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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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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골국[1]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Yeke Mongɣol Ulus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svg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흰색.svg 파일:몽골 제국 국새 인영.svg
문장[2] 국새[3]
ᠮᠥᠩᠬᠡ ᠲᠩᠷᠢ ᠶᠢᠨ ᠬᠦᠴᠦᠳᠣᠷ᠂ ᠶᠡᠬᠡ ᠰᠤᠤ ᠵᠠᠯᠢ ᠶᠢᠨ ᠢᠭᠡᠭᠡᠳᠣᠷ᠎
영원한 하늘의 힘 아래, 위대한 힘의 가호 아래[4]
파일:몽골 제국 위치.svg
최전성기 지도
1206년~1635년 (429년)[5]
성립 이전 분열 이후
나이만
타타르 차가타이 칸국
케레이트 일 칸국
메르키트 오고타이 칸국
카마그 몽골 킵차크 칸국
위치 <colbgcolor=#fff,#191919> 아시아, 동유럽
수도 아보르고([ruby(ᠠᠪᠣᠷᠭᠤ, ruby=aburɣu)]) : 1206–1235
카라코룸([ruby(ᠬᠠᠷᠠᠬᠣᠷᠣᠮ, ruby=qaraqorum)]) : 1235–1260
칸발릭(대도)([ruby(ᠬᠠᠨᠪᠠᠯᠢᠭ, ruby=qanbaliɣ)]), 샤나도(상도)([ruby(ᠱᠠᠨᠠᠳᠣ, ruby=šanadu)])[6] : 1271–1368
카라코룸 ([ruby(ᠬᠠᠷᠠᠬᠣᠷᠣᠮ, ruby=qaraqorum)]) :1368-1635
정치 체제 봉건군주제, 예케 쿠릴타이([ruby(ᠶᠡᠬᠡ, ruby=yeke)] [ruby(ᠬᠤᠷᠢᠯᠳᠠᠢ, ruby=qurildai)])
국가 원수 카간([ruby(ᠬᠠᠭᠠᠨ, ruby=qaɣan)])
( 몽골 제국/역대 대칸 참조.)
언어 중세 몽골어, 중고한어, 중세 한국어, 고대 동슬라브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 아랍어
민족 몽골인, 점령지의 피지배 민족들
면적 약 24,000,000km²(1309년 기준)[7]
종교 텡그리, 불교, 이슬람, 경교
통화 발리쉬,[8] 교초, , , 디르함
주요 사건 1206년 칭기즈 칸, 몽골 제국 건국
1271년 제국 분열
1368년 토곤테무르 칸, 칸발릭 상실
1388년 테구스테무르 칸 암살[9]
1388년 예수데르 칸 즉위[10]
1449년 토목의 변 발발
1453년 에센 타이시 대칸 즉위[11]
1487년 다얀 칸 주도 6투먼 성립
1550년 경술의 변 발발
1634년 링단 칸 사망
1635년 후금에 병합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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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언어별 명칭
중세 몽골어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12]
현대 몽골어 Их Монгол улс[13]
1. 개요2. 상세
2.1. 올로스 체제
2.1.1. 올로스의 정의2.1.2. 씨족과 부족2.1.3. 10진법 기반 체계2.1.4. 올로스 복합체2.1.5. 올로스 간의 연대2.1.6. 4칸국 등장 배경2.1.7. 직할령으로서의 원나라
2.2. 팍스 몽골리카
2.2.1. 역참 제도2.2.2. 세계사의 등장
3. 군주
3.1. 역대 대칸3.2. 호칭3.3. 칸과 카간
4. 군사5. 법률6. 역사
6.1. 칭기즈 칸 이전6.2. 칭기즈 칸 시대6.3. 전성기
7. 전쟁과 복속
7.1. 정복활동의 의의7.2. 정복지 통치 방식7.3. 점령 실패 사례7.4. 복속 및 내정간섭 사례7.5. 여몽 관계
8. 쇠퇴
8.1. 쇠퇴 원인8.2. 칭기즈 칸계 계승 제국8.3. 기타 관련 민족 및 제국
9. 각국에서의 이미지10. 말말말11. 기타
11.1. 이집트 몽골인 술탄11.2. 대중문화에서 외면받는 역사11.3. 영토 크기11.4. 대영제국과의 차이11.5. 여담11.6. 관련 저서11.7.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대몽골국(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예케 몽골 올로스), 통칭 몽골 제국 1206년 몽골이 건국한 초거대 육상 유목 제국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제국이자 황제국이다. 당대 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 세력을 평정하며 '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를 일궈내어 세계사의 판도를 크게 바꾼 대제국으로 알려져 있다.

2. 상세

몽골 제국은 13세기에 건국된 이래 자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 등지에서 정복활동을 벌여 제국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전쟁사를 갈아치운 역사를 상징하는 대제국이었다. 당시 서쪽 끝으로 오스트리아에서부터[14] 동쪽 끝으로 극동 북극 문화권인 사할린까지,[15] 나아가 남쪽 끝으로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까지[16] 몽골 제국군의 침략을 받지 않은 곳은 구대륙에서 인도의 중남부와 동남아시아 일부, 서유럽, 북유럽 등의 몇몇 국가 정도뿐이다.[17]

단기간에 정복으로 세워진 거대 제국이라는 점에서 프랑스 제1제국, 헬레니즘 제국과 흔히 비교되기도 하지만, 한 세대 만에 붕괴한 이들에 비해 훨씬 더 큰 규모로 몇 백 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팍스 몽골리카'로 알려진 몽골 중심의 패권을 구대륙에서 유지했다. 실제로도 몽골 제국의 발흥 이후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이 더 활발해졌으며, 동양 서양이 모두 한 나라에 속하게 되어 이동이 수월[18]해졌다. 이슬람 역사가인 아불 가지(Abu al-Ghazi)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하고[19] 말하기도 했다.

몽골 제국은 후대에 중앙아시아에서 투르코-몽골(Turco-Mongol)[20] 문화를 형성하면서 또다시 티무르 제국[21]에서 남아시아의 무굴 제국[22]에 이르는 대제국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서양에서는 몽골이 벌인 생물전 중세 흑사병 유럽에 퍼지게 한 가장 큰 원인으로 보고 있다.[23] 또한, 대항해시대가 열리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유럽인들에게 아시아를 처음으로 소개한 동방견문록이 꼽히기도 한다.

몽골 제국으로 인해 널리 알려진 몽골(Mongol)이라는 민족명은 몽골로이드(Mongoloid)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배경이 되었다. 현대 몽골도 정식 국호는 '멍걸 올스(Монгол улс)'로, 사실상 800년전과 똑같은 국호를 쓰고 있다.

2.1. 올로스 체제

2.1.1. 올로스의 정의

칭기즈 칸이 속한 보르지긴 씨족은 일반적인 씨족 개념의 집단이 아닌 칭기즈 칸이 속한 가족과 그 지배를 받는 혈연적으로 무관한 다종다양한 유목민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그것이 ‘보르지긴 오복’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가문의 지배그룹이 보르지긴이라는 이름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복들 여럿이 모여 하나의 부민을 형성하였기에 올로스는 친족과 무관한 집단이었다. 오복이 그러하듯이 올로스도 일종의 “머리 없는 국가”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상호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쟁하기도 하면서 일정 지역 안에 공존하는 오복들의 집합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몽골 제국의 공식 국호인 '예케 몽골 올로스'의 뜻을 풀이해보면 대(大)몽골 부민(部民)이라고 볼 수 있다.

2.1.2. 씨족과 부족

몽골 제국사에 자주 등장하는 씨족과 부족이라는 개념은 국가에 의해서 규정되고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흔히들 씨족과 부족이라고 부르는 집단은 어느 특정한 혈족과 종족이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단위일 뿐 결코 친족 조직이 아니[24]었다.

따라서 씨족, 부족은 귀족제의 원리가 관철되는 조직이었고 중앙집권 국가의 부재 상황에서도 국가와 유사한 정치관계에 의해 작동되는 조직이었다. 이를 “머리 없는 국가”라고 부르고 가문[25]이라고도 부른다. 가문은 가족 외에 다른 객식구도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칭기즈 칸 이전 몽골 초원의 '오복'과 '올로스'[26]도 실은 가문사회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규모에 차이가 있을 뿐 “머리 없는 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체제는 고대 서양의 귀족정과 일맥상통한다.

2.1.3. 10진법 기반 체계

1206년 몽골 제국의 시조인 칭기즈 칸은 몽골 초원을 통일한 뒤 몽골을 구성하는 95개의 천호(千戶)를 조직하고 그것을 지휘할 88명의 장(長)을 임명하였다. 각각의 천호는 다시 백호(百戶)로, 백호는 다시 십호(十戶)로 나누어 각각의 장(長)을 임명하였다.

오늘날의 군대 조직과 비교하면 백호는 중대(약 100명) 규모이고, 천호는 대대(약 450명)보다는 크고 연대(약 2천 명 미만)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95개의 천호에서 9만 5천의 병력이 차출된다고 가정할 시 1개 사단이 1만 5천 정도이므로 대략 6 ~ 10개의 사단 규모가 된다. 즉 당대 기마병으로만 구성된 6 ~ 10개 사단이 출현한 것이다. 이들 95개의 천호는 좌익, 중군, 우익 3개의 만호(萬戶)에 배속되어 몽골 전역에 배치되었다. 칭기즈 칸의 아시아 정복을 뒷받침한 군사력은 백호 천호로 그것은 여진족 대금(大金)의 맹안모극(猛安謀克)의 경우와 똑같이 몽골의 부족을 10진법적인 군사행정조직으로 편성한 것이었고 천호백호 장은 칭기즈 칸에게 충성을 서약하여 그 신임을 얻은 장령이 임명되었다. 이 장령들의 지위는 세습되어 칭기즈 칸의 일족과 함께 몽골 제국의 귀족을 형성하고 칭기즈 칸 일족과 군신관계를 형성하였다.

2.1.4. 올로스 복합체

파일:1280px-OljeituToPhilippeLeBel1305.jpg
1305년, 일 칸국의 올제이투 칸이 동맹이었던 프랑스 왕국 국왕 필리프 4세에게 보낸 외교 서신[27]

흔히 몽골 제국이 1260년을 기점으로 '분열'되었다는 방향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칭기즈 칸이 건설한 몽골 제국은 처음부터 여러 올로스로 이루어진 복합체였으며, 각각의 올로스는 여러 유목민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올로스를 지배하는 건 칭기즈 칸의 일족인 카간 일족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농경 지역을 정복하고 정주민들을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 후 전쟁이 확대되고 정주지대가 몽골 제국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자 카간은 정복의 성과를 일족에게 나누어 공동으로 향유한다는 정신에 따라 이를 일족들에게 분배하였다. 하지만 정주지대의 주민들을 관할하고 그들에게 징세하는 건 카간의 독점적인 권한이었다. 즉 정주지대는 카간의 직할령이었다. 정주지대는 올로스의 칸의 관할권에 속해있지 않았기에 칸들은 카간의 재정수입 가운데 자신의 몫을 건네받았다.

이를 통해 유목민들은 칭기즈 칸 일족이 지배하는 여러 올로스로 나누어졌지만 농경민족들은 카간의 일원적인 지배하에 놓였다. 그것은 다수의 올로스라는 분권적 측면과 농경지대에 대한 단일지배라는 중앙집권이 공존하는 지배형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농경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카간과 각 올로스 지배자 사이에서 갈등을 빚었다. 올로스 지배자들은 직접 농경지대를 관할하기를 바랐고 이런 경향은 시대가 지날수록 강해졌다. 몽케 칸 사후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를 두고 벌어진 갈등은 그런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쿠데타로 집권한 쿠빌라이 칸은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에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자 카간의 고유권한이었던 정주지대에 대한 관할권 위임을 약속했다. 이를 통해 몽골 제국은 유목민과 농경민을 동시에 장악하고 지배하는 여러 올로스로 나누어졌다. 아울러 실권이 약화된 카간에 대한 정치적인 독자성도 강화되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의 통치 이후에도 大 몽골 올로스는 변함없이 여러 올로스의 복합체였고 4대 올로스 이외에도 다른 올로스들이 다소 분포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칸의 직할령인 대원大元 올로스보다 동쪽에 있던 칭기즈 칸 동생 일족인 동방 3왕가는 1287년 반란을 겪기 전까지 직할령이 아니었다. 또한 유라시아 서부 초원에는 주치의 여러 후손들이 지배하던 올로스가 있었고 킵차크 칸국은 그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중앙아시아에도 차가타이 오고타이의 후손이 지배하는 여러 올로스가 있었다. 따라서 단일 제국이 1260년을 기점으로 4개로 분열되었다는 것은 실제 사실과 전혀 다르다.

2.1.5. 올로스 간의 연대

시대가 지나면서 각 올로스에서 자체적으로 칸을 추대하는 등 통합이 약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연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카간은 여전히 하나뿐이었고 칸들은 명목상일지라도 그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카간이 즉위하면 여러 올로스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그 사실을 알렸고 칸들도 즉위하면 카간에게 사신을 보냈다. 카간은 중국에서 거두어지는 재정의 일부를 여전히 칸에게 보냈고 칸 또한 올로스에서 거두는 수입의 일부를 카간에게 보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국의 통치자들이 모두 ‘칭기즈 칸의 일족’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몽골 제국은 느슨한 올로스 간의 연맹으로서 제국의 연대감과 일체성을 보존하고 있었다. 이 일체성이 이들 간의 활발한 교류를 가능케 하였고 수 세기 동안 명맥이 끊어진 실크로드가 다시금 활발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2.1.6. 4칸국 등장 배경

파일:몽골4제국.jpg

칭기즈 칸은 1219년부터 1225년까지 남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에, 서로는 카스피 해를 넘어 러시아 남부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전역을 거의 지배하에 두고 1227년 서하를 정복하였다. 서하는 중국사 오호五胡 중 하나로 티베트의 전신인 강족(羌族)의 또 다른 분파가 중국과 중앙아시아 사이에 세운 대하(大夏)라는 나라였다. 제2대 오고타이 칸은 1234년 숙원이었던 대금(大金) 완전 멸망을 성공시키고 하河를 석권하였으며 그 원정군은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뻗어나갔다. 제4대 몽케 칸은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켜 그 영역은 동으로는 동해부터 서로는 러시아 남부까지 이르렀다. 몽케 사후 뒤를 이은 쿠빌라이 칸은 1279년 중국 남송(南宋)을 멸망시켜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 이 광활한 영토는 몽골족 관습에 따라 여러 자제들에게 나누어졌다. 몽골 초원과 금나라가 있던 중국 북부는 황제의 직할령이 되었고 러시아 남부에서는 장남 주치의 아들 바투가 세운 킵차크 칸 국(훗날 투르크 동화), 서아시아에는 막내 툴루이의 아들 훌라구의 일 칸 국(훗날 이란 동화), 西 투르키스탄에는 차남 차가타이의 차가타이 칸 국, 東 투르키스탄에는 오고타이 칸 국의 4개 칸국이 들어섰고 그 밖의 지역도 칭기즈 칸의 일족과 귀족들에게 배분되었다. 그렇게 황제를 주축으로 하는 대제국 몽골 제국이 출현하였다.

2.1.7. 직할령으로서의 원나라

남송을 맡은 쿠빌라이 칸이 세력을 가지는 것을 경계한 몽케 칸이 직접 江으로 남하하는 원정에 참가하였지만 1259년 급사하였고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를 제압하고 몽골 제국 5대 카간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1279년 애산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어 남송을 멸망시키고 몽골 제국의 카간이자 동시에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 원나라란 몽골 제국의 올로스 가운데 카간 직할령인 올로스의 명칭을 대원(大元)으로 삼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영토의 확장 이후부터는 올로스 간의 대립과 병합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오고타이 칸국은 쿠빌라이 칸 치세에 몰락하여 흡수되었으며 여러 올로스들의 분열과 통합을 거쳐 1310년 무렵 우리들이 아는 4개의 대형 올로스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변함없이 소형 올로스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몽골 제국의 올로스 연합체라는 측면은 변화하지 않았다. 쿠빌라이 칸이 대원(大元)의 황제라서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대원(大元)이라는 명칭은 중국 왕조로 완전히 동화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大몽골 올로스에서 카간 올로스를 상징하던 올로스의 명칭을 구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일 뿐이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새로운 왕조인 대원을 선포하였으나 쿠빌라이 칸과 그 계승자들은 자신들이 대원이라는 중국의 천자임과 동시에 大몽골 올로스의 최고 지배자인 카간이라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28]

2.2. 팍스 몽골리카

2.2.1. 역참 제도

몽골 제국이 등장한 13세기 초부터 올로스들이 붕괴하는 14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올로스 내부와 그들 사이에는 혼란이 있었을지언정 유라시아를 무대로 한 교류는 몽골 제국 시대에 이르러 어느 때보다 거대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제국의 지배층이 그런 교류를 적극 후원했다는 점에서 팍스 로마나와 같은 팍스 몽골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거대한 교류를 가능하게 한 기반은 역참(驛站) 제도였다. 본래 참(站)의 기원이 된 몽골어 ‘잠’은 초원을 지나다 잠시 쉬어가는 여관을 말하는데, 오고타이 칸 시절부터 이것이 제국의 교통 네트워크로 채택되어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카라코룸은 도읍으로 정하고 서쪽의 주치 올로스, 차가타이 올로스와 연락을 하기 위해 역참 제도를 실시하였다. 또한 몽골 초원과 중국 북부에 ‘나린’ ‘모린’ ‘차도(車道)’의 세 역로를 설치하였다. 이후 제국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역참도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 부분을 연결하는 교통망으로 발전하여 올로스가 된 외국인 고려와 같은 나라에도 역참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쿠빌라이 시대에 이르면 카간 올로스 내부에만 1400여 개의 역참이 설치되었고 역참을 관리하는 참호(站戶) 또한 35 ~ 70만 호 저도가 배정되고 있었다. 배정되는 사람은 마필 선박 수레 등의 교통수단과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를 책임졌으며 식량과 사료를 항시 준비했다. 또 역참을 사용하는 자들에게도 규정이 있어 역참 사용자는 신분증인 패자와 포마차찰이라는 문건을 소지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일반 사무와 별개로 군사적인 긴급 사무를 신속하게 수행하기 위해 급체포라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 몽골 제국이 운영한 역참제도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경탄어린 어조로 상세히 묘사된 바 있다.

이런 네트워크는 유라시아 내륙교통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이 격화된 1280년대 말부터 10여 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원만하게 운영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사신의 왕래 이외에 군인 종교인 학자 기술자 등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원에서 훌라구 올로스로 파견되어 라시드 앗 딘의 집사 편찬을 도왔던 사람이나 훌라구 올로스에서 대원으로 파견되어 쿠빌라이 칸 휘하에서 중용되었던 자말 앗 딘 이사 등은 그런 올로스 간 다양한 교류의 구체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제정관리를 맡아 자본을 운영하던 오르톡 상인들의 존재 또한 팍스 몽골과 관련되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이들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원거리 무역을 수행하였는데 그들의 임무는 자신들에게 자본을 제공한 지배층에게 최대의 이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국에서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여 고액의 이자를 요구하는 알탈전을 운용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다른 한편으로 대륙 차원의 경제교류를 활성화시키고자 은 본위 제도를 시행하고 각 지역 간의 교환단위를 통일하기도 하였다. 은괴 2kg이 통일성을 가지는 하나의 경제단위로 통용되었다. 은 4g 40kg 단위도 마찬가지였다.

2.2.2. 세계사의 등장

이들의 존재는 세계사라는 개념의 창출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세계지도와 세계지리 세계사 관련서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이 시기부터였는데 15세기 초 조선에서 만든 세계지도에서는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까지 등장하는데 이는 과거 몽골 제국에게 전해들은 세계지식에서 기반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원제인 세계의 서술에서 웅변하듯이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자신의 여행을 통해 얻은 견문을 토대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찬술한 세계지리지이자 박물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쿠빌라이 칸을 만났는지, 그가 실존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이 책을 단순한 여행기나 견문록으로만 인식하였기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실질적인 의미의 세계사 관념이 이 때 나타난 것에는 의미가 있는데, 훌라구 올로스의 라시드 앗 딘이 편찬한 집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훌라구 올로스의 7대 칸이 카잔 칸의 명령에 따라 몽골 제국의 역사를 편찬하였는데 그의 뒤를 이운 올제이투 칸으로부터 3부로 구성된 집사를 만들었다. 1부에서는 몽골과 몽골 제국의 역사, 2부는 아랍 인도 유다 중국 프랑크 투르크 등 몽골 제국 등장 이전까지의 유라시아 세계사, 3부는 세계 각지의 지리적 특징과 도시 및 산천을 각각 설명하고 있다. 3부는 소실되어 알 수 없으나 1부와 2부는 지금도 남아서 이제까지 볼 수 없던 세계사라는 새로운 개념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에게 몽골 제국의 치세는 중국의 경제를 극도로 악화시켰고, 대명(大明)이 중국에서 몽골을 몰아낸 이후에도 이들은 존속하여 1449년 몽골 부족 중 하나인 오이라트 정통제를 포로로 잡는 토목의 변이 발생하고 1550년 몽골의 알탄 칸 이 북경을 포위해 경술의 변을 일으키는 등 중국을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이러한 조치는 중국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세계제국 하에서 최첨단 통상무역경제의 폐해를 접한 이들의 역설적인 구호를 통해 스스로 고립주의를 자초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였으며 팍스 몽골을 통해 득을 본 것은 어이없게도 서유럽이었다.

결론은 알려진 것과 달리 몽골 제국은 원나라 카간을 정점으로 한 느슨한 상호연대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몽골 제국이 봉건제를 유지한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학계 연구에 따르면 고려의 원간섭기 또한 카간 직속의 예케 몽골 올로스 중에 하나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몽골 황족은 남녀공통으로 자신의 지분(올로스)으로 생활을 영위했는데, 기존 고려의 왕실과 고려로 시집간 공주가 올로스의 지분을 나누어 가진 것이라고 한다. 단 고려는 어디까지나 고려 왕실의 것이었기에 공주는 자신의 지분을 별도로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사후 높여진 것이 제국대장공주 노국대장공주의 명칭의 실체였던 것이다. 여담으로 몽골 제국의 올로스 중에서 카간의 직계와 통혼한 외국 왕실은 고려 왕실뿐인데, 나머지 통혼은 칸의 후손으로 이루어졌으며, 청나라의 몽군기 보르지기트 씨족은 엄밀히 말해 칭기즈 칸의 동생인 동방 3왕가의 후손이다. 괜히 고려 왕실이 쿠릴타이에 참가하고 심왕 자리까지 받은 것이 아니다.[29]

만일 고려가 이 당시 올로스들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음이 사실이라면 1368년 주원장이 원 황실을 다시 고비 사막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했을 때 동시대의 고려인들이 이를 그다지 반기는 분위기가 없고 오히려 미래를 걱정하는 기록이 더 많았던 것 역시 자연히 설명이 되는데, 당시 고려인들 입장에서는 대륙을 차지한 명나라 군대가 고려에 대해서도 어떻게 나올지 도무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명나라가 이후 고려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아 별 사건 없이 넘어갔으나 당시를 살아가던 고려인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앞섰을 것이다.

3. 군주

3.1. 역대 대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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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대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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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호칭

역사적으로 북방 유목민족은 독자적인 군주 호칭이 있었다. 흉노, 선비족, 저족, 강족은 기원전부터 탱리고도선우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아내는 연지(閼氏)였으며 후계자는 좌도기왕(左屠耆王)이라고 불렀다. 탱리고도선우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몽골어 ‘텡그린 후후두 초노(하늘의 자손인 늑대)’를 음차했다는 추측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선우라는 왕명은 늑대를 뜻하는 ‘초노’에서 왔다는 뜻이 되는데, 늑대는 몽골 문화권에서 ‘하늘의 개(텡그린 노호이)’ 등의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신성시되어 돌궐(괵튀르크)의 깃발에도 그려질 정도로 숭배되었다.

하지만 흉노의 분열 이후 탱리고도선우를 자칭하는 자들이 난립하자 새로운 호칭이 필요해졌는데, 그때 카간[30]이라는 호칭이 나타난다. 그 이름은 ‘하늘의 지명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고대 제정일치 사회의 잔재를 보여준다. 비공식적으로 3세기 선비족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공식적으로는 5세기에 독립한 유연(柔然)이 사용한 것이 시초였다. 3-5세기 한반도 삼한 지배자들의 명칭에 주로 사용된 간(干)과 유사하여 고구려를 통해 만주로 수출되었다는 추측도 존재한다.

유연을 멸망시킨 돌궐을 통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돌궐은 군주는 大카간이라 불렀고 군주의 아들이나 친족을 小카간이라고 하였으며, 유목민족들은 당태종에게 天카간이라는 칭호를 바치기도 하였다. 동돌궐을 멸망시킨 위구르 제국, 동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설연타(薛延陀), 서돌궐이 사라진 뒤 흑해와 카스피 사이의 산맥을 주름잡은 하자르도 사용하였다. 하지만 840년 위구르 제국이 키르기스족의 침공으로 패망한 뒤 키르기스족은 몽골 고원 통치를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이후 몽골 고원은 공백이 되어 유목민을 통일해 카간이라고 불릴 만한 특출한 지배세력이 등장하지 않았다. 요나라 금나라는 동부에만 통치권을 행사하였고 그조차 간접통치였다.

3.3. 칸과 카간

칭기즈 칸 사후 칸이 되었던 오고타이 칸이 카간(ᠬᠠᠭᠠᠨ)의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본래 카간은 칭기즈 칸이 활동할 때까지도 몽골 초원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명칭이었다. 당시에는 이름 뒤에 칸(ᠬᠠᠨ)이라고 부르거나 새로운 칭호와 칸을 부르는 방식이었다. 즉 오고타이 칸이 카간의 호칭을 사용한 것은 기존의 형식과 다른 새로운 방식이었으며, 이는 몽골 제국의 최고 군주가 다른 유목국가의 군주와는 다르다는 관념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또 칭기즈 칸 사후 여러 칸이 난립하였기에 황제와 같은 지위가 된 몽골 최고 지도자에게는 새로운 호칭이 필요하였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카간이었던 것이다.

몽골 제국에서 카간은 오고타이 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지만 사후 일반명사가 되었다.[31] 칸과 카간은 유목민족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로 동일한 의미였으나 이후 카간은 수많은 칸을 거느리는 지도자를 뜻하게 되면서 중국의 황제와 같은 의미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몽골의 최고 지도자를 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칸이 몽골 전체의 지배자를 뜻하는 의미로도 사용된 것이 맞다.

이러한 명칭변화는 몽골 제국의 군주가 표방하는 정치적 이념의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카간은 황제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절대군주이며 그가 지배하고 통치하는 지역적 범위는 초원과 농경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2~14세기 몽골 제국의 시대에 사용된 카간과 6~9세기 돌궐, 위구르 제국 시대에 사용되었던 카간은 동일한 어원이고 의미상으로도 유사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처음의 카간은 칸과 같이 단순한 지배자의 호칭이었기에 복수의 카간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몽골 제국 이후 복수의 카간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카간이 지상의 최고군주라는 의미의 용례는 교황이 파견한 사신이 돌아갈 때 구유크 칸[32]이 보낸 서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위대한 백성들을 지배하는 사해(四海)의 군주”라고 부르면서 칭기즈 칸과 (오고타이) 카간과 자신은 영원한 하늘의 신이 내린 명령을 집행하는 대리인이기에 교황은 유럽의 여러 왕들을 데리고 직접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복속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칭기즈 칸이 건국한 예케 몽골 올로스가 초원지대를 의미하는 유목국가를 벗어나 정주민이 거주하는 농경지대까지 정복지배하는 세계제국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눈에 세상은 칭기즈 칸 일족의 지배를 받아들인 속민과 反민으로 구별되었고 反민에 대한 정복전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칭기즈 칸 사후 몽골족이 수행한 전쟁은 과거와 같은 약탈이 아닌 정복을 통해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던 의지의 표명이었다.

후에 대청(大淸)을 세운 만주족도 초기에는 지도자를 칸에 해당하는 한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홍타이지 때부터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고 몽골 제국의 옥새를 차지한 뒤에는 카간의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만주족의 한, 몽골족의 카간, 중국의 천자, 티베트의 전륜성왕, 무슬림토후의 이슬람의 지배자를 병행한 동아시아에서 유례없는 동군연합 제국이 등장하였다.

4.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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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천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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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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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사

6.1. 칭기즈 칸 이전

몽골이 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현 몽골 공화국 중부에(서 몽골초원)에 있던 카마그 몽골이다. 몽골의 전신은 현재 만주의 북부에 살고 있던 동호계 민족인 실위[33] 그중에서도 몽올실위 위구르 제국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현재의 몽골 중부 지역으로 이주하여 몽골 제국의 직접 전신인 카마그 몽골을 형성하였다. 이후 칭기즈 칸이 몽골 올로스를 건국하고 이것은 한자로 몽고(蒙古)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며, 원나라 시절 피지배에 존재하던 한족들은 몽골인들을 몽고라고 적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도 몽골을 몽고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기는 '어리석고 낡았다'로 해석될 수도 있는지라 몽골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단순한 음차에 불과하지만, 단순 음차로 치기에는 좋은 의미의 한자를 갖다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랑캐라고 깔보는 면도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런 지적이 있어 2007년부터 표기가 '몽고'에서 '몽골'로 수정되었다.

몽골인들은 초기 거란이나 여진족과 같은 메이저 유목 민족들에게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중소 유목 민족에 불과했다. 게다가 각 부족 간의 분열이 워낙에 잦았기 때문에 타 유목 민족에 비해 세력도 턱없이 적었다. 이들은 바이칼 호수 ~ 북 만주에 이르는 넓은 구역을 유랑했고 딱히 정해진 거처는 없었다. 칭기즈 칸 역시 출생지는 외몽골이었다만 그의 일족은 대흥안령부터 바이칼, 알타이까지를 고루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적대적인 부족에게 아버지가 독살당하는 가하면 아내를 납치당하는 등 엄청난 고난을 겪기도 했다.

6.2. 칭기즈 칸 시대


캡션

1189년, 보르지긴 씨족 출신의 테무진이 몽골계 주변 부족들을 통합한 후, 튀르크계 민족들을 제압하면서 1206년 드디어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의 자리에 올랐다.[34]

이러한 몽골의 성장을 본 남송 금나라를 요격하기 위해서 몽골에게 지원 요청을 했고, 이것은 몽골의 성장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약탈로 인해 우수한 군사 기술력과 재원을 확보하게 된 몽골은 곧 서진하기 시작해 호라즘 왕조, 서요를 비롯해 중앙 아시아의 부유한 오아시스 국가들을 연거푸 박살내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35] 카라 키타이와 호라즘 왕조를 격파한 후 칭기즈 칸이 이끄는 본군은 본국으로 돌아왔으나 제베 수부타이가 이끄는 부대는 서진을 멈추지 않아 조지아 왕국을 격파한 뒤 캅카스 산맥에 도달했다. 캅카스 산맥에서 토착 산악 민족과 쿠만족에게 포위당하는 위험을 겪기도 했지만 쿠만족에게 뇌물을 줘 포위 상태를 극복한 후 토착 산악민족과 쿠만족을 각개격파했다. 칭기즈 칸의 명령에 따라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귀환을 시작하나 그 과정에서 쿠만족의 구원 요청을 받고 진격한 러시아 공국 연합군과 격돌, 칼가강 전투에서 적 세력을 일소시킨 후 본국으로 귀환했다.[36] 한편 칭기즈 칸이 이끄는 본군은 칭기즈 칸이 주력을 끌고 나간 사이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서하 금나라에게 맹공을 퍼부었으나, 서하 정벌 도중 일어난 낙마 사건을 계기로 고령의 칭기즈 칸은 건강을 크게 해치고 결국 두 나라에 대한 정벌은 칭기즈 칸이 세상을 떠난 후 종료되었다.

수많은 중앙아시아의 도시들도 피해를 입고 고려 경주 황룡사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와 도시가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이 겨우 몽골의 침입 직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을 보면 얼마나 파괴가 극심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모습들 때문에 현재 여러 가지 대중 매체(특히 서구권)에서는 단순무식한 야만인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다.

6.3. 전성기


캡션

몽케 칸의 사후 그의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간의 대칸 자리를 두고 내전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제국은 일 칸국,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 그리고 원나라로 찢어진다. 원래 몽골족의 전통 상속 제도는 자식들에게 모든 걸 평등하게 분배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라도 평등하게 분봉받았는데, 자손들이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계속해서 갈라지게 된 것.

다만 이를 제국의 분열로 바라보는 것에 이견을 표하는 학자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중앙아시아 국가들 역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김호동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몽골 제국이 몇 개의 칸 국으로 분열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제국적 틀이 유지된 상태에서 대칸이 각 올로스의 칸들에게 정주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위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37] 이것이 대칸의 제국 장악력에 한계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단일제국이란 관념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원나라 정확히는 대원(大元)[38] 이라는 명칭은 대몽골 올로스를 나타내던 다양한 한자식 명칭을 폐기하고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즉 당시 몽골인들에게 대몽골 올로스는 대칸이 직접 지배하는 올로스를 중심으로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다른 칸들의 여러 올로스로 구성된 느슨한 통합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원은 카라코룸에서 칸발리크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중국화되기 시작했지만, 하필이면 원의 전성기에 정복에 목마른 쿠빌라이 칸이 등장하면서 주변국들은 졸지에 대재앙을 맞고야 말았다. 고려는 복속 이후 일본을 정벌할 배를 만들고 무리한 공물을 바치느라 크게 고생해야 했고, 송나라, 미얀마의 파간 왕조, 참파 등이 망했으며, 대월 일본, 자바 섬 등도 간접적으로나마 된서리를 맞았다.

한편 중앙아시아로 진출한 몽골인들은 당대의 선진 문명권이던 중동으로 진출해 셀주크 튀르크 아바스 왕조 이슬람 제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끝내 바그다드[39]를 무너뜨렸다. 또 다른 한편으론 유럽으로 진출한 몽골인들은 러시아의 크고 작은 공국들을 무너뜨리고 폴란드까지 레그니차 전투 등 3 ~ 4번의 침공 끝에 무너뜨리고, 헝가리에서는 치열한 공방을 주고 받았으며,[40] 불가리아, 라틴 제국과도 전쟁을 치렀다.

정복 이후 몽골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무역로를 단일 세력권으로 통합하면서 동서 무역로는 본격적으로 가동될 수 있었다.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몽골 제국이 동방 무역로를 완전히 통제하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다. 유럽과 아시아는 서로 붙어있었음에도 그동안 상호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지만 이후 역참제가 중앙 아시아까지 확장되고, 13세기 말에는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해상로와 연계되어 전례없는 원거리 무역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 이외에도 기욤 드 루브룩 등의 선교사나 이븐 바투타와 같은 여행가들, 아르메니아 국왕 헤툼 1세와 같은 사절단도 이 역참로를 이용하였다. 이슬람 역사가 아불 가지는 당시 상황을 가리켜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창 잘 나갔을 적엔 국제적인 위상과 위엄이 거의 전세계에 뻗칠 정도라 칸이 중대한 쿠릴타이를 소집할 때에는 몽골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부터, 중동의 무슬림, 그리고 유럽인 사절단이 찾아오기까지 하였다.

한편으로 동유럽 국가들을 제외한 유럽에서는 몽골을 매우 우호적으로 봤던 듯하며[41], 프레스터 존 따위 환상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에도 몽골 군주들이 선교만 받으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리라 믿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뤼브뤼키, 교황 카르피니 등의 사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42] 그래도 몬테 코르비노의 전도 활동은 제법 성공적이어서, 대도에 성당을 세우기도 했다.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사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이들 선교사의 여행기가 중요한 사료로 인용된다. 특히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사자 카르피니쿠릴타이 대칸 구유크의 즉위식까지 참가하여 몽골인들의 쿠릴타이를 직접 묘사한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몽골 제국은 개인 역량에만 의존하던 이전 유목민 제국과 달리 칭기즈 칸의 칙령에 기반하여 성문화한 야삭(Yassa, Yasaq)을 통해 어느 정도 일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 야삭은 몽골 제국이 정복한 영토 내에 수세기 동안 통용되었다. 특히 중앙 아시아에서의 몽골 영향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청했던 티무르 역시 이슬람 율법 샤리아와 함께 칭기즈 칸의 야삭을 통치 규범으로 삼고, 동차가타이로 칸국의 야삭에 정통한 학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18세기 마지막 칸국이 사라질 때까지 칭기즈칸 보르지긴의 혈족을 잇는 이라는 칭호가 계속 사용되었다.[43]

7. 전쟁과 복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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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확장[44]

7.1. 정복활동의 의의

칭기즈 칸은 1206년 몽골 초원을 통일한 뒤부터 대외원정을 시작했지만 그는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칭기즈 칸 시대 몽골군은 1214년 대금과 화친을 맺은 뒤 바로 철군하였고 1225년 호라즘 원정이 끝난 뒤에도 즉각 초원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군사적 위협을 통해 상대로부터 안정적으로 약탈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으로 그의 전략은 흉노 이래 유목국가의 군주들이 흔히들 사용한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칭기즈 칸이 중국 일부와 중앙아시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과정에서 그 지역에 제국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금의 경우에는 황실이 수도를 개봉으로 천도하면서 河 북부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었고 호라즘은 왕의 도주와 피사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

반면에 칭기즈 칸 사후 후손들이 추진한 대외원정은 정치적 응징이나 군사적 위협이 아닌 상대국가의 영토에 대한 영구적 내지는 정치적 복속을 목적으로 하는 쪽으로 방향이 크게 변하였다. 칭기즈 칸의 3남 오고타이가 카간의 칭호를 받은 1231년 무렵 고려로 보낸 국서에 이런 방침변화가 드러난다. 몽골 제국이 “‘영원한 하늘의 가호’를 받아 정복전쟁을 수행하기 때문에 이에 저항하는 사람이나 국가는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언사와 함께 고려 국왕이 직접 자신에게 찾아와 항복하라는 의사를 표시하라는 요구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후일 카간으로 즉위한 귀위크 칸이나 몽케 칸이 교황과 프랑스 국왕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완전히 똑같은 요구가 확인된다. 칭기즈 칸 사후의 몽골 제국은 문자 그대로 세계 정복을 목적으로 한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리하여 몽골 제국의 소위 ‘ 세계 정복’ 전쟁은 2대 오고타이 칸이 즉위한 1229년부터 5대 쿠빌라이 칸이 남송을 멸망시킨 1279년까지 반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특이한 점은 여러 세력 및 지역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공략을 감행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오고타이 칸은 금과 전쟁하면서도 주치의 아들 바투와 자신의 아들 귀위크 칸이 지휘하는 원정군을 서방으로 보내 불가리아 칸 국(러시아 타타르족의 전신)과 킵차크를 복속시키고 러시아와 동유럽을 공격하였다. 그는 동시에 서남아시아와 고려에도 전쟁을 하였다. 희대의 명장 수부타이가 이끄는 러시아 동유럽 공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군대 특징의 상성 상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귀위크 칸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즉위하였고 유럽원정을 완수하고자 하였으나 도중에 병사하였다. 이에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 툴루이의 장남 몽케 칸이 바투의 지원을 받아 몽골 제국의 4대 칸이 되었는데 그는 서남아시아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와 아사신(암살자)으로 악명이 높았던 시아파 세력을 제거하고자 동생 훌라구로 하여금 정복전쟁을 수행하게 하였고, 쿠빌라이에게는 회수 이남에서 몽골과 맞서던 남송 정복을 하게 하였다.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면서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지만 1260년 맘루크에게 패퇴하여 지중해 진출은 막혔다.

7.2. 정복지 통치 방식

칭기즈 칸 사후, 몽골족의 전쟁은 단순한 응징이나 약탈이 아닌 정복을 통한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으로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정권에 대해서는 일단 명맥을 보존시키되 일련의 의무조항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대체적으로 육사라고 불리나 꼭 6가지의 특정한 항목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① 국왕 친조 ② 질자 파견 ③ 호적 제출 ④ 역참 설치 ⑤ 병력 파견 ⑥ 물자 공출 ⑦ 다루가치[45] 주재 등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이었고 그 전쟁은 정복을 통한 몽골 제국 영역의 확대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던 몽골 제국의 정복전이 아프리카 –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펼쳐진 것이었다. 이후 근대 식민제국의 출현 이전까지 몽골 제국의 강역을 넘어서는 나라는 나타나지 않는다.

7.3. 점령 실패 사례

  • 델리 술탄국: 인도의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도 분열제국인 차가타이 칸국의 공격을 받았으나 치열하게 싸운 끝에 견뎌냈다. 이 중 차가타이 칸국에 맞서 가장 격렬하게 싸운 국가는 할지 왕조이며 특히 2대 명군 알라웃딘 칼리지는 다섯 차례 침입을 막고 역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공격하는 등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 그러나 이후 몽골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가 델리를 침략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되며 그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가 델리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무굴 제국이 들어선다. 다만 바부르 대에는 몽골의 정체성은 거의 없어진 상태. 오히려 바부르는 티무르의 정체성이 더 많았다고 봐야한다.
  • 맘루크 왕조: 바이바르스의 활약으로 중동으로 발을 뻗치던 몽골군을 격퇴했다. 바이바르스는 1277년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일 칸국의 몽골군을 패퇴시키고,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 사령관인 키트부가를 사살하는 성과를 거둔다.[46] 이에 키트부카의 상관인 훌라구가 화가 나서 자신이 직접 이집트를 쓸어버릴 계획을 가지고 전쟁 준비를 하다가 병에 걸려 죽는다. 이후 몽골군은 중동지역에 대한 약탈과 점령을 반복했지만, 끝내 맘루크 왕조를 복속시키지는 못했다 #1, #2, #3, #4.
  • 베트남 쩐 왕조: 1차 베트남 침공 시에는 정송가도를 내세워 3만의 군사로 침공, 수도인 탕롱까지 점령했지만 전염병으로 물러났다. 이후 쿠빌라이 칸 시기인 2차 침공에는 참파, 운남, 광둥 세 방향으로 공격했지만, 쩐흥다오의 저항과 전염병 및 게릴라전으로 5만 명이 포로로 잡히며 패배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3차 침공까지 가하지만 바익당 강에서 또 패배했다.[47]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인도차이나 지역으로의 진출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고, 때문에 4차 침공을 계획했지만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면서 추진력이 약화됐다. 이후 베트남에게서 명목상의 사대를 받고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침공은 백지화되었다.
  • 보헤미아 왕국: 올로모츠 전투에서 몽골군을 패퇴시키며 국체를 보존할 수 있었다.
  • 오스트리아 공국: 몽골은 헝가리를 침략하고 이후 북쪽에 위치한 코르노이부르크에 소규모 군대를 보내면서 오스트리아도 침략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활약으로 전멸했다.
  • 인도네시아 싱하사리 왕국: 몽골군은 자바 섬도 침략했었는데, 당시 자바에는 싱하사리(Singhasari) 왕국이 있었다. 침공 이유는 당시 싱하사리 왕국의 왕 '크르타나가라(Kertanagara)'가 1289년에 원나라에서 보낸 사절의 조공 요구를 거부하고 사신의 코를 잘라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1292년에 자바로 원정을 왔더니 크르타나가라는 크디리(Kediri) 지역 유력자의 반란으로 이미 살해당한 뒤였고, 원 제국 군대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몽골군이 목적을 상실하여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할 때 크르타나가라의 사위이자 후계자였던 라덴 위자야(Raden Wijaya)가 몽골군에게 접근해서 원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자신의 장인이자 전임자를 살해한 크디리 지역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위자야는 현재의 수마트라 지역으로 원정나가 있던 군대가 다시 돌아오자 바로 원나라 군대를 공격해 패퇴시켰다. 반란군과 몽골군을 모두 무찌른 위자야는 훗날 인도네시아를 최초로 통합한 왕조로 여겨지는 마자파힛 제국의 시조가 됐다.
  • 일본 가마쿠라 막부: 원나라는 두 번에 걸쳐 쓰시마를 통해 규슈 하카타에 대군을 상륙시키며 일본을 침공했다. 이에 가마쿠라 막부가 각지의 영주의 군대를 규합하여 편성한 일본군과 상륙한 원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며 대치하던 와중에 하카타 인근 지역에서 정박 및 항해 중인 원나라 함대에 태풍이 불어닥쳤다. 이 태풍으로 인해 원나라 군은 많은 수의 선박을 망실하였고, 태풍이 물러간 직후 보급 능력과 전투 지속 능력을 상실했다 판단한 수군은 지상군에 통보도 하지 않고 남은 선박을 끌고 다급히 철수하였다. 지상군은 운 좋게 철수하는 선박에 탈 수 있었던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퇴각하지 못하고 일본에 남겨졌고, 모두 전투 끝에 일본군에 의해 토벌되거나 항복하여 간신히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군비를 무리하게 증강하고 휘하 영주들에게 군사적, 경제적 의무를 이행할 것을 압박하며 많은 부담을 준 막부는 영주들의 신임을 잃고 약해져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반가마쿠라 막부를 기치로 영주들이 모여 결국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일본 진출도 포기하지 않고 3차 원정을 준비했으나, 쿠빌라이 칸이 숨지면서 원정 추진력이 크게 약화됐다. 결국 원이 일본에게서 명목상의 사대를 받고 정식 국교를 맺고 교역하기로 하면서 제3차 침공 계획은 백지화됐다.
  • 폴란드 일대 공국: 1241년, 1259년 두 차례 침공에서 몽골군에게 대패한 적이 있었다. 특히 1241년의 레그니차 전투는 일반인들에게도 유럽 vs 몽골 이미지를 크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1287년에 있었던 3차 침공 시에는 석조 성채 등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폴란드를 상대로 고전했고, 이후 몽골군은 폴란드 침공을 포기하게 된다.
  • 헝가리 왕국: 1241년 몽골의 1차 침공 당시 헝가리군은 모히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40여 년 후, 1285년 노가이의 11만 대군이 2차 침공을 거행하였으나, 헝가리 왕 벨러 4세는 이를 대비해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서유럽식 성채를 도입과 동시에 중장기병의 비중을 대폭 높였다. 덕분에 몽골군들은 패퇴했고 그 잔존병마저 현지 인들에게 절멸했다.
  • 크로아티아 왕국: 동군연합이였던 헝가리 왕국이 1241년에 몽골의 침공으로 짓밟히고 자그레브 지역까지 침공해오자 반격했지만 자그레브 지역이 무장이 빈약했던지라 결국 대패하고 자그레브 지역은 약탈 후 파괴되었다. 하지만 1년도 안돼서 크로아티아로 도망간 밸러 4세를 잡기위해 몽골군이 다시 침입해 클리스 요새를 공략 시도했으나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라도 무장한 크로아티아 군에 의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벨러 4세가 다른곳에 있단 것을 안 몽골군은 트로기르 방면과 스플리트 방면으로 찢어져 공략했으나 결국 크로아티아 군에 의해 격퇴당했다.[48]

7.4. 복속 및 내정간섭 사례

7.5. 여몽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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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쇠퇴


사실상 몽골 제국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원나라는 강남에서 명나라를 건국하고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올라오던 주원장의 세력에 밀려 1368년 대도를 버리고 내몽골의 후룬부이르 초원으로 물러났다.[50] 그나마 북원으로 잔존하였으나, 1388년 쿠빌라이 칸 가문의 마지막 황제 토구스 테무르가 암살당하고 대칸을 이은 조리그투 칸은 몽골의 대칸 자리만 잇고 원나라 황제라는 중국식 칭호는 포기함으로써 이때부터 중국 왕조로서의 원은 사실상 끝났고, 대칸의 지위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어도 실질적 권력은 크게 줄어들고 붕 뜨게 되었다. 이후에도 부족 단위로 쪼개진 몽골족은 명나라 영락제에게 토벌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외몽골을 제패한 오이라트의 지도자인 에센 타이시 등이 허구한 날 북원과 그 후예 차하르부를 침략하곤 했으나 이후 다얀 칸, 알탄 칸 등의 시대에 다시 부흥하면서 토목의 변과 같이 명나라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1634년 만주족 청태종이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스스로 몽골의 대칸을 겸하게 되었고 역대 청나라 황제가 대대로 몽골의 대칸 자리를 겸하는 식으로 칭호는 유지하게 된다.[51]

이후 내몽골 차하르부 청나라의 속국으로 남게 되었으며, 이후 청과 남하하는 러시아의 중간에서 두 세력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분쟁은 강희제, 옹정제 시기 네르친스크 조약( 만주 내몽골 동부)과 캬흐타 조약( 외몽골) 등으로 국경선이 정해지면서 일단락되었으나, 세계 열강의 각축이 본격화한 이후 신해혁명으로 청이 붕괴하자 몽골에서는 유력자들이 회의를 열어 복드 칸을 휴브트 요스 칸(청나라 선통제)을 잇는 대칸으로 추대하고 독립했다.

러시아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을 겪던 혼란을 틈타 외몽골에 침투한 러시아의 미치광이 남작 운게른 슈테른베르크에 의해 1921년 몽골이 강제 점령되었고, 마지막 칸인 복드 칸은 1924년 죽었다. 이로서 이름뿐이라도 칭기즈 칸부터 계속 이어져온 몽골의 대칸위의 계보는 끊기게 된다. 한편 내몽골은 운게른의 사이비 교주급 통치가 비켜가고 중화민국의 일부 영토로 남아 차하르, 열하, 흥안성의 3성이 주어졌으나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본 육군 만주국을 세우면서 동몽골(내몽골 동부) 흥안성은 만주국이 되어 버리고 남몽골(내몽골 중부 및 서부)은 몽강자치연합정부라는 또 다른 일본 괴뢰국으로 전락한다. 이 몽강국은 "몽골판 만주국"으로 사실상 몽골을 일본이 식민지배했으며 국가 주석이었던 데므치그돈로브는 꼭두각시였다. 동몽골의 몽골인은 "만주인"으로 한족 조선인과 같이 분류되어 2등 국민으로 차별받았다.

한편 원나라 이외의 '칸국'은 4칸국 이후에도 많은 국가들이 그 이름을 따와 러시아와 중앙 아시아 지역에 난립하였으나 점차 소형화되어 다른 국가들에 병합되거나 흡수되었다. 칭기즈 칸 다음 대에 형성된 4칸국만 들자면 우구데이 칸국은 14세기 초 내부 분열 이후 원과 차가타이 칸국에게 그 세력을 흡수당했고,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은 14세기 중후반 소국으로 분열하였고 후에 티무르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에게 병합당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버텼던 킵차크 칸국 또한 작은 칸국으로 분열되고 적통이라고 할 수 있는 이흐 칸국은 1502년에 멸망했다.

고려 왕실과 청나라 황실에도 보르지긴 씨족의 피가 섞였다. 그렇다고 고려나 청나라가 방계 혈통의 몽골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52] 다만, 황금씨족의 후손이라는 그 자체가 비교적 흔한 타이틀이었던 것이지, 유목 지역에서 대칸을 칭하려면, 황금씨족의 부계 후손이라는 타이틀은 기본소양으로 필요했다. 실제로 황금씨족이 아닌 자가 대칸위를 창하는 자체가 참칭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그 자체로 주변국들의 토벌을 받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

몽골 제국 멸망의 중요한 정치적 요인으로는 흔히 원과 4칸국의 분할 상속으로 인한 집중적 권력의 약화가 꼽히지만, 그 정도 규모의 거대 제국이 일원적 통치하에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감안하면 분할 통치도 일리 있는 조치였다. 하지만 종주권의 계승을 놓고 4칸국이 서로 물어뜯은 것은 몽골 제국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단 쿠빌라이 즉위 시의 아리크부카(아릭 부케)와 같은 반란 세력이 나타났으며, 쿠빌라이 칸의 재위기에 쿠빌라이의 제위 계승에 반발한 우구데이 칸국 카이두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원과 4칸국이 본격적인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쿠빌라이의 대에서는 이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고, 다음 대에서야 카이두의 영역이었던 우구데이 칸국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는 원의 종주권을 확인하기보다는 원과 다른 칸국이 완전히 별도의 노선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친선사절이 오갈 경우 동양사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종번 관계보다는 훨씬 밀착된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일 칸국의 칸들이 원나라 대칸의 정식 책봉을 받기도 하고 킵차크 칸국의 왕족 일부가 원나라의 대권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후 원은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혜종 토곤 테무르[53]의 시대에 그 하락세가 정점에 달했다. 당시 원의 화폐 정책이 철저히 실패로 돌아가면서 교초의 유통량이 폭증해 경제 구조가 뒤흔들렸고,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초의 남발이 가속화되면서 민중에게서 직접적인 반발을 부르게 된다.

이미 몽골인들은 지배층의 특권과 중국식 문화에 상당히 젖어 있어 정복기의 활력을 잃은 뒤였다. 게다가 유목민 출신이던 몽골인들은 정착기에 익숙하지 않은 화폐 문화를 사용하게 되면서 빚더미에 올라서 심지어는 자기 자식들을 노예로 판 사람도 꽤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몽골 귀족들은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은 보물로 잘 살고 있어 빈부격차가 심했다.

결국 홍건적과 같은 반원 한족 세력이 크게 대두되는 중 주원장이 득세하였고, 원은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1368년 만리장성 북쪽인 내몽골의 후룬부이르(응창)로 도망가 북원이라는 이름으로 이 일대에 잔존했다. 그러나 1388년 이마저도 멸망당했으며, 이후 한동안은 아리크부카 계가 대칸을 이었으나 오이라트 계열의 에센 타이시가 즉위하면서 칭기즈 칸계 왕통은 15세기 후반 다얀 칸 시대까지 끊겼다.

한편 3개의 잔존 칸국도 혼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차가타이 칸국과 일 칸국은 14세기 초까지는 그럭저럭 국가를 유지했으나 이후 분열의 시대를 맞았고, 이 사이 티무르가 득세해 두 칸국을 병합하였다. 차가타이 칸국은 이후 모굴리스탄 칸국으로 부활했으나 이전과 같은 활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킵차크 칸국은 이에 비해 장기간 존속했으나, 14세기 중반 일련의 정권 다툼과 흑사병[54]의 발병으로 삐끗하기 시작하더니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러시아인에게 최초의 패배를 당했다. 2년 후 토크타미쉬 칸 러시아 세력을 다시 한번 억누르는 데 성공하였으나, 15세기 후반이 되면 결국 러시아의 독립을 인정할 정도로 세력이 약화되어 여러 칸국에 의해 영토가 분할되었다. 이 칸국들은 다시 러시아와 격전을 벌여, 16세기 후반이 되면 오스만 투르크의 부용국이 된 크림 칸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는 러시아에 흡수되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몽골에선 다얀 칸이 등장해[55] 토목의 변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했던 오이라트를 몰아내고 몽골 제국의 부흥을 선언한다. 이후 16세기 중엽 알탄 칸의 시대에 베이징 포위하는 등 한동안 몽골 제국은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오히려 대칸이 아니었던 알탄 칸의 명성과 세력 때문에 대칸의 권력이 쇠퇴해서 실질적으로 차하르부에만 미치게 돠고 몽골은 6부족으로 분열되고 만다. 결국 1634년에는 릭단 칸이 청에 의해 정복되어 쫓겨나면서, 칸의 직위를 청에게 빼앗기고 몽골은 한동안 청의 아래에 복속된다. 하지만 숭덕제가 원나라의 옥새를 획득하고 칸의 직위를 받은 이후에 칭제한 것을 생각하면 이전의 이민족 국가들에 비해 우월한 대우인 셈이었다. 숭덕제는 내몽골을 평정 후 만주-몽골 연합 제국으로서 청 제국을 선언했으며 이후 동몽골 황족은 청의 외척이 된다.

8.1. 쇠퇴 원인

열대 지방에까지 진출했던 몽골 제국이 분열 이후 열대와 온대 농경 지대를 상실하고 급속도로 유목민족 중심의 초원 지대로 밀어올려진 건 근본적으로 몽골 제국의 지배 체제 자체에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몽골 제국이 오랜 기간 지속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몽골의 자체적 문화적 역량의 부족과 경제적 역량의 부족이었다고 봐도 되는데, 유목민족 특유의 적은 인구가 저 두 요소를 야기함과 동시에 심화하여 몽골 제국의 존속 가능성에 심각한 악영향을 줬다.

칭기즈 칸 정복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의 몽골 인구가 80만 내외로 추정되는데, 이는 1억 3600만에 달하던 중국(+ 남송)은 물론, 350만~450만 정도로 추정되는 고려, 450만~800만 사이로 추정되는 키예프 루스에 비해서도 훨씬 적은 인구였다. 즉, 고려의 1/3도 안 되는 인구로 그 넓은 영토와 엄청난 피지배 인구를 거느린 대제국을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몽골의 침공으로 중국, 고려, 루스, 페르시아, 아랍 등의 인구가 크게 줄었고, 몽골인은 통일과 피지배 민족에 대한 착취로 어느 정도 늘기는 했으나, 여전히 인구에서 몽골인은 피지배 민족들에 비해 절대적 열세였다.

몽골 제국은 엄청난 판도를 자랑했지만 내전을 치르면서 각 지역별로 분열하게 되었고, 초원에서 가축을 치던 유목민이 인구의 대부분이었던 몽골인들에게는 중국인, 고려인, 아랍인, 투르크인, 쿠르드인, 페르시아인, 슬라브인 등 훨씬 높은 문화적 수준을 지닌 피지배 정주 민족들을 동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문화적 역량도 없었다. 인구가 많다면 혼혈 정책을 펼쳐 억지로 밀고 들어가 혈통 의식이라도 심을 수 있었겠지만, 인구에서도 피지배 민족들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혼혈 정책을 펼치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적은 인구와 낮은 문화적 소양 때문에 몽골인들이 기존 농경 정주 민족을 다스리던 유목민 왕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지배 민족들에게 동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고, 이나 여타 다른 몽골계 국가들에서 피지배 민족에 동화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동시에 피지배 민족들을 몽골에 동화시키려 했으나 결국 이들을 동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피지배 민족들의 반란으로 점점 쫓겨나며 쇠락하였다. 오히려 몽골로 돌아가지 못한/않은 몽골인들은 높은 문화적 역량과 많은 인구를 지니고 있던 중국, 한국, 튀르키예, 아랍, 이란,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에 동화되었다.

그나마 티무르 무굴의 경우를 봤을 때 몽골 제국의 지배층과 통혼하던 중앙아시아 및 그 주변 지역의 유목민족계 지배층들 중 일부에게는 18세기 무렵까지 몽골인의 후손이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나, 이들의 몽골 계승 주장은 사실상 통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 이들을 실질적으로 규정하는 문화적/혈연적 정체성은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나마도 18세기 이후 각지의 민족 의식 혹은 국가 의식이 강화되며 사라지거나 영국, 러시아 등의 지배를 받으며 완전히 사라졌다.[56]

때문에 몽골 제국은 그 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각지에 몽골인들을 보내 살게했지만 대부분 소규모 지배층 및 중간 계층에 불과했고, 이들은 자신들을 보호하던 제국의 지배력이 사라지고 자신들이 피지배 민족이 되자 너무나도 쉽게 지배자가 된 압도적 다수의 피지배민들에게 혈연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 둘 다에서 동화되어 버렸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몽골인의 후손으로서 자각과 정체성을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결국 몽골 제국의 본토이자 칭키즈칸 이전 시대 몽골의 영역인 외몽골 내몽골 출신의 몽골인들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더해서 몽골 제국은 자체적 인구와 경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피지배민들에게 다양한 세금을 엄청나게 높은 세율로 징수했는데, 복속 이전보다 훨씬 높은 세금을 부담해야 했던 피지배 민족들의 반발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몽골 제국이 피지배 민족들의 반발을 감수하고라도 엄청난 세금을 물렸던 이유가 있는데, 농업이 가장 큰 부가가치를 생산하던 당시의 기준에서 보면 몽골인들의 본거지인 몽골 지역의 토지 중 대부분은 농경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몽골의 자체적 경제 역량으로는 대제국을 경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거기다 이런 자연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몽골은 자체적으로 국가 경제를 경영하며 국력을 유지할 수준의 인구를 확보할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몽골은 빠른 기동력 기마궁병의 전술적 우위를 이용하여 정주 농경민들의 국가들을 정복한 후,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 역량을 피지배 민족들에게 의지하는 사실상 약탈 경제 혹은 기생 경제 체제를 구성했다. 더 나아가 정복지의 치안 유지 능력은 물론 군사력조차도[57] 사실상 이렇게 정복하여 지배한 정주 농경민 피지배 민족들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때문에 몽골 제국은 대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자금을 이들 피지배 민족들에게서 세금 및 조공으로 받아내거나 약탈해온 물자들과 농경 민족들 간 교역을 독점하며 챙긴 마진 이익으로 충당했다.

이렇기 때문에 정주 민족들이 몽골식 기마궁병에 익숙해지면서 대응 전략을 세우게 되면서 칭기즈 칸 이래의 몽골의 전술이 파훼되고, 더이상 몽골식 기마궁병이 전술적 우위를 지니지 못하게 되어 정주 민족들을 빠른 시간 안에 제압할 수 없게 되자 몽골 제국과 반기를 든 피지배 민족 간의 전쟁 지구전 소모전이 되었다. 자체적인 인구와 경제력이 부족한 데다 각지의 반란 및 외침과 내분이 겹친 탓에 피지배 민족에 대한 동원 능력마저 떨어져 이런 식의 전쟁에 대한 지속 능력이 부족했던 몽골인들은 자신들에게 반기를 든 피지배 민족을 차례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58] 이렇게 피지배 민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하나 둘 상실하기 시작하자 몽골 제국의 경제 붕괴에 더욱더 속도가 붙어 빠르게 제국이 무너지게 됐다.[59]

몽골 제국의 분열의 이유 중 가장 크게 꼽는 것이 바로 몽골의 상속 풍습이다. 몽골은 장자 상속제가 아닌 분할 상속제를 시행했는데[60] 장자 상속제였다면 분배를 크게 받지 못한 자도 물론 불만이야 있겠지만 "그래 뭐... 그게 원칙이니까" 하고 넘길 수 있었겠으나, 몽골은 모두 정확히 분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네가 더 많이 가졌잖아!!"하며 내부 갈등이 심하였다.[61] 이러한 문제점들이 많이 발견되어 15세기에 상속법을 고치기는 하였으나 풍습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몽골 제국의 부흥에 큰 지장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몽골 제국이 위대한 지도자 아래에서는 급성장할 수 있지만 그 지도자 사후 급속도로 분열과 내부 갈등으로 약화되어 버린 큰 이유이다.

8.2. 칭기즈 칸계 계승 제국

  • 우구데이 칸국 - 외몽골 서부와 동튀르키스탄 동부 등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얼마 안 가 같은 알타이계 유목민이며 오랫동안 섞여 살아 온 튀르크계 문화에 물들어졌다. 카이두가 킵차크 칸국과 손잡고 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켜 원의 쿠빌라이와 한바탕 정통성 분쟁을 벌였으나, 카이두 사후 거꾸로 차가타이 칸국에 먹혀서 멸망했다. 우구데이 칸국을 인정하지 않는 학설에서는 이것을 쿠빌라이에 대한 반란 세력으로 본다.
  • 일 칸국 - 지금의 서남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지역이 지역인 만큼 이란계 문화가 자리잡았고 거진 페르시아계 나라였다고 봐도 된다. 아부 사이드 사후 사실상 소멸했다.

한국어 위키 백과의 ' 몽골 제국의 파편화'라는 틀에 아주 보기 쉽게 정리가 되어있다.

8.3. 기타 관련 민족 및 제국

칭기즈 칸 이전에 등장했던 '몽골계'로 꼽히는 민족들이나, 칭기즈 칸의 제국 혹은 아예 칭기즈 칸 혈족 외 몽골계나 몽골족이 건국한 제국들을 수록. 다만 그들의 후예가 건국했어도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큰변화를 맞은 제국들이 다수다. 애초에 몽골 제국 이후의 유목민족들 중에서는 몽골 제국과의 큰 연계성이 없어도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하거나 '옛 몽골 제국의 영광을 되찾는다'면서 그 명목으로 여기저기 공격하고 다닌 경우가 많았다.
  • 동호- 오환, 선비, 거란, , , 오라혼, 실위 - 대략 대흥안령 산맥까지를 경계로 이른바 '동호계'로 형성되어 있던 여러 민족들이며 그중에서도 실위중 몽올실위가 몽골의 전신이 되는 빈족이다.만주 북부에 살고 있던 몽올실위는 위구르 제국이 키르키스인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서역으로 도주한 후 현재의 몽골지역으로 이주하여 몽골 제국의 직접 전신인 카마그 몽골을 형성하였다.
  • 티무르 제국 -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말까지 중앙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한 몽골 제국의 계승 국가이다. 지배층은 서부 차가다이 올로스 출신의 바를라스, 잘라이르, 술두스, 아를라트, 카라우나스 등과 같은 몽골계 부족민들이었으며, 당대에는 스스로를 차가다이 올로스라고 불렀다.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도 차가다이 올로스의 지배층과 기마 군단을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에 집단명도 변하지 않고 '차가다이인'이라 불렸다. 그럼에도 별개의 국가로 인식되는 이유는, 권력의 중심이 보르지긴씨족 내에서 칭기즈 칸의 직계인 키야트에서 방계인 바를라스 부족으로 정권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 무굴 제국 -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가 이끄는 티무르 제국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 정식 국명은 부마를 뜻하는 몽골어 '구르칸'에서 비롯된 '구르카니', 또는 '힌두스탄'이었다. 당시 인도인들도 무굴 제국의 지배층을 무굴인(몽골인)으로 인식하였다.
  • 대청 - 1635년 후금의 칸 홍타이지는 몽골 원정을 실시하여 북원의 잔존세력을 섬멸하고, 북원의 마지막 칸인 링단 칸의 아들 에제이로부터 선양을 받아 북원 전국옥새를 얻었다. 이어 몽골 부족장들의 추대로 만주족임에도 몽골의 대칸에 오른다. 그리고 항복한 에제이 칸을 몽골의 친왕으로 봉하여 몽골을 청나라의 속방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청나라 황제인 홍타이지는 칭기즈 칸으로부터 이어지는 몽골 제국 카간의 계승자임을 칭했다. 이어 청나라 역사 내내 칭기즈칸의 일족인 보르지긴씨는 몽골의 친왕을 하면서 청나라의 황실인 아이신기오로씨와 겹사돈을 맺었는데, 몽골친왕인 보르지긴씨의 공주들은 청나라 황실의 비빈으로 오고, 아이신기오로씨의 공주들은 몽골 친왕의 비빈이 되었다.
  • 준가르 제국 - 외몽골(서몽골) 지역에서 후퇴한 오이라트계가 결집해 세워진 제국이었으나 4개 부족의 연합 제국으로 통일 제국은 형성하지 못했다.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이고 티베트 달라이 라마에 영향력을 미치려 하였으나, 역시나 티베트 불교를 유목 민족을 장악하는 이념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청 제국과 군사적으로 충돌한다. 결국 건륭제 시대에 완전히 분쇄되어 멸절되었다. 건륭제는 일종의 제노사이드를 실행했다.

9. 각국에서의 이미지

몽골 제국의 위세가 워낙 컸기에 아직도 유럽 이슬람교 문화권에서는 칭기즈 칸을 학살자나 위대한 정복자로 보는 등 시선이 갈린다. 몽골에서는 당연히 자랑스러운 자국의 전성기이자 세계 제국의 건국자로 다룬다.

대한민국에서 받는 평가는 의외로 아주 박하지는 않다. 고려 시대 때는 몽골 제국에게 꽤나 가혹하게 수탈을 당한 국가들 중 하나였음에도 인식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꼽히는데, 우선 700년 전으로 굉장히 오래전 일이기 때문에 체감상 와닿기가 어려울 뿐더러 현대 한국인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다시피 하며, 무엇보다 몽골이 워낙 급성장했다가 급축소된 국가이다보니 한반도의 역사 중에서 몽골과의 교류 자체가 이 시기 말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62] 게다가 역사적으로 보면 또 고려 출신의 기황후가 몽골 제국을 쥐락펴락 했다는 사실 때문에 세계적인 대제국을 우리 민족이 장악 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도 좋다.[63] 아무튼 몽골에 대한 한국의 인식은 워낙 오랜 옛날이라는 점+오랫동안 마찰을 빚고 싸운 중국, 일본과 달리 딱 한번이라 묻힌다는 점+현재 몽골의 국력이 한국에게 상대가 안되는지라 경쟁의식이나 위협론이 없다는 점+동양에 의해 세계 제국이 건립되었다는 오리엔탈리즘 대리만족[64][65]+그리고 소년 만화를 연상시키는 칭기즈 칸의 영웅담적인 서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과거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 치고 나쁘지는 않다.

다만 최근 들어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유린하고 전 유라시아를 파괴하며 문명을 후퇴시킨 몽골 제국의 파괴자로서의 성격이 부각되며 차츰 몽골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늘고 있다. 고려 역시 몽골에 의해 어마어마한 인명피해를 겪고 황룡사를 비롯해 수많은 고대의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한국인들 역시 과거와 같이 동아시아 국가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우호적인 시선에서 바라보지는 않는다. 이러한 추세의 원인으로는 한국 역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우호적인 시선에서 바라보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작용과 과거보다 몽골의 잔혹한 파괴와 학살 행각이 점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이 있다.[66] 정확히는 현대 몽골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나 반감이 생성된 것까지는 아니지만 한국인들이 몽골 제국의 역사를 왜 띄워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증폭된 것이다.[67]

중국은 정부의 입장 및 공정 외에 별개로 일반적인 한족들과 몽골인들의 감정은 그리 영 좋지 않다. 특히 남부 지역 한족들의 몽골에 대한 감정과 외몽골의 몽골인들의 한족에 대한 감정은 불구대천의 원수이다.[68] 바이두나 해외 아시아인 포럼에서 몽골인 중국인의 댓글을 봐도 무지 살벌하다. 한족주의자들에게는 전 중국을 정복하고 한족에게 가혹한 통치를 펼친 대원제국은 야만적이라는 평가가 일반적.[69] 그런데 어쨌든 넓고 강했으니까 원나라를 최고로 치는 한족들도 꽤 존재한다.[70] 그러나 중국이 점차 국수주의와 패권주의에 빠지며 몽골 제국의 발판을 만든 칭기즈 칸을 포함해 차이나 머니와 중화사상적 논리[71]를 앞세워 원나라를 넘어서 몽골 제국이 중화제국이고 중국 위인이라고 막북공정을 시전하는 중이다.

일본 규슈 일대를 중심으로 약간의 피해를 입었지만 현대인들은 몽골 제국에 우호적인 편이다.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대륙으로 건너가 칭기즈 칸이 되었다는 사이비 역사학이 대두한 것도 그렇고, 대원제국 있던 일에 대해서는 침략으로 기억하지만 카미카제 일본인들에게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후에 엄청난 혼란을 거쳐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된다. 어찌되었든 후쿠오카를 제외하면 전 국토가 몽골의 말발굽을 피했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에 비해서도 몽골에 대한 감정이 괜찮다.

티베트의 경우에도 징하게 항전하고 버텨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지금은 호의적이다. 아무래도 청나라나 현대 중국에 정복당한 것에 비해서는 훨씬 옛날 이야기에, 티베트인의 정체성인 티베트 불교 몽골에서는 어느 정도 지분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티베트는 촘촘하게 행정력을 구사하며 수탈받은 곳이 아니라 거의 지방독립정권 수준으로 매우 관대하게 자치를 허용받던 곳이었다. 물론 관대함과 별개로 애초에 몽골 제국의 행정력 자체가 영 부실했던 탓도 있다.

몽골 제국 중에 원나라의 경우에는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였다. 티베트 불교(후기 탄트라 좌도 밀교)는 한국, 중국, 일본에는 전파되지 않았고 원나라에 전파되었는데 원나라의 경우 중국에 세워진 몽골인 국가였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가 없던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였을 때는 원나라 때이다. 원나라가 사라지고 중국에서도 티베트 불교가 사라진다. 중국에서 다시 티베트 불교 세가 강해진 건 청나라 이후의 일이다.

베트남은 코 앞에 붙어 있었는데도 3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뒤 이를 이끌었던 쩐흥다오가 민족 영웅으로 자리한 덕분인지 이런 취급을 받지 않는다.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는 밀림과 바다, 그리고 베트남이라는 방벽이 있어 접점이 크게 없었기에 관심이 크지 않다.

중동 지역에서는 직접 갈려나갔기 때문에 현재에도 평가가 나쁜 걸 넘어서서 증오의 대상이다.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의 역사서에는 칭기즈 칸이 아예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몽골군이 싸그리 밟아버려서 페르시아의 여러 옛 도시들이 지금도 유적지에 불과한 유령 도시로 남아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 덕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았거나 전쟁을 치렀던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72] 이집트[73]에서는 칭기즈 칸, 오고타이 칸 등 몽골 제국의 역대 군주들에 대한 평가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힉소스[74]과 함께 최악의 침략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특히 몽골 제국의 서아시아 침공 선봉장이었던 튀르크인에 대해선 그야말로 극악의 증오심을 갖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튀르크계 종족인 하자라족의 경우가 바로 이 튀르크 군인들의 후손들인데, 아프간을 박살낸 몽골 제국의 후예라는 것과 소수인 시아파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어렵게 산다. 이는 다른 튀르크계인 우즈벡이나 키르기즈, 투르크멘 등도 마찬가지라 이 셋이 연합해 북부 동맹을 구성해 탈레반과 싸우기도 했다. 이란 역시 몽골 - 튀르크와 관련된 것들은 본능적으로 증오해 이웃 나라인 튀르키예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국가들을 되게 고깝게 본다.[75] 서아시아의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훗날 허를러깅 처이발상에 의해 칭기즈 칸의 후손들이 몰살당한 것에 대해 몽골 제국의 서아시아 침략의 업보로 여긴다. 다만 몽골 제국의 직접적인 침입을 받지 않았거나 진출하지 못했던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아랍에미리트, 알제리,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의 아랍권 나라들에서는 이라크나 이란 등에 비해 몽골에 대한 증오감은 약한 편이다.

인도의 경우는 수십 년에 걸쳐서 여러 번 침략이 있었지만, 시대별로 인도에 있던 왕조들이 모조리 몽골 제국과 차가타이 칸국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몽골 제국에 대한 이미지는 그냥 아시아의 자존심 정도에 그친다. 그리고 무굴 제국은 투르크화된 몽골의 바를라스 부족이 주측이 된 국가로, 몽골 제국의 후손을 자처하고는 있었으나 문화적으로는 페르시아화된 투르코-몽골계 국가였다. 그리고 그 침략당한 인도의 초대 총리 네루도 칭기즈 칸에 호의를 표한 걸 보면 19세기 ~ 20세기 동안 유럽의 지배를 받은 아시아의 자존심을 세워주기에 우호적으로 여겨진 듯 하다.

이렇듯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몽골 제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서구에서는 야만성을 강조하는 느낌이 큰 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주로 직접 갈려나갔던 폴란드, 헝가리, 체코, 우크라이나, 러시아[76]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이미지가 안 좋고, 접점이 별로 없이 강 건너 불구경이었던 서유럽 쪽에서는 그냥 이전의 훈족과 더불어 야만적인 유목인의 이미지 정도만 갖고 있다. 서유럽 역사상 가장 크게 당한 유목민 침략은 마자르족의 침략인데 문제는 이 마자르족이 또 외모,종교,문화 모든 면에서 완전히 유럽국가로 동화 되었기 때문에 결국 서유럽은 쳐들어오지도 않은 몽골과 기독교 세계의 방패를 자처할 정도로 동화된 마자르족 대신 고대 로마제국의 몰락을 촉진한 훈족을 가장 임팩트 있었던 유목민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경우는 직접 갈려나가고 정복당한 데다 지역 특색 상 털어먹을 게 없어서 제대로 통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몽골에 대한 여론이 더 안 좋다. 러시아 속담 중에 초토화당했다는 뜻을 가진 속담이 있는데, 그 속담이 "몽골 제국군의 말발굽이 지나간 곳은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시뻘건 땅이었다."이다. 그런데 사실 몽골 제국에게서 벗어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점이다. 몽골 제국이 러시아 지역의 정치를 모스크바 공국에 전임하였고, 후에 이반 대제가 몽골 제국을 몰아낸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탈세가 있었다. 여하튼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완전히 초토화된 데다가, 그 이후로도 타타르계 국가들에게 허구한 날 시달려서 이 피해를 복구하는데 거진 몇 백년이 걸렸다. 그리고 몽골의 침입과 이후 틈을 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확장으로 인해 동질감이 강하던 루스족들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으로 분화되어 현재까지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대립하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으니, 루스의 대표자를 자처하는 러시아 입장에선 루스의 분열을 부른 철천지원수인 셈. 이 때의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았는지, 훗날 소련은 몽골에게 내정 간섭을 심하게 하면서 칭기즈 칸의 흔적을 지우려고 별짓을 다하기도 했다.

폴란드의 경우는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당시 수도인 크라쿠프가 불타고 제2도시인 바르샤바 초토화되었다. 때문에 몽골 제국군에 대해 안 좋게 여기지만, 또 칭기즈 칸에 대해서는 " 폴란드의 역사에 매우 큰 도움을 줬다"며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폴란드의 도시들이 불에 타긴 했지만, 결국 폴란드는 몽골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몽골군을 폴란드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몽골 제국이 폴란드 침공에 지쳐 마지막으로 폴란드를 침공하고 난 1360년대부터, 몽골은 급격히 동유럽의 패권을 상실했다. 그 사이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몽골 제국의 위축으로 생긴 동유럽 힘의 공백을 비집고 10년도 안 돼 세력을 팽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385년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동군연합을 세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만들어 400년간 동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결론적으로 몽골이 동유럽인들을 마구 죽여준 덕분에 폴란드는 별로 힘 안 들이고 동유럽 땅을 점령한 셈이 되었다.[77]

캅카스 지역의 일부 국가들은 정복당했지만 일부는 침공에 저항하여 땅을 지켜냈다. 이 지역은 여러 산맥이 얽혀 있어 지세나 그에 따른 세력관계가 매우 복잡하지만 전략적 요충지[78]라 몽골 제국이나 몽골 계열 국가들이 자주 공격하는 지역이었다. 칭기즈 칸 때 제베와 수부타이가 조지아 아르메니아를 크게 이겼고 이후 일 칸국 때 본격적으로 침공해 속국이 된다. 체첸 같은 북부 지방은 2차례 침공을 이겨냈으나 긴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튀르키예는 몽골 제국의 장군들의 대부분이 튀르크계로서 유럽이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원정에 참가하였고 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 차가타이 칸국, 우구데이 칸국 등이 전부 몽골- 튀르크 제국이었다는 이유로 몽골 제국에 호의적이다. 칭기즈 칸 역시 아랍이나 이란과 달리 같은 알타이인으로서 영웅으로 보고 관련 학회도 많이 있다. 사실 튀르크인 자체가 원래 몽골계 종족이었고[79] 몽골 통일 이전에는 외몽골에 키르기즈나 나이만, 메르키트, 케레이트 등 여러 튀르크 부족이 섞여 살았다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둘은 형제나 다름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몽골로 인해 셀주크가 망했음에도 불구하고[80] 별 신경쓰지 않고 좋게 보며 이는 티무르 제국[81]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냥 같은 튀르크계 부족끼리의 알력 다툼 정도로 보는 듯. 물론 남쪽의 아랍인들에게는 몽골이나 튀르크나 둘 다 죽일 놈 취급을 할 뿐이며 특히 몽골 제국의 앞잡이였고 이후 오스만 제국 당시 아랍인을 차별한 투르크인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다른다.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 황제가 썼던 칭호 중에는 몽골족이나 튀르크족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 '칸'이 어원인 '한'도 있었으니 아랍인들의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은 몽골 제국 시즌2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덕분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겪었던 이라크 시리아 같은 중동 아랍권 나라에서는 튀르키예 이야기는 민감하다.

서구 학계에서는 원래 야만적인 파괴의 제국이라는 평가가 강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동서양 교류의 촉진을 통해 세계사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는 재평가도 힘을 얻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도 이전까지는 몽골과 유목민족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자체가 부정적이었지만, 현재는 정체된 한족의 중화 문명에 유목 민족이 끊임없이 일종의 문화적, 인적 수혈을 해주었다는 긍정적인 견해 또한 제시되고 있다. 그래도 몽골 제국이 죽인 인구[82]와 소실시킨 지적 유산[83]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몽골 제국이 가지고 온 파괴와 학살과 별개로 몽골 제국과 그 후계 중앙아시아 유목 제국들이 유라시아 동서 문명 간 교류 역사에 거대하고도 새로운 장을 쓴 것만큼은 확실하다. 몽골에서 비롯한 이라는 호칭은 훗날 만주족에서 페르시아, 심지어 제정 러시아 차르[84]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국가들에게 무적의 군사력을 가진, 절대적인 권위의 지배자로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했으며, 이뿐만 아니라 중세 후기의 티무르 제국과 후대의 오스만 제국마저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권위를 빌려 정복 제국으로서 그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을만큼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문명사에 남긴 영향은 몹시 크다. 마르코 폴로의 중국 답사는 실크로드가 몽골의 통치 아래 마지막으로 안정적인 번영을 누렸던 때였고, 13세기 당시 아프리카 사하라 횡단 무역도 몽골 제국과 교역 시 성행했다.

이러한 몽골 제국의 영향력으로 인해 대항해 시대와 같은 근대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칭기즈 칸의 영토 확장과 몽골 제국 성립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역사상 최대 크기의 황제국 출현이라는 점을 넘어 세계사의 분수령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10. 말말말

내 생각에는 우리 선우국[85]이 그간의 1,000년, 아니 3,000년 동안 이와 같은 땅을 가진 적이 없다고 생각되는구려. 원문[86]

칭기즈 칸, 1219년 5월 1일, 호라즘 원정 구처기를 초청하며 보낸 조서 中[87]
100만명도 안되는 소수의 인원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인가. 굉장히 강력한 결속력,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그런 측면이 아니었나 싶어요.
김호동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라시드 앗 딘 『집사』 한국 완역 기념 인터뷰

11. 기타

11.1. 이집트 몽골인 술탄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맘루크 왕조의 10대 술탄인 키트부카 몽골 포로 출신의 몽골인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아인 잘루트 전투의 총지휘관으로도 알려진 또다른 키트부카 동명이인이었다. 영문 표기는 각각 'Kitbugha'와 'Kitbuqa'로 얼핏 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몽골어로는 둘다 동명이인이다. 몽골인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통치하였다는 것이 얼핏 미나모토 요시츠네 칭기즈 칸설, 이성계 티무르 동일인물설과 같은 유사역사학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쪽은 엄연히 맘루크 왕조의 공식 역사서인 < al-Nujūm al-Zāhira fī Mulūk Miṣr wa-l-Qāhira>에 기록된 사실이다.

아인잘루트 전투로 유명한 키트부카 노얀은 1260년에 전투 중 사망한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놀랍게도 맘루크의 10대 술탄인 키트부카는 1260년 전투 중 포로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한쪽의 사망 년도와 한쪽이 역사에 등장한 년도가 정확히 겹치는데다가 이름까지 완벽하게 같으니 동일인물(?) 정말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역사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키트부카 술탄의 행보는 아래와 같다.

- 키트부카는 1260년에 아인잘루트 전투 이후에 벌어진 1차 홈스 전투에서 맘루크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그는 포로 출신이었지만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 1293년에 8살이었던 알 나시르 술탄의 측근이 살해당하면서 키트부카가 어린 술탄 대신에 실권을 잡았다. 이로 인해 당대 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또다른 측근 알 슈자와도 갈등을 빚었으나 승리하여 세력을 굳혔다.

- 세력을 강화한 키트부카는 당시 어렸던 술탄을 "국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술탄의 모친과 함께 타지로 추방하고 1294년에 공식적으로 술탄에 즉위하였다.

- 1296년에 훌레구칸의 사위인 토르가이가 자신의 휘하 몽골인들과 함께 가잔 칸에게서 도망쳐 맘루크 진영으로 넘어온 일이 있었는데, 키트부카는 그들을 몹시 반기며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그들은 몽골의 오이라트인들이었으며, 이슬람 신자가 아니었지만 이후에 현지인들과 통혼하면서 이집트 사회와 합병하였다고 한다.

- 그러나 키트부카는 맘루크로 넘어오는 몽골 이주자들을 지나치게 호대하고 몽골인 아미르들을 승진시키는 등 사실상 맘루크 왕조를 몽골화시키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 당시 몽골과의 전쟁 등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마당에 키트부카는 맘루크로 넘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몽골인들만 호대하는 등 아미르들의 반발심을 계속해서 부추긴 결과 결국 아미르들이 모여 키트부카와 전투를 하기에 이르렀다.

- 전투에서 패배한 키트부카는 다마스쿠스로 피신하여 세로 즉위한 술탄을 인정함으로서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살카드라는 도시를 2년간 통치하였다.

- 1299년에 맘루크내 몽골 오이라트 세력이 키트부카를 다시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실패하고 처벌을 받는 일이 있었다.

- 마찬가지로 1299년 3차 홈스 전투에서 몽골군이 승리를 거두고 가잔 칸이 돌아간 이후 키트부카는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 맘루크에 종사하다가 1303년에 사망했다.

이렇듯 키트부카는 몽골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아프리카 땅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보냈다. 맘루크 왕조가 가장 위헙적인 적국의 몽골인을 자국의 수장으로 세우고 몽골인 아미르들을 기용했다는 점은 맘루크 사회의 유연성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1.2. 대중문화에서 외면받는 역사

몽골 제국을 소재로 한 대중문화 작품들은 몽골 제국의 역사적 임팩트에 비해서 매우 적은데, 대부분은 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을 건국하는 과정까지만 다루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사실 몽골 제국을 소재로 한 영화 등의 콘텐츠가 나오기 어려운 가장 큰 원인은 지나치게 큰 제국의 판도와 정복 전쟁의 묘사에 있다.

몽골 제국의 군사 활동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하고자 할 경우, 몽골이 중동에 위치한 예루살렘 다마스쿠스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동유럽을 침공해 보야르들과 싸우고, 대륙 반대편에선 남송 고려를 털자마자 일본 사무라이와 칼을 맞대며, 베트남과 한판 붙으면서, 태연히 북아프리카의 정치 상황에 간섭하는 등, 하나도 버거운 대형 사건들을 줄줄이 연출해야 한다. 심지어 이 와중에 했던 집안 싸움까지 묘사하려면 답이 없다.[88] 때문에 촬영을 마음먹고 하려고 해도 세계 각국의 성벽과 건축물, 궁전, 도시, 의복, 거기에 더해 각국의 종교까지 등장하면서 끝도 안보이는 예산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원나라를 소재로 영화를 제작하려 해도 이미 그 스케일과 제작비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실제로 넷플릭스에서 시즌당 총 제작비를 무려 9000만 달러(한화 대략 1000억)를 투입하여 마르코 폴로(드라마)를 제작했음에도 결국 예산 문제로 시즌 3을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무려 왕좌의 게임(드라마)의 제작비에 필적할만 어마어마한 예산 투자였음에도 고증 측면에서 판타지에 가깝다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점점더 세계관이 넓어지는 만큼 넷플릭스 측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스케일이었을 것이다.

킵챠크 칸국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수도 사라이와 중세 모스크바의 묘사,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인종을 캐스팅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일 칸국은 이란 문명권을, 차가타이 칸국은 중앙아시아 문명권을 묘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마르코 폴로가 사실상 실패한 선례가 되었기에 몽골 제국사를 소재로 영화 등의 콘텐츠가 앞으로도 나오기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역사를 다루는 게임에서는 등장이 잦은 편인데 이마저도 몽골 제국을 중심으로 다룬다기보다는 강력한 적이나 재앙 정도로 다루는 편이다.

11.3. 영토 크기

1279년 전성기 시절의 영토를 하나하나 계산해 보았을 때 확실한 강역에 포함되는 영역은 다음과 같다.
여기까지의 면적을 합하면 약 21,413,431km²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러시아 시베리아 유럽 지역 면적을 얼마만큼 포함 시키느냐에 따라 영토 크기 수치가 달라진다.

먼저 우랄 산맥 서부의 러시아 영토 중 몽골 제국이 차지한 면적은 다음과 같다. 우랄 산맥 서부 합계 약 2,149,164km²

여기에 남부 시베리아 중 몽골 제국이 차지한 면적은 다음과 같다. 시베리아 남부 합계 약 3,039,640km²

따라서 다 총합하여 계산해보면 러시아 제국 또는 소련보다 조금 더 큰 2,660만km²이다. 물론 엄청난 영토인 건 분명하나 3,300만km²로 알려진 수치에 비하면 과장이다. 또한, 지금의 러시아의 면적은 약 1,710만km²로 몽골 제국보다 훨씬 작다. 소련의 면적은 2,240만km²였다. 러시아, 소련의 면적이 몽골 제국에 비해 그리 작지 않거나 더 크지 않는가 하는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만들어진 지도가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것의 영향이다. 이런 지도에서는 지구의 구형에서 북쪽과 남쪽이 모여지는 부분이 구현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지도에서 북쪽과 남쪽 땅들은 실제 면적에 비해 크게 그려져 있다고 보면 된다. 일례로 그린란드 미국보다 크게 나온다.

11.4. 대영제국과의 차이

2000년대까지만 해도 대영제국과 몽골 제국 중에서 어느 나라가 더 큰 영토를 가졌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단순 영토 크기만 놓고 보자면, 대영제국은 약 3,550만km²(1920년 기준), 몽골 제국은 약 2,660만km²으로 대영제국이 훨씬 더 큰 국가였다. 흔히 몽골 제국 최대 영토가 3,300만km² 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3,300만km²가 나오려면 시베리아 면적을 전부 포함한 수치인데, 당시 몽골은 북부 시베리아를 점령한 적이 없다.

그러나 사실, 대영제국과 몽골 제국을 단순히 영토 크기로만 비교하기는 어렵다. 영토 크기가 아닌 정복 국가 지역을 놓고 비교한다면,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을 전부 정복하고 동유럽까지 진출한 몽골 제국과는 달리, 대영제국은 영토 자체의 잠재력이나 자원 이외에 실질적으로 복속한 나라는 사실상 인도뿐이지만 당시 산업혁명 이후 영국은 비서구권 타 지역 문명권[93] 대비 압도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으며, 전세계 바다 역시 독차지 하였고 지구 반대편까지 이동하여 아편전쟁을 통해 동양의 강자 청나라도 박살냈으며 당시 경계하던 열강은 프랑스나 러시아 제국 정도였다.[94]

근대 시기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제국 열강들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의 질서와 패권에 순응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도모하였으므로 19세기 당시 세계관과 정치외교적 입지, 영국의 국력과 기술, 역량의 우위는 13세기 몽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다만 대영제국의 점령지들은 당시 세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유럽과 아시아가 아닌 대부분 미개척지거나 국력이 미미하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해있었긴 했다. 특히 캐나다(998만km²)의 북극 지방, 호주(769만km²)의 사막, 영국령 아프리카의 내륙지역 사람이 제대로 살기 힘든 곳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시대에는 아직 신대륙이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었기에 13세기 세계관 내 몽골도 19세기 세계관 내 영국이랑 비교에서 마냥 밀리진 않는다.

이외에 관점에 따라서 가장 큰 국가 순위가 바뀌기도 하는데 한 예로 단일국가, 황제국의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반대로 몽골 제국이 앞선다. 그 이유는 대영제국이 단일한 국가가 아니라 영국+영국의 식민지들의 집합체였기에 영국 본토를 중심으로 한 식민제국의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11.5. 여담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 나무위키의 여러 문서에서 몽골 제국의 상징으로 쓰이는 깃발. 다만 실제로 몽골 제국에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2008년에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한 깃발 모음 사이트를 근거로 올렸는데, 신빙성이 확인되지 않아 위키미디어 공용 측에서도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언어별 몽골 제국 문서에서도 쓰이지 않는다. 위키미디어 공용 근거로 든 사이트에 여러 가지 깃발이 나와 있다. 2006년 몽골에서 열린 몽골 제국 설립 700주년 행사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나온다. #

11.6. 관련 저서

몽골족만이 아닌 거란, 여진족과 같은 유목 민족이 세운 왕조를 정복 왕조라 하는데, 한국 출판계에는 이 정복 왕조들에 관해 시중에 출판된 책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괜찮은 책들 중에는 유목 민족사의 권위자인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의 저서가 많다. 그는 Michal Biran 교수와 함께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Cambridge History of Mongol Empire)>(근간)의 편집자이다. 최근에는 고려대에서 카안 올로스(원제국)의 중후기 권신 정치 연구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권용철 박사가 열정적으로 몽골 제국사에 대한 외국의 훌륭한 서적들을 번역하고 있다. 그가 번역한 몽골 제국 관련 서적은 모건, 핼퍼린, 티모시 메이까지 2020년 6월 현재 3권에 달하며 모두 학계의 권위자이며 뛰어난 평가를 받은 저작들이다.
  • 김호동, 『몽골 제국과 고려』, 서울대학교출판부, 2015.
    몽골 제곡의 4대 대칸인 뭉케 칸이 사망하고 그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대칸의 지위를 두고 싸운 사건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러한 몽골 제국의 상황이 고려의 정치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 김호동, 『몽골 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2010.
    '실크로드와 유목제국', 몽골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찾아온 평화의 시기였던 '팍스 몽골리카' 등 몽골 제국이 세계사에 끼친 다양한 영향들에 관한 논문들을 인문 교양서 수준에 맞게 재편집한 책이다. 역사 전공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읽기에도 무난하다.
  • 라시드 앗 딘, 김호동 역, 『 집사(集史) 시리즈 1~4』, 사계절, 2018.
    일 칸국에서 관리로 일했던 색목인 라시드 앗 딘이 쓴 몽골의 역사서이자 또한, 당시 최초의 세계사 역사서였다. 김호동 교수는 1편은 몽골 제국 성립 이전 몽골족들의 역사를 기록한 "부족지", 2편은 "칭기스 칸 기", 3편은 우구데이 칸부터 쿠빌라이 칸의 손자였던 원나라의 성종 테무르 칸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칸의 후예들", 4편은 2018년에 출판된 일 칸국의 칸들의 역사를 기록한 "일 칸들의 역사"로 나누어 번역하였다. 내용도 방대하고 명칭들도 생소한 것이 많기 때문에, 역사 비전공자들이 교양으로 읽기에는 어렵다. 총 5권으로 완결될 예정이다. 참고로 이 부분은 집사 중 제1부 몽골사 부분만 번역한 것이며(총 5권 예정), 제2부인 세계사는 2017년 현재까지 이란 학자 무함마드 로샨의 교감본(2013 11권 13책으로 완간)만이 전체를 다룬 유일한 현대의 판본이다.
  • 유원수 역, 『 몽골비사(元朝秘史)』, 사계절, 2004.
    『집사』와 더불어 몽골 제국의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칭기스 칸을 가까이에서 모신 신하로 추정된다. 읽어보면 역사서의 서술 방식보다는 서사시같다. 몽골족의 조상 이야기부터 시작하며 칭기스 칸의 원정에 대다수의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 잭 웨더포드, 정영목 역,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사계절, 2005.
    칭기스 칸의 원정이 당시 유럽 국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 지를 서술한 책이다. 칭기스 칸이 활용했던 다양한 군사전략들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어떻게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그것들을 다스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관찰한 책이다.
  • 윤은숙, 『몽골 제국의 만주 지배사』, 소나무, 2010.
    저자가 썼던 논문을 책의 형식으로 출판한 것이다. 칭기스 칸은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의 친족들에게 분봉을 실시했는데, 아들들에게 분봉한 곳이 흔히 말하는 4칸국(킵챠크, 우구데이, 차가타이, 일 칸국)이며 이들은 서방 왕가로 불렸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에게는 중국의 동쪽 지방을 분봉하였는데 이들은 동방 3왕가로 불렸다. 이 책은 만주 지방을 다스렸던 칭기스 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옷치긴 왕가와 조선의 건국 세력인 이성계 가문과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각주 설명이 자세하여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도 읽어볼 만한 수준이다.
  • 데이비드 O. 모건, 권용철 역, 『몽골족의 역사』, 모노그래프, 2012.
    1986년에 초판이 출간된 후 영미권에서 몽골 제국 뿐 아니라 제국 성립 전후의 몽골족의 역사까지 다룬 통사로 쇄를 거듭하여 출판된 명저로, 2012년에서야 번역 출간되었다. 초판 출간이 30년이 넘은 만큼 다소 구 학설을 담고 있지만 2007년까지의 최신 연구성과물을 새 챕터로 추가한 2007년 개정판을 번역하였으며 몽골족에 대한 통사적 지식을 얻기에 적합한 저서이다.
  •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2016
    스키타이부터 근대 중앙아시아 공산주의 혁명기까지 지도를 중심으로 서술한 통사이며, 한국인에 의해 한국어로 출간된 최초의 중앙유라시아(내륙아시아) 통사이다. 몽골 제국만을 다루진 않으나, 몽골 제국이 유목국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고, 저자가 몽골 제국사의 권위자인 만큼 한 챕터를 몽골 제국사에 할애하고 있다. 지도와 함께 간단하게 몽골 제국사를 알아보기에 적절하다.
  • 오타기 마쓰오, 윤은숙. 임대희 역, 『대원제국』, 혜안, 2013
    몽골 제국의 전사부터 제국 성립 이후 남송 정벌, 그리고 그 이후 원 제국(카안 올로스)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현재 한국에 번역된 몽골 제국사 관련 일본 서적은 두 권인데, 이 책과 바로 아래 서적이다. 이 책은 원래 고단샤라는 출판사의 “중국의 역사” 시리즈로 기획되었고 그 시리즈 중 하나인 『몽골과 대명제국(モンゴルと大明帝國)』로 출간된 것인데, 이 중 원 제국 파트만을 번역한 것이다. 전체 몽골 제국 중 몽골 지배하 중국(원 제국, 카안 올로스)만을 다루지만, 전통적인 관점인 중국왕조로서의 시각 대신 다원주의적 국가로서의 제국이라는 성격으로 이 시기 몽골 제국을 바라보며 몽골 지배가 중국사에 끼친 영향을 탐구하고 있다.
  • 스기야마 마사아키, 임대희 외 역, 『몽골 세계제국』, 신서원, 1999
    일본의 대표적인 몽골 제국사 연구자인 스기야마 마사아키의 몽골 제국사 관련 개설서. 출간된지 꽤 시간이 지난 책이기는 하지만, 1987년 이후 몽골 제국사 연구의 새로운 동향인 전체적 관점(a holistic perspective)으로, 몽골 제국을 하나의 전체로 바라보는 입장에서 쓰인 제국사 전체에 대한 개설서이다. 특히 동아시아, 이란을 중심으로 한 서아시아,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을 분절적으로 이해해 왔던 그 이전(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일반적인 몽골 제국사 인식)까지의 역사 인식은 여러 언어로 된 사료의 종합적인 이해를 통해 극복되고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관점에서 쓰였다. 다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4칸국의 분할 독립으로 인한 제국의 해체 시기라고 표현되는 1260년을 기점으로 그 이후는 아무래도 동아시아 중심으로 몽골 제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나, 현재까지도 그 부분을 명확히 전체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통사는 아쉽게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최근 학계의 최신 연구 동향은 1260년 제국 해체라는 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 이후에도 몽골 제국의 대칸(카안, 즉 원 황제)의 권위가 유지되었으며 제국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통합성을 유지하였다는 시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입장을 견지한 학계의 연구 성과를 모아 낸 종합적인 연구서가 바로 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 및 미할 비란 헤브루대 교수를 편집자로 하여 출간 예정인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근간, 2021년 출간 예정)이다.
  • 라츠네프스키, 김호동 역, 『칭기스칸』, 지식산업사, 1992
    유목제국사의 권위자인 김호동 교수가 번역한, 칭기즈 칸에 대한 사실상 최초로 번역된 학술서이다. 원조비사, 원사, 집사 등을 참고하여 칭기즈 칸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저서라고 역자는 평가하고 있다. 12-13세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칭기즈 칸의 업적과 생애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983년에 러시아어로 초판이 출간되었으며, 91년 영역본, 92년 국역본이 출간되었다. 출간된 지 28년째인 2020년 현재에도 절판되지 않아 시중에서 구할 수 있으며 2017년에 초판 7쇄를 찍은 책으로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 모리스 로사비, 강창훈 역, 『수성의 전략가 쿠빌라이 칸』, 사회평론, 2015 (이전 판: 『쿠빌라이 칸 그의 삶과 시대』, 천지인, 2008)
    미국의 중앙아시아사 전문가인 모리스 로사비 교수의 저서 번역본. 원본 초판은 1994년이며, 2008년에 처음 번역 출간되었으나 출판사와 제목을 바꾸어 2015년 재출간되었다. 쿠빌라이 칸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최초의 번역 학술서이며, 교양서로 읽기에 손색이 없다. 정복자였던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뒤를 이어 100여 년간 이어간 대제국의 체계를 완성한 수성가로서의 쿠빌라이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 찰스 핼퍼린, 권용철 역, 『킵차크 칸국』, 글항아리, 2020
    주치 올로스(킵차크 칸국)를 다룬 첫 번역 학술서이다. 핼퍼린은 구미 학계에서 주치 올로스 내지는 킵차크 칸국이라 불리는 몽골 제국기 중앙아시아 연구에 대한 중요한 연구들을 냈는데, 이 책도 그중 하나이다. 그는 이 책에서 몽골 지배기가 러시아의 연대기 기록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분석하여 러시아 지식인들이 몽골 지배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회피함으로써 러시아인 자신들의 종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일련의 정체성 지키기를 핼퍼린은 ‘침묵의 이데올로기(ideology of silence)’라고 불렀다.
  • 티모시 메이, 권용철 역, 『칭기스의 교환: 몽골 제국과 세계화의 시작』, 사계절, 2020
    6월 23일 출간 예정인 가장 따끈한 신작이다. 티모시 메이 역시 미국에서 활동 중인 몽골 제국사의 중견 학자이며, 몽골 제국의 정복으로 진정한 세계화가 시작되었음을 전쟁, 전염병, 종교, 교역, 인구 변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하고 있다. 저자 메이는 이러한 변화를 ‘칭기스의 교환(Chinggisid Exchange)’이라는 용어로 정의내리고 있다.

그 밖에 한국사학계의 이명미(『13~14세기 고려•몽골 관계 연구』, 혜안, 2016), 이강한(『고려와 원제국의 교역의 역사』, 창비, 2013), 동양사학계의 이개석(『고려-대원 관계 연구』, 지식산업사, 2013), 고명수(『몽골-고려 관계 연구』, 혜안, 2019) 등은 고려-몽골 관계사에 대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연구서를 저술하였으며, 여원관계사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틀인 세조구제(世祖舊制)론(이 세조구제론을 집대성한 연구가 이익주의 연구(「고려•원 관계의 구조와 고려후기정치체제」,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이다.)에서 벗어나 몽골 제국 속의 고려라는 틀에서 여원관계사를 바라보고 있다. 관심이 있으면 참고하여도 좋다.

그외에도 각 대학에서 신진 연구자들이 몽골 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그 박사 논문들도 공개되고 있는데, 역시 관심있는 사람들은 참고하면 유용할 것이다. 권용철의 고려대 박사 논문은 『원대 중후기 정치사 연구』(온샘, 2019)로 출간되었으며 설배환 박사의 「몽•원제국 쿠릴타이(Quriltai) 연구」(서울대 박사논문, 2016), 김호동 교수의 뒤를 이어 서울대 동양사학과 몽골 제국사 전공 교수로 임용된 김석환 교수의 「13~14세기 몽골 제국 칙령제도 연구」 등이 있다.

김호동 교수가 최근 30년(1986~2017)의 몽골 제국사 연구사를 정리하는 논문을 학술지 『중앙아시아연구』에 실은 바 있는데, 이 논문에서는 몽골 제국사 핵심사료의 정리, 번역, 신 사료의 발굴부터 최근 30년간의 중요한 몽골 제국사 연구를 구미, 서아시아, 중화권, 몽골, 한국, 일본 등 전세계에 걸쳐 망라하고 있다(김호동, 「最近 30年(1986-2017) 몽골帝國史 硏究: 省察과 提言」, 『중앙아시아연구』22-2, 2017, pp. 1-71).

11.7. 같이보기


[1] 뜻은 대(예케) 몽골(몽골) 국(올로스). 올로스는 사전적으로 '국가'의 의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많은 사람이 모여서 국가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맥락이 통한다. 한국에는 ([ruby(ᠤᠯᠤᠰ, ruby=ulus)])의 로마자 표기법인 ulus에 이끌린 발음인 '울루스'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몽골어에서 '울루스'에 해당하는 발음이 되려면 ([ruby(ᠦᠯᠤᠰ, ruby=ülüs)])이고 실제 ᠤᠯᠤᠰ의 발음은 올로스가 정확하다. [2] 파일:xiongnu_sunandmoon.jpg
2008년 몽골 알타이 지역의 고대 흉노 유적 타킬티인코트고르(Takhiltiin Khotgor)에 있는 'Elite Tomb 64호'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의 문양으로, 태양과 달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아침에는 태양에, 밤에는 달에 절을 하던 흉노의 전통을 상징하며, 이후 몽골인을 포함한 북아시아 유목민들에게 계승되어 각 지역마다 태양과 달의 원형은 그대로 두고, 추가적으로 약간의 변형을 더해 사용하였다. 현대 몽골의 국장의 기원이기도 하다. #
[3] ⟪영원한 하늘의 힘 아래, 예케 몽골 올로스의 천지의 카간의 명령이 백성에 내려와 도달하니, 두려워하라, 찬양하라⟫ 귀위크 칸(재위 1246~1248년) 시대의 국새. 귀위크 칸이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4세(Innocentius PP. IV)에 보낸 칙서에 날인한 국새의 인영으로, 1923년 프랑스의 인류문화학자 폴 펠리오(P. Pelliot)가 저서 『몽골인과 교황(Les Mongols et la papauté)』에서 모사하여 실은 그림이다. [4] 몽골 제국의 국시. 몽골 제국의 통행증 '알탄 게레게(ᠠᠯᠲᠠᠨ ᠭᠡᠷᠡᠭᠡ, Golden Paiza)'에 뚜렷히 남아 있다. 이중 "영원한 하늘의 힘 아래"라는 문구는 당대 몽골 제국의 외교 문서 등의 공식 문서에서 빠지는 일이 없을 만큼 상징적인 문구인데, 이것이 전통으로 굳어져 현재까지도 몽골의 정부기관 등지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문장 구조가 일반적인 몽골 문자의 문법과 약간 다른 시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 특히 뒷 문장에서의 Suu Zali(ᠰᠤᠤ ᠵᠠᠯᠢ)의 경우 영어나 한국어에 매칭되는 단어가 없는 관용구로, 의미상으로는 ' 패기+불씨'의 구조로 '힘'이 가장 가까운 의미로 알려져 있다. [5] 1635년 몽골의 39대 대칸인 링단 칸이 사망한 이후, 후계자인 보르지긴 에제이가 후금에 사로잡히면서 보르지긴 왕가의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당시 모굴리스탄 칸국이나 무굴 제국과 같은 계승국은 건재하였으나, 이들 국가들은 혈통적 연속성만 있을뿐 분리된지 수세기가 지난 탓에 문화 인종적으로 현지화되어 몽골 본토와는 이질적이었다. 이중 무굴제국의 경우 황금씨족에 해당하는 보르지긴씨족이기는 하나 칭기즈칸의 직계인 키야트부가 아닌 방계인 바를라스부가 세운 국가였기에 더더욱 이질적이었다. 준가르의 경우에는 아예 보르지긴씨족이 아니었다. [6] 원나라 한정. 유럽인이 생각하는 동양식 이상향을 뜻하는 ' 제나두(Xanadu)'라는 어휘의 유래이다. 원대에는 두 개의 수도를 운영했으며 겨울 수도는 대도(大都), 여름 수도는 그보다 좀 더 위쪽에 위치했던 상도(上都)였다. 몽골어의 모음조화 원칙에 따라 몽골 문자로는 샤나도(ᠱᠠᠨᠠᠳᠣ)로 표기, 발음된다. [7] Taagepera, Rein (1997), "Expansion and Contraction Patterns of Large Polities: Context for Russia",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41 (3): 475–504., # [8] 발리쉬는 은본위제도였던 몽골제국의 은 화폐단위였으며, 칭기즈칸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몽골제국 분열 이후에는 중국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는데, 14세기 초에 거래를 발리쉬로 하였다고 한다. 당시 발리쉬는 60 1/3 디르함과 동등가치였다고 한다. [9] 쿠빌라이 칸 직계 단절 [10] 아리크부카 직계 [11] 최초의 황금씨족이 아닌 대칸. [12] '예케 몽골 올로스 (Yeke Mongol Ulus)' 라고 읽으며, '대몽골국' 이라는 뜻이다. [13] '이흐 멍걸 올스 (Ih Mongol Uls)' 라고 읽으며, '대몽골국' 이라는 뜻이다. [14] 단 오스트리아 정벌에는 실패했다. [15] 몽골 제국이 니브흐족의 요청에 따라 아이누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정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6] 참고로 북쪽으로는 어디까지 진출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17] 인도 북부에 위치한 델리 술탄국을 비롯한 인도 북부와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일대는 수차례의 침입을 받았다. [18] 동방견문록을 집필한 마르코 폴로 또한 그 영향으로 당시 이탈리아에서 중국에 이르는 먼 길을 탐험할 수 있었다. [19] 기존에 유라시아에는 수많은 민족들과 세력들이 있었고,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을 이동하는 여행자들은 언제 어디서 약탈당하고 죽을지 모르는 위협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전역을 싹 정리하면서 자잘한 산적들이나 반란군들이 조용해졌기에 돌아다니기 더 안전했다는 뜻이다. 물론 몽골이 일부러 실크로드의 치안을 위해 공권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며, 몽골은 너무 큰 영토 탓에 제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매우 힘들어 했다. 하지만 몽골이 유라시아를 정복하는 와중에 중앙아시아에서 활개치던 약탈자들을 다 제거했기에 덩달아 치안이 좋아진 것이다. 세계 최강대국의 신성한 영토에서 약탈하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 [20] 튀르크화된 몽골계 지배 계층을 칭하는 명칭. 몽골인들이 중앙아시아로 대규모 이주하면서 점차 문화적으로 가까운 튀르크계 원주민들에게 동화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민족적 집단이다. [21] 몽골 보르지긴 씨족의 방계인 바를라스부가 새운 국가. 몽골비사에도 등장하는 유서 깊은 부족이지만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이후 튀르크족과 혼혈화가 진행되어 서양 학계에서는 투르코-몽골화된 부족이라 불린다. [22] 티무르 제국의 계승국. 무굴은 인도+페르시아식 발음으로 몽골이라는 의미이다. 출처 [23] 출처 [24] 이는 부여의 사부(四部), 고구려의 오부(五部), 신라의 육부(六部)로도 드러난다. 어느 씨족의 지배 혈족은 그 씨족 내 다른 사람들과 혈연적으로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지배가문에 속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원시사회의 혈통을 구별하는 단위인 성(姓)조차 가지지 못했다. [25] 家門 [26] 부민(部民)으로 해석될 수 있다. [27] 카이두 칸이 일으킨 내전이 진압되어 남중국에서부터 지중해까지 전 몽골령이 다시 통일되고 실크로드가 정상화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편지에서 올제이투는 스스로와 필리프 4세를 이슬람식 군주 칭호인 술탄으로 부르고 있으나 막상 문서는 제국 공용어인 몽골어로 작성되어 있으며, 배경에는 한문으로 쓰여진 몽골 대칸 성종 옥새가 찍혀 있다. 원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28] 물론 국호에 대원(大元)을 사용하면서 중국식 황제 칭호와 칭제를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대칸 칭호와 병용해서 사용했으며 어차피 몽골계 국가는 현지화가 특징이라... [29] 다만 이는 쿠빌라이 칸 시절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진 동방 3왕가에 대한 견제의미가 컸다고 한다. [30] 한자로는 가한(可汗)으로 표기된다. [31] 카이사르가 본래 인명이었지만 사후 황제를 뜻하는 일반명사가 된 것과 같은 것이다. [32] 오고타이 칸국의 제 2대 칸이자 몽골 제국의 제 3대 카간 [33] 실위는 고구려로부터 철을 수입했다고 하며, 인근에 위치한 황두실위의 경우 고구려 휘하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부여의 후신인 두막루가 실위와 인근해 있었다. [34] 이미 그 전에 칭기즈라는의 칭호를 받아 칸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에 대항하는 다른 부족들과 전쟁을 벌이거나 끌여들여 가며 몽골통일을 완성해 갔다. 결국 1206년,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타양 칸과 구르 칸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이후 이 두 칸이 사망하면서 몽골 초원에 칭기즈칸 외에는 칸의 칭호를 가진 자가 없었고, 이는 몽골의 통일을 뜻했다. 그해 쿠릴타이는 몽골 유일의 대칸으로 인정해 몽골 제국이 탄생했다. [35] 이 과정에서 워낙 많은 정예병이 서방 원정에 동원된 탓에 금나라의 반격을 받아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대 금나라 방면 최고 사령관 무칼리는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36] 귀환 도중 제베는 병사했다. [37] 이는 로마 제국의 동서분할이 실제 분열이 아닌 행정상의 분리인 것과 비슷하다. [38] 大가 수식어가 아니라 정식 국호다. [39] 당시만 해도 세계적인 도시였다...라고 하는데 사실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이미 잦은 내전으로 황폐해졌기 때문에 몽골제국이 나타나기 전인 12세기 말의 아랍 여행가의 기록에도 더 이상 아름다움이나 매력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기록되었다. [40] 가장 유명한 것이 모히 전투다. 병력수 추정은 학자에 따라 유동적이며 몽골군이 많다는 의견과 헝가리군이 많다는 의견이 대립한다. 전투 초기에는 바투가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몽골군이 밀렸으나, 당대 최강의 군대답게 수부타이의 화려한 옆치기 기동으로 헝가리를 털어버린다. 바투의 원정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이후에도 몽골과 헝가리는 여러 차례 공방을 주고 받았다. 모히 전투 이후, 몽골은 서유럽식으로 군제를 개혁하고 방어 태세를 갖춘 헝가리를 상대로 별 재미를 못보다, 결국 헝가리 정복을 포기했다. 하지만 이때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데 헝가리는 매우 오랜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41] 이럴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는데, 이 당시가 십자군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 세운 기독교 왕국인 예루살렘 왕국 살라흐 앗 딘 아이유브 왕조에 멸망하고 이슬람 제국이 강성해지던 시기라서, '머나먼 동방에 기독교 사제인 왕이 세운 왕국이 있어 그들이 사악한 이슬람 이교도들을 무찌를 것이다'라는 소문이 시민들의 희망을 타고 빠르게 번져나가던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 지배층 중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계열 신자가 있던 서요가 있었으니 마냥 헛소문은 아니었다. [42] 당시 몽골인들 가운데에는 일찍이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유럽인들이 믿는 그리스도교와는 그 개념이나 교리가 상당이 달랐다. 이들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네스토리우스교를 신봉하였다. 게다가 몽골인들은 대체로 종교나 신앙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한 몽골인 사절은 유럽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 예수의 살과 피'라 부르는 성체성사 광경을 보고는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먹고 마시다니 역겨운 풍습이다.'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43] 물론 유럽에서도 18세기까지 진존한 몽골계 칸국이 있긴했다. 크림 칸국 문서 참조. [44] 당시에는 측량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몽골 제국의 최대 영역, 특히 유럽 북방 경계는 지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시베리아 중부 역시 어디까지 진출했는지도 논란이 있다. [45] 당시에는 지방 정권을 장악한 군대의 사령관을 뜻했다. [46] 물론 이듬해, 알 무스탄시르 2세가 이끄는 맘루크 군이 바그다드를 침공했으나 역으로 몽골군에게 궤멸당하긴 했다. [47] 베트남 북부의 산악지대가 몽골의 침공에 있어서 첫 번째 관문으로 작용했고, 간신히 북부 산악 지대를 뚫은 이후 나오는 저지대의 빽빽한 정글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하천들과 습지로 인해 몽골군 특유의 기동성을 살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리고 서늘하고 비가 적게 내리는 몽골 및 북중국 지역과 상반된 베트남의 찌는듯한 열대 기후와 잦은 강우가 몽골군을 괴롭혔으며, 정글에 사는 해충과 맹수들 또한 몽골군을 괴롭혔다. 그리고 이런 자연환경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전염병이 몽골군을 휩쓸면서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었다. 이런 베트남의 혹독한 자연 환경에 치를 떨며 약해져 있던 몽골군을 정글 속을 날렵하게 오가며 살해하는 베트남군은 몽골군에게 있어 공포 그 자체였다. 훗날 명나라, 프랑스, 미국, 중국 모두 베트남에서 비슷한 경험을 거친 이후 결국 철수했고, 이 때문에 베트남에 제국의 무덤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48] 영어판 위키피디아 몽골의 유럽 침공문서에서 The Mongols' pursuit of Béla IV continued from Zagreb through Pannonia to Dalmatia. While in pursuit, the Mongols under the leadership of Kadan (Qadan) attacked Klis Fortress in Croatia in March 1242. Due to the strong fortifications of Klis, the Mongols dismounted and climbed over the walls using nearby cliffs. The defenders were able to inflict a number of casualties on the Mongols, which enraged the latter and caused them to fight hand to hand in the streets and gather a sizable amount of loot from houses. As soon as they learned that King Bela was elsewhere, they abandoned the attack and split off to attack Split and Trogir. The Mongols pursued Béla IV from town to town in Dalmatia, while Croatian nobility and Dalmatian towns such as Trogir and Rab helped Béla IV to escape. After being defeated by the Croatian soldiers, the Mongols retreated and Béla IV was awarded Croatian towns and nobility. [49] 다만 1269년 이후에 몽골에 병합되었다. [50] 중국측 사관 기준으로 이 때를 원나라의 멸망으로 본다. [51] 예를 들면 건륭제텡게린 테트게센 칸이라는 몽골식 칸호를 고종 건륭제라는 중국식 황제호와 같이 사용했다. [52] 참고로 청나라의 보르지기트씨 황후들은 칭기즈 칸의 동생 카사르의 후손들이지만 원 간섭기 고려의 왕비들은 칭기즈칸 직계 혈통인 원나라 황실의 공주들이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몽골 황실의 피가 흘러들어간 왕실 중 가장 칭기즈 칸 직계와 가까운 혈통이 고려 왕실이었다. [53] 토곤 테무르의 아내 중 한 명이 바로 기황후이다. 이로 인해 고려에서는 기씨가 권문세족으로 득세했지만, 정작 토곤 테무르 대에 원은 멸망한다. [54] 서유럽뿐만 아니라 러시아 스텝 초원의 흑사병도 엄청났다. 몽골인, 러시아인 가리지 않고 발병하였으며 모스크바의 경우 대공이 흑사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55] '다얀'은 '대원'을 뜻이다. [56] 사실 이 부분에서 티무르, 무굴 등의 몽골 제국 계승 의식이 지배층에만 국한되며 피지배층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몽골 제국의 후계를 자처하며 인도를 통치하던 무굴 제국 대영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무굴 제국 정부와 종교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반란까지 일으키던 힌두계/ 시크계/ 자이나계 인도인들은 관용 정책을 펴던 악바르 대제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 걸 제외하면 무굴 제국에 대해 전반적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무굴 제국을 사실상 북방 이민족 왕조 지배 기간으로 취급하고 있다. 무굴 제국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무굴 제국에 대해 좋게 평가하는 파키스탄인들도 자신들과 몽골이 별 다른 관계가 있다고 보지는 않고 있다. [57] 몽골인 인구가 적어 몽골인으로는 충분한 병력을 동원하기가 어려웠고, 때문에 몽골 제국은 전성기 시절부터 중국인, 고려인, 아랍인 등 피지배 정주민들을 징병하거나 용병으로 고용하여 써야 했다. [58] 가령 몽골의 주요 정복지 중 가장 마지막에 복속된 남송 지역의 경우 저항이 워낙 심한데다 인구도 많아서 강압적인 통치를 시행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행정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 이렇게 되자 원나라 정부가 아니라 한족 지주들과 한족 출신 관리들의 힘으로 사회가 돌아가게 되었고 원나라가 내분으로 쇠약해지자 이 지역은 홍건적과 반란군이 들끓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버린다. [59] 대표적으로 정복 초기부터 저항이 심했던 남송 지역은 농민 반란군들을 이간질하여 서로 싸우게 하는 식으로 제국의 붕괴를 막는 소위 뗌빵을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이 선택은 원나라에게 있어서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는데 무장 상태가 농민이 아닌 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대포와 전함으로 무장한 자칭 농민 반란군 [60] 중세 당시에는 동아시아를 제외하면 장자 상속이 보편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분할 상속이 대세였다. 중세의 게르만 관습법에 의한 국가들의 빈번한 분열, 특히 프랑크 왕국의 서, 동, 중 프랑크의 분열이 대표제인 예라 하겠다. 크루세이더 킹즈에서 유목 민족으로 장자 상속제를 만들기를 체험해보자. 답답하다. [61] 아래 뿐만 아니라 지배층에서도 이랬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병사를 소집할 수 있는 지배층에서도 내부 갈등이 심했다. [62] 같은 맥락에서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몽골에 시달렸던 역사는 존재할지언정 몽골을 지금까지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다. 당장 그 유명한 노래 징기스칸 부터가 바로 그 서양나라 독일에서 만들어진 음악이다. [63] 단, 기황후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황후는 고려를 위한 행동 따위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강한 교수의 연구로는 기황후가 원나라를 장악한 이후 고려에서 원나라로 보내는 조공의 양이 더 늘었다고 까지 한다. 결정적으로 반원정책을 펼치며 자주성을 회복하려 노력하던 공민왕을 응징하기 위해 고려 침략군까지 보냈던 여자다. 물론 기황후 입장에서도 고려는 자신을 상납해버린, 혹은 팔아먹은 못난 조국이라 단순히 민족배반자라 하긴 뭐하다. 아무튼 기황후가 원나라 실권을 쥐었음을 자랑스러워 하는 건 다소 엇나간 혈통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황후는 고려의 반원 자주책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자신의 옛 조국을 침략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로 치자면 조선 여자가 일본에 끌려간 후 출세하여 일본의 황후가 된 다음 자기 조국이었던 조선을 더욱 가열차게 수탈하고 독립운동을 유혈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과 같다. 때문에 사극 기황후는 역사왜곡이란 비판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문제작이었다. [64]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대리만족으로 몽골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저항의 성과는 오로지 같은 아시아 국가인 베트남 뿐이며, 국가 감정이 있는 일본은 제외된다. [65] 다만 몽골의 발흥이 송, 금, 고려 등 발전된 문명을 파괴시켜 동양 문명을 후퇴시켰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특히 남송의 경우 현대 기준으로 보면 미국 + 유럽의 국력을 합쳤다고 봐도 될 정도로 중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융성한 문화를 가진 국가였기에 송의 멸망은 동아시아 문명 쇠퇴 그 자체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수학, 천문학 등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던 이슬람 문명의 몰락 또한 몽골이 원인인 측면이 있다. [66] 몽골의 침공과 학살 때문에 고려의 인구수가 절반으로 줄었으며, 마차의 수레바퀴보다 큰 남성을 모두 죽이는 형벌을 받은 타국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식으로 몽골에게 학살을 당한 곳은 인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수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인구=국력인 이상 각자 다른 방법으로 인접국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물론 각 전쟁의 원인은 여러가지겠지만, 국력이 모자라서, 만만해보여서 침공을 받았다는 대전제는 변하지 않는다. [67]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동양의 세계제국이었던 몽골에 대해 훨씬 우호적인 시선이 존재했는데 일부 한국인들은 이에 감정을 이입해서 몽골이 후에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일본과 서유럽을 정복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시선이 거의 사라졌다. [68] 전체적으로 중국 내에서 북방과 남방의 사이가 안 좋기도 하다. 이런 중국의 지역 감정은 둥베이(만주) VS. 광저우(광동)로 대표된다. 사실 신해혁명 발발 시에도 위안스카이의 적절한 조치로 어정쩡하게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광동을 중심으로 한 혁명 세력인 남군과 북양군으로 남북이 갈릴 뻔 했다. [69] 물론 이런 반감은 만주족에게도 마찬가지라서 대청제국 역시 야만족이라고 폄하하면서도 한족 명나라를 마지막 중국 왕조로 보는 입장도 많다. 이 입장에서 대청 제국은 그냥 만주의 식민 지배였을 뿐이다. [70] 사실 중국의 강력한 반몽감정은 중국공산당이 의도한 탓도 크다. 공산당 일당독재 통치를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자국의 중화민족주의, 우생학을 과하게 추켜세우는 과정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 위주의 사관을 과하게 밀어주다보니 자연스럽게 비 한족 국가들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내릴 수밖에 없다. 같은 중국 계열이지만 공산당의 터치를 받지 않는 대만에선 몽골에 대한 적개심이 별로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71] 이들의 논리가 몽골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니 중국인!이라는 동북공정식 논리이고 이 외에도 영상매체에서도 중국을 지배한 청나라 인물이 러시아 인물한테 우리들의 조상중에 징기즈칸이었다고 하면서 중국인이라는 듯이 포장하는 영상도 있다. [72] 아바스 왕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가 몽골군에 파괴되었다. [73] 맘루크 왕조 시대에 몽골과 전투를 벌였다. [74]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란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인데 반해, 칭기즈 칸은 얄짤없이 악마로 분류된다. 몽골 제국도 오래된 역사이지만 알렉산더에 비해서는 훨씬 현대에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 [75] 튀르크 계를 미워하는 것은 몽골의 영향도 있지만,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의 영향이 더 크다. 오스만 같은 경우 전략적 요충지였던 현재의 이라크 일대의 영유권 분쟁에 같은 이슬람이라도 시아파냐 수니파냐 하는 종교적 분쟁을 이유로 수백 년 동안 서로 치고박고 하던 사이다. [76] 몽골에게 점령당했던 기간을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른다. [77]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몽골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던 현재의 우크라이나 북부 지방과 벨라루스 전역을 지배하였고, 이는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이 러시아인과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78] 후에 다른 제국들도 이 지역을 서로 탐하려고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에는 러시아 제국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점령된 적이 없다. [79] 정확히 말하면, 튀르크인을 몽골라고 정의하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 튀르크계와 몽골계 모두 유라시아 북부 스텝지방의 유목민에 속한 계열의 민족집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 즉, 유라시아 북부의 유목민들 중에는 튀르크계와 몽골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튀르크계가 몽골계보다 좀 더 먼저 등장한 유목 민족 집단인 것. 튀르크계나 거란계등이 유목제국화하여 스텝 외부의 풍요로운 지역을 정복하면서 스텝 지역에 세력의 공백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이전까지 스텝 북족의 타이가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몽골계가 남하하여 유목민족화한 것이라고 보면 적절하다. 물론 유목 부족 전통을 공유하여 강한 문화적 동질감을 가지고 있던 투르크계와 몽골계는 정확히 구별할 수도 없고, 사실은 딱히 구별할 필요도 별로 없긴 하지만, 튀르크계를 '몽골계 종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라시아 북부 스텝의 유목민은 곧 몽골인'이라고 착각하는 전형적인 오류이다. [80] 셀주크 튀르크가 망한 이유는 내분 때문이다. 이 내분에 몽골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몽골족이 몽골고원을 통합하여 유목제국화 하기 한참(한 세기 반 이상)전인 서기 1100년 전후에 셀주크 제국은 이미 심각하게 파편화 된 상태였다. 예를 들어, 셀주크 제국의 핵심부였던 이란-페르시아 지역만 보더라도 몽고가 이 지역을 공격한 1200년대 초반에는 이미 호라즘 왕조가 (범 셀주크계 세력의 종가격이었던) 셀주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차지한 상태였다. 셀주크 제국의 심장부였던 이란 지역이 이 정도니 다른 지역은 더 말할 나위도 없어서, 중동-서아시아 지역의 경우 각 도시마다 그 영주가 술탄을 칭할 정도로 격심한 분열상태였기에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 즉, 몽골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시점에 셀주크 제국은 이미 극도로 파편화되어 사실상 붕괴수순을 밟고 있었고, 셀주크 제국이 몽골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것은 그냥 이미 제국이라고 부르긴 어려운 규모로 분열된 범 셀주크계 세력들을 일소한 것이 몽골이라는 의미 정도밖에 없다. 반면 아바스 왕조는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81] 티무르 제국을 세운 티무르는 스스로 자신이 모계를 통해 칭기즈 칸의 혈통을 이었다고 주장했다. [82] 각종 분야에서 영향을 끼치던 학자들도 행방불명이 되거나 사망 [83] 도시 도서관에 대한 파괴나 방화를 해서 여러분야의 서적도 많이 사라졌다. [84] 정복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을 상대로 백인이란 칭호를 내세웠다. [85] 칭기즈 칸 구처기에게 보낸 한문으로 작성된 조서에는 카간(可汗)이라는 표현이 아닌 선우(單于)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몽골 제국 흉노에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기에 칭기즈 칸이 그리 표현한 것이다. 당시 몽골 제국의 깃발에 담긴 태양과 달 문양, 황금씨족인 키야트 보르지긴의 송골매 문양 흉노에서 계승된 것이었으며, 보르지긴 왕가의 도장 문양도 흉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과 같았다. 즉, 칭기즈 칸은 흉노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초원의 정통성을 중히 여겼다는 것이다. [86] 天厭中原驕華太極之性,朕居北野嗜欲莫生之情,反樸還淳,去奢從儉 每一衣一食,與牛豎馬圉共弊同餐。視民如赤子,養士若兄弟,謀素和,恩素畜。練萬衆以身人之先,臨百陣無念我之後。七載之中成大業,六合之內爲一統。非朕之行有德,蓋金之政無恒,是以受天之佑,獲承至尊。南連蠻宋,北接回紇,東夏西夷,悉稱臣佐。念我[ruby(單, ruby=선)][ruby(于, ruby=우)][ruby(國, ruby=국)]千載百世以來未之有也。然而任大守重,治平猶懼有缺。且夫刳舟剡楫,將欲濟江河也;聘賢選佐,將以安天下也。朕踐祚以來,勤心庶政,而三九之位未見其人。訪聞丘師先生體真履規,博物洽聞, 探賾窮理,道沖德著,懷古子之肅風,抱真上人之雅操,久棲岩谷,藏聲隱形,闡祖師之遺化,坐致有道之士,雲集仙徑,莫可稱數。自幹戈而後,伏知先生猶隱山東舊境,朕心仰懷無已。先生豈不聞渭水同車、茅廬三顧之事,奈何山川防闊,有失躬迎之禮。朕但遲位側身,齋戒沐浴,選差近侍官劉仲祿,備輕騎素車,不遠千裏謹邀。先生仙步,不以沙漠悠遠爲念,或以憂民當世之務,或以恤朕保身之術。朕親侍仙座,欽惟先生將咳唾之餘,但授一言,斯可矣。今者,聊發朕之微意萬一,明於詔章。誠望先生旣著大道之端,要善無不應,亦豈違衆生小願哉!故玆詔示,惟宜之悉。 [87] 성길사황제 구신선수조(成吉思皇帝賜丘神仙手詔」. 이 조서의 글은 몽케 칸 때인 1251년에 세워진 「대몽고국누조숭도은명지비( 大蒙古國累朝崇道恩命之碑)」에도 새겨져 있으며, 해당 비석은 현재도 산시성 시안시의 중양궁(重陽宮)에 남아 있다. [88] 제국의 크기가 크기다 보니, 다른 제국에선 단순 권력 투쟁 취급 받을 일이 거의 세계대전급이다. [89] 하바롭스크 전체(788,600km²)에서 오호츠크 지구(158,517km²)와 아야노-마이스키 지구(167,200km²)를 제외한 수치. [90] 볼가연방관구 전체(1,038,000km²)에서 페름지방(160,236km²)을 제외한 수치 [91] 이르쿠츠크 주 전체(774,846km²)에서 카탕스키 지구(139,043km²)와 보다빈스키 지구(92,000km²), 맘스코추이스키 지구(43,396km²), 키렌스키 지구(43,904 km²)를 제외한 수치 [92] 크라노야스크 주 전체(2,366,797km²)에서 타이미르스키 돌간-네네츠키 지구(897,900km²) 와 에벤키스키 지구(763,200km²), 투르칸스키 지구(211,289km²), 예니세이스키 지구 (106,300km²), 세베로예니세이스키 지구 (47,242km²)를 제외한 수치 [93] 오스만, 무굴, 아프리카, 동양 등 [94] 19세기는 아직 미국도 미숙하던 시기이다. 독일도 통합되기 전이거나 이제 막 성장하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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