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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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2. 생애
1913년 함경북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90년대 북한 자료가 대개 그렇듯이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1948년 조선로동당 함경북도 당위원회에서 간부과장을 지냈으며 1954년 청진제철소 지배인이 되었다. 1957년 4월, 2기 내각에서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 9월, 기계공업성 부상에 임명되었으며 1958년 2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일룡의 뒤를 이어 신임 기계공업상에 임명되었다. 1958년 9월 7일, 김응기, 김응상, 리병남, 박문규, 박세창, 유철목, 정성언, 최재하와 함께 북한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2급을 받았으며 받았다. 아마 중공업 부문에서 실적을 많이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9년 3월, 김일성의 함흥시 현지지도를 수행하였다.1960년 4월 4일, 기계공업성, 금속공업성, 동력화학공업성이 중공업위원회로 통폐합되면서 중공업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60년 5월에는 교편을 잡고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 교수로 일했다. 1961년 8월 김일성종합대학 교무부총장, 과학원 측지 및 지구물리학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임하다가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무임소상에 임명되었는지 1961년 11월 11일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상'에서 해임된 기록이 있다. 1962년 4월 21일, 내각 제1사무국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내각으로 돌아왔고,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내각 제1사무국장에 유임되었다. 1965년 8월, 강영창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내각 제1사무국장에 유임되었다.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 1969년 3월, 김태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1971년 3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3년 3월,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으며 1973년 9월 20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홍성남에게 국가계획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대외경제사업부장로 이동한 것이 로동신문 보도에서 언급된다.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 1980년 1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봐서는 정무원 부총리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부총리 겸 기계공업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3년 9월, 김일대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1983년 12월에 부총리에서 해임, 정치국 후보위원에서도 소환된 것으로 보이며 국가과학기술위원장으로 이임했다. 1985년 5월까지 재임하다가 해임되어 리자방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나 특별한 직책은 받지 못했다. 이후 1992년 9월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두문불출하였다.
2002년 1월, 기계공업상 재직 시절 김일성과의 일화를 다룬 "한점의 불꽃이 온 나라에 타번지도록"을 집필하였으며, 이후 사망하여 2004년 11월, 정무원 부총리 직함으로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이후 딱히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중앙통신은 "오랜 기간 국가경제기관의 중요한 직책에서 사업하면서 조선로동당의 사회주의경제건설로선을 옹호관철하는데 기여한 정무원 부총리였던 최재우"라고 나름대로 좋게 말해주었다.
3. 참고문헌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