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24FA2 17%, #FFF 17%, #FFF 19%, #ED1C27 19%, #ED1C27 81%, #FFF 81%, #FFF 83%, #024FA2 83%, #024FA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color: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국가주석
|
||
<rowcolor=#ed1c27,#e3111c> 초대 | 제2대 | 제3대 | ||
김두봉 | 최용건 |
김일성 섭정대행 김정일 |
||
<rowcolor=#fff>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국방위원장
|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
국무위원장
|
|
<rowcolor=#ed1c27,#e3111c> 제4대 | 제5대 | 제6대 | ||
김영남 |
김정일 섭정대행 김정은 |
김정은 | ||
}}}}}}}}}}}} |
역임한 직위
|
||||||||||||||||||||||||||||||||||||||||||||||||||||||||||||||||||||||||
|
<colcolor=#ffffff> 제1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金枓奉 | Kim Tu-bong |
|
|
|
<colbgcolor=#024fa2> 출생 | 1889년 3월 17일 |
경상도
기장현 읍내면 동부동 (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
|
사망 | 미상 (1958년 이후, 향년 불명) |
본관 | 김해 김씨 |
호 | 백연(白淵) |
직업 | 한글학자, 정치인, 항일운동가 |
소속 정당 |
(제명) |
[clearfix]
1. 개요
|
|
<rowcolor=#fff> 젊은 시절 | 1948년, 노년의 모습 |
일제강점기의 한글 학자,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 본관은 김해(金海) #. 호는 백연(白淵), 백련(帛連).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건너가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주시경의 제자로서 한글 연구에도 힘썼다. 그의 저작으로는 한국어 문법서인 『조선말본』과 『깁더 조선말본』이 있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에 귀국하여 국가원수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라는 최고위직을 역임했으나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다.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활용하여 북한의 초기 언어 정책을 주도했으며, 그중에서도 「조선어 신철자법」에 포함된 『6자모』를 만들어 남한과 이질적인 맞춤법을 도입한 것이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하지만 『6자모』는 리극로 등 다른 언어학자들로부터 언어학적으로 조잡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김일성이 김두봉을 숙청한 후에 이 정책은 폐기되었다.
2. 생애
2.1. 독립운동
1889년 경상도 기장현 읍내면 동부동(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김돈홍(金敦洪)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문과 한학을 배우고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주시경의 가르침을 받았다. 1908년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안교재, 남형우, 신배부, 이경희 등 동료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해서 활동했다. 그 와중에 계속 한글을 연구하며 <조선말본>을 집필하여 1916년 완성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검거를 피해 영국 화물선에 숨어서 상하이로 밀항했다. 192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고 김두봉은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이 되어 활동했다. 1942년 조선독립동맹의 결성에 참여하여 1942년 7월 의장이 되었다. 이 시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훗날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게 되는 최현배를 포함한 상당수의 어문학자들이 옥고를 겪었는데 김두봉은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하고 있어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1946년, 북조선 로동당 창당 대회에 참가한 김일성과 김두봉[1] | 맨 왼쪽에 서있는 인물이 바로 김두봉.[2] |
1945년 광복이 되자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귀국하고 조선신민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을 지냈다. 1946년 8월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김일성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창당되자 명목상 당수인 북로당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소련 군정하에서 「조선어 신철자법」 제정에 힘썼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총장을 지냈으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언어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북로당 위원장에 재선되었으며,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당시 김일성, 박헌영 등의 추대를 받아 북한의 초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국가 수반)이 되었다. 비록 국가 수반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실권은 수상 김일성에게 있었다. 김두봉이 속해 있던 연안파 내에서도 실제 최고 실력자는 최창익이었다. 김두봉이 국가 수반 직에 오른 것은 당시 북한 정계에서 원로급에 속했고 항일운동가 및 한글학자로서 국내에 명망이 높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1949년 7월, 남북로당이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출범하면서 당수 자리도 김일성에게 물려주게 된다.
2.2. 6.25 전쟁
1950년 김두봉이 김일성의 6.25 전쟁 개전에 같이 참여했는지 논란이 있다. 김일성이 박헌영과 힘을 합쳐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 김두봉은 김원봉과는 다르게 " 서울은 한반도의 심장이다. 서울만큼은 무조건 장악해야만 한다"며 김일성의 남침을 찬성했다는 의견이 있다.[3] 6.25 전쟁 직전 평화 회담을 대한민국에 제안하는 것을 보면 침략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뿐 아니라 김두봉은 연안파 북측 인물들과 끈이 있고 대표성이 있는 인물이다. 소극적 반대를 했다고 보기에는 평화 회담 제의 뒤 6.25 전쟁 2일 전 대한민국 국회를 비방하면서 남측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여 6.25 전쟁 북침 주장의 밑밥을 깐 점, 6.25 전쟁 발발 즉시 북침으로 가정, 7월 4일 남한의 토지 개혁 추진과 남측 행정 기구 조직, 1951년에도 여전히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한 괴뢰 비방 등을 볼 때 김두봉이 반대 또는 소극적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6.25 전쟁 당시 인민군 중좌로 참전한 최태환의 회고록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송악산 주능선에 배치되어 열흘 이상 보낸 6월 23일, 사단 사령부에서는 대대장급 이상 군관들을 소집하였다. 대부분의 군관들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참가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당 정치국원이었던 김두봉이 비밀회의를 소집하게 된다는 정보를 중앙으로부터 미리 통고받고 있었다.
우리는 말을 타고 송악산 계곡에 임시 천막으로 만들어진 회의장으로 갔다. 우리는 길게 놓여진 탁자에 둘러 앉았다. 그러자 곧 이어 김두봉이 나타났다. 온화한 기운을 풍겨주는 인물이었다. 내뱉는 목소리도 차분하고 느릿해서 그동안 들썩거리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듯 했다. 그는 알고 있던 대로 학자를 연상케 했다. 번쩍거리는 금실로 수놓은 계급장을 단 다른 장군들의 면모와는 전혀 다른 것이기도 했다. (중략)
현 시국에 대한 이야기가 끝날 때쯤 김두봉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영문을 모른채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금방 그의 눈물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동안 공화국에서는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왔습니다. 이제 와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남조선의 우리 동포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시작해야 하는데 일주일 안에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남조선정부가 합작,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면 더는 외국도 우리를 간섭,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느 군관동무들은 해방전쟁의 의의를 저버리지 말고 맡은 임무에 충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두봉의 연설이 끝나자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군관들은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듯 했다.
최태환, 박혜강, '젊은 혁명가의 초상: 인민군 장교 최태환 중좌의 한국전쟁 참전기', p.111-112.
우리는 말을 타고 송악산 계곡에 임시 천막으로 만들어진 회의장으로 갔다. 우리는 길게 놓여진 탁자에 둘러 앉았다. 그러자 곧 이어 김두봉이 나타났다. 온화한 기운을 풍겨주는 인물이었다. 내뱉는 목소리도 차분하고 느릿해서 그동안 들썩거리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듯 했다. 그는 알고 있던 대로 학자를 연상케 했다. 번쩍거리는 금실로 수놓은 계급장을 단 다른 장군들의 면모와는 전혀 다른 것이기도 했다. (중략)
현 시국에 대한 이야기가 끝날 때쯤 김두봉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영문을 모른채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금방 그의 눈물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동안 공화국에서는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왔습니다. 이제 와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남조선의 우리 동포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시작해야 하는데 일주일 안에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남조선정부가 합작,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면 더는 외국도 우리를 간섭,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느 군관동무들은 해방전쟁의 의의를 저버리지 말고 맡은 임무에 충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두봉의 연설이 끝나자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군관들은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듯 했다.
최태환, 박혜강, '젊은 혁명가의 초상: 인민군 장교 최태환 중좌의 한국전쟁 참전기', p.111-112.
위 내용은 전쟁 발발 이틀 전인 6월 23일, 김두봉이 최태환의 부대를 방문한 상황을 회고한 것인데 '남조선 해방전쟁이 임박했으니 부대원들은 맡은 임무에 충실해주기를 바란다' 는 내용의 연설을 하면서 부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만일 김두봉이 전쟁에 찬성하지 않았으면 명색이 국가 수반이라는 인물이 한창 침공 준비 중인 전방부대까지 찾아와서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침공 독려 연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아래부터는 김두봉이 침략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에 의하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예정대로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일제히
38도선을 넘어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같은 시각 김일성은 내각 비상 회의를 개최해 “동지들, 매국 역적
리승만의 군대는 오늘 이른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무력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라고 둘러대면서 휘하의 고급 당 간부들까지 속였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북한은 줄곧 “미제와 이승만 도당은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하여 조선 인민을 반대하는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인민군이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무력 침공을 물리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섬으로써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알아봅시다! 6.25 전쟁사, p.11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알아봅시다! 6.25 전쟁사, p.110.
여기에 의하면 김일성과 군부는 당 고위 간부들까지 속인 것을 알 수 있다. 아나톨리 토르쿠노프(Анатолий Васильевич Торкунов)의 저서인 《한국 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Загадочная война: корейский конфликт 1950—1953 годов, 2001)》[4]에서 인용된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의 이름은 나오나 김두봉이라는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김두봉보다는 테렌티 시티코프가 더 많이 나온다. 그들이 속였던 이유는 소련이 겨울전쟁 시절 같은 소련 아군에게 직접 포를 쏴서 핀란드군의 공격을 조작한 일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학 명예 교수는 6.25 전쟁 당시에도 이 때의 경험이 큰 영향을 준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박명림 교수의 책에 의하면 이런 내용도 확인이 가능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 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리권무,
김창덕,
류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나남 출판. 303쪽 ~ 304쪽.이 내용을 구글 도서 검색에서 검색해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최용건을 제외하고도 전쟁에 소극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김두봉이 있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서 볼때 김두봉의 입장은 '전쟁이 성공하면 좋은데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과 기대가 섞인 어정쩡한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홍순관의 증언에 따르면 최용건이 김두봉에게 만약 미군이 오면 어찌하냐고 우려를 표명했다가 리승엽에게 기회주의라고 맹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슈티코프의 보고에도 김두봉은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고 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에 극도의 공포에 질려서 소련군이 언제 개입하느냐고 허구한날 소련인들을 붙잡고 빌었다고 한다.
휴전 협정문에 서명하는 김일성과 그를 지켜보는 김두봉. 옆에는 박정애다. |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에는 피난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던 임시정부 시절 동료였던 부통령 이시영에게 이승만이 도망쳤으니 이시영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는 논리로 김일성과 (명목상의) 정상회담을 하자면서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이시영은 이를 거부하고 피난을 갔다. 전쟁 중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헌법 준수를 촉구하며 김일성과 대립각을 많이 세웠으나 전체적으로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매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자격으로 신년사를 발표하고 계속하여 당지도부에는 포함이 되었으나 김일성은 김두봉이 비조직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계속하여 비판하였다. 무력감 때문에 김두봉은 소련측에 전쟁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사퇴했을 것이라고 자괴감을 토로하였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2.3. 몰락
전후에도 김두봉이 원한 총선이 실시되지 않고 일부 지방선거만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김두봉과 김일성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의 계속되는 토사구팽과 개인숭배 강화에 환멸을 느낀 연안계와 고려인 지도자들이 1956년 3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의 스탈린 격하의 영향을 받아 김일성에 맞서 8월 그룹을 조직하면서 김두봉 역시 여기에 합류하였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김두봉은 주권기관 선거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면서 김일성을 비판했다. 어쨌거나 정치위원회에서 개편된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결국 1956년 8월 최창익, 윤공흠, 박창옥 등이 김일성의 독재를 비판하고 집단 지도 체제 구성을 시도한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 김두봉은 처음에는 동참했으나 소련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원회의 2주일 전에 발을 빼버렸다. 살아남기 위해 최창익, 박창옥 등을 비판하는 데 동원됐으나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최창익, 박창옥을 비판해야 하는 당 회의 때 늙어서 힘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휴가를 가버리는 등 반대파 숙청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이 때문에 김일성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또한 밑에 언급된 황진이 묘 참배 사건을 비롯해서 여러모로 선비적인 풍류 즐기기를 북한에서도 멈추지 않은 모양인데, 박정애가 소련 측에 전달한 정보에 따르면 68세의 나이에도 정력적인 춤꾼(...)으로 춤추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대의원으론 재선되었으나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는 최용건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후 조직지도부 부부장 김영주가 주도한 열성자회에 끌려가 비판을 당했는데 늙고 병든 김두봉이 운신을 하지 못하자 김영주가 늙은 반동이 늙은 것이 벼슬인 줄 아냐고 못나오면 우리가 끌어내자고 군중을 선동하여 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개처럼 끌어내서 조리돌렸다.
이듬해인 1958년 3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전 부수상 박의완 등과 함께 혹독한 비판을 받고 상무위원에서 해임, 출당 조치되었다. 1958년 3월 7일, 김일성은 도, 시, 군당위원장들 및 인민위원장들에게 한 연설 <당사업을 개선할데 대하여>를 통해서 "김두봉은 자기가 대통령이니, 왕이니 하면서 거기에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하는 기술서기들을 궁녀라고 하고 상임위원회를 당보다 더 높다고 하였으며, 별의별 못하는 소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상임위원회를 무법천지로 만들어놓았습니다."라고 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2.4. 최후
이후 일개 농민으로 몰락하여 협동농장으로 쫓겨났다. 이때 평안남도 지도원으로 일하다가 남한에 공작원으로 파견되었고 1970년부터 1988년까지 수감되었던 김진계의 증언에 따르면 1962년에 김두봉을 만난 적이 있는데, 김두봉은 같이 쫓겨난 젊은 아내가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제발 유치원 교사로 일하게 해달라고 당국에 탄원하였고 당국이 이를 수용해주어 김두봉과 그 아내가 유치원에서 일하게 해주었다고 한다.하지만 와다 하루키의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1960년 1월, 박창옥, 최창익, 고봉기, 김웅 등을 총살하기 위해 비밀재판이 소집되었을 때 김두봉은 이미 병사한 후라서 재판에 회부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두봉과 같이 숙청당했던 박의완은 이때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유성철의 주장에 따르면 농촌으로 하방당한 후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농촌당원들에게 맞아죽었다고 한다. 유성철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모르나 대숙청 시기 소련 NKVD가 실제로 써먹은 방법이기는 하다.
그리고, 하앙천처럼 김일성종합대학 역대 총장 목록에서 삭제되어 있다. 그런데 일부 복권이 된건지 김정은 시대에는 김두봉의 사진이 북한 매체에서 쓰이고 있다.
3. 평가
3.1. 『말모이』 반출 및 방기
김두봉은 최초로 편찬된 우리말 사전[5] 『말모이』를 국어학자들이 완성하지 못한 주요 원인이다. 『말모이』는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과 그의 제자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이 편찬한 미완성 사전이다. 주시경의 요절 후,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고, 원고는 1919년 김두봉이 상해로 망명하면서 상당 부분을 반출하였다. 문제는 국내 국어학자들이 사전 편찬을 재개하고자 했을 때, 김두봉이 원고를 내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1927년에 국내 국어학자들은 사전 편찬을 재개하기 위해 『말모이』 원고를 인수하려고 이윤재를 상해에 파견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김두봉이 이윤재의 요청을 거부하며 원고를 정리해서 보내주겠다는 핑계로 생활비 200원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윤재는 맨손으로 귀국했지만 김두봉을 믿고 중앙인서관의 이중건에게 200원을 기부받아 상해에 있는 김두봉에게 보냈다. 그러나 김두봉은 원고를 보내기는커녕 정리조차 하지 않았고 아래와 같이 훈시 비슷한 말을 동생을 통해 전했다고 한다.
사전원고 정리는 장구한 시일을 요하는 것이니 그것보다도 신 철자법을 속히 보급시키는 것이 중요하니 대중이 많이 읽는 서적을 신 철자법으로 많이 박아내는 것이 가장 첩경이다.
#
결국 『말모이』는 김두봉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다. 국내 국어학자들은 김두봉이 가지고 있던 『말모이』 원고 없이 작업해야 했고, 조선어학회 사건 등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1957년에야 『조선말 큰사전』을 출판했다. 이윤재가 상해에 있던 김두봉에게 건넨 200원은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일본제국이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가는 꼬투리가 되었고 이윤재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윤재의 장남 리원갑과 차남 리원주가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쓴 실화소설 『민족의 얼』에서 이 사건을 다룬다. 소설에서는 최기봉이란 인물의 입을 빌려 김두봉을 다음과 같이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그 원고 하나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머나먼 길을 오셨는데 제것도 아닌 원고를 움켜쥐고 내놓지 않는 그가 무슨 량심있는 학자입니까. 호구책도 없이 과객노릇이나 하며 림정에서 한자리 얻어볼가 해서 끼웃거리는 그 량반이 어느 하가에 사전을 손질한단 말입니까. 입으로는 애국애족을 부르짖으면서 실지 행동에서는 딴판인게 그런 사람들입니다.
#
3.2. 6자모
6자모는 김두봉이 주도한 「조선어 신철자법」에서 나타나는 주요 특징으로, 기존 맞춤법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인다. 6자모는 불규칙 용언의 규칙화를 위한 5개의 자음 글자와 조사와 결합할 때 반모음으로 축약하는 'ㅣ'를 표기하기 위한 1개의 모음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두 자음 글자는 옛한글 'ㅿ'과 'ㆆ'을 재도입한 것이며, 나머지 네 자모 글자는 김두봉이 새로 창조한 것이다.[6]하지만 6자모는 널리 사용되지 못했으며 언어학적으로 미흡한 점이 여럿 지적되었다. 예를 들어, 현대국어의 'ㅅ' 불규칙 활용은 중세국어에서 'ㅿ' 규칙 활용이었지만 'ㅿ'이 소실하면서 불규칙 활용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ㅅ' 불규칙 활용에는 'ㅿ'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김두봉은 'ㅅ' 불규칙 활용에서 'ㆆ'을 사용하며 'ㄷ' 불규칙 활용에서 'ㅿ'을 사용하는 역사적·음운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을 했다. 비슷한 이유로 중세국어의 'ㅸ' 규칙 활용에서 유래한 'ㅂ' 불규칙 활용을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든 점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 외에도 새로 창조된 자모의 제자 원리에 대한 설명 부재, 새로운 모음의 사용 예시에서 나타나는 작위성 등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북한에서도 국어학자 리극로가 「소위 《6자모》의 비과학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김두봉의 체계를 비판했다. 결국 6자모는 거의 쓰이지 않았으며, 김두봉이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후에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29 - 1930 | 정계 입문 |
[[한국독립당| 한국독립당 ]]
|
1930 - 1935 | 창당 |
[[민족혁명당| 민족혁명당 ]]
|
1935 - 1937 | 합당[7] |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혁명당 ]]
|
1937 - 1942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2 | 탈당 |
[[조선독립동맹| 조선독립동맹 ]]
|
1942 - 1946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6 | 정당 해산 |
|
1946 | 창당 |
|
1946 - 1949 | 합당[8] |
|
1949 - 1958 | 합당[9]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58 - ? | 제명 |
5. 경력
임기시작 | 임기종료 | 비고 |
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
1946년 6월 26일 | 1946년 8월 31일 |
1차 북조선대표대회에서 선출 북조선공산당과 합당 |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
1946년 8월 31일 | 1949년 7월 1일 |
북조선로동당 1차 당대회에서 선출 2차 당대회에서 재선 남북로당 합당 과정에서 퇴임 |
1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
1948년 9월 9일 | 1957년 9월 18일 |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임기 만료 |
조선로동당 1,2기 정치위원회 위원 | ||
1946년 8월 31일 | 1956년 4월 29일 |
1차 당대회에서 선출 2차 당대회에서 재선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재선 3차 당대회에서 직함 개편 |
조선로동당 3기 상무위원회 위원 | ||
1956년 4월 29일 | 1958년 3월 6일 |
3차 당대회에서 선출 1차 당대표자회에서 출당, 제명 |
6. 여담
- 같은 항일운동가였으며 월북한 인사인 약산 김원봉과 이름과 행보가 비슷해 헷갈리거나 친척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이름에 들어간 '봉'자를 돌림자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김두봉의 '봉'자는 받들 봉(奉)이고 김원봉의 '봉'자는 봉황 봉(鳳)이다. 대신 둘이 인척 관계이긴 했다. 김두봉은 김원봉의 본처 박차정[10]의 외당숙이었다. 박차정은 김두봉의 5촌 조카인 셈. 생전에 김원봉에게 "내 조카 차정이는 갔지만 약산은 언제까지나 내 조카 사위"라고 말하기도 했다.
- 그가 나고 자란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현재는 부산광역시로 편입됨)는 김해 김씨 일파의 집성촌으로 이 지역 출신의 친척 중 항일 운동과 관련된 사람이 많았다. 제1공화국 초대 국회 부의장을 지냈고 한국 전쟁 당시 월북한 김약수는 그의 6촌 동생이다. 김약수는 개명한 것으로서 본명은 김두전(金枓全). 두(枓)가 돌림자이다.
- 그가 북한의 언어 정책을 주도할 때 대한민국의 언어 정책을 주도한 최현배와 주시경의 제자로서 동문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남북한의 언어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김두봉의 정치적 배경을 이용한 프로파간다에 가깝고, 실제 상황과는 다르다. 우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1933년에 발표되었고,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은 1936년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김두봉이 1945년 북한으로 귀환하기 한참 전에 이미 남북은 같은 언어정책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이 업적은 김두봉, 최현배 한두 사람이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이 협력하여 일군 것이다. 최현배는 이 과정에서 커다란 기여를 하였지만, 김두봉은 1919년에 중국으로 출국했기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말모이』 원고를 둘러싸고 문제를 일으키는 등 방해를 했다. 게다가 박승빈의 표음주의 맞춤법과 이승만의 한글 간소화 파동에 맞섰던 최현배와는 달리, 김두봉은 이러한 대체 맞춤법과 대결한 이력이 없다. 도리어 김두봉이 '6자모'를 제정하며 한글학회의 맞춤법에 대항했기 때문에 북한에서 맞춤법 통일을 일군 사람은 김두봉을 숙청한 김일성이라 할 수 있다.
- 김구와 인연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 연합 작전을 구상하기도 했다. 위의 사진은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사망하였을 때 김두봉이 만들어준 무덤으로 순한글로 써진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인연을 바탕으로 김구는 1948년 남북협상 때 김두봉을 형(인형(仁兄), '어진 형')으로 칭하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친족 관계가 아닌 경우 형이라는 호칭이 좀 애매하다. 원래 구어체에서는 남녀 불문하고 손위 사람을 '언니'라고 불렀다. 드라마 추노에서 잘 묘사되어 있으며 '졸업식 노래'의 첫 소절도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인데 여기서 언니는 남녀 불문한 손윗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다. 그러다가 근대에 형이라는 호칭이 등장했다. 이 호칭은 가벼운 존중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게 동년배간에, 손위가 손아래에게, 손아래가 손위에게 사용된 예가 모두 존재하는 마법의 단어이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김구가 훨씬 나이 적은 김두봉에게 형이라고 불렀다 해서 숙이고 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편지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족하나 좌하 같은 서간문 어투가 아니라 평상문의 친근함을 과시하려고 저렇게 썼을 수도 있다.
- 1961년에 여운홍이 남북 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의 전국가원수인 김두봉을 남한으로 초청하려 하기도 했다.[11] 그러나 당시 내각제 총리였던 장면을 포함한 사회의 반대에 의해 성사되지 않았다.[12] 물론 이 때는 이미 숙청되어 협동 농장에서 노역을 하거나 사망했던 시기이므로 실현될 수 없는 주장이었다.
-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에 등장하는 모스크바 8진 중 1명이었던 최국인은 조선의용군 산하에 있는 연극단에 들어가 활동했고 그는 조선의용군 김두봉과 인연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김일성을 상당히 증오하는 발언을 다큐멘터리 내내 한 것으로 유명하다.
- 월북 인사이며 북한 정권 초창기에 숙청당했기 때문에 다른 북한 정치인들에 비해 존재감이 부족한 편으로 현대 한국에서는 김일성과 함께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인데 북한의 지도자로서 6.25 전쟁에 동의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항일 운동 역시 공산주의자로서 참여했기에 현대 한국 정부와 법통이 이어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등 현대 한국에서 쉽게 옹호해주기 어려운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글학자로써도 말모이 편찬을 방해한 일 때문에 평가가 박하다. 북한에서도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 패해 숙청된 인물로서 평가가 낮다.
- 과거에 개성에 갔을 때 황진이의 무덤에 헌화하고 술을 부은 뒤에 절을 했다고 한다. 국문학자로서 황진이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행동이었지만 후에 김두봉이 숙청당할 때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일국의 국가원수라는 자가 기생 년의 무덤에 꽃다발을 놓고 술을 따르고 절까지 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이유였다고 한다. 다만 김두봉의 숙청은 그가 연안파였기 때문이었고 황진이에 대한 문제는 구실 중 하나였을 것이다.
7. 대중매체에서
- < 공화국 시리즈>의 시작인 1981년 MBC 드라마 < 제1공화국>에서는 중견 배우 박영지가 연기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시절로 시대가 시대인지라 북한 인물에 대한 정보나 자료가 부족했고, 있다해도 당시 분위기상 반공적으로 다소 왜곡된 것이 대부분이였기에 박영지는 나름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연기에 임했다고 한다.
- 대한민국 전쟁 영웅이 되었다에서는 평양 함락 이후 김일성과 함께 도망다니다 말 한 마디 잘못 해서 김일성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며 이후 김원봉과 짜고 향후 탈출 보장을 조건으로 이강산의 특수 연대에 김일성을 넘겨주지만 이들을 완전히 믿지 않은 이강산의 명으로 일단 포로로 잡힌다.
[1]
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일성 바로 옆의 인물. 뒤에 걸려 있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눈에 띈다.
[2]
오른쪽부터
김일성,
박헌영,
김원봉,
김달현,
허헌. 1948년
모란봉극장에서
남북연석회의 입장 당시 촬영한 사진이다. (
출처
[3]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한국 전쟁 - 김두봉의 활동과 역할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의 17쪽에는 6.25 전쟁 발발 후 상임위원장으로서 북한 법적 체계상 남조선 행정 기구 등을 도입하게 하고
조선인민군의 사기 진작을 도왔다.
[4]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 등 공산 세력의 남침을 소련 문서로 엮어서 보여주는 책이다. 아나톨리 토르쿠노프는
정치학 박사이자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학장 및
동양학과 교수다.
[5]
여기서는 표제어와 뜻풀이를 모두 한국어로 한 사전을 말한다.
[6]
새로운 자모는 유니코드에 등재되지 않아 기술적으로 언급하기 어렵지만,
위키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7]
의열단,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과 신설 합당
[8]
북조선공산당과 신설 합당
[9]
남조선로동당과 신설 합당
[10]
부산 출신의 여성 항일운동가.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생가와 동상이 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1]
「金斗奉등 招請 呂運弘議員主張」, 『동아일보』, 1961.01.11, 1면
[12]
「問題삼을 性質 呂運弘議員發言에 張總理가 答辯」, 『동아일보』, 1961.01.16,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