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17:42:37

최현(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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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민족보위상,인민무력부장
최현
崔賢 | Choi Hyun
파일:choihyun.jpg
<colbgcolor=#FF0000><colcolor=#FFF> 출생 1907년 6월 8일
지린성 훈춘현
(現 중국 지린성 훈춘시)
사망 1982년 4월 9일 (향년 74세)
자녀 아들 최룡해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 및 일제강점기 2.2. 6.25 전쟁2.3. 전쟁 이후
3. 장의위원회 구성4. 수상5. 대중매체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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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공산주의자. 해방 이후 북한의 군인,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최룡해의 부친.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친위쿠데타에 가담하는 등의 공헌으로 인민무력부장(1969년~1976년)까지 역임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2. 생애

2.1. 유년기 및 일제강점기

1907년 6월 8일 중국 길림성 훈춘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최득권이다. 그의 부친은 최화심(崔化心)[1]으로 당시 항일운동을 펼쳤던 홍범도 부대의 일원이었다.[2]

아버지가 속해있는 항일군 부대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그 후 간도에 돌아와 민족주의 성향 단체인 동만청년총동맹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25년에는 중국 군벌에게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32년까지 연길의 감옥에 복역했다. 감옥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최현은 출소한 해 7월 연길현에서 적위대에 가입했다. 이듬해 9월 그보다 5살 연하인 김일성과 처음 만난 것으로 추측된다.

군사활동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최현은 김일성의 눈에 들어 유격대 내에서 빠른 승진을 했고, 1936년 동북항일연군 1단장이 되어 1937년 보천보 전투에 참전했다. 하지만 출중한 군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문맹이라서 지휘능력에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중국어를 못했던 탓에, 방면군 사령관 지위에 이르렀던 김일성과 달리 그렇게까지 높은 지위를 차지하진 못했다.

2.2. 6.25 전쟁

광복 이후 김일성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온 다음 1948년 7월, 내무성 산하 38선 경비여단, 즉 제3경비여단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12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강건, 김광협, 김달삼, 김웅, 김일, 전태룡, 최용진, 무정, 박달, 박훈일, 최광, 김경석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남침을 준비하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옹진반도 침공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6.25 전쟁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6월 26일 16시경 국군 17연대의 주력부대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없이 최현의 눈 앞에서 배를 타고 최현 부대의 포사격을 받으며 후퇴하였다. 그 후 개성과 문산을 거쳐 이렇다 할 전투 없이 6월 29일 서울에 도착하였다.[3]

7월에는 38선 경비여단장에서 조선인민군 제2사단장(☆)으로 영전했다. 인민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달성됐으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4] 이에 격분한 김일성은 제2군단장( 김광협)과 그 예하의 제2사단장, 제12사단장을 보직해임하여[5][6] 제2사단장이라는 고위직책이 그에게 돌아왔다.

사실 인민군 2사단의 본래 계획은 춘천 방면을 빠르게 돌파한 뒤 서울 남측의 이천- 수원 방면으로 신속히 기동해 국군의 배후를 차단, 포위섬멸을 완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었다. 게다가 이들은 팔로군에서 인계받은 부대 정도를 제외하고 인민군 내에서 가장 정예부대라 김일성의 기대도 컸었다. 하지만 이들이 첫 전투인 춘천 전투에서 전멸당함으로서 계획이 틀어졌고 이에 사단장이 이청송 소장에서 최현으로 교체됐는데, 당시 그의 나이 겨우 43세였다.[7][8]

사단장이 된 최현은 재정비를 마친 2사단을 이끌고 꾸역꾸역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진천에서 김석원 준장이 이끄는 수도사단을 만나 진격이 일주일 가량 지체되었고 이에 "또 그 놈과 만나 이 꼴이 됐군, 그 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며 불평하였다고 한다.[9] 그래도 사단장 직책을 유지한 채 부대 이동과 정비를 마친 8월 중순부터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고, 8월 31일에는 창녕 영산 방면에서 낙동강을 강행도하하여 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고, 공세종말점을 지나 한계에 다다른 인민군은 배후가 차단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속도로 와해되어 제각기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최현은 잔존병력을 규합해 유엔군의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시간을 벌었다.

한편 주력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자 멘붕에 빠져 있었던 김일성[10]은 최현이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유엔군의 추격을 조금씩 지연시키자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6.25 전쟁 당시 북한의 장군들 중에서 연안파가 아닌 동북항일연군 출신(김일성 직계)으로서는 그나마 가장 활약한 인물이었던 셈.[11]

그 덕분인지 1950년 11월에는 김무정을 몰아내고 제2군단장(☆☆) 자리를 꿰찼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침없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2.3. 전쟁 이후

1955년 12월,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 1956년 4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958년 4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림업상으로 이동한 고준택의 뒤를 이어 체신상에 임명되었다.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장,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체신성 대표단장으로 1958년 6월에 체코, 1959년 6월에 동독을 다녀왔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체신상 자리는 박영순에게 물려주었다. 1962년 12월, 군사위원회가 설치되면서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에는 조선올림픽협회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10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2차 대표자회에서는 집행부 성원을 지내는 한편 정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이때 군사부장에도 임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7년 5월 6일, 환갑을 기념하여 공화국영웅 칭호, 금별메달,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에 재선되었다. 이후 불분명한 시점에서 비서국 비서에 선출되었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을 지냈고 1969년 1월, 김창봉이 숙청되면서 후임 민족보위상에 임명되었다.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나 비서국 명단에 없는 걸 봐서 비서에서는 해임되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민족보위성이 인민무력부로 개편되면서 인민무력부장에 임명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6년 5월 14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진우에게 인민무력부장을 넘겨주고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직만 남기면서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왔다.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중앙군사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2년 4월 5일,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중앙인민위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으나 불과 4일 후인 4월 9일 14시 5분에 75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최현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충실한 혁명전사, 친근한 혁명전우, 훌륭한 혁명동지이며 우리 당과 인민의 충직한 아들이다. 최현동지는 계급적원쑤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한생을 바쳐온 견결한 혁명투사이며 미일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전쟁의 로정우에 커다란 공적을 쌓은 용감하고 재능있는 군사지휘관이다. 최현동지는 일찌기 혁명활동을 시작한 때로부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에게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우리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 (...) 최현동지는 당과 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성으로 하여, 확고한 혁명적원칙성과 고결한 품성으로 하여 언제나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최현동지의 전생애는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적으로 투쟁한 견결한 공산주의혁명가의 빛나는 한생이였으며 그의 숭고한 혁명정신과 혁명가적풍모는 우리당원들과 근로자들의 모범으로 되여왔다. 지금 전체 인민은 당과 국가의 탁월한 활동가를 잃은 커다란 슬픔에 잠겨있다. 최현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큰 손실로 된다."라고 북한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의 찬사를 바쳤다. 이후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치되었으며 반신상이 제작되었고 아내인 김철호도 그의 묘에 합장되었다.

이후 북한 정권의 충신으로 거듭 언급되고 있으며 2022년 8월 25일자 조선중앙통신 기사 <우리 혁명무력의 핵심골간을 키운 위대한 동지애의 품>는 "우리 당을 무장으로 옹호보위하여온 최현동지의 값높은 혁명생애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믿고 아끼시는 로투사의 생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뜨겁게 어려있다. 절세위인의 극진한 신임과 사랑을 심장깊이 간직한 최현동지는 당의 령도를 변심과 가식이 없이 충직하게 받들었으며 총대로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이룩하고 혁명의 전취물을 수호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의 길에 한생을 다 바치였다."라고 최현을 칭송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수상

5. 대중매체

6. 여담

  • 호전적이고 잔인한 성격이었다. 김일성의 집무실에 권총을 차고 들어갈 정도였으며[12] 1949년 옹진지구 38경비여단장으로 있을 때는 전기 철조망에 한국군 시신 3구를 매달기도 했고, 같은 해 남한의 백골부대(38유격대) 1개 소대를 습격해 총알이 아깝다면서 32명을 삽으로 찍어 죽였다.[13]
  • 인민군 사단정치위원을 하다가 숙청되어 중국으로 탈북한 강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6.25 직전에 임업소 지배인에게 자재를 내놓으라고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다가 지배인이 완강히 거부하자 일본놈 배급 받아먹던 놈 주제에 끝까지 안줄거냐고 폭언을 퍼부었다. 이에 화가 난 지배인이 그런 말이 어딨냐고 항의하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배인을 쏘아죽였다고 한다. 이에 평안도가 발칵 뒤집어지고 놀란 김일성도 그를 평양으로 소환해 질책했지만 개새끼 한마리 죽인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김일성에게도 대드는 등 그놈의 성질머리는 어찌 고쳐지지가 않았다고. 주영복의 증언에서도 제재소 지배인 총살 사건이 언급되는데, 다만 여기서는 자재 문제가 아니라 최현이 만포제재소에서 난 화재의 원인을 지배인 김복명에게 추궁하자, 김복명이 실화(失火)일 뿐이라고 반발했고 이에 그 자리에서 쏴 죽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평양으로 소환되었다. 방원철 회고록에서는 개천 국영목재소 화재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 조선인민군 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1958년에 남파공작원으로 발탁, 1970년에 체포되었던 김진계가 13사단 복무 시절인 1951년 9월에 2군단장 최현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함경도 출신임에도 서울말에 능통했다고 한다. 어느날 최현이 야전병원을 순시하던 중 침상 밑이 왜 이렇게 더럽냐고 군의관을 질책하였는데 군의관이 담당병들이 게을러서 그렇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최현이 하전사만 청소하라는 법이 어딨냐며 군의관에게 즉시 병실을 청소할 것을 지시했다. 군의관이 걸레질을 하고 나오자 최현은 군관도 이런걸 직접 해봐야 하전사를 이해하는 법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면 때문에 휘하 병사들은 최현을 아주 좋아하면서 "군관에겐 범이오 전사에겐 아버지다"라고 했다고 한다.
  • 사적으로는 김책, 최용건 등과 함께 김일성에게 사적으로 반말을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사였다. 김책과 최용건이 김일성의 선배격이라서 김일성이 존대한 형태라면 이 사람은 김일성과 동일선상에서 있던 형태다.[14] 김일성 본인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가 나에 대해 경어를 사용한 것은 다만 공식석상에서뿐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예의와 격식을 제쳐놓고 오히려 그 우정에 진실성과 참신성을 부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북한에서 김일성 우상숭배와 더불어 빨치산 회상기 학습을 열심히 하면서, 김일성의 전우이며 민족보위상을 지내는 그 역시 절찬리에 강연에 불려다녔지만 말주변도 없는 자신을 왜 부르냐고 투덜거리면서 나오더니 빨치산 시절에 들은 갖은 음담패설을 늘어놓아 좌중을 경악하게 하곤 했다고 한다.
  • 김정일이 수령 자리를 할 수 있었던 것에도 최현의 도움이 컸다. 1972년 자신의 회갑 잔치에서 김일성이 빨치산 원로들에게 "내 아들이 두셋 있는데 누가 다음으로 좋겠나?" 라고 묻자 최현이 "당연히 장남이 해야죠? 장남이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라고 답한 것이다. 당시 원로들은 내심 김평일을 점찍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는데, 김일성의 바로 왼편에 앉았던 최현이 "수령님, 당연히 장손이 해야죠. 장남이 하지 누가 합니까?" 라고 외치자 김일성이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 라고 물어봤는데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못했고 분위기가 경직되어 김정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집안이 줄초상 나는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아무도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는 부주석 김동규가 김정일 후계 체제에 반대하였으나 여지없이 박살이 났다. 자세한 것은 김동규 사건 참조. 그리고 김정일은 최현이 사망하고 난 뒤 후계자 자리를 받게 도와준 보답으로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 김정일과 김정은의 대표적인 충신이고 현재 북한의 의전 서열 2인자인 최룡해가 최현의 사생아다. 혼외관계로 최룡해를 낳자 잠시 파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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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룡해의 조부, 그의 고향은 양강도 혜산(대한민국 기준으로 함경남도 혜산) 출생. [2] 이 때문에 최현을 가리켜 북한군에서 유일하게 독립군 가문 출신이라고도 하기도 한다. [3] 林隱,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김일성 왕조' (沃村文化社, 1989), pp.214-215 참조. [4]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5] 김일성은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다.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6] 쉽게 설명하면 군단장(☆☆☆)을 참모장(☆)으로 강등, 사단장(☆☆)을 여단장(***)으로 강등시킨 것과 비슷하다. [7]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나이에 비해 높은 직위에 올랐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북한군은 건군 초기인지라 20대 후반의 사단 참모장, 30대 초반의 총참모장, 30대 중반의 군단장 등, 직급에 비해 나이가 많지는 않은 고위 군관들이 꽤 있는 군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젊은 나이의 고위 장교들이 있는 현상은 똑같이 건군된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한민국 국군도 마찬가지였다. 20대 후반의 사단장이라던가, 30대 초반의 4성 장군이라던가... [8] 참고로 이 당시에 김광협의 후임으로 제2군단장에 임명된 사람이 김일성의 라이벌 중 한명이었던 김무정이다. [9] 이 둘은 6.25 전쟁 발발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도 각자 사단장으로 맞붙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 건 육탄10용사 참조. [10] 최고사령관인 자신만이 내릴 수 있었던 후퇴명령조차 제때 내리지 않고 남들보다 먼저 도망칠 정도로 혼이 나가 있었고, 스탈린에게 찍혀서 시베리아로 유형갈 생각까지 했다고 했을 정도. [11]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장군은 방호산, 김무정 등의 연안파나 남일 등의 소련파가 대부분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 중에 그나마 유능한 인물로 김책이 있긴 있었으나 1951년에 일찍 죽어버렸다.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최현보다 7살 연상인 최용건은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는데 남침을 반대했던 탓에 초기 작전수행은 김책이 주도했다. 김광협도 동북항일연군 출신이었으나, 위에 서술한 것처럼 전쟁 초기에 제2군단장으로서 심각한 무능을 드러내어 김일성에게 빅엿을 먹였다. 군사교육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기껏해야 중대급 비정규전 밖에 지휘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한테 군단급 제대 지휘를 바라는 것부터가 도둑놈 심보다 [12] 당연한 말이겠지만 북한 내에서 수령을 영접하기 전에는 검문을 통해 무장해제하고 들어가야 한다. [13] 정병준 저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p.256~257) [14] 대한민국에서의 사례를 찾자면 육사 11기 동기생인 정호용 전두환에게 반말을 하는 것과 같은 사례라고 보면 편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