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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
허담 許錟 | Ho D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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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6b534><colcolor=#FFF> 출생 | 1929년 3월 6일 |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1] | |
사망 | 1991년 5월 11일 (향년 62세) |
평양시 | |
가족 |
아내
김정숙 아들 허철, 딸 허영희 |
학력 |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키이우 대학교 (학사)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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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rfix]
1. 개요
허담은 북한의 정치인 겸 외교관이다. 오랜 기간 조선로동당 대남비서, 국제비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외무상 등을 역임하면서 대남정책을 담당하였다.2. 생애
1929년 3월 6일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에서 청계천에서 막벌이하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도공사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두 동생도 모두 병으로 죽었다. 이에 병든 어머니와 남은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13살부터 백년광산에서 탄부로 일하면서 실로 개고생을 했다. 해방 후 원산철도공장에서 취직하면서 월북했고, 1946년 8월 3일, 북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공장에서 공장을 지키는 보위대도 조직하는 등 월북자지만 당성이 좋은 활동을 하였다.이후 공장로동계급의 추천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에 입학하여 학급 세포위원장이 되었다. 그의 아내 김정숙의 주장에 따르면 대학생 시절부터 김두봉, 최창익 따위가 감히 김일성 옆에 나란히 자기 초상화를 붙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등 김일성 우상화에 적극 동참했다고 하며 이 덕분에 김일성과 김정숙 부부의 눈에 들게 되었다고 한다. 1949년 9월, 아내가 되는 김정숙과 함께 나란히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며,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귀국했다. 김정숙과 정식으로 커플이 되는 것은 졸업하고 귀국하는 열차 안에서였다고 한다.
아내가 김일성의 고종제인 김정숙인 관계로 북한 권력계층에서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또한 수완이 매우 영리하여 김일성의 후계자였던 김정일의 비위를 척척 잘 맞춰서 매우 높은 신임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1948년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헝가리 외무성 문서에 따르면 사실 키예프 대학을 졸업했다. 외교관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외무성 참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1957년에 정식으로 김정숙과 결혼했으며 김일성도 참석하여 축하했다.
1955년 8월, 중앙위원회 지도원으로 배치, 이후 1958년 10월, 국제부 과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61년 외무성 부상에 임명되는 등 외교분야에서 승승장구하였으며, 김정일에게 국가보위성 창설을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1969년 외무성 제1부상을 거쳐 1970년 7월 11일, 박성철의 뒤를 이어 외무상으로 승진했고,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면서 1973년 2월 26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부총리를 겸하게 되었다. 1973년 12월에 남미 출장을 갔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었다는 뜬금없는 사망설이 돌기도 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75년 리마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서 북한의 비동맹회의 가입을 성사시킨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77년 4월, 5기 13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76년 3월에 남일 장의위원,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에는 김일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83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8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당한 김중린의 뒤를 이어 대남비서에 선출, 통일전선부장 및 조평통 위원장을 겸직하게 되었댜. 이에 따라 12월 28일, 외교부장 자리를 김영남에게 물려주었고 부총리에서도 이때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허담의 아내 김정숙은 대남비서가 아니라 알짜배기 자리인 국제비서 자리를 원했기 때문에 이 결정에 상당히 분노했다고 한다.
허담은 1985년 9월 남한을 극비리에 방문하여 전두환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였다. 당시 보안 문제 때문에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의 경기도 가평 별장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러한 허담의 방남 이후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이 다시 평양을 방문하여 첫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시사하였으나[2], 팀 스피릿 훈련 중단에 대한 부정적인 대한민국의 입장 및 1985년 10월 청사포 간첩선 격침 사건 이후 전두환이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간첩선을 보내는 놈들이 어딨냐고 격노, 판문점 통해서 북한놈들이 사과하지 않으면 뒤엎어버리라고 지시하면서 물건너갔다.
그러나 허담은 이러한 정상회담의 불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김정일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하였다. 국제부 내부에서 벌어지는 김용순과 현준극의 다툼에 질린 국제비서 황장엽이 김용순을 후임 비서로 추천하면서 발을 빼려고 하자 김정일은 교통정리를 하여 국제부장에 김용순, 그리고 국제비서에는 허담을 임명하여 허담이 안하무인인 김용순을 제어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1988년 12월, 6기 15중전회에서 김중린에게 대남비서 자리를 물려주고 국제비서로 이임하였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9년 3월 방북한 문익환 목사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해 6월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 모스크바에서 회동했다. 8월에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전대협 임수경 대표를 만나기도 했다. 1989년 11월, 최덕신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당뇨병으로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국제비서 업무 자체가 불가능하였고, 결국 1990년 5월 23일, 6기 18중전회에서 국제비서에서 물러나 김용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그를 위한 예우상 자리로 신설된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으로 물러났다. 1991년 1월 4일, 김일성의 고려연방제 지지성명 발표를 통해 오랜만에 공개활동에 나섰으나 건국 42주년 기념보고대회, 당창건 45주년 경축연회, 최고인민회의 9기 2차 회의 등 주요 공식석상에 계속 불참하는 등 아프다는 것이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4월 29일 ~ 5월 4일 평양에서 열렸던 85차 국제의원연맹에조차 불참함으로 건강 이상설은 절정에 달했다.
결국 1991년 5월 11일, 오랜 병환 끝에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허담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주체혁명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한 우리 당과 인민의 충직한 아들이다. (...) 허담동지는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위업이 전면에 재기된 시기 당중앙위원회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당의 조직사상적기초를 강화하며 당의 전투력을 더욱 높이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동지는 우리 당이 제시한 조국통일방침을 높이 받들고 분렬된 조국을 하루빨리 통일하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하였다. 허담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혁명적수령관을 확고히 세워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쳤다. 허담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가슴아픈 손실로 된다."라고 매우 후한 찬사를 바쳤으며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그가 앓았던 병에 대해서는 당뇨라는 설과 암이라는 설이 대립했으나 북한에서 확인해주지 않아서 미궁에 빠졌다. 다만 당시 통일부는 허담이 운신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미루어볼때 암 쪽에 더 무게를 두었었다. 그런데 나중에 허담의 아내 김정숙이 본인 회고록에서 당뇨병이었다고 밝혔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죽기 직전에 "가더라도, 이 허담이 육체는 가더라도 정신만은 살아서 지도자동지의 곁에 영원히 서있을것입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라는 후빨성 글을 바쳤다 카더라.
사망 이후 김정일이 김용순, 양형섭 등을 거느리고 조문을 왔으며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등 허담과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연형묵, 김중린, 허정숙, 김국태, 김용순, 김양건, 전병호, 박송봉, 리찬선, 리제강, 리용철, 강량욱, 리종옥, 김락희, 안달수와 함께 허담을 언급하였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은 그의 생애를 다룬 영상편집물을 방영하였다.
3. 경력
임기시작 | 임기종료 | 비고 |
내각 외무상 | ||
1970년 7월 11일 | 1972년 12월 28일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임명 |
정무원 외교부장 | ||
1972년 12월 28일 | 1983년 12월 28일 |
5기 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임명 6기 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재선 7기 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재선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해임 |
정무원 부총리 | ||
1973년 2월 26일 | 1983년 12월 28일 |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임명 6기 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재선 7기 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재선 비서로 조동 |
조선로동당 5, 6기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정치국 후보위원 | ||
1977년 4월 6일 | 1983년 12월 1일 |
1977년 4월, 5기 13중전회에서 보선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재선 1983년 12월, 6기 8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
1983년 12월 1일 | 1991년 5월 11일 |
1983년 12월, 6기 8중전회에서 보선 임기 중 사망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대남비서 | ||
1983년 12월 1일 | 1988년 11월 30일 |
1983년 12월, 6기 8중전회에서 선거 1988년 11월, 6기 14중전회에서 소환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장 | ||
1983년 12월 1일 | 1988년 11월 30일 |
1983년 12월, 6기 8중전회에서 선거 1988년 11월, 6기 14중전회에서 소환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국제비서 | ||
1988년 11월 30일 | 1990년 5월 23일 |
1988년 11월, 6기 14중전회에서 임명 1990년 5월, 6기 18중전회에서 소환 |
9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 ||
1990년 5월 24일 | 1991년 5월 11일 |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임기 중 사망 |
4. 장의위원회 구성
- 위원장: 김정일(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 정치국 상무위원)
- 위원: 오진우(인민무력부장 겸 총정치국장, 정치국 상무위원), 연형묵(정무원총리), 리종옥, 박성철(이상 부주석), 김영남(정무원부총리 겸 외교부장), 최광(총참모장), 계응태, 전병호, 한성룡(당 비서), 강성산(함경북도 책임비서), 서윤석(평안남도 책임비서), 서철(빨치산 원로, 이상 정치국 위원), 현무광(당중앙검열위원장), 최태복(당 비서), 최영림(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 홍성남(정무원 부총리), 홍시학(정무원 부총리), 김철만(제2경제위원장), 김복신(정무원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장), 강희원(정무원 부총리, 이상 정치국 후보위원), 김중린, 박남기, 서관히, 윤기복, 김용순, 황장엽(이상 당 비서), 김윤혁, 김환, 김창주, 김달현, 장철(이상 정무원 부총리), 양형섭(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 리계백(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정신혁(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기남(선전선동부장), 김영채(간부부장?), 김봉주, 김경희(경공업부장), 리하일(군사부장), 김익현(민방위부장), 리창선(사회문화부장), 오극렬(작전부장), 권희경(대외정보조사부장), 강석숭(당력사연구소장), 로명근(재정경리부장), 리몽호(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사무장), 지창익, 정준기(대외문화련락위원장), 최문선(평양시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 원동구(직총 중앙위원장), 최룡해(사로청 중앙위원장), 박수동(농근맹 중앙위원장), 김병률, 김철명(주체과학원장?), 장성택(청년 및 3대혁명소조부장?), 최봉만(39호실장), 강석주(외교부 제1부부장), 김영호, 한시해, 최현덕, 려봉구, 황병대, 고기준, 리동철, 우종학, 리춘식, 리기화, 최창헌, 리상태, 전순명, 조복길, 류상직.
5. 가족
- 아내: 김정숙. 김일성의 아내인 김정숙과 동명이인이지만 일반 북한 시민들과 달리 개명하지 않아도 되었던 이유는 이 김정숙이 김일성의 사촌동생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씨일가와 연이 없는 북한 내 다른 동명이인 김정숙들은 전부 강제로 개명해야 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과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은 반드시 개명해야 한다. 김정숙의 언니 김신숙은 양형섭과 결혼했으나 일찍 사망했다.
- 아들: 허철 (외무성 근무, 2019년 주 이탈리아 북한 대사 대리 조성길의 망명 책임을 지고 외무성 당위원장 직책에서 철직되었다. 류현우의 증언에 따르면 숙청은 아니고 모란지도국 초급당비서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 딸: 허영희 (자택에서 외화뭉치가 발견되어 구속) #
6. 여담
- 성격상으로는 과묵하고 온화한 품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을 험담하거나 모함하지 않았다. 허담과는 권력상으로는 경쟁관계에 있던 황장엽도 김정일이 측근으로 가장 총애한 허담이 그래도 상당한 인격자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회고할 정도. 후지모토 겐지도 허담이 자신을 굉장히 잘 대해주었다고 그에 대해서 좋게 회고하고 있다.
- 반면 아내 김정숙은 탐욕스럽고 괄괄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허담의 회고록에도 자신과 아내가 사귀게 되자 주변에서 물과 기름이 사귄다고 놀렸을 정도라고 했으니 말 다했다.
7.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2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