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06:49:20

김영주(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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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
前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
김영주
金英柱 | Kim Yong-ju
출생 1920년 9월 21일
평안남도 대동군
사망 2021년 12월 13일 (향년 101세)
평양시
가족 김형직(1894 ~ 1926)
강반석(1892 ~ 1932)
큰형 김성주( 김일성)(1912 ~ 1994)
작은형 김철주(1916 ~ 1935)
딸 김영성, 아들 김정현
친척 조카아들 김정일(1941 ~ 2011), 김평일, 김영일(1955 ~ 2000)
조카며느리 성혜림
조카딸 김경희, 김경숙, 김경진
조카사위 장성택
조카손자 김정남(1971 ~ 2017), 김정철, 김정은, 김인강
조카손자며느리 신정희, 리설주
조카손녀 김여정, 김은송
외조카손녀 장금송(1976 ~ 2006)
조카증손자 김한솔, 조카증손녀 김주애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정치경제학 / 학사)
모스크바 정치대학교 (법학 / 석사)
직업 관료, 정치가
정당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당의 2인자2.3. 몰락과 실종2.4. 김정일 시대2.5. 말년
3. 경력4. 수훈5. 기타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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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일성의 동생으로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었다.

김일성 일족 가운데 최장수한 인물로 일제감정기,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6.25 전쟁, 8월 종파사건, 천리마 운동, 조카 김정일의 탄생부터 죽음, 고난의 행군과 화폐개혁으로 몰락하는 북한의 경제 상황, 조카손자 김정은의 집권,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등 북한 현대사를 체험한 산증인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20년 9월 21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때 고등보통학교까지 졸업했으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 관동군 통역을 맡았다고 한다.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국민혁명군에 입대했던 이용상이 국부군 193사단 소속 대위 자격으로 일본군 독립혼성 82여단을 무장해제할때, 그가 조선인임을 알아본 이용상이 김영주를 따로 불러 자신도 조선인이라고 반갑게 말하자 김영주는 처음에는 중국말로 예?라고 반문하더니 곧 눈물을 글썽이면서 자신의 사연을 말했다고 한다. 일본군 통역으로 일하면서 반일감정이 강했는지, 통역을 하면서 천황을 일본 추장으로 통역하고, 일본은 일본을 낮잡아부르는 표현인 동양삼도라고 통역해서 이용상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후 이용상을 따라서 한동안 서울에서 지냈으나 김일성이 북한에 돌아와서 평양에서 연설한 것을 라디오에서 듣고 "우리 형님 만세!"라고 부르짖더니 이용상에게 사실 자신이 김일성의 동생임을 밝히고 같이 월북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용상이 거절하자 혼자 월북하여 김일성과 재회했다.

해방 직후에는 소련군정 주관의 시험으로 소련 유학에 합격해 모스크바 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정치대학에서 법학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1952년부터 모스크바 고급당학교 연구반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3월 북한으로 들어왔고,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소좌 계급을 받고 총정치국 제7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었으며[2] 군법 재판소의 사법행정서기관을 맡기도 했다. 1954년 로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57년에 과장,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김영주는 소련 유학파들을 적재적소에 대거 등용[3]하여 조선로동당의 조직을 확대하고 내각의 행정 역량을 확대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1955년, 김일성의 삽질로 북한에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북소관계가 악화되고 소련계 간부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김일성은 연안계 간부들에게 소련계들은 소련 국적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식들은 북한 주재 소련학교에 보내면서 자기들끼리 뭉쳐 특별 대우를 받고 러시아어만 쓰는 '두개의 의자'에 앉아있는 자들이니 조지라는 비밀 지령을 하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연안계들은 대대적으로 고려인 비판 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김영주도 매우 적극적으로 활약하여 평양시 당위원회 부위원장 홍순관, 평양시당 조직부장 김충식 등을 사주하여 심지어 외무상 남일과 외무성 부상 리동건까지 조리돌렸다. 이에 분노한 남일이 조직지도부장 박금철에게 항의하고 박금철이 홍순관과 김충식, 김영주를 불러 다그치자 홍순관과 김충식은 별말을 못했지만 김영주는 당당하게 지시를 받았기에 그렇게 했다고 맞받았다. 어이가 없어진 박금철이 누구 지시냐고 묻자 김영주는 김일성 초상화를 가리키더니 "저이가 시켰소."라고 하였고, 월권했다고 화를 내던 박금철은 갑자기 태도가 싹싹해지면서 "수상 동지가 시킨거면 나에게 귀뜸을 해줬어야지 않은가."라고 역시나 고려인 공격에 동참하게 되었다.[4] 8월 종파사건 이후 늙고 병들어 운신도 못하는 김두봉을 늙은 반동, 기생년에게 절하는 봉건주의자로 몰아서 조리돌린 것도 김영주의 주도였다. 이처럼 능력이 있었기에 김일성은 물론 김정일도 김영주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으며, 1970년대 중반엔 북한 내에서 소련 유학파의 대부 격으로 여겨졌다.

일각에서는 김영주가 관동군 헌병 통역을 맡았다고 주장하면서 평양정권이 친일파를 적극 기용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탈북자 출신으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주성하 이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5] 김일성이 변경에서 워낙 악명을 떨쳤기 때문에 일제는 이 사람을 붙잡아다가 선무공작에 이용했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김영주 케이스와 무관하게 평양정권이 친일파들을 어느 정도 기용한 것은 사실이다. 자세한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북한 참조.

2.2. 당의 2인자

1958년 10월 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에 임명,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으며 이에 대해 당의 갑산파, 군의 허봉학, 김창봉 등이 김영주를 일제에 부역한 반동으로 조직지도부장에 어울리지 않다고 반발하자 1967년 갑산파 숙청 사건을 통해 박금철 리효순 등 갑산파를 쓸어버렸으며 1969년에는 허봉학, 김창봉을 극좌 좌경 맹동주의자로 몰아서 역시 숙청하는 등 김일성의 절대적인 수령제의 건설과 김일성 우상숭배의 정착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5년 8월, 강영창 장의위원, 1965년 9월, 김은순 장의위원, 1965년 12월, 서채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제2차 당대표자회의에서 비서국이 설치되면서 비서로 선출되었으며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김영주의 급속한 성장에 허봉학, 김창봉 등이 불만을 드러냈으나 1969년 1월에 모두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에게 개기던 소위 '군벌관료주의자'들이 제거된 후 1969년 12월, 4기 20중전회에서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 1969년 3월, 김태근 장의위원,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 마지막날에는 김영주가 당규약 개정 보고를 맡았는데 4차 당대회에서는 명백한 2인자 박금철이 맡았던 자리였다. 그 정도로 김영주의 힘은 대단했다. 5차 당대회 결과 정치위원회 위원 겸 조직비서에 재선출되었다.

한편 괌 독트린 이후로 미군 철수의 압박,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친미국가인 파키스탄의 패배, 1971년 중화민국의 유엔 축출 등의 불길한 상황을 연이어 목격하고 비슷한 일이 한반도에서 벌어질 것에 대해서 극도로 불안해하던 박정희 정부에선 남북대화를 통해 긴장을 줄여야겠다고 판단하고, 남북대화를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2인자를 김영주로 파악하고 어떻게든 김영주와의 라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북측에 거의 강요하듯이 김영주와의 직접 회담을 요구하였다. 북측에선 김영주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으나 남한에서 김영주를 만나야 회담이 의미가 있다고 밀어붙혔고 그 결과로 1972년 5월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두 번 회담을 하는 등,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에 일정 정도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는 실제로 김일성이 김영주를 자신의 후계자로 고려하고 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냉전기 대표적인 공산주의 연구자였던 마이론 러쉬(Myron Rush) 교수도 김영주를 김일성의 후계자로 분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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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이후락, 김영주, 김일성.

허나 명실상부하게 김일성의 후계자로 여겨졌던 김영주를 물러나게 한 것은 다름아닌 그의 건강이었다. 70년대부터 김영주의 건강은 극심하게 악화되었고 이 때문에 7.4 남북공동성명 때도 북에서 김영주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남측에 김영주의 건강을 이유로 수차례 거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영주를 만난 이후락은 김영주의 건강이 정말로 좋지 않은가 알아보기 위해 그에게 강제로 술을 먹였는데 김영주는 한잔을 딱 마시고는 그대로 기절하여 며칠이나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영주에게 금주령을 내렸던 김일성이 노해서 김영주를 질책했다고. 결국 김영주는 공직수행이 불가능한 정도가 되어서 이후락의 평양 방문에 대한 답방도 자신이 아니라 부수상 박성철을 보내야 했으며, 1970년대 초부터 건강 이상을 호소하면서 공직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계속 비추었고 김정일을 자신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싶다고 김일성에게 제의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두고 시기상조라고 거절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자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김영주의 좋지 않은 건강을 틈타 김성애는 노골적으로 야욕을 부리며 정치에 간섭하려 하였고 이 때문에 김영주와 김성애의 관계는 매우 나빴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3년 8.28 성명을 발표하여 일방적인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하고 한동안 잠적하였다.

참고로 김영주의 병이 무엇이었는지는 말이 아주 많은데, 이후락은 식물신경불화증(자율신경실조증)이라고 기록했으며, 그외에 뇌졸중(장진성), 당뇨병(강명도), 정신분열증(박규식의 김정일 평전) 등등 증언마다 다르게 언급한다.

한편 50을 넘긴 나이에 이런 중병이 왔음에도 그는 101세까지 버텼다.[6]

2.3. 몰락과 실종

1973년 9월, 5기 7중전회에서 김정일이 새로운 조직비서에 선출된 것을 보면 이때 조직비서에서도 물러난 것이 확실하다. 이 때문에 1973년 말부터 남한에선 김영주 숙청설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74년 2월 15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고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에 위촉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미 김영주가 돌아오기 직전인 5기 8중전회에서 김정일을 정치위원에 보선,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추대한 상황에서 예전과 같은 존재감은 없었다. 이후 이집트를 비롯하여 해외 순방을 다녔으며, 최고인민회의 회의 주석단에 꼬박꼬박 나타났다. 장진성의 주장에 따르면, 1974년 쯤에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조직지도부 업무에서 완전히 물러나서 조직지도부 부부장이었던 김정일이 조직지도부를 장악한 것이라고 한다.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런데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회 명단에선 탈락하였으며 이후 최고인민회의 주석단에도 나타나지 않았음으로 정무원 부총리 및 정치위원회 위원에서 완전히 해임된 것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남한에선 '곁가지' 신세가 되어 숙청당했거나 지방 한직에 임명되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을 거라 여겨졌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에게 자신에게 개길 뜻이 없음을 드러내고자 식구들을 데리고 자강도로 내려가서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분석은 황장엽이 망명한 후 김정일이 김영주를 숙청했다고 주장하면서 백학순을 비롯해서 상당수 북한학자들이 수용,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북한의 실세가 김영주에서 김정일로 교체되는 것을 지켜봤던 중앙위원회 부부장 박병엽은 당시 김영주가 밀려난 것은 아니라고 증언한 바 있다. 정무적 감각이 매우 뛰어난 김영주가 향후 후계 구도에서 김정일이 부상하는 것을 막는 것은 사실 상 어렵다고 생각하고 김정일 세력과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이러한 타협으로 실제로 자신의 자리를 김정일에게 넘겨준 김영주는 자강도에 있는 특각에서 편안히 지냈으며, 그의 가족이나 평소 김영주 라인에 섰던 간부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주는 김성애가 김일성의 집에 들어온 이후 계모에 대한 반항심으로 밖으로 나도는 김정일을 거두어 사실상 자기가 키우는 등 어린 김정일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고 이후로도 후견인을 자처했기 때문에 김정일과 매우 친밀한 관계라고 설명한 바가 있다. 김정일의 러시아어 과외교사를 했던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 김현식 역시 김영주가 어려서 어머니 김정숙을 잃은 조카 김정일을 불쌍하게 여겨서 어릴 때부터 잘 돌봐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김영주가 산송장 취급받는 김성애에 비해서 명예직이나마 당의 요직을 거치면서 계속 대외활동도 했던것은 김정일과 김영주의 관계가 양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유추가 가능하여 현재는 김영주와 김정일이 정적이었다는 설은 설득력을 잃은 상태이다. 게다가 김영주가 은퇴하던 1970년대 초는 김영주가 당조직지도부장으로 철권을 쥐고 있던데에 반해 김정일은 정치위원회에도 몸을 담지 못한 선전선동부의 부부장에 불과했고 그런 김정일이 김영주를 몰아내는 것은 아무리 수령의 아들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뭣보다도 김정일을 적극적으로 정치위원회과 조직지도부에 추천한 인물이 다름아닌 김영주였다. 이 때문에 일본의 저명한 북한 연구자 와다 하루키 교수도 김영주를 김정일의 후견인으로 해석한다. 김정일 리더십의 전문가인 임재천 교수 역시 김영주 숙청설에 대해서 부정하는 입장이다.

2.4. 김정일 시대

이후 20년 가까이 종적을 감추어 잊혀졌던 김영주는 말년의 김일성이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시도로 정치 전면를 총지휘하면서 이 과정에서 친 김일성 성향의 구세대 인물들이 필요해지면서 다시 정치에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 대표격인 김영주의 복귀설이 돌았고 실제로 1993년 12월 개최된 조선로동당 6기 21차 전원회의에서 갑자기 등장, 정치국 위원으로 복귀했으며 이어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9기 6차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그 당시 남한 사회를 경악시켰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김정일을 쳐내고 김영주를 다시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있었지만 그보단 그냥 정권의 무게감을 주기 위해 불렀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이때 조직지도부장, 선전선동부장, 국방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 등의 요직을 꿰어차고 북한의 실권을 휘두르고 있던 김정일이 김영주의 등장을 자신에 대한 위협을 인식했다면 김영주의 국가 부주석 임명을 묵과했을리도 없었을거고 김일성이 죽은 후에 김영주를 가만 뒀을 리도 없다. 여튼 이때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어 김정일 시대 내내 당 조직개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17년간 정치국 위원을 지냈다.

부주석으로 임명된 후 얼마 가지 않은 1994년 7월, 형 김일성이 죽자 김일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김일성 헌법이 도입되어 중앙인민위원회 제도가 폐지되자 자동적으로 부주석에서 퇴임하였다. 하지만 새로 신설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선출되어 예우받는 원로로 남게 되었다. 이후 동료 명예부위원장들이 차례로 죽으면서 1998년 12월, 전문섭,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3년 9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09년 4월, 12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명예부위원장에 또 재선되면서, 건강 때문에 물러난 것이 무색하게 무척이나 장수하였다.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가 열리고 30년 만에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이 새로 선거되면서 정치국 위원에서 소환되었다. 2011년 12월, 조카인 김정일의 죽음까지도 목격하게 된다.

2.5. 말년

조카손자 김정은이 집권한 후에도 계속하여 예우받았다. 2012년 2월, 김정일훈장의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으며, 2014년 3월,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또 재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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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대의원 선거 참여 모습.

2015년 김영주가 북한의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모습이 북한 매체를 통해 공개되면서, 거동이 다소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상의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작 1970년대부터 건강 문제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후계자 논의에서도 빠졌던 걸 생각하면 인생사 정말 모를 일이다. 그 대신 권력을 물려받은 조카 김정일보다도 훨씬 오래 살았다.

슬하에 김영성과 아들 김정현을 두고 있다. 작은할아버지인데다가 이미 나이가 많아 은퇴해서 그런지 김정은이 건드리지 않아서 잘먹고 잘 살았다. 고모부 장성택이나 이복형 김정남처럼 현역에서 활동하거나, 후계자리를 위협할 정도의 권력을 가졌거나, 계승 자격을 가진 것도 아니며 이미 은퇴한지 오래인 90대 노인이고 직계 윗어른이니[7] 김정은이 굳이 무리수를 둬가며 건드릴 이유가 없기는 하다. 사실 그런거 다 차치하더라도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점때문에 만약 위협적인 존재라고 해도 죽이기는 커녕 유배조차 보내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정찰총국 대좌 출신 탈북자 김국성은 김영주가 김정은 시대에 함경북도 경성의 별장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고 증언했다.[8] 다만 자강도 강계의 별장[9]에서 말년을 보냈다는 설도 있다. #

2019년 4월, 1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헌법이 수정됨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직함이 폐지되면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소식이 없다가 2021년 12월 15일, 국내외 언론사에 김영주의 사망이 확인됐다고 로동신문을 인용해서 보도되었다. 로동신문은 "김영주동지는 당과 국가의 중요직책에서 오래동안 사업하면서 당의 로선과 방침을 관철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으며 사회주의건설을 힘있게 다그치고 우리 식의 국가사회제도를 공고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대개 화환 전달 뉴스는 그냥 령전에 화환을 보내주었다고만 쓰지 해당 인물의 공적에 대해서는 적지 않는 일이 많은데, 김영주가 김일성 독재 수립에 큰 공을 세운 것 자체는 맞다 보니까 고민 끝에 좀 자세한 화환 전달 뉴스를 내보내는 것을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14일에 그의 영전에 화환을 보내주었다는 것으로 보아 사망시기는 그 전날인 12월 13일 즈음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전의 위상에 비해서는 죽어서 대접이 상당히 박한데, 우선 같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을 지낸 최영림은 지금도 원로로 많은 행사에 초대를 받고 있지만 김영주는 2015년 이후로 그런 활동이 다 끊겼고, 역대 부주석들은 심지어 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으로 조총련 출신인 김병식까지도 장의위원회가 구성되고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지만 김영주는 부고 발표도, 략력 발표도 다 건너뛰고 장의위원회 구성도 없다. 당장 2020년 1월에 죽은 황순희는 장의위원회가 구성되고 성대한 대접을 받고 갔다. 현철해의 성대한 대접과 비교하면 백두혈통 최상위계층이 맞나 싶을 정도지만 그래도 화환 전달, 공적 인정 등은 이루어져서 사실상 기록말살형에 준하는 박한 대우를 받고 사망 시기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김성애보다는 훨씬 낫다. 아무래도 김일성 일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준걸로 보여진다. 다만 현철해 같은 경우는 김정은의 후계자 수업을 도와준 측면도 있으며 여러 공로를 인정받아 성대한 대접을 받은것이지 김영주는 평범한 김일성 일족으로서의 대우를 받은거다.

3.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
1958년 9월 27일 1973년 9월 17일?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조직부장 임명.
1973년 9월, 5기 7중전회에서 해임 추정.
조선로동당 4기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66년 10월 12일 1969년 12월 5일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선출
1969년 12월, 4기 20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조선로동당 4, 5기 정치위원회 위원
1969년 12월 5일 1976년? 1969년 12월, 4기 20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재선
1976년 중반에 해임
정무원 부총리
1974년 2월 15일 ?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1993년 12월 11일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9기 6차 회의에서 부주석 선출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직함 폐지
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위원
1993년 12월 11일 2010년 9월 28일 1993년 12월, 6기 21중전회에서 보선
3차 당대표자회에서 소환
10, 11, 12, 13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1998년 9월 5일 2019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직함 폐지

4. 수훈

5. 기타

  • 김정일과는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복동생이었던 김평일과 그 가족들이 김일성 사후에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도 김영주의 도움 덕분이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 김일성 말고도 김철주라는 형이 하나 더 있었는데 김철주는 빨치산 운동을 하다가 1935년에 사망했다.
  • 2020년 기준으로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김씨일가의 후광은 어디 가지 않는지 2020년 8월 20일에 있었던 신의주 세관원 전원 체포 사건이 있었을 당시 절대 다수의 세관원들이 숙청되어 감옥에 가거나 추방당했지만 세관원으로 있던 김영주의 손녀는 건드릴 수 없어 곧바로 빠져나왔다고 한다.
  • 만약 김일성 대신 김영주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면 2021년까지 75년 동안 주석이었을 것이다. 장기집권한 독재자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장수한 군주들 장수왕까지 넘볼 수준. 실제 역사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가 재위 70년을 갱신했다. 하지만 김영주는 빨치산 경력도 없고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점을 통해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므로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김정일 대신 김일성의 뒤를 이어서 집권했을 가능성은 꽤 있었는데 이 경우 가장 장수한 독재자가 됐을 것이다. 물론 초대로든 2대로든 권좌에 오르지 못했기에 오히려 장수했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술한 얘기들은 모두 큰 의미는 없는 가정. 독재자는 만기친람(萬機親覽) 식으로 모든 걸 직접 나서서 관리해야 하므로 스트레스와 체력 소모가 꽤나 심하다. 즉 집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수한 것일 수도 있다. 저 엘리자베스 2세의 큰아버지를 보자면 즉위한 지 10개월 반 만에 퇴위했는데 77살까지 산 반면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는 16년 동안 재위하고 56살에 사망했다.
  • 김영주와 비슷한 인물로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가 있다. 라울 카스트로는 실제로 형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는 데에 성공했지만, 김영주는 그렇지 못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라울 카스트로는 형이 독재자가 되기 이전부터 형과 활동을 함께하면서 쿠바 혁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고 혁명 직후 혁명무력상에 임명되어 북한으로 치면 최용건, 최현, 오진우의 역할을 맡은 인물인 반면, 김영주는 형이 독재자가 된 이후에 형 덕분에 출세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차이점이 있다.
  • 해방 직후 일본군 무장해제 과정에서 중국군 193사단 통역관인 이용상[10] 만났다고 한다. 1946년 같이 귀국하였으며 월북 직전까지 서울에 있는 이용상의 집에서 같이 지냈다고 한다. 당시 가명인 김일선을 사용하였다. 이용상은 7.4 남북 공동 성명 당시 김영주가 특사로 서울에 오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영주를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6. 대중매체에서

  • 1980년 KBS-TV 100분 드라마 《붉은 왕조》에선 배우 김성겸이 연기했는데, 1982년 《지금 평양에선》과 1984년 6.25 연속기획 《함정》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진유영이 연기했다.
  •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선 배우 이병철이 연기했다.
  • 2013년 MBN 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 - '7.4 남북공동선언 비화' 편에선 배우 강기성이 연기했다.


[1] 2014년 3월, 13기 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명예부위원장으로 선출될 당시의 공식 사진으로 당시 94세였다. [2] 그런데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주는 그보다 3살 아래였다고 하는데 박갑동은 1919년생이다. [3]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재의 특성을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능력은 유능한 리더의 필수 조건이다. [4] 참고로 홍순관과 김충식 모두 연안계가 토사구팽당하면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5] 주성하 기자는 확고한 반김, 반북 성향이나, 사실이 아닌 것까지 이용해서 북한을 비판하지 않는다. 허위사실을 가지고 하는 비판은 비판한 사람이 오히려 진실성이 의심받게 되므로 백해무익하다. 실제로 주성하는 완전통제구역 관련 거짓 증언을 남긴 신동혁의 실체가 드러나자 "거짓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평가를 남겼다. [6] 심지어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김정일보다도 10년이나 더 장수했다. [7] 무려 그 김일성의 친동생이다. 아무리 김정은이 고모부와 이복형을 죽인 인물이긴 하더라도 북한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김일성의 직계 혈족을 죽였다간 후폭풍이 엄청나단 것은 눈치챘을 것이다. [8] 김국성은 그래서 장성택이 숙청될 때도 김영주처럼 지방 특각에서 밥만 잘 먹이면서 지내게 할 줄 알았는데 공개총살해서 놀랐다고 덧붙였다. [9] 김성애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10] 前 국립극장장, 서울 국제방송국장 역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