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23:39:04

쿠바 미사일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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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폭탄[1] 위에 앉아 팔씨름을 하는[2] 니키타 흐루쇼프 존 F. 케네디

1. 개요2. 명칭3. 배경
3.1. 힘의 불균형3.2. 쿠바의 상황
4. 전개
4.1. 아나디르 계획과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4.2. 발각과 미국의 대응4.3. 치킨 게임4.4. 검은 토요일4.5. 미사일 철수
5. 후일담6. 미디어7. 둘러 보기

[clearfix]

1. 개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성명을 발표하는 존 F. 케네디
It shall be the policy of this nation to regard any nuclear missile launched from cuba against any nation in the Western Hemisphere as an attack by the Soviet Union on the United States, requiring a full retaliatory response upon the Soviet Union.

서방의 어떠한 국가에게든 쿠바에서 발사된 핵미사일이 향한다면 우리는 이를 미합중국에 대한 소련의 공격으로 간주하고 소련에 대한 완전한 보복 대응을 가할 것입니다.
1962년 10월 22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냉전 시기인 1962년 10월 14일 미국 측의 U-2 정찰기가 쿠바에 소련의 SS-4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MRBM) 기지가 건설되는 것을 포착하면서 불거진 미국과 소련 양국이 1962년 10월 28일까지 군사적으로 대치한 사건.

2. 명칭

3. 배경

3.1. 힘의 불균형

흐루쇼프의 말은 허풍이다. 우리에겐 제1격 능력[5]이 없다. 당신들 우리를 멸망시킬 수 있지만 우리 당신들을 멸망시킬 수 없다.
CIA 요원과 접선한 소련 GRU 장교 올레그 펜콥스키의 발언
1962년 당시 미군이 보유한 소련에 투발 가능한 핵전력은 미 본토에서만 탄도탄 200여 기에[6] B-52 전략폭격기 555대[7], 그리고 B-58 초음속 폭격기 116대였다.[8] 투발 가능한 전략핵탄두만 총 1,830기. 여기에 영국에는 PGM-17 토르 IRBM이 60여기가 배치되었고 PGM-19 주피터 MRBM은 이탈리아에 30여 기, 튀르키예에는 15기가 배치되며 소련 영토를 사거리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전략초계 중인 조지 워싱턴급 잠수함들과 이튼 앨런급 잠수함들은 유사시 수십 발의 UGM-27 폴라리스 SLBM 불벼락을 소련 전역에 퍼부어댈 수 있었다.[9]

소련군이 가진 건 66기의 ICBM SLBM이었다.[10][11] Tu-95 전략폭격기[12]를 동원해도 차이가 커도 너무 커서 선제 핵공격을 통해 미국을 제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실제 핵전쟁이 발발한다면 소련은 얼마 안 되는 핵무기를 다 사용하고 나서는 미국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그냥 맞아줄 수 밖에 없었다.

소련 붕괴 이후 밝혀진 당시의 핵전력 비율은 17:1. 소련이 정말 운 좋게 미국에게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성공했다고 가정해도 당시 소련의 ICBM, SLBM 정확도를 고려했을 때 핵공격이나 대규모 공습을 상정하고 지어진 미국의 ICBM 사일로나 SLBM 기지, 지휘벙커들을 고작 핵무기 한 발로 무력화한다는 것은 진짜 하늘이 도와줘야 가능한 거고 일반적으로 타격대상 하나 당 핵탄두 여러 발을 할당해야 무력화할 수 있을지 고민이나 해야 할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ICBM과 SLBM[13]을 가지고 미국 본토의 핵전력을 하나하나 때리고 있다간 미국의 핵전력은 별 타격 없는데 소련 대륙간 탄도탄 전력이 먼저 나가 떨어질 정도로 가성비가 안 나오는 일이었다. 소련이 그나마 노려 볼 수 있는 것은 미국 본토의 대도시를 날리는 거였는데 이마저도 쉬운 게 아니었다.

미국의 대도시권 밀집도는 대한민국의 그 미친 밀집도와 동일선상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북미 대륙 여기저기 드넓게 퍼져 있는 데다 콘크리트, 철골 건축물로 가득한 미국의 대도시에서 충분한 살상력을 내기 위해서는 도시 하나당 핵무기 한 발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사실상 당시 소련의 핵전력 수준으로는 미국 본토의 대도시들을 타격해 미국의 전쟁수행능력 무력화를 노려 본다는 선택지도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조건이 소련에게 절망적이었다.

특히 튀르키예와 이탈리아에 배치된 주피터 미사일은 모스크바를 사거리 안에 두고 있었다. 반면 소련으로선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미국 본토 타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소련 정부와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니키타 흐루쇼프 이하 소련 지도부는 이러한 전략적 불균형 상황에서는 소련에게 무조건 항복과 저항 말고 그 어떠한 중간 선택지도 없다고 여겼고 미국에 대해서 매우 도발적이고 공세적인 외교 전략으로 나가게 되었다.
파일:John_Kennedy,_Nikita_Khrushchev_1961_0.jpg
1961년 6월 임페리얼 호텔에서의 정상회담,
니키타 흐루쇼프 존 F. 케네디의 만남

마침 새로 당선된 케네디를 애송이 부잣집 도련님 정도로 여겼던 흐루쇼프는 그와의 첫 회담에서 그를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위협하였고 소련의 미사일과 핵 공격력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마치 한 판 붙을 것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이는 흐루쇼프가 아이젠하워와의 회담을 통해 미국 역시 핵전쟁을 두려워하므로 이를 빌미로 협박하면 물러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14]

한편 소련의 정보를 잘 알지 못했고 스푸트니크 쇼크 차르 봄바 실험 이후 소련에 대한 공포로 미국은 정작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우월하다고 과대평가하고 있었다.[15] 하지만 미국은 소련이 설마 소련 바깥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도발적인 전략을 취하진 않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미 소련이 동독에 준중거리 미사일과 핵탄두를 배치했던 전례를 볼 때 이는 터무니없이 안일한 생각이었다.

게다가 니키타 흐루쇼프는 즉흥적이고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련 군부는 흐루쇼프의 핵만능주의와 미사일 올인 전략에 불만을 품었지만 미국에 대한 도발은 지지했고 소련군 총참모장 세르게이 비류조프 육군 원수 쿠바의 야자수 나무들로 핵미사일을 완벽히 숨길 수 있다는 보고까지 올렸다. 결국 소련은 쿠바에 5만 명의 육군 병력과 전략로켓군 MRBM 기지, 해군 기지 설치 계획을 승인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요약하면 50년대 말부터 실제 핵전력, 재래전력, 기술력 모두 미국이 압도적으로 우월했지만, 소련은 스푸트니크 쇼크[16] + 가가린의 유인 우주비행 + 루나 탐사선의 달 명중과 같은 발사체 홍보효과 + 차르 봄바 실험 성공 + 철의 장막으로 정보 은폐에 성공해 소련이 미국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블러핑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와중에 소련은 뻥이 아니라 실제적인 타격능력을 가지기 위해 쿠바를 주목했고 안 그래도 자국이 전력상 동등 또는 열세라고 생각했던 미국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3.2. 쿠바의 상황

쿠바를 보호하는 것 외에 우리 미사일은 서방이 '힘의 균형'이라 부르기 좋아하는 것을 대등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들은 적의 미사일이 당신을 겨냥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니키타 흐루쇼프, 1962년 간부회[17]에서 발언.
쿠바 혁명 정부의 국가평의회 의장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 혁명 성공 이후 여러 서방계 자본을 추방하고 토지를 국유화하는 등 미국이 중남미에 다져놓은 정책적 기반을 흔들었다. 그 결과 미국 정부는 CIA를 통해 피델 카스트로 제거를 시도했고 피그만 침공을 진행하는 등 쿠바에 대한 미국 정부의 물리적, 경제적 압박이 이어졌다. 쿠바 정부는 피그만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미국에 제대로 한 방을 먹이긴 했으나 세계 최강국 미국의 앞마당에 있는 현실상 미국을 혼자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카스트로는 대놓고 밀고 들어오려는 미국의 위협에 자신의 정권을 떠받칠 바깥 기둥을 마련하고자 소련에 협력을 요청했다.

한편 소련의 흐루쇼프도 서방 압박용으로 시도했던 1961년 베를린 위기와 베를린 장벽 설치가 오히려 서방 국가들을 단합시키는 결과만 가져왔고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엄청난 투자를 했던 핵미사일 사업도 생각보다 효과가 적어서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장거리 탄도미사일 생산이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재래식 무기에 대한 투자 감소로 인하여 소련 군부의 불만까지 사고 있었다.

이러던 와중에 피그만 침공과 더불어 카리브 해의 긴장이 강화되자 흐루쇼프는 쿠바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였고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공산주의 확산이란 세계적 목표를 바탕으로 쿠바를 지원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 지도부는 미국의 쿠바 침공이 임박하였다고 여겼다. 거기에 소련 지도부, 엘리트,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비롯한 쿠바 혁명가들에 대한 지지와 기대가 높아지고 있었고 이들 제3세계 혁명가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까지 있었다. 흐루쇼프의 반대파들은 흐루쇼프의 외교적 실패를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군비 증강을 요구했다.

4. 전개

4.1. 아나디르 계획과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

나는 존 F. 케네디 불알을 움켜쥘 거요.
니키타 흐루쇼프, 1962년 7월 소련을 방문한 라울 카스트로에게
미국이 우릴 어린애 다루듯 엉덩이를 때릴 수 있게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소. 이제 우리도 미국의 엉덩이를 때릴 수 있소.
9월,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튜어트 유덜(Stewart Udall) 미국 내무장관에게
소련과 쿠바 사이에는 긴밀한 비밀 연락이 오고 갔다. 그리고 그 결과 쿠바는 자신들의 영토에 중거리 탄도 미사일 기지를 설치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 쿠바는 미국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말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으므로 쿠바의 요청은 소련의 치명적인 핵전력 열세를 일거에 평형 상태로 바꿀 수 있는 신의 한 수였다. 이미 대량 생산된 중거리 탄도탄을 쿠바에 배치해 미국에 대한 추가적 공격 수단을 갖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흐루쇼프는 1962년 5월 21일 쿠바에 미사일 배치를 결정하였고, 간부회는 이 결정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카스트로와 흐루쇼프는 1962년 7월 7일에 공식적으로 핵미사일 기지 건설에 합의한다. 이 계획은 서방을 속이기 위해 마치 시베리아에서 벌어지는 작전인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시베리아의 아나디르 강의 이름을 따서 아나디르 계획이라 불렀다. 이 아나디르 계획은 5만 명의 소련군과 해군기지의 쿠바 배치 역시 포함하고 있었으며 소련 군부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쿠바에 사정거리가 워싱턴 D.C.를 비롯한 미국 동남부에 달하는 R-12 드비나(NATO 코드명: SS-4 샌들) 미사일과 여기에 탑재할 핵탄두를 9월 8일과 16일에 나누어서 보내주고 이후 당연히 미사일 기지를 만들 전문 인력과 장비를 배달한다. 이 미사일 기지는 총 40개의 사일로를 가졌는데, 이 중 24개는 R-12를 위한 사일로이고 나머지 16개는 이후 설치될 R-14 추소바야( NATO 코드명: SS-5 스킨)용 사일로였다.[18] R-14는 미국 본토의 워싱턴 주[19] 제외한 미 본토 전역에 핵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이다.
파일:external/e46d8c184d754af378391832fea85ea6d1ee7c79a931db23e653c71fe5ae93b4.jpg
R-14 미사일

아나디르 계획에 의해 쿠바 주둔 소련군집단이 창설되었으며 이사 플리예프 육군 대장이 사령관에 취임했다. 아래는 쿠바 주둔 소련군집단의 편제다.
육군: 제302, 314, 400, 406차량화소총병연대[20]
해군: 제5함대[21]
공군: 제134분리항공대대, 제437분리헬리콥터연대, 제561, 584순항미사일연대[22]
방공군: 제10, 11방공대공미사일사단, 제32근위전투항공연대[23]
전략로켓군: 제51미사일사단[24], 제79근위미사일연대, 제181미사일연대
9월 말 미국 신문들은 소련 선박이 쿠바로 무기를 이송 중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케네디는 국민들에게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이 무기들은 방어용이지 공격용이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그 발표가 맞다고 절대적인 보장을 해 주었다. 케네디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거대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때 쿠바에는 소련군의 MiG-21 전투기와 S-75 지대공 미사일이 배치된 것이 미국 정보당국에 의해 확인되었기에 더더욱 흐루쇼프의 말이 맞는 듯하였다. 그러나 CIA 국장인 존 맥콘(John A. McCone)은 해당 시설들이 탄도 미사일 사일로 배치를 위한 사전작업일 것이라고 정확히 추측했고 이와 같은 추측을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케네디가 이렇게 강력하게 경고한 데에는 미국 내부의 정치적 사정이 있었다. 같은 해 11월에 중간선거가 예정되어 있었고 공화당은 케네디 행정부의 대외적 유약함, 특히 피그만 침공의 실패로 대표되는 쿠바 문제의 해결에 적극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이런 공격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케네디는 소련에 강력한 경고를 날릴 수밖에 없었고 위기 발발 이후 케네디는 차라리 중간선거에서 깨지는 게 제3차 세계대전과 핵전쟁보다는 훨씬 나았을 거라며 괜히 강력한 발언을 했다고 후회했다.

소련 역시도 이런 미국의 정치 시스템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쿠바 미사일 배치를 강행한 측면이 있었다. 소련이 생각하기에 미국이 이미 튀르키예에 핵미사일을 배치한 상황에서 소련 역시 자국의 동맹국인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였다. 사실 이런 인식은 미국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수뇌부도 자기들이 튀르키예에 미사일을 배치했는데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국제정치적으로 반박할 논리가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미사일 배치가 확인되기 전에 상술했듯 내부 정치적 문제로 강력한 경고성 메세지를 날려야 했던 것.[25]

4.2. 발각과 미국의 대응

그레이엄 앨리슨이 쿠바에서 소련군이 미사일 은엄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기술하여 이것이 한때 정설로 자리잡혔으나 2022년 5월 러시아 국방부가 공개한 문서는 전혀 다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소련군이 바보도 아니고 비밀 작전에서 미사일 은엄폐가 중요한 줄 몰랐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포병 출신인 전략군사령관 비류조프는 본국에 미사일 은폐에 문제가 없다는 터무니없는 보고를 올렸으며 5월 24일 국방상 로디온 말리놉스키와 총참모장 마트베이 자하로프는 쿠바에 제51로켓사단을 비롯한 4만명의 소련군을 배치하는 계획을 흐루쇼프에게 제출하였다. 흐루쇼프는 이를 5월 27일에 승인하였고, 7월에 이고르 스타첸코(Игорь Стаценко) 장군을 비롯하여 소련 군사고문단을 쿠바에 보내서 기지를 건설하게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군사고문단 2진이 악천후로 쿠바 인근 바하마의 수도 나소에 긴급착륙하는 바람에 공항에 가득있던 미국인 관광객들에 발각되었고 소련 당국이 대외적으로 발표한 이들의 쿠바 방문 목적과 이들의 비자의 명목상 체류 목적도 다른 등 실수가 연발했다. 거기에 소련 군사고문단은 쿠바의 공용어인 스페인어도 몰랐으며 쿠바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도 없었고 소련에서 가져온 각종 중장비들은 북미 전압체계와 호환이 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는 등 개판 5분전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비류조프가 호언장담한 야자수를 통한 은엄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소련 군사고문들은 경악하여 미사일 기지 건설 계획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모스크바에 보고했으나 소련군 총참모부는 이미 지도부의 승인을 얻은 계획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에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이를 묵살했다. 때문에 소련군이 은엄폐의 중요성을 알았음에도 상부 눈치를 보느라 은엄폐는 개나 줘 버린 엉망진창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심지어 말리놉스키는 흐루쇼프에게 미사일 은엄폐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하기 위해 쿠바에서 온 군사고문 알렉세이 데멘티예프(Алексей Дементьев)에게 입 닥치라고 걷어차기까지 했다.
파일:쿠바 미사일 기지.jpg
파일:CubaSites1962_1.jpg
미국 정찰기에 찍힌 쿠바 미사일 기지. 미 국방부가 공개한 소련이 쿠바에 구축해 둔 병기들의 상황
하지만 이 엉망진창의 공사는 기적적으로 3개월 이상 미국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8월에는 CIA가 소련이 쿠바에서 뭔가를 한다는것을 눈치챘지만 소규모 군사지원 정도로 여겼으며 소련군의 공사를 방해한 허리케인과 악천후는 미국의 정찰도 방해해서 짙은 먹구름이 소련군을 은폐해 주었다. 하지만 기적은 3개월 후 기상조건이 호전되면서 끝났고 기지가 건설되던 중 1962년 10월 14일 쿠바의 하늘을 감시하던 U-2가 찍은 항공사진이 펜타곤 백악관에 전달됐다.[26] 이전에도 CIA의 첩보 활동으로 쿠바에 핵무기가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는 이전부터 파악되고 있었지만 케네디는 증거가 없다며 이를 믿지 않았다.

쿠바에 미사일이 들어갈 때는 소련군 총참모부 특별팀과 정보 기관이 집행했기 때문에 완벽한 보안을 유지했다.[27] 하지만 들어간 뒤에는 보안이 형편없어졌는데 이 일을 쿠바 주둔군 사령부에서 인수했기 때문이다. 당시 주둔군 사령관은 기병 병과 출신의 이사 플리예프 장군이었다. 흐루쇼프의 총애를 받는 플리예프는 가짜 여권으로 입국했지만 정체가 들켜도 전략로켓군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이 로켓과는 관계 없다고 판단할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원하던 사령관 자리는 못 얻었어도 부사령관과 참모들은 전부 전략로켓군 출신이 차출되었다. 서로 출신이 다른 부대들은 융화되지 못했고 쿠바에서 각자 하던 대로 임무를 수행하다 모순된 행동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게다가 기밀 임무였기 때문에 서로 정보 교환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아는 임무만 수행하게 되어 더더욱 조율이 되지 않았다.

이때 GRU 소속 소련 정보장교인 올레그 펜콥스키(Олег Пеньковский) 포병대령이 R-12 미사일 특유의 발사대 모양과 배치 형태가 담긴 자료를 GRU 도서관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입수해 MI6 CIA 요원에게 전달[28]했기 때문에 저 소련군의 주둔지가 미사일 사일로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반나절 안에 모든 미군 병력들의 비상경계가 발령되었고 소련제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사거리가 계산된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미 의회는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가 그린 가상 전황도를 보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앤틸러스 열도 - 쿠바가 중심이 된 붉은 원은 말 그대로 미국 전역을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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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제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사거리가 계산된 가상 전황도
문제의 지도. 중간 크기의 원은 쿠바에 이미 배치했던 R-12의 사정거리고 가장 큰 원은 그 다음 배치하려던 R-14의 사정거리다. 이미 배치된 R-12로도 수도인 워싱턴 D.C. 타격이 가능한 데다 R-14로는 워싱턴 주 오리건, 캘리포니아 주 일부를 제외한 미국 본토 전 지역이 사정권에 들어가 있다. 여기에 소련 극동 지방의 미사일도 고려하면 사실상 태평양의 섬들을 제외한 미국 전 영토가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 사정거리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즉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를 소집했다. NSC 멤버 중에서도 핵심 참모들이 집행위원회(EXCOMM; Executive Committee)에 참여했는데, 린든 B. 존슨 부통령, 딘 러스크 국무장관[29],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더글라스 딜론 재무장관,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미합중국 합참의장 맥스웰 테일러 육군 대장,[30] 존 맥콘 CIA 국장,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시어도어 소렌슨 특별보좌역[31], 케네시 오도넬 보좌관 등의 쟁쟁한 인물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렸다.

군부는 이를 명백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폭격이나 미사일로 쿠바의 발사 시설을 날려 버리는 방안이 최선이라고 외쳤다. 특히 커티스 르메이 대장은 EXCOMM 구성원이 아니었음에도 여러 루트를 통해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으로 소련과 쿠바를 초토화하자고 주장했다. 후술되는 케네디의 비밀 녹음에 의하면 르메이는 회의에서 뮌헨 협정을 거론하며 케네디 대통령의 온건책을 비판했다.

문제는 바로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당시 주영 미국 대사로 활동하면서 뮌헨 협정 등 히틀러에 대한 유화책을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즉 르메이는 "니 애비가 한 잘못을 너도 되풀이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면박한 거다. 군 장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단순히 아버지의 흑역사를 지적한 것만으로도 심각한 모욕인데 애초에 케네디가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것도 아버지 조셉의 유화 정책을 비판하는 논문인 〈왜 영국은 잠자고 있었는가〉를 출판하면서부터였다. 다시 말해 "당신도 나이 드니 아버지를 닮아갑니까"라고 깐 셈. 케네디 대통령은 르메이의 이런 공박에도 일단 참고 넘어가는데, 르메이는 이후 대통령이 자리를 떠난 이후에도 자신의 의견에 적극 동조한 미합중국 해병대 사령관 데이비드 M. 슈프 장군 등 다른 군 장성들과 실컷 대통령 뒷담화를 한 것이 비밀 녹음에 모조리 기록되어 있다. 이를 듣고 케네디는 자기 보좌관에게 " 장성급 장교들에게는 아주 유리한 점이 있지. 이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가는 나중에 살아남아서 잘못을 지적해 줄 사람이 우리 중에 아무도 남지 않을 테니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케네디는 태평양 전쟁 시기 미합중국 해군 장교(최종 계급 대위)로 참전, 어뢰정 정장으로 복무하였는데 하급 장교 시절 정부의 명령과 군에서 그 명령을 실행하는 것 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데 대해 놀랐고, 군이 모든 것을 망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케네디의 민간 국방 전문가들은 미국 국민들이 놀랄 만큼 핵공격으로부터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보호 시설은 도시들에만 존재할 뿐이고 시골에는 약간의 혹은 거의 아무런 보호 시설도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시골 지역에 5천만 명이 살고 있고 도시 거주자들도 2~3백만 톤의 TNT의 파괴적인 위력에 직면해서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더 유리했다. 미국 민방위청이 예산 부족으로 지지부진할 동안 소련은 미국보다 훨씬 앞선 인민 핵방호 태세를 갖췄다.

물론 모든 인류의 생존이 걸린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한 온건파는 다른 방안이 나올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케네디는 이때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과 그 배경을 연구한 바바라 터크먼(Barbara W. Tuchman, 1912~1988)의 역사서 8월의 포성을 읽은 터라 사소한 행위가 얼마나 쉽게 대규모 전면전으로 갈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아울러 테일러 장군이 논의 초반에 미사일 전면 제거는 어렵다는 조언을 한 것도 케네디 대통령의 생각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테일러 장군은 쿠바 공습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결정적 순간에 정확한 조언을 했다.

CIA의 보고 직후에는 EXCOMM 내부에서 폭격밖에 답이 없지 않느냐는 매파가 우위인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CIA가 찍어온 사진이 EXCOMM에 전달되었을 때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 장관의 첫 반응은 이런 개××들이였고 이후에도 공습을 강하게 주장했다.[32] 이러한 매파의 강경책은 쿠바에 소련의 전술핵이 없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세게 나가더라도 최소한 쿠바만 피해를 본다는 논지였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대로 쿠바에는 R-12 미사일 36발(사정거리 - 위 지도의 중간원)과 함께 핵탄두가 충분히 배치되어 있어[33] 쿠바는 공격받을 경우 워싱턴 D.C.를 시작으로 미국 남동부와 중부의 주요 도시에 핵미사일을 날릴 능력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소련도 보복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엑스콤 회의에서는 수도를 시애틀로 바꾸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이후 묵인, 전면 침공, 공습을 통한 습격, 회유 등의 수많은 대안들이 제시되었으나 케네디는 봉쇄를 선택했다. 소련에 미국의 단호한 대응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미사일을 철수하여 평화적으로 위기를 해결할 기회를 준다는 취지였다.[34] 케네디가 쿠바를 봉쇄하기로 생각을 정한 계기는 공군에서 "90% 이상의 미사일을 제거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보고해 왔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공습을 한다면 정확성이 보장되지 않는 일반 재래식 폭탄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쿠바에 배치된 소련의 미사일 모두를 제거하는 데 기술적인 어려움이 컸고 그 과정에서 소련 군인들까지 살상될 경우에도 미소 양국의 정면 충돌로 비화되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여기에 문제의 미사일에 관한 CIA 등 정보당국의 분석에서 '소련의 핵미사일이 실전배치 완료되기까지는 약 10일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와서 케네디는 좀 더 차분한 대응에 나설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때 회의 내용을 몰래 녹음했다. 녹음 파일이 담기는 장치는 백악관 지하실에 있었고 엑스콤 회의가 열리는 탁자 밑에 녹음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케네디는 자신만이 아는 버튼을 통해 녹음을 켜고 끌 수 있었다. 주로 연필꽂이 옆에 있었다고 한다. 케네디가 이렇게 비밀 녹음 장치를 둔 이유는 이전 피그만 침공 당시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던 참모들이 막상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들 말을 바꾸는 것에 분개했기 때문이었다. 닉슨도 있었던 걸 보면 그것은 닉슨의 독창적인 발상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훗날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녹음본이 공개되기 이전까지는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발언 취지를 바꾸어 증언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위에 언급된 로버트 케네디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는 엑스콤 회의 당시 비둘기파보다는 매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 녹음본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로버트 케네디는 처음 사진을 받아왔을 때 불같이 욕을 했다. 로버트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자신의 책에서도 자신이 매파보다는 비둘기파였다는 취지로 서술했다. 미국 대중들에 큰 영향력이 있었던 로버트의 증언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케네디가 형제들이 비둘기파였고, 나머지 관료들이 매파인 것처럼 인식이 됐다. 이는 후술하는 D-13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실제 녹음본에서는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비둘기파였다. 협상을 하던 폭격을 하던 미사일 선박이 쿠바로 들어가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사일이 쿠바 본토에 배치가 완료되면 협상은 힘들어지고 폭격을 한다 해도 100% 완전히 없앨 수 없기 때문에 소련이 원하는 걸 다 들어줘야 되는 상황이 오게 된다. 물론 케네디 대통령도 처음 쿠바 미사일 배치 정보를 접했을 때 경악과 분노를 담아 이렇게 외쳤다. "흐루쇼프 그 자가 나에게 이럴 순 없어!"[35]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TV와 라디오를 통해 소련이 미국 전역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 중이라고 전 세계에 알렸다. 덤으로 쿠바에 위치한 소련의 미사일이 서반구 국가를 타격한다면 즉각 미국에 대한 전쟁 행위로 간주하고 보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전 세계의 정부와 언론들은 쿠바에 시선을 모았다. 미국은 소련에게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시설의 철거를 요청했지만 누구도 흐루쇼프 서기장이 순순히 물러서리라 보지 않았다.

4.3. 치킨 게임

우리는 전쟁 직전이었다. 한 마디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군사적 긴장 상태를 창출했고, 그런 후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다. 미친 니키타가 우리들을 엄청난 혼란 속으로 몰고 가고 있다.
페트로 셸레스트(Петро Шелест, 당시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겸 키예프 시장), 1962년 11월.
22일의 케네디의 비난 성명에서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쿠바에 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소련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거래를 할 것이라고 여겼고 10월 21일까지 소련 지도부는 이 환상을 공유했다. 하지만 10월 21일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소련의 '배신'을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나설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고 소련 지도부는 당황하였다. 흐루쇼프는 '비극적'인 상황이 되었다고 하였다. 소련 군부는 미국이 핵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흐루쇼프는 핵 없이는 쿠바의 멸망을 막을 수 없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소련 군부는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면 전술핵무기 차원의 반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리예프 장군도 쿠바군 동지들과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겼는지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핵무기 사용 허가를 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전술핵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핵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핵전쟁의 가능성에 직면하자 동요한 흐루쇼프는 플리예프 장군에게 어떠한 핵무기도 사용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로디온 말리놉스키의 주장으로 소련 해군 핵어뢰를 장착한 4척의 폭스트로트급 잠수함을 쿠바 해안에 접근시키기로 하였다. 소련 군부 강경파는 케네디가 선거를 앞두고 꾀를 부리는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흐루쇼프는 이 상황이 자칫 열핵전쟁으로 번질 것이라고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나디르 계획의 주 목적이 미국의 쿠바 침공을 억제하는 것이라며 소련 군부 매파들을 설득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리놉스키 국방장관은 미국이 카리브 해에 배치한 해군력이 아직 형편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쿠바에 대한 미사일 전력 배치를 강행하자고 주장했다.

흐루쇼프는 세 가지 방안을 내걸고 토의했다.
  1. 라디오를 통해 공식적으로 핵우산을 쿠바로 확대한다는 안을 발표하는 것.
  2. 미군이 쿠바를 침공할 경우 즉각 소련군 핵무기 통제권을 쿠바군으로 넘기고 쿠바가 자국의 방어를 위해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
  3. 쿠바 주둔 소련군이 방어용으로 단거리 핵지대지 미사일만 운용하고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운용하지 않는 것.
그러나 당시 소련 수뇌부의 회의는 미국이 소련 수뇌부의 예상을 깨고 비난 성명을 한 이후에 나온 것이어서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웠으며 소련 군부 매파들은 흐루쇼프가 결정을 미루고 강경한 대응을 하기를 주문했다.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전군에 데프콘 3를 발령했다. 아울러 미 해군이 별다른 전력을 동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련 군부 매파의 예상을 깨고 미합중국 해군 항공모함 8척을 포함, 무려 90척의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켜 쿠바의 모든 영해를 봉쇄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카리브 해로 미사일기지 건설 자재를 싣고 오는 모든 선박에 대한 강제 수색 명령을 내리고[36] 이를 거부할 시 격침시키라는 초강수를 뒀다. 또 미합중국 공군은 플로리다 공군기지에 140대였던 전투기를 511대로 늘리는 동시에 40기의 공중급유기를 파견해서 전력을 증강시켰으며 중앙 방공 사령부는 520여기의 추가 항공기를 언제든지 출격시키게끔 하기도 했다.[37] #

흐루쇼프는 미국의 쿠바 봉쇄를 "공해상 항행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제법 위반이자 해적 행위"라고 강하게 비난하며 미사일 부품과 기술자를 태운 자국 선박에게 미국의 해상 봉쇄를 뚫고 핵잠수함 6척[38]핵어뢰를 탑재한 디젤 잠수함들이었다.]의 호위 하에 쿠바로 강행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미 해군은 P-3 오라이언 대잠초계기 순양함을 급파했고 동시에 즉시 보유한 모든 핵전력에 비상대기 명령을 하달해 주요 전략폭격기에 핵탄두 탑재 준비를 마쳤으며 탄도미사일들은 발사 준비 절차에 돌입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NATO에 서로 비상이 걸리고 동독 서독은 물론이며 소련과 미국의 군사력이 맞닿는 모든 곳에서 위험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그야말로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상황이었다. 모든 인류가 두려워했던 제3차 세계 대전이 바로 눈 앞에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케네디의 초강경한 입장은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무력의 사용을 최소화하라고 명령했다.[39] 명령에 불응하거나 무기가 발견된 선박은 격침보다 나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도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다. 아무 일도 없이 봉쇄를 뚫고 지나간 선박들도 많았고 흐루쇼프가 되돌린 선박들도 상당수 있었다. 미 해군과 마주치기 직전 방향을 돌린 선박들 중 상당수가 미사일을 탑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흐루쇼프 입장에서도 무력 충돌은 피하고 싶었거니와 자국의 최신 무기 체제인 핵미사일을 적의 수중에 넘겨줄 리가 없었다. 당시 소련 선박들은 잠수함의 근접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실제 격침은 고사하고 소련 선박에 사격이라도 했다간 바로 대규모 전쟁으로 번질 만한 상황이었다. 이후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대서양에서 자칫하면 무력 충돌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대규모 핵잠수함 추적을 벌인 앤더슨 제독과 심한 마찰을 빚기도 했다. 위기 종결 이후 앤더슨 제독은 2차대전 이후 미 해군의 대잠 능력을 증명할 수 있었던 최적의 기회였다고 진술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 역시 봉쇄 및 검역에 대해 매우 조심스런 조치를 취했다. 전 세계와 미국 내부적으로는 쿠바는 확실하게 격리되고 있다는 미국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했고 소련에게는 핵과 미사일을 실은 배를 어서 회항시키라는 압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미 해군은 핵/미사일이 실려있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 소련측 화물선 1척을 먼저 골라서 검역을 결정했다. 이를 위해 미 해군은 봉쇄에 나선 개별 선박들에게 소련 측 인원들에게 우호를 사기 위한 가벼운 선물 구매를 지시했고 이를 위해 각 해군 함정들은 라이터와 담배, 사탕과 초콜릿 등의 선물류를 급히 사들여야 했다. 검역에 나서는 해군 인원들은 어두칙칙한 카키 근무복 대신, 멋드러지고 적의를 표시하지 않는 해군 정복을 입으라는 지시를 받았다.[40] 검역에 나서는 함선들은 소련 측 선박과 인원에게 화기를 겨누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다. 이런 조심스런 행동 끝에 미국은 화물선 1척을 검역한 후 통과시켜주었고 이는 미국이 의도한 대로 전 세계에 미국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한편 24일 전략공군사령부의 토머스 S. 파워(Thomas S. Power)[41] 공군대장은 합동참모본부의 지휘 아래 데프콘 2를 발령했다. 준전시태세가 선포된 것이다. 이에 따라 1,400대가 넘는 전략폭격기와 134기의 ICBM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전시 작계에 따라 공군 기지에 배치된 전략폭격기 부대가 핵 공격에 대비해 미 본토 각지의 민간 공항에 분산전개하기 시작했으며, B-52가 하루 평균 75소티 출격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나머지 미군은 데프콘 3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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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다. 이 자리에서 미국 측 대사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은 쿠바에 배치된 소련 탄도미사일의 정찰 사진을 공개하면서 소련 측 대사 발레리안 알렉산드로비치 조린(Валери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орин, 1904~1986)에게 "귀하는 쿠바에 귀국의 탄도미사일이 배치 중임을 인정합니까? 통역 기다릴 것 없이, 예/아니오로 대답하십시오(Yes or no? Don't wait for the translation: yes or no?)"라고 강하게 몰아붙였다. 이에 조린은 "여기는 미국 법정이 아닙니다. 검사 범죄자를 취조하는 듯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습니다(I am not in an American court of law, and therefore do not answer a question put to me in the manner of a prosecuting counsel…you will have your answer in due course)"라고 응수했다. 이에 스티븐슨도 지지 않고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귀하의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I am prepared to wait for my answer until Hell freezes over)"라고 다시 맞섰다.[42]

안보리가 산회하고 몇 시간 후 날을 넘겨 10월 26일 오전 1시 3분 미네소타 주 덜루스 공항의 방공관제소에서 철조망 월담을 시도하는 그림자가 포착되었다. 오대호 일대를 관할하는 이 방공관제소는 북극권과 캐나다를 통해 접근하는 소련군 폭격기들을 감지해야 할 곳으로 잔뜩 긴장했던 기지경비대는 즉시 적, 소련군 특수부대 스페츠나츠의 사전침투 시도로 파악하고 대침투 실제상황을 발동했다. 즉시 미국 각지의 기지들에서 전투기들이 황급히 산개 및 핵 공대공 미사일을 탑재한 후 이륙 준비를 시작했다. 이들 전투기들의 이륙은 몇 분 후 중단되었다. 관제소 경비대원들이 확인한 월담 시도자는 스페츠나츠가 아니라 이었다.

한편 흐루쇼프도 전략 핵미사일이 쿠바에 도착하기 전에 상황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교착 상황에서 10월 27일, 흐루쇼프가 먼저 해결책을 제시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튀르키예에서 '유사한 무기'를 제거한다면 자신들도 쿠바에서 무기를 제거하겠다고 제안했으며 미국과 소련이 UN 안보리에 튀르키예와 쿠바 양국의 국경과 주권의 보전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할 것을 제안했다. 이런 흐루쇼프의 제안에 소련 외무기관들은 물론 소련 시민들도 안도했다. 빅토르 이스라옐란을 비롯한 고위 외무 관리들도 이를 상호 수용 가능한 타협 조건으로 환영했다.

4.4. 검은 토요일

회의를 끝내고 백악관을 나오면서 노을이 드리운 가을 하늘을 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음 주 토요일이 오기 전에 다 죽을 것이라는 예감에 공포에 휩싸였다.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미합중국 국방장관, PBS War and Peace in the Nuclear Age. [43]

10월 27일, 로버트 케네디와 아나폴리 도브리닌이 만나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것과 이탈리아와 튀르키예의 미사일 철수를 쿠바에서의 미사일 철수와 교환하자고 합의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 거래가 공개되면 미국 국내와 나토의 동요와 분열이 있을 것이므로 비공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이를 수용 가능한 주장으로 보았고 상황이 정리되는 듯 하였지만[44]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었다.

10월 26일에서 27일을 거치는 새벽 카스트로는 아바나의 소련 대사관에 가서 "앞으로 24시간, 늦어도 72시간 내로 미국의 공습이 임박했다"고 흐루쇼프에게 알렸다. 그리고 미국이 침공하는 즉시 소련이 미국을 향해서 핵공격을 감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카스트로는 이것이 1941년 독소전쟁의 재림을 막는 길이라고 주장했으며 미국 정찰기를 격추시킬 것을 명령했다. 즉 카스트로는 위기를 통제하고자 했던 흐루쇼프와 생각이 달랐다. 나중에 카스트로는 자신이 이러한 요청을 했다는 것을 90년대에 부인했으나 카스트로의 면피에 불과하며 2022년 5월에 러시아 국방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흐루쇼프는 카스트로의 요청에 "이 새끼는 광기에 눈이 먼 것인가 아니면 뇌가 없는 것인가!"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여기에 미 군부가 민간 도시들이 아니라 군사 시설에만 핵공격을 퍼부어서 전쟁할 수 있다는 새로운 핵전쟁 교리를 들고 오자 흐루쇼프는 자신의 핵 벼랑 끝 전술이 더는 먹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미국이 핵전쟁을 군사 시설만 타격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핵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모든 것이 도루묵이었다. 흐루쇼프는 간부회에서 미국의 목표가 사람들이 핵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여기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핵전쟁이란 것이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흐루쇼프는 플리예프의 명령으로 핵탄두가 무기고에서 나와 트럭에 실리자 전략 핵무기는 물론, 긴급 전보로 비행기에 장착된 핵무기나 전술무기도 모두 금지한다는 방침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모스크바와의 통신은 원활하지 않았고 현장의 실전 심리와 쿠바군 동지들에 대한 연대감은 부풀어올라 있었다. 카스트로는 소련측 지휘관에게 쿠바 영공을 침범하는 미군기에 대한 방공태세, 즉 요격과 격추를 요청했고 소련의 현장 지휘관은 이를 승인했다.[45]

미국에는 흐루쇼프의 두 번째, 그리고 공개적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용은 "튀르키예의 미국 미사일 기지도 철수할 것." 국가안보회의 참석자들은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그것이 공개적 메시지인 이상 흐루쇼프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개적인 거래는 NATO 동맹국들의 걷잡을 수 없는 반발을 초래할 것이며 미국의 협상력을 약화시키고 굴복으로 비쳐 여론의 질타를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EXCOMM 구성원들은 흐루쇼프가 비밀 전문을 보내면 될 것을 공연히 공개 메시지로 보내서 일을 망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중에는 '만약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때 튀르키예에서 철수할 걸'이라고 후회하게 될 거라고 생각을 바꾼다.

한편 26일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미리 예정되었던 아틀라스 로켓 ICBM의 시험발사가 이루어졌다. 데프콘 3이 발령된 상황에서 주변 ICBM에는 핵탄두가 장착되고 있었다. 태평양으로 발사될 예정이었던 이 미사일에는 핵탄두가 장착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소련이 이 발사를 포착하여 핵공격으로 간주했다면 핵전쟁이었다.[46] 심지어 쿠바의 미사일 동향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던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 지도부는 자국 내에서 중국과 소련 방향으로 ICBM이 발사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27일, 미국 동부표준시로 7시이며 그리니치 표준시로 11시에 영국에서는 해럴드 맥밀런 총리가 내각 회의 끝에 탄도미사일 및 핵폭격기 부대에 15분 내 즉시 출격대기상태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영국도 핵전쟁 태세에 돌입하게 되었다. 쿠바 정부는 카스트로의 지휘하에 혁명지도부가 각기 쿠바 내 다른 지역을 맡아 방위전을 지휘하기로 하고 피델이 수도 아바나에 남았으며 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가 쿠바 내 다른 도시로 이동했다. 이는 유사시 정부가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동시에 쿠바 전국에 민방위체계 가동을 선포하고 공습에 대한 지침을 전파했다.

마침내 소련 시각 28일, 미국 시각 27일 오후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 브랑겔 섬 영공을 침범해 미국측의 F-102 요격기들이 비통상탄두 미사일[47]을 탑재하고 날아올라 소련 요격기들과 대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48] 다행히 U-2가 소련 영공을 벗어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49] 그러나 그 직후 쿠바 영공의 다른 U-2 정찰기가 소련군의 SA-2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어 미 공군 조종사 루돌프 앤더슨(Rudolf Anderson) 소령이 사망했고[50] 같은 날 쿠바 상공을 정찰 비행하던 미 해군 RF-8 정찰기는 쿠바군의 대공포 사격을 받았다.

이때 양측 수뇌부는 이 상황을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U-2 정찰비행은 위 ICBM 시험발사와 같이 위기 발생 직전에 잡은 일정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뒤늦게 이를 안 맥나마라 국방장관[51]은 노발대발하며 모든 비행 일정들을 취소시켰다.[52] 양측 전투기가 수칙에 따라 핵미사일을 탑재하고 이륙하여 대치했다는 사실은 양측 수뇌부 모두 상황 종식 이후에나 알았다. 또 다른 U-2 격추는 크렘린이 아닌 소련군 일선 지휘관의 결정이었으며 크렘린 역시 상황이 끝난 이후에나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막장의 절정.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최고지도부들이 최일선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쿠바 상공에서 U-2가 격추된 순간 미 수뇌부는 당장 쿠바를 침공해야 한다면서 격노했으나 '24시간 동안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고 정하고 용케 참았다. 같은 날 카리브 해에서는 미군이 훈련용 폭뢰를 통해 소련 해군 잠수함의 강제 부상을 시도했고 이것이 적중해 소련의 폭스트로트급 잠수함 B-59함의 선체 근처에서 폭뢰가 폭발했다.

당연히 B-59는 미군의 '시도'를 폭뢰 '공격'으로 오인했고 함선의 손상이 심한데도 미군의 폭뢰 투하로 인해 부상하지 못하다보니 산소 고갈 상태에 빠졌다. 약 4시간 동안 함선 내부에서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급증해 승조원들이 쓰러지고 있었고 모스크바와의 통신도 불가능했다. 이 판국에 다시 함선 근처에서 폭뢰가 터지자, B-59 함장 발렌틴 사비츠키(Валентин Савицкий) 대령은 이를 전쟁 발발 상황으로 간주, 정치장교 이반 마슬렌니코프(Иван Масленников) 대령의 동의를 받아 탑재한 핵어뢰를 발사하려고 했다.[53] 다행히 부장이자 K-19 함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인 바실리 아르히포프가 반대하여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54]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날 저녁을 기억했다. "회의를 마치고 백악관을 나설 때,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주 토요일 밤에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한편 공포에 질린 것은 미국 수뇌부뿐이 아니었다. 소련 역시 수뇌부가 공포에 질렸다. 모스크바의 중앙당 관리들은 가족들을 시골로 대피시키느라 소동을 벌였고 난데없이 모스크바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을 본 지방 관리들도 사태의 추이를 알게 되자 경악하였다. 소련 곳곳에서 미친 니키타가 엄청난 혼란 속으로 자신들을 몰고 가고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시 당중앙위원회 연락부 부원으로, 연락부장 유리 안드로포프를 보좌하던 소련 정치학자 표도르 부를라츠키(Фёдор Бурлацкий)는 10월 27일 당중앙위원회의 긴급한 호출을 받고 차를 기다리던 중 동료인 알렉세이 벨랴코프(Алексей Беляков)를 만났다. 벨랴코프가 그에게 가족들을 시골로 보냈냐고 묻자 부를라츠키는 도대체 왜 가족들을 시골로 보내야 하는지 되물었고 벨랴코프는 조만간 모스크바가 핵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10월 28일 '소련이 선제 핵공격을 했다!'는 경보가 북미방공사령부( NORAD)에 울려 퍼졌다. 플로리다로 핵미사일이 온다는 경고가 울린 것이다. 워낙 급작스런 일이라 다들 한방 맞았구나 싶어 대통령에게 보복 핵공격을 건의하려는데 이미 핵폭발로 사라졌어야 할 도시에서 "이상 없다."는 보고가 올라와서 조사했더니 핵공격을 대비한 자체 훈련 프로그램으로 인한 오보였다. 사태 파악이 늦었으면 어처구니없는 핵전쟁이 터질 뻔했다.[55]

4.5. 미사일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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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핵전쟁)을 가둡시다."
결국 핵전력은 물론 봉쇄를 돌파할 만한 재래식 해상전력조차 없었고 끝까지 가면 국가 멸망을 피할 수 없었던 소련의 현실로 인해 흐루쇼프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튀르키예에 배치한 미국의 중거리 탄도탄의 철수를 조건으로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이 공식 루트가 아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언론플레이로 의심했고 동맹국 튀르키예의 안전보장 문제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그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미국의 의심과는 달리 흐루쇼프의 제안은 진짜였다. 라디오 방송으로 제안을 한 이유는 양국 간에 핫라인이 없어서 전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암호화하여 보내고 다시 이를 해독하고 또 통보하는 시간 등을 합치면 거의 하루가 걸린다.[56] 게다가 그 전보가 진짜로 상대국의 국가원수에게서 온 건지도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흐루쇼프는 2번 전보를 보냈는데 미국은 이게 정말 흐루쇼프가 보낸 건지 고민했다.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에서 양국 수뇌간 의사교류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려 문제가 더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한 방법이 바로 라디오였다.

흐루쇼프는 10월 28일을 기하여 선단에 회항 명령을 내리고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렇게 쿠바 미사일 위기는 종결되었다.

5. 후일담

소련은 약속대로 R-14 미사일들을 수송 중이던 선단을 회항시키고, 쿠바에서 이미 배치된 R-12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미국과의 전쟁을 각오했던 피델 카스트로는 10월 28일 아침, 소련으로부터 어떤 상의나 통보조차 없이 뉴스에서 흐루쇼프가 선단을 회항시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격노하여 흐루쇼프를 보고 '게이 새끼'(Maricón)라고 저주를 퍼부으며 벽을 걷어차고 방에 걸려 있던 거울을 집어던지며 울부짖었다. 이후 카스트로는 소련에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온 인류가 절단나느니 동맹국 하나 잃는 게 낫다는 소련측의 논리에 따라 깔끔하게 씹혔다. 한편 분노한 카스트로를 설득시키기 위해 소련은 쿠바에 다른 지원을 해주었다. 미사일을 철수한 뒤에도 여러 최신예 구소련산 무기들을 쿠바군에 공여함과 동시에 쿠바 주둔 소련군[57]은 계속 배치되었으며 소련 붕괴 후에야 철수했다. 이후 1990년대에 당국의 압박으로 출간되지 못했던 흐루쇼프 회고록의 미검열판이 출간되자 여기에 카스트로가 미국에 핵공격을 해달라는 내용이 실려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때까지 살아있던 카스트로는[58] 당황해서 그란마지를 통해 문서를 공개하며 흐루쇼프의 구라라고 주장했으나 2022년 5월에 공개된 러시아 국방부 문서고 자료에서도 카스트로가 핵공격을 요청한 것이 확인되었다.

한편 미국은 이에 대한 거래 이행으로 쿠바에 대한 무력 침공을 하지 않을 것을 소련에 약속했으며, 흐루쇼프가 10월 27일에 제안한 대로 튀르키예 이탈리아에서 자국의 주피터 중거리 탄도 미사일들을 철수시켰다.[59] 튀르키예 역시[60] 자국의 안전 보장이 흔들린다며 항의했으나 역시 문명의 퇴보와 제3차 세계 대전 앞에선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에 튀르키예와 이탈리아를 위해서 지중해에 SLBM 탑재 잠수함이 배치되었다. 소련도 마찬가지로 쿠바에서의 폭격기 전력과 해군 기지는 유지했고, 그 덕에 냉전 시기에 카리브 해에서 미•소 잠수함 간의 쫒고 쫒기는 추격전이 이어지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미국은 쿠바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만큼은 소련이 붕괴된 뒤에도 지켰고, 지금도 눈엣가시인 쿠바를 경제제재만 할 뿐 공격하지는 않고 있으며, 2015년 재수교하는 등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 역시 쿠바와의 관계를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계속 유지하고 있으니 쿠바 입장에서 보면 주권 보장은 확실하게 받은 셈이다.

쿠바는 이때 미국이 정말 대규모 폭격을 하고 상륙을 감행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피그만 침공이나 노스우즈 작전, 노스우즈 작전의 후속편 격이었던 몽구스 작전 같은 것을 보면 실제로 관련 작전이 그때까지 존재했으므로 그런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후 미•소 양국은 위기 동안 양측 수뇌간에 부정확한 의사소통이 있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양국 정상간에 핫라인을 개설했다. 피그만 침공으로 타격을 입었던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보여준 강인한 지도력으로 전 미국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반면 흐루쇼프는 튀르키예와 이탈리아에 배치된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의 철수를 이끌어냈음에도 미국에 너무 질질 끌려다녔다는 비판을 받았고[61] 공산권 내에서 소련의 위신이 실추되었다. 한편 이 사건으로 인해 흐루쇼프에 대한 신뢰가 매우 훼손되어 흐루쇼프 몰락의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 기존에 흐루쇼프를 약한 독재자로 봤던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러시아가 알음알음 공개하고 있는 내부 문서들, 그리고 올레크 흘레브뉴크(Олег Хлевнюк)를 비롯한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가 누적되면서 사실 흐루쇼프가 무소불위의 강력한 독재자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의 몰락은 흐루쇼프가 1964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지도부를 다시 선거하겠다고 위협하자 다른 간부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에 가까웠다. 이와 관련해선 독일 학자 주자네 샤텐베르크(Susanne Schattenberg)의 브레즈네프 평전과 조지프 토리전(Joseph Torigian) 교수의 《You Don't Know Khrushchev Well : The Ouster of the Soviet Leader as a Challenge to Recent Scholarship on Authoritarian Politics》 # 참조.

이 사건은 미•소 양국의 군비 경쟁 양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소련의 경우 핵전력 강화는 물론이고, 재래식 해상전력의 필요성도 크게 대두되었다. 소련은 대륙국가라는 특성상 해상전력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는데, 이러자 압도적인 미 해군의 봉쇄를 돌파하지 못해 전면 핵전쟁 아니면 꼬리를 내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면 핵전쟁은 인류 멸망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불가능한 선택지였으므로 이런 일이 계속되면 소련은 미국에 밀릴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소련은 1991년에 붕괴되었다. 물론 문제를 모르지는 않았으므로 당장 흐루쇼프부터 "우리는 더 발이 넓은 해군이 필요하다"는 말을 천명할 정도였고, 이후 소련 해군은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제독의 지도 아래 양적으로 급속히 팽창하여 냉전 후기에 이르면 세계 2위 대양 해군에 최대 규모의 배수량을 자랑하는 초거대 해군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배수량이 곧 질적인 우세는 아니고 미국엔 10척이 넘는 항공모함과 이를 호위할 대규모 수상함, 잠수함과 함재기들이 있는 이상 여전히 해군력은 미국이 훨씬 우위였다.

미국 또한 '힘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다고 해서 결국 믿을 것은 힘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결국 당시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는 모두 매파라기보다는 비둘기파였지만 결과적으로 냉전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냉전을 뒤흔드는 핵전쟁의 공포와 상호확증파괴, 일명 MAD 전략에 대한 믿음만 더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시점에서는 소련의 핵전력이 여러모로 미국에 한 수 뒤졌으나 사실 이 사건 이후 오히려 소련은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1970년대에 이르러 미•소 핵전력 균형(parity)를 달성했다.[62][63] 다만 어차피 핵전쟁이 시작되면 균형이고 뭐고 인류 멸망 확정이니 의미는 없었다. 한편 1979년에 터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인해 긴장감은 높아져 가고 핵전쟁에 대한 인류의 공포는 더해져만 갔다.

전 세계 대부분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대화로 해결된 것에 대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마오쩌둥·김일성 등 공산주의 초강경파들은 겁쟁이 수정주의자 흐루쇼프가 미국인들에게 평화를 애걸했다고 무척이나 한심하게 보았다. 스탈린 격하 직후 한동안은 소련의 영도권을 인정하면서 어느 정도 협조관계를 가졌던 마오쩌둥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주도권을 주장하면서 소련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처음에는 소련 정부가 불필요한 전쟁을 하지 않는 현명한 결단을 내렸다고 갖은 알랑방구를 뀌면서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이를 방어하기 위해 소련이 북한의 방공망과 해안방어를 강화시켜주기 위한 군사적 지원을 해달라고 주북 소련 대사 바실리 모스코프스키(Василий Московский)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대북 지원에 인색하게 나오고, 벼르고 별렀던 흐루쇼프의 북한 방문조차도 미국의 요청에 따라 무산되자 뿔난 김일성은 입장을 바꿔 흐루쇼프를 비웃으면서 중소분쟁 초기에 마오쩌둥을 열렬히 지지했다. 남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싶었던 북베트남도 소련의 평화공존 정책에 대해서 실망을 드러냈고, 레주언이 주도한 친소파 대숙청과 친중 노선의 정착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국제정치, 안보 연구에서 '위기관리'(crisis management)의 가장 고전적인 사례로 자리잡았고, 사건 발생 수 년 후인 1970년대에는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그레이엄 앨리슨 《결정의 본질》(Essence of Decision)이란 저서를 통해 당시 케네디 행정부의 대응 배경을 학문적, 이론적으로 분석한 바 있었다. 1) 합리적인 행위자, 2) 조직행태, 3) 정부정치 등 3가지의 모델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즐겨 사용되는 편. 예컨대 특정 국가의 대외정책 노선을 평가할 때 '주변국 안보 위협 증대에 따른 동맹 강화' 같은 국가를 단일하고 합리적인 행위자로 가정하는 해석은 합리적 행위자 모델, '부처 내 업무 절차 혹은 매뉴얼에 따른 행동'이라는 해석은 조직행태 모델, '정부 내의 온건파 대 강경파 경쟁'이라는 해석은 정부정치 모델에 해당한다.

이 사건으로부터 53년 후 미국과 쿠바가 국교 정상화를 재개한다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발표가 2014년 12월 18일에 나왔다. 기사 이후 2015년 재수교했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전역대상자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3~5개월 가량 전역이 미뤄졌다.

이 사건 때문인지 몰라도 세계의 서방과 비서방 국가들은 쿠바와 미국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 편이다.

이 사건의 배경 중 하나가 된 1962년 중간선거는 본래 공화당의 압승이 유력했으나 케네디가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데 성공하고 흐루쇼프에 판정승을 거둠으로써 판세가 완전히 뒤바뀌어 민주당이 압승했다. 하원에서는 큰 의석손실 없이 다수당 지위도 유지했고, 상원에서는 의석을 4석이나 불렸다. 그도 그럴 것이 3차대전의 위기에서 대통령이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 데다가 자신들의 턱밑에 깔린 쿠바의 미사일까지 철수시키고 끝내 핵전쟁까지 막아냈으니 여론은 당연히 핵전쟁으로부터 미국을 구한 케네디를 지지하자는 여론으로 흘렀던 것이다. 더군다나 위기의 종결과 중간선거까지의 간격은 고작 1주일여에 불과했으니. 위기 전에는 유약한 행동으로 미국의 위신을 추락시켰다며 까인 것과 정반대. 케네디의 유약한 대외정책을 공격하던 공화당은 말 그대로 참패했다.

별 관계가 있나 싶겠지만 이 사건은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도 나름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는데 당시 유력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들은 대부분 케네디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천명하며 반소 입장을 표명했다. 마틴 루터 킹, A. 필립 랜돌프 등은 모두 공개적인 케네디 지지 운동에 나섰고 흑인 언론들도 뒤따르며 흐루쇼프야말로 미국 내 극우 백인 우월주의자와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극좌파는 미국이 제국주의 침략을 하고 있다고 쿠바를 지지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맬컴 엑스는 소련을 딱히 지지하진 않았지만 미국에 대해서도 백인들은 흑인에게 늘 참으라고 하면서 자기네를 조금만 핍박해도 참지 못하지 않냐고 빈정댔다.

오버프루프 바카디 151을 사용하여 쿠바 리브레를 만들면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도수도 상당하거니와 바카디가 쿠바에서 창업한 가족기업이다.

6. 미디어

워낙에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제3차 세계 대전 발발에 가장 가까웠던 몹시 위험했던 사건인지라[64] 종식 이후 이 사건을 다룬 여러 편의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이 쓰였다. 그 중 상당수는 양국이 결국 양보하지 못해 막장 고고씽을 달리는 가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6.1. 도서

영국 대체역사소설 《부활의 날》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핵전쟁으로 확전되었고,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대충 망한[65] 미국을 그리고 있다. 주요 도시가 괴멸되고 영국의 신탁통치를 받고 있는 미국에서 쿠바 전쟁에 얽힌 비밀[66]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이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 출신인 마이클 돕스의 《1962》이라는 역사서도 있다. 쿠바 위기의 모든 것을 다룬 역사서이기 때문인지 640페이지에 육박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물론 분량 못지않게 내용도 충실해서 사건을 한 시점이 아닌 미국인, 소련인, 쿠바인의 시점으로 번갈아 보며 그때 일어났던 모든 해프닝들을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연구하거나 관심이 있다면 꼭 봐야 될 책이다.
파일:1962.jpg

본문에 서술했던 케네디 대통령의 비밀 녹음 테이프는 이후 케네디 도서관에 보관되었는데 여기서 근무했던 셀던 M. 스턴 박사는 녹음 테이프를 일일이 풀어 일의 전말을 기록하는《결정적 실패 피하기》라는 책을 펴냈다. 스턴의 이 책은 이후 《존 F. 케네디의 13일》이라는 축약본으로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에는 2013년 번역, 출간되었다.

6.2. 영화

6.2.1. D-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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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철저하게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로는 로저 도널드슨 감독의 〈D-13〉(2001년작, 원제 Thirteen Days)이 있다. 미국측 입장에서 만든 영화지만 상당한 수작.[67] 로버트 케네디가 쓴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만 나중에 기밀 해제가 된 U-2 격추 사건이나 소련과의 접촉 등이 영화에 추가되었다.

6.2.2.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이 작품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는 헬파이어 클럽의 뮤턴트인 세바스찬 쇼가 양국 군 수뇌부 인사를 배후 조종해 일으킨 것으로 묘사된다. 이유는 미소 양국이 핵으로 박살난 혼란상을 틈타 헬파이어 클럽이 뮤턴트들을 규합해 인류 지배에 나서기 위해서였다. 또 쇼는 핵전쟁으로 인한 방사능으로 뮤턴트가 많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68] 결과적으로 핵전쟁을 통해 기존의 강대국들과 인류를 멸망시키고, 새로이 각성하거나 태어날 뮤턴트들을 거느리는 뮤턴트 제국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였다.

실제로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갈 뻔했지만, 찰스 자비에 소련 해군 스베르들로프급 순양함에 타고 있던 정치장교 마인드 컨트롤해서 경계선을 넘어가려는 소련 화물선에 소련의 대함 미사일을 때려박는 엄청난 일을 성공시켜 교전 상황을 방지하는 데 성공한다.[69] 그리고 자기가 뭔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른 정치장교에게 소련 해군 함대사령관이 하는 말이 백미.
축하하네, 동무. 동무는 핵전쟁을 막았네. (부하들을 향해) 이 자를 끌어내!
얼떨결에 핵전쟁을 막은 정치장교 동무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아군을 상대로 공격했으니 수병들에게 끌려나간다. 사실 해당 장면이 나오기 전 소련 함대사령관과 정치장교가 서로 갈등을 나타내는 장면이 있었다. 정치장교가 미 해군의 봉쇄를 돌파하도록 제촉할 때 함대 사령관은 "난 이미 전쟁을 겪어보았다. 또 다시 그러고 싶지는 않다"고 했던 것. 때문에 위의 대사를 말할 때도 일이 이렇게 되어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결국에는 쇼 본인이 직접 원자로를 가동해[70] 핵폭발을 일으키려 들지만, 때마침 갑툭튀 에릭 렌셔에게 저지당하고 결국 최후를 맞았다.

다만 이후 사건의 전개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쇼를 죽인 에릭은 곧바로 두 강대국의 눈이 집중되어 있는 그 상황에서 뮤턴트의 존재를 공표한다. 그리고 뮤턴트라는 존재와 그 강대한 힘을 인지하게 된 미국, 소련 각국 상부는 이를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하고 쿠바 연안에서 대치하고 있는 자국 전력들에게 뮤턴트들이 있는 섬을 공격하도록 지시를 내린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미군, 소련군은 한 마음으로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재래식 화기를 뮤턴트들에게 쏟아붓는다. 물론 이 시도는 자신들이 쏜 재래화기들을 에릭이 장악, 자기들에게 되돌려 보내면서 실패한다. 그리고 이를 자비에가 제지하다가 총에 맞아 하반신 마비 장애를 입고, 에릭과의 관계는 끝나게 된다. 이후 뮤턴트의 위협이란 새로운 위협이 대두하자 두 나라는 지금까지 언제 싸웠냐는 듯이 이에 대응하고자 화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어찌 보면 왓치맨과 비슷한 결말.

6.2.3. 더 스파이

1960년에서 1962년까지 쿠바 미사일의 정보를 포함해 군사 기밀 5천 건 이상을 반출한 영국의 사업가 그레빌 윈과 러시아 GRU 소속 올렉 펜콥스키 대령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핵심적인 배경으로 그려진다.

6.3. 만화

이어진 1980년대의 또 다른 핵전쟁 위기 속에서 쓰였던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 《 왓치맨》의 결말에는 끝은 평화로웠으나 양국을 더욱 더 핵 개발에 몰두하게 만든 이 사건을 비꼰 닥터 맨하탄의 대사가 있다.
그: 제가 좋은 일을 한 것 맞죠? 결국 끝에는 모든 일이 잘 됐잖아요.
닥터 맨하탄: '끝에는'이라고요?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절대 끝나지 않아요.
저 너머의 아스트라 세계관에서는 쿠바 위기가 심화되어 결국 핵전쟁이 일어나 살아남은 후손들이 세계를 하나로 통일했다는 설정이다.[71]

2007년에 나온 《 심슨 더 무비》에서도 첫 장면이 쿠바 핵위기의 패러디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개그물에까지도 패러디로 등장한다는 것에서 이 사건이 미국인에게 얼마나 깊이 각인된 사건이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4. 게임

<팀 포트리스 2>에서 헤비 수염 장식의 이름이 '쿠바 미수염 위기' 로 패러디되었다.

<콜 오브 듀티 블랙옵스 1> 멀티플레이어 맵에서 Crisis: 위기라는 맵이 있는데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것임을 맵을 돌아다니면 확인할 수 있다. 상대는 Op40 (미국에 협조중인 쿠바 반군) VS Tropas (카스트로 친위대, 쿠바 군대).

< Hearts of Iron IV>의 모드인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 이를 오마주한 "하와이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현실과 달리 소련 대신 일본이 토코시마(일본령 하와이의 현지명)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고, 미국이 이를 봉쇄하며, 닉슨 대통령 대신 부통령 JFK가 일본과의 협상을 타결해 극적으로 종료된다. 맥시코 컨텐츠 업데이트 이후로는 미국이 일본 코앞 알류산 열도에 핵무기를 배치해 이로 인한 양국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다가 맥시코 대통령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의 중재로 위기가 해결되는 알류산 위기로 대체되었다.

6.4.1.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

패러디로 점철된 게임 레드얼럿 2에는 당연히 이 사건을 패러디한 미션도 있다.[72] 연합군 캠페인인데 쿠바에 핵 사일로3기나 건설되어[73] 크로노스피어 건설에 위협이 되는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 물론 흐루쇼프와는 달리 게임 속의 소련 서기장 알렉산더 로마노프는 기꺼이 핵 사용을 불사한다.
핵미사일 도발(미션 후반부)
로마노프: 이 메시지는 귀여운 척 하지만, 썰렁하기만 한 미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이제 소련군이 최후의 승자가 될 순간이 왔다!
이제 우리 핵무기의 맛을 보고 나면, 생각이 좀 달라질 끼다!
핵미사일 무력화(미션 성공)
로마노프: 이미 경고는 층분히 했다, 사령관. 이제는 우리의…! (미사일, 미사일! 거기…) 뭐?!
(부숴… 네! 미사일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예…!)
이런 젠장! 이제 장난은 끝났다, 사령관! 끝장을 내주마!! 이제 곧…!!!

3편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사라졌기 때문에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소련군은 대신 키로프에 대형폭탄을 장착해서 아바나에서 다이렉트로 미국 본토까지 투하하려 했으나, 플레이어 사령관에 의해서 무산.

6.4.2. 메탈기어 시리즈

메탈기어 솔리드 3에서는 제로 소령 네이키드 스네이크에게 버추어스 미션 브리핑을 하면서, 소련이 쿠바에 설치한 핵미사일을 철수시키면서 튀르키예 쪽에 배치한 IRBM을 철수한 사실은 연막이고, 사실은 단지 소코로프를 돌려받기 위해서 벌인 사건이라는 꽤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준다.[74]

6.4.3. 마피아 3

마피아 3의 두 번째 DLC 옛 원한(Stones Unturned)에서는 이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소련에서 비밀 핵잠수함 기지를 폐쇄하고 쿠바 혁명 정부에 러시아제 R-12 전구탄도유도탄 열핵탄두를 다시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와중에 태풍을 만나 추락해 버린 쿠바 측 수송기에 실려 있던 핵탄두가 DLC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중심이 되는데, 변절한 CIA 요원 코너 알드리지가 용병들을 고용해 이 핵탄두를 전쟁 중인 북베트남에 팔아 넘기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때문.

폐쇄된 핵잠수함 기지도 DLC 후반부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이때 존 도노반이 쿠바 미사일 위기가 미국의 판정승으로 끝난 덕에 기지가 폐쇄된 게 천만다행이라는 듯 "고마워요, 케네디!"라는 드립을 친다.

7. 둘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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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소의 원자기호(H)가 탄두에 써져있다. [2] 자세히 보면 서로 핵폭탄 버튼을 누르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3] 로마자로는 Karibsky krizis. Karib에서 볼 수 있듯이 쿠바가 아닌 카리브 해의 위기라는 뜻이다. [4] 1962년 10월 16~28일에 벌어진 위기이기 때문에 '10월 위기'라고도 불린다. [5] First Strike Capability. 핵전략 및 국제정치학 용어로 단순히 먼저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선제공격을 가해 상대 핵보복 전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수준의 능력을 말한다. [6] SM-65 아틀라스 ICBM 144발, SM-68 타이탄I ICBM 60발 수준이었고 미니트맨I ICBM도 실전배치 중이었다. [7] 여기서 소련의 요격기와 방공망에 쉽게 격추당하지 않겠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는데 숫자도 워낙 많고 이들은 AGM-28 하운드독 핵 공대지 초음속 미사일을 소련 방공망 바깥에서 투사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소련의 선제핵공격으로 폭격기 전력이 깡그리 날아가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Chrome Dome 작전으로 알래스카 그린란드, 그리고 지중해 상공에서 상시 전략초계하며 언제든지 소련에 핵불벼락을 끼얹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공군 소속 아브로 벌컨 전략폭격기들도 B-52 폭격기와 공동으로 전략초계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8] 미 해군 항모전단에서 이륙하는 A-5 초음속 핵폭격기와 A-3 핵폭격기까지 합한다면 장난아닌 수다. [9] 이들이 바렌츠 해 또는 지중해에서 발사할 경우 모스크바 정도는 손쉽게 사거리에 넣을 수 있었다. [10] 소련은 R-7 10발과 R-16 50발을 가지고 있었고 RT-20P도 추가로 가지고 있었다. [11] 당시 소련의 K-19에 탑재된 R-13 SLBM들은 사거리가 불과 600㎞로 미국의 폴라리스 SLBM보다 사거리가 짧았고 나토의 대잠망을 돌파해 미국 본토에 아주 가까이 접근해야 겨우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12] 이것도 사실 미국 본토에 대한 핵공격에 활용될 수 있는 유의미한 전력으로 보기 힘든 게 미군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을 북극권과 캐나다 지역의 방공망을 고고도 비행으로 돌파하고 미국 본토에 핵공격을 실시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13] 이것도 소련 해군 따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의 미국 해군 대잠망을 피해 미국 부근까지 진출했을 때나 활용 가능한 전력. [14] 이는 냉전 시기의 악감정이 섞인 서방의 잘못된 시각이며 소문이다. 흐루쇼프는 케네디를 함부로 다루려할 의도도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이젠하워와 흐루쇼프 간의 외교 관계는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 군 감축과 같은 데탕트적 분위기와 금문도 - 마조도 포격 사건, 1958년 베를린 위기, 미국의 레바논 사태 개입, 소련의 미국 U-2 격추와 같은 충돌이 뒤섞여 있었다. [15] 당시 나온 표현으로 미사일 격차(Missile Gap)가 있다. [16] 당시 사용한 로켓의 계보는 역사상 가장 경제적인 우주발사체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군용으로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련은 생산했고, 열병식에 공개도 했고 서방권은 믿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에게 우주개발비를 준 소련 군부의 목적은 이런 면에서 완벽하게 달성되었다. [17] 당시 정치국의 명칭. 1952년 스탈린이 정치국을 간부회로 개편했는데 나중에 브레즈네프 시기에 정치국으로 환원되었고 소련 공산당 수장도 서기장으로 돌아갔다. [18]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실제로 배치된 전력은 R-12 8발에 그쳤다. [19] 알래스카를 제외하면 미국 태평양 연안 제일 북쪽에 위치한 주이다. [20] 소련식 군사용어에 의하면 해당 부대들은 전차와 장갑차로 무장한 기계화보병부대다. 이 말인 즉슨 쿠바 미사일 기지를 재래식 군사력으로 제거하려면 피그만 침공처럼 쿠바 망명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로는 안 먹히고 미군의 전면적인 상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21] 스베르들로프급 순양함 2척, 카닌급 구축함 2척, 코틀린급 구축함 2척, 코마급 고속정 12척, 골프급 잠수함(불필요하게 NATO의 대잠망을 돌파하지 않고도 단숨에 미국 본토를 향해 SLBM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겠다는 소련의 의도가 들어가 있었다.) 7척, 폭스트로트급 잠수함 4척, 돈급 잠수함 보급함 2척, 2척의 급유선과 2척의 벌크선 그리고 수상 작업장 1척을 포함한 보조함 8척, Il-28 폭격기 33기, S-2 소프카(NATO 코드명: SSC-2b 샘릿) 발사대 8기. [22] Mi-4(NATO 코드명: 하운드) 헬리콥터 33대, 2K6 루나(NATO 코드명: FROG-3/5) 발사대 16기. [23] 다수의 대공포, S-75 포대 12기, MiG-21F-13 40기, MiG-15UFI 6기. [24] 제514, 539, 546, 564, 657미사일연대 [25] 다만 미국의 튀르키예 핵미사일 배치와 소련의 쿠바 핵미사일 배치는 공개적이냐 비밀리냐는 차이가 있었다. 적어도 미국은 튀르키예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대외적으로 인정했는데, 소련은 미국이 정찰기 사진을 공개하기 전까진 미사일 배치를 철저히 부인했다. [26] 재미있게도 U-2의 쿠바 정찰은 당시 정권이 사회주의에 너무 유약하다며 공세를 펼치던 공화당원들의 압력으로 빈도가 늘어난 것이었다. [27] 미국의 눈을 속이기 위해 쿠바로 향하는 배들에는 마치 시베리아나 북극권으로 가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스키를 포함한 각종 동계용품들이 같이 선적되었다. 승선원들은 물론 함장과 함에 동승한 정치위원까지 최종 목적지가 쿠바라는 사실을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한 이후에나 알았다. 쿠바에 도착한 이후에도 스파이의 눈을 속이기 위해 트럭행렬을 여러 개 만들어서 쿠바 내 어느 곳이 진짜 미사일 기지인지를 철저하게 속였다. [28] 펜콥스키는 독소전쟁 당시 최연소 연대장으로 활약했고, 지상군 미사일 및 포병사령관인 세르게이 바렌초프 포병상원수의 부관을 지냈으며 개인적인 친분도 유지하고 있었던지라 출세에 탄탄대로가 열린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가 러시아 내전 당시 전사한 백군 장교였던 사실이 밝혀지자 소련 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받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소련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서방세계에 협조하는 스파이로 전향했다. 결국 10월이 다 가기도 전에 간첩 혐의로 소련 당국에 체포되었고 1963년 KGB 본부 지하실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간첩 활동에 관한 내용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영화 더 스파이로 극화되었다. [29] 대한민국 입장에선 악연이 꽤 있는 인물이다. 8.15 광복 당시 미군정의 점령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삼팔선의 아이디어를 직접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초 일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러스크 서한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에 관한 일본 측의 논리를 보태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30] HBO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등장한 제101공중강습사단 사단장이었던 그 테일러 장군이다. [31] Theodore Sorensen.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모든 의사 결정에 참여한 핵심 참모. "자, 미국 국민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라는 구절로 유명한 대통령 취임사도 소렌슨의 작품이다. [32]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스페인 전쟁의 명분을 제공한 USS 메인 함 침몰과 비슷한 사건을 조작하자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이후 쿠바 공습을 진주만 공습에 비교하며 미국에 영원히 불명예를 안기는 격이라며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기도 했다. [33] 1992년 쿠바 아바나 회의에서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그리프코프는 1962년에 쿠바에 약 160개의 핵탄두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숫자는 블러프로 다소 의심되지만 98개라는 말도 있는 등 충분한 양이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34] 봉쇄(Blockade)라는 용어는 그야말로 전시에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용어는 검역(Quarantine)으로 선택했다. [35] 케네디의 녹음 장치는 그의 사후 폐기 처리되었지만 이 장치에 주목한 사람이 바로 닉슨 대통령이다. 닉슨은 케네디의 녹음 장치를 더욱 개량해 다시 백악관 집무실에 녹음기를 설치했고 이는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이어진다. [36] 만약 전략 물자가 발견된다면 압수하도록 지시했다 [37] 항공모함 해군 항공대에 편제된 함재기는 빠진 숫자다.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의 항공기였다는 것. [38] 여기서 '핵잠수함'이란 소련이 이제 막 실전배치한 핵추진 방식 노벰버급 잠수함이 아닌 [39] 그렇다고 절대 소련에 굴할 심산은 아니었다. 시간을 계속 벌었던 것일 뿐. [40] 정복은 전투 시에는 입지 않는다. 즉, 정복을 입음으로써 소련 측에게 우리는 교전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41] 당시 르메이는 공군참모총장이었고 파워 장군은 르메이의 후임 전략공군사령관이었다. 이 양반은 르메이에 대해 농반진반으로 '형용사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미친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르메이식 일방적 강경론에는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마저도 이 사태 때는 도저히 답이 없다고 생각한 것. [42] 이 장면을 백악관에서 TV로 지켜보던 JFK는 스티븐슨의 결의에 감탄하면서도 “ 1952년에 저런 결의를 진작 보여줬으면 좋았을텐데.”라는 블랙유머에 가까운 감상평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43] 36분 15초에 해당 발언이 나온다. 맥나마라를 비롯한 당시 미 수뇌부가 가졌던 공포와 부담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맥나마라는 이 일을 겪은 것이 10월 27일이었다고 증언했는데 이때 백악관 회의는 오후 7시가 넘어 끝났고 10월 말의 워싱턴은 7시면 이미 해가 진 뒤다. 나와서 본 게 아니라 회의 중에 봤다거나, 27일 당일은 아니고 그 즈음에 그런 기분을 느꼈다든지 등의 것을 헷갈렸을 수 있다. 사실 핵전쟁이 일어나니마니 하고 있는 마당이니 주변 풍경과 시간 같은 것은 잘 기억이 안 날 만도 하다. [44] 이때 이상한 기류를 직감한 튀르키예 정부는 주피터 미사일 철수는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반면 이탈리아 정부 측은 자국 본토에 배치된 주피터 미사일을 협상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았다. [45]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카스트로는 대표적인 강경파였다. 미소를 막론하고 주로 정치인들이 온건파, 군부가 강경파에 속하였는데 카스트로는 스스로 게릴라를 이끌고 혁명을 성공시킨 사람이라 그런지, 그리고 미국의 침공 위협에 계속 시달려서 그런지 미국을 공격하자는 굉장한 강경론을 내세웠고 흐루쇼프를 뒷목 잡게 만들었다. [46] 소련이 이 발사를 감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47] 일반 폭약 탄두가 아닌 탄두, 즉 핵무기를 뜻한다. [48] 다음날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련 영공을 침범한 U-2가 핵공격으로 오인되었을 경우 자칫하면 핵전쟁으로 번질 뻔했다고 서술했다. 특히 당시 미국의 요격기들은 250t 출력의 GAR-11(이후 AIM-26 팰콘으로 개명됨) 핵공대공 미사일과 1.5kt 출력의 AIR-2 지니 핵공대공 로켓을 탑재하고 있었다. [49] 사실 이 U-2기는 고의적으로 소련 영공을 침범해 정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북극권 정찰 및 대기권 내 핵실험 시료 채취를 위한 비행 도중 항로착각으로 소련 영공으로 들어간 거였다. 소련 영공 정찰은 1960년 5월 개리 파워즈의 U-2기 격추 이후로 위험성이 인정되어 중단되었다. [50]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여 군산 기지에서 복무한 이력이 있었으며 이 사고 이후 최초로 공군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51]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 장면에서 대표적인 온건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국방장관이 온건파라는 사실은 케네디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52] 이 소식을 들은 케네디 대통령은 "어딜 가나 말귀를 못 알아먹는 개새끼가 꼭 있지 (There's always some son of a bitch who doesn't get the word)"라고 냉소적으로 농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간단히 말해 넌씨눈. [53] 당시 B-59함은 최대 10kt의 위력을 지닌 RDS-9 핵탄두를 탑재한 T-5 어뢰들을 탑재 중이었다. [54] 부장이 발사에 반대한 후 B-59는 미군 항공기에 도발을 중단하란 교신을 보냈고 미군이 이를 받아들여 철수하자 수면 위로 부상했다. 전력도, 산소도 고갈되고 에어컨 장치까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미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아르히포프의 반대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었다. [55] 의외로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핵전쟁이 터질 뻔한 적은 엄청나게 많다. 긴박한 상황일 때 잘못된 정보나 누군가의 거짓말에 사실을 전혀 파악해보지도 않고 곧이곧대로 믿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약 4개월마다 핵전쟁이 터질 뻔했다고 전해지는데 높으신 분들만 알고 국가 차원에서 은폐해서 민간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사건까지 있었다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56] 사실 이것도 엄청나게 서둘러서 한 거다. 미소 양측 모두 상황의 긴박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측 외교관 및 해독관들은 보통 혼자서 진행하던 작업을 여럿이 달려들어서 문장 단위로 나누어 해독한 후 합치는 식으로 작업시간을 축소시켰다. [57] 이 쿠바 주둔 소련군은 소련군 내에선 손꼽히는 꿀보직이었다고 한다. 날씨가 온화하고 먹거리도 풍족했으며, 현지인들의 민심도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냉전 기준으로 치면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들과 피 흘리며 싸우는 미군이 있는 데 반해 한국과 일본, 서독, 그리스 등에서 경주, 교토, 큐슈, 하이델베르크, 노이반슈타인 성, 델포이 신전, 파르테논 신전 등 주둔국가 내 관광지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즐기는 미군 병사들이 있는 것과 같았다. [58] 1926년생인 피델 카스트로는 향년 90세인 2016년에 세상을 떴다. [59] 주피터 중거리 미사일이 소련의 공격에 취약했다는 내부적인 우려도 한 몫했다. 실제로 1962년 초, 이탈리아 주피터 미사일 기지 바로 근처에 소련의 동맹인 불가리아 공군의 MiG-17 정찰기가 추락해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게다가 사일로는 고사하고, 개방형 런치패드에서 발사되는 형태라 소련군의 핵폭격 또는 재래식 폭격에 매우 취약했다. 결국 철수된 주피터 미사일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고, 1963년 이후부터 폐기 절차를 밟게 된다. [60] 앞서 말했지만 이탈리아의 아민토레 판파니 총리는 주피터 미사일의 협상용 철수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61] 특히 흐루쇼프는 자주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해 케네디를 골탕먹이곤 했는데 막상 핵전쟁 위기가 들이닥치자 유약한 태도를 보인 것이 컸다. [62] 흐루쇼프의 무기력함에 실망한 브레즈네프와 그의 트로이카의 미국에 대한 보복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브레즈네프 또한 닉슨과 함께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체결한다. [63] 1970년대 이후 소련의 ICBM 숫자가 미국을 뛰어넘는 기염을 토해냈지만 기술 격차로 인해 공산오차가 미국의 ICBM에 비해 형편없었고, 제1격 시 미국의 ICBM 사일로를 격파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소련의 SS-17, SS-18, SS-19 ICBM들은 MIRV로 선회하게 되었다. [64] 이후에도 우발적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사건은 수 차례 있었지만, 이 사건만큼 위험한 경우는 없었다. [65] 쿠바는 방사능 오염지대가 되어 법적으로는 스페인의 소유권이 된다. [66] 케네디는 실제 역사대로 비둘기파였는데, 매파 장군들이 명령불복종을 해서 확전이 되었다. 케네디와 참모들이 핵으로 전멸하자 매파에서는 책임을 모두 케네디에게 돌리는 역사 왜곡을 벌였다. [67] 참고로 주인공 역(케니스 오도넬. 그 역시 실존인물이긴 한데 케빈 코스트너와는 안 닮았다)인 케빈 코스트너를 제외하고 나머지 등장인물은 실존 인물 역이라 비슷한 인상을 가진 배우들로 캐스팅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배우 중에서 그렇다는 의미. [68] 엑스맨 실사영화 시리즈에서 인간의 뮤턴트화에 영향을 끼치는 두 가지가 방사능과 스트레스라고 묘사되었는데, 방사능의 경우 콜로서스가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온 몸이 강철로 변하는 뮤턴트로 태어나게 되었다. [69] 해당 화물선의 선원들은 이미 세바스찬 쇼의 수하 아자젤에 의해 전원 끔살당하고 아자젤의 통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련 함대에서도 미군 측에게 '우린 화물선의 통제권을 잃었다. 화물선에게 정선 명령을 내렸으니 발포하지 마라.'고 통신을 보내고 있었지만 당연히 미군은 이를 소련의 거짓말로 생각해서 믿지 않고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70] 세바스찬 쇼의 능력이 에너지 흡수 및 방출이기 때문. 핵잠수함의 원자로의 에너지를 흡수하면 스스로가 걸어다니는 핵폭탄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어진다. [71] 사실 이는 지어낸 역사로, 실제로는 현실과 동일하게 쿠바 위기에 그쳤다. 그러나 핵전쟁에 비견되는 전쟁이 일어나는 비극을 맞는데…자세한 건 문서 참고. [72] 실제로 게임상의 시기적으로도 유사하다. [73] 전통적으로 C&C 시리즈에서 핵 사일로 등의 슈퍼무기는 하나만 건설할 수 있다. 제너럴은 제외. [74] 물론 소코로프가 개발하고 있었던 병기 해당 병기체계가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가진 병기체계의 개념을 따진다면 단지 소코로프를 돌려받기 위해서였다는 이유는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전쟁의 판도 자체를 뒤엎는 전략무기를 개발하는 과학자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