여 증오를 부추겨 평안도의 민족자본가들을 숙청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 뒤 북한에서 권력 기반을 키우는데 집중하다가 더 많은 권력을 얻을 조건이 성숙했다고 성급하게 판단하여 6.25 전쟁을 일으킨다.

김일성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군세를 잃고 평양마저 함락 당한 끝에 강계까지 도망쳤는데 만약 펑더화이 쑹스룬 등이 이끄는 중공군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완벽하게 망할 뻔했다.[19] 사실 낙동강까지 밀어붙였던 전쟁 초반에도 소련의 지원과 전쟁을 예측하지 못하고 대비를 못한 남한의 실책이 겹친 덕에 운좋게 이겼을 뿐이다. 그것도 한국 전쟁 시기 북한편에서 뛰어난 군공을 세운 것은 그의 파벌이 아니라 김일성이 나중에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시킨 방호산 같은 연안파였다.

김일성은 점령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현지인의 민심을 얻는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무시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학살과 전쟁 범죄를 자행하고 인력과 자원을 징발하여 그나마 있던 민심마저 잃어버렸다. 이에 스탈린은 "김일성 동무는 그런 멍청한 짓을 금지시키지 않고 뭐하고 있어?"라고 화를 냈고 마오쩌둥조차 어리석다고 김일성을 비판했다.[20] 권력을 지켜줄 세력만 자신을 지지한다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행동을 보였는데, 머슴이나 고용농 등에게 빼앗은 땅을 넘겨주며 농민위원장 등으로 출세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북한인들이 김일성의 실체를 깨닫고 6.25 전쟁 당시 월남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굳이 실제로 잘 대해주는 식으로 민심을 얻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반발하면 충성파가 이들을 잘 숙청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론 중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데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전후 권력 기반이 확고하지 않을 때는 레닌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레닌의 프롤레타리아독재 뿐 아니라 레닌의 전위당 이론을 통해 모든 정치적 권력이 관료화된 전위당인 노동당에 집중되어 사회의 전 구조가 수직적 통제 하에 들어있어야 하며, 모든 권력이 1인과 일당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하였다. 전쟁이 멈추자 주었던 땅도 다 뺏고 사회주의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체제는 권력을 지켜줄 수 있는 사회주의의 일부만 빌려온 것이었다. 권력 기반을 더 갖추자 소련의 사상을 갖다 버리고 주체사상을 주장하였다. 세종대왕, 이순신 같은 민족의 영웅조차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되고, 일체의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지 말도록 하고 자신이 만든 '근로단체' 같은 조직 이외의 동창회와 같은 모임도 금지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도무지 공산주의라고는 볼 수 없는 요소들을 너무나도 많이 이식하였다. 가령 초강성 민족주의[21]와 지나친 반외세 경향을 강조한다거나[22],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이라는 신분제 사회를 만들어 놓거나[23], 족벌 세습을 당연시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와 그의 수하들이 주체사상이라는, 마르크스 레닌이 들었다가는 무덤에서 뛰쳐나올 법한 사이비 공산주의, 사적 소유가 철폐되고 경제가 국유화된 '노동자 국가'라는 이념에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생산력의 부족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부재로 인한 '기형적 노동자 국가'에 어울릴 법한 사상을 만든 것도 그가 공산주의에 무관심했기에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과거 1990년대 주사파들이 불법월북을 통해 김일성을 만나 주체사상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했지만, 김일성 본인은 주체사상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남한의 추종자들이 설파하는 주체사상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주체사상 자체가 (여느 설정놀음이 그렇듯이)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끌어다 붙여서 만든 결과 모순과 왜곡으로 가득찬 설정인 데다, 애당초 김일성 본인이 사상 자체에 별 관심을 갖고 있지 못했던 이유가 크다.

다만, 6.25 전쟁이 끝난 뒤 박헌영, 김무정, 최창익 등 수많은 경쟁자들을 숙청하고 최용건을 바지사장으로 만들어 온갖 권력을 휘둘러댄 것으로 볼 때, 권모술수 하나만은 천재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군인으로서는 무능한 정치군인에 불과했어도 정치적으로는 쓸데없는 쪽으로 꽤 수완이 있었던 셈이다.

사실 민족주의자이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반미, 반일이라는 일관된 개념은 있었고 우방이라 할 수 있는 소련, 중국에 대해서도 어느 한쪽에 끌려다니지 않는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나름 독자성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는 일제에 대한 해방을 원했던 북한 주민의 소망을 악용하고,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간섭[24]을 피하는 용도에 국한된 것이었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 전에는 독립운동으로 중국 공산당의 눈에 들어 중국의 안도현장이 되기를 꿈꾸던 인물이었으며, 스스로 '안도 사람'[25]이라고 하였다. 건국 초창기에는 조만식 같은 민족주의자를 탄압하며 소련에 아부했고, 민족 문화를 '봉건주의'로 탄압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에는 스탈린 초상화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소련군에 있어 박헌영보다 믿음직스럽기에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한복을 입는 모습이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 것이 김구를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음력설은 한국 전쟁의 정전 이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는 아예 명절이 아니었고, 추석은 1972년부터 '민족 최대 명절' 김일성 생일보다 격이 낮은 명절이 되었다. # 판소리, 전통 음식, 사투리 같은 민족 유산도 훼손되거나 사라졌다.

심지어 그 아들 김정일은 일본 군가인 라바울 속요를 즐겨불렀다고 한다. 70년대부터 초상화 검열 정책이 도입되더니 80년대에는 아예 일본 천황 마냥 초상화가 불에 타면 목숨을 버리고 초상화를 구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 순수한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더 많은 권력을 위해 민족주의를 방패막이로 삼은 것에 가깝다.

이보다 더한 좌파 계열의 전체주의 독재권력자는 아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경제성장 자체를 부정했던[26] 폴 포트 선군정치라는 해괴한 개념을 만들어내고 수령숭배에 축지법같은 괴력난신을 집어넣도록 시킨[27] 김일성 본인의 아들 김정일 정도밖에 없다. 다만 폴 포트처럼 그나마 솔직하게 정치의 목적을 밝힌 것과 다르게 김일성은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 같은 기만으로 통치를 해왔다는 면에서는 더 간사한 면도 있다. 결국 그의 주체사상은 지적으로 조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전체주의 + 군국주의 + 파시즘 등등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 모든 사상들 가운데 자기네들 독재권력 유지에 유리한 것들만 다 뽑아내 섞어놓은 일개 개똥철학이자 그 자신과 후손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극악무도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2. 무능한 전쟁광

북한은 지금도 대한민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때부터 아이들에게 전쟁교육을 시켜 유사시 소년병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소년병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백해무익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법한 부분인데도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김일성이 독재와 적화통일을 위해 얼마나 전쟁에 미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단 교육제도를 통해 성장한 아이들은 평범한 단순 노동자에서부터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이 양성되고 실제로 한국도 그런 식으로 나라를 발전시켜왔기에 지나친 교육열로 인하여 부작용이 생겼고 교육제도에 대한 투자와 관심이 많다. 이에 반해 북한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으며 그나마 되고 있는 것도 국제적인 고립과 우상화 교육으로 북한 사람들은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은 매우 형편없었다. 애초에 기본적인 군사적 식견이라도 있었다면 해당 항목 맨 위의 발언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김일성이 직접 지휘해서 승리한 전투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압도적인 물량 차가 났던 전투인 보천보 전투[28] 6.25 전쟁 중의 오산 전투 정도였다.

그리고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군에게 총 후퇴 명령을 하달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 고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뒤 평양시를 떠나 덕천시로 도주했고 한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자, 피신 장소였던 덕천시를 떠나 강계시 임시수도로 정하고 그곳의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남조선 해방을 호언장담했던 그는 스탈린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림은이 당시 김일성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으며 시베리아 유배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고 한다.[29]

이 때문에 6.25 전쟁 중 자꾸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김일성에게 펑더화이"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맹비난하였고 그래도 정신 못 차린 김일성은 유엔군 한국군의 반격으로 북한군 중공군이 주도하던 전세가 다시 밀리게 되자 북한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 상의도 없이 멋대로 북한군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유엔군이 중공군을 기습하여 중공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이 때문에 펑더화이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홍콩 유력지 "명보"에 따르면 분노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싸대기를 때렸고 그 탓에 김일성이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펑더화이는 북한군이 벌이는 대대적인 양민학살과 조직적인 약탈, 그리고 그로 인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김일성을 불신하였다고 한다. 비록 삼대기율 팔항주의는 허구로 밝혀졌고 중공군도 잔혹하기는 매한가지였다지만, 적어도 그런 '삼대기율 팔항주의'라는 허물이라도 있던 중공군 북한군만큼 막나가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시비만 걸어놓고 정작 진짜 싸움은 펑더화이 쑹스룬에게 죄다 떠넘겼다. 즉,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전세에 기여한 것이 거의 없다. 전쟁 초반의 선전은 6사단장 방호산 등의 활약과 전쟁 경험이 많았던 조선족 부대인 조선의용군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고, 후반의 반격은 펑더화이와 쑹스룬이 지휘한 중국 인민지원군이 주도한 것이다.

게다가 1960년대 이후, 남한과의 군비경쟁에서 우위를 가지기 위해 국가 예산의 30%를 군비에 지출시키고 100만이 넘는 젊은 인력들을 군대에 10년 이상 징집시키면서 북한 경제에 큰 주름을 가져다 주었다.(...) 국부의 상당수가 지출 대비 경제적 효과 창출 효과가 매우 제한적인 군대에 투자된 것은 물론이고 젊은 노동 인구들이 10년 이상 군대에 강제로 복무하게 되면서 북한 경제의 생산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3.3. 무자비한 숙청

종파분자와 계급의 원수는 그가 누구이건 3대에 걸쳐서 씨를 없애야 한다.

1968년 김일성 교시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은 6.25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도 어김이 없었다. 전쟁 초기 김일성은 잦은 전술적 실패와 자신의 오류를 부하에게 전가하면서 처형을 명령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을 상대에게 뒤집어 씌웠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 제 3, 4사단은 남진하여 서울을 점령했는데 제1사단장 최광의 진군이 문제가 됐다. 전쟁이 시작되자 제1사단은 고랑포를 거쳐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국군 제1사단의 조직적인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진군이 타 사단에 비해 지연됐다. 당시 고랑포 → 임진강 문산 서울로 진군 경로를 하달한 이는 전쟁 계획을 세우고 지침을 내렸던 최고 사령관 김일성이었다. 임진강에 도달한 제1사단장 최광은 예하 연대를 장악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김일성은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최광을 체포하여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김일성은 제1사단의 부진한 진격에 대단히 신경질적이었으며 자신의 계획이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일절 반성이 없었다. 김일성의 작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던 사례는 북한군 제2군단의 수원 점령 실패에서도 나타났다. 북한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 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달성됐으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 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김일성은 수원 점령에 실패한 인민군 제2군단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문책의 칼날을 들이댔다.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으며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소장이던 최현은 제2사단장으로 임명됐다.

김일성의 책임전가성 문책은 전쟁 후에 더욱 잔인하게 나타났다. 전 주소 북한대사 리상조와 소련 유학생 허웅배의 김일성 정전[30]에 따르면 6.25 전쟁에서의 무참한 패배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피의 숙청'을 단행케 한 계기가 됐다. 자신의 전략이 없음으로 인해 패배한 전쟁의 책임을 군사령관에게 전가하고 개인 독재의 길을 여는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의 숙청은 그 잔인함에 있어 이오시프 스탈린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림은 자신이 희생의 직전까지 갔는데 그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장군 중 95%에 해당하는 70여 명이 학살 내지 처형되고 당·정·군의 간부급 20만 명이 숙청됐다.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사람들을 합하면 희생자 수는 무려 수백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출처] 김일성은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무정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숙청해버렸다. 김일성이 김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는데 김무정이 평양 방어는 무리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억지로 평양 방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김무정을 실각시켰다.

6.25 전쟁에 대한 피해와 책임을 자신이 지게 될까 두려웠던 김일성은 자신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상으로 떠오른게 박헌영 남로당파였다. 김일성 정권은 한참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결국 박헌영은 6.25 전쟁 책임론에 휩싸여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3월에 체포당하는데 당시 체포당한 이유는 ' 리승엽이 미군과 비밀리에 내통한 간첩 의혹'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리승엽은 6.25 전쟁 때 인민군 서울 점령 치하 때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었는데 휴전 직후 미국 스파이, 반당종파분자 등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당에서 제명당하고 직위에서 해임당했다.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재판 직후 증인으로 나와있던 리강국 등 주요 남로당계 간부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다 김일성으로부터 신변 위협을 느껴 소련으로 망명한 박길룡에 따르면 박헌영은 7월 19일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세운 꼭두각시답게 김일성 역시 스탈린식 개인 숭배를 자신에게도 적용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후원자였던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에 의해 스탈린의 신격화가 중지되었다. 한편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신나게 써먹었다가 갖다버린 연안계와 소련계 정치인들은 자신의 자리를 갑산파, 심지어 혁명을 한 적도 없는 김영주같은 낙하산들이 채우고 완장질을 하는 현실에 기가 막혀서 김일성에게 이를 시정해줄 것을 수차례 강력히 요구하였다. 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김일성은 자신의 인사정책에 대한 항의가 들어오자 이들을 조금 승진시켜줌으로 달래려 했다. 하지만 그간 김일성의 토사구팽과 무도한 정치에 질려있던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서휘, 리필규 등은 조선로동당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여 그의 정치를 시정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와 맞서게 된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소련은 헝가리와 폴란드와 소동 때문에 북한의 지도부 교체가 가져올 혼란을 두려워해 이를 지지하지 않았고, 중국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파악도 못했으며 이들 8월 그룹조차도 김일성은 젊고 능력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맑시즘을 잘 배운 자기들이 옆에서 지도하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어본 김일성은 잔혹하게 이들의 항명을 진압한다. 서휘,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 박창옥(1911)의 당직은 박탈되었으며 동시에 최창익과 박창옥은 내각 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다.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고 1957년 여름까지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했다. 이것이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되었다.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도 8월 종파 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하는데 8월 종파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수의 반대파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후 1958년 1차 당대표자회를 열어 반대파들에게 동정적이었던 김두봉, 박의완, 오기섭 등도 모조리 숙청하는 등 북한에서 김일성 친위세력을 제외한 세력은 거의 씨가 마르고 만다.

최후의 분파였던 갑산파는 1967년 경제건설 노선에서 김일성과 이견을 보이다가 결국 숙청되고 만다.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김광협으로 이러한 숙청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김원봉 등 월북한 인물들도 숙청했다.

4. 의문사

94년 7월 8일 날 사망한 장소는 묘향산이었다. 에어컨의 찬바람에 습관이 들지 않아서 항상 여름철에 백두산이나 묘향산 초대소에 가곤 했다. 묘향산은 북한에서도 아주 외진 산골이고 기본적으로 산에 올라가면 대기 온도가 낮아진다. 기록적인 폭염이 지속됐던 1994년의 여름 묘향산 초대소는 기온이 20~27도에 맞춰져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김일성이 여름을 시원하게 나기 위해 묘향산에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북한 어느 곳에 가더라도 늘 함께 따라다니는 호위성원들이 수십 명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이 묘향산 초대소에서 죽은 다음에 북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아니, 수령님께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셨다고 하는데 부관들은 그럼 수령님께서 심장마비로 서거하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
  
이에 대한 측근들의 이야기로는 돌아간 전날 아침에 9시가 됐는데도 수령님이 안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부관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볼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으면 늦게까지 주무신다고 생각을 하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조금 더 있다가 똑똑 두드려서, “수령님. 벌써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랬는데도 말이 없자, 열고 들어가 보니까 마지막 순간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그 당시 주치의원은 묘향산 초대소에 동행했지만,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심장 구급 기계(AED)가 없었다. 곧바로 김정일에게 보고를 하고 심장 구급 기계를 직승기(헬리콥터)에 띄워 보냈다. 하지만 7월 8일 당시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착륙하기가 어려웠고, 의사와 심장 소생기를 실은 직승기가 내리다가 떨어져서 폭파하였다. 결국 의사들은 죽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도 사람들은 실제 마음속으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북한에 봉화병원이라는 김 씨 일가를 위한 큰 병원이 있고, 몇백 명이 김일성의 건강을 보는데 묘향산에 갔을 때 심장 소생기가 따라가지 못했다는 게 무슨 일인가 싶다.

5. 여담

  •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金聖柱)였으나 1929년에 김일성(金日星)으로 개명하였다. 1935년에는 한자 표기를 金日成으로 변경했다.[32] 북한식의 변형된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쓰면 Kim Il Sŏng이 되고 기존 매큔 - 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Kim Ilsŏng이 되겠으나, Kim Il Sung은 당사자가 쓰던 표기가 굳어진 것으로 보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어의 라틴문자 표기법 참고. 한어병음로는 Jīn Rìchéng(진르청. 항일 투쟁 시기에 알려진 '진지첸' 등의 표기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어로는 Ким Ир Сен(킴이르센). 소련 체류 시절에는 러시아식 이름도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 대략 1970년대에 김정일 기쁨조를 만들어 김일성의 비위를 맞추고[33] 자기 세력을 확보하였다. 안에 행복조, 만족조, 가무조가 있는데 그 중에서 만족조는 성적으로 만족을 주는 조이다. 이것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데 기쁨조를 하다가 퇴직한 사람은 고급 아파트에 들어가게 해준다. 그러나 기쁨조를 나올 때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하게 각서를 쓰게 한다고 한다. 김일성의 경호원을 1년 6개월 했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기쁨조는 1975년도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인민국협조단에서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했으면 됐다고 한다. 북한에는 '음팔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음팔이가 스트립쇼를 하면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에게만 여자를 안겨주기에는 부러웠는지 예술단에서 예쁜 사람들만 뽑아 김정일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고 한다. 김일성도 살아있을 때부터 기쁨조를 신명나게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똑같이 1971년 득남을 했는데 김일성은 김현, 김정일은 김정남을 각각 얻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진짜 종요처럼 75살에 김백연을 득녀했다.
  • 키가 무려 193cm로 북한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실제 키는 177cm다. 말년에는 173cm까지 줄었다. 177cm면 2022년 한국 기준으로도 평균 이상이며, 영양이 부족한 북한 기준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장신이다. 더불어 1930~1950년대 기준으로는 세계 기준으로도 꽤나 큰 편이었다. 서로 비슷한 키도 아니고 아래 쪽에서 올려다보면 상대방의 키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고 김일성은 키에 비례해 덩치도 제법 되기 때문에 키가 작은 옛날 북한 사람들이 보기에 얼핏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김일성이 청년기였던 1930년대 한반도의 20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3~164cm이었음을 감안[34]하면 현재 한국 평균 키로 환산하면 188~190cm이 된다. 즉 체감상으로는 실제보다 더 크게 보였기에 저런 소문이 돌았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김일성과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만난 사진이 있었는데 티토와 약간의 차이가 날 정도였다. 티토의 추정 키는 대략 172cm 정도로 추측된다.
  •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 같은 덕스런 얼굴이 북한 기준으로는 좋은 외모다. 장군님 킹왕짱, 희망 어쩌고 세뇌되어 자라니 미학이 그렇게 형성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젊었을 적 외모는 남한 기준으로도 괜찮은 편이다. 김일성 본인은 이러한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카리스마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항상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이는 그의 아들 김정일이 결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정치 기반 확립과 숙청을 감행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정일은 언제나 인민복 차림인데 김일성은 정장을 좋아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어디까지나 1970년대 이후 토실토실 살이 찌기 전의 이야기. 다만 21세기의 김정은처럼 터질 듯한 초고도 비만까지 찌지는 않았다. 흔히 김정은이 살찐 것이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차용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알려져 있는데 2020년 기준 김정은의 비만도는 김일성이 가장 뚱뚱했던 시절보다 심각하게 더 쪄 있다. 처음에는 따라한거라고 해도 김정은의 경우는 생활 습관 자체가 잘못된 것에 가깝다.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내외적으로 김일성을 닮았다고 한다. 1946년 북조선로동당 당수 취임 즈음 때까지는 날씬한 모습이 유지됐지만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 투실투실해진 것을 보면 2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설 기념 연설 1948년 4월 19일 남북연석회의 연설
  • 기록영화에 남은 생전 김일성의 목소리는 상당히 걸걸했다. 이는 김일성의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젊은 시절에 기록된 몇 안 되는 육성 녹음을 들어 봐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손자인 김정은의 목소리와 상당히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이는 김정은이 집권 초기부터 김일성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벤치마킹했기 때문이다.
  • 1994년 지미 카터를 만나고 정확히 14일 후 김일성은 사망했는데 1994년 당시 칠순이었던 지미 카터는 28년이 지난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다. 지미 카터는 이상하게도 그가 만난 독재자는 얼마 가지 않아서 권력을 잃거나 사망한다는 징크스가 있어서 농담삼아 '독재자 킬러'라는 별명이 있다. 그런데 김일성의 경우 정말로 지미 카터 때문에 사망한 것이라는 진지한 분석들이 있기는 하다. 지미 카터가 주선한 북미 대화 및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다가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고 이 때문에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주장들이 있다.
  • 자신의 성씨와 조상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로, 6.25 전쟁 중에 전주 김씨 족보를 구하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다. 한 일본 기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전주 김씨 족보와 조상의 영정을 모셔놓고 향을 피우는 방을 따로 마련해 놓은걸 봤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묘가 전주 모악산에 있기 때문에 북한과 전쟁이 나도 전주는 안전할 거라는 이야기를 우스개소리로 하고는 하지만 정작 6.25 전쟁 개전 초기(9월)에 전주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본가인 전주 김씨 시조는 사실 경주 김씨의 일파[35]인 김태서로서 그 후손 전주 김씨는 몽골 침입 당시 경주를 떠나 이주한 방계이며 한동안 전주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36] 즉 근원적인 조상은 신라 쪽으로 닿는다. 하지만 김일성의 집안이 정말 전주 김씨인지를 교차검증할 만한 자료가 마땅치 않다. 1915년 전주 김씨 대동보가 편찬되었으나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되었으며 김일성 일가가 살았던 평안남도 대동군 일대가 누락되었다. 따라서 문서로써 김일성 일가가 확실히 전주 김씨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으며 실제로 전주 김씨들은 김일성과 종친이라는 이유로 분단 이후 상당한 세월을 눈치보면서 살았어야만 했다. 실향민+전주 김씨 콤보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며 이런 이유로 모국을 떠난 이민 1세대들도 있다. 일반 북한 주민들은 계속된 국가의 통제로 인해 지금은 자신의 본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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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에는 혹이 있었으며, 이 꽤나 쪄 있어 반공 애니메이션에서는 주로 돼지로 묘사되었다. 김씨 일가를 돼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똘이 장군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한 돼지로 등장해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김일성 본인은 이 콤플렉스를 거론하는 것을 무척이나 기분 나쁘게 여겼으며 이것에 관해 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만약에 논할 경우엔 아주 무시무시한 아저씨가 찾아와서 아주 무시무시한 곳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측에서 찍은 사진 중엔 김일성의 혹이 찍힌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1988년 북한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 행사 때 프랑스 취재진이 녹화한 영상에 그의 혹이 드러난다. 20초 부근 참고.[37] 김일성의 혹은 지방종으로 추정되는데 외과 수술을 통해 조기에 절제할 수도 있었으나, 치료 시기를 놓쳤고 고령이 된 후라 수술을 하면 건강에 타격이 가기에 그냥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혹은 더 커졌다.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남북고위급회담 차 방북했을 때, 김일성을 예방한 적이 있는데 당시 내외통신(현 연합뉴스) 기자에 의해 혹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도 있다. #
  • 위의 이유로 김일성에게는 목 뒤의 혹과 사실상 왕국이나 다름없는 북한의 삼대세습 정치체제를 로마 황제식으로 비꼰 '혹부리우스'라는 별명이 생겨나게 된다.
  • 김일성의 전직 주치의가 <신율의 시사열차>에 출연하여 "김일성이 젊은 청년 피 뽑아 한 달에 한 번씩 피갈이를 했다."라고 증언했다. 이 피갈이의 부작용으로 목 뒤에 혹이 생겼다는 것이다. 20대 내내 김일성에게 피를 헌납한 청년들은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과 같을 정도로 폭삭 늙었다고 전한다. 실제 나이는 20대인데 외모는 70대처럼 변했다는 것이다.
  • 빨치산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해 준 김책을 존경하였다고 한다.[40] 그래서인지 원래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김일성으로 내세우려던 것은 김책이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그가 죽고 나자 함경북도 성진을 ' 김책'으로 바꾸고 공업대학을 만들 때 그의 이름을 붙여서 '김책공업종합대학'이라고 짓기도 했다.
  •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걸 좋아한 나머지 1946년부터 1994년 사망한 해까지 육성으로 신년사를 내보냈다. 예외적으로 1966년과 1970년에는 신년사 대신 로동신문 사설로 대체했다. 반대로 비밀주의를 표방하던 김정일 때에는 신년사 없이 공동사설이 신년사를 대체하다가 2013년에 김정은이 부활시켰다.
  • 6.25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허락받으러 갔는데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반대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끈질기게 스탈린을 설득하며 전쟁을 부추겼고, 결국 스탈린은 무려 48번씩이나 거절한 끝에 6.25 전쟁을 허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 뒤 스탈린은 인민군이 깨져서 패주하는 꼴을 쳐다만 봤다. 그래도 형님은 형님인지라 UN군과 국군에게 개박살난 북한 공군을 대신해 소련 공군을 참전시켜 줬다.
  • 북한에서는 문화어가 '수령님께서 몸소 쓰시는 영광스러운 언어'라면서 김일성이 과거에 말한 '지주놈의 상통'(면상), '자본가놈이 뒈졌다', '대가리를 돌로 까부신다'와 같은 온갖 각종 욕설이 난무한 막말 문화어라면서 대놓고 교과서에 실어놓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그러나 타국에서는 보기 힘든 유례 없는 일인데, 아무리 도널드 트럼프 로드리고 두테르테와 같은 사람들이 막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에 비하면 상당히 양반이며 적어도 미국이나 필리핀은 대놓고 교과서나 언론에서 쌍욕을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불분명하나, 일각에서는 1967년 김일성이 "전투적 화법을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을 시초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도 지도자의 품격에 따라 달라져서, 김정일 때는 더 심해졌다고 한다.
  • 해방 이후에는 남측의 정적들에게 죽을 위기를 몇 차례 넘겼다.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연설을 하던 도중 백의사에게 암살 당할 뻔했다. 수류탄을 암살자가 던졌는데, 그 자리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되집어던져 암살을 모면했으나, 그 장교는 가까이서 터진 수류탄 덕에 팔 하나와 여러 곳을 다치고 의병제대했다. 소련군정문서 1946년 4월 6일자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전에 북한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조만식에게 보내는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 김구는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 받았다. 김일성이 권력을 확실히 잡은 195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이 장교를 손수 찾아가 고마워했고, 북한에서 따로 연금과 여러 가지를 제공하여 은혜를 보답했다고 한다. 심지어 기념영화까지 나왔으며, 죽을 때도 북한에서 장례비를 지원했다.
  • 외국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개인숭배의 정도가 나오는데, 평양의 웬만한 공원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인 벤치가 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은 '수령님께서 앉으셨던 의자'라서 길이 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아들과 손자까지 이어져 다녀간 벤치뿐만 아니라 현장지도 때 몸을 기댄 나무에도 강화 플라스틱 덮개를 씌운다. 그리고 현장지도로 방문한 일반 가정에는(물론 사전에 다 방문 준비가 완료된 가정이다.) 집의 안팎으로 붉은 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현판이 달린다. 그 현판의 내용은 대충 '주체00년 김ㅇㅇ 수령동지께서 ㅇㅇㅇ현장지도 중 찾아와주신 집'으로 적힌다. 이러한 방문의 대상이 되는 가정은 이를 반기는 마음 절반, 싫어하는 마음 절반이라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방문준비로 인해서 집 안팎이 정돈되고(페인트 칠부터 시작해서 동네 진입로까지 싹 다 새로 깔린다고 한다.) '수령님께서 직접 만난 사람'이라는 북한에서 최고의 끗발을 날릴 수 있는 뒷배가 생기기 때문에 절반은 기쁜 마음이고. 방문 이후 다녀간 집 자체를 전술한 벤치처럼 보존해야하기 때문에 돈이 있건 없건, 지원이 있건 없건 항상 그 상태 그대로 유지시켜야 할 의무가 생기기 때문에 싫어하는 마음이 같이 생긴다고 한다.
  • 보통 동아시아에서는 부모, 선조, 성인, 군주의 한자를 피하는데 이를 피휘라고 한다. 왕조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모습이었는데 김일성 가문은 특이하게 아버지의 한자를 차용하여 이름을 짓는다. 이를 편휘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일반적이나 아시아에서는 일본에서나 쓰이던 특이한 방식이다.
  • 김정일이 실권을 쥐게 된 1980년대 이후로는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고, 유년기부터 항일투쟁과 해방 시기까지의 활동을 다룬 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같은 책을 집필했다. 하지만 저 회고록은 자기 입맛에 맞게 항일운동사를 마구 뜯어고치고 윤색해 북한 밖에서는 불쏘시개로 취급된다.
  •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었으며, 심지어는 한국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 실제 1989년 소설가 황석영 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하여 주석궁에 갔을 때는 황석영의 여러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까지 했을 정도라 한다. 문익환 목사는 성경책을 보여줬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 때 동북항일연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에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김일성이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으로 국제친선전람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는데, 양강도 삼지연군 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 서예 활동을 많이 했다. 북한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꽤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개성에 있으며, 인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여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북한의 종합대학 중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 북한 원의 인물이다. 북한 원 2기 3차 시리즈 100원권 지폐에는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는 기나긴 수식어가 붙어 있다.
  • 김일성의 장례식에 당시에는 북한의 인민들이 총동원되어 매일 생화를 들고 김일성의 동상을 찾았고 이로 인해 북한에 꽃이란 꽃은 모조리 팔려버리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김일성 사망 당시에만 해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날에는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고 이 시기를 이용하여 짬짬이 꽃장사에 나서는 장사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의 장례기간 동안마다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북한 돈으로 5원밖에 안 하던 생화 한송이의 가격이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10배 가까이 오른 50원까지 거의 인플레이션 급으로 올랐을 정도다. 심지어 그 가격에도 꽃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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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납북 신상옥과의 대화 도중 고려연방제의 국호 후보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라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때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점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박정희의 신라 계승 정신도 좋지 않게 보았다. 위 발언에서는 '우리가'라고 하여 고구려를 망하게 한 계파를 '우리'라고 주장한다고 적혀 있지만, '우리', '그'라는 군말이라 신라가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시켰다고 하여 나쁘게 본 것으로 묘사된 경우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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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정권도 초창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기에 김일성과 태극기가 나란히 있는 사진들이 있다. 심지어는 위의 사진처럼 김일성이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영상도 있다. 지금 와서 보면 매우 어색한 사진이기도 하다.
  • 장성택의 길이라는 책에 의하면 김일성은 자신의 건강이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던 시점에 자신이 가장 믿는 측근 10명을 불러 모은 뒤 손잡이가 은으로 되어 있는 권총 열 자루를 꺼내어 각자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리고 엄중한 태도로 그들에게 후계와 체제 문제에 대한 중대한 발언을 남겼다. 그 발언은 "만약 자신이 죽은 후 후계자인 아들이 자신의 노선에서 일탈해 함부로 체제 개혁에 손을 댄다면, 누구라도 바로 이 총으로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이었다 한다.
  • 아들인 김정일의 매우 사치스러운 식습관이 잘 알려진 것에 비해 김일성의 식습관은 알려진 부분이 많지 않다. 우선 김정일이 집권하던 시기는 김일성이 생존하던 시절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체가 더 발달하였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준 후지모토 겐지와 같이 이를 증언하는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더 많다. 그래서 김일성보다 더 잘 알려진 것. 김일성의 경우 된장과 같이 으로 만든 음식을 즐겼다거나, 개고기 고래고기를 자주 먹었다는 식의 증언은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교차검증이 잘 안되는 편이다.[47]
  • 2021년에도 그와 같은 고향 출신의 실향민 김형석 씨가 존재한다. 북한에서 1947년까지 살다가 하나 둘씩 조용히 주변 인물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월남한 것이다. 김일성은 아이 때부터 골목대장의 성격을 가졌으며, 지식보다는 의지가 강하고, 목적의식이 강했던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를 젖 먹여 키운 할머니가 김일성에 의해 자식을 잃기도 했다고 한다. 그 할머니가 '그놈, 내 아들 두 놈 다 잡아 죽일 줄 알았더라면 그때 젖꼭지로 콧구멍을 막아서 죽이는 건데 못했다'라고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
  • 어려서 중국인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중국어는 대단히 능통했다. 영상으로 보다시피, 김일성은 한국어 억양이 약간 섞인 중국어 동북방언 억양으로 말했는데, 이는 그가 지린성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펑더화이 역시 김일성이 지린성 억양을 썼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 외에 월어를 비롯한 여러 지방의 중국어 방언도 수준급으로 구사할 줄 알아서 통역 없이 회담이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러시아어는 30대 되어서 배우긴 했지만 소련에서 몇년 살았기 때문에 통역 없이도 그런대로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은 되었으나 중국어만큼 유창하진 못했고 이 때문에 고려인 출신의 유성철, 문일 등 러시아어 통역을 데리고 다녀야 했다.

6. 가족 관계

김일성은 김태서가 시조인 전주 김씨의 후손이다.
  • 8대 조부: 김계상
  • 8대 조모: ???
  • 7대 조부: 김차형 (1699년 - 1768년)
  • 7대 조모: 나씨 (1703년 - 1744년)
  • 6대 조부: 김욱 (1728년 - 1813년)
  • 6대 조모: 도민숙 (1735년 - 1811년)
  • 현조부: 김민수 (1770년 - 1854년)
  • 현조모: 고송희 (1772년 - 1832년)
  • 고조부: 김송령 (1810년 - 1899년)
  • 고조모: 나현직 (1811년 - 1897년)
  • 증조부: 김응우 (1848년 - 1878년): 북한에서는 그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민중들을 선동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게 이끈 주동자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이건 역사왜곡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사건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감사 박규수와 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장교 출신의 박춘권이었다. 물론 당시 기록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사건 당시 김응우는 21세의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1807 - 1877)는 이미 60을 바라보는 노회한 고위 관료였다. 누가 이 사건을 주도했을지는 뻔한 일.
  • 증조모: 리씨 (???? - ????)
  • 조부: 김보현 ( 1871년 8월 19일 - 1955년 9월 2일)
  • 조모: 리보익 ( 1876년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 부친: 김형직 ( 1894년 7월 10일 - 1926년 6월 5일): 개신교 미션스쿨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동문들과 '민족주의'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아들과 달리, 이 단체의 목표는 일종의 준비론에 가까웠다고 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는 자신의 아들과 달리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훗날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점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 외조부: 강돈욱( 1871년 2월 3일 - 1943년 11월 14일)
  • 외조모: 위돈신
  • 모친: 강반석 ( 1892년 4월 2일 - 1932년 7월 31일): 만약 베드로를 떠올린다면 맞다. 장로회 장로 강돈욱의 차녀로, 그녀 본인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참고로 숙부인 강량욱은 장로회의 목사였다.[48]
  • 본처: 김혜순, 김일성이 만주에 있던 시절 여자라 정식 혼인관계였는지는 불확실하나 1940년 일본군에 체포되면서 조선족 순사와 재혼하고 자연스레 헤어짐.
  • 정처: 김정숙 ( 1917년 12월 24일 - 1949년 9월 22일) 본래 회령지역 지주에게 첩으로 팔렸다가 탈출하여 김일성의 부하 지갑룡의 아내로 1933년부터 1940년까지 6년간 있다가 지갑룡이 생사 불명일때 김일성이 데려다 살다가 김정일을 낳으면서 아내로 격상되었다. 참고로 김혜순이 있을때도 김일성과 불륜 사이였고 생사불명이던 지갑룡은 멀쩡히 살아있었다고..
  • 후처 김성애 ( 1928년 - 2014년) (추정) 타자수 출신으로 김정숙이 김정일을 임신중에 불륜으로 간통해서 김정숙이냐 나냐 선택하라고 김일성에게 요구 했고, 김정숙이 난산으로 위험할때 치료를 거부하고 사실상 자살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 첩실
      • 지순옥: 빨치산 시절 부하 강홍석의 아내였으나 김일성이 몇 달 데려다가 살았다고 한다. 김정숙처럼 아들을 못 낳아서 아내로 승격 실패..
    • 홍귀원: 벽초 홍명희의 딸로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비서였으나 김성애가 임신 중, 김일성이 간통하여 임신 시켰고 출산중 사망.
      • 제갈 아무개: 김일성의 주석궁 안마사 내지는 간호사. 김일성의 많은 자식들 중 하나인 김현의 모친. 이외의 알려진 것은 없다.
      • 김송죽 기사: 기쁨조 출신이라고 한다.
      • 김순희 기사: 김일성 말년에 전담 간호장교 였다고 한다.
  • 형제
  • 자식
    • 김정일 ( 1941년 - 2011년)
    • 김만일 ( 1944년 - 1947년): 3살 때 김일성 관저에 있는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다가 그 연못에 빠져 익사했다.
    • 김경희 ( 1946년 - )
    • 김평일 ( 1954년 - )
    • 김영일 ( 1955년 - 2000년)
    • 김현 ( 1971년 - ): 김일성과 제갈씨에게서 태어온 사생아다. 북한 당국에서 존재를 철저히 숨겼지만 북한에서 넘어온 이한영이 자신의 수기를 통해 김현의 존재를 알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2001년 자신의 이복형인 김정일에게 처형당했다. 사람들의 추측으로 정통성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김현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과 동갑이다. 그런데 2015년에는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있으며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 김백연 ( 1987년 - ): 위에 나온 김송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아버지와의 나이차가 참으로 장대하며 동년배 내지는 1살 연하로 확정된 김여정의 고모다.

의외로 사람들을 충공깽하게 만드는 사실은 김일성 집안이 본디 개신교 집안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강반석이 장로회 장로 강돈욱의 딸이었다.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부모가 기독교인임을 부정하고 김형직은 무신론자. 어머니 강반석 삼촌어머니 현씨와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며 기독교인 집안임을 부정한다. 김일성은 교회에 나가기 싫어했고 아버지가 안나가도 된다고 맞장구를 쳤으며 강반석은 심심해서 나간거라고 애써 기독교의 영향을 부정하며, 오히려 자기가 기독교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목사와의 인연을 친아버지처럼 모셨다고 과시했는데 이 분은 대한민국 해군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의 부친되는 분이다.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가 아들처럼 돌봐주었다고 구라를 쳤지만 손목사 가정에선 이를 부정한다. 그저 안면만 있는 사이이며 손원일 제독과는 학년이 많이 차이나서 알지도 못했을 거라고. 다만 손목사가 김일성이 길림시절 다른 어려운 조선청년들을 도와 주었을 수도 있고, 만년의 김일성이가 손목사를 장문에 걸쳐 칭송했기 때문에 이런 인연으로 손제독의 형 손원태 박사는 미국 거주중에 김일성 에게 초청받기도 하고 사망 시 조문차 방문하고 방문기간에 생일을 맞은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직접 차려 주기도 했다.

북한이 1946년에 내놓은 공식 김일성 전기인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에 따르면 1930년대에 한영애란 여자와 하얼빈에서 살림을 차린 적이 있었으나 난리통에 헤어졌고 이후 최희숙이란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나 일본인들이 김일성을 홧병 걸려 죽게 하려고 사로잡아서 눈알과 심장을 뽑아 죽였다고 김일성은 주장했는데 소련에 의해 우상화된 김일성의 전기인만큼 신뢰성은 낮다. 한영애는 김일성이 한반도 이북의 수괴가 되자 6·25전쟁 도중에 김일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동하다가 공습으로 죽었다 한다. 이후 최희숙의 친구인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난' 여자인 김정숙과 결혼했다고 김일성은 구술하고 있는데 이후 이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은 철저히 말소되었고, 그나마 연재처였던 정로 신문은 199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책자 형식으로 편찬하여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비치중이니 큰맘 먹고 서초 국립중앙도서관 5층까지 가서 뒤져봐야 한다.

7.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31 - 1945 입당


1945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45 조선공산당 남북 분당

1945 - 1946 창당

1946 - 1949 합당[50]


1949 - 1994 합당[51]
사망

8. 어록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도 책임이 있어!
- 1950년 11월 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 10월 10일 한국군과 UN군이 파죽지세로 평양으로 진격해 오자 평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한 라디오 방송.[52]
남조선 인민들은 스스로 해방 투쟁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무장공비를 지속적으로 침투시켜서 해방구를 만들고 봉기를 시켜야 한다.
사람이 건전한 인격을 갖추려면 다면적인 지식을 섭취해야 하지 않습니까. 학교당국은 어째서 새것을 한창 섭취해야 할 청년들에게서 세계적으로 공인된 선진사상을 연구할 권리마저 빼앗습니까. 맑스나 레닌의 저작들이 보통책방에까지 흘러나와 글을 아는 사람이면 다 읽는 판인데 유독 화성의숙에서만은 어째서 그런 책들을 못읽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일성 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제1권[53] 제2장 제3절 타도제국주의동맹.
우리가 해방직후에 조선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떠들었다면 누가 그것을 인정하였겠는가? 인민들은 우리의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란 것은 한 이부자리를 쓰고 살며 한 가마 밥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까지 악선전하였기 때문입니다.[54] 이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때에 우리가 사회주의 구호를 들었다면 인민들은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현단계에 있어서 당 및 국가사업의 몇가지 문제들에 대하여”(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결론, 1955년 4월 4일) #
소련을 모델로 삼는 것이 이 나라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는지는 젼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자기 백성들을 너무 잘 먹이는 것을 경계한 것처럼 보인다. 1977년, 동독 에리히 호네커[55]와 만났을때 그는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더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56]고 말했다. 이것은 베른트 쉐퍼가 말했듯이 "어떤 동독 지도자 입에 올렸을 경우 무사하지 못했을" 발언이었다. 발라즈스 스잘론타이는 "김일성은 일관되게 정권의 사회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경제적 '조정' 보다 그렇지 않은 것을 선호했다"고 지적한다.
- B.R. 마이어스 저,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중에서-
우리 행성에서 핵무기가 있는 한 핵전쟁의 위협은 가셔질 수 없으며, 인류는 항시적인 핵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핵무기의 시험과 생산, 배치를 금지하고 지금 있는 핵무기들을 축감하며 나아가서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합니다.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 빨리 핵무기 장거리 탄도 미사일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위에서는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매
지금 일꾼들은 마치도 리순신( 이순신) 장군을 우리 시대의 영웅보다 더 나은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려 하고 있다. 조국해방전쟁( 한국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는 리순신보다 나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우리 일꾼들은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도 리순신 장군만 자꾸 내세우고 있다.[57]
- 1967년, 김일성저작집에서 #
내가 죽으면 나의 혁명동지들이 묻혀있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어달라. 그곳에서 내 옛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
- 1994년,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아들 김정일에게 유언처럼 남긴 당부.[58]
남조선 당국자들은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고 민족 단합이 아닌 외세와의 야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신들을 문민정부라 칭하지만 역대 군부독재 정권과 조금도 다를바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핵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갈등을 충돌(동)질 하는 건 미국입니다!
- 1994년 생전 마지막 신년사 중.
동무들이 당의 결정을 아는가? 농사제일주의, 경공업제일주의, 무역제일주의, 세가지 제일주의인데 화학비료는 남흥화학하고 흥남화학을 생산정상화하도록 만들라. 비료만 생산정상화하라.
금년에 비날론은 계획된 대로 하고 명년에는 5만톤 만부하를 걸어야 돼. 그 다음에 세멘트를 우리가 정상화해야 돼. 세멘트를. 세멘트가 1 200만톤이란 말이야. 세멘트를. 난 세멘트를 만부하 역시 걸라는 게다.
허구 배무이(선박건조)를 많이 해야 돼. 배무이. 배무이, 그전에 내가 말한것을 백척을 맨들라(만들어라). 그 다음에는 전기를 앞세워야 돼. 내가 늘상 말하는것 같이 전력, 철도, 이거는 어떤고 하니 인민경제의 선행관(앞세워야 할 부문)이라고.
금속문제를 마저 해결해야 되겠어. 금속은 지금 어떤고 하니 우리가 구체적대책을 세워야 한다, 전기하고 금속만 풀면 우리 나라에서는 잘 살수 있다고, 우리가.
내가 이번에 카터 보고 회담할 때 지금 유엔에서 제재하겠다 하는데, 하려면 해라. 이때까지 우리는 제재받고 살았지 제재 안 받고 산적이 없다. 다 제재한다고 우리를. 일본놈들도 제재하지, 당신들도 다 제재하지. 우리 제재 받고 살았다. 제재받고도 이만큼 살아나가는데, 제재하려면 더 똑똑히 해라. 우리 못살 거 뭐이가? 그랬더니 '제재 취소하겠다.' 그래. 취소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나도 마찬가지다. 못사는가 봐라. 우린 더 잘산다.
— 1994년 7월 6일 생전 마지막 지시 中 #(02:13부터)

9. 대중매체에서

9.1. 대한민국

198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의 얼굴이 공개되는건 한국에서는 코렁탕의 지름길이었다. 대부분 캐리캐처로 등장했으며 브리태니커나 뉴스위크지에서 김일성의 사진이 나올 경우 먹지로 처리하거나 찢어버려서 수입되었으며 해외 제작 6.25 전쟁 다큐멘터리의 경우 김일성의 육성 부분은 묵음으로 처리했다. 이런 것들이 풀린 시기는 1988 서울 올림픽 전후.
  • 1961년작 영화 《붉은 두목》에서는 배우 백송(본명 김정순)이 연기했다.
  • 1982년 KBS1 100분 드라마 《반역자》에서는 배우 김희라가 연기했다.
  • 1982년 KBS1 반공드라마 《 지금 평양에선》에서는 배우 문오장의 손과 입만 나오는 걸로 처리되었다. 다만 문오장 본인이 출연한 KBS2 토크쇼 《밤과 음악사이》 자료화면에 따르면 그는 김철만 역도 맡은 것으로 나온다.
  • 1990년 KBS 실록대하드라마 《 여명의 그날》에서는 배우 전광렬이 연기했다. 해당 작품은 외압성 조기 종영으로 끝났는데, 외압을 받은 이유는 김일성 미화 논란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처음에는 이상을 가진 항일 투사였으나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독재자로 타락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전광렬은 기존의 '혹부리 돼지' 이미지와는 다른 샤프한 미남이었고, 방영 당시에는 3당합당 이후의 여대야소 정국인데다 김일성 가짜설이 아직 대세여서, 김일성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든 경직된 시기였다. 드라마에서 박정희의 모습도 일본군 신분으로 비밀 광복군 활동을 하는 모습으로 나왔다. 영상
  • 1993년 남파간첩 출신 귀순자 이항구[59]가 <소설 김일성>을 출간하였다.
  • 굽시니스트의 2차 세계대전 만화에 코믹하고 무능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웹버전과 출판버전 둘 다 나오는데 웹버전은 지프차 타고 전장에서 도망치다가 홍범도 장군한테 관광당하는 내용이며, 출판버전은 독일군 포로로 잡혔는데 자신이 북쪽의 실권자라면서 "살려주면 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허풍을 친다. 홍범도 장군이 구해주면서 페어로 다니는데, 마지막에 홍범도가 버려진 정교회의 성당에서 봉인이 풀린 라스푸틴의 고환을 재봉인하기 위해 김일성의 목 뒤에 고환을 박아버려 혹이 생긴다. 시간이 흘러 김일성이 죽기 직전 김정일에게 자신이 친모임을 고백한다.
  • 2016년 개봉한 영화 《 인천상륙작전》에서는 배우 이원종이 연기했다. 흰색 육군 원수용 하예복을 입고 있다.
  • 싱어송라이터 천용성은 2019년 6월 《김일성이 죽던 해》라는 제목의 음반을 발표하였다. #

9.2. 일본

9.3. 북한

북한 영화에서 김일성을 다룬 유명한 작품 중엔 1980~1987년까지 만든 연작영화 <조선의 별>, 1985년작 북-소 합작영화 <영원한 전우> 등이 있는데, 상당수 내용은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과 정권 수립 준비과정 등이며 1993년까지 관련 영화들은 김정일이 만든 '백두산 영화창작단'이 제작했다. 의외로 김정일이나 김정은과 외모가 비슷한 배우가 젊은 날의 김일성으로 나오는데, 대표적인 예가 배우 강덕이다.

김일성 역할을 한 배우는 '1호 공훈배우' 대우를 받으면서 평생 그것만 해야 하고 대단히 경호를 잘 해주는데, 김일성 가족 역을 한 배우들도 마찬가지다.[61] 2012년 러시아 방송에서 한 의사가 김일성 배역 연기를 위해 성형수술도 했다고 한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박정희 전문 배우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의 배우도 이 정도 대우를 받지만 그 사람은 다른 역도 꽤 나왔다.(이하 2014년 KBS2 《 남북의 창》 보도내용 참고)

10. 별명 및 호칭

10.1. 부정적 호칭

이하 내용은 1994년 7월 11일 한국경제신문 기사 12일 한국일보 기사를 참고함.
  • 남한
    • 혹부리, 돼지 등 외모 비하 별명들, ㄱㅅㄲ 등 온갖 욕설들[62]
  • 북한: 일반 주민들 관점의 경우, 북한 언어전문가 서정범 경희대 명예교수 등이 위 기사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반대파가 추방된 평양과 같은 곳은 꿈도 꾸지 못한 일이라고 한다. #
    • 골든 베이비: 북한 주재 서방국가 외교관들이 김일성 동상이 금박으로 칠해진 것을 비꼬는 호칭.
    • 김마두: '김일성은 마적단 두목'의 준말.
    • 조선 히틀러: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같은 독재자란 뜻. 둘 다 북한 집권 초기에 은밀히 입에 오르내렸다.
    • 양다리 동무, 왔다갔다 동무: 중-소 분쟁 때 북한이 등거리 외교를 할 당시 붙여진 호칭.
    • 왕포쟁이, 후라이 6단, 대포쟁이: 김일성은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한다는 주민들의 불만이 내포된 호칭들.
    • 큰곰, 너구리, 메사구(입이 큰 메기) 등: 김일성의 외모에서 착안함.
    • 송지떡(소나무 껍질떡) 장군, 죽장군 등: 북한 주민들을 제대로 먹여주지 못한 데서 오는 반발심으로 붙인 것이다.
    • 1호 대상자: 숙청 제1호라는 뜻
    • 김인백 동무: '김일성은 인간 백정'의 준말.
    • 김피내: '김일성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명수'에서 따온 준말.

10.2. 북한 입장에서

위 기사에서 언급된 국방연구원 북한연구학자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했으며, 옹호 목적으로 한 게 아니다.
  • 김일성 장군: 1945년 귀국 후 처음 불려짐.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민 환영대회 때 불려짐.
  • 내각수상: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뒤 불려짐
  • 수령: 정권 초기부터 일컬어짐. 1956년, 스탈린 격하에 놀라 일시 중단했으나 8월 종파사건으로 반대파를 모두 숙청한 이후부터 다시 사용 시작.

11. 관련 사건사고

12. 관련 문서

13. 관련 연구

1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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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교롭게도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날이다. 북한에서는 이를 앵글로색슨식 자본주의가 침몰하고 주체의 시대가 열린 날로 선전한다. [2] 이북 5도 기준으로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 만경대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3] 김정일, 김정은과는 달리 '중앙위원회'가 들어갔다. [4]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 소재. 현재는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속해 있다. [5]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세칭 안식교 신자라는 주장이 있다. 조모 리보익과 김일성의 사촌 김원주는 재림파였던 것으로 확인되어 왔고 김일성이 태어난 남리에 재림파 교회인 칠골교회가 있었던 것을 근거로 한다. 외가 강돈욱이 장로회 장로이고 어머니 강반석이를 따라 송산교회를 다닌걸로 보아 어린시절 장로회 교회에 출석 한걸로 보인다. 감리교회 목사인 손정도와의 인연으로 교회에서 풍금도 탔다는 충격적인 회고도 있으나 손목사 측에서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손목사와의 관계를 과장했다고 하고 부정하는편이다. [6] 사회주의자로 전향한 후에는 대외적으로나 형식적으로는 무신론적 스탠스를 내세웠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상당 기간 유지한 걸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해방 직후 수술을 할 때 기독교식 기도를 했다고 한다. ( 장기려 박사의 회고) 자손들은 철저한 무신론자인 것과 대조된다. [7] 젊은 시절의 키로 노년에는 173cm까지 줄었다. [8] 북한의 김씨 세습 3대 중에서 유일하게 AB형이다. 김정일 김정은은 A형. [9] 북한은 당국가체제(黨國家體制)로서, 조선로동당 총비서 직함이 다른 어떠한 직책보다 앞선다.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전문, 제11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은 ...(중략)...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라는 문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죤 리춘히가 항상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라며 가장 먼저 호칭하는 데는 다 이러한 이유가 있다. [10] 북한에서는 1967년 반당반혁명종파사건으로 불린다. # 박금철 부총리는 갑산파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민족보위상(오늘날의 '국방상')도 맡고 있었다. 이효순은 대남총국장으로, 박금철의 수하였다. 이 사건은 김일성 우상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그 흐름에 배치되게, 박금철에 대한 개인 우상화 때문에 일어난 숙청사건이다. # 이를 계기로 북한 내 반김일성세력이 종적을 감췄다. [11] 6.25 전쟁은 김일성이라는 일개인이 결심만 안했다면 충분히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김일성의 북한은 평화적인 통일 노력을 모두 거절하고 전쟁준비만 했다. 베트남도 전쟁으로 적화통일을 이루긴 했지만 일단 공격을 북베트남이 했음을 숨긴 것도 아니고, 실제 자신의 공적이 있는 호찌민의 지지가 남북베트남 모두 압도적이어서 남베트남 정부의 주민 지지가 낮아 평화적으로 통일을 추진해도 적화가 될 공산이 있었다. 물론 호찌민도 전쟁으로 통일을 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12] 존 에버라드 전 평양주재 영국대사의 의견에 따르면 한반도의 통일 여건은 똑같이 분단되었지만 좌우의 합의로 통일을 이룬 오스트리아보다 유리했다고 주장한다. 미소의 대립이 유럽에서 더 치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지원을 적화통일을 위한 것으로 이용했고, 이들을 끈질기게 설득시켜 남침에 대한 '승인'을 받아낸다. # 마오쩌둥조차 처음엔 전쟁을 거절했다가 스탈린의 승낙을 보고 자신도 동의하고, 국제연합군에게 밀리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병하였다. # 이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의 중화민국을 공격할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1965년에 김일성은 다시 남침을 시도했으나 중공 지도부의 만류로 실현되지 못했다. [13] 그가 소련군 사령부를 찾아서 처음 한 말이 소련군이 벌인 해방전에 참가하지 못 한 자신도 참가한 것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거절당하자 아예 가상의 군대를 동원한 역사왜곡을 벌여 아이들에게까지 이를 가르친다. 김일성/생애 문서 참조. 그 외에도 아래 어록에서 보듯 스스로 '인민이 다가오게 하는 수단'이라며 거짓말을 정권 유지 수단으로 삼았음을 인정하긴 했다. [14] 도덕적인 사람도 출세를 하긴 했으나 자신에게 속고 있는 우직한 사람을 좋아했다. [15] 고난의 행군 시기까지도 한국보다 잘 살았다고 생각하는 증언도 있으며, 한류나 중국의 외부 문물이 들어온 2000년대 중후반 이후에야 북한 주민이 자신의 국가가 가난함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되었다. [16] 명색이 갈라진 한반도의 북쪽의 지도자였으면서 통치기간 내내 한국과 세계에 적대 위주의 태도만 고집했으며, 전쟁은 비롯하여 군사적 도발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후계자들까지도 그런 입장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가 워낙 말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에서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의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들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소 간의 갈등 심화와 좌우 사이의 새 나라의 정치적·경제적 방향성에 대한 대립 때문에 어려웠던 것도 있었지만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전쟁이 없은 채 국내 정치인들 간에 타협이 어느 정도 되었다면 분단이 실제 역사만큼 길어지거나 남북 관계가 실제 역사만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17] 정확히는 중학교 중퇴지만 교과과정은 거의 마쳤다고 한다. 그러므로 현재로 치자면 고졸 내지는 고교 중퇴에 해당한다. [18] 소련군 장교들은 소학교 졸업을 겨우 한 대다수 항일연군 병사들이 아닌, 중졸에다 나름대로 리더십도 엿보였던 김일성에게서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19] 중공군 개입이 시작된 1950년 10월과 11월에 미군은 압록강변의 국경도시인 혜산진에 도착했고 국군은 함경북도 청진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반면 이 때 김일성은 중공군이 올 때까지 강계의 벙커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20] 스탈린과 마오쩌둥도 우선 민심을 얻기 위해 토지개혁으로 땅을 나눠주고 약탈과 학살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민심을 얻었다. 학살자로서의 악명은 주로 체제가 안정된 이후에야 집중된 것이다. [21] 다만 사회주의를 지킨다는 쇼와 해외의 지지기반을 위해 미국의 인종차별을 트집을 잡거나, 해외의 독재자와도 잘 어울리기는 했다. [22] 분파마다 차이는 있지만 공산주의는 민족을 초월한 계급적 연대를 강조한다. [23]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이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단 한 번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대립이 사회의 근본 모순이며, 이러한 계급투쟁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변증법적으로 해체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세우는 계급론을 폐기한 적이 없다. 이런 계급구분조차도 생산수단의 사유화 여부에 따른 것일 뿐, 혈통이니 하는 전근대적인 수단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즉, 신분제 사회부터가 마르크스주의에서 100만 광년 떨어진 정책이다. [24] 유사한 사례로 87년 6월 항쟁 당시 미국의 반대가 전두환의 진압을 방해하는데 기여하였다. 폴 포트의 독재도 같은 공산 국가인 베트남에 의해 종식된다. [25] 아예 북간도에서 태어난 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에서 자신의 고향을 강( 두만강) 건너 남쪽이라고 하고 만주는 돈벌러 가는 곳이라고 여겼던 것과 대조적이다. [26] 적어도 김일성은 경제성장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고 그래서 실제로 개발독재 정책을 추진은 했다. [27] 김일성 시대에도 맹목적인 수령숭배가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인간이 영원히 산다든지, 축지법을 쓴다든지, 세살짜리 아기가 천재적인 능력으로 총을 다룰줄 안다든지하는 신화적인 이야기는 집어넣지 않았다. [28] 약 170명이 동원된 반면 보천보에 있던 일본 병력은 군도 아닌 순사 5명이 전부였다. 그들 중 아무도 죽지 않았다. 정작 이 전투에서 전사한 건 요리사와 2살짜리 여자 아기, 이렇게 꼴랑 2명 뿐이다. [29] 림은,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金日成 王朝', 沃村文化社, 1989) p 252. [30] 북한의 암살을 피하기 위해 전 비서 임은이라는 가짜 신분을 내세웠다. [출처] 림은, '北韓 金日成王朝 祕史' 한국양서, 1982, pp. 326 - 327. [32] 일제강점기에는 '金日星'으로 더 자주 표기되었다. [33]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아버지가 김성애와 불륜을 저지른 성격도 있고, 자신도 70년대 초에는 권력을 얻기 위해 애를 썼음을 감안하면 이쪽이 유력하다. 굳이 김일성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국가의 수명을 단축시킬 이유도 찾기 어렵다. 실제로 김일성이 싫어했다면 권력을 얻고 싶어한 김정일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김일성이 오늘내일하던 90년대 초였다면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어느정도 설득력을 얻을 지 모르나 기쁨조가 처음 생긴 1975년은 아직 김일성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34] 지역차가 큰 편이라 전라도 지방은 161 - 162cm, 함경도 지방은 167~168cm. [35] 라고 했지만 경주 김씨가 인구가 많아 그렇게 표현했을 뿐 전주 김씨가 장손(長孫) 집안이다. [36] 17세기경 김일성의 8대조인 김계상이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했다. [37] 프랑스 TF1에서 '붉은 왕(Le roi rouge)'이라는 이름으로 1988년 12월 2일에 방영된 르포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88년 12월 27일 KBS 1TV에서 방영된 바 있다. [38] 놀새나라TV 에서도 남한에 오고나서 한글날 이라는 날이 있는걸 처음 알았다고 한다. [39] 과거 주영북한공사를 지냈던 태영호 의원에 의하면 조선글날은 푸대접 받아서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전에는 달력에라도 표시 됐지만 김정은 집권 후로는 이마저 빠졌다고 한다. 관련기사 자세한 내용은 한글날 문서의 북한의 한글날 문단 참조. [40] 김책은 당시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김일성도 김책에게는 깍듯했다고 한다. [41]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남로당 사건으로 군에서 예편된 후 군에 복귀하지 못하고 평생 빨갱이 소리나 들으며 살았을 것이다. [42] 6.25 전쟁이 없었다면 중화민국은 중공군의 침략으로 멸망 당했을 것이고, 장제스도 반동분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43] 전쟁 특수가 없었다면 이케타 하야토의 발언으로 실각되었을 것이다. [44]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은 일본을 농업국가로 만들려고 하였다. 근데 6.25 전쟁 덕분에 미군의 공급기지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45] 시인 전동혁. 이 사람은 1957년 소련파가 숙청당해 힘을 잃자 소련으로 돌아갔다. [46] 특히 중간에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라'는 내용. [47] 제대로 알려진 부분이 적은 편이지만 일단 김정일에 비해 확실히 소박한 입맛인 듯하다. 성장 배경과 젊은 시절 행적을 보면 적어도 아들처럼 산해진미를 맛보면서 자랐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48] 북한에서 성모마리아처럼 숭배되는 김일성의 어머니지만, 김형직 사후 안도현 만보라고 부르는 중국 동네에서 아편농사를 지었던 조광준이라는 홀아비와 재혼했었다. 그걸로 인해 김일성이 본격적으로 엇나가고 말았다는 설이 있다. 물론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불리할 가정사가 있다면 철저히 숨기며 김일성 일가를 미화하고 있다. [49] 1993년 - 1998년 9월까지 부주석. 2003년부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50] 조선신민당과 신설 합당 [51] 남조선로동당과 신설 합당 [52] 후에 김일성은 10월 12일 밤 평양을 비밀리에 탈출하여 덕천으로 도주했다가 일주일 후 평양이 한국군과 UN군에 의해 점령되자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나중에 중공군이 개입하고 난 뒤 12월 6일이 되어서야 평양으로 나왔다. [53] 아버지의 유언마저 왜곡한 책이다. 세기와 더불어 문서 참조. [54] 일제가 사회주의를 싫어하였고, 북한이 사후 행할 정책이 거부감이 심하리라는 예상이 있던 건 사실이나 대신 평안도 같은 지역은 자발적으로 민족자본가, 기독교 민족주의자가 있던 곳이었다. # 함경도는 좌파가 제법 있었으나 오기섭 같은 토착 공산주의자도 이 발언이 있고 난 후 수년 뒤 숙청된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유진오가 밝혔을 만큼 사회주의는 단순히 공산주의와 다른 진보적 사상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의 정책이 너무 폭력적이기에 사람들이 꺼린 것이다. 실제로 북한에 살았던 사람들이 드러내던 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대한 옹호를 목격하고 사회통제가 더 강화되기도 했다. [55] 당시 동독 서기장. [56] 여기서 사상이 나태해지고 행동이 산만해진다는 것은 경제가 성장해서 국민들 삶의 질이 높아지면 국민들이 독재자에게 저항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당연하지만 제대로된 국가지도자라면 해서는 안되는 말이며 한국에서 경제부장관이었던 김재익이 "경제가 성장하면 자동적으로 민주주의로 발전된다" 확신하였고 실제로 신군부에 협력했다는 비판에도 김재익의 경제정책은 한국이 신군부를 몰아내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는 토대가 된다. [57] 정작 김일성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리순신 장군들과 같은 우리 선조들의 영예로운 업적과 용감성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이 신성한 투쟁에서 우리의 인민군 장병들과 전체 인민들을 영웅적 위훈에로 고무 격려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사후에는 그나마 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급적 한계를 언급하고 외세 배격을 강조하는 하에 북한에서 연구되고 있다. [58] 그러나 김정일은 이 유언을 무시했고, 체제 선전을 위해 아버지의 시신을 엠버밍했다. [59] 1990년대까지 각 언론매체에서 '북한통'으로 이름을 날렸다. [60] 2010년 드라마 전우에서도 작지 않은 비중의 인민군 고급장교 역할을 맡아 비슷한 느낌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전시에 무능하다는 점도 같다. [61] 김정일은 미등장. 탈북자 주순영도 1호 공훈배우 시절 첫째부인 김정숙 역을 맡았다. [62] 사실상 민족을 반으로 갈라놓은 장본인이자 수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내몬 원흉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비속어도 웬만해선 허용된다. 심지어 욕설이 일체 허용되지 않는 군대 정훈교육 시간에도 백두혈통 삼부자 사진이 나오면 훈련병들이 욕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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