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18:25:19

정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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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鄭準澤 | Jong Jun Thaek
파일:북한 정준택.jpg
<colbgcolor=#024FA2><colcolor=#FFF> 본관 연일 정씨[1]
출생 1911년 1월 12일[2]
경기도 부평군[3]
사망 1973년 1월 11일 (향년 61세)
평양시
학력 송도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
최종 당적


1. 개요2. 생애3. 경력4. 장의위원회 구성5. 여담6.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김일성 시대의 테크노크라트 정치가.

일본 부역자 출신임에도 고위직에 오른 독특한 케이스이다.

2. 생애

1911년 1월 12일 경기도 부평군(현 인천광역시)의 지식인 가정에서 부평군수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 정운구(鄭雲衢, 1867 ~ 1930. 1. 15)와 어머니 해주 오씨 오정근[4]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5] 본적은 경기도 파주군(현 파주시)이다.

그의 증조부 정후겸은 본래 생선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문벌이 한미했으나, 9살 되던 해에 영조의 서녀 화완옹주에 입양되면서 승승장구하여 종2품 호조 참판에까지 오르지만, 끊임없이 혜경궁 홍씨 세손 시절의 정조를 핍박하고 정조를 보호하던 홍국영을 탄핵하더니 정조 즉위 직후 역모를 꾸민 죄로 사사되기에 이른다. 이후 아버지 정운구 대에 이르러 관직에 나아가면서 비교적 집안이 안정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정운구는 1902년 평안남도 지계위원과 1906년 경기관찰도 경무서 총순(京畿觀察道 警務署總巡), 1908년 수원경찰서 경부(警部)를 거쳐 1909년부터 1913년까지 부평군수에까지 오른 경찰 출신의 관료이며 #[6], 외조부 오귀영(吳龜泳) 또한 1890년 사검관(査檢官)과 종9품 부사용(副司勇)을 시작으로 동래항 감리(東萊港監理)와 중추원 의관(議官) 등에 오른 관료이다.

출생 이후 개성군 송도면(현 개성시)로 이주하여 1928년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스승으로 만난 것이 조류학자 원홍구로, 나중에 정준택이 산업국장이 되고 나서 그를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추천하였다. 한편 정준택은 의사가 되기 위해 1929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지케이카이(慈惠會) 의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중도 퇴학당했다.[7]

그 뒤 귀국하여 경기도 경성부 관철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에 거주하면서 1933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과에 입학하여 3학년 때는 우등상을 받기도 했다. 1936년 3월에 졸업한 후에는 일본 미츠비시광업회사(三菱鉱業) 산하 효고현 이쿠노 광산(生野鉱山)에서 선광기사로 근무했다.

재차 귀국한 뒤에는 1943년 황해도 곡산군 소재 백년광산에 선광기사로 채용되어 선광장으로 일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 광복 후 곡산광산 광산장으로 일하며 북한의 광산 실태와 전망, 기술개선대책안을 연구하던 중 소군정이 수립되자 소련군에게 스카웃되어 1945년 11월 북조선행정국 산업국장에 임명되어 김일성을 만나게 되었다. 일본 광산에서 일한 부역자 출신에 1943~1936년 사이 자신의 광산을 경영한 부르주아 출신임이 문제가 되어 일시적으로 지방으로 추방당하였지만, 김일성의 개입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북한에선 이를 김일성이 외국 순방을 간 사이에 소련군이[8] 북한의 공업 설비를 약탈하려하자, 정준택이 조국 건설에 필요한 설비를 가져갈 수 없다고 저항했고, 이에 소련을 숭상하는 종파 사대주의자들의 음해로 억울하게 박해받은 것을 김일성이 귀국 후에 구해준 것이라고 이빨을 까고 있다.

1946년 조선로동당에 가입하였고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산업국장, 계획국 부국장, 1947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계획국장을 거쳐 북조선인민위원회 기획국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3월 노동당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겸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8년 7월 7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157호에 따라 한설야, 남일, 리문환, 리순근, 리동화, 허남히, 리병제, 계응상, 장기려, 태성수와 함께 고등교육원 내에 설치된 최고과학기술평의회 성원으로 위촉되었다. 1948년 8월에 1기 대의원에 선출, 9월 초대 내각이 선출되자 국가계획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2월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과 회담, 차관을 얻어오는데 성공했으며 1950년 6월 26일 조직된 군사위원회에서 박헌영, 홍명희, 김책, 최용건, 박일우와 함께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 1953년 4월, 김정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3년,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를 요청하기 위한 김일성의 방소, 방중 대표단에 박정애, 정일룡, 남일, 김회일, 허정숙, 김형국, 신천택 등과 함께 참석하여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방문, 소련의 주요 지도자들과 회담하였다. 소련에서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주도한 신노선이 발표되자 말렌코프의 신노선은 소련의 중공업화가 충분히 되었으니 경공업과 농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논리를 역이용하여 북한은 중공업화가 부족하므로 이를 먼저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중공업 노선을 적극 지지하였다.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백홍권의 뒤를 이어 화학건재공업상에 임명된다. 전후 김일성이 주도한 중공업 주도의 전후 복구계획에 적극 호응한 고려인 박창옥이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면서 국가계획위원장에서 물러났다. 1955년에 화학건재공업성이 화학공업성으로 개편되 초대 화학공업상을 맡았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56년 5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화학공업상에서 해임, 화학공업성 부상 리천호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으로 승진했다.

1957년 9월에 2기 최고인민회의가 구성된 후 김일, 홍명희, 정일룡, 남일, 박의완과 함께 내각 부수상에 재선되었다. 1958년 9월 7일, 김일, 박정애, 김달현,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60년 4월 경공업성이 경공업위원회로 격상되자 초대 경공업위원장을 8개월간 재직한 후 1960년 12월 조선로동당 4기 2중전회에 출석하여 제1차 5개년계획을 토론한 후 12월 27일,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국가계획위원장 림계철과 자리를 맞바꾸었다. 따라서 정준택이 다시 국가계획위원장으로 돌아가고, 림계철은 경공업위원장으로 이임한다. 국가계회위원장으로써 성과를 높게 올렸기때문에 1962년에 국가계획위원장 겸 3기 대의원, 67년에 다시 국가계획위원장 겸 4기 대의원에 재선출되는 등 3차례나 연임하며 10년 가까이 재임하다가 1969년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윤기복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69년 9월에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5년 8월, 강영창 장의위원, 1968년 9월, 홍명희 장의위원,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 1969년 3월, 김태근 장의위원,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 1970년 8월, 김원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경공업을 대표하는 테크노크라트로 기존의 빨치산 출신 위원들을 대신하여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 채택 이후 정무원 부총리,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5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973년 1월 11일 오전 8시, 평양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정준택동지는 일편단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충성 다 하여온 충직한 혁명전사이다. (...) 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멸의 주체사상을 높이 받들고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공화국의 국제적권위를 높이기 위한 대외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실로 정준택동지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그 어떤 어렵고 복잡한 환경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끝없이 충직하였으며 수령님의 가르치심따라 조국의 부강발전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력을 다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라고 매우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김일성은 정준택을 "당에 끝 없이 충직한 일군, 훌륭한 혁명가, 수령을 알고 당을 알고 혁명 투쟁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김일성이 직접 장례식에 나와 공화국영웅 메달을 정준택의 시신에 달아주었으며 유가족을 위로하였다 카더라. 북한은 그의 죽음을 기려 원산경제대학을 정준택원산경제대학으로 개칭하였다.

그런데 사망지에 대해서는 위에 링크를 보면 알겠지만 초기 보도에는 북한이 분명 정준택이 평양에서 죽었다고 했는데 김정은 시대의 선전물을 보면 함경북도 출장을 가서 죽었다고 은근슬쩍 말을 바꾼게 확인되었다. 김덕홍 회고록에 따르면, 인민무력부 군관으로 복무하던 정준택의 아들이 1972년 말에 소련 출장을 갔다가 말실수로 소환되어 예심을 받게 되었다. 정준택의 아들은 아버지에게 누를 끼쳤단 수치심에 철창에서 목을 매어 죽었고, 정준택은 아들이 죽었단 소식에 너무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노발대발해서 군보위부 예심원들을 모조리 제대조치하고 지방으로 추방해서 분풀이를 했다고 한다.

3.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국가계획위원장
1948년 9월 9일 1954년 3월 23일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선출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조동
내각 화학건재공업상
1954년 3월 23일 1955년 1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직함 개편
내각 화학공업상
1955년 1월 20일 1956년 5월 11일 직함 개편
내각 부수상으로 영전
내각 부수상
1956년 5월 11일 1972년 12월 2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직함 개편
경공업위원장
1960년 4월 4일 1960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4기 2중전회에서 조동
국가계획위원장
1960년 12월 27일 1969년 9월 2일 4기 2중전회에서 임명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해임
조선로동당 4,5기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69년 9월 2일? 1973년 1월 11일 후보위원에 선거
5차 당대회에서 재선
재임 중 사망
정무원 부총리
1972년 12월 28일 1973년 1월 11일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재임 중 사망
5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1972년 12월 28일 1973년 1월 11일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재임 중 사망

4. 장의위원회 구성

5. 여담

  • 아내는 박길원이다.
  • 북한 총정치국장 정경택의 아버지이며, 정조 때 역모를 꾸민 죄로 사사 정후겸의 증손자이다.
  • 북한 선전매체에 정준택의 손자 정호용이란 사람이 자주 나와 김일성의 대중정당 노선을 칭송하는 얘기를 하고 다닌다. 정경택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지는 불명. 참고로 박길원의 회고에 따르면 총 11명의 손자, 손녀가 있었다고 한다.
  • 정준택의 가계를 살펴보면 좀 의아한 부분이 있다. 정후겸의 증손이 정준택이 맞는다면, 증조부 정후겸이 사사된 해가 1776년이다. 그러면 정후겸의 아들이자 정준택의 조부는 아무리 늦어도 1776생에서 유복자라고 가정하더라도 1777년생일 것인데, 정후겸의 손자이자 정준택의 아버지로 알려진 정운구의 출생년도가 1867년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아들(정후겸의 아들-정운구)간의 나이차가 90세가 난다는 뜻인데, 환갑만 넘어도 오래 살았다고 평가받던 시대에 90이 넘어서까지 살아 아들까지 얻었다는 의미가 된다. 오늘날에도 나이 아흔에 자식을 보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라, 그래서 현대에 와서 정운구와 정후겸 사이에 사실 1~2명의 알려지지 않은 대(代)가 더 있으며 정준택은 정후겸의 증손자가 아닌 고손자나 현손자라는 설(說)이 있다. [9]
  • 그의 손녀는 정송희라는 사람이다.

6. 참고 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 도서출판선인.
  • 로버트 스칼리피노, 이정식 저, 한홍구 역,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돌베개
  • 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 문정공파-판결사공파 25세 택(澤) 항렬 [2] 음력 1910년 12월 12일 [3] 로동신문 1973년 1월 12일자에 의하면 경기도 부평군 출생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그가 졸업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학적부에 의하면 개성 출신이라고 한다. [4] 동래항감리를 지낸 오귀영(吳龜泳)의 딸이다. [5]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온면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고 #,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 [6] 1909년 12월 부평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시절 한일합방 문제에 대해서 "합방문제는 일진회에서 아무쪼록 이로운 데가 있지 않을까 하고 당돌한 제창을 한 것이며, 물론 찬동하기 어렵다."라며 소신 발언을 한 바 있다. # [7] 북한 측 자료인 로동신문 1988년 9월 28일 기사에는 퇴학의 사유를 '적색독서회사건'에 연루되어 학교 측으로부터 퇴학 조치를 받은 것으로 보았다. # [8] 그나마도 소련군이라고도 안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고 한다. [9] 1~2명이 더 족보에 추가된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부모-자식간의 나이차가 40~50세 정도 난다는 의미여서 초혼연령이 15세 전후로 치뤘던 조선시대 기준에서는 남들은 손자를 봤을 나이라 말이 안되기는 하지만 80~90살 차이나는 것보다는 말이 되는 소리이니 여하튼 정준택 가(家)의 결혼이 대대로 늦었던 것일수도 있고, 북한 측 역사기록을 대한민국 정부에서 연구할수 있는 때가 될때까지는 결론적으로는 이 문제는 계속 설(說)로만 남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