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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경제/역사/1980년대의 대규모 정책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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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목록4. 종합

1. 개요

북한에서 1980년대 중후반에 걸쳐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힌 실패한 정책들을 정리한 문서이다. 1970년대부터 망조가 드리운 북한 경제는 체제의 모순과 80년대의 온갖 실책, 그리고 90년대 이후 냉전의 종식과 함께 최빈국으로 추락했다. 돌이킬 수 없는 경제적 실패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기근으로 이어진다.

2. 배경

북한은 김일성이 절대권력을 가지기 이전만 해도 공산주의식 계획경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8월 종파사건, 1967년 갑산파 숙청 사건, 도서정리사업으로 경쟁자들을 숙청하고 당의 유일적령도체계확립의 10대원칙이 확립되면서, 1970년대 전후로 북한과 조선로동당은 완전히 김일성 집안의 소유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산당 특유의 견제구조도 없어진 상황에서 김일성 김정일의 후계체제를 견고히 하기 위해 1970년대에 3대혁명소조운동과 각종 속도전으로 경제성과를 내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주먹구구식 경제시스템 하에선 별다른 경제적 성과를 낼 수 없었고 더군다나 과도한 군사비와 우상화 그리고 두 차례의 오일 쇼크로 북한 경제는 막대한 외채더미에 휩싸여 침체기로에 접어들었다.

그 와중에 대한민국은 연평균 8% 이상의 고도 성장을 누리며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있었고 대한민국과 체제경쟁중인 상황에서 김일성은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 계획되었던 주요 경제 프로젝트들을 대규모로 진행해 체제경쟁에서 밀리지 않는 동시에 경제 성과를 내세워 체제를 결속시키고자 했다.

3. 목록

3.1. 서해갑문

파일:attachment/NK-Hafen_Nampo.jpg

서해갑문은 북한 남포시( 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 진남포시)의 서쪽 15km에 위치한 7.8km 길이의 방조제로서 위에는 도로가 건설되어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사실 서해안은 워낙 조차가 커서 조차를 극복할 시설(예를 들어 뜬다리부두 같은)이 필요하다.[1] 특히 남포 같은 큰 항구라면 국가 단위의 물동량을 수용해야 하는 만큼 갑문 설치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당장 남한도 인천에 갑문이 설치돼 있는 상황.

그러나 문제는 서해갑문이 부실 공사, 날림 공사, 무리한 공사 등의 여러 악조건이 겹쳐지며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착공하여 3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조선인민군 육군 군단 4~5개에 달하는 군 병력(20만 명)과 수만 명의 노동자를[2] 투입하였다. 이 공사는 워낙 난공사였고 북한의 토목공사 기술 수준이 낮아 완공 시기를 두 차례나 연기한 끝에 1986년에 겨우 완공하였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 김일성의 지시로 어떻게든 완공 일자를 당겨야만 했기에 그때서야 겨우 완공된 것이다. 이럴 바엔 자력갱생을 하지 않고 선진국[3]에게 공사를 의뢰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날림으로 공사하느라 발생한 부실시공으로 방파제에서 틈이 벌어지고 물이 새어들어오고 갑문이 망가지면서 유지보수를 위해 남는 게 군 인력인 북한에서는 육군 1개 건설 사단이 보충작업을 위해 이곳에서 항시 대기하는 상황이 현재진행중이다. 게다가 완공된 이후에 대동강 유역의 기후가 변하면서 농업생산량과 어업생산량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통일하면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즉 북한에서는 돈을 들여 공사를 해 생산량을 줄였다고 할 수 있다. 얼마나 큰 뻘짓이었는지 남한 특수부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시로 침투할까봐 지었다는 소문이 북한 내에서 돌았을 정도다. 그나마 하구둑으로서의 순기능은 하고 있으니 후술할 사례들과 비교하면 서해갑문은 훨씬 양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북한은 해외 정보를 틀어막은 채 이 서해갑문을 '20세기의 기적', '공업이 발전되였다고 하는 나라들에서도 반세기, 아니 몇 세기에 걸쳐 건설하여야 할 세계 굴지의 건축물'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당연히 북한이탈주민들은 남한에서 인천대교를 보고는 하나같이 이 '몇세기에 걸쳐 건설하여야 할 건축물'이 인천대교와 비교하는 것조차 민망하다고 비판하고 있다.[4] 결국 40억 불[5][6]만 허공에 날린, 사실상 북한 경제 몰락의 시발점이 된 꼴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3.2.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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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1984년 북한의 대남 수해지원

다른 경우들이 주로 북의 돈과 자재를 털어먹었다면, 이 경우는 북의 비축미를 털어먹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많은 탈북민들이 이 사건 이후 "조금 남은 쌀까지 싸그리 모아다 보내는 바람에 창고가 텅텅 비었다"는 식으로 증언할 정도이다. 심지어 이는 북한이 디폴트를 선언한 바로 그 해에[7] 일어난 일이었다.

3.4. 사리원카리비료공장(사리원카리비료련합기업소)

황해북도 봉산군에 위치한 공장. 청단군에 대량으로 매장된 카리[8]장석을 원료로 하여 카리 비료 51만 톤, 내화(耐火)재료인 알루미나 42만 톤, 시멘트 1만 톤 등을 생산할 수 있는 대단위 공장으로써[9], 북한 농업의 고질적인 화학비료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1986년 9월에 착공, 5년 6개월만인 92년 4월, 1단계 공사를 마쳤다.[10]. 그러나, 전력사정 악화로 공장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였으며, 2단계 공사는 자본 부족으로 삽도 뜨지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94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건설 사업은 흐지부지 되어 공장은 흉물로 방치되었다. 2020년에, 김정은은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 2단계 건설과 함께 사리원카리비료공장 건설을 언급하며,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특별히 강조하였다.[11] 그러나, 30년간 흉물로 방치되어온 공장을 어떻게 재가동 할 지는 미지수.

3.5.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임수경 방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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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류경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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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35년 동안 호텔 대신 애물단지 역할만 하고 있는 평양의 마천루이다. 1987년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1989년 콘크리트 골조만 완성된 채 20년 가까이 방치되었다가 2008~2011년 공사를 거쳐 2011년 외장 공사가 24년 만에 완공되었다. 그럼에도 류경호텔의 내부 공사는 시작하기는 커녕 첫 삽도 들지 못했고, 오히려 겉면에 LED를 붙여 야경을 과시하는 외관 과시용으로만 쓸 계획이라 영원히 미완성 건물로 남게 되었다.

이렇듯 북한 입장에서도 견디기 힘든 흑역사였던지라 서해갑문과 정반대로 북한의 대외 선전에서 류경호텔만큼은 언급을 거의 안 할 지경이라고 하면 말 다한 셈이다.

3.7. 과도한 군사력 증강

남한이 자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율곡사업을 통해 군사력을 크게 증진시키자 김일성은 큰 위기감을 가지고 막대한 국방비를 투자해버렸다. 중국으로부터는 J-7 전투기 30대, J-6 전투기 100대, Q-5 공격기 40대, 실크웜 대함미사일과 다수의 고속정들을 사들였고 소련으로부터도 S-200 지대공미사일 4개 포대, S-125 지대공미사일 8개 포대, MiG-29 전투기 14대, MiG-23 전투기 60대, Su-25 공격기 36대 등의 막대한 군수물자들을 도입해버렸다. 여기에다가 병력을 100만[12]으로 늘려버리고 천마호 전차들을 1,000대 이상 생산해버렸다.

그러나 군대는 결국 평시에는 마땅한 재화를 생산할 수 없는 조직이다. 안그래도 북한은 남한보다 경제규모가 한참 열세인 상황에서 자국의 경제사정과는 맞지 않는 대규모 군사력 증강 프로젝트를 개시해버렸고 거기다가 노동인구들까지 북한군에 흡수되면서 북한의 잠재력이 완전히 깎여나갔다. 여기에 1990년대가 도래하자 북한에게 막대한 원조를 해주던 동구권과 소련이 붕괴되면서 막대한 군사력은 그대로 돈만 퍼먹는 하마가 되었고 북한 경제가 파탄나는데에 일조하게 되었다.

3.8. 우상화

사실 북한은 1960년대만 해도 동구권에서 제작된 해외 영화를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었고 북한의 젊은이들은 자유롭게 소련의 최신가요를 길거리에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 자유는 몰라도 사회적 자유는 제한적으로나마 보장된 사회였다.[13] 그러나 김일성이 1967년에 마르크스 책까지 검열 대상이 된 도서정리사업을 시작한 이후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1974년에 김정일이 공식적인 후계자로 추대되면서 북한 사회는 1970년대부터 경직된 개인숭배 사회로 퇴행해버렸다.

특히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과 자신의 신격화를 위해 국가의 막대한 돈을 끌어모아 전국에 수십 개의 김일성 동상을 건설하고 혁명사적지들을 구성했다. 뿐만 아니라 우상화 시설 건설에 다수의 북한 주민들이 동원되면서 인민경제는 파탄이 나버렸다. 1990년 기준으로 북한은 국가예산의 19%를 우상화에 지출해버렸다. # 당연히 우상화는 아무런 경제적 파급효과도 발생시키지 못했고 이는 결국 북한 국가 재정의 파탄으로 이어졌다.

그 정점은 김일성 사후 금수산태양궁전 리모델링 과정에서였다. 강철환의 주장에 의하면 리모델링 비용에만 9억 불의 비용이 소모되었을 정도이다.

4. 종합

서해갑문 건설에 약 40억 불,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약 47억 불, 그리고 비날론 공장 증설로 약 100억 불, 총합 187억 불을 허무하게 낭비하며 북한 경제는 이 때부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북한이 낭비해버린 수십억 불의 국방비 투자 + 우상화 시설 건립 + 류경호텔 건설까지 합하면 북한 경제가 입은 손실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2024년 현재까지도 북한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겨우 버텨나가고 있는 게 더 신기할 정도. 이 정도면 칠천량 해전, 임팔 작전마냥 일부러 북한을 망치기 위한 적국의 사보타주라고 의심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인 셈.

김정은 이전 북한 총생산이 가장 높았던 1989년 기준 북한의 총생산은 157.7억 불에 불과했고, 2021년 기준으로도 북한의 총생산은 168억 불도 되지 않는다. #[14] 그러니까 북한은 자기 1.2년치 총생산에 육박하는 거액을 탕진한 셈이다. 당장 콩고민주공화국도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가 1년 총생산과 맞먹는 돈을 해외로 빼돌려서 극빈국으로 전락한 것인데 1년 총생산보다도 많은 돈을 낭비한 북한의 경제가 멀쩡히 유지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사실 디폴트 선언 3년 전에 서해갑문 건설을 시작하며 총생산의 30~45%를, 1년 전에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를 건설하며 총생산의 80% 가량을 날려먹었다.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참칭 황제 보카사 1세의 대관식에 쓴 돈이 GDP의 18% 남짓이었는데도 나라 경제를 완전히 말아먹었다고 평가받는데, 이보다 더한 비율의 돈을 연이어 퍼부었으니 북한이 1984년 2월 냉전 시기 공산권 국가 중 유일하게 디폴트를 선언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던 셈.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삽질은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였는데, 다른 사업은 유동성 자산이나 현물 자산을 활용할 수 있었으나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 비용은 당연히 외국인들을 초청해 이것저것 가판대에 행사 같은 걸 벌여야 했던만큼 얄짤없이 외화 현금[15]이었다. 즉, 50억 불에 가까운 막대한 현금을 날려버린 셈이다. 당시 북한의 1년 예산은 넉넉하게 잡아도 40억 불인걸 감안하면 국가 1년 예산 이상을 축제하느라 날려버린 것이다. 물론 상술했듯 축제 준비를 위한 스포츠와 주거시설 건설 사업에 든 돈도 포함한 수치다. 그 외 부수적인 건설 사업까지 합하면 비용은 더 늘어난다. 또한 육류, 쌀, 밀, 채소 등 비축하고 있던 식량마저 외국인들 먹고 재우는데 소비하였고 그 결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배급 체제마저 붕괴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90년부터 함경도 자강도 양강도에서 배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라가 디폴트를 선언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총생산의 30% 가량을 써버렸으니 나라 경제가 제대로 버틸 리는 전혀 없었다.

여기에 더불어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 소련이 붕괴함으로 인해 무역길이 막히며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이나 중국이 정치적인 이유로 저급한 북한 제품을 구매해줬지만 냉전 종식 이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고 더군다나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경우에는 경제 상황이 너무도 나쁜데다[16] 거기에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이 친한반북 성향이라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공산권에서 소련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소득이 크게 신장했으나 아직 1인당 소득으로 따지면 형편이 없었다. 전체 경제력으로 따진다면 인구가 훨씬 적은 일본 경제력의 반은커녕 1/8에 불과했고,[17] 인구 600만에 불과한 홍콩이 중국 경제력의 1/5, 인구 2,000만으로 역시 성 하나 수준인 대만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40%였던 시절이었으며, 한국의 경우는 90%였다. 더군다나 다른 국가에 수출하기에는 북한 제품의 품질이 심각하게 낮았고 이미 북한보다도 값싸게 물건을 수출할 수 있는 나라들이 넘쳐나다보니 경쟁력에서 밀려나게 된다.

1993년에는 그토록 추진해 왔던 제3차 7개년 계획도 실패했고, 여기에 각종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 생산량 감소가 겹쳐지면서 결과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초하게 되는 동시에 북한 외부에서 북한 체제의 실상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북한이 날려먹은 돈은 대규모 자연재해 손실액과 비교해야 하는 수준이었는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의 피해가 당시 소련 GDP의 32%, 2015년 네팔 대지진의 피해가 당시 네팔 GDP의 35%, 관동대지진의 피해가 당시 일본 GDP의 37%, 나르기스의 피해가 당시 미얀마 GDP의 56%, 2010년 아이티 대지진의 피해가 당시 아이티 GDP의 66~71%였다.

더 심각한 건 북한에서는 반성은커녕 아직도 이 실책들을 '혁명과업의 치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18] 사실 반성했다면 지금 그 꼴 날 리도 없었겠지만,[19] 문제는 수령절대주의라는 주체사상의 이념 문제가 걸린다는 것. 여기에 대한 실책을 인정할 경우 주체사상의 해석 여지에 따라 ' 백두혈통'이 스스로에게 인민재판을 당한 뒤 인민의 손에 죽어야 하는[20]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스스로의 정치적 정당성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반성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것을 제대로 증명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독재국가의 최대 약점인 소수의 높으신 분들이 저지른 오판과 무능이 나라 전체를 시궁창으로 몰아넣는 위험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1] 일례로 서해안의 인천항 서울과 붙어 있음에도 조차 때문에 하역량이 부산항심하게(거의 4배) 밀린다. 물론 서울은 물동량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공업 기능을 상실한 서비스 기능 위주의 도시이고, 부산항 싱가포르처럼 입지가 심히 좋은 것이 보다 근본적인 격차의 원인이긴 하지만. 애초에 인천항은 수도권 위주의 물동량을 담당하지만 부산항은 대한민국 전국의 물동량을 담당한다. 게다가 부산항에는 철도( 부산진역)와 도로 시설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부산항으로 들어온 물자가 전국으로 수송되기에 편리하다는 점도 부산이 인천에 크게 앞서는 원인 중 하나. 다만 문제는 이런 부산항조차 최근 유행인 초대형 선박이 접안하기에는 얕다고 준설 요구가 들어오는 판이라는 점인데 하물며 조차가 큰 서해안은 이런한 문제가 더욱 부각된다. [2] 말이 노동자지 실상은 대학생들까지 끌고 와 건설현장에 투입하였다고 한다. [3] 원래 북한에선 소련에게 서해갑문의 설계와 시공 감리를 의뢰했으나, 소련은 '이거 짓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여러 측면에서 이익보다 손해가 더 크다'면서 북한의 의뢰를 거절했다. 그런데 김정일은 이걸 소련이 건설 기술 노출을 우려해서 안 해주는 거라 곡해했고, 이런 식으로 김일성에게 보고해서 공사가 강행됐다. [4] 참고로 인천대교 길이는 서해갑문의 3배 가량(21.38km)이나 되니 탈북자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더구나 인천대교는 서해갑문보다도 짧은 4년 4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5] 서해갑문이 완공된 1986년 기준으로 북한 총생산이 136.5억 불 남짓이었으니, 서해갑문 건설에 총생산의 약 30% 가량을 써버렸다는 말이 된다. 덤으로 서해갑문 건설비를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대략적으로 약 120억~140억 불, 한화로는 약 16~18조 원이나 된다! [6] 심지어 일본인 건설기술자는 실제로는 60억 불이 들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 [7] 정확히는 디폴트 선언 이후 [8] 칼륨을 의미하며, 칼륨의 일본식 발음에서 유래했다. 북한도 '고뿌(컵)', '삐라' 같은 일본식 외래어를 그게 일본식이란 것을 숨기기는 하지만 쓰기는 한다. ' 청산가리'의 '가리'가 이 뜻이다. [9] # [10] # [11] # [12] 80년대에 들어서 군복무 기간을 10년 이상으로 늘려버렸다. 70년대까진 북한군은 50만 명 정도로 65만 명 선을 유지하던 국군에 비해 규모가 적었다. [13] 이와 비슷하게 루마니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도 70년대 중반까지는 서구권 문화를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것을 넘어 심지어는 해외여행을 2년에 한 번씩 허가해줄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14] 상단의 시계 아이콘을 누름으로서 통계 시점을 변경할 수 있다. [15] 당시 북한 외교관이었던 고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대금 지급용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온 외교관이 동원됐다고 한다. 북한 내 금융 기관이 보유한 현금을 모조리 꺼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소련, 중국, 아프리카 등 당시 북한이 외화국고금으로 예치한 현금을 인출해 축전총국에 갖다주고 그걸 다시 항공사나 무역사에 지급하느라 외무성의 본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한다. [16] 1992년 당시 물가 상승률이 공식통계로 2000%에 달했던 상황이었고 이후로 물가 상승률은 낮아졌지만 빈곤율은 엄청나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새로 민영화된 기업에서 세금 체납과 임금 체불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던지라 정부에서 연금이나 공무원 급여도 체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기업도 임금 체불을 해서 임금 대신에 물건을 대신 받아서 팔아치워야 했던 일이 다반사였으며 학교에서도 겨울철에 난방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러시아는 소련 시절에 국가 차원에서 대중들에게 별장을 지급해서 별장이 대중화되어있던 관계로 도시민들과 농민들이라도 농사를 지어서 최소한 먹고살 만큼의 농작물을 자체 수확할 수 있었기에 북한처럼 식량난을 겪지는 않았다. 물론 북한도 텃밭 농사를 장려하기는 했지만 국토면적의 차이와 농사를 짓기에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는 힘들었다. [17] 다만 당시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의 총생산을 다 합쳐도 일본 한 국가에 못 미쳤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18] 서해갑문, 청년학생축전은 2023년 현재까지도 북한 선전매체에서 자랑거리처럼 언급하고 있으며, 심지어 지금은 폐쇄된 우리민족끼리에서는 2012년 류경호텔을 비판하는 것은 외부의 '악선전'이라고 우긴 적도 있다.(...) [19] 그나마 류경호텔만큼은 북한 측에서도 수치스러웠는지 전술한 우민끼의 글 이후로 류경호텔을 대놓고 찬양한 적은 없긴 하며,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는 아예 존재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20] 참고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을 존경한 것으로 유명한 독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