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07:22:47

엠버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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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과정4. 현황5. 공산권6. 엠버밍된 유명인사

1. 개요

파일:external/static.guim.co.uk/Lenins-embalmed-corpse-007.jpg
엠버밍 처리된 블라디미르 레닌의 시신
시체의 간단한 분장에서부터 방부 처리 또는 사고 등으로 훼손된 시신을 복원 처리하는 기술.

동사형인 Embalm 자체가 '(시체에) 방부 처리를 하다'라는 뜻이다. 시체에 있는 를 빼내고 혈관에 보존액( 포르말린)을 채워 넣는 작업이 수반된다. 다른 말로는 유체보존기술, 시체방부처리, 사체위생보전, 시신위생처리라고도 한다. 사후 시신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중보건적 위험성 방지를 위한 외과적 처리로, 사후 발생하는 질병의 감염경로를 차단하고 생전의 모습과 가깝게 보존하는 장례전문기술이다. IATA 규정에 의거하여 항공기 내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해외로 운송되는 시신에도 필요한 처리다.

2. 역사

유래는 고대 이집트 미라 제조 기술이다. 6-7세기를 무대로 한 아라비안나이트의 한 에피소드에도 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미녀의 시신이 수은 등을 쓴 보존 기술로 마치 살아 있는 듯 보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보존 기술이 유럽으로도 전파되었고 이후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 이후로 왕실 장례법에서 이런 미이라 제조술을 응용하여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그 예로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나 황실 인물이 죽으면 내장과 심장을 적출하여 따로 성당들에 보관하고 시신은 약품에 절여 간단한 방부 처리를 한 후 3중~4중으로 구성된 관에 봉하여 카푸친 성당의 황실 묘역에 안장하였으며 귀족 또는 저명인사들의 장례를 치를 때도 장기를 적출하고 시신을 방부액에 절여 관에 봉안하는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그 예로 올리버 크롬웰은 장례 때 방부 처리가 상당히 잘 되어 있었는데 찰스 2세에 의해 관이 파내어지고 효수를 당할 때 도끼로 30번이나 내려쳐서 목을 겨우 잘라냈을 정도로 시신이 잘 절여져 있었다.

아시아도 마찬가지인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에도 수은을 써 시체를 상하지 않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굴묘편시에 나오듯이 오자서 초평왕 시체를 구리 채찍으로 수백여대를 패면서 죽은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갚을때 십팔사략에선 초평왕 시체가 수은을 듬뿍 칠해 손상이 적어서 오자서는 기뻐하면서 두 눈을 후벼파고 온 몸을 토막내며 채찍질을 가했다고 나온다.

이후 서부개척시대에 이르러 엠버밍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다시 한 번 발전하게 된다. 당시 미국은 광활한 미개척지에서 개척이나 모험에 종사하다 객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데다 아직 교통 요건도 미비했기 때문에 고향으로 운반할 때까지 시신의 장기간 보존이 절실했으며 미국 초기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 전상(戰傷)으로 훼손된 시신이 많이 생겨나자 시신의 복원과 보존, 그리고 부패로 인한 질병 발생의 방지를 목적으로 적용되어 점차 민간에 퍼져나갔다.

초기에는 일정한 기준이 마련되지 않아 장의사들이 개별적으로 고안해낸 방부액 등을 사용하여 간혹 난잡하게 처리되는 일도 많았으며 이러한 사례가 몇 건 폭로되자 결국 미국에서 시신위생처리사와 장의사들의 자격을 위한 규칙과 법령을 만들었다. 이후 대중에게 엠버밍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하여 민간에서의 수요도 급증하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장의사들이 손님 유치를 목적으로 신기술 개발에 열을 올린 결과 엠버밍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엠버밍 관련 전문가를 양성하는 기관도 각지에서 생겨나 그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3. 과정

장의 전문 기술자나 일반의 면허를 취득한 의료종사자에 의해서 화학적·외과학문적으로 사체가 처리된다. 현대의 유체보존기술은 구체적으로는 이하의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다.

1.전신을 소독 및 세정한다.
2.사체의 표정을 정돈해 필요에 따라서 자르거나 깎는 등의 처리를 실시한다.
3.사체를 절개(주로 경부 등)하여 동맥을 통해 체내에 방부제를 주입한다. 동시에 정맥에서 혈액을 배출한다.
4.복부에 약 1cm의 구멍을 뚫어 거기로부터 강관을 찔러 흉강·복강부에 남은 체액이나 부패를 일으키기 쉬운 소화기관 내의 잔존물을 흡입해 제거한다. 또 동시에 그러한 부분에도 방부제를 주입한다.
5.절개한 부위를 봉합해 사고 등으로 손상된 부분이 있는 경우에는 그 부분도 복원한다. 이때 절개한 부분에는 테이프 등을 붙여 눈에 띄지 않게 한다.
6.재차 전신·모발을 세정해 유족이 의뢰한 의상을 입히고 표정을 다시 정돈한 다음 납관한다.

이렇게 처리된 사체는 주입되는 약제의 농도나 양에 의해 며칠~2주간 정도까지는 상온에서 보존이 가능하다.[1] 이 이상으로 철저하게 처리하면 보존 가능 기간을 더욱 늘릴 수 있으며[2] 방부제 교환 등 정기적인 유지보수를 실시하면 생전의 모습으로 보존, 전시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4. 현황

근래 연구 보고에 따르면 사람은 고인의 시신을 매장 혹은 화장 전에 한 번 더 접견하게 되면 고인의 죽음에 대해 '납득'하게 됨으로서 사별(死別)로 인한 슬픔, 두려움 등의 스트레스가 상당 부분 해소된다고 한다. 서양과 일본에서 관뚜껑 열어 놓고 장례식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하게 한국에서는 안치 다음날 입관할 때 얼굴을 덮기 전에 유족들에게 접견안내를 한다.

서양과 일본에선 상기한 대로 고인의 시신을 접하는 문화가 발달해서 시체 보존 처리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지만 한국, 중화권, 중동권은 시신에 손을 대는 것에 대한 전통적인 터부 및 홍보 부족으로 인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3] 일본에서도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야 엠버밍 학교가 세워졌다.

한국에선 1960년대에 미군을 통해 엠버밍 기술이 보급되어 나름대로 상당한 기술 경험을 쌓았으나 인식 부족 및 제도 미비, 그리고 면허 제도의 부재로 인해 공인받기가 힘들어서 해외 유명 장의 업체와 보증 계약을 맺어 시행하고 있으며 그나마도 주로 한국에서 사망한 외국인 시신의 처리가 대부분이다.[4] 엠버밍은 부검과 다르게 시신을 좀 더 보기 좋게 만드는 작업이라지만 피를 빼내고 경우에 따라 내장을 제거하는 작업이 수반되기 때문에 유족에 따라서는 그것이 꺼림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 등지에서 사망했을 경우 엠버밍 처리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1909년에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의 시체는 하얼빈 만철병원 영안실에서 엠버밍을 거쳤고, 1997년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당시 한국인 희생자들의 시신 인도가 늦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유명인사 중에서는 1956년에 사망한 최순주 전 국회부의장, 1960년에 사망한 조병옥 전 민주당 대표, 1980년에 사망한 송요찬 전 내각수반, 1982년에 사망한 권투선수 김득구, 같은 해에 사망한 김태동 전 보건사회부 장관, 1983년에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으로 순직한 17명의 고위 인사들, 1985년에 사망한 김녹영 전 국회부의장, 1994년에 사망한 정일권 전 국무총리, 2005년에 사망한 이건희 회장의 막내딸인 이윤형, 2019년에 사망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대한민국의 사망자들 중 2009년에 사망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도 봉하마을 마을회관에 임시 안치될 때 냉동시설이 없어서 불가피하게 엠버밍을 했다. 게다가 매장을 통한 안장이면 더 그렇다. 그래서 해외에서 사망한 경우 매장을 하는 집안이라도 화장으로 장례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며, 현지에서 화장하여 한국으로 유골을 운구하려는 경우 엠버밍이 생략되기도 한다.

5. 공산권

공산권 국가에선 이 기술이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는데 이것의 시초는 소련의 국부인 블라디미르 레닌으로, 이후 각 공산국가에서는 레닌의 엠버밍 사례를 본받아 국부나 건국자의 시신을 보존처리했다.

소련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중국 마오쩌둥, 북한 김일성 김정일, 베트남 호치민의 시신이 엠버밍을 받았다. 스탈린도 사망 직후에는 엠버밍되어 레닌 영묘에 합장되어 있었다가 격하 운동 후 화장되어 크렘린 벽 묘지로 이장되었다. 이후 이들의 시신은 일반에 전시되어 참배를 받는데 보면 알겠지만 이 인물들의 태반은 바로 그 공산주의 국가의 국부와 그 후계자에 해당하는 인물들이다. 즉, 국부의 숭배를 통해 지배층의 권위 제고와 그를 통한 권력 장악을 확고히 하려는 데 있다.

다만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생전에 이런 취급을 원하지 않았다. 엠버밍 역사상 첫번째 희생양당사자인 레닌은 자신의 장례에 대한 별다른 유언 없이 사망했고[5] 스탈린은 애초에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돼서 사망했기 때문에 관련 유언을 남기지 못했으며 마오쩌둥과 호치민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한 후 자국 영토 곳곳에 뿌려 주기를 원했고 김일성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있는 항일 빨치산 동지들의 무덤 곁에 자신을 묻어 주길 원했지만 아들 김정일은 기어이 엠버밍으로 불꽃 효도를 선사했다. 일본 혐한 잡지인 슈칸분슌( 주간문춘)은 카더라 통신을 통해 김정일이 이 취급을 자처했다고 보도했지만 열차에서 이동하던 중 뇌출혈로 급사했기 때문에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애당초 이 잡지는 데일리 메일 수준의 보도로 악명이 높다.

소련 붕괴 후 매장만 교리로 인정하는 러시아 정교회가 득세한 러시아에서도 엠버밍된 레닌의 시신을 매장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레닌을 존경하는 여론은 여전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악마화하던 보리스 옐친 시절에도 레닌의 매장은 불가능했고 이후 소련 시절을 어느 정도 긍정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레닌의 매장은 불가능하다며 확인사살을 날렸으며 붉은 광장 한 켠에 있는 레닌 영묘가 이미 소련 시절부터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어 버린지라 관광업계도 이를 반대했다.

보리스 옐친은 레닌 영묘 및 보존팀에 대한 예산 지원을 끊었지만 보존팀은 스스로 기업화되어 북한이나 베트남과 같은 국가에서 고객을 유치해서 스스로 수익을 냈고 레닌을 존경하는 많은 러시아인들이 자발적으로 레닌 영묘에 기부하여 25년간 버텨 왔고 2015년 푸틴 정부가 예산 지원을 재개하면서 예산 부족 때문에 레닌 영묘가 폐쇄되거나 레닌이 매장될 가능성은 없어졌다.

6. 엠버밍된 유명인사

매장이나 화장된 인물은 취소선 표기. 해외 운구 등 장례 전 보존 절차상 임시적인 엠버밍은 제외한다.

이하는 공산권 지도자들이다.


[1] 평균적으로는 1~2주 [2] 예를 들어 레닌 같은 경우는 아주 오랫동안 보존된 좋은 사례다. 물론 에바 페론처럼 관리도 안 하고 이곳저곳 옮겨다니면 시체의 여기저기가 깨질 수 있다. [3] 다만 중국과 중동권은 시신을 염습할 때 엠버밍을 하지는 않아도 고인이 평소에 입었던 옷을 입히는 경우가 많고 고위층은 엠버밍을 하는 경우도 있다. 고인에게 삼베옷을 입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4] 물론 현재는 한국에서 사망한 외국인들도 시신을 화장해 본국으로 보내는 경우도 늘고 있다. [5] 레닌이 어머니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주장은 레닌 매장을 주장하는 측이 만들어낸 것으로, 레닌은 생전에 자신의 장례에 관한 언급을 일절 한 적이 없다. [6] 화장을 한 이유는 시신의 보존 상태 때문이다. 초기에 방부처리를 잘못 해서 시신이 검게 변하고 부패가 진행되는 바람에 화장 후 원래 있던 영묘에 재안장했다가 1990년 프라하에 위치한 올샤니 공동묘지로 이장했다. 영묘가 위치했던 곳은 비트코프 전투가 벌어졌던 비트코프 언덕에 위치한 현재의 체코 역사 박물관 건물이었다. 영묘의 흔적은 박물관 지하에 시신 보존을 위한 기계장치와 보존처리를 담당하던 실험실, 재안장할 때 사용되었던 석관의 파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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