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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밀러 | 로이드 오스틴 | |||
← 역대 미합중국 전쟁부장관(육군장관) | }}}}}}}}} |
<colbgcolor=#176183><colcolor=#fff> | |||
본명 |
로버트 스트레인지 맥나마라 Robert Strange Mcnamara |
||
출생 | 1916년 4월 1일 | ||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 |||
사망 | 2009년 6월 6일 (향년 93세) | ||
워싱턴 D.C. | |||
묘소 | 알링턴 국립묘지 | ||
재임기간 | 제8대 국방장관 | ||
1961년 1월 21일 ~ 1968년 2월 29일 | |||
서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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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6183><colcolor=#fff> 자녀 | 3명 | |
학력 |
UC 버클리 (경제학 /
BA)[1] 하버드 대학교 ( MBA) |
||
정당 |
(1978년까지) (1978~2009)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
1940년 ~ 1946년 | |||
최종 계급 | 중령 (미합중국 육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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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기업인, 관료.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시절인 1960년대 미 국방부 장관으로 재임했으며, 해당 기간 동안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 전쟁 등을 치렀다. 재임기간도 총 7년 30여일에 달하여 미 국방성 역사상 최장수 재임 장관의 기록도 갖고 있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냉전 시대의 미국을 대표했던 국방장관으로 평가된다.
또한 포드 재직 시절의 업적 등으로 인해 합리적인 경영의 귀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라 기업경영을 연구하는 이들도 맥나마라의 경영철학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후술할 포드 자동차 시절의 업적으로 미국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을 정도.
2. 젊은 시절
191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2] 존 F.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할아버지 대에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미국 매사추세츠, 다시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가문. 미들네임 'Strange'는 어머니의 성씨다.[3]1937년 UC 버클리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 MBA를 거친 뒤 고향에서 회계사[4]로 일하다가 하버드로 돌아가 최연소 겸 최고연봉 조교수로 근무했다. 주요 업무는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장교들에게 경영학적 분석기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1943년 아예 육군 항공대 대위로 임관하여 통계분석에 나섰다.
직접 전투기나 폭격기를 조종하거나 하는 임무는 아니었지만 맥나마라는 이 시기 육군 항공대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에게 군에서 맡긴 업무는 폭격기 부대의 공습에 있어 효율성을 분석하는 것이었고, 맥나마라는 폭격기 부대에 만연하던 비효율성의 해결을 추진하였다. 맥나마라는 B-17 대신 B-29를 대대적으로 도입하여 커티스 르메이의 제21폭격기사령부가 일본 본토 공습, 도쿄 대공습을 진행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에 일조했다.
폭격 부대가 유럽과 일본에서 불벼락을 내리는 데에 있어서는 맥나마라의 날카로운 분석이 매우 큰 역할을 하였기에 후방에서 펜대만 굴릴 것 같은 非조종 장교로서는 이례적으로 1946년 공로 훈장(Legion of Merit)을 받고 중령으로 전역했다. 비교적 짧은 군생활이었지만 미국이 총력전에 나서던 시기에 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접한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그가 추진한 미국의 국방과 안보 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포드의 중흥
|
1946년 전역한 맥나마라는 처음에는 하버드 대학으로 돌아가 연구활동을 하려 했으나, 친구의 권유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포드에 입사하였다. 그 당시 포드의 고위관리자 1000명 중 대졸자는 10명에 불과하였으므로, 포드는 지식을 갖춘 전문 경영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군에서 만난 텍스 손튼이 주도한 10명의 통계분석팀의 일원으로 포드에 입사 원서를 냈고 시험[5]을 거쳤다. 맥나마라의 증언에 의하면 이 10명의 일원들은 역대 최고점수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헨리 포드 2세는 이들 전원을 채용했다.
그리고 맥나마라는 업계에서 침체에 빠져 있던 포드를 구시대적인 기업 구조 차원에서부터 싹 뜯어고치기 시작했고, 그 개혁은 성공하여 이들은 Whiz Kids로 불렸다. 또한 마케팅 면에서도 개혁을 일으켰는데, 1950년대에 주력으로 삼았지만 쓸데없이 부담스러운 포드 링컨 시리즈 대신 작지만 생산비가 저렴하여 가격 경쟁에 유리한 포드 팰컨 세단[6]을 히트작으로 키워냈고, 링컨 컨티넨탈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렇게 포드의 중흥을 이끈 맥나마라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960년 11월에는 44세의 나이에 포드 가문 外 인사로는 최초로 사장까지 올랐으나, 사장 취임 한달 만에 미국 국방장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4. 국방장관 재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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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
사장까지 올랐던 맥나마라는 사장 취임 한 달 만에 뜻 밖의 제의를 받는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이을 대통령 당선자인 민주당 출신 존 F. 케네디가 차기 행정부 인선에서 그를 국방장관으로 앉히려 한 것이다. 원래 케네디는 제4대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러벳을 재기용하고 맥나마라에게는 재무부 장관직을 제안하려했지만 오히러 러벳이 맥나마라를 대신 천거했다.
JFK의 이런 제안을 받고 이어진 면접에서 맥나마라는 질문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온갖 질문을 던져가며 JFK와 설전을 벌였다. 당초 케네디는 맥나마라가 포드의 사장임을 높이 사 재무장관을 제의했으나 사양하자, 이어 국방장관을 제의했다. 맥나마라가 재차 사양하자 케네디는 "나도 대통령 전문 학교 같은 곳을 안 나오고도 이렇게 대통령이 되었다"다며 계속 권유했고, 결국 맥나마라도 마지못해 수락했다.
JFK는 그를 매우 신임하여 단순한 국방에만 치우치지 않은, 경제 정책 등에 대해서도 그에게 많은 조언을 구했다.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역시 그와 매우 친한 사이가 되어 당초 공화당을 지지했던 맥나마라임에도 민주당의 RFK가 이후 대선행보에 나설 때 지원을 했으며 1968년 6월 RFK마저 사망한 후에는 관을 운구하기도 했다.
4.1. 펜타곤의 개혁
맥나마라가 국방부에 부임하기 전인 1950년대부터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점입가경으로 치닫으며 핵 만능주의와 미사일 만능주의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맥나마라는 2차 대전 때부터 프로파간다 뒤에 가려진 미군의 비효율적인 면모를 접했고,[7] 소련과의 격돌을 대비한다는 미명하에 온갖 터무니없는 무기 개발과 노스우즈 작전 같은 계획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려는 군대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 상황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로 홍역을 겪은 뒤, 맥나마라는 군 개혁에 나섰다. 군부와 정보기관의 기강을 다시 다질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맥나마라가 가진 권한은 돈줄을 막는 길밖에 없었고, 핵전쟁의 공포에서 간신히 벗어난 미국민들의 평화요구와 경제 안정을 위해서라도 안보를 위해 돈을 써야 한다는 핑계로 군이 많이 가져가는 예산을 줄이기 위해 우선 쓸데없이 복잡해서 행정적인 비용부터 새어나가던 군용기의 명명규칙부터 통일했다. F2H 밴시, F9F 팬서 같은 이름들은 공군과 유사한 방식으로 명명규칙이 통합되었다.
해군과 공군이 같은 항공기를 운용하기 싫어하는 상황 또한 국방 예산을 낭비시키는 원인으로 보고 해/공군 통합 전투기 개발에 착수, F-111, F-4를 도입시켰으며, 중구난방이던 미 육군 제식소총 프로젝트도 손 보기 위해 스프링필드 조병창도 강제로 해산시키고 돈먹는 하마였던 SPIW와 시대착오의 결정체인 M14 소총을 정리하고 M16 소총을 제식소총으로 선택했다. 인종차별이 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종구별이 성행했던 당시 미군에서 실질적인 인종 통합을 꾀하기도 했다.
1960년대와 그 이후 미군의 각종 정책에 있어 이런 맥나마라의 가성비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개념은 기본 중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에 미 해군의 엘모 줌왈트가 추진했던 확장성 좋고 많이 생산해낼 수 있는 대규모 수상함대의 개념 역시 맥나마라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국방정책을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4.2. 유연반응전략의 도입
냉전 초기인 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의 미국은 소련의 거대한 재래식 군사력으로부터 서유럽을 방어하기 위해, 어떠한 재래식 침공이든 핵무기를 통해 억지, 제압한다는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 전략을 표방했다. 소련이 1949년 핵무기를 개발하긴 했지만 양적, 질적으로 여전히 미국이 우세였고, 특히 미국 본토가 여전히 핵공격으로부터 안전지대에 있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핵 만능주의와 다양한 전술핵무기 개발, 배치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하지만 1950년대 말 스푸트니크 위성의 발사 성공으로 소련이 ICBM을 통해 미국을 직접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대량보복 개념의 핵전략은 수정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에 맥나마라는 소련의 침공에 처음부터 핵무기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재래식 무기를 1차적으로 동원하면서, 이후 확전 여부에 따라 유럽 전장을 대상으로 하는 전술핵무기, 그리고 소련을 직접 겨냥하는 전략핵무기 순서로 대응하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했다. 이를 '유연반응'(flexible response) 전략이라고 한다.
맥나마라의 유연반응전략에 따라 미국은 폭격기 중심이었던 기존의 핵전력을 지상 배치 ICBM, 원자력 잠수함에서 탑재, 발사되는 SLBM으로 구성되는 제2격 보복능력 중심으로 재편하기 시작했다. 미니트맨, 폴라리스가 이때의 작품. 이후 1970년대에 소련도 비슷한 구조의 핵 반격능력을 갖추면서 미소 양국간의 상호확증파괴가 성립될 때까지, 유연반응전략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의 핵전략으로 지속되었다.
4.3. 쿠바 미사일 위기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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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미사일 위기 극복을 위해 애쓰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맥나마라 |
그 와중에 쿠바 미사일 위기이 닥치고, 미국 수뇌부가 혼란으로 치닫는 와중에 맥나마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말을 중히 여기며 저 미사일들은 군사적 위협이 아니라 정치적인 위협이라고 주장, 군사적인 대응을 주장하던 NSC의 ExCom 위원들 사이에서 확전을 반대하고 쿠바 영해 봉쇄를 주장했다.
그는 전군을 준전시태세로 대기 시키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라디오로 주장하던 터키의 중거리 탄도탄 철수를 받아들이는 대신[9] 막 개발된 SLBM UGM-27 폴라리스를 보내자는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으며 매파의 목소리가 컸던 ExCom과 합동참모본부을 휘어잡는 리더십을 발휘,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치닫던 인류사의 흐름이 빗나가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4.4. 베트남 전쟁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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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맥나마라는 JFK의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자신 스스로 훗날 후회할 결정을 내렸다. 오늘날 맥나마라에 대한 비판은 8할 이상이 베트남 전쟁에 관한 것이며, 이는 맥나마라의 흑역사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남베트남이 상상 이상의 막장이었음을 알고도 도미노 이론에 지레 겁먹어서 통킹만 사건 같은 작은 일에 본격적인 개입에 나섰고, 돈만 들이고 효과는 미미했던 롤링썬더 작전은 역사가들이 훗날 그에 대한 평가를 낮게 보는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맥나마라도 초창기에는 베트남 전쟁 개입을 반대하다가 결국 찬성 쪽으로 돌아섰는데, 계속해서 돈은 들이는 데 효과가 없으니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피력하려 했지만, 린든 B. 존슨 행정부에서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10] 줄창 불벼락을 내려댔다. 단적으로 공산권에서 계속 들어오던 전쟁수행 물자나 각지에 산개한 북베트남 산업시설의 분포도만 봐도 폭격으로 북베트남의 전쟁수행 능력을 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LBJ 행정부에서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줄어들었고, 1968년 2월 29일 클라크 클리퍼드에게 바통을 넘기며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말년에 사이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7년의 재임기간은 역대 미 국방장관 중 최장기 집권이었으며, 퇴임하며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맥나마라가 유일하게 건진 긍정적인 성과는 M14 소총을 제식 소총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M16 소총을 도입한 것이다. 국방장관 재임 당시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했던 커티스 르메이와 의견이 일치한 유일한 안건이었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하위 지능자를 입대시키는 Project 100K[11]를 제안했으나, 이렇게 뽑힌 미군 병력들은 베트남의 최일선에서 동료 미군 장병들에게 'McNamara's Follys(맥나마라의 바보들)', 'McNamara's Morons(맥나마라의 머저리들)'이라는 경멸을 받으며 결과적으로 크나큰 실수로 평가 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장애인 징병 문서의 미국 항목을 참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맥나마라는 베트남 전쟁 종전 20년 후에 회고록 「베트남전쟁의 비극과 교훈」을 내면서 미국이 실수했고, 자신이 잘못된 전쟁을 일으켰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 자서전에서 ‘베트남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 몸서리치게 잘못된 전쟁이었다(Vietnam war was wrong, terribly wrong)’라고 말하며, 베트남전쟁이 방향도 잃고 목표도 없는 전쟁으로 끝났다고 스스로 비판했다.
5. 세계은행 총재
퇴임 후 그는 세계은행 총재에 올랐고, 베트남 개입을 고집하던 린든 B. 존슨 대신 로버트 F. 케네디를 지지하며 LBJ와 거리를 두려 했지만 RFK가 갑작스레 암살당하고 리처드 닉슨이 집권하며 정계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대신 그는 세계은행 총재로서 그는 부의 불평등 해소와 문맹 퇴치, 교육, 보건 등 빈민 구제가 우선임을 역설, 투자와 고도성장을 우선시하던 기존 세계은행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1981년까지 오랫동안 재임하였지만 함께 문맹 퇴치 운동을 하던 아내 마거렛 크레이그와 사별하고 급격히 쇠약해지며 은퇴하였다.6.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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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에는 베트남 전쟁기 북베트남의 명장 보응우옌잡 장군과 회동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미국 현대사의 가장 큰 이슈였던 핵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에서 얻은 교훈으로 반전/반핵 운동에 투신하였다. 1990년대 베트남을 방문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통일 베트남의 고위층들과 회담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기도 했었다.
당신들은
베트남인 340만 명이 희생된 게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이는 미국 인구로 비교하자면 2,700만 명과 맞먹습니다. 그럼 당신들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다큐멘터리 영화 전쟁의 안개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전쟁의 안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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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중문화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인 'D-13(2000년 작. 원제: Thirteen days)'에서 로버트 케네디로 대표되는 온건파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여 강경대응을 주장하는 군부와 대립한다.[12] 미국 배우 딜런 베이커[13]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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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에서도 국방부 장관으로 등장하는데, 보르쿠타의 지옥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알렉스 메이슨을 대통령에게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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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안개 (원제: Fog of War)라는 에릴 모리스의 2003년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을 하였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더 포스트에서 비중있게 등장한다. 그가 국방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작성을 지시한 펜타곤 페이퍼가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폭로되어 곤혹을 치른다. 배우는 브루스 그린우드.[16]
포드 V 페라리에서도 포드 경영진 중 하나로 잠깐씩 등장한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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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장관 | 로버트 F. 케네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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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장관 | 딘 러스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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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장관 | 로버트 맥나마라 → 클라크 클리포드 | |
법무장관 | 로버트 F. 케네디 → 니콜라스 카첸바흐 → 램지 클라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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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장관 | 스튜어트 우달 | |
농무장관 | 오빌 프리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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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장관 | 앨런 S. 보이드 | |
주유엔대사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 아서 골드버그 → 조지 볼 → 제임스 러셀 위긴스 |
}}} }}}}}}}}} |
[1]
부전공은
수학과
철학
[2]
그의 증언에 따르면 첫 기억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스페인 독감이 퍼졌던 미국의 모습이었다. 이 얘기는 2004년 그를 인터뷰했던 다큐멘터리인 '전쟁의 안개'에서 확인 가능하다.
[3]
비슷한 사례로 역시 아일랜드계인 존 F. 케네디도 미들네임인 피츠제럴드(Fitzgerald)는 그의 어머니의 성씨에서 딴 것이다.
[4]
현재 세계최대의 경영 컨설팅그룹이자 회계법인으로 유명한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PWC)에서 재직했다. 한국의 삼일회계법인도 계열사에 포함되어 있다.
[5]
시험 문항 중에는 "플로리스트와 광부 중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문항이 있었는데, 맥나마라는 플로리스트 경험도 있었고 그 일을 좋아하였지만 높은 점수를 위해 광부가 되고 싶다고 거짓 답안을 썼다고 한다...
[6]
포드 머스탱의 베이스 모델이 되었다.
[7]
소구경 저위력탄 자동 소총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시기에
M1 개런드의 화력에 경도된 미군 수뇌부가 저위력탄을 무시하고 고위력인
7.62×51mm NATO탄을 밀어붙이는 일이 있었다.
[8]
노스우즈 작전 보고서가 제복 군인들의 결재는 다 통과해서 맥나마라 앞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이것은 증명이 된다.
문민통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9]
당시 터키에 배치된 중거리 탄도미사일은 이미 기술적으로 노후화되어 있어서 쿠바 미사일 위기 이전부터 미국이 철수를 검토 중이었다. 다만 사건 당시에는 '소련의 압력으로 동맹을 저버렸다'는 지적을 받지 않으려고, 소련의 미사일이 쿠바에서 철수한 지 수개월 후에야 터키의 미사일도 철수했다.
[10]
물론
남베트남이 하도 막장이라 LBJ로서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긴 했다. 또한, 국내 정치적으로도 남베트남을 쉽게 포기해버리면 그것이 미국의 보수 반공주의자들을 자극해 제2의
매카시즘이 발흥할 것이라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참전할 수 밖에 없다고 후일 존슨이 밝히기도 했다.
#.
[11]
100K는 10만을 뜻한다.
[12]
극 초반 쿠바에 배치되는 소련 미사일에 대한 대응 논의가 선제공습의 찬반 여부로만 흘러가던 와중에, 맥나마라가 해상 봉쇄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13]
훗날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에서
커트 코너스 역을 맡았다.
[14]
영화는 린든 존슨이 1964년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부터, 1968년
구정 공세 직후까지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린든 존슨 대통령이 구정공세로 인한 베트남 전쟁 수행의 실패를 인정하며 재선을 위한 1968년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는 TV 연설 모습이다.
[15]
공교롭게도 이 넷은 모두 냉전 시대를 언급할 때 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자 서로 접점이 있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정권 당시 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 카스트로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이를 토대로 그의 위험성을 보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권 교체 이후 케네디와 맥나마라는 쿠바 상륙작전을 무리하게 벌이다 실패했지만 카스트로 치하의 쿠바에 소련 미사일이 배치되는 것을 막았다. 이후 맥나마라에 의해 미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 베트남 전쟁은 대통령으로서 정계에 돌아온 닉슨이 발을 빼며 남부 베트남의 패배로 끝났다. 한편 임기가 비정상적이었다는 것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다. 케네디는 암살, 닉슨은 탄핵 직전 자진 사임, 맥나마라는 중도 해임(그러나 미 국방부 장관들 중에서는 최장기간 자리에 있었다), 카스트로는 장기 독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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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위에서 언급된 영화 D-13에서는
케네디 대통령 역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