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00:03:37

신상옥

신상옥 감독의 수훈 및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금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06년
이름 신상옥
분야 영화
금관문화훈장(1등급)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감독상
한국최우수영화상
( 1961년)
제1회
( 1962년)
제2회
( 1963년)
김기영
( 하녀)
신상옥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유현목
(아낌없이 주련다)
제3회
( 1964년)
제4회
( 1965년)
제5회
( 1966년)
이만희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신상옥
( 벙어리 삼룡)
유현목
(순교자)
제6회
( 1967년)
제7회
( 1968년)
제10회
( 1971년)
김수용
(안개)
신상옥
( 대원군)
유현목
(분례기)
제10회
( 1971년)
제11회
( 1972년)
제13회
( 1972년)
유현목
(분례기)
신상옥
(평양폭격대)
최훈
(수선화)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파일:baeksangartsawards4.png
영화부문 감독상
- 제1회
( 1965년)
제2회
( 1966년)
[1] 신상옥
( 벙어리 삼룡)
김수용
( 갯마을)
제7회
( 1971년)
제8회
( 1972년)
제9회
( 1973년)
정소영
(필녀)
신상옥
( 전쟁과 인간)
김기영
( 충녀)

}}} ||
<colbgcolor=#6699cc><colcolor=#fff> 신상옥
申相玉
파일:ff91bafcaabc4863bf6b04a34f7f558b.jpg
출생 1926년 10월 18일[2]
함경북도 청진시
사망 2006년 4월 11일 (향년 79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 평산 신씨 (平山 申氏)[3]
가족 배우자 최은희, 슬하 2남 2녀[4][5]
학력 경성중학교 (졸업)[6]
도쿄미술학교 (중퇴)
병역 해당 사항 없음
종교 무종교 가톨릭( 세례명: 시몬)
데뷔 1952년 영화 '악야'

1. 개요2. 생애3. 사망4. 연출작 일람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영화 감독.

2. 생애

1926년 10월 18일, 함경북도 청진시 출생으로 한때 함경북도 회령시 경성군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6]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1945년 도쿄예술대학을 중퇴하였다. 일본 유학 덕분에 일본어에 유창했으며, 후에 지인에게 자신의 납북 상황을 알려준 녹음 테이프도 일본어로 되어있다.[8]

해방 후 1946년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한 적이 있었고, 1948년 영화 '희망의 마을'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 이듬해 1949년 영화 '여성일기'의 미술감독을 맡았고 이어 같은 해 1949년 영화 '파시'로 영화 조감독으로 데뷔하였으며 1952년에 16mm 영화인 '악야'라는 작품으로써 본격적인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1960년 자신의 영화사인 '신필름'을 설립했다. 신필름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형태에 가장 가까웠던 첫 번째 기업형 영화사로 1960년대 한국 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다. 미국 콜럼비아 영화사를 모델로 전속 배우, 작가, 감독, 촬영 감독, 녹음 기사까지 영화 제작에 필요한 인력을 자체 조달하는 영화 스튜디오였다. 신상옥의 아내인 최은희를 비롯해 김승호, 신영균, 이예춘, 남궁원, 태현실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신필름 전속 배우로 활동했으며 용산에 지어진 1천 평 규모의 촬영소에는 촬영 스튜디오와 녹음실, 편집실, 영사실, 부설 연기자 양성소 등을 두었다. 1961년부터 1970년까지 쏟아낸 작품 수는 102편이며 신필름 휘하에 있던 안양필름이 제작한 영화까지 합하면 150편이 넘는다. 신필름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 1961년 성춘향의 성공으로 기반을 잡고 사업을 키워서 전성기엔 상근직원수가 200명, 전속배우가 70명에 달했다고 한다. 1966년 신필름은 홍콩을 비롯한 해외 합작 영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안양종합촬영소를 세워 몸집 불리기에 나섰지만 정부의 지원이 약속대로 이뤄지지 않자 재정적 위기에 몰리기 시작해, 안양종합촬영소는 산업은행으로 넘어가고 현대식 설비들이 즐비했던 스튜디오는 황폐화됐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흥행작들도 적어지면서 설상가상의 위기를 맞아 신필름은 1970년부터는 회사 규모를 줄이며 연명하고 TV 보급에 따른 영화계 침체까지 겹쳐 고전하다가 결국 1975년 홍콩과 합작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중 검열 과정에서 삭제된 키스 장면을 극장에서 상영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영화사 등록취소 처분을 받고 해체된다.

배우였던 부인 최은희 1953년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불임인 관계로 친척조카를 입양하였다. 아들 신정균은 신상옥의 사촌의 아들인 당조카이고, 딸 신명희는 육촌의 딸인 재종질녀. [9] 훗날 두번째 부인인 오수미 사이에 아이가 생겨 최은희가 불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양자인 신정균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중간에 배우 오수미와 사귀게 되면서 아내인 최은희와는 이혼했으나 최은희 1978년 1월 14일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자 그녀의 행방을 찾다가, 그 역시 같은 해 7월 19일 홍콩에서 납북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문서로. 오수미는 신상옥이 납북되자 홀로 신상옥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들을 키우다가 유명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했으나 1992년 교통사고 요절했다. 이후에 신상옥과 최은희는 재결합하였다.

다행히 북한에서도 영화 활동을 이어 나갔다.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면서 '소금', ' 불가사리' 등의 영화를 제작했다. 1960년대 이래로 북한 영화의 소재가 체제선전이나 계몽성 코미디, 첩보물 등 장르가 편중되어있었던 이유도 있고 무엇보다 재미도 있었기때문에 북한 영화계와 인민들에게 신성한 충격을 줌과 동시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고, 김일성, 김정일 부자도 흡족해할만큼 작품성도 뛰어나서 해외에서도 상을 탈 정도였다. 그러다가 1986년 3월 13일 최은희와 함께 오스트리아 에 있던 도중,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무려 납북 8년만에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했다. 8년 중 영화활동은 3년 정도 뿐이었는데, 그거 밖에 안한건 사실 초반 5년간은 탈출 시도를 했다가 수용소(사실상 감옥) 노동생활과 세뇌교육을 받은 적[10]이 많기[11]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1987년 11월 29일 김현희가 일으켰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다룬 반공 영화인 ' 마유미'를 대한민국 복귀작으로 제작하여 1990년에 내놓았다. 이 때 김현희와 매우 닮아서 캐스팅한 배우가 당시 무명이었던 김서라. 미국에서 닌자 키드 아동 액션 영화를 제작 하였다. 감독은 존 터틀타웁으로 나중에 쿨 러닝, 페노메논, 내셔널 트레져 시리즈 감독으로 할리우드 흥행 감독이 되었다. 199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에 정치 스릴러 증발이 비경쟁 초청되었다. 1992년에 사이먼 신이라는 예명으로 닌자 키드 3편인 3 Ninjas Knuckle Up 를 직접 감독했으나, 1995년에 잠깐 개봉해 처절하게 흥행과 평은 망했다.

2000년에 미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추천하는 한국고전영화 #

3. 사망

이후 간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2006년 4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가현리 소재의 천주교 공원 묘지다.

4. 연출작 일람

임권택 감독의 경우처럼, 워낙 연출한 작품이 많아서 대표작만 추려도 수십편이 넘는다. 연출을 하였지만 크레딧에 넣지 않은 경우도 부지기수. 이하 목록은 나무위키에 항목이 작성되었거나 그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 경우만 모아놓은 것이다.


[1] 1965년 신설 [2] 한국영화감독사전에는 1925년 10월 8일 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3] 현대의 평산 신씨 중에서는 항렬이 꽤 높은 편이며, 신익희의 동생 뻘이다. [4] 장남 신정균(1963년생)이 32세손 ◯균(均), ◯규(圭), ◯로(老), ◯곤(坤) 항렬. [5] 이 중 둘은 오수미 소생이다. [6] 현재의 서울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중학교가 아니라, 함경북도에 있던 학교. [6] [8] 해당 육성 파일은 다큐 영화 <연인과 독재자>에서 최초 공개되었다. [9] 후사를 잇기 위해 같은 항렬 혈족인 조카, 재종, 없으면 재재종까지 데려다 양자 양녀로 삼는 일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그 시대에는 충분히 있을 법 했던 이야기다. [10] 그래서 사실 최은희와 만난건 납치당한지 5년이 지난 1983년이다. 다시는 탈출 안하겠다고 서약하자 최은희가 살던 곳으로 데려가서, 김정일이 있는 자리에서 처음 만난 거라고 한다. [11] 두번이나 했다고 한다. 처음 도망쳤을때 잡아놓고 몇년간 감옥에 쳐넣어서 세뇌가 된 줄 알았는데, 도로 또 도망치려고 해서 또 세뇌하느라 시간이 총 5년이나 걸린 것. [12] 제작은 2004년이다. [유작]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