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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478,#C39335> 내각 수상 | 정무원 총리 | ||||
<rowcolor=#003478,#C39335> 제1-4대 | 제5대 | 제6대 | 제7-8대 | 제9대 | |
김일성 | 김일 | 박성철 | 리종옥 | 강성산 | |
<rowcolor=#003478,#C39335> 정무원 총리 | 내각총리 | ||||
제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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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리근모 | 연형묵 | 강성산 | 홍성남 | 박봉주 | |
<rowcolor=#003478,#C39335> 내각총리 | |||||
제16-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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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 제19-20대 | 제21대 | 제22대 | |
김영일 | 최영림 | 박봉주 | 김재룡 | 김덕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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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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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리종옥 李鍾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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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6년 1월 10일[1] |
함경북도 성진군 | |
사망 | 1999년 9월 23일 (향년 83세)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관료, 정치가 |
학력 |
니혼대학 (전문부) 하얼빈공업대학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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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국가 부주석, 7~8대 정무원 총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916년 1월 10일, 함경북도 성진군, 현재의 김책시에서 출생했다.[2]김일성 시대의 잘 나가던 여러 엘리트들과 달리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만주국의 하얼빈공업대학에 진학했다.[3] 1940년, 하얼빈공업대학 졸업 후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했으며 1944년 성진에서 적우사(赤友社)를 조직하여 지하활동을 전개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남기진 못했다는 정보가 있다. 여정의 증언에 따르면 교토 제3교고에 유학해서 일본도 다녀왔으며 귀국 후 성진의 상업학교에서 교사를 했다. 해방 후 1946년 성진 배영중학교에서 교무주임로 일하다가 1948년 청진방직공장 지배인이 되었으나,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기사장 추천을 잘못한 것 때문에 친일파로 몰려서 곤란한 처지에 놓였으나 김정숙이 탄원을 받고 김일성과 리종옥의 만남을 주선하여 오해를 풀고, 일제강점기의 항일 이력이 입증이 되면서 입당을 시켰다 카더라.[4]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1949년 10월 내각 산업성 중공업 국장에 임명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산업성 부상으로 승진, 6.25 전쟁 발발 후 산업성 대표로 서울에 파견돼 리승기를 비롯하여 남한의 과학계 엘리트들을 대거 북한으로 데려갔고, 조선왕조실록 적성산본을 기차 째로 노획해서 북으로 보낸 것도 그로 알려져 있다. 1951년 7월 27일, 산업성이 중공업성, 경공업성, 화학건재공업성으로 분리된 이후 12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초대 경공업상에 임명되면서 북한 정계에서 주목받는 테크노크라트가 되었다.
2.2. 부수상 시절
1955년 11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경공업상에서 해임되었다. 1955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공업부가 신설됨에 따라 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1956년 1월 4일, 전임 국가계획위원장인 부수상 박창옥이 1955년 대기근의 죄를 뒤집어쓰고 경질당하자 후임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공업부장은 백홍권에게 물려주었다. 4월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3차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상무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중앙위원회 중공업 담당 위원장을 거쳐 1958년 9월 7일, 김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1959년 7월 1일, 국가계획위원장에서 경질되고 경공업성 부상 림계철에게 자리를 넘겨주었으나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라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 각종 열성자대회에 출석하여 경제계획을 독려하였다. 1960년 1월 15일,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서 물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겸 중공업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0년 4월 4일, 금속공업성, 기계공업성, 동력화학공업성이 중공업위원회로 통합되면서 초대 중공업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8월 19일, 중공업위원회가 금속화학공업성, 전기석탄공업성, 기계공업성으로 분리되면서 금속화학공업상에 임명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대의원에 선출되어 부수상에 유임되었고, 금속화학공업상에 유임되었다. 김일성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다가 대약진 운동에 대한 중국의 허세를 듣고 이를 북한에도 도입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으나 의심많은 김일성이 중국의 허풍을 믿지 않아 1개 농장에서만 시범적으로 심경밀식을 해보라고 지시한 결과 심경밀식의 결과가 참혹한 것으로 드러나 끝내 무산되었다. 1964년 12월 4일, 금속화학공업성이 금속공업성과 화학공업성으로 분리되면서 금속화학공업상에서 해임되었다. 1965년 8월에 과학원장인 강영창 장의위원장이 되었으며 강영창의 후임으로 1965년 9월 21일, 과학원 총회에서 과학원 원사로 선거되었다. 1967년 12월, 4기 대의원에 선출되어 부수상에 유임되었으며 과학원장 자리는 오동욱에게 물려주었다. 1968년 홍명희 장의위원,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장,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2.3. 몰락과 부활
하지만 제1차 7개년 계획의 부진한 성과 때문에 1970년 6월 29일부터 7월 6일까지 이어진 4기 21중전회에서 김일성에게 준비한게 고작 이게 다냐고 직접 문책을 받고 숙청당해[5] 함경북도의 광산 지배인으로 하방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김정일의 후계 체제가 확립된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1970년에 체포된 공작원 김진계는 여기에 대해서 흥미로운 증언을 남기는데,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에 소련 대사가 미국과 전쟁나면 어떡할 거냐고 리종옥에게 마구 따지자[6] 리종옥은 당연히 미국과는 평화적으로 담판할 것이라고 소련 대사를 안심하여 돌려보냈는데, 김일성은 니가 뭔데 그런 약속을 했냐고 리종옥에게 매섭게 비판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대안의 사업체계에 반론을 재기했다가 혼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리종옥의 숙청 시점은 1968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북한에서 공개한 선전물으르 보면 1970년 여름에 진행된 회의, 즉 4기 21중전회에서 숙청됐다고 분명히 쓰고 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조차 탈락하였다. 그러다가 1972년, 광업상으로 정계에 복귀하여, 12월에 5기 대의원, 중앙인민위원, 정무원 중공업위원장에 선출되면서 재기하였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통일부에선 리종옥이 1973년 3월에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정준택 국장 때의 장의위원 서열을 보면 그보다 먼저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상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 소집 직전에 이루어진 1972년 12월의 5기 6중전회에서 보선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3년까지는 중공업위원장 직함을 수행한 것이 북한 언론에서 보도되지만 중공업위원회가 1973~1974년 사이에 금속공업부, 전력공업부, 광업위원회 등으로 분산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리종옥이 정확히 어떤 부서로 이동했는지, 아니면 어떤 부서를 맡기나 했는지 등은 북한에서 밝히지도 않았고 남한에서 파악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후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뭔가 분명히 하긴 했는지 1976년 12월 1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계응태와 함께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76년 3월에 남일 장의위원,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에 위촉되었으며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더니 12월 13일, 5기 15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박성철의 뒤를 이어 정무원 총리로 발탁,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정무원총리로 2차 7개년 계획을 수행하였다. 리종옥은 김일성의 과학기술 경시와 중공업, 군수공업 집착, 주먹구구의 계획으로 엉망진창이 된 북한 경제를 살려보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으나 큰 성과를 보진 못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의 승계를 보조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82년 2월, 7기 대의원, 중앙인민위원에 선출되었고 2차 7개년 계획이 순조롭다고 과시하기 위한 김일성의 의도에 따라 4월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4월에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2월부터 8월까지, 남한의 신현확 국무총리와 남북총리회담을 실시하기 위한 실무대표 접촉을 가졌으나 성사되진 못했다. 이런저런 악재가 겹치면서 김일성에게 또 질책을 받았으며 1983년 3월에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정위원으로 강등당했다. 6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정치국 상무위원 중 사망이 아니라 해임된 것은 리종옥이 유일하다. 2005년 7월 15일자 로동신문에 따르면 1982년 12월 9일 정치국 회의에서 김일성으로부터 광산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을 왜 아랑곳하지 않고 있냐고 쪼인트를 까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6년 1월 24일자 민주조선에 실린 <정치국회의에 상정된 로동조건 문제>는 구체적인 날짜는 얼버무리고 있지만 역시가 광산실태 문제 때문에 자강도 책임비서를 비롯한 간부들이 비판을 받았다고 되어 있는 것을 봐서 같은 회의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2.4. 부주석 시절과 말년
이후 1984년 1월,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정무원 총리에서 해임되어 강성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대신 국가부주석에 선출, 경제 부주석을 맡아 동유럽 순방길에 나서 북한과 3세계의 경제적 협력을 추진하였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에는 김일(1910)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86년 11월, 90년 4월에 8기 대의원, 9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부주석에 유임되는 등 북한의 핵심 엘리트임을 과시하였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1988년 10월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89년 최덕신 장의위원에 위촉,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장,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장을 지냈다.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음으로 2번째 김일성훈장을 득템했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4년 김일성이 죽은 후 장의위원을 맡았으며 김정일, 오진우, 강성산에 이어 주석단 서열이 4위에 이르렀다.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맡았다.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가 8년 만에 소집되어 김정일을 조선로동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장으로 선출한 후 김영주, 박성철, 전문섭 등과 함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임명됨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혁명원로로 대접받았으며 김정일, 김영남에 이어 주석단 서열 3위의 영예를 누렸으며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을 맡았다.
1999년 9월 23일, 1시에 83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리종옥동지는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시기 당과 국가의 중요한 직책에서 사업하면서 사회주의공업화로선을 관철하며 경제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리종옥동지는 다년간 정무원총리,공화국부주석 등 국가기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주체의 사회주의제도를 공고히 하고 나라를 부강발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리종옥동지는 우리 당의 대외정책을 받들고 공화국의 국제적권위를 높이며 인민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대외활동에서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리종옥동지는 우리 당의 혁명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혁명적수령관을 확고히 세워,혁명의 시련과 난관을 꿋꿋이 이겨내면서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자신의 힘과 지혜를 다 바쳐 투쟁하였다.리종옥동지는 당과 혁명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로 하여,불굴의 투쟁정신과 겸손하고 소박한 품성으로 하여 동지들과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해방후 첫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조국의 륭성발전과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하여온 재능있는 지도일군인 리종옥동지를 잃은것은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된다."라고 아주 좋게 칭송하였다.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북한에서는 리종옥이 김정일을 보좌하겠다고 마지막까지 함경북도의 광업지대를 현지료해하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데 죽기 직전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강철 생산작업을 점검했다고 한다. 근데 당시가 고난의 행군이라는 것을 선전에서도 의식했는지 옆에 있던 아들 리만박이 생산이 잘 되고 있다고 구라를 치자 장군님이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가 죽은 후 6년 후인 2005년, 로동신문은 그의 일대기를 집중 조명한 특집 기사를 내보내, 그가 "한평생 과학기술 영역, 국가 경제분야에서 땀흘려 왔다"면서 수령 이외의 엘리트 칭송에 인색한 북한 치고는 이례적으로 그의 생애를 기렸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 연형묵, 김중린, 허정숙, 김국태, 김용순, 김양건, 전병호, 박송봉, 리찬선, 리제강, 리용철, 강량욱, 김락희, 안달수와 함께 리종옥을 언급하였다.
3. 장의위원회 구성
- 위원장: 김영남.
- 위원: 박성철, 김영주, 홍성남, 리을설, 김일철, 전병호, 한성룡, 김철만, 양형섭, 최영림, 최태복, 연형묵, 김기남, 김중린, 백학림, 조창덕, 곽범기, 김윤혁, 김영대, 류미영, 박용석, 강석숭, 김병률, 박남기, 강영섭, 리길송, 리철봉, 리일환, 승상섭, 천연옥, 렴순길, 박태화, 리광호, 태형철, 백남순, 신태록, 손종호, 전승훈, 조윤희, 김용삼, 김영일, 박봉주, 리연수, 강정모, 리상무, 리성웅, 장일선, 최종건, 배달준, 리용선, 백창룡, 변영립, 리금범, 림경숙, 리원일, 김수학, 박명철, 김의순, 정성택, 김창수, 정문산.
4. 경력
임기시작 | 임기종료 | 비고 |
내각 경공업상 | ||
1951년 12월 13일 | 1954년 3월 23일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박의완에게 이임 |
내각 경공업상 | ||
1955년 1월 20일 | 1956년 11월 29일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조선로동당 공업부장으로 조동 |
조선로동당 공업부장 | ||
1955년 12월 3일 | 1956년 1월? |
1955년 12월 전원회의에서 임명 백홍권에게 이임 |
국가계획위원장 | ||
1956년 1월 4일 | 1959년 7월 1일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림계철에게 이임 |
조선로동당 상무위원회 후보위원 | ||
1956년 4월 29일 | 1961년 9월 18일 |
3차 당대회에서 선출 4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
1959년 6월 30일 | 1960년 1월 15일 |
1959년 6월 전원회의에서 선출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소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 ||
1960년 1월 15일 | 1970년 7월 6일 |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임명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재선 4기 21중전회에서 숙청 |
내각 중공업위원장 | ||
1960년 4월 4일 | 1962년 8월 19일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직함 폐지 |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 | ||
1961년 9월 18일 | 1970년 7월 6일 |
4차 당대회에서 선출 4기 21중전회에서 숙청 |
내각 금속화학공업상 | ||
1962년 8월 19일 | 1964년 12월 4일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유임 직함 폐지 |
과학원장 | ||
1965년 9월 21일 | 1967년 12월 16일 |
강영창의 후임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임기 만료 |
내각 광업상 | ||
1972년? | 1972년 12월 29일 | 중공업위원장으로 조동 |
정무원 중공업위원장 | ||
1972년 12월 29일 | ? |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임명 직함 폐지 |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 ||
1972년 12월 22일? | 1977년 12월 13일 |
5기 6중전회에서 보선? 5기 15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 | ||
1977년 12월 13일 | 1980년 10월 14일 |
5기 15중전회에서 보선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부총리 | ||
1976년 12월 11일 | 1977년 12월 17일 |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정무원총리로 승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 ||
1977년 12월 17일 | 1984년 1월 27일 |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소환 |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 ||
1980년 10월 14일 | 1983년 3월 |
6차 당대회에서 선출 정치국 위원으로 강등 |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 | ||
1980년 10월 14일 | 1999년 9월 23일 |
6차 당대회에서 선출 임기 중 사망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 ||
1984년 1월 27일 | 1998년 9월 5일 |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직함 페지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 ||
1998년 9월 5일 | 1999년 9월 23일 |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임기 중 사망 |
5. 여담
- 1990년 9월 21일,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을 기념하여 중국을 방문하여 인민대회당의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때 한중수교를 협상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 중이던 한국측 특사 박철언과 만나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 역대 정무원총리 중 강성산의 뒤를 이어 2번째로 긴 6년 2개월의 임기를 기록하였다. 내각총리까지 합친다면 박봉주, 강성산의 뒤를 이어 3번째로 긴 재임 기간을 기록하였다.
- 정무원 총리 중에서 유일하게 총리 재임 중에 정치국 상무위원에 도달했다. 박성철이 정치위원회 상무위원까지 간 적이 있지만 부수상 겸 외무상 재임 시절이었고, 총리 재임 중에는 정치위원으로 남았다.
- 리을설의 삼촌이라서 조카 덕을 봤다는 주장도 있다.
6. 참고문헌
- 간대욱, 「김정일 시대 북한 권력엘리트의 특성」 『사회과학연구』 17(1) (2001.12).
- 김진계, 조국: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하권(서울: 현장문학사, 1990).
- 박형중 외, 『김정일 시대 북한의 정치체제: 통치이데올로기, 권력엘리트, 권력구조의 지속성과 변화』(서울: 통일연구원, 2004)
- 조용하, 「북한인물론10: 원로급 전문관료 떡보영감 이종옥 부주석」『北韓』226(1990.10)
- 통일부 통일정책국 정치사회분석과, 『2009 북한의 주요인물』(서울: 통일부, 2008)
[1]
음력
1915년
12월 6일
[2]
1912년, 1918년 출생설 등이 경합했으나 북한에서 부고를 발표하면서 정확한 생일이 공개되었다.
[3]
나중에 북한에서는 빈농의 아들로 고학하여 중학교를 겨우 나왔다고 출신배경을 세탁했다. 하지만 인민일보에 소개된 약력을 보면 대학을 졸업했다고 분명히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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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김일성과 리종옥의 관계를 이간질하려는 극좌분자들의 음해로 하방된 불우한 식민지 지식인이라고 얘기한다. 1947년에 김정숙이 도와줬다고 주장하는 것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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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북한은 김정은 시대의 선전물에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는데, 리종옥이 경제실무에만 집중하느라 정치 문제를 챙기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고 포장하고 있다. 이때 김일성이 고작 그게 다냐고 안타깝게 꾸짖은 후 인민경제대학에 보내서 더 공부를 하게 했다고 카더라. 이때 인민경제대학에서 빨치산 회상기를 읽으면 뻘건물을 더 들였다고 한다. 근데
최광이나
림계철처럼 숙청당했다가 복권된 사람들 일대기에도 이 시기를 모두 인민경제대학에 갔다고 쓰는 걸 보면 그냥 혁명화를 당한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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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일성은 대책 논의를 위해서 지도부를 이끌고 벙커에 들어가 있어서 리종옥만 내각 사무실에 남아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