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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colbgcolor=#CC0000><colcolor=#fff> 동북항일연군
東北抗日聯軍
파일:동북항일연군기.png
창설일 1933년 9월
해체일 1941년
소속 중국공산당
규모 불명
사령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역사
2.1. 소멸
3. 대표적인 출신 인물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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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공산당 동북 방면에서 운영하던 다민족 부대. 화북 방면에서 운용되던 팔로군과는 친척관계이다.

2. 역사

1933년 9월에 결성된 동북인민혁명군을 모태로 한다. 1935년 8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8.1 선언을 통해 모든 민족, 모든 계층의 항일연합군 창설을 결의하였다. 그 결의에 따라 1936년 동북인민혁명군과 다른 항일조직들이 모여서 동북항일연군 제1군부터 11군까지가 창설되었다. 시작은 공산당계열, 국민당계열, 토비(土匪) 등의 연합이었지만,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선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있게 된다.

2.1. 소멸

팔로군과는 다르게 1941년을 전후로 관동군의 치안숙정공작으로 사실상 소멸되고 만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동북지방이 매우 추운 지역이라 생존환경이 열악했고, 일본의 통치기간이 길어서 통제가 엄격했고, 일본군이 집요하게 항일연군과 농민들의 사이를 분리시켰고, 1930년대 후반 일본 소련과의 분쟁( 1938년 장고봉 사건, 1939년 노몬한 사건)으로 관동군의 치안이 강화되고 병력이 증강된 것 등의 여러 원인들에 의해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1]

항일연군 1~3로군의 지도부와 잔여 병력들의 상당수는 1941년까지 소련 영내로 피신하여 소련 공산당 NKVD 휘하의 제 88국제여단으로 편입되었는데, 여단내 조선인 대대의 대대장을 맡던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여단장은 저우바오중으로, 대체로 동북항일연군 때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3. 대표적인 출신 인물

3.1. 허형식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관. 1942년까지의 행적만 보면 네임드급 무장 독립운동가로,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 <광야>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바로 허형식이다.

김일성, 김책, 최용건, 최현 같은 동북항일연군 전우들이 북한정권을 수립한 것과 달리, 허형식은 이들이 소련으로 피신한 이후에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2년 8월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휘하에 있던 동북항일연군을 이끌며 전사했기에, 북한정권 수립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훈장수여는커녕 1980년까지 대한민국에 정착한 후손들이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허형식이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고, 무장항일투쟁 당시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그가 속한 동북항일연군 다수가 북한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 참여정부가 들어서며 기류가 바뀌는데, 참여정부는 2005년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도 북한정권 수립과 한국전쟁 참전과 관련이 없다면 건국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훈장서훈 법안을 개정하면서 허형식 역시 훈장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실제로 여운형 주세죽 김산 손용우 같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심지어 김일성의 삼촌인 김형권과 외삼촌인 강진석 등이 건국훈장을 받았고, 허형식의 아버지인 허필 역시 2010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허형식 본인은 2019년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대구보훈지청에 서훈 대상자로 신청하여, 2021년 현재 서훈신청 대상자로 접수되어 국가보훈처의 심사를 받고있다.

3.2. 팔녀투강()

1938년 10월 20일, 일본군과의 전투 끝에 목단강에 투신하여 자결한 8명의 여성 열사들. 일본군에게 잡혀서 치욕적인 포로가 되느니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항일 게릴라들이다. 지금도 중국 현지에서 항일투쟁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현지 학자들 중에는, 팔녀투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동북항일연군 제5군 1사단 소속으로 8명 전원이 헤이룽장성 출신이다.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 안순복(, 안쑨푸)[2]: 1915년생(향년 23세). 피복공장장. 조선인. 목단강시(무단장시) 출신.[3] 중국공산당원. 안씨 집안은 가난한 농민이었지만 가족 모두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안순복도 어려서부터 항일 소년단원으로 활동했다. 아버지와 오빠들이 일본군에 희생된 후 안순복은 남편 박덕산(, 퍄오더샨)을 따라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으나, 남편도 1935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유복녀를 낳은 후 안순복은 다시 동북항일연군으로 활동하다가, 1938년 10월 20일 아래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전사한다. 당시 여성대원들 중에는 안순복 외에도 아이 엄마들이 있었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 어려워 흑룡강성 밀산현의 어느 농가에 모두 맡겼는데, 이 아이들도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 랭운(, 렁원): 1915년생(향년 23세). 대대지도원 겸 분대장. 본명은 정지민(, 정즈밍). 가목사시( 자무쓰시) 출신.[4] 1934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같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인 남편 주유인(, 저우웨이런)과의 사이에 1녀를 두었지만 얼마뒤인 1938년에 남편은 전사했고 슬하의 외동딸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여담으로 8명의 열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실제 사진이 존재하며 나머지 7명은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스케치로 남아있다.
  • 이봉선(, 리펑샨): 1918년생(향년 20세). 보급병. 조선인. 목단강시 출신.[5] 17세 때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하여 선전ㆍ정찰 활동을 했고 일본군 250명을 사살한 ‘흑할자요 저격전’에도 전투병으로 참전했다.
  • 호수지(, 후슈즈): 1918년생(향년 20세). 기관총 사수, 1분대 반장. 목단강시 출신.[6] 중국공산당원.
  • 황계청(, 황구이칭): 1918년생(향년 20세). 의무 사관. 목단강시 출신.[7] 집안이 항일운동을 하는 가문[8]으로써 어릴적부터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 양귀진(, 양구이전): 1920년생(향년 18세). 부분대장, 2분대 반장. 목단강시 출신.[9] 중국공산당원. 어린 나이에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나서 17세에 과부가 된 뒤, 시댁에서 그를 인신매매를 하려고 하자 그대로 집을 떠나 도망쳐서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다. 부친인 양징춘(杨景春)은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딸의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1962년 10월이 되어서야 자기 딸이 팔녀투강의 영웅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 곽계금(, 궈구이친)[10]: 1922년생(향년 16세). 소총병. 칠태하시( 치타이허시) 출신.[11] 1936년에 항일연군에 입대하였고 제5군 교도단 분대장 풍문래(冯文礼, 펑원리)와 약혼하였으나 본인은 얼마 안가서 순국했다. 남편은 그후 무려 60여년이 지난 1992년이 되어서야 그녀의 사망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왕혜민(民, 왕후이민): 1925년생(향년 13세). 척후 안내원. 12세 때 동북항일연군 제5군의 군부부관인 아버지 왕희문(王)을 따라서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으나 얼마 후에 아버지는 전사했다. 투신 당시에 불과 13세라는 어린나이로 8명 중에서 최연소자.

동북항일연군 제5군 1사단에는 30명의 여성대원들이 있었다. 1938년 10월 20일 일본 관동군 약 1,000명에 의해 수많은 동료들이 포위되자, 여성대원들 중에서 8명이 나서서 적들을 유인하며 교란하여 동료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성공적으로 포위를 뚫었다. 그러나 미처 자신들은 빠져나가지 못했고, 포위되어 생포될 위기에 처했다. 그녀들은 최후까지 저항하였고, 마침내 총알이 다 떨어지자 고립무원의 위기 속에서 차가운 오사혼하()[12]에 뛰어들어 순국함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8인의 영웅적인 일대기는 1986년에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같은 해인 9월 7일에는 그녀들의 영웅적인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흑룡강성 목단강시 사회과학원 인근 빈강() 공원 광장에 대규모의 동상과 기념비를 세웠으며, 초대 중국 총리 주은래의 부인인 등영초() 여사가 비석에 팔녀투강() 휘호를 썼다. (안순복과 이봉선은 한복 차림으로 조각되었고, 조선인이라고 쓰여 있다.) 박물관도 건립되었으며, 2013년에는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4. 관련 문서



[1] 윤휘탁, 「항전시기의 화북과 동북, 항일전술과 투쟁환경의 비교고찰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의 상이한 운명과 관련하여-」(2003) [2] 항일투쟁 초기에는 장복순 (张福顺, 장푸순)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3] 前 목릉진(穆棱镇) 신안둔(新安屯) [4] 前 화촨현 열래진(悦来镇). [5] 본적은 린커우현 용조진(龙爪镇) [6] 본적은 린커우현 조령진(刁翎镇) 마제촌(马蹄村) [7] 본적은 린커우현 조령진 남위자하(南围子河)이며 현재는 하심둔(河心屯)으로 개칭되었다. [8] 집안이 일제의 수탈에 맞서고 저항하는 항연보루호(抗联堡垒户) 가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9] 본적은 린커우현 동류수 하자둔(东柳树 河子屯)이며 현재는 연화향(莲花乡) 동흥촌(东兴村)으로 개칭되었다. [10] 어릴적 이름은 곽국화 (郭菊花, 궈쥐화)였다가 입대후에 개명했다. [11] 출생당시에는 보리현. 출생하고 나서 유년시절에서는 린커우현 조령진 사함촌(四合村) 사합둔에서 성장했다. [12] 목단강의 지류. 만주어로 ‘사나운 강’, ‘흉포한 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