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1:09:13

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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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478,#C39335> 내각 제1부수상 1959년 1월 20일 직함 신설
김일 1959년 임명, 1962년, 1967년 유임
<rowcolor=#003478,#C39335> 내각 제2부수상 1970년 7월 11일 직함 신설
박성철 1970년 임명
<rowcolor=#003478,#C39335> 내각 부수상
1기
1948-1957
박헌영· 홍명희· 김책(1948)
허가이(1951)
최창익· 정일룡(1952)
최용건· 박의완(1953)
박창옥· 김일(1954)
정준택· 정일룡재임명(1956)
2기
1957-1962
김일· 홍명희· 정준택· 남일· 박의완· 정일룡(1957)
리주연(1958)
리종옥· 김광협(1960)
3기
1962-1967
김일· 김광협· 김창만· 정일룡· 리종옥· 리주연· 남일(1962)
최용진(1964)
고혁· 김창봉· 박성철(1966)
4기
1967-1972
김일· 김광협· 박성철· 김창봉· 리주연· 남일· 리종옥· 최용진· 정준택(1967)
김만금· 홍원길(1970)
최재우(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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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
金策
파일:김책.jpg
<colbgcolor=#ed1c27><colcolor=#fff> 본명 김홍계 (金洪啓)
출생 1903년 8월 14일
함경북도 성진군 학상사 수사리 봉평촌[1]
사망 1951년 1월 31일 (향년 47세)
직업 군인, 정치가
정당 중국공산당(1930년-1946년)
조선로동당(1946년-1951년)
1. 개요2. 생애
2.1. 항일운동2.2. 북한 정권 수립 참여2.3. 사망
3. 김책에 대한 김일성의 특별대우
3.1. 관련 일화
4. 장의위원회 구성5. 경력6. 매체에서7.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의 독립운동가, 북한의 군인, 정치인이다. 강건, 최용건, 최현 등과 함께 1930년대 만주 빨치산 시절부터 김일성과 함께한 김일성의 대표적인 심복이다. 북한에서 그의 이름은 이순신[2]을 능가하는 '충성'과 '의리'의 대명사로 통한다. 북한 각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김책시[3], 김책제철소, 김책역, 김책공업종합대학,[4] 근위 서울 김책 제4보병사단 등이 있다.

2. 생애

2.1. 항일운동

1903년 함경북도 성진군[5] 학상사 수사리 봉평촌(棒枰村)(現 함경북도 김책시 옥천리)의 빈농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에 중국 지린성으로 이주 후 중등학교에 다니던 당시 지하청년단체 활동에 참여하며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일제의 눈에 띄어 몇 번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만주 동북항일연군의 무장항일운동에 참여하여 관동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성실하고 입이 무거운 성격이었고, 신중하면서도 온화한 성격으로 중간에서 조정자 역할을 잘해서 당시 속해있던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매우 평이 좋아 중국 공산당 내에서의 계급도 김일성보다 높았다. 당시 김책은 소좌( 소령), 김일성은 대위였다. 하지만 보천보 전투로 유명해진 9살 연하의 김일성을 이른바 만주빨치산파의 1인자로 추대하고 평생 충성을 바쳤다. 성격이나 행동이 중국에서 많이 존경받는 저우언라이와 비슷했다는 평.

8.15 광복 직후 북한 요인들에 대한 소련의 평가에서도 실질적인 능력이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받은 바 있다. 요지는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이 좋으며 동시에 냉정한 분석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물론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6.25 전쟁 발발 당시 남한에 있어서 최고의 위험인물이었다.

2.2. 북한 정권 수립 참여

미군정 초기 남한에서 박헌영 등 좌익 세력이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처럼, 광복 직후의 소련군 치하 북한에서도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우익 세력도 상당수 존재했고, 조만식이 이들을 대표하는 인사였다. 하지만 남한에서 지속된 정치적 혼란과 달리 북한은 신속하게 여론을 통일시키고 정부를 세웠는데, 이런 북한의 수립 과정에서 좌익 계열의 여론을 북한의 주장으로 말하면 '통합', 부정적으로 보면 공이 많아 권력에 위협이 되는 다른 좌익 독립운동가마저 제압할 수 있게 한 것은 김책의 역할이 크다고 한다. 또한, 북한 지역에 김일성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홍보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책이다. 광복 직후 북한에 귀국한 김책은 평양, 함흥, 원산 등 북한 주요 도시에 "우리 민족의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등의 표어를 붙이고 김일성의 업적을 알리는 선전물을 대량 배포하는 등 김일성을 민중들에게 '민족의 지도자'로 인식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김일성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전부터 널리 알려졌지만 북한 대중들이 김일성하면 엄청난 전공을 세울 수 있는 노장군[6]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김일성 가짜설도 나돌정도였는데, 김일성에 대한 실제보다 과도한 전공에 대한 소문은 유지하면서 그를 우상화시키는 일에 일조했던 것이다. 자기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경력도 선배인 김책이 이정도로 자신에게 충성을 바쳤으니 김일성으로서는 김책을 빨치산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특별대우할 정도로 고마웠을만도 하다.

1945년 10월, 서북5도당책임자급당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창설되면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1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당시 민족보위국( 인민무력부의 전신)의 국장으로서 활동했다. 당시 북한 정계에서 "이름부터가 타고난 '책'략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치 공작에 뛰어났다고 한다. 이후 조선인민군을 창설하는데 공헌했고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에 당연히 재선되는 한편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9월 9일,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초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임명되면서 김일성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파일:FB_IMG_1474744992635.jpg
1949년 북한의 최대 난관이었던 평원선 개통 후 테이프를 끊는 김책 부수상.[7] 아직도 쓴다 카더라

6.25 전쟁에서도 명목상 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북한 수상을 맡으며 상징으로서 평양에 죽치고 있던 김일성에 비해, 김책은 전선사령관으로서 전선 전역에서 실질적인 악명을 떨쳤다. 개전 초기 총참모장 강건과 함께 중서부 전선의 북한군 침공 작전을 계획해 서울을 3일 만에 함락시켰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한 퍼레이드에 직접 참여했다. 이후 충청, 전라 지방을 점령하는데도 성공해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수안보에 북한군 전선사령부를 세우지만, 다부동 전투에서의 큰 피해,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유엔군의 기세에 밀려 조치원을 통해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후퇴했다.

2.3. 사망

6.25 전쟁 당시 한국군 유엔군 평양을 향해 진격할 때, 김책 스스로 평양에 남아서 싸우겠다고 자청하여 전선사령관으로서 남았으며, 1951년 1월 31일에 사망했다. 지뢰에 폭사한 강건과 더불어 6.25 전쟁 중 전사한 거물급 빨치산 출신 인물이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매우 괴로워했으며 평생토록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사망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으며, 그의 사망 원인으로 전사, 일산화탄소 중독, 심근경색, 교통사고, 암살 등이 거론되었고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과로사(아마도 심근경색인듯)로 기록되어 있다.[8] 김일성이 자기 숙소에서 자고 가라고 했는데, 이를 거절하고 집무실로 가서 철야 업무를 하다가 사망했다고. 이것이 북한에서 발표한 공식적인 사망 원인이다. 한국에서는 항공폭격으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김덕홍 회고록에도 그가 폭격으로 죽었다고 적혀 있다. 어쨌거나 이후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

1968년 9월 1일, 북한 창건 20주년을 기념하여 안길, 최춘국, 김경석, 조정철과 함께 공화국영웅 칭호, 국기훈장 1급, 금별메달을 추서받았으며 1990년 8월,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3. 김책에 대한 김일성의 특별대우

만주파의 최연장자이자 혁명 선배인 최용건에게도 뻣뻣하게 굴던 김일성이[9] 김책에게만은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드러냈다고 한다. 혁명 선배들 중에 유독 김책에게만은 존경을 표했으며, 광복 후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어도 길에서 김책과 마주치면 먼저 차에서 내려서 김책에게 먼저 깍듯이 인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후일 자신의 평생 심복이었던 김창봉, 김광협[10] 등도 가차없이 숙청했던 자였건만, 김책만은 극진히 대우했다. 또한 김일성과 이야기를 하면서 반말을 하며 말을 놓을 수 있었던 정말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의 사망 직후 김일성이 직접 장례식을 주관했다. 그가 내각 부수상으로 재직하던 당시의 내각 집무실 전체를 통째로 옮겨서 평양전승기념사적관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몇 년 후 행정구역 개편시 함경북도 성진시김책시로, 학성군김책군으로 개칭하고[11][12] 북한 최고의 공업대학과 최대의 제철소 이름을 각각 김책공업종합대학, 김책제철소라고 지었고, 평양에 주둔한 제 4사단을 통칭 '김책사단'으로 칭하도록 했다.

그리고 김책의 두 아들을 직접 후원하여 만경대혁명학원[13] - 김일성종합대학 - 소련 모스크바 대학교 유학 - 당 간부의 북한 엘리트 코스 테크 트리를 밟게 했다.[14] 이 중 차남 김정태 국가안전보위부 정찰국 국장이었으나 1.21사태의 실패로 숙청당했다. 하지만 장남 김국태는 요직을 두루 거쳐 김일성이 살아있던 90년대 초반 당 비서를 역임했고 2000년대 김정일을 보좌했으며, 2010년 김정은의 차기 내각 명부에도 이름을 올리며 2013년 12월에 노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요직에 있었다. 김국태의 딸[15] 김문경 또한 2017년 7월 기준으로 조선로동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배우자는 외무성 국장 리흥식[16]으로 확인되었다. 그 김정일이 생전에 김국태에게 사석에서 '형님'으로 존칭했다고 하니, 김책 일가는 그야말로 3대를 잇는 김씨 조선의 최측근 심복이자 로열 패밀리의 일원인 셈이다.

3.1. 관련 일화

파일:A1332886232.png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어버이 수령님께서 서거하신후 여러 달이 지난 어느날 일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였다.

금수산의사당에는 수령님께서 애용하시던 금고가 있었습니다. 수령님께서 그 금고 안에 무엇을 보관하시였는가 하는것은 부관들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다음 그 금고를 열어보려고 하였으나 열쇠를 찾지 못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며칠전에 그 열쇠를 찾아 금고를 열어보니 그 안에 수령님께서 김책 동지와 함께 찍으신 사진이 있었습니다. 원래 수령님께서는 사진들을 다 당력사연구소에 보관하시였습니다. 그런데 수령님께서 김책 동지와 함께 찍으신 사진만은 직접 금고에 따로 보관하여 두시였습니다. 이것은 수령님께서 전우인 김책 동지를 얼마나 못잊어하시였는가 하는 것을 잘 말하여 줍니다.》

수령의 추억속에서의 영생, 그것은 인간이 한생을 통해 지닐수 있는 영광 가운데서도 가장 큰 영광이며 혁명가가 한생을 바쳐 도달할 수 있는 행복 가운데서도 가장 큰 행복이다. 김책동지는 그 영광과 행복의 상상봉에 있는 충신 중의 충신이다.

그는 어떻게 되여 수령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인간으로 되였는가.
세기와 더불어_제8권 제23장 제2절 혁명가 김책
김일성의 사무실에는 수십 년 동안 커다란 금고가 하나 있었는데, 모두들 그 안에는 굉장한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한 후 김정일이 그 금고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딱 하나, 누렇게 변한 옛날의 김책과 김일성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있었다고 한다.[17] 스탈린 부하린의 일화와도 비슷하다.

당력사연구실에서 근무했던 김덕홍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1994년 7월 16일에 김정일이 김일성이 청백리였다고 강조하려는 차원에서 교시한 내용인데, 평양의 엘리트 반응은 "온나라가 수령님의 것이었는데 수령님께서 금덩이와 돈을 모아둬선 뭘 하겠는가?"라고 오히려 비웃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일화로 역시 김일성 사망 당시 주석궁의 집무실 창가에는 그가 항상 쓰던 망원경[18]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그 창가로 밖을 내다보면 대성산혁명렬사릉[19]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생전의 김일성은 망원경을 가지고 이 곳을 자주 둘러보며 항일 빨치산 시절을 추억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김정일에게 유언 비슷하게 내가 죽으면 동지들과 함께 혁명열사릉에 묻어달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김정일은 마치 스탈린 레닌의 유언을 저버렸듯이 아버지의 유언을 외면하고 김일성의 묘를 금수산태양궁전에 건립하여 세습을 정당화할 선전에 써먹었다. 어쨌간에 독재자 김일성에게 인간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북한에서 "열심히 하면 수령님께서 알아주신다" 운운하는 찬양 프로파간다에 이 이야기를 너무 많이 써먹은 나머지 식상해졌으며, 이상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에 그저 동화의 일종이나 지나간 옛 일 정도로 여겨지는 듯하다.[20]

4. 장의위원회 구성

5.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로동당 2기 정치위원회 위원
1948년 3월 31일 1951년 1월 31일 북조선로동당 2기 1중전회에서 선거
임기 중 사망
내각 부수상
1948년 9월 9일 1951년 1월 31일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임명
임기 중 사망
내각 산업상
1948년 9월 9일 1951년 1월 31일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임명
임기 중 사망

6. 매체에서

  • 한국의 미디어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지만 반공드라마에 등장해도 하나같이 빌런으로 나온다. 최용건에 비해서는 의외로 저돌적이고 악역 전문 배우들이 나오는데... 극우세력이 김일성을 미화한다면서 반발해서 13회만에 조기종영 당한 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21]에서조차도 김책의 성격은 고스란히 김흥기가 주연한 최용건이 가져가고 그냥 저돌적인 김일성 찬양자로 묘사되고 있다.
  • 제1공화국에서는 백인철이 맡았다. 뭘해도 똑부러지게 할 줄 아는 게 없는 김일성을 어떻게든 커버해주려고 애쓴다. 그런 만큼 김일성도 김책을 제대로 사부님처럼 모신다.
  • 북한 영화에서는 주로 인상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캐릭터로 나온다. 북한에서 선전하는 대로 머리 좋고, 인심 좋은 수령님의 심복 캐릭터를 재현하기 위해 많이 신경을 쓰고 있다. 간혹 영화상에서 김일성이 김책에게 자문을 하는 장면도 나올 정도다. 영화 <한장의 사진>에서는 배우 채기영이 분했다.

7. 여담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책의 아들 김정태의 아내가 러시아인이었는데 북한 당국에 의해 강제 이혼 당했다. 1950년대 후반 김정태는 소련 모스크바 대학 유학 시절부터 사귄 러시아인 아내를 국내로 데려왔다. 그런데 김정태가 출장을 간 사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소련으로 추방당했고, 이후 가족은 다시는 재회하지 못했다.[22] 당시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 의해 스탈린주의가 배척되어 소련과 북한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고, 소련으로부터 받던 원조가 격감한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8월 종파사건 이후 민족스탈린주의가 강화되어가던 북한에서 이 러시아인 아내들이 남편에게 '못된 물'을 들인다고 북한 당국에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민족스탈린주의하의 북한 체제를 비판하던 작가 서만일, 시인 김철 등도 러시아인 아내가 있었는데 비슷한 전철을 밟아야 했다.
  • 김책의 일가라고 주장하는 탈북자(김책이 종조부라고 주장, 즉 김책이 할머니의 큰오빠라고 주장)가 사실 김책의 고향은 충북 옥천이며 원래 정씨라고 주장한 일이 있다. # 하지만 북한에서 김일성의 측근들의 본명과 실제 고향을 딱히 숨긴 적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신빙성이 의심된다. 가령 김일은 본명이 박덕산인데 북한은 이를 전혀 숨기지 않고 있고 강건, 박성철 등은 고향이 경상도지만 이 역시 숨긴 적이 없다. 애초에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라는 것도 전혀 숨기지 않으니[23] 측근들의 본명을 숨길 이유는 전혀 없다. 그리고 전형적인 김일성 가짜설 + 김책이 모든 것을 주도했다는 주장인데[24] 88여단이 소련 관리 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역시 황당한 주장이며 또한 미역국에 독을 타서 죽였다는 것인데 이 역시 북한 관련해서 전가의 보도처럼 나오는 만물독살설 수준의 얘기에 불과하다.[25]

[1] 함경북도 김책시 옥천리 [2] 도서정리사업 이후 북한에서는 '리순신'조차도 리씨 조선이라는 봉건 국가에 충성한 전근대적 영웅이라며 깎아내린다. [3] 원래 성진시였으나, 1951년 2월, 김일성이 학성군을 김책군으로, 성진시를 김책시로 고치라고 지시하였으며 1952년 12월, 김책군 학남면에 있던 일신, 송정, 풍호, 리대, 룡대, 례동 7개 리를 나중의 단천시에 해당하는 광천군에 넘기고 1961년 12월, 김책군과 김책시를 통합하였다. 원래는 김책읍도 있었는데, 이는 도로 학성읍으로 돌아갔다. 여기에 소재한 성진제철소, 성진역도 김책제철소, 김책역으로 같이 개명되었다. 상세한 것은 김책시 문서 참조. [4] 참고로 김책공대는 김책시가 아니라 평양에 있다. [5] 북한 정권이 들어선 현재는 '김책시'로 개칭 [6] 예를 들면 홍범도가 있다. [7] 뒤에 데로형 전기기관차가 보인다. [8] 백선엽의 6.25 회고록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에서도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9] 그래도 최용건에게 계속 존대는 했다고 한다. 최용건도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었다. [10] 북한군 제 2군단장이었는데 6.25 전쟁 개전 초기 한국군 제 6사단을 제 시간에 못 밀어버리고 오히려 피해만 입은 까닭에 강원도 등지의 동부전선 진격 속도가 현저하게 둔화되어 전선이 고착되었고, 지구전 양상으로 흘러가는 계기가 되었다. 춘천-홍천 전투 참조. 하지만 김광협은 6.25 전쟁 때의 실책으로 잠시 좌천당하긴 했지만 숙청까지 당하진 않았다. 그가 숙청된 건 1970년대 초반이다. [11] 이후 김책군이 김책시에 통합되었다. [12] 북한의 시/군 단위 이상의 행정구역에서 사람 이름을 딴 지명은 김형직군, 김정숙군, 김형권군, 문덕군, 김책시 이 다섯 뿐이다. 참고로 김형직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정숙은 김일성의 아내이자 김정일의 어머니, 김형권은 김일성의 작은아버지다. 근대사 인물이 아닌 을지문덕의 이름을 딴 문덕군을 제외하고 보면 북한에서 김일성 일가가 아닌데 이 정도의 대우를 받는 인물은 김책 하나뿐이다. 다만 리 단위에서는 몇몇이 더 있는데, 은덕군 아오지읍을 학송로동자구로 개칭한 것이 그 예. 김학송에서 딴 것이다. 이외에 역시 빨치산 출신으로 김일성의 측근이었던 안길에서 이름을 딴 경흥군의 안길리, 평안도 지역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로 일찍 암살당한 현준혁에서 이름을 딴 개천시의 준혁리도 있다. [13] 항일빨치산과 6.25 전쟁 전사자들의 유가족을 위한 교육기관, 인민무력부가 직접 관리하며 현재 북한 최고의 초중고교 학원으로 이 학원 졸업생은 당 초급 간부 임용이나 김일성종합대학을 위시한 중앙대학 입학이 보장된다. [14] 중국을 움직이는게 공산당 초창기 지도자들의 2, 3세로 이루어진 태자당이듯이, 북에는 빨치산과 한국전 참전자들의 2, 3세들이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서 당 - 정 - 군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들이 현재 북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15] 1남 1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들 김광일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16] 남북고위급실무자회담 등에서 자주 얼굴을 비추고 있으며, 2017년 6월 인권대사라는 직함으로 오토 웜비어의 죽음에 관해 해명하기 위해 UN에 파견되는 중책을 맡았다. [17] 아마 영화 ' 시민 케인'를 배껴서 선전용으로 사용한 듯하다. 만화 ' 떠돌이용병 아레스'에 이와 같은 에피소드가 삽입돼 있다. 작가가 이 얘기를 알았는지는 불명. [18] 정확히는 '포대경'으로, 전산 자동화 도입 이전 근대의 포병이 탄착 예상 지점을 계산하기 위해 사용했던 관측도구이다. [19] 항일 빨치산과 6.25 전쟁 유공자(어디까지나 북한 입장에서)들이 합사된 북한판 국립현충원. [20] 사실 김일성과 혁명렬사릉 이야기는 김정일과 북한 정권 입장에선 도움이 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어쨌든 김일성의 의사를 김정일이 무시한 것이므로) 정권 차원에서 조작한 프로파간다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21] 이 드라마에서 전광렬이 김일성으로 나오는데, 훗날 북한을 방문해서 자기가 너무 멋져서 강제종영 당했다고 인터뷰 한 적이 있다. [22] 김정태가 불과 10여년 후에 국가안전보위부 정찰국장이라는 요직에 임명되었고, 60년대 소련과 중국이 중소분쟁으로 갈라선 후 소련 - 북한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회할 수는 없었다. [23] 오히려 평양김성주소학교까지 있고, 이를 '수령님의 어린시절 존함'으로 명명한 것 역시 밝히고 있다. [24] 김일성을 증오하는 입장에서 사실 김일성은 아무것도 한게 없고 최용건이 다 했니, 김책이 다 했니 이런 주장은 아주 흔하다. [25] 과거 남로당 출신 전향자들의 경우 김책의 죽음은 김책의 전공을 시샘한 김일성의 암살이라고 말하긴 하는데 이건 그들의 이야기일 뿐 이고 80년대만 해도 그냥 비행기 폭격에 맞아 전사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